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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역사란 무엇인가 평가B괜찮아요
    REPORTE.H.Carr의 1. 역사가와 사실역사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우리들의 시대적 관점을 반영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를 어떻게 보는가 보다 광범한 문제에 대한 우리들 대답의 한 부분이 된다. 19세기의 역사가들은 사실을 존중했는데 그 중 랑케는 역사가의 과제는 단지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과학으로서의 역사를 주장하는 실증주의자들은 우선 사실을 확인하고 난 다음에 사시로부터 결론을 이끌어내라고 했다. 또 경험주의자들은 역사는 확인된 사실의 집합으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역사적 사실이란 무엇인가? 이것은 어떤 역사가에게나 공통된 기초적 사실이 있고, 이러한 사실이 역사의 뼈대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역사가의 주된 관심은 이 사실에 있지는 않다. 즉, 모든 역사가에게 공통된 이른바 기초적 사실은 보통 역사가가 사용하는 원료에 속하며 역사 자체에 속하지는 않는 것이다. 또한 사실을 확정해야 할 필요는 그 사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의 결정에서 비롯된다. 역사가의 해석으로부터 독립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역사적 사실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즉, 사실은 해석의 문제에 봉착한다. 우리들이 알고 있는 상은 우리들을 위해 이미 선택되어 있고 결정되어 있다. 이것은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특정한 견해에 물들고 이 견해를 뒷받침해주는 사실들만이 보존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들에 의해 선택되고 결정된 것이다.19세기의 사실숭배는 문서숭배에 의해 완성되고 정당화되었다. 사실이라는 것은 그것이 문서에서 발견되든 안되든 역사가의 손을 통해 처리된 다음에야 비로소 역사가들에 의해 이용될 수 있다. 물론 사실과 문서는 역사가에겐 필수적이다. 그러나 사실이나 문서를 맹목적으로 숭배해서는 안 된다. 사실이나 문서가 스스로 역사를 형성하는 것은 아니다. 19세기의 역사관은 자유방임의 경제학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 역사의 사실 그 자체는 보다 높은 것을 향해 나가는 자비롭고 틀림없이 무한한 진보라는 사실을 스스 볼 수 있고 과거를 이해할 수 있다고 했다. 콜링우드는 역사가의 기능은 과거를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과거로부터 스스로를 해방시키는 것도 아니며 현재를 이해하는 열쇠로서 과거를 지배하고 이해하는 것이다라고 했다.이렇게 되다가 역사가들은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다. 그것은 역사상의 사실을 결정할 때 해석이 필수적 역할을 한다고 해서 또는 현존하는 해석은 어느 것이나 전적으로 객관적인 것은 아니라고 해서 어떤 해석이나 모두 좋다든가, 역사상의 사실은 원칙적으로 객관적 해석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즉, 역사가는 그의 해석에 따라 사실을 형성하고 그의 사실에 따라 해석을 형성하는 끊임없는 과정에 매달려 있다. 한 쪽을 다른 한쪽의 우위에 놓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2. 사회와 개인사회가 먼저인가 개인이 먼저인가는 우문이 아닐 수 없다. 사회와 개인은 분리될 수 없다. 개인화의 증대는 발달된 근대 사회의 필연적 산물이고 사회 활동의 구석구석까지 들어간다. 그러나 이런 개인화의 과정과 사회적 힘 및 결합력의 증대 사이에 대립관계를 설정하는 것은 잘못이다. 사회의 발달과 개인의 발달은 병행하며 서로를 제약한다. 문명인도 미개인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의해 효과적으로 형성되면 이것은 사회가 문명인에 의해 효과적으로 형성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이런 역사적 진리는 개인주의 숭배시절에 의해 가려져 있었다. 개인주의는 19세기의 공리주의의 기초였다. 자본주의 초기 단계에는 생산과 분배의 단위는 주로 단일한 개인의 손에 장악되어 있었으므로 새로운 사회질서의 이데올로기는 사회질서에 있어서의 개인 창의력의 역할을 강력하게 강조했었던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의 지식은 그의 배타적인 개인적 소유물이 아니다. 많은 세대에 걸쳐 여러 사람들이 역사적 지식의 축적에 참여했을 것이다. 역사가는 역사의 한 부분이다. 지금 역사가가 들어 있는 지점이 과거에 대한 그의 시각을 결정한다. 위대한 역스이다. 이 문제에 대해 카는 역사는 상당한 수준의 수의 문제라고 했다. 또 개별적인 인간의 행동은 행위자나 심지어 어떤 다른 개인에 해 의도되거나 욕구되지 않는 결과에 이르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역사의 사실은 사회에서의 개인 상호간의 관계에 대한 사실이고, 또한 개인의 행위로부터 그들 자신이 의도마던 결과와는 다른 또는 때로는 정반대되는 결과를 일으키는 여러 가지 사회적 힘에 대한 사실이다. 역사가가 연구해야 할 것은 행위의 배후에 놓인 것이다.역사에서의 반역자의 역할은 위인의 역할과 비슷하다. 역사에 있어서 위인은 개인이지만 뛰어난 개인이므로 동시에 탁월한 중요성을 가진 사회적 현상이다. 어떤 시대의 위인은 그의 시대의 의지를 표현하고 그 시대를 향해 원하는 바를 전해주고, 그 의지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의 행위는 그의 시대의 핵심이고 본질이다. 곧 그는 그의 시대를 실현한다. 위인을 역사적 과정의 산물이고 대행자이면서 동시에 세계의 양상과 인간의 사상을 바꿔놓는 사회적 힘의 대표자고 창조자가 되는 뛰어난 개인으로 인정하여야 한다. 역사가와 그의 사실들의 상호작용이라는 상호과정은 추상적이고 고립된 개인 사이의 대화가 아니라 오늘의 사회와 어제의 사회사이의 대화다. 부르크하르트는 역사는 어떤 시대가 다른 시대 속에서 주목할 만하다고 생각한 일들의 기록이라고 했다. 다시 말하면 과거는 현재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이해될 수 있고, 또한 우리는 과거에 비추어 볼 때 비로소 현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3. 역사와 과학과 도덕18세기 말에 과학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식과 인간 자신의 생리적 성질에 대한 인간의 지식에 공헌을 했는데, 이 시기에 과학이 사회에 대한 문제에도 관심을 보여 사회과학이라는 개념이 나왔다. 사회과학의 하나로 역사라는 개념은 19세기를 통해 발달되었고, 자연세계를 연구하는 방법인 과학이 인간의 문제의 연구에도 적용되었다. 다윈은 역사를 과학으로 만들었는데, 과학을 정적인 것, 무시간적인 것이 아니라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다루게 영향을 미친 한도 안에서만 관심을 갖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가는 그의 책에 등장하는 개인들의 사생활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리는 일탈을 해서는 안 된다. 역사가는 공적 행동에 대한 도덕적 판단을 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재판관이라는 생각보다는 과거의 개인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 제도, 정책에 대해 도덕적 판단을 내린다는, 보다 어렵지만 보다 유익한 문제를 살펴야 한다. 역사는 투쟁 과정이고 이런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결과는 우리가 그것을 좋거나 나쁘다고 판단을 하던 어떤 집단에 의해 다른 집단이 희생됨으로 해서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이루어 진 것이다. 패배한 자는 대가를 지불한다. 즉 한 쪽의 행복의 증대와 다른 쪽의 희생을 균형 잡아줄 척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한 쪽의 행복이 다른 쪽의 희생을 정당화한다는 것은 보수적이고 급진적인 결론인 것이다. 추상적인 도덕적 관념에 특수한 역사적 내용이 주어지는 과정이 역사적 과정이다. 역사적 행위를 판단할 수 있는 추상적이며 초역사적인 기준을 세운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어느 쪽이나 불가피하게 나름대로의 역사적 조건과 소망에 맞는 특수한 내용을 이런 기준에서 읽어내려고 하는 것이다. 진정한 역사가는 모든 가치의 역사적 제약성을 인정하는 역사가이며, 자신의 가치에 역사를 넘어선 객관성을 요구하는 역사가는 아니다. 역사는 역사 이외의 어떤 것에 근본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도 않으며, 이것이 역사를 다른 과학으로부터 구별하지도 않을 것이다.카는 역사를 과학이라고 하는데 반대하는데 그는 이른바 두 문화의 균열을 정당화하고 영속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균열 자체가 이미 과거에 속하는 영국 사회의 계급적 구조에 바탕을 둔 낡은 편견의 소산이다. 따라서 우리들의 역사의 수준을 높이는 것, 역사를 보다 과학적으로 만드는 것,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에 대한 우리들의 요구를 더욱 엄격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역사가와 자연과학자는 무엇을 설명하려고 하는 근본적인 목적에서는 또한 물음을 제시하고 대답을 하는 근본적 절차에 있어서는 동을 보면 모든 사건에는 하나 또는 몇 가지 원인이 있으며, 하나 또는 몇 가지 원인에 어떤 변화가 없는 한, 어떠한 변화도 일어날 수 없다고 하는 신념이다. 결정론은 역사의 문제가 아니라 모든 인간 행동의 문제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은 원칙적으로 확인될 수 있는 원인에 의해 결정된다고 정제하지 않으면 일상생활은 불가능할 것이다. 정상적인 성인이 자기 자신의 인격에 대해 도덕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은 사회생활의 한 조건이다. 그러나 책임을 물었다고 해서 행동에 원인이 없다고 인정한 것은 아니다. 원인과 도덕적 책임은 그 범주가 다르다. 역사가도 인간의 행위에는 원칙적으로 확인 될 수 있는 원인이 있다고 믿으나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는다.그런데 최근에는 역사는 어느 모로 보나 우연의 장이며 우연의 일치에 의해 결정된 전적으로 우발적인 원인의 소치라고 밖에 볼 수 없는 사건의 연속이다라는 주장이 크다. 역사에 있어서의 이른바 우연은 역사가가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는 인과의 연쇄를 중단한다. 마르크스는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을 세 가지로 말했다. 첫째, 역사에 있어서의 우연은 매우 중요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사건의 과정을 촉진하거나 지연시킬 수는 있지만 사건의 과정을 근본적으로 변경시키지는 못한다. 둘째, 하나의 우연은 다른 우연에 의해 상쇄되고 따라서 결국 우연 그 자체를 말살시킨다. 셋째, 우연은 특히 개인의 성격 속에서 구체화된다. 역사에 있어서 우연의 문제의 해결을 전혀 다른 사고의 차원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역사는 역사가에 의해 사실이 선택되고 정리되어 역사적 사실로 될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어떤 사실이든 그 적합성과 중요성이 인정되면 곧 역사적 사실이라는 지위로 승진되는 것이다. 역사가와 원인의 관계는 역사가와 사실의 관계와 마찬가지로 이중의 상호적 성격을 갖는다. 원인은 역사적 과정에 대한 역사가적 해석을 결정하고, 동시에 역사가의 해석은 원인의 선택과 정리를 결정한다. 여러 원인들의 상하관계, 또는 한 묶음의 원인, 또는 다른 원인의 상대 한다.
    인문/어학| 2002.07.23| 5페이지| 1,000원| 조회(1,0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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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원잡극 평가B괜찮아요
    1. 원 잡극의 발생배경중국 북쪽 지방에 원나라가 칭기즈칸의 출현으로 강성해지고, 금나라가 망하면서 잡극이란 새로운 극종이 출현하여 성행하기 시작한다. 이름은 같지만 송의 잡극과는 완전히 다른 형식의 것이었다. 음악적인 특징을 바탕으로 하는 희문을 남곡이라 부르는 반면 이 잡극을 북곡이라고도 부른다. 이 잡극이 갑자기 원나라에 성행케 된 것은 만주족인 금나라가 중국 북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발전시킨 연극이 그대로 원나라로 들어와 연출이 이어졌기 때문인 듯하다. 지배자인 원나라 왕족과 귀족들을 즐겁게 하기 위하여 금나라 유민들과 지식인들이 잡극을 창작하여 공연하여 잡극은 크게 성행하였을 것이다. 또한 여진족과 몽고족은 몇몇 한족 지주와 결탁해 대중의 저항을 공동으로 진압하였다. 따라서 대다수가 한족인 대중들은 불만을 품을 수밖에 없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현실의식이 강한 잡극이 생겨났다. 또 금 왕조는 양지구를 그들의 통치기반으로 삼아 인구를 이주시켰는데 각종 기예인이 이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그러나 이 이역의 안정과 번영은 잡극이 형성하고 발전할 수 있는 물질적 조건을 제공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미 잡극이 발생하는데 필요한 제반여건이 문예자체에 구비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금의 원본은 이미 각종 기예를 융합하여 인물 고사를 연출할 수 있는 성숙한 단계에 접어들었다. 북 잡극은 이를 직접적으로 계승한 것이다. 물론 북 잡극은 원본만을 직접 계승한 것은 아니다. 기타 각종 기예의 예숭을 광범위하게 흡수했는데 제궁조의 영향은 지대했다. 끝으로 잡극의 발전에는 문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몽고가 금을 멸한 뒤 과거를 폐지하자 지식인의 입신양명의 길이 단절되어 일부 지식인들은 예인을 위해 잡극을 쓰면서 불만을 달래기도 했는데 이 때 오로지 예인을 위해 대본을 써주는 조직인 서희도 출현했다. 그러나 원나라가 약해진 말엽에 잡극이 귀족의 놀이도구로 봉건예교를 선전하는 용구로 전락하는 경향을 보여 사람들은 잡극을 멀리하고 옛 희문을 되살리기 시작했다. 이 때 나온 희문이 오대전기이다.원잡극은 민간에서 생겨난 연극이라 통속성을 지닌 반면, 중국을 지배한 몽고 통치자에게 봉사한 면도 있어 귀족성과 이족성을 아울러 지닌, 독특한 희곡이다.2. 원잡극의 작가와 작품왕국유는 그의 에서 원잡극의 시대를 세 시기로 나누고 있다.■ 몽고 시대 (약 1234~1279년)몽고 시대는 원잡극이 생겨났고 대표적인 작가와 작품들이 쏟아져 나온 시기이다. 몽고 시대의 작가들은 대부분 중국 산서, 하남, 산동이북의 북방 사람들이어서 잡극이 북곡이라는 것을 보태어 준다. 이 시대에 작가들은 무대상연에 관심을 지닌 부류와 희곡을 전제로 잡극을 지은 사람들로 나눌 수 있는데 전자는 작품에 서민들의 생활과 감정을 반영하기에 힘써거 이들의 문장은 당시 사람들의 구어로 이루어지고 속어나 방언의 사용도 피하지 않았다. 따라서 여기에는 민중의 애환이 담겨있고, 사회문제가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고 대표적으로 관한경, 양현지, 무한신, 고문수를 뽑을 수 있는데 관한경은 직접 연출을 하기도 했다. 희곡을 전제로 잡극을 지은 사람들은 고전문학에 대한 소양이 풍부한 사람들이었는데 왕실보, 백박, 마치원, 오창령, 이수경등을 꼽을 수 있다.■ 일통 시대 (약 1280년~1340년)일통 시대는 원나라의 세력이 대단했던 시기인데 잡극은 반대로 이속성을 잃게 되어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는 듯했다. 이 시기의 작품은 세련된 문장을 구사하고 있으나 몽고시대의 것과 같은 자연스럽고 생동하는 맛은 찾아보기 힘들다.■ 지정 시대 (약 1341년~1367년)잡극의 쇠멸기라 할 수 있고 희문이 대두되었다.거의 170편의 원잡극의 대본이 남아있다. 그 중요한 내용은 전체적으로 중국 다른 희곡과 다를 바 없다. 내용에는 여자 상대가 창기이거나 상류층 여인인 애정 고사도 있고, 신비한 존재나 은둔자, 반역영웅, 폭군, 부패한 관료에 관한 것도 있으며, 남자들 사이의 우정을 언급한 것도 있다. 또한 역사적인 삽화, 특히 과거의 전쟁을 많이 다루었다. 또 다른 중요한 주제는 재한이었는데 대개 적어도 두 번의 재판이 있고, 두 번째 재판관이 첫 번째 판결을 번복하고 정의를 되찾는다.이 시대의 작가들은 거의 무명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다. 잡극이 본래 민간예술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면, 지금까지 이름도 알려지지 않은 무수한 작가들이 수많은 작품들을 창작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3. 원잡극의 조직■ 구성잡극의 구성은 남희의 구성보다 훨씬 엄격했다. 원잡극의 형식상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한 작품이 4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라는 것이다. 이는 송 잡극이나 금 원본이 4고인 것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만약 극정이 이로 부족하면 4절을 보태어 2본의 작품을 이룬다. 4절은 보통 발전 -전개 -위기- 대단원이라는 극 구조를 나타내며, 극의 최고조는 제3절에 흔히 설정된다. 4절 이외에 설자라는 짧은 대목이 보태지기도 하는데 이는 작품 앞에서 본제로 들어가기 전에 설명해 주는 것이 보통이나, 가끔 절과 절 중간에 끼어 앞 뒤 절의 극정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남희와는 대조적으로 잡극은 일반적으로 삽화적이지 않아서 다른 절들과 분리하여 한 절만을 공연하는 것은 연극적인 의미가 없다.원잡극은 산문과 운문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산문부분은 독백이나 대화로 이루어졌으며, 극 중의 어떤 인물에게나 모두 허용되었다. 운문 부분은 노래로 불렀는데 이런 사(詞)와 곡(曲)에는 잡극의 표현과 감정이 담겨있었다. 중국연극의 3요소를 창, 과, 백이라 하는데 원잡극을 비롯한 중국의 전통연극에서는 창이 가장 중시된다. 그런데 원잡극에 있어서는 극의 주인공, 곧 남자 주인공일 경우에는 정말(正末), 여자 주인공일 경우에는 정단(正旦)만이 시종 혼자서 노래부르는 것이 원칙이다. 이 노래에 대해 다른 출연자들은 백으로 응대한다. 정말이 노래하는 작품을 말본, 정단이 노래하는 작품을 단본이라 부른다. 남희에서처럼 잡극은 연곡체를 따랐는데, 그것은 가사에 곡을 붙인 것이 아니고 곡에 가사를 붙였기 때문에 음악이 사의 길이를 결정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각 절 전체를 통해서 한 개의 운만이 허용되었는데, 운자의 평측법은 중국시의 초기 형태보다는 덜 제한적이었다.■ 악곡원잡극의 1절은 짧은 노래인 이 여러 곡 모여 이루어진 조곡인 하나의 으로 이루어진다. 사용된 악조는 수당대의 연악28조를 근거로 하고 있으나 실지로는 정궁, 남려궁등의 12개 궁조이다. 그리고 잡극의 각 절에는 관례상 가장 흔히 쓰이는 악곡들이 정해져 있었다. 주된 음악 반주는 현악기, 특히 비파로 했다.■ 백(白)빈백이라고도 부르며, 연극에서의 대화와 독백을 총칭한다. 정장백. 수장백. 중국 고정극에는 창이 위주이고 백은 경시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관한경처럼 백의 운용을 통해 극의 효과를 크게 올린 작가도 있다.
    예체능| 2002.07.23| 4페이지| 1,000원| 조회(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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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 중국고대의가무희
    1. 가무희란 무엇인가?중국에는 노래와 춤을 위주로 하는 중국 고유의 양식인 희곡과 서구로부터 받아들인 대사를 주요수단으로 하는 화극, 두 가지의 연극형태가 있는데 이를 합쳐 희극이라 한다. 또한 희극은 소희와 대희로 나뉘어 지는데 소희는 옛날 중국에 유행하던 산악이하 여러 놀이 또는 연극을 가리키며 가무희가 중심을 이룬다. 대희는 북송 말에 생겨난 희문을 비롯하여 원대의 잡극, 명대의 전기, 청대의 화부희 등을 가리킨다. 소희는 민간의 종교나 계절제와 관련이 깊고, 민중의 생활에서 우러난 것이기 때문에 어울려 즐기는 오락적인 놀이로서의 성격도 두드러졌다. 가무희는 은나라 이전부터 무습이나 민간신앙에 의해 소망을 빌고, 불행이나 역귀를 쫓아낼 때, 소원이 이루어져 감사하는 의식을 행할 때 생겨난 것이었는데 신을 상징하기 위해 가면을 사용하여 가무희는 가면놀이가 중심을 이루었다.가무희는 한 마디로 노래와 춤으로 엮어지는 일종의 놀이라 할 수 있다. '가무희에는 대면 . 발두 . 답요낭 . 굴뢰자 등의 희가 있다.' 라고 권29에 나와 있으나 중국에 가무희라는 특수한 종류의 놀이나 연극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산악'이나 '나'같은 종교의식, 옛 민간의 '가무'와 '잡기'를 비롯하여 한대에 성행한 '각저희' , '참군희' , '골계희','백희'속에 섞여 가무희는 연출되어 왔다. 또한 그 어원을 살펴보면 가무희는 무술을 겨루는 일, 재주를 부리고 겨루는 일, 우스개놀이, 노래와 춤, 인형극, 연극 등 여러 가지 연예가 모두 연관을 갖게 되는 것이다.가무희는 궁에서도 민간에서도 온 국민이 좋아하고 즐기던 연예였기 때문에 중국의 전통문화를 잘 대변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원대 이후 대희에 가려서 그 중요성을 인식받지 못했다. 그런 이유에는 가무희가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하게 발전되어 온 연희인 데다가 기록마저도 별로 없어 그 실상을 올바로 이해하기가 힘들기 때문이기도 하다.2. 가무희의 특징1) 시가와 음악과 춤을 그 미학기초로 삼으며, 노래와 춤으로 간단한 이야 전승하여 행해지게 한 가무희와 관계가 깊은 행사였다. 특히 12월의 나는 민간에도 널리 행해졌다. 왕국유의 에서 방상씨가 곰가죽을 뒤집어 쓰고 라는 말이 나와있는 것을 보아 여기에서 가면이 시작된 듯하다. 고대 연말의 제의로는 납과 사도 있었다. 상(商)나라 이전에 가면이 존재하였고 그 가면은 제의와 가면희에 쓰이던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기( )의 경우로 보아 요순 때에도 가면희인 가무희는 이미 악의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왕국유는 에서 중국희극의 근원인 가무가 고대의 무격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하였다. 무무(巫舞)는 춤을 추고 노래하며 신을 내리게 하고, 신에게 바람을 나타내며, 다시 그 바람을 이루어 주도록 유인해야하고, 일이 끝난 다음에는 신을 전송해야 하기 때문에 가무희적인 성격을 띠지 않을 수가 없게 된다. 그러나 주(周)나라로 들어와서는 주공이 제례작악함으로 무풍이 자취를 감추게 된다. 그러나 에 보면 사무와 남무,여무에 관한 기록을 볼 수 있는데 이들은 사람들의 병을 고치고 미래를 예언하거나 꿈을 점쳐주는 역할도 했다. 관무의 활동이 이러하니 민간의 무격은 역할과 가무가 더욱 다양했으리라 여겨진다. 땅의 신에게 풍년을 비는 '사'는 민간에서도 성행되었을 것이다.은나라 말엽에 조희와 가무를 전문으로 하는 우( )가 있었다. 우의 기능은 우스개짓을 위주로 하면서도 노래와 춤을 겸하여 했다.4. 진한(秦漢)의 가무희춘추전국의 정치적 혼란은 예악제도의 붕괴를 가져와 정악은 날로 미약해졌다. 특히 전국시대에 강성했던 초의 영향이 한나라 문화에 크게 작용했는데 이때 나온 것이 '초가'이다. 초가에는 춤도 곁들여져 있었다.진시황은 분서를 하면서도 의약, 복서, 종수와 관계되는 책은 제외시키는데 의약, 복서는 무와 관계가 많은 책들이어서 진나라 때에는 무풍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민간에 성행한 여러 잡신들의 제사들도 무와 관계가 있고 거기에는 여러 가지 가무희가 쓰였다. '영성'은 농사를 관장하는 신이어서 풍년을 비는 제사를 드리는데본래의 뜻으로 되돌아가 가무희와 관계없는 것으로 되었다. 평락관에서 연출되었던 '각저지묘희'에는 사람의 힘과 재주로 하는 여러 가지 기예, 짐승들의 재주부리기, 요술, 노래, 음악과 춤, 연극 및 환상적인 무대장치와 연출효과등 기술이 총동원되었던 듯하다. 사마상여의 에도 당시의 음악과 춤을 서술한 대목이 있는데 이 중 파유무는 배우, 주유, 적제지창 등 반수 이상은 가무희 또는 골계희였을 것이다. 또한 서역을 중심으로 들어온 호악은 한나라에 유행하여 한대 가무와 가무희의 발전에도 자극제가 되었다. 즉, 한대의 각저지희의 발달은 서역과 남만 및 동이등 외국음악의 영향도 크게 받은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중국 고대의 가무희는 한 가지만이 연출되지 않고 여러 가지 다른 가무 잡기와 기예들이 함계 공연되었다._가무희■ 동해황공 - 붉은 칼과 월인의 주법으로 흰 호랑이를 물리치려다 잡아먹히는 내용의 가 무희. 술에 취한 것이 그 원인이데 이를 표현하기 위해 가면을 썼을 것이다.■ 포인잡부 - 여가 주인공 노릇을한 가무희. 후에 요동요부, 농가부인, 답요낭의 선성이 되 었을 것.■ 파유무 - 이인(판순만이)이 여러 번 적진을 함락시켰는데 그들 풍속은 노래와 춤을 좋아 하는 것이였다. 고조가 이를 보고 무왕이 주를 정벌하는 노래이다하여 악공들에게 익힌 것이 파유무이다. 파유무는 상당히 긴 정절을 표현하는 가무였을 것.■ 공막무 - 건무 또는 공막무는 유명한 홍문지연을 춤으로 표현한 것.■ 관동유현녀 - 아버지의 원수를 갚은 용감한 여인의 이야기를 춤과 노래로 연출했던 가 무희.■ 해중탕극■ 목후무와 구투무 - 극히 우스꽝스러운 사람이 가면을 쓰고 하는 가무희.■ 참군회 - 당대에 성행한 참군회는 후한때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단순한 골계희였다.■ 괴뢰희 - 인형극. 괴뢰희는 상가악과도 불가분의 관계. 육괴뢰.■ 여악 - 기녀.5. 위진남북조의 가무희1) 위진(魏晉)의 가무희■ 산악 - 기악백희. 수괴뢰.■ 우희 - 골계희■ 잡무 - 위나라로 들어오면서 한대의 가무희인.■ 화산기 - 신녀총.■ 신현가 - 무무가이며 가무희적인 놀이의 가사.■ 서곡가 ■ 여아자 ■ 상운악 ■ 호악■ 배가사(난쟁이들이 연출. 주유도. 골계 위주.)와 봉황함서기3) 북조(北朝)의 가무희■ 답요낭 - 주먹코가 달린 추악한 모습의 남편이 술을 마시고 취하여 자기 처를 때리는 내용. 남편은 스스로를 낭중이라 부르는 건달인데 반해 처는 아름답고 노래를 잘하는 데, 남편에게 얻어맞는 처는 괴롭고 억울한 처지를 춤과 노래로 표현하여 사람들의 동 정을 사면서 화창하도록 만들었던 듯하다. 슬픔과 억울함을 호소하는 과정에 설백, 곧 대화도 있었을 가능성이 많고, 주먹코에 술취한 흉악한 모습을 하기위해 가면을 썼을 것이다.■ 난릉왕 - 대면(大面)또는 대면(代面). 난릉왕은 자포를 입고 금띠를 두르고 채찍을 든 장군이 부하를 지휘하며 적을 무찌르는 모습을 형용한 가무희. 난릉왕입진곡. 장군이 썼던 가면이 크고 위엄있어서 大面이라고 부른 듯하다. 代面은 가면과 비슷한 뜻이었 을 것. 난릉왕은 답요낭과 함께 당대에까지 계승되어 성행하고 발전.■ 안악 - 안악은 고사 성분이 적어 가무희라고 하기 보다는 가면희라고만 함이 옳다.■ 민간의 가무희 - 가면희와 창우잡기가 궁전은 물론 민간에서도 유행하였다. 북조에 와 서는 호악과 호무를 비롯한 외국 음악과 춤이 더 많이 들어왔다. 서량.■ 불교와 호악 - 불교사원은 여러 가무와 잡희 연출의 중심지가 되기도 했다.6. 수당(隋唐)의 가무희1) 수대의 가무희수나라는 가무희뿐만 아니라 남북조 시대의 온갖 가무와 잡희를 모두 계승하여 크게 발전 시켰다.■ 칠부악과 구부악 - 국기. 청상기. 구자기. 예필.■ 삼조설악 - 궁중의 잔칫자리에서 연충하던 음악과 잡기의 순서 기록. 배기. 당기.■ 창우노잡 - 가무희뿐만 아니라 백희까지 포함. 괴뢰희의 기교도 극도로 발달.2) 당대의 가무희당대는 수나라를 이어받아 처음부터 가무잡희가 성행하였다. 음악 황제인 현종이 교방을 둠으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가무잡희의 성행은 궁중뿐 아니라 귀족과왕은 초당에서 만당에 이르기까지 여러 모양으로 연출되었다. 같은 가무희라 하더라도 장소와 시대에 따라 연출 기법에 많은 차이를 보이는 것이 그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답요낭 - 본시는 남자가 남편뿐 아니라 그의 처 역할까지 하던 것이였는데 현종때에 이르러 남편 역할까지 여자가 맡게 되었고, 그 남편을 낭중이라 부르지 않고 아숙자라 부르게 되었다.■ 상운악 - 표현은 다르나 당대에도 양나라 때의 상운악을 그대로 이어받았던 것으로 보 여지고, 앞머리에 늙은 오랑캐 문강의 가무가 나오고 뒤이어 사자춤과 봉황춤이 이어지 며, 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것으로 놀이는 끝난다.■ 서량기 - 당대의 서량기는 북조의 것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아니였다. 놀이는 환검등의 잡희로 시작되었고, 오랑캐가 사자를 이끌고 등장한다. 사자와 오랑캐들이 우울려 태평 성세를 기리는 춤을 추고 호등무를 추면, 한 사람이 나타나 양주가 함락되어 그들이 고 향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알리면 오랑캐와 사자는 슬피 울부짖으며 끝을 맺는데 이는 당나라가 안사의 난 이 변경을 돌보지 못하는 사이 양주가 함락된 것을 각시키려 하 였다고 본다. 하황지방을 토번에게 빼앗겼던 사실을 일깨우고, 상운악을 당시 실정에 맞도록 개작했던 것. 오방사자. 서하사자. 구두사자. 호등무.■ 참군희 - 후한 때 관도령 석탑에게서 시작되었던 참군희는 당대에도 성행했다. 육참군._ 호희■ 소막차 - 발한호희 또는 발호왕걸한희. 놀이의 주역은 혼탈대인데, 말을 고 오랑캐 옷 을 입은 사람들로 이루어져 있고, 깃발을 세우고 북을 울이며 서로 대적하는 모양을 하 며 날뛰다가 춤을 추며 놀이를 한다. 끝에 가서는 웃통을 벗은 사람들이 등장하여 길거 리에서 물을 뿌리며 추위를 몰아낸다. 혼탈은 16세기 무렵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주머 니이다. 소막차를 혼탈, 대면, 발두의 종류라고 하는 것은 이것들 모두가 가면놀이임을 뜻하는 것이다. 칼춤과 결합되어 검기혼탈. 동물놀이. 취혼탈.■ 발두 - 발두는 서호희이며 어떤 사람이 맹수에게 잡아먹힌 아의곡.
    예체능| 2002.07.23| 8페이지| 1,000원| 조회(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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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극론] 홍해성 인물분석
    report홍해성에 대해..과 목 : 연 극 론지 도 : 박영은 교수님학 번 : 9946136009이 름 : 정 보 라1. 생애홍해성은 1894년 홍치장과 한순이의 5형제중 3남으로 대구에서 출생.1917년 일본의 중앙대학 법학과에 입학.1919년 2월 8일 동경에서 일어난 조선 독립선언 과 3월 1일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선 언 , 김우진의 영향으로 1920년 극예술협회 결성.중앙대학 자퇴. 일본대학 예술과에 편입, 졸업.1921년 김복동과 결혼. 후로 5남1녀를 가짐.축지 소극장 가입하여 활동. 1924~1929. 오사나이 가오루. 히지가타 요시.1930년 6월 귀국. 신흥극단 창립. 연출.1931년 7월 극예술연구회 설립. 지도자로 추대. 고골리의, 어빙의,그레고리의, 괴링의, 체홉의, 유치진의 , 입센의, 르나알의, 체홉의 연출. 등등.1935년 동양극장 설립. 연출부 및 무대의 지도자로 참가.1943년 10월 연출활동 중단, 칩거.1955년 7월 극단 민극에서 홍해성, 변기종 회갑기념으로 공연.1957년 7월 중앙국립극장 환도기념공연의 연출.1957년 12월 6일 심장마비로 서거.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1979년 8월 김포군 고려공원묘지로 이장.2. 축지 소극장에서의 생활축지 소극장은 근대극의 실험, 근대극의 상설관, 이상적 소극장, 민중의 연극을 목표.비상업적 입장. 관극료의 저렴화, 후원회원제의 도입, 공연시간의 단축 시도.배우, 연출, 장치, 조명, 효과, 무대감독 등을 양성하는 전문학교의 기능.번역극에만 의존한다는 비판을 받을 만큼 다양한 서양의 작품 공연.출연한 초연 작품만 50여편, 재출연까지 80여회에 달함. 이로 인해 풍부한 체험.홍해성이 연출의 중요성과 전문화 및 연극 창작의 분업화를 강조하게 된 동기와 근거는 여기에서 연유된 것으로 해석됨.「우리 신극운동의 첫길」에서 그는 새로운 연극에 대한 적극적인 계몽, 번역극의 올바른 수용과 창작극의 장려 및 조화, 전문적인 무대예술가의 양성, 극장건립을 전제로 한 소극 장운동과 회원제의 실현을 제시하였다.3. 홍해성의「연출론」희곡과 연극의 장르적 특성 및 극작가와 연출가의 창조적 역할의 독자성을 밝힘.연출은 희곡을 완전하게 표현하는 동시에 연극적인 독립적 가치를 갖게한다.희곡의 해석은 유일무이한 것이 아니고 무대 표현의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며 작품의 새 로운 해석이라는 점에서 연출가의 창조성이 살아난다.자연 그대로의 무대는 부자연한 무대가 될 것이라고 하여 자연과 예술 구분.홍해성의 연극론은 서구의 근대극 특히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와 동일.배우론과 연출론은 스타니슬라브스키의 방법을 거의 그대로 수용.4. 홍해성의 「무대예술과 배우」대사는 문화적인 언어 즉 창조적인 언어여야 한다.발음법에서는 발음기관의 작용과정을 설명하고, 무대 중앙에 배우를 세우고 극장의 최후 부에 앉은 관객에게까지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발음 훈련을 강조.배우의 연기는 인류의 신성한 악기이자 창생의 소망과 동경을 구원하는 표징.배우는 인류의 시대적 정신, 생의 의식으로 선명한 감각과 생명의 유동을 파악하여 인 류의 생활미를 표현해야 한다.극적 연기법에 대하여 자상하게 기술. 율동훈련에 대하여 기술.동양극장에서 그는 연구생들도 기초분장을 한 채 대기하게 하여 분장에도 중요.5. 극예술연구회에서의 연출활동홍해성의 극연연출시기는 짧은 시기였으나 우리 근대극 수립의 토대와 발전의 계기 마련.연출가로서의 자아 확립. 근대극의 수용과 계몽과 창작에 열중.일본에서 배운 무대예술의 모든 측면을 재현. 민족정신과 정서를 바탕으로 사실주의 연극 을 창조적으로 실험. 축지소극장에서 참여했던 서양 번역극이 대부분.6. 동양극장에서의 활동동양극장은 청춘좌, 동극좌, 희극좌등 전속극단을 두었다.청춘좌는 사실주의 연극 표방. 동극좌는 역사극 공연. 희극좌는 희극을 위해 만듦.동극좌와 희극좌는 극단 호화선으로 통합. 일제 말기에 극단 성군으로 개편.홍해성은 청춘좌에서 지속적으로 연출, 지도.기성배우 연기 지도. 신인 배우 양성을 위한 연구생 제도. 6개월 훈련으로 신인배우.동양극장은 신파극 배우 채용. 스타 시스템.홍해성은 장막극 의 연출을 계기로 일회 일작품 체계 수립.평일 오후 7시, 토요일·일요일 오후 1시 개막시간 고수 확립.홍해성은 동양극장이 목표로 하는 것은 관중에게 고양된 즐거움과 인생에 대한 교화를 제 공하는 민중극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사실주의 연기를 바탕으로 한 멜로드라마 창조가 그의 현실적인 의도였다고 보여진다.대중극의 연출가로 변신. 근대극의 발전의 좌초이자 창작력의 한계. 그러나 저질적인 대 중극의 체질개선으로 월등한 수준 향상. 건전하고 유익하고 재미있는 대중극의 창출.7. 일제 말 조선연극협회와 조선연극문화협회시절의 홍해성이 시기에 홍해성은 라는 논설을 냈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그가 황국 신민화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이 아니라 표면적으로 그 단어들만 사용한 것은 발견 할 수 있다.
    예체능| 2002.06.17| 4페이지| 1,000원| 조회(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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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실험극] 미래주의, 다다,존케이지 평가A+최고예요
    발 표재현의 거부, 일상성의 추구와 비판점미래주의, 다다이즘, 존 케이지과 목 : 현대연극 연구지 도 : 허동성 교수님발 표 : 정 보 라★ 미래주의 ★1. 발생의 배경과 명칭의 유래미래주의는 20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혁신적 예술운동으로서, 미래파라고도 하며, 이탈리아어로 푸투리스모라 한다. 전통을 부정하고 기계문명이 가져온 도시의 약동감과 속도감을 새로운 미로써 표현하려고 하였다. 이 운동은 1909년 시인 필피포 마리네티가 프랑스의 신문 《피가로 Le figaro》에 미래주의 선언문 을 발표한 것이 그 효시이다. 마리네티는 자신이 주창한 운동의 명칭으로 Dynamism, Electricity, Futurism이란 용어 사이에서 망설이다 최종적으로 미래주의를 채택, 선언문을 발표했다.2. 미래주의 선언문미래파들의 선언문에서 언급되고 있는 것 : 용기, 대담성, 공격, 투쟁의 미 등우리는 위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고 힘과 담력에 익은 습관을 노래하고자 한다.용기, 대담성, 반항 이들은 우리들 시의 근본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문학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요지부동한 생각, 황홀, 잠을 고양시켰다. 우리는 진취적인 운동, 열병적인 불면증, 치명적인 도약, 주먹다짐을 찬양하고자 한다.우리는 속도의 아름다움이란 하나의 새로운 미로 풍요로워진 세상의 위대함을 인정한다. 폭발하는 바람을 내뿜어 낼 용도로 뱀처럼 만들어진 우람한 배기관이 부착된 본네트를 가진 경주용 자동차... 기관총 위를 달리는 듯이 붕붕 소리를 내는 자동차는 사모트라치아의 '승리의 여신상'보다도 아름답다. 우리는 운전대를 잡고 있는 그 사람을 찬미하고 싶다. 그의 이상을 향한 깃발은 순환궤도 위를 질풍처럼 달려 지구를 통과한다.시인은 본원적인 요소들에 대한 열광적인 정열을 고양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투쟁하는 과정이 아니라면 미란 존재하지 않는다. 진취적인 성격이 없는 그 어떠한 작품도 걸작일 수 없다. 시는 무지한 세력들을 인간 앞에 굴복하도록 끌어들이기 위해 그 세력들에 대항하는 격렬한 , 현대인은 누구나 그러한 상황 속에서 혁명적인 전율을 느끼고 있다고 보았다. 미래주의가 기계화와 전쟁에 매료되어 있다는 사실은 20세기로 접어든 처음 10년 동안 이탈리아가 서유럽에서 산업화가 가장 저조한 나라였다는 점에서 이해될 수 있다. 미래주의 자들은 과거 시대의 예술적 이상을 공격하고 박물관 예술 을 조롱했으며 새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형식이 창조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미래주의 연극은 이 현실에 즉응(卽應)하여 일체의 논리적인 수사법을 버리고, 자유로운 공상 아래 논리를 초월한 종합을 통해 외관상의 현실보다 더욱 진실한 현실을 무대에 나타내야 한다고 하는 것으로, 요컨대 종래의 부르주아 연극을 철저히 파괴하려고 하는 것이었다.그들은 짧으면서도 비논리적으로 보이는 단편들의 합성 연극을 지지했다. 예를 들면 마리네티의 같은 작품에서 하인 역을 맡은 배우들은 무대 위의 가구들을 정리하는 것 이외에는 거의 어떤 일도 하지 않았다. 또한 그들은 관객들이 서로 대립하여 적대감을 느껴야 한다고 믿었기에 공연자와 관객 사이를 분리하는 것에 대해서도 반대 의사를 세웠다. 미래주의자들은 연극에 새로운 전자매체와 인형극, 시각예술 또한 결합하고 싶어했다. 그들이 시도한 것은 동시적 무대의 설정 - 기술 문명의 발달로 현대인은 다양한 체험을 동시간에 할 수 있으며, 그래서 동시성을 체험하는 것이 바로 현대의 삶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의 오버렙이나 페이드 인/아웃,몽타주 기법등을 들 수 있는데 이를 연극에서도 사용하고자 했던 것이다 - 이었으며, 나중에 프랑스의 부르통 등이 주장한 자동기술법과도 닮은 비이성적 언어의 사용이었다. 미래주의는 전통과 형식적 틀을 파괴하는 아방가르드 일뿐, 허무주의와는 그 성격이 다르다. 과거를 부정하면서 현실을 바탕으로 신세계 건설이나 기계문명 예찬 등 밝은 미래를 그리고 있는, 유토피아를 꿈꾸고 있는 낙천주의자들이었던 것이다. 마리네티의 주장은 결국 이탈리아의 무대미술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뿐, 희곡운동으로서는 실패로 끝났으나따라 휠젠베크가 독불사전을 뒤적거리다가 우연히 선택한 단어로서 대답을 할 때 무의식적으로 튀어나오는 말인 '예, 예' 혹은 '장난감 말'을 의미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무의미한 말이다.3. 다다선언다다는 쇠약한 유럽의 테두리 속에 남아 있는 너절한 것이기는 하지만 이제부터 우리는 예술의 동물원을 각국 영사관의 깃발로 장식하기 위해 여러 가지 색깔로 된 대변을 누려고 한다... 우리는 우리의 혐오감을 선언하고 자발성을 삶의 규범으로 삼았다. 우리는 시와 삶의 구별이 있는 것을 원치 않는다. 우리의 시는 바로 존재 양식이었다".- 트리스탄 짜라, 앙티피린느 씨의 선언문 중에서, 1916 -◎ 1918년에 발표된 다다 선언문우리는 여기서 저 비옥한 땅에 닻을 던진다. 전율과 감성을 체험한 우리에게는 선언할 권리가 있다. 힘에 넘쳐 돌아온 우리는 무사안일의 육체 속에 담긴 화음을 부숴 버린다. 우리는 저 어지러운 열대식물의 풍요함으로 저주가 넘쳐흐르는 강물이며, 흘러나오는 고무와 내리는 비는 우리의 땀이며, 우리는 피 흘리고 갈증에 불타오르며, 우리의 피는 힘이다....동정은 필요 없다. 살육이 끝난 후에 우리에게 남아있는 것은 순화된 인간의 희망이다. 그러므로 다다는 독립의 의지와 공동체에 대한 불신에서 태어났다. 우리와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자기들의 자유를 간직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 이론도 인정하지 않는다.내가 단언하건대, 어떤 새삼스러운 출발은 없으며,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고, 또한 감상에 빠지지 않는다. 우리는 분노한 바람처럼 구름과 기도의 옷자락을 찢어버리고 거대한 재난의 무대와 방화와 파괴를 마련하고 있다....우리는 우리들 속에 담긴 눈물 짜는 성향을 내던져 버렸다. 모든 사람들은 소리쳐야 한다....이륙해야 할 거대한 파괴적, 부정적 작업이 있는 것이다. 소멸시키고 제거해야 한다. 여러 세기를 찢고 파괴하던 도둑들의 손에 맡겨진 이 세계의 공격적이며 완전한 광기, 이 광기의 상태가 지난 후에야 개인의 결백이 인정되었다....도덕은 코끼리나 유성주의자들은 전쟁을 숭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무의미하고 불합리하며 의심의 여지가 있는 예술에 대한 관습적인 정의들에 주목하여 거의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다. 그들은 다른 급진적인 예술적 표현 양식들과 함께 합리적인 설명을 거부하는 짧은 극들을 공연했다. 그리고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 주변에서 확인할 수 있는 세상의 불합리성을 연극에 반영하기 위한 시도를 했다.다다는 전통에 반대하고, 합리적인 것에 반대하며, 제도에 반대하고, 모든 것에 반대한다. 그 기본적 원칙은 부정이다. "다다는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일종의 혐오감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트리스탄 짜라는 말하고 있다. 그 혐오감의 대상은 전쟁에 의해 파괴된 세상, 따분한 도그마, 상투적인 감상 그리고 이 제약된 우주를 반영한 것에 지나지 않는 예술이었다. 다다는 환상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나타났다.다다주의자들의 목적은 단 하나, 기존 문화에 대한 철저한 부정, 더 나아가 파괴였는데, 합리주의적이고 이성적인 아카데미 예술에 대한 거부로 이들은 '우연의 원리'를 선택했다. 소음주의 음악, 아프리카 부족의 토속어로 지어진 시, 언어가 아닌 음성으로만 만들어진 음성 시, 여러 사람이 한꺼번에 읊어 대는 동시 시 등이 만들어지게 되고, 아무런 뜻도 알 수 없는 연극과 퍼포먼스가 상연되기도 했다. "無에의 정신"은 다다주의자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원시 부족예술에 눈을 돌리게 하였으며 초현실주의에 와서는 다다의 예술 부정에 대한 대안으로 잠재적 무의식의 세계를 비합리적 방법으로 표현하려고 시도하였는데, 이것은 쾌락원리와 현실원리를 화해하는 것을 의미하며 더 나아가서는 원시인들의 2원적 세계관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다다이즘이 공통적으로 추구했던 '우연의 원리'는 예술의 합리성과 논리성은 삶 자체가 가지고 있는 우연성을 표현해 내지 못하며, 따라서 예술과 삶의 경계를 허물기 위해서는 예술이 '우연의 원리'에 따라야 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또한 '우연의 원리'에 순서로 단어를 배열한 시, 음성시 등 원시적이고 지리멸렬한 형태를 연다.트리스탄 짜라 ,휠젠베크 등과 함께 과거의 모든 예술형식과 가치를 부정하고 비합리성 ·반도덕 ·비심미적인 것을 찬미하였다. 짜라는 “새로운 예술가는 항의한다. 새로운 예술가는 이미 설명적 ·상징적인 복제를 그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돌이나 나무나 쇠로 직접 창조한다. 특급기관차와 같은 새로운 예술가의 유기체는 순간적인 감동을 싣고 모든 방향으로 향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선언하였다. 여기에 오늘날 말하는 자유분방한 오브제(objet)가 등장하는데 그것들은 문자 그대로 중립을 선언하면서 스위스에 모인 망명자들의, 밖에서의 참혹한 살육을 의식한 발언이며, 그들은 종래의 예술작품이 외적 폭력에 대해 얼마나 무력했는가를 전쟁 체험을 통하여 느끼고 있었다고 할 것이다. 잡지 《다다》가 발간되고 우연을 이용한 추상시 ·음향시가 발표되는 등 이 취리히 다다는 1920년까지 계속되었다.취리히 다다는 음악에서의 소음, 문학에서의 동시성, 그리고 미술에서의 우연성을 특징으로 한다. 기본적으로 문학적 특징을 지니며, 뒤에 내부 의견 충돌로 해산되었다. 예컨대 캬바레 볼테르의 저녁이 점차 소란해지고 선동적으로 변해가자 아르프와 한스 리히터, 마르셀 얀코와 같은 작가는 은밀하게 각자 나름대로 본질적, 추상미술 탐색하였다. 다다란 말을 발견해낸 휠젠베크도 카톨릭적 세계관으로 귀환하였으며, 마르셀 뒤샹과 프란시스 피카비아가 뉴욕으로 옮겨감에 따라 다다의 중심이 취리히로부터 뉴욕으로 이동했다.(2) 뉴욕 다다전쟁이 종반에 들어서면서 취리히 다다는 종말을 고하게 되고 마르셀 뒤샹과 피카비아가 뉴욕으로 이주하면서 뉴욕 다다시대가 본격적으로 열리게 된다. 1914년 수많은 유럽 이민자들이 자유로운 미국으로 몰려들어 뉴욕에 있던 전위예술가들의 단체(사진작가 알프레드 스티글리츠의 화랑, 예술 후원자 월터 콘라스 알젠버그의 살롱)와 급속도로 접촉함으로써 뉴욕 다다가 시작되었다. 뉴욕 다다는 쮜리히 다다와 거의 같은 시기에 출연한.
    인문/어학| 2002.06.17| 9페이지| 1,000원| 조회(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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