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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하이마트고객서비스
    하이마트 고객만족 서비스평가목 차1. 고객만족 경영2. 하이마트와 경쟁사의 고객만족서비스3. 개선방향고객만족(customer satisfaction)이란 고객과 눈높이를 맞추는 것을 의미한다. 즉 고객이 '아, 이것이 내가 찾던 것이구나' 라고 느끼게 하여 계속 같은 제품, 같은 회사, 같은 장소에서 구입하도록 상황을 창출해 나가는 것이다.고객만족경영고객만족경영상품 및 서비스에 만족한 고객은 고정고객이 된다. 마케팅비용의 효율성을 제고해 준다. 고객이 만족하면 가격우위효과를 가질 수 있다. 판매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2.타사와의 비교신용카드포인트적립기존고객관리마일리지카드적립커뮤니티운영Online관리없음해피콜운영사후관리미비함1년간 무상제품A/S1년간 무상삼성디지털프라자하이마트3. 개선방향설 문 조 사현재 가장 관심이 가는 전자제품 전자제품의 구매경로 전자제품 구입 후 구입처로부터 사후 서비스여부 대형 전자제품전문점 선호도 하이마트하면 떠오르는 이미지 앞으로 하이마트가 개선할 점▷ 총 100명 :24명 :76명20대초반 :47%20대후반 :20%30,40대 :33%3. 개선방향◈ 제품 구매시 고려부분3. 개선방향◈ 하이마트 이미지3. 개선방향◈ 하이마트 개선점3. 개선방향4. 일렉-인테리어(Elec-Interior) 전문가의 도입3. 고객세분화 관리2. Door To Door1. 고객 휴식공간 체험관{nameOfApplication=Show}
    경영/경제| 2008.09.09| 10페이지| 1,500원| 조회(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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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오카스테가 오이디푸스에게 쓰는 편지
    나의 오이디푸스 왕께.오이디푸스, 지금의 처참한 나의 마음은 그 무엇으로도 형용할 수 없군요. 세상에 이보다 더 비참하고 비극적인 일이 있을 수 있을까요? 하늘이 우리를 버리고 저주했어요. 지금 나에게는 암흑과 고통뿐이에요. 아아..누구보다도 당신의 고통이 크겠지만..당신의 영혼은 누구 보다고 순결하고 깨끗하다는 것을 알아요. 이 모든 일들이 대체 누구의 장난이란 말인가요? 신의 저주로 우릴 지옥의 불로 몰아갔어요. 우리의 운명을 희롱한 하늘이 원망스러울 뿐이에요.모든 것이 나의 죄악이에요. 당신의 어미가 된 것도, 아내가 된 것도...오, 나의 아들이자 남편, 오이디푸스여. 부디 그대의 가엾은 영혼이 이 큰 고통에서 벗어나길 바래요. 모든 악몽은 내 몸이 당신에게 세상의 빛을 보게 함으로써 시작된 것이에요. 모두 나의 부덕이고 나의 죄에요.불쌍한 오이디푸스여. 그대가 이 사실을 몰랐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겠건만... 이 고통이 부디 나만의 것이기를 바랬건만... 몇 일전부터 알 수 없는 불안함과 불현듯 떠오르는 선왕의 모습이 이런 결말을 예고하는 것임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대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지 않게 도왔을 것 을... 운명이 그대를 그냥 내버려 두질 않는군요.이 한 몸으로 속죄가 가능하다면 기꺼이 죽음으로써 신께 바치겠어요. 그렇지만 그대, 그리고 나의 아들, 딸... 그들이 평생 받을 상처와 시련이 이 어미의 가슴에 못을 박는군요. 그들을 생각한다면 마음 편히 세상을 떠날 수 없지만 이 저주받은 어미를 부디 용서하고 고통에서 벗어나길 항상 바라겠어요.나의 오이디푸스여! 어떻게 하면 그대를 이 암흑 속에서 구해낼 수 있을까요? 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형벌과 고통도 마다하지 않겠어요. 나는 평생 지옥에서 가장 끔찍한 형벌을 받으며 고통으로 몸부림칠 것이에요. 나 자신조차도 나를 용서치 않을 것이에요. 세상의 모든 잔혹한 형벌이란 형벌은 다 주어질 것이에요. 나 그렇게 함이 마땅한 몸이에요. 그 어떤 형벌로써 나의 죄를 벌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달게 받겠어요. 나의 저주받은 영혼이 이 더러운 죄악을 벗을 수 만 있다면...오, 부디 그런 형벌이 있기를...나의 사랑하는 아들 오이디푸스여. 그대에게 나는 모든 것이 죄악이군요. 어미로써 당신에게 단 한번도 사랑의 손길로 보듬어 준 적이 없어요. 나의 아들을 버리다니... 난 어미로써 자격이 없어요. 죽음으로써 신의 저주를 막았어야 했는데... 당신에게 어미의 사랑한번 베풀지 못하고 그대로 죽음으로 잔혹하게 몰아내고 말았어요. 오, 세상에 이토록 잔인한 어미가 있을까요? 나는 지금 또다시 그대를 고통스럽게 하는군요. 부디 날 용서하지 말아요.차라리 선왕이 아닌 내가 그대의 손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었다면 기꺼이 그 운명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 텐데...
    인문/어학| 2004.05.10| 2페이지| 1,000원| 조회(1,0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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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소크라테스 반박하기 평가D별로예요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화편을 정독하다보면 세계가 인정한 현자이자 4대성인 중 한분인 소크라테스의 발언에서 몇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오류가 발견된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이렇게 발견된 오류를 4가지로 요약해 보았는데, 소수 또는 다수의 의견에 대한 견해상의 오류, 국법에 대한 지나친 비약과 전치주의, 타인에 대한 태도상의 오류, 일고나성이 결여된 주장 및 사상이 바로 그것이다. 지금부터 그 각각의 내용을 알아보고 비판해 보겠다.첫째로 소크라테스는 초반에서 극단적으로 소수의 의견을 추종한 나머지 다수의 의견을 묵살하는 반면 후에는 다시 다수의 의견을 추종하는 오류를 범한다.169P 14번째 줄에서 “남들의 의견을~하지 않겠는가?” 부분부터 171P 20번째 줄 “우리가 염려해야~것이 아니겠나?” 부분을 보면 소크라테스는 소수의 전문가들의 의견이 무조건적인 최선의 방책이며 정의라고 일컫는 반면, 대중의 의견은 들을 것도 없으며 불의라 말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정말 옳은 것일까? 과학적인 분야라면 전문가의 의견이 옳다고 말할 수도,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판단 할 수도 있다하겠지만 이러한 정치적, 사상적 문제는 개인마다의 생각이 다르고 그것은 개인의 가치관과 가중치의 차이이지 이를 두고 옳다 그르다 한사람의 판단으로 결론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지극히 독단적인 입장에서 자신과 소수전문가의 의견이 정답이고 바로 옳은 것이라 섣부른 판단을 내리고 있는 것에 그 문제점이 있다. 그가 옮고 그름을 판단하는 잣대는 오로지 자신의 가치간과 사상뿐인 것이다.또한 이부분에 바로 이어서 나오는 172P 13번째 줄 “아테네 사람들의~살펴보기로 하세.”에서는 앞의 주장과 달리 대중의 의견을 추종하고 있으며 이는 183P 11번째 줄~184P 4번째 줄 부분에서는 확연히 드러난다. 그는 그의 행동(탈주)을 그가 주장하던 대로 전문가에게 묻지 않고 대중의 의견을 따르려 한다. 또 그가 만약 탈주해서 이국에서 살아가게 된다면 그곳 사람들의 부정적인 평판이나 자신을 대할 태도 등 타인을 의식하는 것이 확연히 드러난다. 이는 모순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소크라테스는 크리톤에게는 대중의 말을 귀담아 듣지 말라고 하면서도 정작 그는 대중의 태도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것이다.둘째, 그는 국법에 대해 지나친 비약을 하면서 전체주의적 발상을 드러내고 있다.177P 9번째 줄~182P 10번째 줄까지 그러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특히 178P 22번째 줄에서는 “만일 조국이~견디어야 하네.”라며 지나친 국가중심적인 발언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는 옳고 그름을 따지고 진리를 쫓는 현인의 발언이라 하기엔 의심스럽기 짝이 없다. 물론 그의 애국심이 각별하다고는 하지만 애국심과 전체주의적 발상에는 차이가 있다고 본다. 그는 국법과 나라를 부모와 동일시하였을 뿐만 아니라 국가와 자신과의 관계를 수직적이고 명령-복종의 관계로 인지하는데 이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부모와 나라는 그 본질이 다르고 국가와 국민은 명령-복종의 관계가 아닌 상호의존적 관계이기 때문이다. 또한 세계 곧곧에서 국가를 떠나거나 새로 개척하여 잘 발전시킨 민족들을 종종 볼 수 있다.그는 179P 14번째 줄에서 국법이 자신을 태어나게 하고, 기르고 가르쳤다고 하는데 이는 비약이 지나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그 나라가 맘에 들지 않아도 여러 여건들로 하여금 쉽게 바꿀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존재 및 양육이 모두 국법에 의하여 행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179P 마지막 문단에서도 “이곳에 머물러~있지 않겠나?”라고 한다. 이는 한 국가에 사는 국민이라면 적어도 그곳에 살고 있다는 것은 나라의 명령에 복종하겠다고 약속한 것과 같다는 뜻인데 나는 이 생각에 동의 할 수 없었다. 태어나면서 국가와 부모 등과 같은 것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정되는 것인데 이를 소크라테스처럼 “나라에 산다는 것 = 법을 지키겠다는 약속 → 무엇이든 복종해야한다.” 라는 것은 성급한 판단의 오류이다. 그는 170P 20번째 줄 이하의 대화에서 악한 것은 복종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렇다면 법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하면서도 악법을 지킨다는 것은 일관성이 결여된다.소크라테스는 아테네의 발달된 민주주의와 국법에 굉장한 자부심과 만족을 느끼고 있는데 만약 진정한 민주주의라면 잘못된 법이 있을 때 무조건 숙응하는게 아니라 옳게 고치려하는 항등권 내지 저항권이 있어야 한다. 그래야 잘못된 것을 고치고 보다 나은 민주주의와 국법을 만들 수 있는 것이다.그는 그가 법을 지키겠다고 약속했다고 주장하며 그것에만 치중하는데 이러한 사항은 시대와 그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며 결코 절대적으로 지켜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또한 이렇게 원칙만 극단적으로 내세우는 면에서 융통성이 부족하다고 본다.셋째, 소크라테스가 타인을 대하는 태도상에 문제점이다.그는 남에게 피해를 주고싶지 않다고 하지만 그의 죽음 자체가 그의 친구들 에게, 자식과 아내 등 가족들에게 큰 슬픔을 안겨주는 등 해가 될 수 있다. 또한 친구들에게 금전적인 도움을 포함하려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하지만 184P 8번째 줄을 보면 “자네 친구라는~돌봐 줄 게 아닌가.”라며 그의 친구들에게 자식을 떠넘기고 금전적인 부담을 주는 등 모순이 보인다. 진정 남에게 피해를 주길 원하지 않는 다면 친구들이 당연히 자신의 자식들을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크리톤에게 부담이 되게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겉으론 남에게 피해를 안주려 하려면서도 정작 남의 도움을 받으려고 하였단 말인가!마지막으로 그의 행동과 사상에서 일관성이 결여되는 부분을 발견하였는데 그는 자신이 아테네 사람들에게 진리를 전달할 의무가 있다고 생각하고 사명감을 느꼈으나 너무 쉽게 그 의무를 포기하고 죽음을 선택한다. 또한 그가 그토록 언변에 우수한 철학자였다면 자신의 무죄를 충분히 증명하고 설득시킬 수 있었을 텐데 그의 설득의지가 부족한 것이 아니었나 싶다. 168P 3번째 줄 “자네는 자네대로 자기 자신을 구하려고 하지 않았네.”를 보면 알 수 있다.
    인문/어학| 2004.05.10| 3페이지| 1,000원| 조회(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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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 남한산성 평가A좋아요
    [남한산성]남한산성(南漢山城) 국가 사적 57호로서 북한산성과 함께 도성을 지키던 남부의 산성이었다. 지금은 동, 서, 남문루와 장대, 돈대, 암문, 우물, 보, 누, 등의 방어 시설과 관해, 군사 훈련 시설 등이 있다. 이 산성의 주변 지역에는 백제 초기의 유적이 많이 분포되어 있어서, 일찍부터 온조 왕대의 성으로도 알려져 왔다.신라 문무왕12년(672)에 한산주에 주장성을 쌓았는데 둘레가 4,360보로서 현재 남한산성이 위치한 곳이라고 믿어져 내려온다.고려시대의 기록에는 보이지 않으나 세종실록지리지에 일장산성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둘레가 3,993보이고, 성내에는 군자고가 있고, 우물이 7개인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또한 성내에 논과 밭이 124결이나 되었다고 하였다.남한산성이 현재의 모습으로 대대적인 개수를 본 것은광해군 13년(1621) 후금의 침입을 막고자 석성으로 개축키 시작하였으나 준공치 못하고, 후금의 위협이 고조되고 이괄의 난을 겪고 난 1624년(인조 2년)이다. 인조는 총융사 이서에게 축성할 것을 명하여, 2년 뒤에 둘레 6,297보, 여장 1,897개, 옹성 3개, 성량 115개, 문 4개, 암문 16개, 우물 80개, 샘 45개등을 만들고 광주읍의 치소를 산성 내로 옮겼다. 이때의 공사에는 벽암 각성대사를 도총섭으로 삼아 팔도의 승군을 사역하였으며, 보호를 위하여 장경사를 비롯한 7개의 사찰이 새로 건립되었으나, 장경사만이 현존한다. 그 뒤 순조때에 이르기까지 각종의 시설이 정비되어, 우리 나라 산성 가운데 시설을 완비한 것으로 손꼽히고 있다.처음 축성의 목적을 대변해 주듯이 유사시 임금이 거처할 행궁이 73칸 반의 규모이고, 하궐이 154칸이나 되었다. 1798년(정조 22년) 한남루를 세우고 1642년에 세운 객관인 인화관을 1829년(순조 29년)에 수리하였다. 관해로는 좌승당, 일장각, 수어청, 제승헌을 비롯하여, 비장청, 교련관청, 기패관청 등의 군사시설이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종각, 마구, 뇌옥, 온조왕묘, 성황단, 여단 동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남문과 함께 가장 사용빈도가 높았던 성문 중의 하나이다. 이 성문은 선조 때에 이미 보수하였고 인조 2년 새로 수축된 이후, 정조 3년(1779) 성곽 보수시에 이 성문도 보수하였다. 이때 다른 문과 마찬가지로 이름이 하나씩 붙여졌는데, 동문은 좌익문(左翼門)이라 하였다.동문을 '좌익문' 이라 한 것은 국왕은 남면(南面)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것이므로 동쪽이 왼쪽이 되기 때문이다. 성문은 홍예식이며, 폭은 310cm, 높이는 400cm 이다. 홍예는 홍예기석 위에 9개의 홍예돌을 쌓아서 구축하였다. 일반적으로 성문의 육축(陸築)은 크고 정교하게 가공된 무사석(武砂石)쌓기를 하는 것이 보통인데, 동문의 경우 일반 성돌에 비해 오히려 덜 가공된 약 2배 정도 크기의 성돌을 사용하여 쌓았다. 성돌의 형태나 축성상태를 보면 개구부의 바깥쪽에서 보았을 때 홍예의 좌측 부분이 여러 번 수축되었음이 확인된다. 성문의 여장은 타의 구분이 없이 하나로 연결한 평여장이며 총안도 설치되지 않았다. 성문 좌측 부분은 경사가 급해 계단으로 처리된 부분의 여장은 가운데에 한 개의 총안이 있는 층단형 여장이며, 우측은 경사면을 따라 올라가는 성벽과 평행하여 옥개정상부도 사선을 이루도록 하였다. 기둥 양식은 주심포 양식의 민흘림 기둥이며 그 위에 굴도리 가구(架構)를 둘렀다. 다른 문에 비해 동문은 가장 낮은 지대에 축조되어 있기 때문에 성문은 지면에서 높여 계단을 구축하여 우마차의 통행이 불가능한 상태이다. 따라서 물자의 수송은 수구문 남쪽에 있는 11암문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서문(右翼門)서문은 산성의 북동쪽 모서리 부분의 해발 450m 지점에 위치한다. 이곳은 서쪽사면의 경사가 급해 물자를 이송하기는 어렵지만 광나루나 송파나루 방면에서 산성으로 진입하는 가장 빠른 길이다. 서문은 산성의 초축시기부터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조 3년(1799) 개축하여 우익문(右翼門)이라 칭하였다.행궁터를 중심으로 국왕은 남쪽을 바라보며 정치를 하는 것인데, 서문은 우측이 문을 수축하였다는 내용이 있는 것으로 보아 남문은 인조 2년(1624) 수축되기 이전부터 이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남문은 정조 3년(1779) 성곽을 개보수할 때 개축하여 지화문(至和門)으로 칭하였으며 남문은 4대문 중 유일하게 현판이 남아있는 문이다.병자호란으로 인조가 처음 남한산성에 들어 올 때에도 이 문을 통해서 들어 왔다.성문의 하부 육축은 일부 성벽의 배부른 현상을 제외하고는 육축의 높이와 홍예문의 높이가 동문보다는 높게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성문의 문비도 두꺼운 판재에 30cm 크기의 철린을 촘촘히 박아 댄 육중한 모습이며 상하의 지도리석으로 위아래에서 지탱하도록 되어 있는 원형 그대로이다. 성문 통로의 바닥은 바깥쪽으로 경사가 심하며 통로 위의 천장은 동문의 경우와 같이 회벽이 홍예형으로 형성되어 있으며 회벽칠로 둥글게 막아져 있다. 다른 성곽의 성문에서는 주로 판자널로 천장을 막고 별화단청을 한 천판을 형성하는 것이 통례임에 비추어 볼 때 이것은 이례적이라 할 수 있다. 문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동문에 비해 비교적 그 규모가 크고 장초석을 사용하여 기둥높이는 낮으나 건물의 전체 높이는 약간 더 높게 지어졌다. 또한 건축양식으로 비교하면 동문보다는 공포와 가구구조, 처마부분 등에서 비교적 형식을 갖추어 지어졌다고 볼 수 있다. 화강석 장주초석 위에 세워진 기둥은 건물규모에 비하여 비교적 굵으며 약한 민흘림이 있다. 주춧돌은 가로 50cm, 세로 50cm, 높이 110cm의 장주 초석을 사용하였다. 남문은 4대문 중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문이다.북문(戰勝門)북문은 성곽 북쪽의 해발 365m 지점에 있으며, 북문을 나서면 계곡으로 난 길을 따라 상사창리로 이르게 되는데 조선시대에 수운으로 옮긴 세곡을 등짐으로 이 문을 통해 산성안으로 운반하였다. 선조대의 기록을 보면 산성 내에 동문과 남문, 수구문의 3개의 문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북문은 인조2년(1624)에 신축된 성문이라고 생각된다.정조 3년(1779) 성곽을로 있다. 성 내부의 구조물로는 동·서·남·북 방향의 4곳에 성문이 있고, 신남성의 두돈대에 각각 홍예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남옹성2의 포루로 들어가는 홍예문이 1개소 있다. 암문은 기록과 마찬가지로 16개가 확인되었는데 그중 원성에 11개 봉암성에 4개, 한봉성에 1개소가 설치되어 있다. 치는 각 남옹성과 연주봉 옹성에 1개소 및 봉암성에 1개소 등 5개소가 설치되었다. 포루는 각 남옹성과 장경사 부근의 옹성 및 장경사 신지옹성, 연주봉 옹성, 한봉성 등 7개소에 설치되어 있으며, 현재 포루가 전혀 확인되지 않는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면 확인 가능한 포루는 모두 28개소이다. 또한 성내의 물을 성밖으로 내보내기 위한 수구문은 동문 근처에 1개소가 있었으며, 28개의 수구가 확인되고 있다.-여장여장은 성위에 설치하는 구조물로 적의 화살이나 총알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하여 낮게 쌓은 담장을 말한다. 이 여장은 다른 용어로 여담, 여첩, 치첩, 타, 여원 이라고도 하고 고어로는 성각휘, 성가퀴, 살받이터 등으로 불려졌다. 또한 설치하는 목적에 따라 치폐, 첩담, 비예, 희장 이라고도 하였다. 여장의 종류에는 평여장과, 凸형여장, 반원형여장 등으로 구분된다.남한산성 여장의 경우 급경사지역의 일부지역에서는 경사면의 중간에 단을 두어 계단과 같이 축조하였으나, 대부분의 경우 단을 두지 않고 바닥의 경사면과 평행하게 여장을 설치하였다. 이 경우 여장의 높이가 전체적으로 일정하게 되어 방어의 효율성은 있지만, 여장을 쌓을 때 양력이 아래로 쏠리게 되어 여장 축성시 어려움이 있고, 안정성에도 문제가 있다.-옹성옹성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문 밖으로 또 한겹의 성벽을 둘러 쌓아 이중으로 쌓은 성벽을 말한다. 성내로 진입하기 위해서는 이 옹성을 먼저 통과해야만 하고, 성벽에서 밖으로 돌출되어 있어 성문으로 접근하는 적을 3면에서 입체적으로 공격할 수 있는 시설물이다. 남한산성에는 모두 5개의 옹성이 있지만 성문을 방어하기 위한 시설이 아니기 때문에 엄밀한 의미에서 옹성 이라기 계곡에서 화포를 쏠 경우 산성의 방어에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옹성은 치성과는 달리 모두 체성과 직접적인 연결됨이 없이 체성벽의 기저부를 옹성의 상단으로 하여 축조하였고, 암문을 통하여 연결되도록 하였다. 옹성의 말단부에는 포루를 설치하였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이 옹성들은 연주봉 옹성을 제외하고 다른 옹성은 원성축조 시에 쌓은 것이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에 적의 화포공격에 대응할 목적으로 축조되었다.-돈대성을 쌓을 여건은 안되지만 전략적인 요충지에 설치하여 적의 척후활동을 사전에 방어하고 관찰할 목적으로 쌓은 소규모의 방어 시설물을 말한는데 현존하는 두 돈대는 계유(1753)년에 축성된 것으로 보인다. 편의상 두돈대를 신남성 동돈대와 서돈대로 부른다.신남성은 7암문에서 남쪽으로 직선거리 1.5km지점의 검단산 정상부에 위치하고 있다.-포루대포를 쏠 수 있는 시설을 포루(砲壘)라고 한다. 임진왜란은 조선의 진법전술에 결정적인 변화를 초래하였다. 종래의 전술은 궁시류에 의존하였지만, 조총과 화포의 위력을 경험하고 난 이후 조선도 신무기인 조총과 화포를 주로 하고, 여기에 창검과 궁시가 보조하는 전술개념으로 전환 하게 되었다. 이에따라 산성축조에도 대포를 쏠수 있는 시설이 기본적으로 구비되었으며, 축성기법도 화포의 공격에 견딜수 있는 형태로 바뀌게 되었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대포에 대한 관심이 매우 높아지게 되어 병자호란이 끝난 2년 뒤인 인조 16년(1638)년 원성을 증개축하면서, 원성과 옹성에 포루를 구축하였던 것으로 보인다.-수구성내에는 축성 위치에 따라 부분적으로 우수가 모이게 되는 지점에는 별도로 작은 수구를 설치하여 성벽안으로 물이 스며들어 성벽을 약화시키는 것을 방지하였다. 산성내에는 현재 성벽이 무너져서 확인이 어려운 지점을 제외하고 가시적으로 확인되는 수구는 모두 28개에 달한다. 일반적으로 수구는 낮은 곳으로 모여든 물을 성밖으로 배출하였기 때문에 배수구의 위치는 외면에서 볼 때 출수구의 위치가 성벽의 중간에 있는 경우도 많다
    사회과학| 2004.05.10| 6페이지| 1,000원| 조회(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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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양미술사] 미술관 관람 보고서
    17세기는 네덜란드에 있어 ‘황금시대’라 불린다. 이 시기의 네덜란드가 정치?경제?학문?예술 등 여러 분야에서 유럽을 이끄는 선두 위치에서 있었기 때문이다.이때 네덜란드는 스페인의 지배 하에 있었는데 신교가 우세했던 북부 7주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전쟁을 전개, 혁명을 이루어냈고 반면 가톨릭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부유했던 남부 10주(플랑드르 지방)는 혁명에 가담하지 않고 스페인의 치하에 있다가 후에 벨기에로 독립한다. 당시 네덜란드는 해상력을 바탕으로 자유도시 국가들이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며, 그로 인한 경제적 부가 왕이나 귀족이 아닌 시민계급의 차지로 돌아갔다. 또한 가톨릭체제에 반대하여 신앙과 사상의 자유가 존중되었으며 시민문화가 융성하여 여러 제반 여건이 변모하였다. 이렇게 네덜란드는 17세기에 들어와 외교,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게 되는데, 이 시기를 ‘황금시대’라고 부른다.가톨릭 지배가 우세했던 유럽사회에서는 실제 교회나 궁정의 후원으로 바로크의 궁정풍 문화가 유행했던 데 반해 신교가 우세했던 네덜란드에서는 교회, 궁정, 귀족 계급의 문화적 후원이 줄어들었다. 그리고 시민들이 주 구매자가 되면서 일상적인 주제들이 선호되었다. 즉 그들의 삶과 도시, 환경을 묘사하는 사실적인 경향의 정물화, 장르화, 풍경화 등이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작품에 대한 수요도 많아서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이 제작되었으며, 작품이 주제가 분화되고 전문화됨으로써 네덜란드는 이러한 장르들의 본원지가 되었다. 또한 암스테르담, 하를렘, 레이든, 헤이그 등 각 도시마다 지방의 특색을 살린 화풍들이 발전하고 있어 네덜란드 회화는 어느 나라와도 견줄 수 없는 높은 수준의 독창성과 질을 확보하게 되었다. 즉 다수의 천재가 배출되는 위대한 시민의 미술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초 상 화 >17세기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지방을 대표하는 작가들 중 그 대표격을 뽑으라면 어느 누구도 주저하지 않고 렘브란트를 가리킬 것이다. 렘브란트는 네덜란드 예술의 최고의 천재로 인간에 대한 깊은공개 해부학 강의를 그림 상황으로 설정하고 있는 이 그림은 근엄한 태도로 진지하게 의술을 전술 하고 있는 튈프 박사와 그 주변에서 놀라거나 호기심에 가득 찬 모습 등 다양한 표정과 행동으로 강의를 듣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자연스럽고 생동감 있게 나타내었다. 또한 누워있는 시체의 살과 얼굴 표현에 있어 사실성이 뛰어나 보는 사람을 섬뜩하게 만든다. 그 당시의 다른 초상화의 딱딱하고 진부한 구성에 비하면 커다란 혁신이라 할 수 있다.이밖에도 많은 그림들이 남아 있어 렘브란트의 천재적 능력을 맘껏 보여주었다. 특히 (1655년)는 그 표현에 있어 매우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 실제로 도살된 소를 보는 듯 하게 매우 사실적이고 상세하게 묘사되어 이런 주제로 그림을 그릴 수도 있다는 것에서 놀랍지 않을 수 없었다.렘브란트와 쌍벽을 이루는 플랑드르 화가 페터 파울 루벤스는 따뜻한 색채로 주위 공간을 통일 시키고 이야기의 극적 효과를 생생하게 전달하는 작품으로 바로크 미술의 성장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루벤스는 동화 ‘플란더스의 개’에서 주인공 네로 소년이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성모 승천’을 그린 화가이다.(1620~30년경)발그레한 볼과 살아있는 듯한 표정이 매력을 풍기는 이 작품은 스페인풍의 옷을 입고 있는 젊은 여인을 그린 것으로 처음에는 루벤스의 첫 번째 부인인 이사벨라 브란트라고 알려졌으나 그녀의 다른 초상화에서의 모습과 너무 달라서 아직 누군지 밝혀지지 않았다.루벤스는 재능이 있는 조수들을 여러 명 둔 작업장에서 그림을 제작했는데, 이 조수들은 대가의 스케치를 바탕으로 그린 그림으로써 이례적으로 높은 수준의 작품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러나 루벤스가 작업한 정도는 작품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이 작품의 경우에는, 얼굴 표현에서 뛰어난 자질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아 얼굴은 루벤스가 직접 그렸다고 생각되지만, 얼굴 외에 나머지 부분들은 틀림없이 한명 또는 그 이상의 조수들이 그렸을 것이다. 안소니 반다이크 역시 루벤스 공방이 배출해 낸 가장 유명한 화가함을 표현하고 있다.여기서 인물은 허리 높이에서 화면 중앙보다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묘사되었으며, 얼굴은 왼쪽을 향한 채 회화 평면 밖을 바라보는 것처럼 보여서, 정지된 한 순간 인 것 같은 느낌을 준다. 이런 효과를 강조하는 것은 어깨에 느슨하게 걸쳐진 코트와, 가장 엉성하게 그려진 것 같은 하얀 레이스 칼라, 그리고 반다이크가 얼굴 입체감을 부여하는데 사용한, 신속하고 확신에 찬 붓질의 흔적이다. 인물 뒤로 그려진 구름배경도 눈에 들어오는데 구름의 정적인 모습 또한 이러한 효과를 받쳐 주는 듯 하다.이들 밖에도 야콥 바커의 (1634년)에서 옷의 표현은 명도의 차이만 있는 갈색과 회색으로 제한되어 있는 반면 목둘레의 흰 깃은 밝게 빗나 얼굴을 강조 하고 있다.또한 호퍼르트 플링크의 (1640년)는 지나치게 넓은 이마를 가진, 결코 예쁘지만은 않은 3살 정도로 보이는 여자아이의 지극히 사실적인 초상화이다. 소녀의 왼팔을 올려놓은 높은 의자는 당시 아이들의 실내 변기이고, 길게 늘어진 벨트는 수정으로 보이는 보석 장식의 딸랑이다. 유아 사망률이 높았던 당시 딸랑이는 장난감이자 질병과 액운을 물리치는 일종의 부적 역할을 했다. 플링크는 1632년부터 3년간 렘브란트 밑에서 수학하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분명한 명암 대조와 느슨한 붓질 등은 렘브란트 양식을 떠올린다.< 정 물 화 >숨을 멎고 바라보게 되는 밀도 있는 작품들의 정물화는 사실주의의 극치를 보여준다.꽃정물 중 대표적인 작품으로 발타사르 판 데어 아스트의 작품을 들 수 있다. 그는 꽃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면서 특히 정물과 함께 파리?나비?유충?조개?중국 도자기 등을 첨가했다.(1640년경)발타사르 판 데어 아스트는 정물화를 전문적으로 그린 화가로 그의 초기 작품은 경직된 구성을 보여주지만, 1619년 이후부터는 이전에 선호했던 대칭적인 꽃꽂이 배열을 버리고 보다 밝은 배경에 정물을 배치하는 자유로운 양식으로 변화해 갔다. 이 작품은 그의 전형적인 후기 작품으로, 그림 속의 다양한 요소들은 신중하게 조어나는 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위적으로 연출한 것을 볼 때 그림 그릴 당시의 화가의 어려움이 느껴지며, 이와 같은 완벽한 묘사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인생무상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정물화를 ‘바니타스’정물 이라 하는데, 대표적인 작품으로 빌럼 헤다의 작품을 들 수 있다.(1629년)1620년대 인기 있었던 정물화는 회색과 갈색으로 그려진 것으로 전형적인 연회용 식탁 그림에는 온갖 종류의 음식들 뿐 아니라 화려한 사물들로 그려진, 풍부하게 차려진 식탁이 포함된다. 또 때로는 이 그림에서처럼 손님들이 방금 떠난 듯이 뒤집힌 유리잔이나 먹다 남거나 잘린 채로 흩어져 있는 음식들이 묘사되어 있을 때도 있다. 그러나 보다 면밀히 관찰해 보면, 이 외관상의 어지러움이 실은 세심하게 구성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즉, 헤다는 전체가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그런 방식으로 사물들을 배치했던 것이다. 여기서 사물들은 왼쪽 상단에서 오른쪽 하단으로 이어지는 선을 따라 배치되어 있다. 또 중앙에 놓인 접시는 관객 쪽을 향해 탁자의 모서리 밖으로 튀어나와 있음으로 해서 환영적인 깊이감이 강조하고 있다.화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시선을 이동하면서 보면, 뚜껑이 열린 포켓시계와 커다란 포도주잔, 뒤집혀진 유리잔, 발이 달린 은 대접, 나이프와 껍질이 반쯤 벗겨진 레몬과 두 조각의 레몬이 놓인 백납 접시, 고등어가 놓인 백납 접시, 그리고 롤빵이 놓여 있으며 빵 주위에는 도토리가 흩어져 있다. 그리고 화가는 여기서 다양한 물체의 질감과 그 표면에 반사되는 빛을 매우 성공적으로 표현해 냈다.그런데 표면상 사실적으로 보이는 이 장면 속에는 보다 심오한 의미가 숨겨져 있다. 예컨대 뚜껑이 열린 포켓시계는 시간의 경과를, 따라서 결국 무상함 이라는 삶의 본질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피터 클라스존은 빌럼 헤다와 더불어 단색조의 연회장 식탁으로 통칭되는 그림들을 그린 대표적인 작가이다. 그는 하를렘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가로 그의 작품 (1630년)을 통해 세속적 존재의 무상함을 드러내는 탁월로는 풍자화가인 얀스테인을 들 수 있다. 그는 즐거운 세부 묘사로 인해 흥미있는(1651년)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장르화 중 가장 유머 넘치는 화면을 만들어 냈다.얀 스테인의 작품의 특징으로 서술적인 화면 구성을 뺄 수 없는데, 이들 작품 역시 마찬가지이다. 에서는 어리숙한 사람들이 빠질 수 있는 속임수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담고 있다. 구경꾼에 둘러싸여 의자에 앉아있는 젊은이는 두려운 듯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두 발로 땅을 구른다. 이 뽑는 사람은 이제 곧 일을 치를 태세이다. 멋진 옷차림, 금목걸이, 탁자위의 증명서는 그럴듯해 보인다. 하지만 증명서에 찍힌 지나치게 큰 봉납은 이 모든 것이 가짜임을 이야기 하고 있다. 이제 젊은이는 이 뽑을 때의 고통으로 이것이 보두 사기임을 알 것이다.또한 는 얀 스테인이 즐겨 그린 주제인 의사의 왕진 중 하나로 우스꽝스럽게 차려 입은 의사가 슬퍼 보이는 여자의 맥박을 재고 있는 모습을 하녀가 지켜보고 있다. 한편 벽난로 위에는 활과 화살을 든 사랑의 신 큐피트가 서 있는 것을 보아 이 작품이 상사병을 소재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 탁자 위에는 소변을 담은 병이 놓여 있는데, 당시 돌팔이 의사들은 소변의 색을 통해 상사병에 걸렸는지 아닌지를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녀는 이러한 광경을 조소를 띈 채 관찰하고 있는 듯 하다. 즉, 얀 스테인은 이 그림에서 돌팔이 의사와 상사병에 걸린 여자를 모두 희롱하고 있다.(1660년경)이 작품은 얀 스테인의 작품과는 달리 어떤 암시적 내용 없이 실내의 평화로운 분위기를 묘사한 피터 드 호흐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양식화된 특성 및 침착하고 평화로운 인물들과 조화를 이루는 장면의 분위기이다. 드 호흐는 일반적으로 실재를 충실하게 묘사하는 대신 새로운 실체를 만들기 위해 건축적 요소들을 조합해 냈다.벽으로 둘러싸인 테라스 안쪽으로는 탁자 주변에 앉아 있는 남자와 서 있는 여자가 보인다. 남자는 파이프 담배를 피우고 있으며 여자는 큰 잔으로 술을 마시고 있다
    예체능| 2003.12.10| 12페이지| 1,000원| 조회(1,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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