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서론Ⅱ. 본론1. 19세기 전반기 사회정세와 평안도1) 세도정권 성립기의 중앙과 지방① 세도정권의 성립과 그 성격② 지방사회의 성장과 동요2) 평안도 농민전쟁의 발생배경2. 농민전쟁의 전개과정1) 주도층의 형성과 농민전쟁의 준비2) 농민군의 청천강 이북지역 장악3) 정주성에서의 장기항전4) 농민전쟁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책3. 평안도 농민전쟁의 참가층4. 평안도 농민전쟁의 역사적 성격과 의의Ⅲ. 결론Ⅰ. 서론19세기는 봉건제의 해체기인 동시에 근대로 옮겨가는 시기이기도 하였다. 또한 잠채가 성하게 행하여진 것은 국내산업의 발전에 따라 금은에 대한 수요가 급증하였기 때문으로, 봉건정부도 이를 공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의 신흥 상인들은 이들 사영 광산을 자본주의적인 방법으로 운영하여, 차차 구래의 봉건적 특권상인과 이해의 대립을 일으켜 그들의 권익을 침해하기 시작하였다. 「18세기 이후, 상품 화폐관계의 발전, 18세기말 이후 극히 한정된 범위로 자본주의적인 생산양식의 요소가 발생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18세기 이후가 우리 봉건적 역사의 최후의 시기인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 동시에 또, 19세기와 18세기를 구별할 수 있는 근거를 부여해 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더욱이 「투쟁이 전례가 없을 만큼 급진화 하여 농민봉기는 끊임없이 일어났다. 19세기 역사의 또 하나의 특징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고 있다. 「농민봉기에 관하여는 봉건적 지배체제의 붕괴를 촉진시킨 심각한 대규모 투쟁으로, 국내의 모순이 극도로 첨예화하였음과 민중의 거대한 역량과 투지를 보였다고 평하고 있다. 이 같이 평안도 농민전쟁은 조선봉건사회에 있어서의 가장 규모가 큰 반봉건적인 농민폭동의 하나이며, 그것은 또 12세기부터 19세기 전반기의 봉건사회가 내포하고 있던 모순의 전개와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19세기 이전부터 봉건적 사회모순이 첨예화되는 과정에서 매우 다양하게 전개되었는데, 항쟁과정이 잘 드러나지 않는 소극적 경제투쟁에서부터 폭력적 봉기에 이르기까지 농민들은 끊 정권기에 지방에 파견된 대부분의 수령들은 자신들의 뒤를 보아주었던 상전들에게 상납하기 위하여 수탈을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행위는 세도 정권기에 임명된 무관직(武官職)과 음관직(蔭官職) 수령에 의해 주로 저질러졌다. 특히 평안도 지역 중에서도 농민전쟁의 중심지였던 청북(淸北)지역은 무관직이나 음관직 수령이 임명되고 있었다. 이들 수령들의 부정탐학은 평안도 지역의 부민(富民)세력의 기반을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평안도 지역에서의 수령과 재지유력자(在地有力者)들 사이의 모순을 격화시킨 요인이 되었다.② 지방사회의 성장과 동요19 세기 초반에는 중앙정치권력의 모순이 심화되는 가운데 화폐경제가 널리 보급됨에 따라 농민층의 분해가 가속화되었다. 지주제가 확대 ? 강화되는 가운데 토지로부터 분리된 농민층이 대거 발생하였다. 다른 한편으로는 발달된 상품 화폐경제를 배경으로 경영형부농 내지 광작농민(廣作農民)들도 성장하고 있었다. 이들은 봉건적 권력의 조세수탈과 특권적 상업을 옹호하는 정책에 의하여 더 이상 자신들의 부를 축적하는 데 큰 한계를 느끼던 계층이었다.또한 지주층들도 지주제의 확대 발전 속에서 종래의 봉건적 특권에 의존한 지주경영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주경영을 강화해나갔다. 이들은 지주경영을 통하여 확보한 이익을 다시 토지나 상업에 투자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계층이었다.농촌사회의 분화가 가속화되고, 지방사회에서 새로운 사회계층이 성장하는 가운데 중앙권력의 집중성이 강화되면서 지방사회의 저항 또한 거세어졌다. 1800년 정조가 죽자 경상도 인동에서 작변(作變)이 발생한 후, 다발적으로 투서사건이 일어났다. 또한 1808년에는 함경도 일대에서 그 지역 향임층이 주동이 되어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대표적으로 평안도 농민전쟁을 몇 개월 앞둔 1811년 2월에는 황해도 곡산부에 대규모 농민항쟁이 일어났다.곡산농민항쟁은 60여 일간의 장기적인 항쟁이라는 측면, 연루자 130여 명에 37명을 효시한 항쟁의 격렬성, 향임층의 주도하에 수령을 몰아쟁준비에 착수하였다.홍경래 등 농민전쟁의 주도층은 처음부터 무장한 병력을 통한 봉건정부 전복을 꾀하고 있었으므로, 이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한 사업을 다양하게 벌여나갔다. 그들은 추도(楸島)에서 정부 몰래 화폐를 찍었으며, 각 지역의 향임이나 부호들로부터 자금을 모집하였다. 농민군은 이와 같이 각 지역의 내응자들로부터 자금과 물품을 조달받는 한편, 이희저 ? 김창시 ? 우군칙 등이 자체 조달한 자금으로 군수물자를 반입하여 전쟁 준비를 갖춰나갔다.이와 함께 주도층은 병사를 동원하기 위하여 광산노동자를 모집한다는 명분으로 유민층을 선금을 주고 끌어들였다. 따라서 초기 농민군의 인정구성은 순수한 농민세력이라기보다는 광산노동자들로서 용병(傭兵)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홍경래 등 주동층은 1811년 7월경에 우군칙의 집에 모여 1811년 12월 20일에 거병할 것을 계획하고, 10월경에는 신도(薪島)에 모여 그동안 끌어들인 모든 군사와 경제적 역량을 다복동에 집결시키기로 결정하였다. 이때에 주요 군사군부들이 선정되었는데, 이들 중 대부분은 평안도와 황해도 서북지역 출신자였고, 멀리 경기도 개성 출신의 농민도 섞여 있었다. 이는 농민전쟁의 사전준비가 매우 치밀하고, 그 범위도 광범했음을 알려주는 것임과 동시에 농민들의 반봉건 항쟁에의 참여가 평안도라는 하나의 지역에 한정되지 않고 전국적인 범위에 걸쳐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그런데 전쟁준비가 완료되는 시범은 12월 중순경 이들의 움직임이 관측에 사전에 누설되자, 농민전쟁의 주도층들은 1811년 12월 18일 가산 다복동에서 거병하였다.2) 농민군의 청천강 이북지역 장악홍경래 등 지도부는 1천여 명의 군대를 남진군(南進軍) ? 북진군(北進軍) 두 부대로 편성하여 평안도 여러 지역에 대한 공략을 개시 하였다.농민군은 출진에 앞서 김창시가 지은 격문을 발표하여 자신들의 거병의 명분을 내외에 공포하였다. 이 격문은 평안도에 대한 차별이 없는 질서와 부정부패가 숙정된 질서를 요구했다. 당시 봉건권력에 의해 수탈당하던 모든 되지 않은 것은 분명하다. 즉 농민들에게 토지를 재분배한다든다, 삼정운영을 개혁함으로써 농민군을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데는 실패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변혁구상의 부재는 농민전쟁을 실패로 이끈 가장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북진군이 청천강 이북 지역을 공략하고 의주공략을 준비할 즈음, 남진군은 박천에서 영변을 공격한 후 평안도 병영이 소재한 안주를 공략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이 계획에 반대하여 안주를 먼저 공격하자고 주장한 안주병영 집사 김대린(金大麟)의 모반 때문에 홍경래가 부상을 입고 다시 가산으로 후퇴하게 되었다. 남진군은 가산에서 전열을 재정비한 뒤, 12월 24일에서 26일 사이에 박천 송림리에 집결하였다. 사고로 인한 공격지연으로 전력요충지에 대한 공격이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각 군현의 내응세력들이 크게 동요하여 배신하거나 관군에 체포되는 경우가 많았다. 지도부에서 발생한 이 조그만 사건은 전술적으로 농민군을 열세에 빠뜨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관군측에서는 초기 농민군의 위세에 눌려 청천강 이북 10여 개 군현을 빼앗긴 후 12월 29일에야 비로소 체제정비에 들어가 박천 송림리에서 농민군과 최초의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평안병사 이해우(李海愚)가 지휘한 관군에 패한 농민군은 정주성으로 퇴각하였다.관군은 박천을 수복한 후 계속 농민군을 초토전술(焦土戰術)로 밀어붙였다. 관군은 진군하는 마을마다 모두 불태웠으며, 남녀노소와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살육하였다. 이와 같은 관군의 청야전술(淸野戰術) 즉 초토화전술로 인하여 홍경래의 남진군이 후퇴할 때 가산 ? 박천의농민들 대부분이 농민군을 따라 정주성에 들어갔다.남진군이 송림전투에서 패배했다는 소식을 접한 북진군은 정주 이북지역을 석권하는 것만이 세력만회의 첩경이라고 파악하였다. 그리하여 북진군은 1812년 정월 1일 이후 용천을 점령하고 의주를 공격할 태세를 갖추었다. 이때 관군도 전열을 수습하여 의주부에서 의병(義兵)인 김견신(金見臣)을 방어장군(防禦將軍)으로 삼고, 허항(許沆)을 영초를 다져가는 시기에 발생한 평안도 농민전쟁은 지배층내의 위기와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농민전쟁은 집권층내의 동요를 심화시켰다. 이러한 정치적 위기를 맞아 정권에서 소외되어 있었던 소론일파는 새로운 사회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중인층 ? 서얼층과 연합하여 세도정권의 전복을 기도하였다. 그러나 1812년 2월에 계획이 탄로나 3월에 모두 처형당하였다. 농민전쟁으로 권력 내부의 동요는 심화되었으나, 지배층 내부의 반발은 권력의 교체에 이르지 못하였다. 오히려 농민전쟁을 진압함으로써 안동김씨 일문의 권력이 강화되는 결과를 낳았다.평안도 농민전쟁을 강력하게 진압한 중앙정부는 평안도 주민들에 대해서 일정한 대책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다. 농민전쟁의 진압시처럼 초토화전술에 의한 강경한 무력탄압으로는 평안도지역 주민들의 불만을 무마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특히 농민전쟁의 여파로 평안도 가구수와 남자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으므로, 중앙정부에서는 점차적으로 평안도 주민들에 대한 각종 안정화시책을 포함한 회유정책을 시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정부는 우선 서북민에 대한 고립정책을 점차 해소하는 정책을 취하였다. 한편 삼정문화에 대한 대책도 취해졌다.농민전쟁에 의한 정부의 이와 같은 대책은 삼정개혁이나 세도정권의 부패를 적극적으로 시정하려는 것이 아니라 지주제와 고리대 자본의 이익을 인정하는 선상에서 행해진 것이었다. 정부의 대책은 당시의 상풍화폐경제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되거나 하층농민들의 이익을 보전하는 방향에서 삼정개혁을 실시한 것이 아니라 여전히 고식적인 대책만 답습했을 뿐이었다. 이로써 평안도 농민전쟁에서 제기한 대부분의 문제는 해결되지 못하고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3. 평안도 농민전쟁의 참가층평안도 농민전쟁은 평안도의 신흥 상공업세력과 몰락양반의 주도아래 이 지역에서 상업이나 고리대를 통하여 경제적 실력을 쌓아 지방의 읍권을 장악한 향임 ? 무임층(武任層)의 적극적인 창여와 지원, 그리고 평안도 지역에 광범하게 산출되고 있었던 무전무전농(無田無佃農)의 지지 .
Ⅰ. 머리말Ⅱ. 조선후기 사회변동1. 신분제 변동2. 조선후기 농업의 상업화 전개상황과 농민운동1) 개항이전 농업의 상업화와 농민운동2) 개항이후 농업의 상업화와 농민운동Ⅲ. 맺음말Ⅰ. 머리말18, 19세기의 조선사회에서는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변동이 진행되고 있었다. 오랜 자급적 자연경제가 무너지면서 상품화폐경제가 발전하였고, 신분상승이 광범하고 진행되는 가운데 양반중심의 신분제적 지배체제가 해체되어 갔으며, 천주교나 동학 등 반주자학적인 이데올로기가 피지배층 내에서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 새로운 사회변동은 조선의 중세 봉건사회가 마침내 그 역사적 진보성을 상실하고 해체단계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역사적 징후들이었다. 조선의 봉건사회는 19세기 중엽 피 지배층의 반봉건 투쟁이 「민란」이라는 집단적 항쟁으로 발전하면서 본격적인 해체과정에 들어가게 된다.봉건사회의 해체과정은 단순하지도 순탄하지도 않았다. 사회 경제적 변동이 진행되면서 양반지배층과 피지배층인 상·천민 내에서도 분화가 일어났고, 그로 인해 사회적 경제적 대립관계도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경제적으로는 양반 지배층과 이해를 같이하는 常賤民層이 성장하였고 사회적 대립관계는 지배층 내부, 피지배층 내부에서도, 그리고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서도 발전하였던 것이고, 이 복잡한 갈등과계 속에서 조선의 봉건사회는 해체되고 있었다.)여기서 다뤄볼 것은 신분제 변동, 조선후기 농업의 상업화 전개상황과 농민운동에 대해 다루어 보고자 한다.Ⅱ. 조선후기 사회변동1. 신분제 변동조선후기 경제적인 변화와 관련하여 신분적인 측면에서도 극심한 변화가 일어났다.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은 봉건경제의 분해를 촉진했을 뿐 아니라 종전의 사농공상의 낡은 봉건적 신분질서를 허물면서 새로운 사회 계급관계를 이루어 나갔다. 조선전기에 확립되었던 양반 · 중인 · 평민 · 천인의 신분제는 17세기 이래 크게 무너져 갔다. 양대 전쟁을 치르는 동안 부족한 국가재정의 보충을 목적으로 納栗制를 실시하여 신분을 상승시켜주기도 하고, 변화를 배경으로 하여 부농층으로 성장한 농민들이 농업경영 규모의 확대와 상품 생산을 통해 부를 축적해갔다. ‘경영형 부농’ 들의 부의 축적방법은 무엇보다도 경작지의 확장이 중요한 것이었다. 이앙법의 발달은 제초작업에서의 노동력을 절약할 수 있었고 이 때문에 적은 노동력으로도 광작을 할 수 있었으며 가족노동의 한계를 넘어 임노동자를 이용한 넓은 땅의 경작도 가능했던 것이다. ‘경영형 부농’이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길은 상업적 농업의 경영이 있었다. 왕조 후기 사회는 인구증가, 특히 비농업 인구의 증가로 농산물의 상품화가 급격히 진전되고 경작지를 확대시킨 부농층의 그것을 통해 부를 축적해 갔다. 한편 합리적인 농업경영을 통해 부를 축적한 ‘경영형 부농’층은 그 재력을 바탕으로 하여 공명첩을 사거나 족보를 사서 양반신분을 얻어 갔다. 이들이 양반신분을 얻음으로써 양반의 수가 증가하고 그 결과 양반의 권위가 떨어지고 나아가서 중세적인 신분질서를 무너뜨려 갔지만 이들이 하급양반 신분을 얻는 것은 기성 양반의 수탈을 피하고 부를 축적하기 위한 경제활동에 편의를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던 것이다. ‘경영형 부농’은 요컨대 조선왕조 후기에 있어서의 농민분화 과정에서 형성된 하나의 새로운 계층이다. 따라서 본질적으로는 종래의 양반 지주층과의 이해관계를 달리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그들과 적대관계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경우에 따라서는 양반관료층의 비호 아래 경제적 이윤의 증대를 도모하는, 영세농민층 및 빈농층에 대한 수탈자의 위치에 있었다. 또한 이들은 지주가 아니면서 임노동자를 고용하여 생산규모를 확대시켜 갔고 경제적 · 사회적 지위, 그리고 어느 정도의 정치적 지위를 높여 갔으나 아직 근대적 농업자본가로 볼 만한 단계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합리적인 농업경영을 더욱 확대시켜 나감으로써 토지 소유와 임노동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적 농업경영자로 나아갈 길이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들의 토지 소유가 종래의 중세적 양반 지주층과는 다른 근대 초기의 격에 대한 문제는 지금까지 연구자들 사이에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특히 19세기부터 개항을 통하여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들어와 전통적인 농업구조를 변형시켜가기 전까지인 조선후기사회의 성격을 규정하는 문제는, 한국사회의 근대자본주의 사회론의 자생적인 발생가능성 문제와 연관되어 많은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가 중요한 것은, 바로 근대 사회로의 이행기의 한국적인 특성이 정확히 밝혀져야 그에 따라 이 시기 농촌공동체의 구체적인 성격과 구조 그리고 계급관계의 실상 등도 명확히 파악될 수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조선사회의 성격을 토지사유론에 입각해서 설명하든 또는 토지국유론의 입장에서 설명하든, 대부분의 연구들이 동의하고 있는 것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소농민경영이 일반적으로 성립하고 나아가 농민분화에 의하여 어느 정도 전통적인 토지소유형태가 해체되기 시작하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 시기의 농민분화의 구체적인 양상이나 정도, 그리고 이에 따른 사적 대토지소유는 어느 정도 확립되었는지의 문제가 정확히 판명된 상태는 아니다. 또한 이러한 현상이 농민분화에 의한 것인지 축적된 상업자본이 토지에 집적되어 이루어진 것인지도 밝혀지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가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농촌의 한 고을에도 5~9개에 이르는 향시가 성립되었으며 전국적으로는 그 수효가 천여 개에 이를 정도로 유통경제가 발전하고 있었다는 점이다.이러한 유통경제의 발전은 단순히 전통적인 자급자족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상품교환을 위해서 였는지, 아니면 농업의 상업화가 진전되어 직접생산자 사이에 사회적 분업이 발전되어 이루어진 것인지 또는 농촌수공업과 상업의 발달에 의한 것인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후자의 경우도 지금까지는 상업자본의 발달정도나 규모, 그 성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밝혀진 상태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 개방이전부터 청국이나 일본과는 관무역, 사무역, 잠무역(밀무역)의 형태를 통한 활발한 교류가 있었으며, 조선은 이들 나라에 미곡, 인삼류, 직물(주로 견직 의한 수탈을 들고 있다. 더욱이 면화를 시장에서 구입하여 직포를 하는 경우에는 시장세와 유통경비 들을 제외하면, 경영이 소규모인 농민이 이윤을 축적할 수 있는 기회란 더욱 좁아진다.이러한 요인 이외에 보다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각종 조세제도와 부가세의 신설을 통해서 정부가 농민이 축적한 이윤을 끊임없이 흡수해 갔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특히 세금의 징수는 지방관에게 자의적인 재량권이 많이 위임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방관뿐만 아니라 이들과 결탁한 아전 측에 의한 가혹한 수탈행위는 농민생활을 궁핍을 가속화시켰을 뿐, 확대재생산의 가능성을 열어주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은 조선후기에 이르면, 순조 때부터 거듭되는 세도정피에 의한 중앙 행정력의 약화와 함께 더욱 심해져서 세제의 문란은 극에 달하였다. 따라서 1862년 진주를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37개 지방에서 일어난 농민반란의 직접적인 원인도 바로 삼정(진정, 군정, 환정) 특히 환정의 문란에서 기인한 것이었다.그런데 1862년의 민란은 92%가 삼남지방에서 발생하고 있다. 물론 삼남지방은, 19세기 초를 기준으로 하여볼 때 총농지 면적의 64.1%가 이 지역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설명만으로는 왜 삼남지방에서만 집중적으로 민란이 발생하였는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될 수는 없다. 여기서 우리가 발견할 수 있는 한 가지 흥미 있는 현상은, 조선 제일의 면포생산지인 진주지방을 비롯하여 삼남의 유명한 면화생산지와 직포지의 상당부분이, 그리고 미작을 위한 대토지 소유가 전개되고 있던 지역이 민란발생 지역과 일치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농민들의 공격대상에 탐관오리와 양반뿐만 아니라 처음으로 부호(부농)까지 포함되어 나타난다. 이러한 사실들을 농업의 상업화와 관련시켜 볼 때, 이미 농민층 내부에서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민란의 주체는 농민분화에 의해서 몰락했거나 몰락에 직면한 농민층이었다고 추정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농민의 어떤 계층이 어떤 상황에서 보다 격렬하게 저항운동에 참에 불과하며, 47.2%가 개항액이 지주로 성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일제시대 대지주의 사회적 배경을 연구한 논한 의하면, 조사대상자 233명중 양반 출신이 172명이고 평민이 59명이었다. 그런데 확립 중 1920년대 확전에 대 지주가 되었던 경우는 112명으로 여기서 양반과 관리를 제외하면 농업종사자가 1명, 상업종사자가 7명으로 되어있다. 그렇다면 개항액이 쌀의 상품화를 통하여 대지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계층은 주로 현물로 지대와 조세를 본 하던 지주층과유제품 리, 그리고 일부의 자작농과 상인층이라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쌀의 상품화를 통해서 부를 축척층이라고 볼 기회가 일부 계층에 한정되었던 또 다른 이 볼, 쌀 생산력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볼 보다 많은 추가자금이 요구되을 위한이었다. 따라서 일찍부터 대지주 의 한 보 많은 활발했던 충청남도와 전라북도에서 쌀의 상품화가 선행하였으며, 상대적으로 있다.방 농민층의 몰락도 다른 있었던 기해 경우 되었을 것이다. 여기쌀의 급격해서볼일수출 자체 무역업 생산력의 성장과 보읰 통맞추어 무된 것이 아니었을 위한 서볼무역의 선행과 일본 상인활발했고리대적인 곡물수매방법으로 인하여 조선농민의 몰락은 일반적인 쌀이었인하여 조선농민의 몰기도에서는 쌀의당연히 조선사회 해서볼 식량위기와 곡가섬유제가의 상승덄 초래하여 가난한 농민들 식는 쌀의 상품화를 통해서 ‘면미교축척층이기회 자체 무존재하적으않았다. 쌀의 상품화가 일부 계층에 한정되어 무되었던 것던 기해서섬유콩의 경우는 수출시장이 급속히 열림던 따라 경작기술어 무던 추가부담이 A치부소요되적으않았을 위한 서빈농층이라도 상품화를 목적으로 콩의 재배를 되고할 수 있었다. 따라서 콩의 상품화는 남부 .방 중에서 비교적 소작지뱘 기율이 적었던 경상북도에서 가장활성화 되었다. 1 제외후반이 농작물 남부 .방 중에서도 경상도 특히 경상북도는 쌀 뫬화 연초 인삼 맱 있중심으로 작지뱘 기율어 무이 두드러졌다 몰한다. 이러한 상지뱘 기율어 무은 주로 수리시설적으않업기술어 진보와 이던 다.
목차Ⅰ. 머리말Ⅱ. 본론1. 中人의 성립시기2. 「中人」의 범위와 형성 원인3. 「中人」명칭의 유래4. 技術職中人의 차별과 通淸운동Ⅰ. 머리말우리나라 역사상 中人이라는 독자의 신분층이 형성되어 兩班과 常人의 중간적 위치에서 특수한 역할을 담당한 것은 대체로 17세기 중엽 이후부터이다. 中人은 兩班 다음의 지배층으로서 일정한 정치적 지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까닭에 서얼이나 노비처럼 신분상승운동에 극도로 예민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이후로 노비와 서얼이 대규모로 해방되는 추세에 자극되어 집단덕인 신분상승운동을 벌이게 되는데 中人은 開港이후 倭洋세력과 접촉하면서 소위 開化政策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들의 전문적 지식이 높은 효율성을 드러내어 開化派의 先頭走者로 부상하게 된다.따라서 조선후기 社會史에서 中人의 존재는 중요한 의미를 가짐에도 불구하고 아직 만족할 만한 연구 성과가 나타나고 있지 못하다. 여러 편의 논문자료가 많은 참고가 되나 中人의 정치적 지위, 그리고 中人의 성립시기에 관해서는 더 해명되어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있다.哲宗 2년 (1851)에 일어난 技術職中人의 通淸운동자료는 中人 자신들에 의해서 작성되었고, 그 자료 속에 中人의 형성시기, 中人의 정치 사회적 지위, 中人의 의식구조 등 中人에 관한 정보를 포괄적으로 담고 있어서 中人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앞으로 中人연구는 戶籍 · 榜目 · 族譜 등을 이용한 統計分析的 硏究도 시도 되어야 하겠지만, 우선 實錄 · 文集 · 法典 그리고 위 通淸운동자료 등을 이용한 구조적 접근 방법도 병행될 필요가 있다.)Ⅱ. 본론1. 中人의 성립시기중인이라는 칭호가 생겨난 시기를 대체적으로 인조 이후로 보고 있는데 구체적으로 관련 기사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① 臣들은 諸學을 世業하여 지위는 비록 卑微하지만 國初 [士族과] 구별되고 제한을 받지는 앉았으며 재주에 따라라 [일반관직에] 등용되었습니다. 大典通編에는 ?醫 · 譯 · 律 · 曆등에 정통한 사람은 京外의 顯官에 啓授한다?고 되어있습니다. …… 法典을 두祿을 구하는 방법으로 삼았으며, 그 후손들은 가정에서 [父業을] 익히고 배워, 학문은 집안의 대물림이 되고 관리로 나가면 창고를 이어가게 되었습니다. 正學에는 힘쓰지 아니하여 사람들이 천하게 생각하고 士大夫 밑에 두었으며, 드디어 中人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습니다. 대체로 仁祖이후로 그러한 명칭이 생겨났습니다. …… 또한 臣들의 족보를 살펴보면 10世아래로는 淸顯의 자리를 거친 이가 많은데, 이를 통해서 말한다면, 臣들은 본래 士族의 후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위 세 자료중 ①과 ③에서는 분명히 仁祖 이후로 中人의 칭호가 생겨났다고 단정하였고, 자료 ②에서는 300년간 中人의 차별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1850년대의 시점에서는 300년 전이라고 한다면, 그 시기는 대략 16세기 후반이 되어 17세기 초의 仁祖代보다는 다소 앞서지만 여기서는 中人칭호가 300년 전에 생겨났다는 뜻은 아니다. 따라서 中人칭호는 仁祖 이후 생겨났지만, 中人세습화 경향은 16세기 후반 경부터 두드러지기 시작했다고 해석한다면 두 기사 사이에 모순이 생기지 않는다. 자료 ③에서 中古이래로 기술직이 세습되어 仁祖 이후로 中人 칭호가 나타났다고 한 것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말해 준다.위 기록을 통해서, 적어도 19세기 중엽의 中人들 스스로가 인식하고 있는 「中人」칭호의 시발은 17세기 초이며 中人 세습화 경향은 16세기 후반 이후부터 현저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中人들이 仁祖代를 그 칭호의 시발로 인식하고 있는 주요 근거지는 자신들의 족보에 10代 이상은 淸顯에 오른 자가 많다는 사실에 두고 있다. 1代를 대략 30년으로 잡는다면 10代 300년이 된다.이 밖에도 中人들은 조선 초기 이래로 300년 전 이전까지는 技術職에 있다가 技術官으로 나간이도 많고 中人들 스스로 내세운 實例들 말고도 技術人들이 高官으로 나간 사례나 高官子弟로서 技術官이 된 사례는 얼마든지 더 찾을 수 있다. 문제는 中人들이 자신의 뿌리를 士族이라고 생각하고, 국초에는 名門大族으로서 技術官에 종사한 사례와 技術 ① 儒學 ② 武學 ③ 史學 ④ 譯學 ⑤ 陰陽風水 ⑥ 醫學 ⑦ 字學 ⑧ 律學 ⑨ 算學 ⑩ 樂學을 가리킨다. 이 10學 중에서 儒學과 武學은 양반만이 하는 것이고, 나머지 8學은 中人의 專業인 것처럼 흔히 생각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 4品 이하의 모든 관리 ( 見任의 三館 7品 이하 관리만 儒學에 한정했다) 가 技術學을 시험 치도록 조처하고 있는 데서 기술학이 특정한 신분의 전업이 아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儒學만은 三館의 7品 이하 관리에게만 한정하여 특례로 취급하고 있음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 본다면 대부분의 관리에게 技術學을 장려하고자 하는 것이 이 조치의 근본 취지인 것이다.技術學을 장려하는 조치는 世宗 때도 없지 않았다. 세종 때의 과학기술 발전과 음악의 발전 등이 그러한 정책의 소산임은 두말한 나위도 없는 것이다. 한편 기술학 장려정책은 世祖때에도 보인다. 세조는 재위 9년 5월에 「諸學이 精하지 않으면 안 되고 醫 · 算 과 같은 雜學도 모두 精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申叔舟도 이에 동의하여, 다음해 7월에는 年少文臣들을 7學으로 나누어 학문을 전문적으로 습득하도록 조치했다. 이때 7學은 ① 天文 ② 風水 ③ 律呂(음악) ④ 醫學 ⑤ 陰陽 ⑥ 史學 ⑦ 詩學으로서, 史學과 詩學을 빼고는 모두가 雜學에 속하는 것이다.세조 다음으로 崇儒君主이던 成宗조차도 技術學에는 매우 관용적인 임금이었다. 특히 醫官과 譯官의 東西班 擢用을 실천하였다.대체로 15세기에서 16세기로 넘어가면서 국가시책상 기술학을 장려하는 정책은 미약해지고 기술학 장려에 대한 儒臣들의 태도도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간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추세가 결국은 기술직 세습인 으로서의 「中人」의 형성을 가져오게 한 원인의 하나가 된 것이지만, 적어도 15~16세기의 2백년 시기를 놓고 본다면, 19세기 中人들이 국초를 자기시대와 다르다고 하는 주장은 상당한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2. 「中人」의 범위와 형성 원인「中人」이라 불리는 계층에 어떤 부류의 사람들 향촌에서 《磻溪隧錄》을 썼던 만큼 17세기 후반의 지방사회에서 校生이 中人으로 자처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그렇게 썼을 것으로 보인다.18세기 말 19세기 초의 학자 丁若鏞은 「우리나라에서는 醫 · 譯 · 律 · 曆 · 書 · 算數者를 中人이라고 한다.」고도 하고, 또 「良人으로서 遊學하는 자」로서 校生도 中人에 포함되는 것으로 쓰고 있다.결국 이러한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관변쪽에서 파악하는 中人은 중앙의 고급 기술관원에 한정되어 있고, 재야 지식인들이 파악하는 中人은 지방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서얼 · 향리 · 교생 등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것도 개인에 따라 조금씩 시각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반계수록》에서 中人을 일명 「閑散方外」라고 표현한 것도 地方人의 시각에서 지방의 中人을 의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中人」범위의 복잡성은 中人을 자칭하는 부류들이 생겨난 데서 연유하며, 그 복잡성 때문에 「中人」사이에 자기갈등이 일어나는 것은 필연의 일이다. 앞에 소개한 에서는 醫 · 譯 등 고급 기술직 中人만이 진짜 中人이고, 그 밖에 서얼이나 교생 · 향리 등은 비록 中人이라고 자칭하더라도 기술자인 이른바 「雜職」은 醫 · 譯中人 과는 격이 다르다는 것이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中人중에도 여러 等分이 있는바, 그중에서도 동반「正職」에 속하는 고급 기술직 中人이 最上位에 있고, 그 나머지는 中人이 아닌 下人이라고 보는 것이다.)3. 「中人」명칭의 유래中人이라는 명칭은 어디서 유래한 것인가. 종래 이에 대해서는 여러 設이 있어 왔다.먼저, 中人은 조선후기 黨論에서 고급기술관원이 政治的 中立을 지킨데서 유래했다는 주장이 있다. 《象院科榜》에 수록된 中人通淸운동자료에는 西洲散人이라는 익명의 中人이 쓴 글에 崔愼의 《華陽語錄》을 인용하여 中人의 내력이 黨論의 中立性에서 유래했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즉 숙종 때 어떤 醫譯人이 宋時烈을 찾아갔는데, 송시열의 門人이 「어느 쪽 사람이냐」고 묻자 송시열은 「이 사람은 中人」이라고 답변하여 그가 四色의 어느 쪽심부에서 거주한 것은 사실이므로 그들을 「中人」혹은 「中路」라고 부르게 되었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 그러나 조선후기의 中人은 서울의 中路에 사는 技術官員만이 아니라 지방의 校生 · 鄕吏 · 庶蘖까지도 통칭하는 것이므로 이들이 모두 생활거주지의 中央性에서 中人으로 불렸다고 말하기는 어렵다.조선후기의 中人은 黨論에서의 「中立性」이나 居住地域의 「中央性」에서 유래된 호칭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결론부터 말한다면 中人은 계급적 「중간성」에서 붙여진 호칭이다. 中人은 兩班도 아니고 常人도 아닌 그 중간에 있다고 한 것이 단적으로 中人의 계급적 위치를 지적해준다.中人은 조정에 나가더라도 士夫가 되지 못하고, 벼슬을 그만두더라도 常賤이 되지 못하여 氣像이 위축되어 있는 존재라는 것이다.中人이 兩班도 아니요 常民도 아니라는 것은, 兩班 · 中人 · 常民간에 계급적 장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의미한다. 17세기 후반의 에서는 兩班 · 中人 · 常人간의 衣服 · 稱號 ·坐席의 차이가 엄준함이 보고되어 있는데, 특히 常人과 中人의 장벽보다는 中人과 士族의 장벽이 더 엄격하다는 것이 지적되고 있다. 물론 에서 말하는 中人은 중앙의 고급기술관이 아니라 鄕吏 · 校生 · 庶孼 등 향촌의 中人을 가리키므로, 士族과 中人의 장벽이 中人과 常人의 장벽보다 더 엄격하다고 말한 것으로 생각된다.그러나 兩班 · 中人 · 常人간의 계급적 장벽이 이렇듯 엄격하다 하더라도, 그 장벽은 法制에 의해서 규정된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社會慣習上의 장벽인 까닭으로, 상호간의 上下移動이 전혀 불가능한 身分的 장벽은 아닌 것이었다. 따라서 그 장벽을 뛰어넘는 상하이동은 실제로 있었으며, 시대가 내려갈수록 그 이동은 활발해져 갔다.또한 17세기 후반기에 있어서도 계급간의 이동은 마찬가지로 일어나고 있었던 것이니, 앞서 인용한 바 있는 에서는 奴婢의 신분해방과 中人의 士族上昇운동을 개탄하는 뜻에서 쓴 글이지만, 中人들이 士族으로 행세하기 위해 戶籍 · 正案 · 赴擧 · 都目 등에서 「幼學」으로 쓴다는 보고가 매우
=목차=1. 서론2. 본론 (에게문명)1) 크레타문명(미노아문명)2) 미케네 문명3. 결론 (트로이 문명)1. 서론에게문명은 크레타 섬, 키클라데스 제도, 그리스 본토의 남부, 소아시아 서해안의 트로이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치는데, 크레타로 대표되는 남방계의 도서 문화와 미케네로 대표되는 북방계의 본토 문화로 나눠진다.선진 사회인 오리엔트 문화권과 해상 교통을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일찍이 개화되어 고도의 문명이 성립되었다. 에게 문명의 세계는 과수 재배와 해상 교역을 생활의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것이었으며,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오리엔트와 그리스, 즉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그 존재는 19세기 중엽까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독일의 고고학자 H.슐리만에 의한 트로이, 미케네의 발굴과 영국의 고고학자 A.J.에번스에 의한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의 발굴 등에 의하여 차차 명확하게 되었다.간단히 설명하자면 BC2000년 경부터 크레타 문명이 동지중해 해역의 주도자가 되었고, 이어서 미케네 문명이 전 지역을 통일하게 되었다. 미케네 문명은 철기를 가지고 남하한 그리스인인 도리아 인에게 멸망하였으며, 이 후 폴리스 중심의 그리스 문명이 나오게 된다.2. 본론 (에게문명)1) 크레타문명(미노아문명)BC 2000년경에 아마도 중부 유럽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되는 민족이동의 여파를 받아 초기 청동기문명이 붕괴되고, 에게해 주변의 세계는 크레타섬을 중심으로 하는 중기 청동기시대로 들어간다. 크레타섬은 동(東)지중해의 중앙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오리엔트세계, 특히 이집트와의 교류가 있었다. 또한 다른 섬들보다 훨씬 면적이 넓은 데다 평야가 많은 점 등으로 조직적인 문명 성립에 필요한 조건을 구비하였다.처음에는 동부와 중부에 각각 독립적인 세력이 분립되어 있었는데, BC 2000년경에 크노소스를 중심으로 하여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져, 미노스라 불리는 왕이 섬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정치 ·군사 나 곧 보다 큰 대규모의 새 궁전이 재건되어, 그 뒤 약 2세기 동안 크레타문화는 절정기를 이루었다.특히 수도 크노소스는 인구 8만을 헤아렸으며,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으로서 번영하였다. 크노소스궁전은 경사진 곳에 가운데 마당을 사이에 끼고 수백의 작은 방을 배치한 복잡한 계획에 의하여 건립된 대건축으로, 소위 미궁(迷宮:라비린토스)로서 유명하다. 거기에는 제례 ·공무(公務)를 위한 방, 왕족의 사실(私室) ·공방(工房) ·창고 등이 있는데, 중요한 방은 대부분 선명한 벽화로 장식되고 채광과 배수시설도 세심하게 배려되었다. 다른 지역의 궁전도 대소의 차이는 있으나, 계획 ·장식방법 등에서 크노소스와 공통된 성격임이 확인되었다.크레타는 BC 1400년경에 그리스 본토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크노소스를 비롯한 각지의 궁전은 파괴되었으며, 주민은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후 에게문명의 중심은 그리스 본토로 옮겨가게 되었다.2) 미케네 문명그리스 본토에는 테살리아의 문화로 대표되는 초기 그리스문화가 있었지만, 북방 산지로부터 남하해온 아카이아인은 이 선주민을 정복, BC 2000년을 전후하여 본토 남부의 각지에 소왕국을 건설하였다. 미케네 ·티린스 ·오르코메노스 ·필로스 등이 그 주요한 곳이었다. 그들은 서서히 선진문화를 흡수하고 군사력 ·경제력 등을 충실히 하여 본토에서의 지위를 확실하게 다져나갔으며, 특히 BC 1600년경부터 급속히 그 힘을 증가하여 남쪽 크레타를 대항할 만큼 되었다.그 중에서도 미케네는 가장 강대하여 본토 여러 세력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으며, 특히 크레타의 붕괴 후 지중해 각 지역과의 교류에 지도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왕궁은 미케네문화의 특성을 가장 잘 나타낸 것으로 낮은 산등성이 위에 바위산을 등지고 구축되었으며, 크레타궁전의 개방성과는 대조적으로 성새(城塞)로서의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주문(主門)으로서 유명한 ‘사자문(獅子門)’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장려한 궁륭묘(穹墓)와 원형의 묘군(墓群)도 성벽 내에 만들어졌으며, 또한 몇 개의 주실 들어서이다.BC 1200년경부더 그리스 본토에 도리아인이 남하해오자 이를 막지 못함으로써 BC 1100년경에 미케네를 비롯하여 여러 도시가 붕괴되었고, 에게문명은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리스는 암흑시대로 접어들게 된다3. 결론 (트로이 문명)크레타 문명과 미케네 문명 이외 간단히 트로이 문명을 언급하자면 트로이문화는 에게 해의 유럽 쪽, 레스보스 섬, 소아시아의 내지로 퍼져 갔으나 에게 세계의 동북부에 한정되어 있고, 크레타와의 접촉은 찾아볼 수 없다. 트로이 문명은 크레타문명을 이은 미케네문명 국가들의 침략(트로이 목마사건)에 정복되고 만다. 이 트로이문화는 19세기에 독일인 슐레이만에 의하여 발굴되었는데 그가 49세에 트로이 문화유적을 발굴하게 되고 트로이 문명이 허구가 아닌 역사적인 사실임을 증명하게 된다.에게문명은 아직까지 무한한 유적과 연구자료가 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다른 문명에 비해 많이 뒤처지는 것이 사실이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슐레이만처럼 열정을 가지고 에게문명에 조금 더 관심을 가진다면 우리가 알지 못하고 사라져 가는 소중한 역사를 들춰내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하인리히 슐리만과 트로이 문명 문제제기오픈백과사전 분류 : 역사, 인물 > 세계사 > 서양사"트로이, 우리는 그 이름만 들어도 얼마나 많은 것들을 떠올리게 되는가! 우리 아카이아인들이 거기서 참아야 했던 불행들은 어떠했던가! 아킬레우스가 시키는 대로 약탈을 하기 위해 안개 자욱한 바다를 가로질러 이어졌던 공격들, 프리아모스의 왕도의 성벽을 에워싸고 벌어졌던 전투들........." 왕이 잔치를 베푸는 자리에서의 일이었다. 노년의 왕 네스토르는 그리스 서쪽 연안에 있는 이타카 섬에서 찾아온 귀족들을 위해서 잔치를 베풀었다. 자연스럽게 화제는 피의 원정에 대한 기억들로 옮겨졌고 북쪽으로 몇 백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트로이의 푸르른 평원에서 이루어진 습격과 전투 이야기도 나왔다. 네스토르는 그 전쟁들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했다. 그와 동료 군인들권의 거대한 저작으로 집대성 되었다.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가 그것들이다. 민간에 전설에 의하면 이 위대한 저적들은 시인 호메로스가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장기간에 걸친 트로이 전투, 용감한 족장들의 영웅적인 행위, 신의 계획과 인간의 연약함에 대한 호메로스의 감동적인 이야기들은 그리스 고전 문학의 기초가 되었다.일부 고전학자들은 트로이가 실제로 있으며 호메로스가 진실한 역사를 기록했다고 열렬히 믿었다. 하인리히 슐리만 역시 고대 트로이가 존재한다고 철저히 믿으며 그것을 찾으려고 나선 인물이었다. 슐리만은 동서 고금을 막론하고 고고학계에서 가장 뛰어난 학자로 손꼽히는 인물 가운데 한명이다. 그는 1822년 북독일 한 시골 교구의 개신교 성직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그리스, 트로이 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자라났다. 그는 아버지의 이야기가 사실임을 믿었다. 하지만 너무 가난해 학업을 중단했다. 그리고 오랫동안의 노동으로 차츰 학업에 대한 열망도 수그러들게 되었다. 어느날 가게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던 술에 취한 방앗간 주인이 무심결에 호메로스의 시 100행을 그리스 원어로 음송하기 시작했다. 슐리만은 계산대에 몸을 기댄 채 황홀하게 듣고 있었고 방앗간 주인이 음송을 마치자 위스키 3병을 주며 그 시들을 다시 음송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때부터 놀라운 의지력을 발휘하여 연봉의 절반을 학업에 쓸 정도로 열정적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6주에 하나씩 언어를 하나 씩 정복해서 독일어는 물론 네덜란드어, 스페인어, 이탈리아어, 포르투갈어 등을 모두 알 게 되었다. 그리고 사업을 하여 돈을 번 후 41세때 사업에 손을 떼게 되었고 트로이를 발굴하러 그리스로 가게 되었다. 그는 여러 언덕을 돌아다니다가 히사를리크 언덕을 발굴 하게 되었는데 그는 어리석을 정도로 거창한 일을 여기서 하게된다. 삽과 인부들만으로 39M의 도랑을 팠는데 모두 25만 제곱 미터에 해당 하는 땅을 파내었다. 그가 사용한 방법들은 충동적이고, 직접적이고, 비용이 많이 드는허무한 죽음을 맞게 되었는데 1890년 성탄절날 나폴리의 한 광장에서 쓰러지게 되었다. 외모에 신경 쓰지 않는 슐리만을 100만 장자로 보는 이는 아무도 없었고 금방 병원으로 옮기지 못해 몇시간 후 숨지게 되었다. 우리가 슐리만에게 헌사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묘비명은 아마도 호메로스의 저술 안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직접 아카이아 사람들과 같이 있었으며 그게 아니라면 바로 그 사람으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슐리만의 위대성은 선사시대를 일반 대중의 것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데 있다.크레타섬, 키클라데스제도, 그리스 본토의 남부, 소(小)아시아 서해안의 트로이 등 광범위한 지역에 걸치는데, 크레타로 대표되는 남방계의 도서문화와 미케네로 대표되는 북방계의 본토문화로 나눠진다. 이 지방은 다도해(多島海)로서 많은 섬들이 흩어져 있는 데다가 기후도 온난하여, 포도 ·올리브 등의 천연산물이 풍부하므로 인간의 정착 지역으로 적합하였다.특히 선진사회(先進社會)인 오리엔트문화권과 해상교통을 통해 직접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유럽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서 일찍이 개화(開化)되어 고도의 문명이 성립되었다. 인종적으로는 비(非)아리아계의 소아시아인을 중심으로 하는 혼성민족이었으나, 민족이동의 결과로 아리아계도 섞이게 되었고 지역에 따라 인종이 달랐다.에게문명의 세계는 과수재배와 해상교역을 생활의 기반으로 한 독자적인 것이었으며,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도 오리엔트와 그리스, 즉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다. 그 존재는 19세기 중엽까지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으나, 독일의 고고학자 H.슐리만에 의한 트로이 ·미케네의 발굴과 영국의 고고학자 A.J.에번스에 의한 크레타섬의 크노소스의 발굴 등에 의하여 차차 명확하게 되었다.1. 성립이 지역에 인간이 생활하기 시작한 것은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서 그리스 본토의 테살리아, 크레타섬, 소아시아 서해안 등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BC 2600~BC 2200년에 걸쳐 석기에서 금속기로의 이
※목차※Ⅰ 서론Ⅱ 본론1. 커뮤니케이션이란?2. 참고면담과 언어적 커뮤니케션의 이해1) 참고면담에서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2)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종류Ⅲ 결론Ⅰ. 서론도서관 업무에서의 참고면담은 첫단계에 해당된다. 정보서비스 과정에서는 여러단계의 과정이 있는데, 이용자와 사서가 서로 의사소통을 하면서 이용자의 요구사항을 사서가 알게 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참고면담에서의 의사소통, 즉 커뮤니케이션은 큰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커뮤니케이션의 정의에 대해 살펴보고, 참고면담과정에서 커뮤니케이션의 기법 중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자.Ⅱ. 본론1. 커뮤니케이션이란?커뮤니케이션의 일반적인 의미로는, 개념이나 뜻의 전달 및 통신과 사상의 표현이나 교환을 말하는 이른바 의사전달을 의미하며, 자기표현에 있어서 가장 기초적인 노하우의 요소로 여겨지고 있다.나아가 서로 대변하고 있는 개인간에 이루어지는 커뮤니케이션을 대인 커뮤니케이션(Personal Communication)이라 하고, 신문이나 잡지, 라디오나 TV 등의 매스 미디어(Mass media)를 통해 행해지는 커뮤니케이션을 매스 커뮤니케이션(Mass Communication)이라고 불리운다.2. 참고면담과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이해1) 참고면담에서의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참고면담은 사서와 이용자간의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인커뮤니케이션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서로간의 의사소통으로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바로 적용할 수 있고, 변화가 가능하다. 커뮤니케이션에도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언어적 커뮤니케이션과 비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이 그것이다. 그 중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을 다룰 것이다.참고면담에는 과거부터 여러 가지 면담기법들이 있었지만, 그 중 가장 널리 쓰였던 폐쇄적 질문방법은 정보의 성격, 정보요구행동, 정보봉사의 목적 등에대한 설명이 결여되어 있다는 단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단점을 보안하기위해 고안된 여러 가지 이론 중 구체적인 상담의 목적에 따라 그 기법이 다양하지만 커뮤니케이션기법이 참고면담의 기법과 유사하기 때문에 도입되어 활용되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이들 커뮤니케이션기법들이 참고면담이라는특수상황에 맞도록 보안되어야 할 것이다.2) 언어적 커뮤니케이션의 종류① 신뢰감참고면담을 수행하기 위한 첫 가제는 신뢰감을 형성하는 일이다. 면담의 처음에는 수용적이고 온화한 태도로서 이용자에게 깊은 관심을 나타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러한 사서의 태도와 관심이 보여져야만 이용자가 사서를 믿고 편안한 상태에서 면담을 시작 할 수 있을 것이다.② 수용수용이란 짧은 문구로 표현되는 사서의 반응을 말한다. 이러한 반응은 이용자에게 주의를기울이고 있으며, 이용자의 말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서의 태도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는 이용자가 사서에게 자신의 요구를 좀더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수용기법들은 극히 사소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무시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들로 여겨지고 있다.③ 질문기법참고면담은 사서가 참고질문에 간단히 대답할 수 있을 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이용자의 요구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해 다시 질문함으로써 일어나는 것이다.질문기법에는 폐쇄적 질문기법이 있는데 이는 “예”, “아니오”라는 대답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서와 이용자간의 대화를 제한하여, 이용자의 진정한 요구를 파악하는데 어려움이 있다. 반면에 개방적 질문은 이용자에게 말을 할 수 있도록 유도해 주믕로써 사서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점까지 얻어낼 수 있는 방법이다. 이들 질문의 유형은 각각 다른 상황에서 모두 적절할 수 있는 선택적인 방법이기 때문에 면담과정에서 적절히 선택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특히 참고면담은 대부분 공개된 장소에서 단시간에 해결해야 하는 특수 상황이기 때문에 폐쇄적 질문방법도 적절히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④ 자기노출자기노출이란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에 대한 자신의 느낌을 그 사람과 공유하는 것이다. 이용자들은 간접적인 표현을 사용하는데 이용자가 정서적 안정감을 가지고 정보요구를 표현할 수 있다록 하기 위해 자기노출이 필요하다. 사서는 이용자가 마음을 열고 참고면담에 응할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하야야한다. 하지만 개인의 느낌이나 상황을 고려하지 않는 자기노출은 비효과적이다. 결국, 자기노출에 대한 사서의 용기와 노출의 적절성에 대한 민감성과 안정감은 사서의 효과적인 자기노출을 가능하게 한다.특히 사서의 수동적인 봉사보다 능동적인 봉사의 이미지를 보여주는 것이 바람직한 자기노출의 방법이며, 이렇게 할 때 이용자는 자신의 완전한 요구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⑤ 민감성도서관은 사서와 이용자간의 인간적 상호작용이 일어나는 곳이기 때문에 사서는 이용자의 전체를 파악하여야한다. 따라서 모둔요소에 대한 민감성이 요구된다. 즉, 이용자에게 제공되는 정보는 사서가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이용자의 실제요구와 관련된 것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서로서는 이용자의 요구에 민감해야 한다.⑥ 수평적 태도수평적 태도는 긍정적이며, 비위협적, 비경쟁적인 성격으로 타인과 동등한 관계를 유지하며, 우호적이고 타인의 성장과 행복을 기뻐한다. 또한 인간관계에 있어서도 자유스럽고 일관성이 있다. 이러한 수평적 커뮤니케이션을 유지하기 위해 사서는 이용자와의 관계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밝히고, 질문을 통해 이용자의 뜻을 정확히 알아내며, 이용자와 의논하여 방법을 모색하고 실제로 협조하며 자신의 감정도 공손히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이러한 수평적 태도의 유지는 민감성보다 사서 자신의 노력 여하에 따라 크게 강화될 수 있는 커뮤니케이션기법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