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론에른스트 랑에는 1927년 독일에서 태어난 신학자이다. 독일인 아버지와 유대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미국과 독일 등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지역 교회에서의 목사로, 출판사 책임자로, 교수로 있으면서 다수의 논문을 발표하였으며 이 시기를 거치면서 실천-신학적 사고를 발전시켰다.랑에의 신학은 구체적으로 일상생활과 관련된 신앙 세계관을 피력했으며, 일상생활과 신앙은 결코 분리 될 수 없이 일치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랑에는 예배는 전 삶과 관련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인의 삶이 예배가 되어야 하고, 우리의 일상생활을 통해 자연스럽게 신앙이 드러나야 하며, 일상생활에서의 문제는 신앙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실제적으로 요즘 세대의 한국 교회는 교회 예배당 안에서 드리는 공 예배와 실제의 삶을 연결시키지 못 하며, 그리스도인의 일상생활 자체가 예배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잊고 살며 또 그 사실에 대해 전혀 도전을 받지 못하고 있어 선데이 크리스쳔 이라는 문구까지 생겨난 지경에 이르렀다.현대처럼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가고, 모든 것이 아우러져 통합되어가는 시대에 있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과 생활, 인생에 대해 정확한 인식을 하고 있지 못하다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녀로서의 삶은 어려울 것이라고 본다. 특별히 예배라고 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성경적인 정확한 인식이 필요하다고 본다. 여러 사람들이 그냥 좋다고 생각하는 부분이 아닌 성경 안에서 하나님이 정확하게 말씀하신 예배에 대해 알고, 우리의 삶 가운데서 적용을 하여 단순히 주일 공예배 시간에만 드려지는 예배가 아니라 우리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 진정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가 우리의 삶 가운데서 있기를 소원한다. 이에 우리보다 앞선 세대에서 삶에 대해 고민하며 진정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에 대해 연구하고 그에 대한 신학을 나름대로 정리한 에른스트 랑에의 글을 통해 성경적인 예배의 관점을 알아보고, 나의 삶을 돌아보며 또, 나의 삶을 변하시킬 하나성경적인 전통의 중요함에 따른 인간의 약정으로, 약정과 함께 그리고 약정 아래에서 삼위일체 하나님 자신을 증명하는 언약으로 나타나며 이러한 언약은 하나님 자신께서 채워 주시므로 설교자는 설교의 성취에 대하여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하는 바르트의 설교-신학적 이해에 대한 기본 방향으로부터 기인한다. 이같은 계시 신학적 출발의 배경 하에서 랑에는 위에서부터 의 설교 이해를 또한 현대 해석학을 통한 아래로부터 의 설교 이해로 발전 시켰다. 언약에 대한 온전한 하나님 말씀으로서의 설교와 책임있게 구성하는 교회의 시도로서의 설교는 분리 할 수 없이 함께 속한다. 그러므로 랑에의 경우 설교 사역 주제는 언약을 가지고 있는 책임적인 인간 사역으로서의 설교 위탁에 관한 인식이다.랑에의 견해에 따르면 그리스도 언약의 빛 안에서 청중의 삶에 대해 그들과 함게 하는 말은 설교의 핵심점 안에 있다. 이와 관련해서 성경 본문은 회중과 함께 의사 전달하는 측면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한다. 이미 언급한 것처럼 랑에는 설교 준비 때에 중요한 요인으로서의 사회적 상황에 있는 설교의 청중을 명시한 것을 통하여 결정적으로 청중에게 경의를 표한다.한편으로 랑에는 하나님 말씀신학의 경우 언약과 실재의 일치를 이루는 데 많은 어려움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에 랑에의 신학적 기본 토대는 하나님의 말씀신학을 통하여 강한 자극을 받았다. 그는 본훼퍼의 신학적 사고의 수용을 통하여 바르트의 예배와 설교 이해에 따른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시도했다. 랑에는 본훼퍼의 종말론을 연구하면서 교회의 개혁에 대해 기독교 전승의 핵심 말씀은 가시적 교회로부터 그리고 교회에게로 더 이상 해석되지 않으며 이것은 해석학적 위기이기보다는 교회와 세상과의 관계 위기는 새롭게 갱신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고, 교회가 교회의 존재되는 것은 세상을 위한 대존재 안에서 결정된다고 하였다.기독교 신앙의 본질은 자신만을 위한 기복 신앙이 아니라 고난받는 이 세상의 어려움과 대결하는 신앙이며, 세계의 고난에 참여하는 신앙이요, 세계의 고난 속에서 고이것을 뛰어넘어 더욱 발전시킨다. 특히 예배학 안에서 일상생활의 기회 또는 언약의 빛 안에서의 매일의 실재 에 대한 묘사를 시도한다. 이처럼 그의 예배학의 토대는 언약과 실재 를 이루려고 하는 시도로 형성된다. 그리스도의 언약은 목적 아래에서 그리고 실재로부터 해결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또한 목적 아래에서 또는 그리스도 언약으로부터 해결된 실재를 수용하지 않아야 한다. 이와 관련해서 랑에는 계약의 갱신으로서의 기독교 예배 를 보았으며 여기서 의사 전달 사건이 나타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교회는 언제나 사실과 일치하는 원칙을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오늘의 사실인 명령을 선포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항상 사실인 것이 오늘 에는 사실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항상 바로 오늘 의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의 본문, 성경적 복음은 신학적으로 모든 경우를 위하여 바르며 해석한다는 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오늘 은 또한 라에 설교학과 관련해서 원칙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여기서 그는 말씀이 육신되어짐 , 즉 우리 역사적 존재의 실재를 강조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개인적 인간의 삶에 대한 역사의 정황에서 단지 논제에 적합하게 발전 될 수 있는 지식을 가져다준다.랑에의 경우, 이러한 연결은 청중이 설교 주제의 핵심적인 논제이다. 이러한 새로운 설교학적 출발로 그는 설교의 대화적 구조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단지 설교자가 청중과 함께 의사 전달적인 관계로 매몰되는 곳에서 성공할 수 있다. 설교는 청중의 상황에 설교자가 참여하는 것으로부터 성장하며, 또한 청중의 상황을 정확히 이해한 후 설교의 목표를 찾아야 한다. 랑에는 이것을 좀 더 분명하게 서술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설교는 대화와 대화 사이에 있다. 사실 설교는 청중의 삶의 정황을 파악하여 새로운 삶에 대한 관점을 수용하도록 하여 다른 빛으로 옮기게 한다.3. 랑에의 예배-신학적 관점의 특징랑에의 예배학은 1965년에 출판된 일상생활의 것이다. 동시에 산업 사회에서 교회의 새로운 위치를 고려하는 액화와 전래적인 교구 구조의 변화의 시도를 다루고 있다. 랑에는 교회의 개혁을 위한 이런 시도들을 그의 논문에서 자세하게 서술한다. 그 밖에 랑에의 사역은 또한 1960년 이래 독일 교회에서 있었던 개혁 운도, 특히 예배와 설교 및 새로운 형태를 위한 공동체 사역을 위하여 지대한 공헌을 했다.4. 랑에의 경험적 접근으로서의 일상생활의 기회랑에 예배학의 특징은 우선 신학적으로 전문적인 대화에 기인한 것이 아니다. 즉, 그이 예배학은 다른 신학자들의 인용을 통한 신학적 전문 서적이라기보다는 설교자와 공동체가 함께하는 대화에서 기초한다. 따라서 그의 예배학을 구체적으로 다른 신학적 착상들과의 논쟁을 통하여 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신학자들의 간결한 인용과 그의 예배학 뒤에 있는 독자를 위한 조언 을 통하여 타 신학적 주안점과의 관계를 분명히 하지만, 단지 그 부분적으로 그들의 신학적 입장을 수용한다. 여기서 랑에는 이미 언급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 신학을 매우 중요하게 참고한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 신학과 함께 특별히 설교적 숙고 안에서 논쟁을 한다. 여기서 바르트 설교학은 랑에의 예배학과 관련이 있다, 아울러 랑에 예배학은 여러 신학자들과의 대화를 통하여 현재 기독교 예배에 따른 문제점과 이에 대한 가능한 대답을 시도한다. 그는 기독교 예배의 기능을 위한 신학적인 숙고 때, 목사로서 교회 공동체 사역에 참여하여 구체적인 현장 경험을 한다. 이것은 그의 예배학에 대한 결정적인 배경을 형성케 한다. 더불어 랑에 예배학의 가장 집중적 관심은 오늘 안에 있는 그 어떤 무엇을 포함하는 것이다. 이때 그는 본훼퍼 신학을 결정적으로 수용한다. 함부르크 대학 실천 신학자 코르넬은 성경 신학과의 관계 속에서 랑에 예배학에 대한 기본 토대를 예수의 선포와 실재에 대한 묘사는 주요 핵심을 형성한다. 그리고 자유로운 악령을 파계하는 해결의 말씀으로서의 예수를 다시 중심 안에서 형성한다. 랑에의 예수 묘사는 관련된 부차의 통치는 샬롬 을 통한 예수의 설교에서 현대의 구체적인 상황을 위하여 가장 의미있게 된다. 이것은 샬롬의 폭넓은 사건의 관점으로 나타난다.랑에의 견해에 따르면 교회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인간들에게서 믿음을 찾으시며,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실현에 대한 도구와 열매로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예배는 단지 예수의 예배만이 모든 사람들과 일치되며 실현될 수 있다. 특히 복음 , 작용하는 말씀 , 보증 , 그리고 언약 의 개념들은 예수 예배의 근본적인 토대를 이룬다.교회의 예배 : 교회의 예배는 교회 또는 그리스도 언약으로부터 이루어진다. 왜냐하면 그리스도 언약은 회합과 공존 및 인간들의 합동극에 의하여 믿음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예배는 그리스도 약속에 머무르며, 동시에 예배는 인간의 사역이다.여기에서 랑에는 도대체 그리스도의 언약에 머무름이 무엇을 의미 하는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다. 그는 우선 이 문제를 신자들이 서로 함께 머무른 것이라고 피력한다. 동시에 신자는 철저하게 믿음의 시초로서의 성경적 전승으로 행한다. 또한 랑에는 이 문제를 삶의 일상적 실재와 현실의 체류 로서 피력한다. 언약은 매일의 실재에게 유효하다. 여기서 그는 교회의 선교적인 본질을 보았다. 여기서 그는 현존 과 유효성 및 대화 라는 세 개념과 함께 교회 선교의 본질을 해석한다.설교 또는 공동체 예배는 첫 번째 단계를 형성한다. 여기서 모든 자를 위한 말씀으로서의 약속의 말씀은 각 개인의 상황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관계에서 인간의 교제를 하는 것을 통하여 현실화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배의 의사 전달은 삶의 실재성을 위한 거리에 따라 번역과 구체화를 필요로 한다. 도 번째 단계로서 랑에는 세례 교육 과정을 발전시켰다. 세례 교육 과정은 자립적 판단과 행동을 위한 과제의 관점 안에서 공동체 회원에게 능력을 기르도록 한다. 그는 여기서 특히 청소년 사역, 성경 공부, 부부 세미나 그리고 가정 세미나의 다양한 형태를 명명한다. 구체적 상황과 책임적 있다.
사랑은 훈련입니다....('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저'을 읽고...)"사랑이 무엇일까?"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하거나, 혹은 남으로부터 받곤합니다. 빠르면 초등학교 시기에,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춘기라고 불리는 그 시기에 이 질문의 답을 찾으려 참으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합니다. 하지만, 이 질문은 아마도 모든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며 답을 찾아내야 하는 어려운 질문인지도 모릅니다.우리 인간의 마음을 구성하고 있는 한 부분인 감성 또는 감정이란 부분에, 이 '사랑'이라고 하는...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그 감정이 들어오게 되는데, 때론 그것이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주어, 한 개인의 평생을 불행하게도 하며, 반대로 너무도 아름답게 자리잡아, 그 일생을 행복함으로 채울 수 있게도 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는 감정인 것 같습니다.어쩌면, 이렇게도 두가지의 극단적인 삶의 모습을 갖게 해주는 중요한 감정인, 사랑에 대하여 우린 세상이 제시한 왜곡된 형태의 사랑을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받아들이고, 마치 그 사랑이 정답인 양, 실제 사랑을 주고 받으며 함께 살아가야만 하는 많이 이들에게 그 사랑을 전하고, 느끼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TV드라마에서, 그리고 유행가의 가사에서 보고, 느끼는 그 사랑의 표현들이 현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이상적으로 꿈꿀 수 밖에 없는 사랑의 형태로 인식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참으로 아쉽습니다.대학 2학년, 군대를 가기 전에 이 '사랑의 기술'이라고하는 책을 집의 책꽂이에서처음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첨엔 책제목을 보고 '사랑의 기술' 이란 표현이 마치 성적인 의미의 흔히들 말하는 'SEX SKILL'인줄 알고 무한한 호기심으로 뽑아 들었다가, 압도적인 그 내용에 K.O 펀치를 당했던 기억이 납니다.그 당시 사귀던 자매가 있었는데, 군대가기 전 남자들의 증후군이라고 해야할지도 모르는 그 이상한 감정, 생각, 태도들 때문에 그 자매와 자주 다투곤 했었습니다. 그랬던 그 시기에, 이 '사랑의 기술'이란 책은 부족하기만한 제게 참으로 깊은 인상과 그때까지 내 자신이 알고있던, 그것도 하나님안에서 배웠다고 생각해왔던 내 안의 사랑에 대한 많은 생각들과 가치관을 흔들기에 충분한 그런 책이었습니다.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이 책의 저자인 에리히 프롬은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결론을 제 자신이 이해하기로는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습니다.'사랑이란, 인간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인간임을 나타낼 수 있는 실존가치로서의 감정이며, 그 감정은 한 개인 스스로의 노력과 훈련뿐만 아니라 그 개인 속해 있는 사회의 공동체원들간의 성숙된 훈련으로서만이 완성될 수 있는 가장 고귀한 것이다.'또, 이 책에서는 여러 가지의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기술하고 있는데, 그 사랑의 대상은 兄弟愛, 母性愛, 性愛, 自己愛 그리고 神에 대한 사랑으로 나누어집니다. 각각의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아주 간단히 요약하자면, 첫 번째로 兄弟愛라고 하는 것은 모든 인간을 사랑하는 것으로 다른 동료들 또는 모든 인간과의 강렬한 합일감, 융합감, 일체감을 뜻합니다.두 번째로 이 책에서 母性愛는 젖과 꿀로 표현되는데 젖은 보호와 책임을, 꿀은 삶의 달콤함, 삶에 대한 사랑, 살고 있다는 행복감을 아이에게 인식시키는 상징을 의미합니다. 또한 이것들을 적절히 수행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자식은 사랑의 창조자가 될 수 있고 삶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형성 할 수 있게 됩니다.세 번째로 性愛는 다른 사람과의 완전한 융합에 대한 갈망을 의미합니다. 사랑은 일시적으로 다가왔다가 사라져버리고 마는 강렬한 감정만이 아니며 결단이고 판단이며 약속 행위임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특히, 요즘 세대들에게 있어 성적 욕망은 사랑이라는 관념과 짝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사이라면 육체적 관계가 사랑이라고 하는 포장지에 싸여져 가능한 것처럼 인식되곤 하는데 그들이 인식하고 있는 그 사랑에 대한 믿음이 어디까지인지가 궁금합니다.네 번째로 自己愛는 자기 자신의 통합성과 특이성 대한 존경을 의미하는 것으로 먼저 자기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어야만 다른 개인에 대한 존경과 사랑이 가능하며 그들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自己愛가 타인에 대한 사랑과 상호 배타적인 것으로 인식해서는 안되며, 自己愛에 충실한 나머지 다른 사람에 관한 순수한 관심을 배척하는 利己心으로 인식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마지막으로 神에 대한 사랑은 은총으로 표현되며, 신은 현상의 다양성의 배후에 있는 통일원리의 상징이고 인간의 내면에 있는 정신적 종자로부터 피어날 꽃의 상징을 의미합니다. 또한 신은 정의와 진리와 사랑의 원리이며 신에 대한 사랑은 사고를 통한 신에 대한 지식이 아닌 신과의 一體性을 경험하는 강렬한 감정적 행위라고 이책은 정의하고 있습니다.이 다섯 가지의 사랑의 모습들이 한 개인이 태어나 성장하는 과정에서 왜곡된 형태로 표현되거나 전달되어진 경우에, 앞서 말했던 무채색의 그림이 인생이라고 하는 도화지에 그려질 수 있는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우린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사랑은 참으로 중요한 것이며 특히,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져가고 있는 현대사회에서의 그 역기능의 결과는 더욱 심각할 수 있기에 그 중요성은 이루말 할 수 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