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락의 조건1) 사회 문화적 통일성 : 동일한 언어, 제사 심볼, 신앙체계, 조상의 동일2) 지리적 공간의 점유 : 경제활동 및 생산활동3) 협동 : 사회관계의 바탕, 혼인, 사회교환1. 농경의 시작과 정착생활·신석기 이전의 시대 : 자연동굴 등지에서 거주·신석기 시대 : 정착생활/ 움집/ 밭농사(황해도 지탑리, 평양 남경유적에서 조, 피, 수수 등의 곡물 발견 ) 목제 농기구와 석기, 토기/ 사냥과 어로활동은 중요한 생업(서울 암사동, 송죽리 유적)/ 밴드사회{) 지도자가 없었던 평등사회(경험이 우수한 이가 각 분야별로 그때그때 이끌었을 것으로 추정)/ 촌장과 주민의 관계는 지배-피지배 관계가 아님2. 벼농사의 시작과 계급사회의 등장·군장사회이며 지석묘·청동기 : 기원전 1000년대, 청동공구의 발달로 다양한 목제농기구가 제작되어 농업생산향상, 벼농사의 시작 (여주 혼암리, 부여 송국리, 평양 남경에서 볍씨 발견/ 울산 무거동 옥현유적에서는 청동기 시대 대규모의 마을 유적과 함께 논{) 자연적 상태 그대로를 이용했기 때문에 크기와 모양이 제각각 달랐음.이 발견)·밭농사도 계속됨 : 경남 진주의 남경 변에 위치한 대평들, 터밭, 무덤·정착생활, 인구증가로 인해 갈등 발생 : 경지, 물, 도구원료 확보를 위해·큰 규모의 집단(청동기 원료와 사용을 독점)의 등장하면서 한 지역을 뛰어넘는 정치적인 세력 등장→ 분업이 진전, 교역이 필요→ 可耕地의 확보, 노동력과 잉여생산물을 둘러싼 가 지역집단 간의 대립은 청동기의 발달과 함께 전쟁으로 비화→ 집단간의 통합이 촉진 : 環濠, 토루{) 마을 가장자리에 흙을 쌓아 올린 것(방어목적), 이 위에 목책 설치, 목책 (환호로 둘러싸인 마을 유적은 부여 송국리, 울산 검단리, 청원 남산, 진주 대평일대, 산청 사월리, 경산 임당동, 대구 칠곡지구)·전쟁의 위험이 사라지고 농경사회가 안정되면서 낮은 지대에 촌락을 조성하게 되었다. (진주 대평리, 거창 산포리, 대야리, 합천 봉계리, 순천 대곡리, 대구 월성동)3. 읍락 사회의 성립과 발전·‘三國志 東夷傳’에 보이는 읍락 : 삼한사회는 소국 내에 국읍(主帥가 통솔하는 중심마을), 읍락(渠帥가 통솔), 별읍(제사장인 天君이 주재)이 있고 소국을 구성하지 못한 읍락이 소별읍을 이루었다. 국읍과 읍락은 인구, 정치, 경제면에서 우열의 차이가 존재하지만 처음부터 확고한 지배, 종속관계는 아니었다.·3세기 후반 : 土城{) 목책설치보다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다. 이는 정치적 세력의 힘이 커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토 목기술의 발달도 알 수 있다.으로 둘러싸인 취락의 형성(경주 월성, 서울 풍납토성, 몽촌토성, 대구 달성토성, 경산 임당토성)·이러한 읍락사회는 지역이나 시기에 따라 다양한 편차를 보이고 있다.부여, 고구려 : 계층분화가 진전되어 읍락에는 豪民과 下戶가 있으며 家戶단위로 지배당함.삼한사회 : 읍락 간의 통합을 통해 소국이 성장하고 읍락간의 분화가 진행되어 국읍·읍 락의 분화가 이루어지지만 개별읍락의 자치는 인정되었다. 읍락에는 수장층(渠帥), 下戶, 노비가 있었고 주된 대립관계 수장층↔하호의 관계이다.4. 촌제(村制)의 등장 -읍락에서 촌으로·‘三國史記’, ‘三國遺事’, 금석문 자료의 6세기까지의 기록에는 村이라는 용어가 신 라 건국 초부터 자주 등장. 촌이란 호칭이 중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육조시대부터 이며, 사서에 처음 보이는 것은 3세기말에 편찬된 ‘三國志’이다. 이때 촌의 발생은 북방 유목민의 침입에 대비한 자위적인 집단의 형성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결국 3세기 이전 의 기록에 나오는 ‘村’이라는 용어는 후대에 일반적인 마을을 가리키는 촌이 소급하여 씌어진 것이었다. [ 고구려 5세기초 자료 ‘광개토대왕비’, 신라 5세기 전반 눌지왕대 사 료에 나오는 수주촌(지금의 예천), 일리촌(지금의 성주), 6세기 초 금석문‘영일냉수리신라 비’]·지금은 촌이 일반적으로 마을을 가리키고 있지만 처음 사용되었을 때는 대규모 취락집 단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촌으로의 전환은 왕경 6부의 성립과 궤를 같이하며 일시에 이루 어진 것이 아니라 변경지역에서부터 실시되어 505년 신라의 지방제도가 정비되면서 전국 적으로 실시되었다.5. 철제농기구와 우경·삼한의 읍락에서 6세기의 촌으로 전환하는데는 생산력의 발전(철제농기구의 보급확대, 우경의 보급, 주곡의 변화, 수리관개시설의 확대 등)·철제농기구의 신라전역으로의 널리 보급, 농기구의 종류와 수량 증대, 철기의 소유도 거 수(수장층)뿐만 아니라 호민층{) 호민층의 등장은 ‘서동설화’를 통해 알 수 있다.(새로이 성장한 계층)에게도 주어짐./ 이를 소유하지 못한 하호층의 경우 경제적 몰락을 겪으면서 철제농기구, 토지 등을 매개로 호민층과 결합하거 나 읍락사회를 이탈하여 流望해갔을 것이다.6. 촌제하의 촌락사회·읍락사회의 동요에 대해 신라 국가는 읍락을 촌으로 편제하고 거수를 촌주로 임명하여 촌락에서의 지배력을 인정해줌(영일쟁수리비)·촌제가 지방사회에서 모든 기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은 촌 내에서 자치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가 민을 지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통일전쟁을 거 치면서 지방사회는 변동.7. 통일신라·촌락문서 : 1930년대에 일본에서 발견되어 1950년대에 소개된 지금의 청주 인근의 촌락 네 곳의 실상은 알 수는 없지만 당시의 상황을 이해 가능했다. 각 촌락에 거주하는 촌락 민{) 대략 70∼100명(14∼20호), 소와 말{) 19∼47마리 소유(개인소유인지는 알 수 없음), 나무 등의 규모, 3년후의 변동(토지 제외),. 전형적인 농촌임을 알 수 있다.·자세하게 기록된 이유: 세금부과의 가장 중요한 원천·마을과 마을은 서로 독자적인 영역을 소유, 마을간의 경계 뚜렷, 때로는 영역확장(공동 노동으로 인한 토지 개간)·자연촌{) 국가의 직접 지배를 받는 촌락과 지역촌{) 국가와 자연촌 사이의 매개체 역할을 하는 행적적인 의미의 마을8. 고려시대의 촌락지배형태·자연촌과 지역촌의 구조는 계승되었지만 국가의 지배대상은 지역촌으로 변화.·지역촌은 지속적인 자기발전을 거듭하여 12세기 무렵에 고유명칭을 가질만큼 성장·촌락행정 업무 : 호구파악, 호적작성, 호구의 신분별 군역을 비롯한 노동력 징발, 공물수 취, 답험손실{) 천재지변 등으로 작황이 나빠 조세 탕감해야 할 경우 현지 조사. 촌락행정 담당자가 업무유기의 경우 강력한 형벌처벌·촌락의 내부조직 : 인보결성{) 5가구를 묶어서 하나의 보로 만듬. 공동체적 협동으로 일을 추진하고, 연대 책임도 부과되었 다. 이는 조선시대에 오가작통법으로 계승.·행정업무 체계 : 촌락(촌주)→군현(향리→수령)→중앙·자연촌과 지역촌으로 형성된 촌락구조는 통일신라에서 고려에 이르는 중세 전반기에 정 립되어 조선시대의 面里制로 계승된다. 조선시대의 面은 이전의 지역촌, 里는 자연촌을 각 각 계승하였다.9. 조선 전기 촌락의 발달과 분화·조선시대의 촌락은 이전 시기와는 두 가지 차이1)하층민과 양반이 함께 거주2) 조선시대의 촌락은 깊은 산곡간에 형성, 발달하고 있었다 : 在地士族의 사족화{) 새로운 지역을 개척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게 됨/ 외 곽 촌락지역으로 개간, 이주{) 이 지역은 특수한 기술 없이도 흐르는 물을 막아 논을 만들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이 주(퇴계 가문인 진보 이씨의 경우)·이주, 개척은 15·6세기에 재지사족 가문에서 일반적인 것이었다 : 기존 邑治지역은 개 발 / 허가권과 노동력 보유·在地士族의 이주와 개척을 통해 적극 개발되기 시작한 鄕村지역은 在地士族의 성장과 더불어 점차 邑治지역을 지배하고 나아가 정치, 사회, 문화, 경제적으로 조선사회를 주도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그리고 이와 더불어 촌락사회의 구조와 성격은 이제 사족의 거 주 유무에 따라 크게 달라지고 있었다. 촌락의 유형 또한 주민의 생업과 거주형태에 따른 것보다는 사족의 존재 유무와 거주 성씨에 따른 구분이 더 의미 있는 것이 되었다. 이에 따라 촌락은 사족의 거주지역인 班村과 평·천민의 거주지역인 民村으로 분화되었고 이런 분화형태는 사족세가 강한 지역의 경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촌락의 신분구성 : 民村에는 평·천민만 거주 / 班村에는 양반, 양반소유의 노비, 소수 의 평·천민이 거주. 班村의 양반은 동성만이 아니라 동족으로 인식되고 있던 상당수의 사위, 외손들로 구성되었음.{) 이들은 혼인 후 처가로 들어와 살면서 부인 명의의 유산을 상속16세기의 班村은 異姓雜居의 ‘同族村落’이었던 이러한 異 姓雜居의 동족촌락은 17세기 이후 점차 동성동본의 ‘同姓村落’으로 변모해간다.·촌락은 거주지인 동시에 행정단위·지역촌으로서의 편제는 촌락사회의 자율적인 질서에 의해 성립(자연 지리적 조건, 공동 농업 노동의 필요성, 喪葬과 자연재해에 대한 공동대응, 촌락 상호간의 혈연관계, 산림과 농업용수의 이용 등 촌락사회의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그리고 더 직접적으로 국가의 촌락지배를 목적으로 성립되었으며 이것이 面里체제이다.10. 동성촌락의 형성과정·17세기에는 조선 사회의 변화 때문에 15·6세기와 달랐다. 그 변화는 상속제도의 변화 와 주자가례의 보급, 예학의 발달, 宗法的 가족제도의 수용이다.·조선 전기에는 子女均分相續, 친족·외손의 구분이 엄격하지 않음. 초가 살이가 보통이 었으며 사위가 처부모의 터전을 이어받는 경우와 外孫封祀도 흔한 일이었다. 조선 후기에 적장자 중심의 종법적 가족질서 확립. 족보에 친손·외손을 똑같이 취급하던 것이 친손 중심으로 바뀌었고, 기재순서에도 출생순서가 아니라 아들을 앞세운다. 적장자 중심의 차 등상속으로 바뀐다. 부모의 재산이 적장자 중심으로 상속됨에 따라 특정 마을에 점차 동 성동본 친족집단의 형성이 가능해진다.
◎「혜능과 셰익스피어」,「김용옥선생, 그건 아니올시다」를 읽고...*자아와 명상**처음에 교수님이 이 책의 감상문을 과제로 주셨을 때 두 책의 이름을 보고는 과연 혜능과 셰익스피어와 무슨 관계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알기로는 혜능은 부처님을 모시는 분이시고, 셰익스피어는 영국의 극작가인데 과연 이들이 무슨 관계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김용옥 선생은 과연 누구일까 하는 의문도 들었다. 두 책의 제목을 언뜻 보더라도 특이한 생각이 든다. 전혀 상관이 없는 승려와 유명한 작가인 셰익스피어... 그리고 한 특정인의 이름을 거론하여 당당하게 그 사람의 생각을 반박하는... 불교에 대한 그리고 선에 대한 두 분의 상이한 생각이 강하게 표출되는 거 같았다.솔직히 불교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고 막연히 불교가 부처님을 모시는 종교다하는 생각만 들었는데 막상 이 책을 통해서 통해서 지금까지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어느 때는 호국 불교로써 정신적 버팀목이 되었던 불교의 정신을 조금이나마 알게 되었다.우선 「혜능과 셰익스피어」의 저자인 김용옥 선생은 도올 이라고 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알 것 같다. 뛰어난 언변으로 많은 대중들에게 철학에 대해 가르치는 강연 장면은 TV를 통해서 많이 접해 보았다. EBS강좌나 다른 여러 매체들을 통해서 관심있게 봤기 때문에 왠지 친근하게 느껴졌고 또 그분의 유명세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끔 보면 자기 중심적인 사고로 그것이 진리인 듯이 강연하는 경향이 있어 보였는데 이 책에서 또한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책 내용 중에 셰익스피어의 에 나오는 `사느냐 죽느냐 이것이 문제로다`나 `이제 남은 것은 침묵뿐이다`라는 귀절을 하나의 화두로 해석해 불교 사상과의 연관성을 고찰시킨 내용이 있다. 이와 함께 의 주요부분을 원문과 함께 싣고 선과 관련해 재해석하고 있는 것도 특기할 만 하다. 햄릿의 고뇌를 통해 본 셰익스피어는 당대의 기독교적 세계관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무아나 연기, 자연적 순환론인 불교의 세계관을 보여주고 있으며, 그가 추구한 것이 구원이 아닌 해탈임을 말한다. 그래서 저자는 햄릿은 공안이고 셰익스피어도 하나의 공안이다”라고 주장하면서 불교적 세계관을 분석한다. 이것은 우리나라 셰익스피어 연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만한 신선한 충격이다. 셰익스피어와 혜능을 화두로 내세움으로 해서 이렇게 이색적인 제목이 나타나게 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6조 혜능과 셰익스피어를 화두로 내세운 이색적인 이 책은 김용옥 선생의 저서답게 다양하고 전방위적인 주제를 다룬다. 우선 이 책은 한국 선불교의 대표적인 공안집인 벽암록 해설서다. 각종 화두에 대한 난해한 해설집인 `벽암론`을 저자가 강연한 것을 담았다. 또 달마·혜능·남전·조주 등 중국 선종 선사들의 일대기를 담고 있다. 깨달음을 놓고 펼치는 각 선사들의 독특한 성격과 삶이 다뤄진다. 김용옥 선생은 화두란 깨달음을 전하기 위한 뗏목에 다름 아니란 사실을 밝힌다. 깨달음을 전하기 위해 선택한 교육적 기획이 화두란 것이다.변상섭 선생은 이 책에 대해서 약간의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변상섭 선생님이 글을 보기전에 왜 선생이 이 책에 대해서 그러한 말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내 생각엔 변상섭 선생의 글도 생각하기 나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이유는 단순히 유능한 학자 또는 전문적인 지식이 있다고 해서 그 종교를 이론적으로만 해석하고 판단하려고 하면 종교의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기 쉬울 뿐더러 그 해석에 대한 책임의 부재도 문제가 될 수 있다. 나는 단지 철학자로서 학자로서 해석했을 뿐이다라고 끝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이루어온 정신적인 계통과 흐름을 일순간에 정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김용옥 선생과 변상섭 선생의 선에 대한 생각은 정반대라 할 수 있다. 김용옥 선생은 선은 반 불교라고 정의하였다. 한편 변상섭 선생은 이에 대해서 강하게 반박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이 두 선생의 의견 대조에 대해서 이러한 생각을 한다. 과연 김용옥 선생은 선이 정말 반 불교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이 점에 대해서 김용옥 선생의 표현이 너무 극단적이지 않았나? 라는 생각이 든다.‘인간에게 있어서 존재의 해탈이 언어의 부정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로 쓰인 모든 경전은 반 불교 운동이다. 만약 이 글 그대로 라면 솔직히 너무 단순하고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다. 정말 김용옥 선생이 불교를 왜곡하려 했거나, 아니면 좋게 말해서 풍자하려는 의미가 아니었을까? 변상섭 선생의 말을 빌리면 여러 경전에서 언어를 부정하는 것은 부처님의 깨달은 마음에는 언어와 문자가 없다는 의미이며 불립문자는 곧 부처님의 깨달은 그 마음의 경계를 표현한다고 하였다. 이렇게 보면 전적으로 김용옥 선생의 판단이 옳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나는 김용옥 선생의 글을 보고 모든 선종이 모든 경전을 부정한다고 보지는 않는다.내가 틀린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현재나 과거의 경전에만 치우친 어떻게 보면 너무 안으로만 굽어있는 불교에 대한 비판이라고 할까?
Ⅰ. 들어가기월남과 우리는 중국과 국경을 연하여 역사적으로 중국의 영향을 같이 받아왔다. 19세기 후반부터 두 나라는 기간과 시차의 차이는 있었으나 열강의 침략으로 식민지배를 받았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이데올로기에 의한 남북분쟁의 설움과 공산주의자들의 침략전쟁을 겪었다. 양 침략전쟁에 미국이 개입했고 우리는 월남전에 참전하여 우리 젊은이들이 고귀한 피를 흘려가며 그들의 자유를 지키는데 일익을 담당하였었다.그러나 월남은 우리와 자유세계의 기대를 저버리고 1975년 4월 30일 공산군에게 패망하였다. 끊임없는 派爭, 分列과 만성화된 不正腐敗로 나라 전체가 뿌리 패 흔들리는 가운데 백만이 넘는 越南군은 越盟군의 기습적인 一擊을 당한지 51일 만에 砂上樓閣처럼 일거에 무너져 버렸다.월남의 정치인, 군인, 경찰, 대학생, 종교인, 언론인, 노동자, 농민, 스스로 재야 민주세력 또는 중도파를 자체했던 사람들 모두 죽을 쑤는데 열렬히 동참하여 개에게 주고 말았다. 죽을 먹은 越盟은 현재 國民所得 200불 수준의 最貧國으로 전락하여 이제는 이데올로기 보다 가난을 면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다.군사적으로 越南戰爭은 단순한 게릴라戰으로 오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월남에서의 게릴라戰은 越盟이 戰爭의 시작을 게릴라戰으로 했고 이를 최대한 활용하였을 뿐 이였다. 越盟은 正規軍으로 월남을 武力赤化統一 한 것이다.한국과 월남은 비슷한 역사를 가진 것 같지만 역사의 전개는 다르다. 월남의 역사는 Hanoi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북에서 남으로 진출하는 역사였다. 18세기 중엽까지 Cambodia 王國에 속해있던 Mekong델타 지역 즉 오늘의 越南 領土를 점령한 것이다. 결국 월남도 패망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三國統一부터 지금까지 역사의 중심은 南이었고, 南에서 北으로 진출하는 역사였다.越南戰爭은 30년간 계속되었다. 1946∼1954년까지의 第1次 越南戰爭은 프랑스의 植民支配에 항거했던 전쟁으로 이 항쟁을 共産主義者들이 주도하여 월남의 비극이 잉태되었다. 1954∼1973년까지의 장군 보 응우엔 집아이 4만 명의 병력으로 포위하고 대포를 앞세워 뚫고 들어오자 비로소 크게 놀랐다. 미국의 많은 원조에도 불구하고 1954년 5월 7일 기지는 함락되었다. 이 전투에서 프랑스군은 1만여명이 항복하고 5,000여 명이 전사했다. 이 전투 뒤 프랑스 군대가 혼란에 빠지자 프랑스 정부는 전쟁을 끝내려 했고, 제네바의 국제회의에서 공식적인 타결 방안이 협상되었다. 국가적 수치감이 프랑스 국민 사이에 팽배했고 특히 군인들에게 심각한 영향을 미쳤으며 그 뒤 알제리 문제도 겹쳐 1958년 프랑스 제 4공화국의 몰락을 가져왔다.(유현종, 『앞에 책』, p 74∼75)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여 제네바 회의의 결과 7월에 체결된 휴전협정{) 제네바 협정은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3국의 독립을 보장하고 베트남의 경우는 북위 17도선 을 기준으로 이북은 월맹의 독립국을 인정하며 월남은 잠정적으로 프랑스 통치아래 둘 것을 합의했다. 7개의 합의 사항: 1. 북위 17도선에 잠정적인 군사분계선을 긋는다. 그러나 이 군사 분계선은 잠정적인 것이며 항구적인 것은 아니다. 2. 북위 17도선을 기준으로 이북은 월맹이 장악하며 이남은 잠정적으로 프랑스가 통치한다. 3. 민간인에 대해서는 상대방편에 협력했다 는 등의 이유로 어떤 보복도 가해서는 안되며 본인이 원하면 17도선을 넘어 자유로이 남북으 로 철수 할 수 있다. 4. 남북베트남은 1956년 여름까지 단일정부 수립을 목적으로 총선거를 실시한다. 5. 1956년 여름의 총선 이전에 수립된 월남정부는 제네바협정에 규정된 사항들 준 수할 책임을 진다. 6. 남북베트남의 어디에서나 외국군의 기지설치는 인정되지 않으며 각정부 는 어떤 이유로든 공격적 또는 방어적 군사동맹을 체결할 수 없다. 7. 폴란다, 캐나다, 인도의 대표들로 구성된 국제통제위원회가 휴전협정의 준수와 총선 실시를 위한 구체적 사항의 이행 을 감시하고 감독한다.( 이경일. 「미국의 동남아 정책과 과정분석: 월남전쟁을 중심으로」, 연 세대 행정대학원, 19빨리 세우려 주민을 강요하게 되었고 이것은 불신을 낳게 되어 1964년 2월에 이 계획은 중지되었다.{) 마이클 매클레어 著, 유경찬 譯, 『앞에 책』, 2002.1963년 초파일에 국기 게양 문제 때문에 불교도의 시위가 시작되어 5월 30일에는 반정부 시위가 확산되어 분신 자살하는 자도 늘어났다. 11월의 군사 쿠데타로 Diem이 사망하고 1967년 9월 Thieu가 대통령으로 즉위하기 전까지 10번의 정권교체가 있었다.{) 유인선, 『앞의 책』, p 407.1964년 월맹에서는 이제 게릴라군이 아니라 정규군을 파병하게 된다. 그것은 새로운 무기로 월맹의 사기가 높아졌고 전력도 증강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Ton Kin만 사건이 도화선이 되기도 했다. 월맹이 이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은 중국과 소련이 지원해 주리라 기대했고, VC의 게릴라로는 더 이상 전쟁의 진전이 없는 데다 총공세를 늦추었다가는 미국의 지원으로 월남 정부가 안정이 되면 안 되었기 때문이다2차 대전이 끝나고 美蘇를 정점으로 한 양극체제가 등장함으로써 미국의 외교정책은 소련을 정점으로 한 공산체제와 맞서기 위해 외교정책을 완전히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월남전의 경우도 재정립된 외교정책 즉, 봉쇄정책{) 1. 소련을 봉쇄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封鎖政策을 깔고 있으면서, 2. 2차대전을 계기로 식민주 의가 포기되었거나 포기되려고 하는 아시아·아프리카의 勢力空白지역 및 內政이 불안한 소 련국경지역에 대한 팽창외교를 편다는 것이고, 3. 이런 팽창외교를 진행해 가는 과정에서 미국 은 自由民主수호의 선봉으로서 공산주의의 팽창을 막아야 한다는 이데올로기戰을 개입의 정 당성으로 사용했다.( 정면화, 「미국의 봉쇄정책과 월남전에 관한 연구」, 단국대 대학원 , 1998, p53.)의 일환으로 미국이 이 전쟁개입에 관한 관심을 갖기 시작했었다.그러나 미국의 월남전개입은 월남개입으로 직접 소련의 팽창외교와 맞부딪치겠다는 것은 아니었으며 그것은 우방 프랑스를 도움으로써 간접적으로 소련에 대한 외교 압박을』)前美국방장관이 지적한 것처럼 비밀리에 진행한 정책, 특히 의회의 지지나 국제여론의 지지를 먼저 얻고 했으면 좋았을 월남전 개입을 행정부 단독으로, 국민의 눈과 국제여론을 피해가면서 진행했던 것이 결과적으로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낳는 한 요인이 되었다.{) Robert S. McNamara, In Retrospect: The Tragedy and Lessons of Vietnam, New York Times Books, 1995, pp 322∼323.( 정면화, 「앞의 논문」, p 105. 재인용)월남전이 끝난후 미국의 군사학계에서는 월남전의 패인을 규명하려는 학문적 노력이 일어났다. 해리 서머스는 월남전쟁이 미국국민의 전쟁이기 보다는 존슨행정부의 전쟁이었고 닉슨행정부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많은 문제가 처음부터 발생했다고 분석하고 있다.{) 해리 서머스 著, 민평식 譯, 『美國의 越南戰 戰略』, 민학사, 1993, pp 23∼30.미국의 월남전 개입이 의회의 동의 없이 행정부에 의해 아주 점진적으로 그리고 눈에 잘 띄지 않게 진행된 것은 뒷날 미국내의 반전여론을 불러 일으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월남내에서도 미군개입에 대한 월남인들의 지지를 얻는데 긍정적이지 못했다.미국은 1950년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戰 비용으로 1억 5천만 달러를 제공했으며 1954년 프랑스가 디엔 비엔 푸 전투에서 결정적인 패배를 당할 때 까지 모든 戰費의 80%를 제공했고 프랑스가 이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총 26억달러를 투자했던 것이다.{) 유제현, 『越南戰爭』, 韓元, 1988.1954년 제네바협정으로 프랑스가 물러가고 대신 미국이 인도차이나문제를 넘겨받으면서부터 미국은 월남정부에 돈과 인원을 제공하면서 월남정부가 공산주의와 싸울 수 있도록 도왔다. 외교적으로는 유럽의 북대서양조약기구를 모형으로 한 동남아조약기구(SEATO)를 조직하여 인도차이나반도의 공산화 물결을 저지하는데 힘을 모을 수 있도록 종용했다.{) 정면화, 「앞의 논문」, p107.미국은 월남에 안 미군의 집중 폭격을 받았다. 파리에서는 다시 회담이 시작되었고 1973년 1월 27일 마침내 월남 공산주의 세력, 월맹, 월남, 미국 사이에 협정{) 총 92장 23조로 된 이 협정안의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1 휴전은 그리니치 표준시(GMT)로 1973년 1월 27일 24시에 발효되며 시한이 없이 실시된다.2 인도차이나 전역에서 포로가 된 미군은 협정발효 후 60일 이내에 전원 석방한다.3 협정조인 60일 이내에 미국을 비롯한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모든 외국의 군대·군고문관·군사요원및 그들의 무기·탄약 기타 군장비물자는 전면 철수한다.4 베트남 정부군과 베트콩은 현위치에 그대로 남는다.5 당사국에 의해 조인된 합의사항을 승인하고 전쟁의 종결을 보장하며 평화를 유지하기 위한 국제회의를 협정조인 30 일 이내에 개최한다.6 미국은 베트남에 군사 개입 또는 내정 간섭을 하지 않는다.7 휴전·철군·포로석방 문제를 다룰 국제 휴전감시 관외위원회(ICCS)를 둔다.8 북위 17°군사분계선은 1954년 제네바 협정에 명시된 바와 같이 잠정적인 것이며 정치 또는 영토를 자르는 분계선은 아니라고 규정하고 있다.그리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의 협정이 발표되었다. 즉1 그 다음날 아침부터 북베트남과 남베트남 전역에서 전투를 중지한다.2 모든 미군을 철수한다.3 모든 미군 기지를 철거한다.4 모든 전쟁 포로들을 석방한다.5 다국적군이 평화를 감시한다.6 남베트남은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권리를 가진다.7 북베트남 군대는 남베트남에 머물수는 있으나 더이상 증강하지는 않는다.8 북위 17°선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두 나라가 통일될 때까지 분계선으로 남아 있게 된다.이 이루어졌다.2. 파리 휴전협정파리 휴전협정(1973년 1월 27일 조인)은 공식적으로는 [베트남에서의 전쟁종결과 평화회복에 관한 협정]이다.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종결시킨 제네바 협정(1954년 7월 20일 조인)의 공식 명칭은 [베트남에서의 적대 행위의 종결에 관한 협정]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제네바 협정다.
Ⅰ. 들어가며三國史記 百濟本紀에는 기원전 1세기 말경 百濟는 이미 국가체체를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하지만 三國史記 의 기록들은 三國志 魏書 東夷傳 등 中國측 사료와는 적지 않은 불일치 점을 내포하고 있어 이전부터 그 사료적 가치에 대한 논란이 많아 왔다. 최근에는 이러한 百濟의 國家形成이라는 연구에 대한 문헌자료의 부족을 考古學 자료가 뒷받침해주고 있다. 이 글에서는 百濟가 어느 시기에 國家가 形成되었는가를 考古學的인 자료를 통해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國家形成에 대한 考古學的 접근국가단계 정치체 출현 등과 관련한 考古學的 증거들이 어떠한 것들인가에 대해서는 아직 뚜렷하게 일치된 견해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특정 土器樣式의 형성 및 그에 의한 공간적 통일성의 출현, 大形封墳을 가진 墳墓의 등장 및 특정 지역에의 집중화, 그리고 城郭의 출현과 같은 현상은 연맹왕국단계 정치체 형성을 반영하고 있는 考古學的 지표로 이해할 수 있다.百濟를 비롯한 한반도 三國의 경우 정치체 영역과 특정 土器樣式의 공간분포가 거의 일치되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百濟와 함께 新羅, 加耶, 高句麗의 경우 각 정치체의 형성과 더불어 특징적인 土器樣式이 출현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 분포 역시 정치체 영역과 거의 일치하고 있다. 이러한 것으로 보면, 한반도 三國의 경우 특정 土器樣式 형성 및 그 공간적 분포양상은 국가체 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특정 墳墓의 봉분 규모나 부장품에는 그 피장자의 性, 年齡, 社會的 身分 등이 반영되어 있다. 이렇게 볼 때, 어느 시점의 특정 피장자 墳墓가 이전보다 현저하게 대형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그 사회 안에서 대형분묘 피장자의 위상이 이전보다 현저하게 높아졌음을 보여주는 지표가 되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대형분묘들은 특정 지역에 집중되어 군집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인데, 이는 해당 정치체내에서 이들 대형분묘의 피장자들이 지속적으로 정치·사회적 우위를 유지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대형분들로만 구성된 묘역 과와 함께 그 상대빈도상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이른 시기에는 경질무문토기만이 존재하다가 이어서 타날문토기와 함께 회흑색무문양토기가 등장하고 있다.경질무문토기의 출현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외반구연토기인 명사리형 토기이다. 경질무문토기와 명사리형토기는 기형이 모두 외반된 구연을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시기적으로 밀접하기 때문이다. 명사리형토기는 光州 新昌洞 甕棺墓에서도 甕棺으로 사용되고 있음이 확인되었고, 樂浪土城址 출토 토기, 황해도 雲城里 유적 출토 토기 가운데서도 확인되고 있어 그 분포는 대동강 유역 이남 전역에 걸쳐 있음을 알 수 있다. 명사리형토기의 제작·사용 절대연대는 대략 위만조선 성립을 전후한 기원전 3세기 말에서 2세기 초경으로 생각된다. 경질무문토기가 한강유역에 출현하는 과정은 결국 명사리형토기가 이 지역에 파급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명사리형토기가 한강유역에 나타날 수 있는 가능성은 그것이 대동강유역에서 출현한 시점으로 추정되는 기원전 2세기 초 이후부터 존재한다. 그러나 한강유역에서 지금까지 경질무문토기와 공반되는 철기는 모두 발달된 漢代의 철기와 관련되므로 그것이 한강유역에 등장하는 시점은 대략 낙랑군 설치 이후일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초기철기문화 전개과정으로 보면 그것은 위만조선 멸망과 그에 따른 일련의 유이민 남하와 관련된다. 따라서 한강유역 경질무문토기의 출현은 대략 기원전 100년경으로 볼 수 있다.한강유역에는 타날문토기가 공반되지 않은 경질무문토기 단순기가 확인되고 있어 타날문토기의 출현은 이보다도 한단계 늦은 것으로 보인다. 한강이남의 남한지방에서 지금까지 확인된 타날문토기의 절대연대는 모두 기원후 2세기 무렵이며, 한강유역 또는 중서부지방에서는 기원후 80∼160년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려하여 볼 때 한강유역을 비롯한 남한지역에서의 타날문토기 출현시점은 기원전후 무렵으로 볼 수 있다.회흑색무문양토기는 그 기종이 주로 평저호에 국한되어 나타나는데, 기원후 1세기 중엽이후 낙랑토기의 무문양화 경향과 더불어 등장하기 후반∼4세기 무렵으로 생각된다.원삼국토기의 대부분을 점하는 壺는 여타 기종에 비해 기형상의 변화가 크지 않지만 대체로 구연부 형태에서 기형상의 변화가 나타난다. 이러한 구연부 형태변화와 더불어 환원소성 경질토기로의 변화도 일어난다. 高杯, 三足器, 직구단경호 등의 전형적인 백제토기 기종의 경질화는 4세기 중엽경으로 추정된다.한강유역 및 중서부지방 원삼국시대를 시기 구분해보면제 Ⅰ기는 경질무문토기 단순기로서 절대연대는 기원전 100년경부터 기원전후까지 약 100년간에 해당된다.제 Ⅱ기는 타날문토기라는 새로운 기술적유형의 출현을 기준으로 그 이전과 구분된다. 이 기간은 한강 유역 원삼국 전기에 해당되는 기원전후 무렵부터 기원후 200년경까지의 약 200년간이다.제 Ⅲ기는 경질무문토기의 각 기종이 산화소성된 타날문토기 심발형토기 및 장란형 토기 등으로 대체되는 시기이다. 경질무문토기가 소멸되고 타날문토기 직구호가 출현하며 경질무문토기 완이 회흑색무문양토기로 대체되는 등의 변화를 보인다. 제 Ⅲ기의 하한은 새로운 백제양식 토기의 출현시기로 추정되는 3세기 중후반경이 된다.2. 백제 토기 양식의 출현과 흑색마연토기한강유역 원삼국 이후의 유적 출토 토기들은 몽촌유형 이라 불리워지는데, 몽촌유형 토기는 4가지 기술적 유형으로 구성되어 있다. 흑색마연토기, 회흑색연질토기, 회청색경질토기, 적갈색연질토기이다. 각 기술적 유형은 다수의 기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적갈색연질토기의 심발형토기, 장란형토기, 시루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이전 시기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기종들이다.새로 나타나는 기종들과 기술적 유형과의 상관성을 살펴보면 高杯, 直口短頸壺 등은 黑色磨硏土器, 灰色軟質土器, 灰靑色硬質土器 등 3가지 기술적 유형 모두에 걸쳐 나타나면서 흑색마연토기→회색연질토기→회청색경질토기의 순으로 기형변화를 보이고 있고, 直口廣肩壺는 黑色磨硏土器, 灰色軟質土器 2가지 기술적 유형으로 나타나면서 역시 기형변화를 보이고 있다. 기대, 광구장경호 등의 기종은 흑색마연토기로 된 것은 아에 등장하였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몽촌유형 기종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삼족기는 서진대의 靑銅三足 과 관련성이 높다. 양자는 형태적으로 유사할 뿐 아니라 청동삼족세에 보이는 돌대처럼 금속기에 흔히 보이는 형태적 특징이 몽촌유형 초현 삼족기에도 그대로 표현되어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삼족기는 서진대의 청동기를 번안·모방한 데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흑색마연토기의 출현을 한강유역에서의 백제 국가형성과 관련시켜 볼 수 있다면 이 문제에 대한 구명은 백제 건국세력의 계통 또는 출자를 이해함에 있어 중요한 의의를 내포하고 있다할 것이다.흑색마연이라는 토기제작기법은 당시 토기보다 상위품인 칠기의 재질감을 토기에 옮겨 적용하려는 노력의 결과로 볼 수 있다.고배, 직구단경호, 광구광견호는 중국에서 후한대 이래 무덤의 부장품으로 자주 보이고 있다. 이들은 대개 후한 만기∼서진에 이르는 시기에 집중되어 있어 몽촌유형 직구단경호와 시기적으로 연관 가능성이 높으며, 세부 기형상으로도 몽촌유형 직구호의 특징과 일치되고 있어 양자간 관련성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이와 같은 몇 가지의 관찰로써 몽촌유형의 직구단경호 및 직구광견호 등 일련의 신출기종은 몽촌토성에서 출토된 적 있는 서진 전문도기 등과 더불어 대략 서진대 중국 기종으로부터 유래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역사적 계기는 역시 진서 마한조에 보이는 것과 같은 3세기 중후반경의 활발한 대서진 교섭으로 볼 수 있다.이상의 검토를 통해 몽촌유형의 출현과 함께 나타나는 흑색마연토기 각 기종은 3세기 중후반 무렵 당시 서진대의 보편적인 기종들을 재래 고급그릇 소재로서의 칠기 재질감을 내는 흑색마연토기 형태로 국산화하는 과정으로 이해되며, 이는 또한 진서 마한전 등 일련의 대서진 교섭 기사들에서 잘 알 수 있듯이 그러한 대외교섭을 주도하는 새로운 정치엘리트층의 출현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Ⅳ.한강유역 고분의 변천1. 임진강·한강중상류유역 고분현재까지 알려진 이 지경의 묘제는 모두 葺石式積石墓(無基壇式積石 )로서 전체 고 11호 토광묘)ⅴ. 廣口長頸壺, 심발형토기, 그 밖에 蓋杯, 外反口緣小壺 등의 기타 기종이 부장된 무덤(석촌동 5, 6, 10호 토광묘)이 5가지 부장토기 조합유형 사이에는 시기적 차이가 있다. 직구단경호, 광구장경호 등 몽촌유형 토기 기종이 포함된 것과 그 이전의 원삼국시대 타날문토기 기종으로 구성된 것은 그러한 시기적 차이를 잘 드러내 주고 있다. 즉 1·2유형과 3·4·5유형 사이에는 분명한 시간차가 있음으 확인된다.원삼국시대 토기로 구성된 1유형과 2유형을 자세히 관찰해보면 2유형은 1유형에 비해 타날문토기 심발형토기가 추가된 점이 다르다. 타날문토기 심발형토기는 한강유역 및 중서부지방 원삼국 제Ⅲ기에 출현하는 기종이므로 이를 포함하고 있는 2유형은 1유형에 후행하는 부장토기 조합상이라 할 수 있다. 심발형토기의 출현시점은 3세기 전반 경이므로 2유형 부장토기 조합은 대략 3세기 전반 이후로 추정될 수 있다.몽촌유형 토기 기종들로 구성된 3·4·5유형 사이의 관계 역시 시간적인 차이가 보인다. 우선 직구단경호를 포함하고 있는 3·4유형을 보면, 심발형토기 이외에 완, 병 등 기타 기종을 포함하고 있는 4유형의 직구단경호는 모두 경질로 되어 있어 몽촌Ⅱ기에 해당되는데 비해 3유형의 직구단경호는 몽촌Ⅰ기에 속하고 있다. 그리고 직구단경호 대신 광구장경호가 부장된 5유형은 3·3유형보다 더욱 늦은 시기의 무덤임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공반된 심발형토기의 기형에서 잘 나타난다. 광구장경호와 공반된 심발형토기가 직구단경호와 공반된 것에 비해 후행하는 기형이기 때문이다.이상 살펴본 각 유형들간의 시기적인 관계를 요약해 보면 제1유형은 3세기 이전, 2유형은 3세기 전반 경부터 몽촌유형이 출현하는 3세기 중후반 경까지, 3유형은 몽촌Ⅰ기인 3세기 중후반 경에서 4세기 중엽 경까지, 4유형은 4세기 중엽 이후의 몽촌Ⅱ기 이른 시기, 5유형은 몽촌Ⅱ기의 늦은 시기에 각각 비정될 수 있다.이로써 석촌동 3호분 동쪽 지역 고분군으로 대표되는 서울지역 토광목관묘는 3세기 이각된다.
- 서양사학사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를 읽고...Ⅰ. 들어가며역사는 끊임없이 흘러왔고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도 끊임없이 달라지고 있다. 각 시대마다 나타난 다양한 역사 연구의 방법은 그 스스로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어 왔다.각 특성을 지닌 역사학은 발전하고, 또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나름의 한계로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러한 연구들은 역사학을 풍부하게 하고 또 다른 역사학을 탄생시키는 토대가 되었을 것이다.그런데 최근 역사학뿐이 아닌 문학, 예술 등의 분야에도 새로운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물론 그 새로움은 어느 때 갑자기 생겨난 것은 아니며, 기존의 것을 모두 바꿔버리는 것도 아니다. 역사학에서 생겨난 새로운 변화는 기존 역사 방법에 중점이 되던 것들 이외의 것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나타났다. 이것은 또한 그동안 오랜 역사를 가진 역사학의 방법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회의적인 생각에서 나온 것이기도 하겠다.그러나 각각의 역사학은 모두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지고 있으며 여기서 다루게 될 문화를 통한 역사 읽기 또한 그 중 하나로서 역시 역사에 대한 이해를 폭 넓고 풍부하게 하는데 그 역할을 할 것이다.Ⅱ. 문화로 보면 역사가 달라진다고대의 역사학은 역사 자체로서가 아닌 교훈을 얻기 위한 역사로 그 논리성보다는 철학의 범주에 있었다. 그러던 것이 객관적인 역사서술을 하게 되면서 역사는 과학성을 추구하게 되었다. 이는 대표적으로 19세기 랑케에 의해 엄정한 사료의 비판 및 원사료에 대한 엄밀한 연구의 중요성 강조로 역사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던 것이 20세기 중반에 들어 사회사의 도전을 받았다.역사서술의 방향이 일방적으로 일부 지배층에 의해 결정되고, 절대 다수의 민중의 목소리는 반영되지 않는 정치사에 대한 비판으로 사회사가 등장한 것이다.이러한 사회사는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과 아날 학파에 의해 주도되었다고 볼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20세기 중엽까지 역사학의 성격을 변화시켜 농민이나 노동자 계급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켜 아래로부터여러 영역이 역사학의 영역으로 편입되었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아날 학파는 변화하지 않고 남아있던 사람들의 생활상을 더욱 중요하게 인식하고 서술의 대상으로 만들었다.그러나 여기에도 비판이 가해지게 된다. 먼저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의 주체가 되어야 할 대중이 계급투쟁의 역사 라는 개념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는 것이다. 아날 학파 또한 일상사에 관해 많은 것을 밝혀 놓았지만 민중들 생활의 물질적인 측면일 뿐, 그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또는 집단적으로 생각했던 방식을 파악하는데는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또한 장기적으로 변하지 않는 구조를 연구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에 걸친 자료가 남아있는 것만이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어, 그 연구는 고대와 중세 연구에 집중되었다는 것이다.여기서 다루는 역사연구의 방법은 사회사가 아닌 문화사에서 출발하여 문화사를 지향하는 많은 역사가들의 노력에 힘입어 확립된 것이다.이 글에서는 그 방법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껍게 읽기 에 대한 소개로 시작된다. 사실 어렵게 느껴질 수 있는 두껍게 읽기에 대한 이론을 윙크에도 여러 가지 의미가 있을 수 있다는 설명, 우리 일상에서 볼 수 있는 현상들로 쉽게 설명하고 있다. 가장 흥미로운 것은 고양이 대학살 의 이야기이다. 인쇄소 견습공들이 고양이를 학살했다는 기록은 그 당시의 시대상과 고양이의 상징적인 의미를 모르면 이해 할 수 없다. 여주인의 고양이보다 못한 취급을 당했던 견습공들의 이야기, 고양이가 마법을 암시하고 주술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성(性)을 암시한다는 점, 그리고 정교한 의식으로 고양이를 재판하고 처형함으로써 부르주아의 유죄를 선고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또한 이 글의 작자의 직업상의 특징 때문에 학생들의 리포트를 통해 여러 방향으로 생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도 흥미롭다. 이는 흔히 우리의 역사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5.18사태에 대한 정부측의 기록과 광주시민들의 입장과 타지역 사람들의 생각은 각각 다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학생들의 리포트로 주제에 대한 환기를 하는읽기에 대한 흥미를 한껏 일으킨다.바로 다음 장에서는 나 역시 의문시 할 수밖에 없었던 문제를 제기하고 답을 제시한다. 앞서 말한 고양이의 대학살이라는 특수한 에피소드들이 어떻게 노동자들의 사고 방식에 대해 일반적 추론을 이끌어 낼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고양이 대학살의 저자 역시 이 점을 변명한다. 이 점에서 우리는 그 동안 역사학에서 구체적인 사료의 양을 통해 확인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지를 말해준다.그러나 필자는 여기에 다시 한번 반문하면서 거의 대다수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고, 그들을 위한 기록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어쩌다 남은 그러한 기록은 양적으로 풍부한 어떤 자료보다 상세하게 진상을 말해 줄 수 있으며, 이런 작은 것을 통해 읽기 의 방식이야말로 그 빈약한 자료를 풍성하게 파악할 수 있는 시도라고 한다.앞서 언급한 대로 마르크스주의 역사학과 아날 학파는 한 번 더 생각하면 거시적, 구조적 역사 속에 오히려 평범한 인물들을 매몰시켰다. 이런 점에서 미시사는 이 미흡한 점을 보완하기 위해 1970년대를 기점을 나타난 일련의 새로운 흐름 인 것이다. 미시사는 하나의 마을, 가족 또는 개인과 같이 경계가 잘 구획된 현상에 초점을 맞추어 실제 존재하던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을 다루고 있으며, 그 방법은 마치 인류학자가 현장조사를 하듯 면밀히 추적함으로써 그 현상이 지니는 역사적인 의미를 복합적인 사회관계의 그물망 속에서 구체적으로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적인 면의 핵심은 역사가의 해석과정이 수학자나 물리학자보다는 의사의 진단에 가깝다는 말이 잘 나타낸다. 즉, 역사학은 겉으로는 의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조그마한 실마리를 통하여 그 뒤에 놓인 역사적 실재를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다음 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이러한 역사학의 방법을 실천한 역사가들 - 미셸 푸코, 헤이든 화이트, 도미니크 라카프라에 대해 알아본다.푸코는 선험적으로 주어진 보편적 대상은 존재하지 않으며 광기, 의학, 국가, 인간 등의 모바로 근대 권력 매커니즘의 역사라고 보았다. 그런데 여기서 염두 해 둘 것은 푸코의 권력은 국가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회적 관계도 권력관계의 대상으로 연구되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국가 뿐 아니라 신체, 사회, 성, 영혼, 경제 등 우리가 객관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보게 한데 그 의의가 있다. 과거의 어떤 시점에선가 어떤 사람들에 의해 어떤 의도를 지니고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객관적이고 절대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황에 따라 옳고 그를 수도 있는 담론이라는 것이다.때문에 푸코는 인과관계의 법칙에 근거하여 원인과 기원을 추적하여 의미의 통일성을 찾으려는 역사학의 방법을 무시한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역사의 연속성이 아니라 단절기라는 것으로, 여기에서 중요하게 부각되는 것이 담론이라는 역사 연구의 방법이다.화이트는 기존 역사가들이 역사책 속에 허구적인 요소를 보지 않으려 하고 허구를 초월했다고 읽기를 원하고 허구적 서술을 못하도록 금지한다는 점을 지적했다.그러나 여기에 따르면 역사적 사건을 기술하려는 모든 시도는 상상적이고 상징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일관성, 성실성, 충실성과 끝맺음을 보여주는 화술 에 필연적으로 의존한다.역사가는 특징적인 논증형식과 플롯 구성형식을 채택하지만 그 과정에서 비경험적인 사고유형에 의존하여 심미적이고 윤리적인 판단을 내린다는 것이다.화이트 역시 이러한 점이 전통적인 역사가들에게 위협이 될 것을 알지만 오히려 역사가들이 인습적으로 나누는 사실과 허구사이의 구분에 도전하는 것이 역사학을 더욱 창의적이고 비판적인 학문으로 만들 것이라는 희망을 유지한다.라카프라는 화이트의 설명조차도 일관적이고 통일적 상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질서와 일관성의 추구를 의문시하는 비판적 역사서술을 요구한다. 라카프라에 따르면 역사가의 임무란 자율적인 과거와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려고 하는 역사가들의 시도 사이에 대화 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일이다.화이트와 라카프라의 기여는 역사서술에 담겨 있는 허구성, 창작성이라는 문제를 역사사학을 깨뜨리는 또 하나의 연구인 포르노그라피에 대해 알아본다. 성은 인류의 삶에 필수적이고 인류 역사의 원동력이라고 할 수 있지만, 인간 정신의 고귀한 승리만이 역사서술의 대상이 되고 육체는 쾌락의 장소, 타락의 장소로 비하되어 역사에서 어떤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 이런 점에서 지금 성의 역사에 몰두하는 학자들은 정신에 의해 불합리하게 격하되었던 육체를 복원하고 있다.성은 아무리 은밀하고 개인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 변화는 각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한다. 이전에 귀족들만 은밀히 성욕을 자극하는 그림을 보고 즐겼을 때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제 많은 사람들이 값싸게 그런 그림을 얻을 수 있게 되자 검열의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포르노그라피는 민주주의의 확산과도 깊은 관련성을 지닌다고 추정할 수 있다. 그리고 포르노그라피는 동성애, 매춘, 성차별 문제는 물론, 사회적 차별이라는 쟁점과도 관계를 맺고 있다.역사적인 맥락에서 포르노그라피가 만들어 졌을 때는 성욕의 도발이라는 문제는 부수적이다. 그것은 정치적인 목적에서 만들어진 경우가 많았으며, 이런 점에서라도 우리는 그 형성 과정을 이해하여 역사를 경험함으로써 현재의 성에 대한 담론이 지니는 문제점들을 의식할 수 있을 것이다.포르노그라피에 대한 역사적 이해를 위해 전제되어야 할 명제는 역사적으로 다른 시대, 지역적으로 다른 장소에서 만들어진 포르노그라피는 다르다는 것이다. 포르노그라피를 통해서 우리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차별이 어떤 의미를 갖는가, 정치적 권력 문제는 그것에 어떻게 얽혀 있는가, 포르노그라피라는 텍스트는 고급의 정치적·사회적 담론과 어떤 관련을 맺는가 라는 문제는 물론, 생생한 대중적 정치 투쟁의 양상까지도 알 수 있다.마지막으로 필자는 문화로 보는 역사를 옹호하면서 한편으로는 문화의 왜곡현상을 염려한다. 특히, 현대사회에서 자본의 논리로만 행해지는 문화에 대해 경계하고 있다. 또한 우리의 문화실정에 맞는 우리 자체의 이론 개발에도 주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