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서론2003년 무역의 날엔 기아자동차 삼성전자 대우조선해양 삼원테크 팬택 등 5개사 가 금탑산업훈장을 받았다. (한국경제2003년 11월 28일 (금))이 중 대우조선해양에 대하여 사례발표를 하고자 한다. 자금난으로 인하여 대우의 수많은 기업들이 몰락해 가는 가운데 세계적인 초우량 조선기업으로서 그 입지를 지켜나가고 있는 대우조선해양 이들은 어떻게 그 험난한 국제 사회에서 살아남아 활개를 치고 있는 것일까?여기서 우리들은 대우조선해양의 세계적인 성공사례를 다루기에 앞서 조선산업의 태생적인 글로벌 경영적 특성과 세계 전반에 걸친 시장을 둘러보고 대우조선의 성공사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다.1.조선 산업의 현황과 세계 시장(1)조선산업의 특징조선산업은 해운, 수산, 기계, 철강, 전자, 전기, 화학 등 타 산업부문과의 전후방 연관효과가 크며 자본, 노동, 기술이 종합적으로 집약된 산업으로서, 생산, 고용, 수출 면에서 국민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큰 산업부문 중의 하나이다.조선산업은 자본집약적인 동시에 노동집약적인 산업이다. 즉, 도크, 크레인 등 대형설비가 필요한 장치산업으로서 선박의 생산에 장기간이 소요되어 투하자본의 회수기간이 긴 점 등 자본집약적인 면과, 선종별로 또한 발주자의 다양한 요구 등 에 따라 제작과정이 복잡하여 설계 및 생산 자동화에 한계가 있다는 점에서 노동 집약적인 면을 함께 가지고 있다. 이는 조선산업이 대기업 위주의 독과점 구조 를 형성하게 되는 원인이 되고 있다. 선박은 수출기여도가 높고, 수입국이 별다른 규제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어 많은 후발 개도국들이 전략적 수출품목의 하나로 채택하는 사례가 많다.세계 조선시장의 특징은 전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단일시장(global market)이라 는 점이다. 시장진입 장벽이 높지 않아 일단 경쟁력을 갖추게 되는 경우 단기간 내에도 시장점유가 가능하다. 선박의 생산이 주문생산의 형태로 이루어지는 점도 타 산업과는 상이하다. 선주들이 적재화물, 항로 등을 고려하여 선종이나 선형을 개별적으로 요구해 져 가고 있는 상황이다.3. 우리나라의 관점에서 본 장기적인 시장 가능성현재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급격히 늘어난 발주량에 대한 국제적인 조선 업체 들의 민감한 반응과 한국의 정책적인 과잉 시설 설비로 인하여 현재 초과 공급상 태이며, 기업마다 기술적 차이가 많이 좁혀진 상태이며, 설상가상으로 중국 조선 업체의 발전으로 인하여 가격 경쟁이 치열한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장기적 으로 선박 운임 사업을 내다본 선주들의 안목에 의하여 이론적인 시장 수요를 상 회한 수요가 시장 전체적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추세는 계속되어 2006년에는 공급이 수요에 비해 30%선 초과 공급되는 것으로 학자들은 내다보고 있다.그러나 과잉 공급 현상은 탱커, 벌크선, 콘테이너선 등의 저부가가치 선박에 대 한 일이며, 아직 LNG선, FPSO 선박, Cruiser급의 대형 여객선 등의 고부가가치 선박에 대한 시장은 그러한 선박 자체가 거대한 시설이 소요되며 기술개발 또한 크게 이루어져야 한다는 특성 때문에 아직 형성이 되지 않고 있었지만 저부가가 치 선박의 공급이 과잉된 상태에서 상대적인 수요가 급증하고 있다.(2000년 고부 가가치 선박 수주비중 15%->2002년 50%)이러한 고부가가치 선박은 대부분이 대형선박이며, 거대한 시설 규모와 발달된 기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시장 상황 속에서 기존까지 과잉 설비 등으로 비판을 받았던 우리나라의 거대한 시설들의 진가가 발휘되고 있다. 특히 대우조선의 경우 2002년도에는 미국의 BP로부터 세계 최대 반잠수식 해양 플랜트를 수주하였고 세계 최대의 극초대형 유조선을 그리스에 인도하였으며, 현재 LNG 시장의 40% 를 차지하고 있다사실, 실질적인 수주량의 감소가 극심하였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2000년 톤당 700 달러의 수주가가 2002년 톤당 1600달러로 올라서 매출액의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한다. 앞으로 LNG선과 FPSO선박에 관한 한 세계적인 시설 규모를 자랑하는 우 리나라 조선 업계가 이끌어나갈 것으로 보이며, 아직 나라는 그 기반을 토대로 시장 점유율을 늘리는 데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올해 상반기의 경우 작년의 같은 시기와 비교하여 290%의 수주량을 거둔 점에서 보아도 우리나라의 앞으로의 시장 활동은 낙관적이다. 그러한 우리나라의 조선업의 경우, 국내 조선업의 70%를 삼성, 현대, 대우의 3개사가 차지하고 있으며, 세계 1,2,3위도 이 세 기업이 그대로 차지하고 있다Ⅱ. 본론1. 한국조선산업 발전사 (대한민국 정부수립이전)우리나라에 근대적인 개념의 조선산업이 도입된 것은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와 활동을 시작한 일본 조선업자들에 의해서라고 볼 수 있다. 일본의 조선업자들은 19세기 말부터 이 땅에 들어오기 시작하여 1910년 일제 강점기를 전후한 시기에는 부산, 인천, 청진, 목포, 진남포, 충무, 원산 등 전국 주요 항구에 걸쳐 조선업을 영위하고 있었다.(표 참조) 광복을 계기로 우리나라에 있었던 일본인 소유의 조선소들을 인수하여 우리의 조선업을 스스로 성장시킬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인 종업원들은 운영대책위원회를 구성하여 일본인으로부터 인계 받았다.(표 2 참조) 곧 이어 미국 점령군 당국은 일본인 귀속업체에 대한 관리인을 임명하였으나, 관리인 제도는 단지 업체 시설의 보전 정도에 그쳤으며 조선활동은 완전히 정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우리 조선업계는 경제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조선업을 새로 출발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든 기자재를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해운과 수산업의 부진으로 소량의 수리 공사도 대금 결제가 어려운 상황이 됨에 따라 업체들은 경영난에 봉착하였으며, 종사하고 있던 기술자들도 점차 조선업계를 떠나게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공업 시설 및 기술 도입 등을 추진하여 경제 자립을 위해 노력하던 중 동년 5월 북한의 단전 조치와 한국전쟁이 발발함에 따라 주요 산업시설과 많은 선박이 피해를 입었으며 산업기반이 크게 약화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구한말 및 한일합방 초기의 주요 조선업체한국에 제일먼저 발우리 조선업계는 경제적 혼란과 무질서 속에서 우리의 조선업을 새로 출발시키는데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든 기자재를 일본에 의존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해운과 수산업의 부진으로 소량의 수리공사도 대금결제가 어려운 상황이 됨에 따라 업체들은 경영난에 봉착하였으며, 종사하고 있던 기술자들도 점차 조선업계를 떠나게 되었다.해방 당시 남한의 주요 조선공장 자료 : 陸運十年誌(교통부 발행){업체명소재지건조능력(톤)수리능력(톤)기관생산능력(마력)기관수리능력(마력)朝鮮重工業(株)朝鮮船舶工業(株)日出造船(株)東亞造船(株)釜山工作船(株)釜山造船工業(株)朝鮮造船工業서울사업장方魚津鐵工造船(株)統營造船(유)麗水造船工業(株)木浦造船工業(株)鍾淵朝鮮造船(株)浦項造船鐵工(株)부 산부 산부 산부 산부 산부 산서 울방어진통 영여 수목 포군 산포 항5,000500400200-1,0006,0006001,0003006003,000500300,00030,0008,5006,0002,000-4,00010,0002,0006,0001,50010,0003,000-1,500500---*************003,000700-3001,0006,000---2,0001,0002,00011,0005,0005,000합계19,100383,0208,55033,300자료 : 陸運十年誌(교통부 발행)2.대우조선해양대우조선은 위에 언급한 우리나라 대형 조선업계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다. 그 때문에 원자재의 유통 구조 내지 시설 규모 등은 여타 우리나라 정부가 신망한 3대 대기업과 그 주류를 같이한다. 대우조선은 애초에 정부 국영기업이었으며, 이것이 대우그룹에 의하여 민영화되어, 이후에도 정부차원으로 그 산업이 육성되어 왔다. 그러나 그러한 정부의 지원만으로 지금의 그들이 있게 되었다고 한다면 이는 대우조선해양을 모욕하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정부의 지원을 당당하게 공기업 중 효율적으로 가치를 창출하는 곳이 얼마나 되겠는가? 그들은 정부의 지원을 수포로 되돌리지 않고 꾸준히 기술 개발과 품질 경영에 힘을 기울여 그들의 경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이러한 문제를 장기적으로 내다보아 대우조선해양은 올해 4월에 로봇 연구소를 설립하여 기술을 개발하여 왔으며, 아직 인간을 대체할 만큼의 로봇의 기술이 발달되지 않았지만 현재까지 선박과 관련된 50여 종의 로봇 관련 특허를 따냈으며, 앞으로도 용접, 그라인딩, 페인팅 등에 필요한 지능형 산업 로봇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저임금체제에 반박을 하여 노동집약적인 조선산업의 특성자체를 뒤집어엎기를 계획하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인간 공존형 로봇을 만들어서 독립적인 산업으로서도 다각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세계 최고의 우리나라 조선산업에서는 대우조선해양 이외에 이러한 시도를 하고 있는 예시가 없으며, 아직 밝혀진 바가 없지만 고임금 체제인 일본에서도 전문화된 로봇 산업이 한창 진행중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 산업은 중국의 저임금 체제의 강점이 부각될수록 더욱 조선업계에서도 빛을 발휘할 것으로 예상되며, 본업인 선박 제조의 집중화와 사업의 다각화 측면에서 두 마리의 꿩을 잡아가고 있는 셈이다.4.이러한 성공의 밑거름인 대우조선해양의 기회 요인국내 시설옛날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을 개발한 경상남도 거제도 옥포만에 그 국내 조선소를 둔 대우조선해양은 그 곳의 130만평의 넓은 부지 위에 세계 최대 100만톤급 도크(선창, 부두)와 900톤 골리앗 크레인 등의 최적 설비로 기술개발을 거듭하여 고급 선박의 건조에 대한 비교우위를 점하고 있다.꾸준히 이루어져 온 기술개발과 품질경영이러한 세계 최대의 시설적 역량은 대우조선해양으로 하여금 세계 최대 규모의 선박들을 여러 개 양산해 내는 밑바탕이 되었으며, 선박의 효율성을 위하여 선박이 더욱 더 대형화되어 가는 이 시세에 큰 우위적 요소로 자리잡아 있다.세계조선업계 가운데 고객의 요구를 가장 잘 반영하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일찍부터 세계 주요 선사들로부터 수주를 따내기 위해 다양한 요구에 대응하는 유연한 엔지니어링 능력 배양에 힘을 기울였기 때문이다. 대우조선 산업 연구소에는 3219
Ⅰ. 서론멕시코 혁명에 대하여(1910-1917) 에 대하여스페인으로부터 200여년 간 오랜 지배를 받아 오던 멕시코는 1821년 스페인의 군사령관이었던 이뚜르비데의 배반으로 독립을 맞이하게 되었다.19세기 말로 접어들어 1876년부터 쁘로피리오 디아스(Profirio Diaz)의 독재가 시작되었다. 30년이 넘는 그의 독재정치는 1911년 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1910년 프란시스코 마데로는 강제로 빼앗은 농지를 인디언들에게 되돌려줄 것과 공정 선거와 대통령 재선 반대를 혁명의 기치로 내걸고 투쟁에 나섰다. 혁명의 불길은 빠른 속도로 멕시코 전역을 뒤덮었으며, 결국 이 같은 압력에 못 이겨 디아스는 이듬해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미국으로 망명했다. 그 뒤를 이어 마데로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 그는 우유부단한 성격으로 개혁을 추진하지 못하고 있다가 1913년 우에르따 장군에 의해 암살되고 말았다. 이후 1917년 우에르따 정부군이 판쵸 비야, 사파타, 오브레곤, 까란사가 이끄는 혁명군에 의해 완전히 평정되고 결국 그들 혁명군들 사이의 내전후 1917년 까란사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멕시코 혁명은 막을 내리게 된다.이상 간략히 살펴본 멕시코의 독립에서부터 혁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다음으로 멕시코 혁명의 동기와 전개 등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Ⅱ. 본론1.혁명의 동기멕시코 혁명의 시작은 쁘로피리오 디아스의 독재정치에 대항해 시작되었다. 독재자 디아스는 8번이나 대통령에 재선되는 등 절대 권력을 행사하였다. 디아스는 통치기간 동안 교회와 외국자본의 적극적 지원을 받았으며 이러한 지지를 바탕으로 어느 정도의 경제 발전도 이룩할 수 있었다. 철도망의 개설, 광산의 개발, 전신·전화망의 구축, 은행의 설립, 수출의 확대, 공업·농업·목축업 등의 확대 등 많은 경제 발전을 이룩하였다. 하지만 그 이면을 살펴보면 그러한 경제발전의 원동력은 거의가 외국인자본에 의한 것이었고 멕시코의 경제는 외국인 자본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혁명이 시작된 1910 위주의 경제정책, 인디오. 노인. 노동자의 경제적 빈곤 물가 상승과 경제 침체 1910년의 전면적 선거 부정 등은 국민들의 반발을 점차 거세게 하는 요인이 되었다.2. 혁명의 전개(1)혁명의 발발혁명전 멕시코는 채무노예인 뻬온과 대토지 소유자인 아센다도, 관리자인 카파타스 등으로 구성된 아센다라는 대토지소유제가 존재했었으며, 대통령인 디아스에 의해 제정된 공유지 개발법 과 이주지 개척법 으로 아센다의 토지소유자인 아센다도에 의한 토지 집중과 수탈이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토지구획회사의 공유지 측량을 통해 아센다도뿐 아니라 외국 기업들도 토지의 획득에 대거 참여하였으며 이로 인해 1910년에는 전체 인구의 평균 3.1%만이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고 나머지 96.9%는 뻬온, 크롭빠(소작인), 공장 직공, 광부 등이었는데 이들의 구성비를 보면 뻬온을 100으로 보았을 때, 소농과 수공업자들은 12, 공장의 직공들은 4 (그 중 여성직공이 1), 광부는 3으로 표시될 정도로 뻬온의 비율이 높았다.뻬온의 생활은 극도로 비참했다. 그들은 하나의 인격이 아니라 아센다도의 소유물에 불과하였으며 그들은 자신의 공동체에 속한 토지를 공유지로 빼았기고 아센다도에게 영원히 갚을 수 없는 채무를 짐으로써 노예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채무가 영원히 세습됨으로써 노예라는 신분도 영원히 세습될 수밖에 없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사이에 뻬온의 일부는 크롭빠라 불리는 소작인으로 전화되기도 했다. 이들 크롭빠는 멕시코의 북부와 중부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아 일부 생산도구를 소유하고 아센다도의 토지를 청부하여 경작하며, 그 생산물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것을 제공한 비율에 따라 생산물을 나누었다.1910년, 디아스는 대통령 선거에서 자신의 독재를 비판하면서 후보로 출마한 마데로를 투옥시키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마데로는 옥에서 탈출, 미국으로 망명하여 그 곳에서 산 루이스 뽀또시 강령을 발표하였다. 이 강령에서는 대통령 선거의 무효, 수탈된 토지의 반환, 마데로의 임가 아센다도와 휴전을 하자 사빠타는 이에 반발하여 마데로와의 동맹관계를 청산하였으며, 이후 마데로가 산 루이스 뽀또시 강령의 제 3조 (디아스시대에 수탈된 토지를 구 소유자에게 반환한다)에 포함된 열망들을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 는 성명을 발표하자 사빠타는 이에 대립하게 되었다.마데로는 사빠타그룹을 무장해제시키려 하였고, 보수파들은 마데로를 지지하며 사빠타를 비난하였다. 사빠타는 아직은 마데로에게 희망을 가지고, 토지문제 해결과 공동촌락의 자율성 확보의 전제조건인 민주적인 정부로서의 마데로 정권을 믿었다. 그러나 토지문제에서 마데로가 토지개혁을 실시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되자 사빠타는 아얄라 강령을 발표하고 마데로 노선과의 공식 단절을 선언했다. 1911년 11월 25일 (다른 책은 28일) 발표된 아얄라 강령은 멕시코 혁명의 방향을 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록으로, 총 15항목으로 성립되어있으며, 주요 내용은 혁명의 적들과 협력하여 디아스 독재보다 더 위협적이고 수치스러운 새로운 형태의 독재를 구축 한 마데로에 대한 비난과, 토지개혁에 있어서 수탈된 토지의 즉각적인 환수와 토지없는 촌락민들에 대한 분배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한 대토지소유자나 과학파 관료중 이 조치에 대한 반대자의 재산 몰수 조항이 있는가 하면, 지역 단위의 자치를 강조하는 등, 개혁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오랜 역사를 지닌 농민운동의 최종 산물 로서 농업개혁과 자치 라는 투쟁의 목표를 밝히고 있다.이러한 아얄라 강령이 발표되자 사빠타의 추종자들이 대거 확대되었으며, 마데로 정부의 무자비한 소탕작전과 유화책에도 사빠타 그룹은 변질되거나 좌절되지 않았다.마데로의 통치 기간에도 단순히 정권을 잡을 욕심만으로 쿠데타를 일으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1913년 2월 몬드라곤 장군이 반란을 일으키자 마데로는 구 디아스체제의 장군이었던 웨르타를 파견하여 반란을 진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웨르타가 마데로를 배신하여 살해하고 자신이 대통령의 지위에 오르게 되었다.(3). 웨르타 정권 이후의 변화웨르타 정권이 성립되이 주로 유럽쪽으로 유학을 다녀온 과학파 관료 들이며 따라서 친미적이기보다는 친영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미국은 1914년 4월 자국 자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베라크루스를 점령, 웨르타파의 보급로를 끊었다. 이에 웨르타는 각 혁명세력들에게 멕시코의 적 미국과 같이 맞서자고 호소하지만, 카렌사, 사빠타, 비리아 등의 세력은 웨르타에 호응하지 않고 계속 공세를 취했다. 이에 웨르타는 결국 그해 7월 정권을 포기하고 유럽으로 망명하였다.멕시코의 수도는 카렌사파와 사빠타파에게 장악되었다. 카렌사파는 토지개혁이 선행되는 것을 반대하였고, 사빠타파는 아얄라 강령의 비준안 을 통해 혁명을 단순히 정권의 교체로만 축소하려는 여러 분파들의 의도를 비난하면서, 아얄라 강령의 농지개혁 조항이 헌법조항으로 격상될 때까지 투쟁을 계속 할 것과 구체제의 충복들을 일소하고, 농지개혁을 실행할 수 있는 자들로 새로운 정부를 구성할 것 등을 결의했다.(4). 카렌사파의 승리1914년 10월, 혁명세력들간 최초의 협의회가 아구아스깔리엔떼스라는 곳에서 개최되었다. 이 협의회에서는 아얄라 강령의 6, 7, 8, 9조가 농업개혁의 모범 조항으로 승인되었으나, 동시에 카렌사파와의 분열이 표면화되기도 하였다. 비리아파와 가까운 구띠에레스를 임시대통령으로 선출하고 카렌사의 군 지휘권을 협의회로 이양할 것이 결의되자, 카렌사는 이에 반발하여 베라크루스로 퇴각하고, 비리아는 사빠타의 아얄라 강령을 기본적으로 지지한다고 확인하며 비리아 그룹과 사빠타 그룹간에 동맹을 맺게 되었다.카렌사파는 뻬온 세력의 분해를 위해 1915년 1월 농지개혁법을 발표하고 수탈토지의 반환을 약속하며 일정 범위 안에서 외국자본을 규제할 것을 약속했다. 노동자에 대해서도 노동 조건의 개선을 비롯한 개혁을 발표하고 이로인해 얻게된 조직 노동자의 힘을 이용하여 그 해 4월 막강한 전력을 지닌 비리아의 북부사단을 분쇄하였다.사빠타 그룹은 이동안에도 공동촌락에 토지를 반환시키는 급진적인 농지개혁을 실시하였으며, 보수파들은 사빠타 운동 주곡인 옥수수 등의 생산이 주로 이루어졌다.비리아 그룹의 패배와 붕괴로 인해 사빠타 그룹의 범위는 전국적이지 못하고 지역적으로 봉쇄되었다. 1915년 후반에 라틴아메리카의 모든 나라를 비롯하여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주요 국가에서는 카렌사 정권이 승인되었다. 사빠타 그룹의 지배 범위는 1916년에는 모렐로스 지방으로 제한되었다.1916년 12월 1일, 카렌사 정부에 의한 헌법제정의회가 케레다로에서 열렸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민주주의에 관한 항목과 토지개혁 규정, 노동문제 등에 관해서 논의가 이루어졌다.(5). 1917년 헌법카렌사 정부에 의해 성립된 1917년 헌법의 주요 내용은 교육, 토지개혁, 노동자 지위개선, 교회에 관한 내용 등이 핵심이라고 볼 수 있다.교육을 다룬 제 3조에서는 종교단체에 의한 교육금지, 중앙집권적 교육, 공립학교의 무상교육, 초등교육의 의무화를 규정하면서 교육은 민주주의적으로 인도주의를 향상시키며 멕시코의 경제적 독립에 도움이 되는 것이어야 한다고 선언했다.토지개혁규정인 제 27조는 토지소유권의 구가 귀속을 천명하며, 광산자원을 비롯한 다른 자원도 국가에 귀속한다고 함으로써 외국기업의 자원 취득을 규제하려 하였다. 그리고, 대토지소유의 수용은 유상으로하고, 소농에게 토지를 주어 육성하며, 공동체에 토지를 반환하고, 교회는 토지소유 자본투자를 할 수 없게 하였다. 또한 디아스시대의 토지구입은 무효라고 규정했다. 특히 공동체에 토지를 반환한다는 내용은 사빠타 그룹의 아얄라 강령이 그대로 인정된 것으로 촌락의 이익을 위해 결정된 공유지 또는 물권의 중여와 반환에 의해 어떤 영향을 받게 되는 다른 소유권자가 나타나도 그 소유권은 전혀 보장되지 않는다 고 명시하고 있다.노동권을 규정한 제 123조에서는 1일 8시간 노동, 주 6일제, 출산휴가, 유급휴가를 규정하고 있으며, 최저임금제에서는 일반적으로 최저임금은 물질적 사회적 문화적 측면에서, 또 아이들에게 의무교육을 시켜야하는 가부장이 필요하다고하여 이것을 농업노동자에게도 적용하였다. 파업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