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 례 >Ⅰ. 머리말1. 연구사 검토Ⅱ. 작가의 생애1. 성장기의 이문구2. 60년대의 이문구3. 70년대의 이문구4. 80년대의 이문구Ⅲ. 작품분석1. 전근대적 사회에서 근대적 사회로의 이행ⅰ)전근대적 인물ⅱ) 과도기를 살아가는 인물2. 근대 사회-근대사회를 드러내는 인물Ⅳ. 맺음말Ⅴ. 참고문헌Ⅵ. 연구논문1. 연구사 검토이문구는 농촌 사회의 현실을 가장 폭넓게 다루고 있는 대표적 작가로 꼽힌다. 그에 비해 그의 작품에 대한 연구는 그다지 왕성하지 못한 편이다. 이문구 소설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략 '사회 문화적 관점'과 '형식주의적 관점'의 두 가지 형태로 진행되어 왔다. 이와 같은 방법은 송희복이 「이문구 소설을 보는 두 관점」에서 여덟 명의 평자를 상기한 두 관점으로 분류하며 제시했던 방법론인 바, 선행 연구자들도 모두 이와 같은 방법론) 송희복, , 작가세계 1992년. 겨울호, 106-108쪽에 기초해 연구사를 정리했고, 이후 발표된 평론 역시 두 가지 관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양상을 보이고 있어 이문구 소설에 대한 선행 연구를 분류하는 데는 가장 적합한 방법이라고 생각된다. 이때의 사회 문화적 관점은 이문구의 소설이 산업화·근대화·도시화 등 당대의 시의성(時議性)에 대해 어떠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가를 측량하는 잣대로서의 논의이며, 형식주의적 관점은 언어와 문체, 구성 등에 관련된 연구들로 이문구 소설에 나타나는 기술적 미학의 범주에 대한 논의들이다.사회 문화적 관점에 의한 연구는 그의 작품들이 당대의 시의성을 어느 정도 적절히 내포하고 있는가를 측량하는 것으로 이 관점에서 보면 이문구 소설은 부분적으로 산업화·근대화의 여파가 남긴 농촌 현실을 극대화하였다는 문화사적 의미가 부여된다.) 송희복, , 작가세계 1992년 겨울호, 106쪽『관촌수필』도 사회 문화적 관점에서 바라보면 이러한 긍정적 평가를 획득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논의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염무웅은 『관촌수필』을 두고 "작가가 그의 잃어버린 육친과 쫓겨난 고행에 대해 측면에서 바라본 논의들은 그의 독특한 문체를 거론하고 있다. 대부분의 논자들은 농민의 사투리뿐 아니라 해학과 만담을 통해 당대의 농촌 풍속을 생생하게 재현하고 있는 이문구의 문체에 대해 산업화에 따르는 변화 양상을 더욱 두드러지게 하는 효과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아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김윤식, 문체의 힘, 김윤식 선집 4 - 작가론 편, 솔, 1996, 192-198 쪽권성우는 『관촌수필』을 평하면서 문체를 중요한 자산으로 보았으며,) 권성우 1991년에 읽은 관촌수필, 관촌수필, 문학과 지성사, 1994, 309쪽김종철은 『관촌수필』이 소중한 인간상을 보여주는 정서적인 감동과 농촌에 대한 비판적인 안목의 지적인 깨달음을 주는 작품이라고 평가하면서 이러한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바로 문체라고 지적하였다.) 김종철, 앞의 책, 111쪽한편 김만수는 이문구의 소설이 정교한 구성을 갖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판소리와 유사하다고 보고, 때문에 그의 소설이 우리 것에 가장 가까운 문체적 특징과 구성을 활용하고 있다고 보았다.) 김만수, 땅의 근본과 사람의 도덕에 대한 성찰, 한국소설문학대계55, 동아출판사, 570-571쪽반면 미학적 측면에서 이문구의 『관촌수필』을 평가한 논의 가운데에는 부정적 입장을 취한 것도 있다. 최광렬은 이문구의 문체가 판소리와 유사하며 "요설적(饒舌的)인 지루함을 수반하고 소설 전체에 동적인 약동감보다는 정적인 설득력으로 독자에게 강요하는 폐단이 많다.") 최광렬, 이문구론, 쟁이들의 환상과 세계, 한겨레, 1978, 190쪽고 하면서 그의 문체를 하나의 단점으로 평가하였다. 황종연은 『관촌수필』의 구어체 문장을 근대화에 따른 대응으로 보고, 이것이 이문구 소설의 예술성의 원인이라고 주장하면서도 구성의 빈곤을 하나의 단점으로 지적하였다.) 황종연, 도시화 산업화 시대의 방외인, 작가세계 1992, 겨울호, 55-64쪽진정석과 진영복도 이문구의 『관촌수필』이 갖는 구성의 빈곤을 하나의 단점으로 보았다.) 이라온 안, 이문구의 관촌수필 연구,그 곳의 업무직원이 되어 편집 업무를 배우기 시작한다. 이 해에 발표한 단편소설로는 「두더지」「담배 한 대」「簡易驛」「이삭」「가을 소리」가 있다.28세(1969) 때 『사상계』에 「百衣」를 발표하고, 『창작과 비평』에 「몽금포타령」을 발표한다. 신변의 숱한 사연을 거리낌없이 진술하는 그것을 우리가 몸담고 살고 있는 현실 속에서 저절로 솟아오르는 체험의 목소리라고 표현하였다.3. 70년대의 이문구1970년대는 이문구가 농촌소설 작가의 비중 있는 한 사람으로서 활동하던 시기이다. 문학사적 의미와 관련할 때, 작가 생애를 집약할 수도 있는 이 시기에 그는 질량 면에서 다른 시기를 압도할 만큼 성과를 거둔 것도 사실이다. 70년대의 시대사적 특징을 한 마디로 요약하면,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입각한 근대화·도시화·산업화의 바람으로 언표된다. 말하자면, 그 것은 상대적으로 농촌공동체의 재편과 전통적 가치관의 몰락을 의미하기도 한다.29세(1970) 때 『월간문학』지 편집장이 되고, 작가로서는 장편「長恨夢」과 단편「암소」를 발표한다. 1972년에 단편 「秋夜長」「금모래빛」「다가오는 소리」「落陽散策」「壬子隨錄」「萬古江山」「그가 말했듯」「그럴 수 없음」을 발표하였다.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일은 필생의 대표작 「冠村隨筆」연작이 시작된 것이다. 1, 2, 3에 해당하는 〈日落西山〉〈花無十日〉〈行雲流水〉를 발표하였다.32세(1973) 때 단편 「우산도 없이」「艸夫」, 연작 「冠村隨筆」4, 5에 해당하는 〈綠水靑山〉과 〈空山吐月〉을 발표한다. 35세(1976) 때 「冠村隨筆」의 6, 7인 〈關山芻丁〉과 〈與謠註序〉를 『창작과 비평』과 『세계의 문학』에 각각 발표한다.36세(1977) 때 동리 선생의 부인인 손소희 여사가 도서출판 한국문학사를 설립함에 따라 편집장이 되어 『한국문학』 창간에 전력을 다하였다. 단편 「冠村隨筆」8인 〈月谷後野〉를 『월간중앙』에 발표함으로써 동명 연작소설은 5년 만에 대미를 장식한다. 『관촌수필』 후기작인 6, 7, 8은 장성한 뒤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동시대를 살아가는 보편적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상황을 극복하기보다는 회피하려는 성향이 강했기 때문에 이러한 이들은 전근대적인 인물로 볼 수 있다. 이들은 산업사회의 극단적 부산물인 전쟁에 의해 희생되는 전형적인 인물이다.옹점이는 6살이 되도록 이름이 없었지만, 조부가 즉석에서 작명해준 이름으로 그녀의 존재를 '나'의 집안에 들여놓기 시작한다. 이 글이 쓰여진 것은 70년대 유신정권 때다. 그 때에는 주체 의식이니, 주체성이라든가 하는 것을 무슨 뜻인지도 모르면서 운운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것이 작가의 눈에는 못마땅해 보였다. 오히려, 이데올로기라든가 사회의 발전 같은 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의 역할과 해야할 일을 해나간 옹점이가 자신이 보아온 사람들 중 몇 안 되는 주체성 있는 인물이라며 그 당시 상황과 사람들을 비웃고 있다. 그렇게 자신의 일을 고집스럽고 묵묵히 해나간 옹점이도 전쟁의 불길을 피해가지는 못한다. 그녀의 남편이 군에 징집되어 6·25에 참전하고 결국엔 돌아오지 않자, 시댁에서는 남편 잡아먹은 년이라면서 온갖 시집살이를 시키기 시작한다. 그녀가 품행이 조용하지 못하고, 손이 크다는 것도 시집 사람들의 구박의 이유가 된다. 그녀는 결국 못 견디고 뛰쳐나와 그녀가 평소에 좋아하던 노래를 부르면서 약장수를 따라다니게 된다.시장터에서 목청껏 노래를 부르는 옹점이를 발견한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간다. 그리도 반가워야할 옹점이를 반가워하지 못하고 도망간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엄격한 조부의 밑에서 양반교육을 받으며 자라온 인물이다.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세상을 떠돌아다니며 사는 약장수나 부랑아 같은 사람들은, 자신의 집에 부엌떼기로 있을 때보다 더욱 천한 삶을 사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러한 생각 이면에는, 신분이든 금전이든 이념 같은 것에 얽매이지 않고 하릴없이 이 세상을 떠도는 삶을 살게 된 옹점이에 대한 부러움과 연민의 감정이 뒤섞여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대복이 또한 옹점이와 마찬가지로 나이 차는 많았지만, '나'와 벗해주기를 다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장면이다.『관촌수필』의 전반부에 등장하는 인물은 근대사회로의 과도기에서 희생당하는 인물들로 그려진다. 또한 화자의 시선은 과거에 머물러 있으며, 이러한 과거지향적인 시선으로 인해 인물들은 미화되고 낙관적으로 해석된다.Ⅱ. 근대 사회-근대 사회를 드러내는 인물「관산추정」에서 복산이는 두 시간대를 잇는 인물이다. 일제시대와 6·25를 거친 힘들지만 아름다웠던 과거의 시대와 산업화가 슬슬 틀어 올라오는 시대, 이 두 시대를 잇고 있다. 이것은 기존의 '관촌수필'에서 보여진 인물들과는 다른 의미를 가진다. '나'의 고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객관성을 어느 정도는 상실한 추억 속에서 인물들은 오직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들은 현재로까지 그 아름다움을 이어가지는 못하고 있다. 하지만 복산이는 과거와 미래를 잇는, 지난 세월이 다 허사가 되고 원점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가 미래로 이어지는 삶을 보여주고 있다. 감사하다는 말 한 번 제대로 듣지 못하지만 언제나 마을의 궂은 일은 도맡아 해왔던 아버지 '유천만'처럼, 복산이 역시 아버지의 이 한 가지 특성이 유전되어 내려와 마을의 궂은 일에 주저 없이 발벗고 나선다. '나'에게 복산이는 그의 아버지 '유천만'이다. 이것은 복산이가 과거 어린 시절을 고스란히 지닌 채 미래를 향해 살아가는 인물임을 단편적으로 보여주는 부분이다."관촌부락도 어디 못지 않게 변했다. 뭉개진 붰재에는 여자 중학교가 보다 높은 봉우리로 솟아 있었으며, ……(중략). 사람보다도 더 못 미더운 동네로 변해버린 거였다. 그러나 유복산이는 거연(居然)했다. 오직 하나 변하지 않은 것이 그였다. 붰재가 변하고 바다가 변했음에도 그 한 사람만은 아직 다치지 않고 남겨두고 있었다."(295쪽)이렇듯 달라진 세태 속에서도 복산이는 강건하게 자신을 지키고 있었다. 온통 상처투성이로 변해버린 고향에서 복산이 혼자만이 다치지 않고 살아있는 것이다. 이는 '나'에게 있어서 변화된 고향을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중심점이 되어 한다.
루카치 1. 완결된 문화고대 그리스의 문화의 구조고대 그리스 시대에 있어서 모든 것은 새로우면서도 친숙하며, 또 모험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결국은 자신의 소유로 된다. 그리고 세계는 무한히 광대하지만 마치 자기 집에 있는 것처럼 아늑한데, 이는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과 본질적으로 동일하기 때문이다. 즉, 세계와 자아, 천공의 불빛과 내면의 불꽃, 주관과 객관, 외부와 내면이 뚜렷이 구분되지만 결코 서로에 대해 낯설지가 않다. 영혼의 모든 행위는 하나같이 의미속에서 또 의미를 위해서 완결되는 원환적 성격을 갖는다.서사시의 시대서사시의 시대에서는 모든 사람이 철학자이자 또 모든 사람이 각각의 철학을 지니는 유토피아적 목표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때에는 행복한 시대의 지도를 그리는 일 이외에 참된 철학의 과제란 달리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또한 가장 깊은 내면으로부터 솟아 나오는 충동이 그 자신은 알지 못하지만 영겁의 시간 이래로 자신에게 주어진 형식, 즉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상징으로서의 자신을 감싸고 있는 형식에 대해 어떤 관게를 맺고 있는가를 규정해 보는 일이 아니라면 선험적 좌표하는 철학의 원초적 문제는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또한 내면성이라는 것도 아직 존재하지 않는데, 이는 아직 일체의 외부적 세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영혼에 대립되는 타자도 전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다시 말해 영혼은 자신을 잃을 수도 있고, 또 그럴 경우에 자기자신을 다시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미처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그러한 생각을 하지 않는다. 우리가 서사시의 시대라고 말하는 것도 이러한 상황을 두고 일컫는 것이다.그리스 정신의 선험적 지형학선험적 고향에서의 정신의 태도는 단계가 많은 과정을 하나하나씩 밟아감으로써 서서히 이 루어지고 있음을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 완성되어 존재하는 의미를 수동적·예시적으로 받아들이는 덧을 의미한다. 의미의 세계는 붙잡을 수가 있고 또 굽어볼 수가 있는 것이다.로운 인간인 현자는 그의 행동적인 인식과 본질을 향한 창조적 비전을 가지고 단순히 비극적 주인공의 실제모습을 드러내어 보여 줄 뿐만 아니라 비극적 주인공이 정복했던 숨겨진 어두운 위험까지도 훤히 밝혀 주고 있다. 따라서 현자는 최후의 인간 유형이며 또 그의 세계는 그리스 정신에 주어졌던 전형적인 삶의 최종적 형상 내지 구조이다.창조된 총체성으로의 예술예술은 이제 더 이상 모사가 아니라- 왜냐하면 전범적 모델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창조된 총체성인데 왜냐하면 형이상학적 제 영역의 자연스러운 통일은 영원히 파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2. 형식이 갖는 역사철학적 문제형식의 일반적 원칙예술의 여러 형식은 역사철학적 변증법에 종속된다. 각 장르가 갖는 선험적 고향에 따라 모든 형식이 달리 나타난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뜻하고자 하는 장르를 창조하는 원리는 생각의 어떠한 변화도 요구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과거이 것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하나의 새로운 목표를 지향하고 있는 동일한 생각을 필요로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말은, 형상화하는 주관 속에서의 선험적 구조가 가졌던 해묵은 평행적 성격이 파괴되어 버렸고, 형상화의 궁극적 기반이 고향을 잃어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선험적 고향 상실성의 표현으로서의 소설그리스는 철학적 순환성이 이루어졌지만 그 이후는 목효를 향한 참된 탐구와 거짓 탐구로 장르가 뒤엉키게 된다.선험적 관련성이 조금만 동요해도, 삶에 있어서의 의미는 내재성도 사라져 버리는 데 반해, 삶과 동떨어져 있고, 삶과 낯선 본질은 격동이 일어나도 그 존엄성은 퇴색만 할 뿐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비극은 변하기는 했지만 자기의 본질을 고스란히 간직한 채 우리시대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에 비해 서사시는 (완전히 새로운 형식인)소설에 그 자리를 양보하고 자취를 감추었다. 물론 삶의 개념과 본질에 대한 삶의 관계도 변함에 따라 비극 또한 변화를 겪지 않을 수 없었다. 세익스피어와 알피에리를 양극으로 하고 있는 현대비극이 양식적 인 결과이다.드라마와 서사형식에서의 당위와 유토피아드라마가 만들어 내는 성격은 인간이라는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아이며, 서사 형식이 만들어 내는 성격은 경험적 자아라고 할 수 있다. 지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자아 내 에서의당위는 심리학적으로서 객관화되지만, 경험적인 자아 내에서는 하나의 당위로 남아 있게 된다.당위의 내용은 사그라져 희미해질 수는 있어도 결코 새로운 이상적 현존재로 소생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는 반대로 서사 형식의 등장인물들은 반드시 살아 있어야만 한다.서사형식에서의 주관성보다 작은 규모의 서사적 형식의 주체는 그가 형상화하고 있는 객체에 대해 지배적인 태도를 취한다. 이것은 화자가 갖는 주관성이다. 그러므로 서사적 형식의 완결성은 주관적인 완결성이다. 작가는 전체 삶으로부터 한 조각을 떼내어 그것을 전체 삶과는 대조되는 하나의 환경으로 바꾸어 놓는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주관의 의지로 선별과 구분을 하게 되고 여기서 서정적 성격을 갖는다. 서정성은 아무런 대상도 없이 자기 자신의 명상 속에서 고독한 자아가 빠져드는 탐닉도 아니고, 들뜬 마음이나 분위기 속에서 일어나는 객체의 해체도 아니다. 그것은 규범에 의해서 생겨나고 또 형식을 창조하면서 모든 것이 형상화된 형태의 존재를 갖게 된다.노벨레삶의 기이하고 불확실한 단편적 양상을 골라내어 형상화하고 있는 형식이 바로 중·단편소설이다. 중·단편소설은 가장 순수한 예술적 형식이다. 그것은 또 모든 예술 창조의 궁극적의미로서 명확하게 보여지게 된다. 이로써 아무런 두려움이나 희망도 없는 이러한 시각의 마력적인 힘은 중·단쳔소설에 형식이라는 신성함을 부여하게 된다. 즉 무의미성은 무의미성으로 형상화되고, 또 그럼으로써 이러한 무의미성은 형식에 의해서 긍정되고 지양되고 구원을 받아, 마침내는 영원한 것으로 되는 것이다.전원시전원시에서 서정성은 사람과 사물의 윤곽과 함께 거의 완전할 정도로 한데 어울려 융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윤곽에 평화로운 은둔 생활의 부드럽고 경쾌한 정취를 부여하고운문은 궁극적인 구성원리는 아니지만 이들 장르의 본질을 근원적으로 그리고 가장 순수하게 드러내 주는 뚜렷한 징후인 동시에 경계선이다. 비극적 운문은 예리하고 엄격하며 구분하면서 거리를 만들어 낸다. 비극적 운문은 형식이 만들어내는 고독의 심연으로 주인공을 완전히 감싸며 주인공들 사이의 싸움과 파멸이라는 관계이외는 어떠한 관계도 용납하지 않는다. 또한 비극적 운문에서는 영혼은 자신의 심연을 심리적 허영심으로 가늠하려고도 하지 않으며, 스스로의 깊이를 반영하고 있는 거울 속에서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자만하지도 않는다.서사적 운문서사적 운문도 역시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러한 거리는 행복과 가벼움을 의미한다.진부하고 경박한 것이 비극에서는 가벼움을 의미했던 것처럼, 삶의 영역과 서사문학에서는 무거움을 의미한다. 삶에 있어서의 무거움이란 현재적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인과관계 속에서 헤어나올 수 없이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운문은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 할 수 없다. 운문이 자신이 담고 있는 모든 것에 부여하는 창조적 황홀감은 서사시로부터 그것이 지닌 위대한 무주관성과 총체임을 빼앗아 서사시를 서정적인 유희로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대서사문학에 갖는 가벼움이란 억압적 굴레를 실제로 벗어버릴 때만이 하나의 가치가 되고 또 현실을 창조하는 하나의 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가벼움이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은 시대에는 운문은 대서사문학으로부터 추방을 당하던가 아니면 자신이 모르는 사이에 서정적인 운문으로 바뀌게 된다. 이렇게 되면 오로지 산문만이 삶의 총체성을 형상화할 수 있게 된다.단테의 운문단테의 시는 담시(譚詩, Ballade)의 가락을 집중화하고 통일시켜 만든 서사시의 일종이다.삶의 의미의 내재성은 단테의 세계에서도 어디에서나 존재하고 있지만 단지 피안에서만 존재하고 있다. 즉 그것은 초월적인 것의 완벽한 내재성인 것이다.단테의 운문에서의 인물은 자신의 개별적 운명을 노래하고 또 자신에게 할당된 운명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고립된 사관습의 세계이다. 관습의 세계는 복잡한 다양성을 가지고 어디에나 현존하고 있지만 영혼의 가장 내면적인 것이 빠져 있어서 영혼의 추구하는 바와 너무나 다르다.제2의 자연인간이 만든 구조물인 제2의 자연은 서정적 실체성을 갖고 있지 않다. 그 형식은 상징을 창조하는 순간에 자신을 적응시키기에는 너무 경직되어 있다. 그리고 제2의 자연의 법칙의 내용은, 서정시를 에세이적인 것으로 만들 수밖에 없을 정도로 확고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더욱이 이러한 성격들은 전적으로 법칙성의 은총에 의해 살아가고 있으며, 그래서 이러한 법칙성과는 무관하게 현존재의 독자적이고 감각적인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따라서 만약 법칙성이 없다면 이러한 요소들은 무(無)로 와해되어 버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자연과 영혼제 1의 자연에 대한 제 2의 자연의 낯설음, 즉 자연데 대한 현대의 감상적인 태도는 스스로가 만든 환경이 인간에게는 이제 그들이 안주할 고향이 아니라는 감옥이 되어 버렸다는 체험의 투영에 불과하다. 인간을 위해서 인간이 만든 구조물이 인간에게 진저응로 적합한 동안에는, 그 구조물은 인간의 필연적이고도 본래적인 고향이 된다. 이렇게 되면 찾음과 발견의 대상으로 자연을 설정하고 체험하고자 하는 향수는 인간에게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자연을 순수한 인식을 위한 법칙성으로 간주하고 또 자연을 순수한 감정을 위해 위안을 자겨다주는 것으로 파악하는 제1의 자연은 다름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이 만들 구조 사이에 존재하는 소외의 역사철학적 객관화이다.구성 요소로서의 윤리적 주체자연의 체험에 있어서 유일한 실체인 주체는 모든 외부세계를 기분으로 해체하며 자기자신도 관조적인 주체와 객체사이의 본질이 완전히 일치하기 때문에 기분으로 변한다. 그렇지 않려면 자신의 행동무대와 행동의 규범적 객체가 윤리적 소재에서 형성되어야 한다.주인공의 유형서사적 개인, 즉 소설의 주인공은 외부세계에 대한 낯설음으로부터 생겨난다.서사시의 대상은 개인의 운명이 아니라 공동체의 운명이고 사건 속의 모험은 한 민족이나 씨족같은 커다
뤼시앙 골드만 제 1장 인문과학에서의 주체와 객체주체는 연구 개상(곧, 객체)의 한 부분이 된다. 객체는 주체의 의식 속에서 발견되어 질 수 있다. 헤겔은 이를 주·객체의 동일성이라고 했다. 이것은 인문과학에서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이 자료에 의해서 자연과학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법으로 객관성의 본질이 나타나게 된다.현재 인정되고 있는 변증법적 사고는 비발생적, 비역사적 구조주의에 대항해왔다. 실존주의와 비발생적구조는 서로 보완적이면서 서로 일방적이다. 한 쪽은 주체, 자유, 투사, 가치, 과정, 이해를 다른 한 쪽은 구조, 사실, 객체, 불연속성, 필연성을 강조하고 있다. 곧 이 둘은 거짓된 이원성의 어느 한 쪽을 옹호하고 있다.실존주의는 객체와 구조가 자유로운 주체 안에 존재함을 전제로 해서 객체와 구조의 개념을 옹호하는 것을 뜻한다. 이는 경제적, 자아 규제적 매커니즘의 발달과 기술 관료적인 사회와 조직화된 자본주의의 확립과 함께 시들기 시작하였다. 비발생적 구조주의는 변동하는 역사 속에서 주체와 인간의 역할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시기를 기술 관료적 사회, 조직화된 자본주의라고 불렀다. 아롱(Aron)과 벨(Bell)은 이데올로기의 종말에 대한 이론을 발전시키는 등 주체의 실제성은 부인되어졌고 인간의 중요성은 부정되었다.실존주의 시기를 통해서 주체가 완전히 자유스러운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할 필요가 생기게 되었고, 세계는 주체와 사고와 정서가 바로 구조화될 때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체가 제한되어졌다.발생적 구조주의는 인간적 사실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것들과 주체의 행위를 관련지어 생각해 보아야 한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프랑스 혁명, 개혁운동과 같은 인간적 사실들은 인간 행위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행위는 작가의 의식을 꿰뚫는 여러 가지 요소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회 집단과 관련해서 그 요소들의 기능은 그 인간과 세계와의 관련성을 향상시키는 것이다.문화적 작품들은 인간과 우주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표현할 정도로 위대한 것이다. 따라서 가 연구하려고 하는 사회의 일부분으로서 일정한 테두리 안에 놓여 있고 이 테두리가 자신의 정신적인 범주들을 형성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우리가 사회학적 지식과 지식 사회학에 대한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도 이와 똑같은 테루리와 마주치게 된다. 따라서 사회 일반이나 특정의 개별의식이나 집합의식에 관한 사실들을 연구할 때 다음과 같은 점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첫째, 집합의식이라는 개념이 개인적 의식들의 총합과 그것들 사이의 관계를 가리키는 조작적 개념이라면 그것은 이러한 의식들 밖에 놓여질 수 있는 어떠한 현실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즉, 개인들의 합이 사회전체가 되지않는다고 하더라도 사회학은 전체로서의 사회를 다루어야한다.둘째, 사회-역사적 실재는 어떤 일정한 자연적, 사회적환경 안에서 개인들의 의식적 행위의 구조화 된 총합이라는 것이다.셋째, 구조화의 과정은 개인들과 그들에 의해 이루어진 사회집단들이 그들의 주위환경과의 관계에서 빚어진 문제 전체에 대해 일관성있고 통일적인 대응책을 모색하려 한다는 사실에서 연유된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그들 자신과 환경과의 균형을 세우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위에 세 가지의 명제들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첫째, 의식에 대한 모든 사실은 직접적으로 또는 비교적 간접적인 방식으로 실천과 엄밀한 관계를 맺고있다는 것이다.둘째,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는 의식의 일부분에 불과하며, 그의 의식의 전체는 그가 속한 모든 집단들과 연계되어 있다. 따라서 개인은 그 집단의 다른 구성원들과의 관계를 통해여 서로 다르게 구조화되는 과정의 근원이며 구조화 과정에 의한 혼합체이다. 사회학자들은 개인과 사회의 상이성을 통해 추상화를 시도할 수 있다.셋째, 어떤 집단은 그들의 의식적인 삶과 사회-역사적인 실천이라는 양면을 통해 어떤 특권적인 성격을 보여준다. 이러한 집단들의 삶에 있어서 의식적인 측면은 그들의 문화 생활이나 실천의 본질적인 발생 요인이면서 동시에 역사적인 삶의 결정 요소인 것이다.넷째, 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그의 가치 판단을 명시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알리는 일이다. 이는 최대한의 객관성을 획득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며, 실재를 보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할 것이다.구조와 세계관사회의 전체적 구조를 지향하는 집단들의 심리적 구조물들을 세계관이라 한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일정한 규칙에 의해 연결된 채 상호 의존적이며 변형가능성이 제한되어 있는 구성 부분들의 집합체인 것이다.한 세계관이 한 집단의 '집합 의식'을 이룬다. 그리고 이 일반적인 공식은 각각의 특수한 경우마다 '특정 집단의 의식'으로 바꾸어져야 한다. 세계관이 집단을 이루는 사람들의 개인적 의식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각 개인에게서 세계를 보는 눈은 집단적에 대한 비교적 전제적인 이해라는 형태로, 집단 구성원의 구조화 과정으로 나타난다. 따라서 지식 사회학은 일반적인 수준에서는 거대한 체계의 사회·역사적인 구조화 과정을 연구해야 하며, 구체적인 수준에서는 세계관을 연구해야 한다. 또한 지식 사회학의 이러한 연구 작업은 오직 이 지적 발생 과정을 개인의 보편적 실천에 그리고 특정한 특권적 집단의 구체적인 사회적 실천에 재결합시킴으로써만 가능하다.자기 규제와 진보: 조절과 동화모든 구조화 과정은 점점 커지는 주위의 사회적·물리적 세계의 영역을 평형의 상태로 흡수하려는 경향을 안에 지니고 잇따. 그러나 이러한 경향을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장벽에 부딪히게 된다.Ⅰ.외계 세계의 특정 부문들은 형성되고 있는 구조 속에 쉽사리 통합되려고 하지 않는다는 사실Ⅱ.외계 세계의 특정 구조들은 비록 전에는 통합될 수 있었다고 할지라도 결국에는 불가능해질 만큼 변형되었다는 사실Ⅲ.평형의 과정을 가져와야 하는 집단 안의 개인들은 주위의 사회적·물리적 환경을 변형시켜 균형의 상태를 지향하는 구조화 과정의 연속성을 방해하는 상황을 초해하게 된다는 사실이 세가지 이유 때문에 모든 평형의 과정은 곧 집합적 주체와 그들 환셩 사이의 의미있는 평형을 찾아야 할 요구에 대해 가장 적절하게 적인 집단들과 더불어 존속하여 왔다. 특히 이 개념이 인간적 실재를 이해함에 있어 제일 중요한 듯한 개념적 도구로 정의되었던 것은 근대 유럽 사회에서의 주요 계급이었던 프롤레타리와와 부르조아 또는 궁정 왕족과 귀족의 가능 의식의 수준에서였다. 이 개념적 도구는 또한 의식에 대한 사실들의 구조화 된 집합체에 대하여도 중요한 것이 된다.실로, 집단의 실제 의식이 집단의 가능 의식에 부합되지 못할 때일지라도, 위대한 문화적 창작물들은 가능 의식의 최대치로 발전되어 거의 일관성있는 정도까지 정확하게 표현한 것 같다. 이 측면이 인간 집단들의 사회적 특징이 된다. 그러므로 세계관이 수년 수대에 걸쳐 문화적 작품들과 상응되어 집단성에 의해 만들어졌다면, 이 작품들은 집합적인 동시에 개인적인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론적 수준에서든지 떠는 예술적 수준에서든지 보다 세련된 일관성의 수준에서 세계관을 표현한 최초의 사람이거나 적어도 최초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왜냐한면 작가는 주인공, 대상, 관계의 상상적 세계를 창작하기 때문이다.이해와 설명사실 이해라는 개념은 흔히 동정(sympathy)이나 감정 이입(empathy)과 같이 오직 감정적인 수준에서만 정의되어 왔다. 실로 이러한 요소들은 연구자가 연구를 전개시키는 데에 중요한 변수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외부적이고 지적인 조건들이 아직도 남아 있다.이 조건들은 한 구조의 구성 요소들 사이의 본질적인 연관성에 대한 서술이나 그것의 적정 수준의 기능에 대한 발견으로 정의된다.발생적 구조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설명이란 결코 이해와 동떨어진 별개의 과정일 수는 없다. 실제, 한 구조의 적정 수준에서의 기능은 이해에 필수 불가결한 것으로서 설명의 한 구성요소이다.새로운 지행성을 파악하려면 새로운 이해적 서술이 필요하다. 이러한 사실은 우리가 거대한 어느 한 구조의 발생을 이해적으로 서술함으러써 이 거대한 구조를 구성하는 특정 구조들의 진화와 변형을 설명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관점에 따르면 이해와 설명이 비와 행동은 사회적 조건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가 이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으로 고려해야 할 것은 사회적 삶이 과정들의 총합을 나타낸다는 사실이다. 크게 보아 사회적 조건들 그 자체는 특정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들의 실펀적 행위가 낳은 결과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루어지는 실천이 환경을 고쳐 나간다. 곧, 실천은 여러 집단에 속해 있는 개인들이 그 안에서 행동해야 할 조건을 창출하면, 그들이 가까운 미래에 해결해야 할 문제들을 제기한다.제3장 문학사에 있어서 의미있는 구조의 개념인간적 사실들 특히, 철학과 문학 또는 예술작품들을 주의 깊게 연구하려면, 그 사실들을 '구조'라는 일반 개념에 의해서 규정해야 하며, 거기에 '의미있는'이라는 말을 덧붙여야 한다.위대한 작품들을 진지하게 연구하려면 내적인 일관성, 곧 그 적절한 구조를 밝히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철학이나 문학 그리고 예술의 역사에서 의미있고 일관성있는 구조라는 개념은 이론적인 것과 규범적인 것 양면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는 구조가 작품들의 본질과 의미를 이해하기 위한 주요한 도구가 될 뿐만 아니라, 철학적, 문학적 또는 미학적 가치를 판단하도록 하는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인문과학에서 구조 개념의 이론적인 기능은 각 연구 영역에 적합한 특수성에 따르지만, 자연과학에 비해서 질적으로 다르지는 않다. 반면에 규범적인 기능은 연구의 주체와 객체, 곧 인간과 사회 현실의 양 부문에 공통되는 목적성이 존재하기 때문에 비로소 설명될 수 있는 것이다. 인문과학을 다룰 때에 의미있는 구조의 이해 가능성은 현실과 규범 모두를 나타낸다. 이는 다름아니라 그 개념이 실제의 역동성과 이 총체성이 향하고 있는 목표를 동시에 규정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총체성은 연구 대상인 작품과 그것을 연구하는 연구자를 함께 포함하는 것이다.현실 연구에 있어서, 광범하고 일관성있고 의미있는 구조들을 향해 나아가서 결국은 궁극적인 투명한 사회로 향하려는 경향들이 역사를 지배하고 있다. 이런 이유 때문에, 문화 또는 보다 정워진다.
참으로 진지한 철학적 문제는 오직 하나뿐이다. 그것은 바로 자살이다. 인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느냐 없느냐를 판단하는 것이다. 대뜸 이같은 형이상학적 질문으로 시작하는 시지프신화의 형식과 내용은 자전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철학적 이론 못지않게 저자의 직접 경험 및 개인적 열정과 깊숙이 관련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그리고 카뮈가 이처럼 초장부터 분명히 하고 있는 책의 주제를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해보면 부조리와 자살사이의 관계 가 된다. 이처럼 책의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주제가 부조리 와 자살 이라면 거기에 추가된 제3의 주제는 희망 이다.《시지프스 신화》는 요컨대 부조리와 희망과 죽음이 서로 대화를 주고받는 비인간적 유희에 대한 매우 성실한 묘사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인간의 삶이라고 하는 기이하고 비장한 유희 혹은 연극에 등장하는 새 주역을 차례로 검토해보면 다음과 같다.부조리는 습관과 의식 속에서 발견된다. 시지프가 정상에 바위를 올려다 놓고 다시 떨어지는 바위를 보면서 다시 걸어 내려오는 걸음, 잠시 동안의 휴식 때문에 특히 시지프는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부조리란 바로 이 의식 에 의하여 발견되는 것이다. 의식은 바위를 굴려 올리는 일상적 행위들이 정지되는 시간, 즉 정상에서 되돌아 내려오는 순간, 들이쉬었던 숨을 내쉬는 순간에 찾아온다.삶이 무엇인지를 또렷하게 직시하는 행위를 카뮈는 명철성 혹은 명증한 의식 이라고 부르고 그 명철성을 출발점으로 하여 마침내 광명의 세계 밖으로 도피하는 행위 를 자살이라고 부른다. 부조리는 명철성과 자살사이에 자리잡는다. 사유가 극한에 도달하게 되는 물 한 모금없이 황량한 장소, 사유가 비틀대는 그 마지막 전환점을 가리켜 카뮈는 사막이라고 부르고 이곳이 부조리의 세계다.부조리란 본질적으로 일종의 이혼, 즉 절연이다. 또한 파열이고 붕괴다. 의식에 의하여 삶이라는 무대장치가 붕괴된다. 다시 말해서, 정신이 조금이라도 깨어나 움직이기 시작하면 이 세계는 금이 가고 무너진다.(p.35) 통일성이 불가능해진다.금이 가고 무너진 세계는 돌연 나에게 낯설어지는 세계이다. 나와 세계를 하나로 여겨왔는데 돌연 내가 세계로부터 단절되었다는 것을 의식하게 되면 낯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낯설음이다. 설사 시원찮은 이유들을 가지고서라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세계는 낯익은 세계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돌연 환상과 빛을 잃은 세계 속에서 인간은 스스로 이방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p.19) 세계의 낯익음은 설명 , 즉 이성이라는 공통된 바탕을 통해서 나와 세계가 하나임을 느끼는 것이다. 낯설음은 인식의 기반인 이성이 환상으로 판명됨으로써 일어나는 단절 현상이다. 세계에 대한 나의 인식은 불가능해진다. 세계는 다시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습관에 의해 가리어져 있었던 무대장치들이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즉 세계의 두꺼움과 낯설음, 이것이 바로 부조리다. (p.30)또한 나에게 낯설어지는 것은 세계만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낯설어진다. 명철성이 살아나는 어떤 순간에는, 인간들이 하는 행동의 기계적인 면과 의미 없는 무언극으로 인하여 그들 주위의 모든 것이 다 어리석게만 보인다. 낯설어지는 것이다.세계, 타자에 대해 낯설어지는 것과 더불어 나에게 또한 낯설어진다. 마침내 나 자신까지도 내게는 낯선 이방인이 된다. 마찬가지로 어떤 때 거울 속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는 그 이방인, 우리 자신의 사진 곳에서 다시 보는 친근하면서도 불안스러운 형제, 이것 또한 부조리이다 . 인간과 그의 삶, 배우와 무대장치 사이의 절연, 이것이 다름 아닌 부조리의 감정이다.(p.19)부조리는 반드시 죽음으로 인도하게 마련인 시간 에 대한 인식으로부터 온다. 그는 시간에 속해 있는 것이다. 그는 자신을 사로잡는 공포로 미루어 보아 거기에 최악의 적이 도사리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는 내일을 바라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전 존대를 다하여 거부했어야 마땅할 내일을. 이러한 육체의 반항이 바로 부조리다. (p.29)따라서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명철한 의식이다. 뺨을 때려도 자국이 나지 않는 무기력한 육체에서 영혼은 사라지고 없다. 죽음이라는 모험의 초보적이고도 결정적인 측면이 부조리의 감정의 내용을 이룬다. 이 숙명을 비추는 죽음의 조명 아래서 무용성이 그 모습을 드러낸다. 인간의 조건을 관장하는 피비린내나는 수학 앞에서는 그 어떤 도덕도 그 어떤 노력도 이미 선험적인 정당성을 가질 수 없다. (p.32)다시 말해서 부조리는 단절이다. 단절은 두 개의 항을 전제로 한다. 그것은 이어져 있던 것의 끊어짐이다. 하나였던 것이 둘이 된다. 갈라진 둘은 이제 더 이상 하나로 이어지지 않는다. 부조리는 나와 세계, 나와 타자, 나와 나 자신 사이의 절연이며 단절이다. 부조리는 인간과 그의 삶 사이의 이혼이며 거기서 오는 낯설음이다. 부조리는 시간에 대한 인식이며 죽음에 대한 명철한 의식, 혹은 의식적인 죽음 이다. 부조리는 어떤 두 가지 사이의 관계로서 인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세계 안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이 양자가 함께 있는 가운데 있을 뿐이다 . 즉 부조리는 인가의 호소와 세계의 비합리적 침묵 사이의 대면에서 생겨난다.《시지프 신화》는 전편에 걸쳐 끊임없이 반복, 확대되며 이어지는 일련의 질문들에 다각적으로 대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요컨대 카뮈는 다음의 세 자기 질문을 제기하고 그에 대답하려고 노력한다.1.부조리의 본질은 무엇인가?2. 부조리는 철학적 자살을 정당화하는가?3.부조리는 육체적 자살을 정당화하는가?시지프 신화는 자살로 시작하여 행복한 시지프로 끝나는 책이다. 즉 자살이 행복한 삶으로 역전되는 과정의 기술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자살이 부조리를 회피하는 방식으로 보았다.부조리의 시각에서 볼 때 자살은 인간이 스스로에게 초래하는 죽음이다. 그러므로 자살은 부조리를 바로 죽음 속으로 끌고 들어간다. 부조리는 대립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그 대립의 항목 중 어느 하나를 부정하는 것은 부조리를 기피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자살은 곧 문제 자체를 폐기하는 것과 같다. 죽음과 더불어 부조리도 끝이 나기 때문이다.자살은 부조리의 본질을 소멸시키는 것이므로 그 귀결 혹은 해답이 될 수 없다. 따라서 산다는 것이 곧 부조리를 살려놓는 것이다.(p.83)부조리를 회피하는 또 다른 방식으로 희망을 말하고 있다.희망은 뜻밖에도 기만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것은 내세의 삶에 대한 희망 을 뜻한다. 따라서 희망이란 결국 현재의 삶 그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어떤 거창한 관념, 삶을 초월하고 그 삶을 승화시키며 삶에 어떤 의미를 주며 결국은 삶을 배반하게 되는 거창한 관념을 위해서 사는 사람들의 속임수(p.22)인 것이다. 카뮈는 희망을 도피, 치명적 회피, 동의 투쟁의 기피, 기권, 비약 혹은 철학적 자살이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희망 역시 부조리의 정당한 귀결이 되지 못한다.카뮈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의 귀결을 이끌어낸다. 그것은 반항, 자유, 그리고 열정이다.유일하게 일관성있는 철학적 태도는 반항이다.(p.83) 반항은 인간과 그 자신이 어둠과의 끊임없는 대면이다. 반항은 어떤 불가능한 투명에의 요구다. 반항은 한 순간 한 순간마다 세계를 재고할 대상으로 문제삼는다 . 반항은 일회적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항구적인 것이다. 반항에는 희망이 없다. 죽는 순간까지 반항은 매순간 계속된다. 삶은 곧 반항이기 때문이다. 위험이 인간에게 반항해야 할 유일무이한 기회를 제공하듯이, 형이상학적 반항은 경험 전반에 의식을 펼쳐놓는다. 반항은 인간이 자신에게 끊임없이 현존함을 뜻한다.반항은 짓눌러오는 운명의 확인이다. 의식과 반항이라는 거부는 포기와는 정반대이다. 인간 가슴속에 깃들인, 환원될 수 없고 정열에 찬 모든 것이 다 함께 그의 삶에 맞서서 이 거부를 고무한다.(p.85) 그는 자신의 매일매일의 의식과 반항을 통해서 운명에 대한 도전 이라는 그의 유일한 진실을 증언한다.두 번째 귀결은 자유이다. 부조리는 죽음에 대한 의식이다. 나의 운명인 죽음은 영원한 자유에 대한 나의 모든 기회를 말살한다. 그러나 그것은 나에게 행동의 자유 를 되돌려주며 앙양시켜준다. 부조리가 이 점에 관하여 나에게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바로 내일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 이다. 희망과 미래를 박탈당했다는 것은 곧 인간의 행동 가능성이 더욱 증대되는 것을 의미한다.(p.89) 나의 깊은 자유의 존재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카뮈는 자유 하는 두 번째 귀결에서 양의 철학 을 도출해낸다. 나의 자유는 한정된 운명 과의 관련하에서만 의미가 있다. 따라서 여기서 가치의 판단은 폐기되고 사실의 판단만 남는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명증한 정신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가치의 척도는 무용해진다. (p.94)세 번째 귀결은 열정이다. 《시지프 신화》속에 담긴 개인적 성격, 뜨거운 육성, 그리고 치열성을 주목해 보았다. 이 책이 줄곧 그 밑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마침내 최종적인 결론으로 이끌어내는 것은 바로 그 열정이다. 그것은 비약하기 바로 전의 미묘한 순간 , 현기증나는 순간의 모서리 위에서 몸을 지탱하는 (p.76∼77)자의 뜨거운 열정이다. 정신이 스스로 부과하는 규율, 불 속에서 통째로 단련해낸 의지, 그리고 이 정면 대결 에는 무엇인가 강력하고 비범한 것이 있다. 합리와 통일성이 결여된 세계 속에서의 삶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당장은 미래에 대한 무관심과 주어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다 소진하겠다는 열정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p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