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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생활환경] 인간과 생활환경에서의 건축
    건축이란-인간의 생활 행태에 관한 제반문제 해결-종합응용예술-종합적인 결과물, 사회의 형성자건축의 내용-건축계획 및 설계, -건축구조, 환경 및 실내 장식, -설비, -재료 및 시공 쾌적한 인간 환경을 창조해 가는 학문20세기 후반-자연환경의 파괴-1960년대 인구문제와 오염문제가 일상생활의 문제로 대두-환경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관리의 중요성건축물 (환경에 부담을 주는 대상)-건축재료의 생산과 운송, -건축물 시공 그 자체 -천연자원과 에너지의 소비, -공기와 물의 오염, -소음, -폐기물, -미기후 및 경관의 변화, -토양포장, -대지의 사용을 야기시키따라서 생태개념의 도입주거문제 -20 세기로 접어들면서 더욱 심화20 세기를 전후건축분야에서 환경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대안: 환경친화개념-지구환경보존 ,-자연환경과의 조화 ,-쾌적하고 지속 가능한 삶의 유지미래의 주거디자인(인간을 둘러싼 주위의 일체를 환경으로 정의)지구환경에 대한 부담은 줄이고 인간이 자연환경과의 접촉은 늘리는 방향제가 생각해 본 것은.1) 인간의 다양한 활동과 주장들을 합법화2) 장기적 안목에서 나타나는 효과까지도 고려하여 계획 3) 잠재적 위험 및 그에 대한 유지관리의 필요성4) 낭비의 요소를 제거5) 자연에너지의 흐름을 이해6) 정보의 교환을 통하여 지속적인 개선을 추구
    생활/환경| 2002.08.15| 6페이지| 1,000원| 조회(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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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서대문 형무소로
    1. 서대문 형무소(독립 공원)를 답사한후~처음 이 과제를 보았을 때 너무나 많은 망설임이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근현대사에서 꼭 가보아야 할 유적지가 너무도 많아 어디를 갈까 망설인 끝에 서울지역에서 한번 찾아보자고 하는 생각이 들었고 또 가 보아서 기분이 좋고, 즐거운 역사 유적지보다는 치욕적이고 부끄러웠던 과거의 유적이 더 많은 것 같았습니다. 군에서 제대하기 전 광주에서 복무를 하였기에 다시 한번 4. 19 의거 지역을 가보고 싶은 마음도 있었고, 지리산의 빨치산, 정읍의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난 곳도 가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서울에서의 지역도 잘 몰랐기에 서울 근교의 장소를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딱히 정하기가 어려워 처음에는 학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장충단 공원을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장춘단이란 을미사변(1895년) 당시 순국한 훈련대 연대장 홍계훈, 궁내부 대신 이경식을 비롯한 충신 열사들의 영령을 기리기 위해 만든 제단인데, 민비가 비명에 간 지 5년 뒤인 1900년 9월 고종은 어영청 분영인 남소영 자리(지금 신라호텔 영빈관 자리)에 단을 꾸며 그때 죽어간 문무 열사들의 충정을 기리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본 모래시계의 장면에서 본 태수의 죽음이 있었던 사형장 그 촬영장소가 서대문 형무소란 것을 알았고, 또 그 형무소에 역사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그곳에 대해 너무나 많은 호기심이 생겨났습니다. 그래서 서대문 형무소에 대한 사전 조사를 먼저 한 후 찾아보기로 하였습니다.사전 조사'서대문형무소'로 통칭되던 근대적 시설을 갖춘 한국 최초의 감옥.지정번호 : 사적 제324호지정연도 : 1988년 2월 27일소재지 :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101시대 : 한말크기 : 부지 19만 8348㎡, 연건축면적 2만 6446㎡, 수감 가능인원 3,200명종류 : 감옥1988년 2월 27일 사적 제324호로 지정되었다. 부지 19만 8348㎡. 연건축면적2만 6446㎡. 수감 가능인원 3,200명 (1987년 경기 의왕시로 이물을 이축(移築)한 것으로, 6·25전쟁 휴전 직후 현재의 자리로 다시 옮겨 관사(官舍)로 사용하였다. 건축물은 군집형태로 묶여져있고, 이중 붉은 담벽 ·감시탑 ·출입문 ·구치감 ·감방 (남사 ·여사 ·외국인사)· 사형장· 일반사무실 (보안과 ·순화교육대) ·교회당 ·공장· 창 고 ·취사당· 식당 ·세면장(목욕탕등) ·운동장 등으로 되어 있다. 지붕은 함석이고, 주위 벽은 판자 위에 아연판을 두른 목조이며, 2층 옥사는 감시하기 좋게 T자형 부채꼴로 설계하고, 감 방은 복도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게 되어 있으며, 복도 천장을 뚫어 철망 사이로 위층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이 구치소의 뿌리는 구한말의 전옥서(典獄署)로서, 1904년 경무청감옥서(警務廳監獄署)로 바뀌고, 1908년 경성감옥(京城監獄)으로 개칭되면서 무악재로 옮긴 이래, 1912년 서대문감옥, 1923년 서대문형무소, 1946년 경성형무소, 1950년 서울형무소, 1961년 서울교도소 등의 명칭을 거쳐 1967년 7월 7일 서울구치소로 개칭되었고, 1987년 경 기 의왕시로 옥사를 이전한 이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일제강점기 때는 주로 민족지도자와 독립운동가, 4·19혁명 이후 1980년대까지는 정치인· 기업인· 세도가· 군장성· 재야인사· 운동권 학생등과 이 밖에 살인· 강도 등의 흉악범과 대형 경제사범· 간첩· 잡범등 다양한 범법자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이곳에는 3·1운동 때 유관순 열사가 갇혔던 지하 여자감옥, 윤봉길 의사가 복역중 만들었다는 붉은 벽돌, 강우규 의사가 처형당한 사형장, 여러 독립 투사들이 투옥되었던 1평 남짓한 좁은 감옥들이 남아 있다. 1988년 서울시는 이곳을 민족의 수난과 독립운동의 역사교육 현장으로 부각시키기 위해 구한말의 독립관을 복원하고, 공원을 조성하여 '서대문독립공원'으로 불렀는데, 1995년 '독립공원 사적지 성역화' 계획을 마련, 독립관 복원 공사에 착수한데 이어 구치소의 제9~13옥사· 중앙사· 나병사· 지하 옥사등 8천여 평과 담장 일부·망루 2곳을 원형대 사라져 간 독립투사들의 감옥 안에서의 상황들을 엿볼 수 있는 산 교육의 장이다.”서대문에서 신촌 쪽으로 금화터널을 넘기 전에 고가도로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푸른 녹지와 붉은 벽돌집, 그리고 몇 개의 조형물이 보인다. 또 지하철 3호선을 타고 가다 보면 어김없이 독립문 전철역을 거치게 된다. 지하철을 타고 지도에 나와 있는데로 5번 출구로 나왔다. 그러다 지하철 역에서부터 커다란 글이 적혀 있는 것을 보았다. 3.1 운동선언문과, 대표자 33인의 명단이 적혀있는 글이었다. 그 글들을 보면서 어떤 말로 표현할수 없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내가 만약에 이 시대에 살았더라면.. 난??? 어떻게 하였을까.그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그럼 바로 독립 공원이 나온다.독립 공원! 오다가다 언뜻언뜻 지나쳐 본 사람들은 많을지 몰라도 마음먹고 한번 찾아본 사람은 드물 것이다. 지어진 지가 얼마 안 된 탓도 있겠지만, 그래도 한국인이라면 누구를 막론하고 한 번쯤 가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도 처음 가보았지만 공원의 아늑함과 주위 할아버지들의 여유로음을 느끼면서 들어 갔다.들어가다 보면 3·1독립선언기념탑이 보인다. 탑과 함께 검은 돌 위에는 독립선언문이 새겨져 있어 읽는 이로 하여금 그 시대 민족자주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렸던 선열들과 일제가 판치는 오늘의 상황를 비교해 보게 한다.이 곳을 중심으로 오른쪽으로는 관리사무소와 옛날에 악명 높았던 서대문 형무소가 자리하고 왼쪽으로는 깨끗하게 조성된 독립공원, 그리고 민족의 기상과 독립의지의 표상으로 우뚝 서 한때 웅장했었던 독립문이 자리하고 있었다. 독립문은 또 고등학교 중학교를 거치면서 국사교과서에 나오는 건축물이라 사진도 찍으면서 유심히 보았다. 독립문의 안쪽 아치! 100년 전의 것으로는 안 보이는 빨간 벽돌들이 보였다. 왠 빨간 벽돌? 정확히 확인할 순 없지만 지난 1979년 독립문 이전 과정에서 다른 부분은 큰 문제가 없었을런지 몰라도 아치형의 이 부분은 이전하여 맞추는데 어려움이 컸을것이다. 그리고 이전 후의가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들이 눈에 띄었고 잔디밭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배드민턴을 치고 있는 여유로운 모습도 보였습니다.이런 풍경 중에 왼쪽 제일 뒤편으로 솟아 있는 탑 하나가 주목을 끌었는데, 높이가 22.3m에 달하는 이 탑은 호국 순열탑이었습니다. 탑 아래를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는 40m의 벽면에는 폭압 아래서도 굴하지 않고 독립군으로, 광복군으로 만주벌판에서, 한반도에서 항일의 기치를 높이 들고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았던 의로운 삶의 파노라마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항일의병의 격전 모습, 윤봉길 의사의 장엄했던 그 광경이 새겨져 있고, 유관순 열사의 외침이 울려 퍼지고, 안중근 의사의 의로운 총소리가 귓전에 생생하게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길이 여덟자 너비 넉 자, 서대문구치소애국지사까지는 되지 않더라도 한국인의 피가 요동치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 곳에서 치욕을 느끼고 치를 떨지 않을 이가 없을것입니다.서대문 구치소. 일제에 항거했다 투옥되고 또 옥사했던 수많은 넋들이 잠들어 있는 이 곳에서 우리는 민족에 대해서, 민족자존에 대해서, 애국이라 말하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반성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독립공원의 오른쪽과 위쪽에 자리하고 있는 붉은 벽돌의 옥사들, 그리고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구치소의 담장! 일제의 침략이라는 민족 최악의 치욕을 단적으로 드러내 주는 환부인 이 곳은, 이 땅의 근대적인 감옥으로서는 최초의 것으로 수용인원이 500명을 헤아렸습니다. 일제가 을사조약으로 주권을 앗아간 후 체포한 저항세력을 수감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고종황제를 강제 퇴위시킨 직후인 1907년에 만들어졌습니다.7동의 옥사와 한 군데의 사형장, 감시본부 역할을 했던 보안과 청사, 그리고 이 모든 시설을 둘러싸고 있었던 4.5m 높이의 담장과 망루로 구성된 서대문 구치소를 둘러보았습니다.우선 담장을 보면, 원래 1천 m가 넘었던 담장 중 현재 복원된 것은 전면의 70m 정도. 이 곳의 정문을 통하여 들어서면 지금은 전시관으로 쓰이는 구 보안과 청사가 보이고 왼쪽으? 그리고 두꺼운 유리로 막아 놓은 것이 낮에는 오히려 안의 내부를 살피는데 불편하아였습니다 아무리 훼손 방지지만 관람을 하게 해 줄꺼라면 잘 보이게는 해야하는 거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역사관으로 들어서는 입구를 지나노라면 완전히 감옥에 들어가는 수감자의 기분이었습니다. 쇠창살로 된 매표구에서 표를 사서 2m 갓 되는 좁은 문을 지나면서 나도 80, 90 여년 전 이곳에 들어왔던 독립운동가들과 같은 마음을 느꼈습니다. 역사관에 들어서면 특별한 설명이 필요없이 안내 요원이 안내하는 대로 관람만 하면 되는데, 처음 전 안내원에게 뭘 물어보다 안내원이 잘 못 알아들었는지 그 안내원이 영어로 물어 봐서 조금 당황했습니다. 대부분의 설명은 영상이나 글로 제시되어 있었는데. 다른 전시관과는 달리 벽관이나 독방에서 직접 감옥생활을 체험할 수 있는 점이 새로운 점이었습니다.(수학여행에서 독립기념관은 그냥 볼수만 있도록 했었던 기억이 났습니다) 또한 고문 기구가 설명과 함께 잘 전시되어 있었습니다.전시관은 2층으로 되어 있는데 1층에는 일제의 한민족 침략사를 상세하게 기술한 여러 자료들과 혹독한 탄압장면을 담은 사진들이 과거를 한눈에 보여 주고, 특히 3.1운동의 역사적 배경과 일제의 은폐조작 흔적, 3.1운동으로 도화선이 당겨져 광복에의 불길로 번지기까지를 시대적으로 나열하고 있었습니다.2층에는 옛날 감방의 모양과 시설을 보여 주는 사진들과 투옥된 사람들이 재판을 받던 모습 등을 자세하게 보여 주는 여러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손바닥만한 감옥에는 죄수의 모형이 섬쩍지근하게 만들어져 있고 그 주변에 쓰여 있던 글귀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당신은 혹시 길이 여덟 자, 너비 넉 자 크기의 관 속에 들어가 누워 본 일이 있습니까. ……그 크기는 0.9평입니다. 그 관에는 0.2평의 변소가…… 그러면 이제 상상이 좀 갑니 까?"전시관에는 또 잔혹한 고문의 장면을 그대로 연출, 인형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 때의 장면을 상상해 내고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 애국지사의 고습니다.
    인문/어학| 2002.08.15| 5페이지| 1,500원| 조회(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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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과학기술역사] 화성에 관한 모든것
    머리말 2 본 글 3 제 원 3 축성 계획 3 축성 동기 7 성 벽 10 성 문 10 암 문(暗門) 12 1. 동암문 12 2. 서암문12 3. 서남암문 13 4. 남암문 13 수문(水門) 13 1. 방화수류정과 용연 14 장 대(將 臺) 14 1. 서장대 15 2. 서노대 15 3. 동장대 15 적 대 16 공심돈(空心墩) 16 1. 서북 공심돈 17 2. 남공심돈 17 3. 동북 공심돈 17 각루(角樓) 18 1. 동북각루 (방화수류정) 19 2. 서북 각루 19 3. 서남각루 19 4. 동남각루 19 포 루 ( 砲 樓 ) 20 1. 서포루 20 2.북서포루 20 3. 동포루 21 4. 동북포루21 5. 남포루 21 포 루 (鋪 樓) 21 1. 동북포루(각건대) 22 2. 서포루 22 3. 북포루 22 4. 동 1 포루 22 5. 동 2 포루 23 봉돈(烽墩) 23 기 타23 화성 행궁 23 화령전 24 이 후의 화성 24 맺음말 25 26머리말지금으로부터 600년 쯤 전인 1394년(태조3년), 노쇠한 고려(高麗)왕조를 뒤엎고 새로이 조선(朝鮮)왕조를 개창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는 새 왕조의 도읍으로 한양(漢陽)을 선정하여 이도(移都)하고 도성(都城)과 왕궁을 마련하는 대역사(大役事)를 일으켰다.그로부터 꼭 400년 후인 1794년(정조 18년), 갖은 파란 끝에왕위에 올라 왕권의 강화를 꾀하였던 조선 22대 임금 정조(正祖)는 한양 남쪽100리에 있는 수원에 화성(華城:`수원성'은 일제 시대 이후 붙여진 별명이며 원래의 정식 명칭은 `화성'이다.)이라는 성곽을 축조하여 그에 둘러싸인 신도시를 건설하는 대역사를 일으키고 있었다.정조(正祖)시대에 건설된 화성(華城)즉, 수원성은 우리 민족 문화의 위대한 성과물 중 하나이다. 전장 6km에 달하는 성곽과 많은 부속건물, 도시기반시설과 생산기반시설들의 총화로 이루어진 자족적 계획도시 수원의 건설은 조선 역사상 서울 건설 이후 가장 대규모의 도시 건설 사업이었다. 정조시대의 국력을 기울여 건설되어 현재 화 외성의 실험적인 벽돌 성벽 축조 기술등의 다양한 경험을 바탕으로 18세기 말 정조의 강력한 축성 의지와 함께 실학파 학자의 중용으로 이제까지의 성곽과는 여러 면에서 다른 면모를 갖춘 성곽으로 계획되기에 이른 것이다.3) 축성 동기수원성의 축성은 흔히 조선 제22대 왕인 정조가 비명에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에 대한 효심의 발로에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한 읍을 새로 옭기고 거기에 국력을 기울여 새로운 모양의 성곽을 축조한 대역사의 동기를 단순히 부친에 대한 효심에만 두는 것은 상식적으로 설득력이 부족한데, 거기에는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라는 문제에 얽힌 당시의 정치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했을 가능성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곧 수원성은 기존의 수원읍을 새로운 장소로 옮기고 나서 이 읍을 보호하는 성곽으로 새로 축조한 것이다. 우선, 정조대왕의 효성에 대하여 그 내용의 일단을 알아보자.정조의 선왕인 영조는 탕평책을 펴고 어려운 나라의 경제를 회복시킨 명군으로 이름 높지만, 52년간의 통치중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인 일도 저질렀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당시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던, 이른바 시파와 벽파측의 모함으로 비롯된 것이었다.영조가 죽고 손자인 정조가 즉위한 후, 항상 억울한 죽음을 당한 부친에 대하여 슬픈 마음을 품고 있다가 즉위한 지 13년째 되던해에 양주땅 배봉산에 있던 부친의 무덤을 당시 조선의 일등 명당지로 일컬어지던 화산으로 옮기었다. 이 화산은 당시 수원읍의 주산이었는데 거기에 세자의 무덤을 쓰려면 기존의 읍을 다른 곳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결국 읍은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 그리하여 먼저 관청 건물을 새로 짓고 이어서 향교를 세웠으며 그 몇 해후에는 도시 주변을 둘러싸는 성곽까지 축조하게 된 것이다.이 과정을 좀더 자세히 살펴보면 왕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고 `현륭원' 이라 정한 후 수원읍을 다른 곳으로 옮기라고 명하였다. 이 때가 정조 13년(1789)7월이었다. 새 읍은 지금의 팔달산 아래로 결정되었고, 나의 크기도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어 있다. 이 문은전으로 홍예를 쌓고 위에는 원여장과 평여장을 쌓아 만들었는데 규모는안쪽 넓이 2.12m 높이 2.24m이고 바깥쪽 넓이는 좁아져서 1.81m에 높이 2.27m이다.2. 서암문문은 화성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서장대의 남쪽 약 52m거리에 있는 성곽 시설물로 서, 1796년(정조 20년)에 축조되었으며 전돌로 홍예를 물렸는데 안쪽 너비1.7m,높이 2.33m이고,바깥쪽너비1.24m 높이 2.18m이다. 안팎에 평여장을 설치하였고, 문은 산허 리에 있으며, 길은 성 위로 났기 대문에 문안의 돌층계는 네모지고 움푹하게 되었다. 돌 {층계를 북쪽에 설치하여 아래위가 적으로 하여금 그갈 길을 알지 못하게 하고,보이는 길과 암문의 길을통하게 하였다. 암문은 성사잇문으로 깊숙하고 후미진곳에 설치하여 성안으로 들어오는 사람과 가축, 수레를 통하게 되었다.3. 서남암문{이 암문은 화성의 서남쪽에 있는 암문으로 서암문의 남쪽 436m 지점에 있다. 암문이란 성의 샛문으로 으 슥하고 후미진 곳에 축조하여 적이 모르게 양식이나 무기 등의 물자를 반입하거나, 사람들이 은밀히 내왕 할 수 있게 만든 비밀 통로이다. 암문중 서남암문 위 에만 포사가 있고 문의 크기는 겨우 말 한 필이 드나 들 수 있을 정도로 작으며 문 위는 보통 성곽처럼 되 어 있다. 이 서남암문은 170m 길이의 용도가 시작되 는 곳이며, 또한 화양루에 이르는 통로 문이다. 이 문은 塼으로 홍예를 만들어 쌓았는데, 규모는안쪽 너비 2.12m 높이 2.58m 이고, 바깥쪽 너비는 1.81m, 높이 1.82m이다.4. 남암문{남암문은 팔달문과 남공심돈의 사이에 있었으며 1900년대 급속한 도시화에 밀려 시장 등이 형성되면서 훼손된 후 현 재까지 복원치 못하였다. 그 규모와 구조양식등은 서암문과 비슷하다.라) 수문(水門)수원성에는 북쪽에서 남쪽으로 흐르는 개천이 성내를 관통하고 있다. 따라서 성내에는 개천과 성벽이 만나는 지고 동북모퉁이의 요해처이면서 장안문을 안에 안고 화홍문과 이어져 쇠뿔처럼 마주 서서 일면을 제압하고 있다."이처럼 동북 각루가 위치한 지형은 전략상으로도 중요할 뿐 아니라 주변 경관도 뛰어난 곳인데, 여기에 또한 빼어난 건축미를 갖춘 누각을 세워 놓은 것이다. 건물은 2층 구조이 며 상층은 사방이 트인 누각이고 성곽 위로 툇마루를 달고 난간을 설치하였다. 평면 형 태가 매우 복잡하여 북측면은 팔각형을 이루고 남측면은 ㄱ 자형으로 되어 있다. 상층은 동 서 세 칸 가운데온돌을 놓고 북쪽에 길게 물리었다. 하층 벽체는 아래에 돌을 쌓고 그 위에는 전돌로 쌓고 성 바깥쪽으로 총안을 뚫었다. 이 건물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지붕의 형태이다. 평면의형태가 복잡한 만큼 지붕도 단순하지 않다. 팔작지붕의꺾이고 펼 쳐지는 품이 여러 겹으로 전개되면서 우리 나라의 다른 건물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외관을 보여 준다. 더욱이 지붕 각마루의 희게 회칠한 양성과 그 위에 올려놓은 취두 그 리고 지붕 한복판 위에 놓은 절병통 등이 보는 이의 눈을즐겁게 하고 있다.서북 각루는 화서문의 남쪽 산 위 휘어 굽은 곳에 있다. 정면 2칸, 측면 2칸으로 동북 3 칸은 마루를 깔고 사면을 평난간으로 둘렀다. 위에는 판문을 설치하고 외면에는 모두 짐 승의 얼굴을 그리고 화살 구멍을 내었다.서남 각루는 일명 화양루(華陽樓)라고도 하는데, 성의 서남쪽으로 멀리 떨어지고 높은 지점 경치 좋은곳에 따로 우뚝 서 있다. 정면 2칸이고 측면 3칸으로, 앞의 4칸은 바닥에 전돌을 깔아 삼면을 개방하였고 뒤의 2칸은 방을 들였다. 이 서남 각루가 위치한 곳은 이른바 용도하고 하여 양쪽으로 성가퀴를 쌓고 그 사이에 군량을 운반하기 위한 길을 좁 고 길게 낸 곳으로 서남 암문의 밖으로 이어지게 되어 있다. 서남 각루는 바로 이 용도 끝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이 건물은 경관을 즐기기보다는 방어의 요충을 견고히 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도 건물 자체는 미적인 조화를 잃지 않고 있으 난간을 설치하였으며, 구부러져서 로래당으로 통하게 하였다. 사면의 댓돌 위 에는 방전을 깔고 전면과 동쪽은 쌍급연석으로 종횡록을 조사하였으며 전면 한 가운데에 3간의 계단이 있는데 각각 세층이다. 정문 좌우에는 장대석을 설치하였으며 좌우내간에 는 운문을 조각한 대우석을 붙였다. 수원시에서 1996년 화성 축성 200 주년을 맞아 화 성행궁 복원기공식을 1996년.7.20일 갖고, 2012년까지 장락당, 복내당, 봉수당등 1796 년 당시의 건조물을 복원할 계획이다.2. 화령전조선조 순조는 원년(1801년)에 정조대왕의 유덕을 받들기 위해서 건립한 것이며 전각 의 이름을 화령전으로 하고, 그 안에 정조의 진영을 봉안하고 해마다 제향을 드렸던 곳 이다.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3간의 팔작 지붕이며, 화강제 기단에 세워졌다. 건물 구조 는 익공집으로, 이 시대의 사당 건물과 같이 간소한 수법으로 되었다. 정전의"운한각"이 란 편액의 글씨는 순조의 친필로 되어 있으나 지금은 없어지고, 현재는 고인인 대통령 박정희 친필로 운학각이라 쓰여 있다. 경내에는 풍화당이란 건물이 있으며 이 곳은 순조 가 풍악을 즐기던 곳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오히려 순조가 선왕을 그리며 때를 보낸 자 리가 아닌가 생각된다.5) 화성 건설의 중기(重機)정조 임금님의 지시에 의하여 다산 정약용이 연구하여 만들어 낸 화성 건설용 기계들이 「화성성역의 궤」에 실려 있는데, 그 중에서 거중기와 유형거라는 수레는 다산에 의해서 고안된 새로운 자재 운반 기구이다. 실제로 공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는 거중기나 유형거 보다는 기존에 사용하던 운반기구들인 썰매나 동차, 대차 등이 훨씬 더 크게 활용되었다. 화성 공사에서 새로운 것이건, 재래식이건 자재를 운반하는 데 수레나 기타 기구를 적극 활용하였다는 것은 커다란 특징이다. 공사에 필요한 거중기와 유형거를 만들어 사용한 그 창조정신과 새로운 기계장치에 대한 실험적 접근 자세는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1) 거중기(擧重器)거중기 무거운 돌을 수직으로 들어 올려 필요
    인문/어학| 2002.08.15| 35페이지| 2,000원| 조회(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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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김창숙에 대한 자료
    김창숙 (金昌淑)◉ 호 : 심산(心山), 벽옹( 雍)◉ 생몰연대 : 1879. 7.10. ~ 1962. 5. 10.◉ 출 신 지 : 성주◉ 훈 격 : 건국훈장 대한민국장(62)◉ 운동계열 : 임시정부1945년 일제 말기의 비밀 결사인 조선건국동맹의 남한 책임자로 추대되었다가 광복 직전에 발각되어 구속. 왜관 경찰서에서 광복을 맞이하였다. 곧 상경하여 민주의원 의원에 선출되었으나, 정당의 난립과 신탁통치의 찬반. 미소 공동위윈회 참가여부등으로 일반 정치인들과 의견이 맞지 않아 정치에 깊이 관여하지 않고 육영사업에 힘써 성균관대학을 설립하였다.매년 심산학술상을 수상하고 있는데 그 대상자는 학문의 업적만이 아니라 행동과 지조를 따진다. 이것은 바로 심산 감창숙의 삶을 단적으로 표상하고 있다. 그를 기리는 학술발표의 주제가 ‘근대 민족운동’과 ‘실천적 유학사상‘이었으니 이런 분위기를 알만할 것이다.심산 사상 연구회에서 정리한 글에서는 “심산은 민족주의자로 자명하였다. 민족의 독립을 위해 전생애를 바친것과 일제에 대하여 철저한 비타협 불복종은 말할 필요도 없고 해방 후에는 민족분열을 방지하기 위해 독자적인 노선을 천명하였고 그뒤 계속 분단에 대한 통한과 통일에의 염원을 잠시도 잊지 못해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장우단탄을 그치지 않았다”고 쓰고 있다.그리고 이어 그의 민족주의는 유학의 대의 명분론에 깊이 뿌리박은 것이요, 또 근대 시민적 내셔널리즘과는 다소 체질을 달리 할지 모르지만 그 정신은 다음날 우리나라 역사의 변혁과 창조 속에 중요한 하나의 힘의 줄기로 작용하게 될 것이라고 하였다.신교육운동을 벌이는 선비그러면 그가 민족을 위해 침략의 항쟁에 나서고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통합운동을 벌이고 민주실현을 위해 반독재에 나선 과정이 어떠했는지 알아보기로 한다. 그의 생애는 대개 4시기로 구분해 볼 수가 있다.첫 시기는 그가 태어나서 중국으로 망명하기 직전인 1918년까지 해당된다. 그가 조선시대 유학자 동강 김우옹의 종손으로 태어난 것도 하나의 운명이었다. 그런 탓으로 어한 유림이 아니었다. 특히 이승희는 을사조약 후 매국오적의 청참소를 올리면서 청년이 된 심산을 동참시켰다.그 후 심산을 결사운동을 참여하여 구습타파에 나서기도 하고 친일단체 일진회를 극렬하게 공격하는 성토문을 내기도 하고 국책보상을 위해 단연동맹회의 성주대표가 되기도 하고 신교육을 위해 고향에 성명학교를 설립하기도 했다. 이런 운동을 벌이자 일제는 그를 감옥에 가두기도 했고, 친일파는 그를 눈엣가시로 보았고 종중과 전통유림들은 신교육 운동을 벌이는 그를 사시로 보았다.끝내 나라는 완전히 넘어졌다. 이때 그는 자폭의 나날을 보냈다. 양광의 행동을 보이며 술과 도박과 낚시에 빠져 폐인의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어머니의 간곡한 타이름으로 다시 마음을 다 잡아 가학과 유학공부에 열중했다, 약 10년에 걸친 이때의 공부로 그는 상당한 선비의 교양을 갖추게 되었으며 또 유학사상의 진수에도 빠졌다.필요한 것은 독립운동둘째 시기는 중국에 망명을 하였다가 일제에 잡혀 국내로 송환된 때까지 해당된다. 3 .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그는 상경해서 유림이 민족대표에 빠지고 또 이어 유림들이 파리강화회의 독립청원의 장서를 보내려는 운동이 있음을 알았다. 그 운동은 경상도의 곽종석 계열과 충청도의 김복한 계열이 따로 추진하고 있음도 알았다.이때 그는 두 계열이 통합하여 장서운동을 벌이는 데에 앞장셨다. 그리하여 1백 37명의 연명을 받았는데 이런 주선은 바로 3백년 동안 갈라져 왔던 영남과 기호의 학파 그리고 남인과 노론의 당파를 타파한 것이라는 칭송을 받았다. 이를 성공시킨 그는 직접 장서를 가지고 상해로 갔고 그곳에서 우리의 대표로 파리에 가있는 김규식에게 전달하게 했다.그 후 국내에서는 곽종석, 김복한 등 많은 유림들이 체포되는 1차 유림단 사건이 일어났다.이때 그의 활약은 누부셨다. 광동으로 가서 손문의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상해에서는 중한동지회를 만들어 두 나라의 민족혁명의 노선을 선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상해임시 정부가 분열을 거듭하자 그 활동무대를 북경으로 옮겼다. 북경에보기도 하고 동지들과 진로를 논의 하기도 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온 박용만과 북경에 거주하던 김달하가 일본의 고급밀정이라는 지목을 받게 되어 의열단과 다물단의 단원들에게 암살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기에 심산이 연루되었고 또 강경한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 이런 과정에서 그는 신채호와 성격이나 노선이 일치함을 확인하였다. 그가 신채호와 같이 이승만을 탄핵한 것이 정부 형태보다 운동단체의 필요성을 강조한 부분에서도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다만 당시 북경에서 특히 이회영, 신채호가 무정부주의 운동에 빠지고 또 뒷날 동지인 여운형, 홍명희가 사회주의에 관심을 기울이는 데도 그가 여기에 가담하지 않았을 뿐이다.심산은 또 만주땅에 우리 동포를 이주시키고 내몽고에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고 국내에 잠입하여 자금을 모집하기도 한다. 그가 돌아간 뒤 영남일대에 검거선풍이 불었고 또 나석주가 동양 척식 주식회사에 폭탄을 던지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의 주동자가 심산임을 일제가 알아냈다. 그리하여 일제는 손을 뻗어 상해 영국조계에서 그를 체포하여 국내로 압송하였다. 이것이 2차유림단 사건이다.앉은뱅이의 항일의지셋째 시기는 국내의 감옥생활과 8 .15를 맞이할 때까지 해당된다. 그는 이때 심한 고문을 받은 끝에 앉은뱅이가 되있었는데, 이로해서 “벽옹”이라는 새로운 아호를 얻게되었다. 어쨌든 그는 14년형을 언도받았다.그는 심한 고문의 후휴증으로 일시 형 집행정지도 받았으나 다시 긴 수형생활을 해야했다. 심산은 감옥에 있으면서 규칙을 거부하는 것으로 불복종의 자세를 보였다. 어느날 전옥에게 절하지 않고 멀거니 쳐다보았다고 잡범감방으로 쫓겨나는 따위의 처벌을 받자 이런시를 남겼다.“머리를 조아리고 무릎을 꿇으라니어찌 차마 말하랴.분통의 눈물이 창자를 찢느구나.”이 무렵 심산은 대전 형무소에서 동지인 안창호, 여운형과 함께 감옥생활을 하게되어 하나의 우안을 얻고 있었다. 이처럼 꿋꿋하게 7년을 지낸 뒤 병세 악화로 형 정지조치를 입었다. 그 후 심산은 창씨개명을 강요할 적에 끝까지 버로 풀려나게 되었다.통일을 염원하는 딸깍발이.마지막 시기는 해방 후 통일 운동과 반독재투쟁을 벌일 때까지 해당된다. 그가 일시 건국동맹에 가담했으나, 8 .15 이후 현실대처를 위하고 좌우익은 물론 우익내부에서 심함 분열상을 연출하고 있었다.그는 민주의원의 한 사람이었으나 미군정에 맞서 반탁활동을 벌였고 계속해 단선단정을 반대하여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그리하여 통일 정부 수립을 위한 성명서를 7인 거두 곧 김구, 김규식, 홍명희. 조소앙, 조성환, 조완구와 심산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그 확고한 노선을 밝혔다.이러는 과정에서도 그는 정치 수완이라든가 술수 따위를 몰랐기에 정당에도 가입하지 않았고, 다만 성균관의 재건과 성균관대학의 설립에만 몰두하였다. 또 유도회를 조직하여 이른바 ‘황도유림’을 성균관에서 내몰았다. 그러는 속에 이승만의 단독정부가 수립되자 이를 반대하였고,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자 기회가 있을 때마다 때로는 성명서를 발표하기도 하고 때로는 공개장을 보내어 규탄하였다. 그런 탓으로 몇 차례 감옥에 갇히기도 하엿다. 특히 1951년에 발표된 ‘경고 대통령 하야문’은 피란 수도 부산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심산의 통일 염원과 반독재의 참뜻은 다음의 시구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 죽을 적에 동을의 평화를 기약하리, 묻노니 제국의 앞잡이여, 붉은 사냥개여, 백성을 속이고 나라를 엎어서 무엇하려 하느뇨.”이것은 그의 선비 기질 또는 지사의 면모를 여실히 드러낸 모습이다.심산은 불구의 몸으로 서울에서 객지생활을 하면서도 집 한 칸 마련치 못했고 친지의 집이나 여관으로 전전하였다. 그는 만년에 쥐꼬리만한 연금으로 살았는데 어느때는 자유당 국회위원이 생활비를 건네주자 더러운 돈은 받을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다. 꼿꼿한 딸깍발이 선비기질을 남김 없이 보인 삶이었다.심산은 중앙의료원에서 의식이 가물거릴 적에 “통일이 안되어서 .... 유림이 잘해 나가야....” 라는 끝을 맺지 못한 말을 남겼다 한다. 바로 그의 마지막 염원은 통일에 있었던에게 문제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가 성리학의 공담을 경계하면서도 강상과 도의를 최우선가치로 본다든지, 구습타파를 외치면서도 어머니의 복상을 뒤늦게야 입었다든지, 마지막 현실타개의 기대를 유림에게 걸었다든지 하여 봉건가치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다.또 그의 민족주의를 유교의 도덕률과 연결시켜서 근대적 내셔널리즘과는 상충되는 내용을 보인다고 한다. 그러나 반 식민독재 투쟁과정에서 보인 그의 꿋꿋한 정신과 기개는 분명 미래의 변혁과 창조에 틈 힘이 될 것이다.★1차 유림단 사건파리장서사건-제 1차 유림단 사건: 3·1운동에 자극을 받아 영남·호서의 도학자들을 중심으로 형성된 유림단이 독립을 청원하는 유림의 결집된 의사를 만국평화회의에 전달하였다. 이에 일제는 곧 유림에 대한 일대 검거 선풍을 벌여 유림 5백여명을 체포하였다. 이 장서 사건은 국내외에 널리 보도되어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 일으켰는데 그것은 유림이 독립운동에 참여했다는 의미를 떠나 국내의 민중운동을 바탕으로 하여 한 민족의 전체의사를 국제적으로 천명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크다고 하겠다.★2차 유림단 사건김창숙, 宋永祐, 김규식, 李鳳魯 등이 만주 동삼성 일대에 독립운동기지를 구축하는데 소요되는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서 국내에 잠입하여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려 하였는데 그 실적은 매우 부진하였다. 그러자, 폭력을 동원하여 국내의 친일 부호들에게 위협을 가해야 자금모집이 쉬울 것이라고 보고 중국에 들어가 의열단과 상의한 뒤 모험단원을 동반하여 다시 잠입하고자 26년 경성을 떠나 중국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김창숙 일행이 돌아간 뒤 영남일대에서 자금을 모집한 사실을 탐지한 일경이 일대 검거선풍을 일으켜 약 6백여 명에 달하는 많은 유림을 체포, 구금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2차 유림단 사건이다.참고문헌 : 한국사의 주체적 인물들, 이 이화, 여강 출판사한국 현대 인물사론, 송 건고, 한길사김창숙 문론, 심산사상연구회,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1987발굴 현대사 인물 3권, 한겨레 신문동지혈사
    인문/어학| 2002.08.15| 5페이지| 2,000원| 조회(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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