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ove Song of J. Alfred PrufrockS’io credesse che mia risposta fosseA persona che mai tornasse al mondo,Questa fiamma staria senza piu scosse.Ma perciocche giammai di questo fondoNon torno vivo alcun, s’i’odo il vero,Senza tema d’infamia ti rispondo.Let us go then, you and I,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Like a patient etherised upon a table;Let us go, through certain half-deserted streets,The muttering retreats 5Of restless nights in one-night cheap hotelsAnd sawdust restaurants with oyster-shells:Streets that follow like a tedious argumentOf insidious intentTo lead you to an overwhelming question … 10Oh, do not ask, “What is it?”Let us go and make our visit.In the room the women come and goTalking of Michelangelo.The yellow fog that rubs its back upon the window-panes, 15The yellow smoke that rubs its muzzle on the window-panesLicked its tongue into the corners of the evening,Lingered upon the pools that stand in drains,Let fall upon its back the soot that falls fry: “That is not what I meant at all.That is not it, at all.”And would it have been worth it, after all,Would it have been worth while, 100After the sunsets and the dooryards and the sprinkled streets,After the novels, after the teacups, after the skirts that trail along the floor?And this, and so much more??It is impossible to say just what I mean!But as if a magic lantern threw the nerves in patterns on a screen: 105Would it have been worth whileIf one, settling a pillow or throwing off a shawl,And turning toward the window, should say:“That is not it at all,That is not what I meant, at all.”. . . . . 110No! I am not Prince Hamlet, nor was meant to be;Am an attendant lord, one that will doTo swell a progress, start a scene or two,Advise the prince; no doubt, an easy tool,Deferential, glad to be of use, 115Politic, cautious, and meticulous;Full of high sentence, but a bit obtuse;At times, indeed, almost ridiculous?Almost, at times, the Fool.I grow old … I grow old … 120I shall wear the이려 한다. 프루프록의 마음이 세속적인 자아와 비세속적인 자아로 양분되어 있으나 몸이 움직이려면 이 양자가 함께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작품의 첫머리에서 비세속적 자아인 "나"는 세속적 자아인 "그대"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다.자, 가자, 그대와 나,저녁이 하늘에 깔려 있을 때에테르에 마취된 채 탁자 위에 누워 있는 환자처럼.가자, 반쯤 내버려진 그 거리를 가로질러,하룻밤 머무르는 값싼 호텔방에서안식 없는 밤들의 투덜거리는 듯한 은둔.그리고 굴껍질이 널려 있는 톱밥냄새 자욱한 레스토랑.지루한 논쟁과도 같이 이어지는 거리들,그대를 반박할 수 없는 의문의 구덩이로 몰아가기 위해음흉한 의도를 가지고서.....아, 묻지 마라, "도대체 그게 뭔데?"라고.우리가 가서 방문하게 해다오. (1-12)Let us go then, you and I,When the evening is spread out against the skyLike a patient etherised upon a table;Let us go, through certain half-deserted streets,The muttering retreats 5Of restless nights in one-night cheap hotelsAnd sawdust restaurants with oyster-shells:Streets that follow like a tedious argumentOf insidious intentTo lead you to an overwhelming question … 10Oh, do not ask, “What is it?”Let us go and make our visit.여기에서 화자는 비세속적 자아인 "나"로서, 자신과 세속적 자아인 "그대"와 합해져야만 전체적인 인간으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비세속적 자아는 자신의 목적지가 어느 곳인지 알고 있으나 세속적 자아는 자신이 가는 목적을 알지 못하고 있으며 길을 가야 하는 것에 불안해하고 있다.세속적 자아는 현실d 22)였다고 말하듯이 그는 학교나 가정이나 마을에서도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이방인이었던 것이다.이러한 자전적인 면을 고려할 때 엘리엇의 초기시는 그 자신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많은 비평가들이 일차세계대전 이후의 유럽의 황폐상과 환멸을 묘사했다고 평한 『황무지』를 두고 자신의 개인적인 불만을 토로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는 시가 시인의 경험뿐만 아니라 자신에 관한 이야기 즉 자신의 사적(私的)인 세계를 노래하기도 하나 시인이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음으로써 시가 비개성화되고 보편성을 얻게 된다고 말한다. 이 말은 그의 작품이 개인적인 정서의 표현이기는 하지만 그 이상의 무엇, 즉 현실에 대한 고찰로 볼 수 있다는 견해를 표현한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그는 시를 하나의 독립된 작품으로 감상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말하여 시를 시인의 사생활과 분리시켜 생각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므로 독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작품은 시대의 환멸과 현대인의 정신풍토를 시화(詩化)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타인으로부터의 고립과 소외의식의 결합은 타인과 사회에 대한 초연함으로 나타나고,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의 적나라한 파악으로 나아가기 쉽다. 수줍고 내성적인 성격을 지니고 근엄한 생활태도를 몸에 익힌 행동력이 약하고 지성이 발달한 시인에게 있어서 현실은 속된 것이면서 동시에 유혹적인 아이러니컬한 대상이 된다.엘리엇의 추구는 현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행한 상태로부터 구해 내어 지복의 상태로 이끄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George Cattaui, Trans. Claire Pace and Jean Stewart, 117). 그런데 엘리엇의 경우 현세의 불행한 상태는 그가 "형이상학 시인들"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다양성과 복잡성을 그 특징으로 하고 있다. 그와 같은 상태에서 개인은 점점 더 자아 속으로 움츠러들게 되어 개인들 사이의 의사소통이 단절되고, 그로 인해 각개인은 소외된 상태에 처하게 된다. 엘리엇그는 여인들을 만나 진실로 의사소통을 이루는 관계를 맺고자 하나 현실적으로 그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좌절하고 만다. 그는 여인들이 단지 육체적인 쾌락만 제공할 수 있을 뿐이고 의사소통을 통한 소외의 극복과 현실의 구원에 도움을 줄 수 없으리라는 예감(豫感)에 불안해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어떻게 이야기의 서두를 꺼낼까 하고 망설이면서 외로운 사내들의 이야기를 해볼까 하고 생각한다.화자가 여인들에게 어떻게 말을 꺼낼까 하고 망설이는 장면에서 이 작품의 서두에 나온 거리풍경이 보다 상세히 묘사된다.황혼에 좁은 길목을 가서창으로 내다보는 샤쓰바람의 외로운 사내들의파이프에서 피어오르는 담배연기를 나는 보았다고나 할까? (70-2)Shall I say, I have gone at dusk through narrow streetsAnd watched the smoke that rises from the pipesOf lonely men in shirt-sleeves, leaning out of window?여기의 좁은 길은 앞에서 나온 싸구려 일박 여인숙과 지저분한 식당이 위치해 있는 거리이다. 이 거리에 사는 사람들은 「황무지」에서 황무지의 주민들로 발전하는, 현실에서의 탈피를 싫어하는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세계"의 사람들이다. 창가에 기대어 단지 방관자적인 삶을 영위하는 이들은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고, 현실로부터 적극적으로 도피하지도 않는다. 이 사람들은 사회로부터도 소외된 외로운 사람들로서 그들의 삶은 담배연기가 아무 자취도 남기지 않고 공중에 흩어지듯이 무가치하고 공허하다. 프루프록도 지금까지 이와 같은 공허한 삶을 살아왔는데 이제는 삶의 방식을 바꾸어 볼까 하고 생각하지만 아직 결심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이는 그에게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그는 이제 방관자적인 삶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아무 의식조차 없는 하등동물과 같은 무의미한 삶을 영위하기를 염원하기조차 한다. 그가 속해 있는 세계에는 현실의 잡다한 것들이 있을 뿐이있다.
자유에 대해서━━━━━━━━━우린 생활 속에서 '자유'라는 말을 쉽게 듣고, 또 말하곤 한다. 그럼 자유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우리가 생활 속에서 무심코 말하고 있는 '자유'란 말의 정확한 의미에 대해 누군가 물어온다면 쉽게 대답하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된다. 우린 자유를 생각할 때 그것의 이미지는 쉽게 떠올리게 되지만 그것을 상대방에게 설명하려할 때 다소 어려움을 느끼게된다고 생각하며 먼저 '자유'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우리가 '자유'에 대해 알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으로부터 자유로운가를 먼저 알아야한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속박이나 장애나 부담을 거론해야만 한다. 속박은 우리의 욕망과 대립하는 것이며,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려는 욕망이 전혀 없다면, 우리는 속박의 의미를 거의 알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속박이 가해지다가 없어졌을 때,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느끼게된다. 다음은 학자들의 자유에 대한 정의이다. 학자들이 말하는 자유에 대해 알아보고 자유에 대해 좀더 깊이 들여다보기로 하자.둔스 스코투(Duns Scotus) - 자유는 의지의 완성태(完成態)이다.헤겔(Hegel) - 자유는 변형된 필연성이다.코헨(Cohen) - 자유는 의지의 힘이다.파울젠(Paulsen) - 인간의 자유는 정신의 지배이다.보네(Bonnet) - 자유는 정신이 그 의지를 실행하는 능력이다.하이데거(Heidegger) - 자유는 존재하는 것을 존재하는 것으로서 드러내는 데 참여하는 것 이다. 스피노자(Spinoza) - 자유로운 인간은...이성의 명령에만 따라서 사는 사람이다.쉘링(Schelling) - 자유란 존재의 적나라한 자연 법칙을 통해서 규정되지 않은 자를 절대적 으로 규정하는 것일 뿐이다. 엥겔스(Engels) - 자유는 자연적 필연성에 바탕을 두고 우리들 자신과 외적 자연을 통제하 는 것이다. 에리히 프롬은 그의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소극적 자유와 적극적 자유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소극적 자유 : 물리적 억압으로부터의 자유주의의 폭력을 경험하며 자유에 대한 인간의 갈망이 얼마나 절실한지 깨닫고 있었다. 자유로의 탈출과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처절했고, 경우에 따라서는 시대의 희생으로 목숨을 잃는 상황도 벌어졌다. 종교적 인습을 거부했던 종교 개혁자, 인종 차별의 장벽에 정면으로 대항했던 자유주의자, 가난과 폭압적 정치 권력에 당당히 맞선 근대 혁명가, 그러나 이들이 자유를 위해 부르짖었던 투쟁의 목소리는 어느덧 많은 이들의 귓가에서 멀어지고, 현대라는 거대한 체제 속에서 대중들은 자신의 안녕과 일상의 소심함에 안주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에겐 완벽한 자유가 주어져 있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그 소중한 자유를 어떻게 누려야 하는지 모르고 삶을 소비하는 현상이 팽배해지고 있다.·현대에서의 또 다른 속박과 굴레개인의 자유와 사회 체계를 분석 비판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려는 프롬의 이론적 노력은 인간이 자연이나 타인이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감과 소외감에서 출발한다. 거대한 도시에 매몰된 개인, 산처럼 높이 솟은 빌딩, 하루에도 수없이 변하고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든 신문의 큰 표제 등등….이러한 사실이 개인이 스스로를 지배할 수 없는 차원에 직면하게 되는 한 무리의 표현이다. 개인은 거대한 사회와 비교하면 극히 작은 미립자에 불과하다. 그러나 개인의 고독과 무력한 감정을 보통 사람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 의식 못하고 있음이 한 순간 그에겐 너무나 무서운 고독감으로 다가온다. 이러한 설명은 전체의 집단에 종속되어 기계처럼 살아가는 물리적 종속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물리적 속박에서 인간은 오래 전부터 벗어나 있다. 이는 전체주의와 닫힌 이념들 속에서 갈망했던 고전적 의미의 소극적 자유와는 구별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롬은 무슨 자유를 또 얘기하려는 것인가. 라는 공간에서 프롬은 또 하나의 교묘한 속박과 굴레를 발견한다. 그것은 분절되고 거대화된 사회에서 개인이 느낄 수밖에 없는 고독과 무력감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주어진 자유마저 불안과 공포를 느끼는 원인이 무엇인지 와 연관시켜 생각해 보자.빨갛고 노랗게 물들인 머리! 유아적인 모양의 머리핀! 배꼽을 드러낸 쫄티! 길거리를 휩쓸고 다니는 찝어진 청바지! 유행이란 이름 하에 이루어지는 획일화. 이렇듯 어쩌면 젊은이가 개성이라고 내세우는 방식은 또 다른 획일화의 한 방식일지 모른다. 그들은 나름대로 자기가 꾸미고 싶은 대로한다고 말을 하며 그것이 개성을 살리는 방식이라고 자신만만하게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들이 주로 보는 잡지들을 들여다보면 그들의 말이 모순임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를 모방하고 있으며 그것을 이끄는 것은 텔레비전이나 신문, 잡지 등의 언론 매체들이다. 누군가 유행을 불러일으키면 삽시간에 마른 가을날 산에 불 번지 듯 하는 것이 개성이라고 한다면 어떤 디자인 어떤 색채 어떤 물건에 대해 자신만의 의미가 있어야 하며 그것에 대해 자신이 만들었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프롬이 이야기하는 민주주의 국가에 널리 보급되는 강제적인 획일화의 모습이다 .누구나 자신이 원하는 대로 입고 꾸밀 수 있는 자유가 우리 사회에서는 보장되어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 자유를 원하기 보다 누군가와 닮은 모습에 길들여진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 무한한 군중들 속에서 자신 혼자만 떨어져 있다는 엄청난 고독감과 무력감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프롬은 20세기 인류정치의 냉전적 질서가 개개의 인간에겐 이상적 자유를 부여하지 못했음을 역설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현대의 무력감은 개인의 힘은 물론 어떠한 정치 질서나 거대 담론으로도 극복될 수 없다. 프롬은 이러한 현대적 국면에서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으로서 에 기초를 둔 만족스러운 인간 관계의 창조를 강조하고 있다. 생산적 사랑은 언제나 상호의 보호, 책임, 존경 및 이해를 내포하고 있는 적극적 자유로의 중요한 토대가 되는 것이다. 제도와 현대문명의 질곡 속에서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 남을 수 있는 길은 결국 인간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프롬의 모든 저서의다. 그래서 '인간 정신의 이해는 그 실존 조건에서 생겨진 욕구의 분석에 기초를 두어야 한다.'고 프롬은 주장했다. 그리하여 프롬은 인간의 실존적 조건에서 야기되는 특수한 욕구를 네 가지로 분류하였다. 첫째는 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욕구, 둘째는 초월하고자 하는 욕구, 셋째는 정착하고자 하는 욕구, 넷째는 동일시의 욕구이다.관계를 가지고자 하는 욕구는 자연과의 동물적인 기본적 유래로부터 분리되었다는 엄연한 사실에서 나온 것이다. 동물은 그가 처한 조건에 맞도록 자연적으로 갖추어져 있는 반면, 인간은 추리력과 상상력으로 인해서 자연에 대한 밀접한 상호 의존성을 상실했다는 것이다. 동물이 가진 자연과의 본능적인 유대 대신에 인간은 에 기초를 둔 만족스러운 그 자신의 세계를 창조해야 한다. 생산적 사랑은 언제나 상호의 보호, 책임, 존경 및 이해를 내포해야 한다. 초월을 하고자 하는 충동은 인간이 그의 동물적 성질을 넘어서 향상하며 동물로 머무르는 대신에 창조적인 인간이 되겠다는 인간의 욕구를 말한다. 만약 그의 창조적 충동이 좌절되면 인간은 파괴자가 된다. 프롬은 사랑과 미움은 상반되는 충동이 아니고 두 가지 모두가 동물적 성질을 초월하겠다는 인간의 욕구에 대한 대답이라고 말했다. 동물은 사랑도 증오도 못하지만 인간은 그러한 것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자연에 정착하기를 원하며 세계와 불가결한 한 부분이기를 원하며 소속감을 갖고자 한다. 어린 시절에는 어머니에게 정착되어 있지만 이 관계가 아동기 이후에도 계속될 때 이것은 불건전한 고착이라고 한다. 인간은 만족스럽고 건전한 정착을 다른 남자나 여자들과의 우애에서 찾는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개인적 주체성을 갖고자 하며 독특한 개인이고자 한다. 만약 인간이 자신의 창조적 노력을 통해서 이 목표에 도달하지 못할 때, 자기 자신을 다른 사람이나 집단과 동일시함으로써 자기 특성을 갖는다. 노예 즉, 인간은 자기 주인과 동일시한다. 시민은 그 국가와, 종업원은 그의 사회와 각기 동일시한다. 이런 경우 동일감은 누구에겐다고 느꼈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의 낡은 적(물리적 억압)으로부터는 해방되었으나 우리는 그것과는 다른 성질을 가진 새로운 적(정신적 억압, 즉 집단 속에서의 소외감, 반복되는 일상에서 느낀 권태 등)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그 새로운 적(정신적 억압)은 본질적으로 외부적인 속박이 아니라 개성(personality)의 자유를 충분히 실현하는 일을 방해하는 내부적인 요소이다. 예를 들면, 우리는 신앙의 자유가 자유의 궁극적인 승리라고 믿는다. 그러한 신앙의 자유는 사람들이 자기의 양심에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을 허용치 않았던 교회와 국가 권력에 대한 승리이긴 하지만, 현대인은 자연 과학적 방법에 의해서 증명되지 않는 사실을 믿는 내면적(內面的)인 능력도 크게 상실했다는 점은 제대로 이해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우리는 언론의 자유가 자유의 최후 단계라고 느낀다. 비록 언론의 자유가 `낡은' 속박에 대한 싸움에서 가장 중요한 승리이긴 하지만, 현대인은 `자기'가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의 대부분이 누구나 생각하고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즉, 현대인은 독창적으로 생각하는 능력, 즉 자기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는데, 바로 이러한 독창적인 사고 방식이야말로 언론의 자유가 필요하다는 주장에 의미를 부여해주는 것이다. 또 우리는 그에게 무엇을 하라, 또는 무엇을 하지 말라고 지시하는 외적 권위로부터 해방되어 자유롭게 행동하게 되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론이나 상식과 같은 익명(匿名)의 권위가 갖는 역할을 경시하고 있다. 사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기대에 일치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하고 있는가 하면, 또한 그러한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똑같이 심각하게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여론과 상식의 힘은 극히 강력하게 된다. 바꿔 말하면, 우리는 `외부에 있는' 권력으로부터 한층 더 자유롭게 되는 데 마음이 황홀해져 `내부에 있는' 속박과 강제와 공포에 대해서는 잘 모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