사림의 대두조선의 문물제도가 정비된 성종 때를 전후하여 새로운 정치세력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들을 사림이라고 불렀다. 사림들은 정치 무대에 등장하면서 훈구 세력과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새로운 정치 명분과 폭넓은 지지 세력, 사림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기반을 통해서 나름대로의 정치력을 발휘하였다. 영남, 기호 지방에 근거하여 성장한 이들 사림은 성리학의 철학과 문학, 사학을 연구하면서 독자적인 학문 영역을 개척하였다. 그리고 훈구 세력의 사장적 학풍과는 달리 경학을 중시하고 인간의 심성을 연구하는 성리학을 학문의 주류로 삼았다. 사림은 성리학 이외의 학문과 사상을 이단으로 배격하고, 중앙 집권 체제보다는 향촌자치를 내세웠다. 그리고 사림은 도덕과 의리를 바탕으로 하는 왕도 정치를 강조하였다. 이들은 3사에서 언론과 문필직을 담당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발휘하였다.사림의 정치적 성장사림은 성리학을 학문의 주류로 삼고 경제적으로는 지주로서 자립하여 지방에서는 사회적, 경제적 지위를 굳히고 있었다. 동시에 사림은 과거를 통해 중앙 정계에 진출하여 훈구 세력들의 비행을 비판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이상을 내세웠다. 조선 9대 임금인 성종도 이와 같은 사림들의 주장에 동조하여, 훈구 세력을 견제하면서 정치 운영에서 나타나는 모순과 부작용을 극복하려고 하였다. 사림은 국가 재정의 확보와 사림 자신들의 경제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훈구세력의 대토지 소유를 비판하였다. 이러한 노력이 국왕과 이해를 같이하면서 사림의 정치력은 강화되었다. 그러나 연산군의 실정을 계기로 훈구 세력과 사림 세력의 대립은 무오사화, 갑자사화로 나타났고, 두차례의 사화로 사림은 큰 피해를 입었다. 중종반정 후 사림은 다시 중용되어 조광조를 중심으로 그들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조광조 등 사림파는 왕도 정치의 실현을 목적으로 현량과를 실시하여 사림을 등용하였으며, 불교, 도교와 관련된 종교 행사를 폐지하고 유교식 의례를 장려하였다. 그리고 소학 교육을 통한 유교적 가치관의 생활화와 난과 어려움을 서로 돕자는 것이었다. 이러한 향약은 중종 때 조광조 등이 보급에 힘썼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각지에서 개별적으로 시행되다가, 사림 세력이 중앙정계에 자리를 잡은 16세기 후반부터 널리 보급되었다. 지방의 유력한 사림이 향약의 간부인 약정 등에 임명되었으며, 일반 농민들은 이에 자동적으로 포함되었다. 그 결과, 사림들은 농민에 대하여 중앙에서 임명된 지방관보다 더 강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그들의 사회적 기반을 굳혀 갔다.붕당의 출현여러 차례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서원 및 향약을 바탕으로 향촌에 뿌리를 깊이 내렸던 사림들은, 그 세력을 확장하여 16세기 후에 이르러서는 중앙의 정치 무대에서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그리고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는 더욱 증가하여 갔다. 이처럼, 정치에 참여하려는 양반의 수는 더욱 많아지는데 반하여, 관직과 경제적 특권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양반 상호간의 대립과 반목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사림 세력이 급격히 성장하여, 마침내 정계의 주도권을 장악한 이후부터 붕당정치가 시작되었다. 붕당은 처음에는 학문과 이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폐단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하였으며, 정치 세력간의 상호비판과 견제의 기능도 가졌다. 그러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국리민복보다는 자기 당파의 이익을 앞세우고 이념보다는 학벌, 문벌, 지연과 연결되어 국가, 사회발전에 지장을 주기도 하였다. 붕당은 왕권이 약화되고 정치기강이 문란해지면서 그 대립과 분열이 더욱 격화되었다.붕당정치의 전개붕당정치의 직접적인 발단은 1575년(선조 8)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전랑직은 그 직위는 낮으나(정5품) 인사권을 쥐는 직책으로, 판서나 국왕이 임명하는 것이 아니고,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서 선출하였으므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인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은 허엽이 영수로 있었고, 심의겸을 중심으로 택됨으로써 정권에는 변동이 없었다. 그러다가 1674년(현종 15) 효종의 비 인선왕후의 상을 당하자 다시 복상문제가 터져 남인은 기년설을 주장하고 서인은 대공설(9개월)을 주장하여,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채택되었다. 이 때, 남인은 송시열 등에 대한 극형을 주장하는 과격파와 이에 반대하는 온건파로 갈리어 이들을 청남·탁남이라 불렀다. 새로 정권을 잡은 남인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등용되었다. 그러나 서인 사이에도 분열이 생겨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노론과 윤증을 중심으로 한 소론으로 갈리었다. 그러던 중 1689년(숙종 15) 서인이 물러나고, 송시열이 사사되는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다시 등용되었다. 그러나 94년(숙종 20)에는 왕에 의하여 남인이 다시 쫓겨나고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져, 남인은 재기불능의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후로는 노론·소론이 대립의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그 후 숙종의 후사문제로 인한 신임사화가 일어나 노론의 김창집·이건명 등은 대역죄로 몰려 죽게 되고, 노론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당쟁을 몸소 체험한 후 왕위에 오른 영조는 당쟁의 완화와 각 파에 걸친 공평한 인재등용에 힘쓰는 이른바 ‘탕평책(蕩平策)’을 내세워 재위 52년간에 정쟁이 크게 완화되었다. 그러나 이 탕평책의 반작용으로 대간의 기능은 크게 위축되고, 언론은 모든 시비와 공격이 당쟁완화라는 명분으로 억제되어, 앞 시기의 긴장과 혈기가 풀리는 반면 공리주의·이기주의의 새로운 시대풍조를 조장하는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탕평책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권세는 주로 노론의 수중에 있었다. 영조 말년부터 싹트기 시작한 새로운 대립은 1762년(영조 38) 임오사건, 즉 사도세자사건을 둘러싸고, 세자를 동정하는 홍봉한 중심의 시파와 세자의 실덕을 지적하고 영조의 처사를 옳다고 보는 김구주 중심의 벽파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그 후 남인과 소론도 시·벽으로 분파되었다. 이 시안악의 변숭복, 박연령, 해주의 지함두, 운봉의 승려 의연 등 기인, 모사 세력까지 포함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의 동정이 주목을 받게 되고 마침내 역모를 꾸미고 있다는 황해도 관찰사의 고변이 임금에게 전해지자 조정은 커다란 파란을 일으켰다. 고변의 내용은 정여립의 대동계 인물들이 한강의 결빙기를 이용해 황해도와 전라도에서 동시에 봉기하여 입경하고 대장 신립과 병조판서를 살해하고 병권을 장악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정여립은 아들과 함께 죽도로 피신하였다가 관군의 포위망이 좁혀지자 자살하고 말았다. 이로써 그의 역모는 사실로 굳어지고, 서인의 정철이 위관이 되어 사건을 조사하면서 동인의 정예 인사들이 제거되었다. 이 때 숙청된 인사는 장살로 죽은 이발을 비롯하여 약 1천 명에 육박했다. 이를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로 한때 서인이 조정을 장악하긴 했지만 오래가지는 못했다.@제 1차 예송논쟁 (기해 예송)기해예송은 1659년 효종이 죽자 자의대비의 복상기간을 기년(朞年:만1년)으로 할 것인가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란으로 시작되었다. 일반적으로 사가(私家)는 주자가례에 따라 사례(四禮 : 관혼상제)를 행하고 있었고, 왕가(王家)는 성종 대에 제정된 국조오례의를 기준으로 했다. 그런데 국조오례의에는 효종처럼 차자로서 왕위에 올랐다가 죽었을 경우 어머니가 어떤 상복을 입어야 하는지에 관해 규정이 없었으므로 문제가 발생했다. 그리하여 복제를 둘러싸고 논란이 진행되면서 소북계의 윤휴는 장자가 죽으면 적처 소생 제2자를 장자로 세운다는 의례(儀禮)의 말을 인용하여 효종은 비록 둘째아들이나 적자로서 왕위를 계승했기 때문에 차장자설(次長子說)에 입각하여 3년상을 치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송시열은 의례의 사종지설(四種之說:왕위를 계승했어도 3년상을 치를 수 없는 이유)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 적자이지만 장자가 아닌 경우)에 입각하여 효종은 인조의 차자이므로 1년상이 옳다고 반박했다. 아울러 윤휴가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다하여 1차 예송은 일단락 되었다. 물론 그 뒤에도 예에 관한 논란이 약간 있었으나 1차 예송은 결국 서인이 승리한 셈이었다@제 2차 예송논쟁 (갑인 예송)1674년 효종비가 죽자 금지되었던 예송이 재연되었는데, 그것이 갑인예송이다. 가례에 의해서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면 기년, 차자부로 보면 대공(大功 : 9개월)이었고, 국조오례의에 의하면 장자부든 차자부든 모두 기년이었다. 서인은 기해예송 때처럼 효종비는 차자의 부인이므로 자의대비는 대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갑인예송에서는 현종비의 장인인 김우명과 김석주가 서인이면서도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계하여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고 기년설을 찬성했다. 현종도 기해년의 복제는 고례(古禮)를 쓴 것이 아니라 국제(國制)를 쓴 것인데 선왕의 은혜를 입고도 체이부정이란 말을 할 수 있느냐며 기년복을 찬성했다. 그리하여 이번에는 남인이 예송에서 승리하게 되어 대공설을 주장한 영의정 김수흥 등 서인들이 정계에서 축출되고, 남인들이 다시 조정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현종이 갑자기 죽고, 어린 숙종이 왕위에 올랐다. 숙종은 기해예송에서 송시열이 예를 잘못 인용하여 효종과 현종의 적통을 그르쳤다는 진주 유생 곽세건의 상소를 받아들여 현종의 묘지명에 그 사실을 기록했고, 송시열을 덕원부로 귀양 보냈다. 서인들은 송시열을 구원하려는 상소를 올리게 되고, 남인들은 송시열과 그를 옹호하는 서인세력들까지 처벌하려는 가운데 서인과 남인간의 대립이 다시 격화되었다. 그 과정에서 서인이 실각함으로써 남인들이 우세하게 되었지만, 복제문제로 인한 당쟁은 끊이지 않았다. 이에 숙종은 1679년 3월 앞으로 예론을 가지고 말을 하거나 상소를 올리는 자가 있으면 역률로써 다스리겠다고 하여 논쟁을 금지시킴으로써 2차 예송은 끝이 났다.@경신환국1674년(현종 15) 갑인 예송에서의 승리로 정권을 장악한 남인은 현종에 이어 왕위에 오른 숙종으로부터는 신임을 얻지 못했다. 이것은 남인끼리 청남·탁남으로 갈라져 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