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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해의 5대 교통로와 국제적 위상
    -박형준 씀- 모두 기말 시험 잘 치세요 -들어가는말발해는 한국 역사상 고구려 다음으로 가장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던 국가이다. 이러한 넓은 영토를 소유하고 있던 발해는 사회적, 경제적으로 번영한 국가이면, 강력한 국력을 지닌 국가이기도 하다.하지만 오랜 기간 발해는 우리에게 잊혀져 있었고, 학자들에 의한 연구도 1960년에 시작해 1980년에 들어와서야 활발한 연구가 행하여 졌다. 이는 사료의 단편성, 편향성 그리고 발해의 영역이 한반도 북부와 중국의 만주, 러시아의 연해주에 걸쳐 있어 우리가 쉽게 다가갈 수 없는 지리적 문제에 기인한다. 최근에 와서도 발해사의 체계적 집성이 이루어지고, 발해영역 접근이 용이해지고,관심도 높아졌지만, 중국이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이라고 중국사에 편입시키려는 동북공정을 실시하면서 발해사 연구에 또 다른 위기를 맞게 되었다.이런 위기는 발해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글에서는 당시의 국제관계를 유추할 수 있고, 발해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발해의 교통로를 중심으로 발해의 대외관계를 알아보고, 이를 통해 국제정세 속의 발해의 자주성과 위상을 알아보고자한다.5대교통로교통로는 사람과 물자 뿐만 아니라, 지식,기술,생활양식 등을 이동시켜, 서로다른 공간과 거리를 극복할 수 있게하며, 이는 곧 자원 및 물산의 유통을 가능하게 하고 군사적 진출 및 중앙정부의 통치력이 지방에 까지 발휘될 수 있도록 하여 중앙집권화의 촉매역활을 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만주-한반도의 지리조건상 교통로의 활용이야말로 지역간의 통합을 거쳐 국가의 탄생과 나아가서 정치적 통합과정을 촉진하여, 양적으로는 영역국가를 질적으로는 중앙집권적 국가를 성립시킬 수 있는 요체라고 볼 수 있다.발해의 당,신라,일본,거란과의 관계에서 교통로의 활용은 국가생존을 위한 전략적 의도가 내포되어 있으며, 따라서 각 교통로마다 그 의도와 쓰임이 다르다. (여기에서는 중국의 왕승례가 주장하는-발해의 교통로를 조공도로 보는- 발해의 5대 교통로를 비판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발해 교통로는 크게 육로와 해로로 구분할 수 있으며, 육로로는 영주도, 거란도, 신라도가 있고, 해로로는 등주도, 일본도가 있다.영주도는 발해의 상경용천부에서 장령부를 지나 당의 영주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육지로 장안과 직접 통하는 간선도로였으나, 거란, 돌궐과의 대립과 안사의 난으로 여러 번 차단되고, 이 지역의 당의 지배력이 약화되어 그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길이였다. 따라서 이 길을 통해 발해의 지배나, 조공무역은 사실상 어려웠다.거란도는 상경용천부를 출발해 부여부를 지나 거란의 도성인 ‘임황’에 이르는 발해의 대거란 교통로이다. 이 길은 국초에 해,거란,돌궐 모두 반당노선을 걸으며 정치적 이해관계를 할 때는 매우 긴요한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보여지나, 거란의 잦은 정치적 변화에 의해 빈번하게 이용되지는 않고 상황에 따라 긴밀한 관계가 요구될 때 이용되던 길이라고 볼 수 있다.신라도는 삼국사기에서 고구려의 옛땅인 책성부,동경용원부에서 신라 북변까지의 거리가39역-1170리-라고 하여 육상교통로임을 짐작케하지만, 비용,거리,시간 면에서 해로를 통한 교역이 더 적합했을 것이라고 본다. 발해와 신라를 잇는 상설교통로인 신라도는 문왕대에 와서 개설되었다고 추측되는데, 대조영이 신라 효소왕 9년에 사신을 보내 제 5품인 대아찬의 질을 받았다는 기록을 제외하면, 무왕의 세력팽창으로 신라에게 위협감을 주어 선덕왕 20년 721년 신라북쪽국겨에 장성을 축조하고, 733년 등주공격 당시 신라가 발해의 남쪽을 공격하고, 826년 신라가 대동강에 300리나 이르는 장성을 축조했다는 일련의 기록을 보더라도 신라도를 통한 신라와 발해의 우호적 교류는 어려웠을 것이다. 다시말해 초기에 신라가 당과의 백제지역 통치문제를 가지고 대립했던 시기와 735년 발해가 대당외교로 전환하는 시점에서는 양국으 이해관계가 일치해 임시적 우호적 교류는 있을 수 있었겠지만, 발해의 세력 확장과 당의 이이제이 외교로 양국의 우호관계 성립을 방해함으로써 양국과의 관계는 원활하지 못하였을 것이다.일본도는 일본으로 가기위한 해로로 기록에는 동경 용원부에서 일본으로 가는 길을 일본도라고 보지만, 꼭 동경용원부에서 배를 띄운 것은 아니다. (배를 띄울수 있는 장소만 있으면 그 길이 일본도가 되었다.) 이 노선은 당의 문화를 일본에 전해주는 교량역활을 수행함에 따라 중-일관계사에 있어서 발해를 통하는 일본도의 역할이 중요시 되었다.일본과 발해와의 관계는 8세기 초 무왕의 대외팽창정책으로 주변국가와 대립양상을 띄게되고, 신라가 초기의 당과의 문제를 해결하고 당과의 국교를 정상화하기 시작하고, 이에 자연히 일본과의 관계가 멀어지는 상황속에서, 발해는 일본과의 외교를 본격화하였다. 720년 일본이 말갈국에 사신을 파견한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말갈은 곧 발해를 말한다. 그 후 727년 발해가 일본에 사신을 보내고, 이듬해 일본에서 답사를 보내면서 국교가 성립하였다.초기에는 정치적 입장에서 나중에는 무역을 통한 경제교류와 문화교로 그 성격을 발전시켜나가며, 727년부터 919년까지 34차례나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였다. 193년에 걸친 일본과의 상호왕래는 양국의 정치,경제,문화등 모든 분야에 있어서의 관계를 강화하고, 이러한 과정을 통해 양국은 서로의 문화내용을 풍부하게 할 수 있었다.등주도는 발해의 구국, 상경용천부,중경용천부,동경용원부로부터 압록강을 지나고 바다를 건너 등주에 이른 뒤, 장안으로 향하는 길이다. 영주도의 침체로 더욱 활발히 이용되었어며 중국측이 주장하는 조공을 위한 길이 아니라 다양한 목적으로 발해와 당사이의 공식 교통로로 이용되엇다.정치적 목적으로는 육로행인지 해로행인지 구분은 어렵지만 705년 발해가 세워지고 7년후에 당이 먼저 처음으로 사신을 보내어 고구려계승의식을 가지고 반당의 기조로 세워진 발해를 국가로 인정한다. 이는 당의 입장에서는 북으로 가는 길이 거란과 돌궐에 의해 차단된 상황에서, 거란과 돌궐을 견재하고, 북으로의 교통로 확보가 필요하였다. 그리고 발해 역시 선진문물의 유입을 통해 국가의 발전과 동아시아 국제질서인 사대외교가 국내통치체제의 안정에 중요한 의미를 갖기 때문에 , 당과 계속 이상만을 가지고 대립할 수 만은 없었다. 이런 이해관계 속에서 713년 최흔이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면서 정식 국교가 성립하였고, 716년 이후 매년 조공사행을 파견하는 책봉, 조공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무왕 대무예는 대조영을 고왕이라고 칭하는 독자적 연호를 쓰는 모습에서는 당과의 관계에서 정치적 신속을 찾아볼 수 없고, 자국에게 불리할 경우 당과의 군사적 충돌도 마다하지 않는 모습과 762년 ‘발해군왕’ 이라는 책봉호가 ‘발해국왕’으로 격상되었다는 점에서 발해는 당에 귀속되지 않은 자주 독립국임을 알 수 있다.군사적으로는 733년 거란과 돌궐의 부탁으로 당의 등주를 공격하는 우리 역사 최초의 해외원정인 등주공격의 행로로서의 역할을 하였다.상업적으로는 등주에 발해과, 신라관이 설치되어, 등주도를 통한 산업교류의 통로로서의 역할도 하였다.이상과 같이 등주도는 중국이 말하는 조공도로서가 아니라 정치적-군사적-상업적-문화적으로 발해와 당을 연결하는 교류창구역활을 하였음을 볼 수 있다.713년 대조영을 발해군왕으로 책봉하는 사료에 근거하여 중국학자들은 발해를 당의 지방정권으로 이해하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발해의 5대 교통로를 통한 주변국들과의 능동적이고, 주체적이고, 실리적 관계에서 발해는 주변정세를 잘 이용해 자국의 이익을 취하고 나아가 동아시아의 발전과 흐름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하나의 독립적이고 주체적인 국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인문/어학| 2006.12.05| 3페이지| 1,000원| 조회(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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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서문명의 교류- 실크로드
    동?서 문명 교류의 窓- 실크로그1. 서 론문화란 인간 집단에서 발생하고 존재 하는데 그것이 보다 정교하고 고차원적인 것으로 향상, 발전해 나가자면 내적 또는 외적인 추진력이나 인위적인 충격. 자극 등 제 요인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러한 요인들은 타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서 갖추어지게 된다. 문화의 접촉은 문화의 전파와 移植이라는 현상으로 나타난다. 지구상의 모든 문화, 특히 선진문화는 이러한 전파와 이식의 과정을 거쳐 비로서 형성 발전해나간다. 실크로드는 이런 문화의 교류를 보여주는 하나의 거대한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실크로드라 하면 고대 비단무역을 계기로 하여 중국과 서역 각국의 정치, 경제, 문화를 이어준 육해교통로의 총칭이지만, 보통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를 경유하는 길을 가리킨다. 실크로드라는 학술용어는 과거 유라시아 대륙에서 명멸했던 諸문화들의 형성과 발전에 나타나는 상호 유기적 관련성과 변용의 현상을 추구하여, 각 지역에서 전개된 문화의 성격을 이해하고자 하는 학술적 아칭인 것이다.이런 실크로드는 동아시아로부터 지중해 세계에 이르기까지 3대륙을 잇는 동서문화 교류의 동맥으로 이해하게 되었으며, 초기의 서방 중심의 개념을 넘어, 불교나 조로아스트교, 마니교, 이슬람교 등 여러 종교를 비롯한 서역의 문화가 동방으로 전하여 옴과 동시에, 동측의 여러 문화도 서방으로 전하여지는 종합적인 문화교류의 길로 해석되기에 이르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실크로드를 통해 많은 것들이 교류되었다. 크게 구분하자며, 물적 교류-정신문화교류-인적 교류로 나눌 수 있으며, 물적 교류나 정신문화교류는 바람이나 해수에 의해 자연히 교류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교류를 통해, 그들의 접촉에 의해 전해지고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과거 고대문명의 실크로드의 역할은 현 시대의 광 통신망 혹은 온라인 네트워크 만큼의 중요한 기능을 수행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생각해 볼 때 실크로드의 활발한 교류의 초석이 되는 6~10세기 경의 실크로드 교역의 상황을 구법승을 중심으로 고1) 경제?무역의 교류이슬람이 창시되기 훨씬 이전부터 중국과 아라비아간에는 실크로드를 통한 육상교역과 함께 발달된 항해술과 희귀물자에 대한 동경으로 실크로드의 교역만큼이나 해상교역도 발달해 있었다. 어느 정도의 활발한 교역으로 서역에 관하여 자세한 정보를 습득하기 이전까지의 중동?아랍에 관한 지식은 한 무제 때의 장건의 서역 탐방으로 얻어진 정보에 의존하였음을 사기나 후한서 등에서 알 수 있다.중국의 사료에 의하면 6세기 경 아랍 상인들은 비교적 쉽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인도를 거점으로 중국의 남부에 진출했지만 중국 상인들은 극소수의 상인들만이 캄보디아?안남?통킹만을 넘어 아라비아 근해까지 제한적으로 진출했음을 알 수 있다. 이 후 6세기부터 시작한 아랍?중국간의 중계무역과 7세기부터의 중국의 적극적인 해외진출로 아랍, 이란, 중국간의 무역량이 증대되기 시작한다.7세기부터 아랍, 이란계 상인들은 광동을 중심으로 자치촌을 형성하여 거주하였고 이 사실은 당승 감진의 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이들의 활발한 활동의 결과로 압바스 제국의 수도 바그다드에서는 중국시장이 형성되기도 하여 비단, 도자기, 차 등의 제품이 거래되었다.또한 이들의 대외관계와 활동을 보여주는 한 단면으로는 9세기 중엽 슐레이만 알 타지르와 아부 자이드라는 두 아랍계 여행가가 작성한 중국에서의 무슬림의 활동과 그들의 숫자 규모를 알 수 있는 기록으로도 확인 가능하다. 아부자이드에 의하면, ‘876년 황소의 난’ 과정에서 약 12만 명의 아랍, 유태인, 기독교인이 학살되었다고 한다. 이는 비록 12만이라는 숫자가 과장되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중국에 거주하던 외국상인들의 비율을 생각해 본다면 그들의 규모를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2) 정치?외교관계(실크로드 접촉)당대의 정치?외교적 측면에서 중국과 아랍?이슬람 세력과의 관계는 주로 4가지 유형을 띠고 진전됨을 알 수 있다.첫째, 초기의 통상을 주목적으로 한 경제 중심의 외교관계둘째, 탈라스 전쟁으로 인한 양국의 외교적 딜레마셋째, ‘안록산의 난그들은 내부적으로 강한 응집력이 있다. 우리는 불교의 전파에 대해 철학사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전파에 대해서는 사회사적이라고 말한다. 기독교와는 다르게 이슬람교는 중국에서 넓게 퍼져나갔고 사회에 대한 영향력도 커졌다. 이슬람교는 중국 역사상 공백기간이 없다.중국의 이슬람교도는 당대에 "번상호고(蕃商胡賈)"라고 불리었고, 오대때는 "만예상고(蠻裔商賈)", 송대에는 "토생번객(土生蕃客)"혹은 "오세 번객(五世蕃客)", 원대에는 "색목인(色目人)"혹은 "회회(回回)", 명대부터는 회족이라고 불리우게 되었다.회회는 명초에 형성된 민족으로 그 기원은 중국에 남아 거주하기 시작한 중앙아시아와 아랍의 모슬렘이다. 당, 송, 원 3대때 중국 내지에 거주하는 모슬렘들은 강한 응집력으로 하나의 민족을 형성했다. 이 회족의 형성은 중국 이슬람교를 견고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중국 이슬람교는 발전 역사상 시대를 구분짓는 의미를 갖게 되었다. 이때부터 중국이슬람교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며 정치적으로 민감성을 띄게 되었다. 회족은 다민족의 결합이다. 우선은 아랍인과 페르시아인 등의 중앙 아시아인들이 중국의 한족, 몽고족등과 결합하여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한 지방에 모여 산 것이 아니라 전국적으로 분포해 있다. 특히 서북, 중원, 운남, 동남, 해남이 모두 회족의 발상지이며 서로 혈연관계나 경제적 연관이 거의 없다. 회족들의 족보는 거의 원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해남의 회족은 송대까지 거슬러 간다. 이것이 회족의 가장 큰 특징이다. 산점적, 이것은 분산되어 거주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들이 형성될 때 무슨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가? 한마디로 이슬람교이다. 근대 위구르족의 형성에서도 역시 이슬람교는 가장 직접적인 원소였다. 이슬람교는 회족에게도 위구르족에게도 하나의 '유대'작용이라고 비유할 수 있겠다.? 중국 내에서의 이슬람교의 위치 및 현황중국이슬람교는 당대이후로 자신의 운명문제를 끊임없이 해결해왔다. 예를들면 전통사회에 대한 적응같은 것이다. 그들은 전통사회에 있다.회족은 回回民族(회회민족)의 약칭이다. 이들의 선조는 대부분 13세기 몽고족의 세차례 서방정벌 이후 대량으로 동쪽으로 돌아서 이동한 回回族이고, 당?송시대에 외국에서 거주하뎐 중국 동남쪽 연해의 모슬렘(회교도)인인 蕃客(번객) 역시 이들의 선조 중 하나이다. 그리고, 이들은 긴 역사의 과정중에서 혼인관계를 맺는 방법을 통해 늘어난 종의 구성인들인 漢(한), 蒙古(몽고), 維吾爾(유오이)족등의 생활습관과 풍속을 받아들여 통합했다. 그리하여 점차 回回(회회)민족이 형성되었다.? 回族의 문화와 전통회족은 소집중 다분산의 거주특징이 있다. 그 지역내에서의 회족은 대부분 한족과 집거하고, 변방지역에서의 회족은 대부분 그지방 소수민족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대부분 수륙교통노선위에 분포한다.) 회족인의 종교는 이슬람교이다.4. 순례자와 실크로드이 시대의 순례자 혹은 승려(성직자 계급)은 근대의 서구 제국주의에서 파견했던 선교사들과는 달리 순수한 종교적 열정과 구도의 의지로 실크로드를 통한 순례활동을 했음을 사료로 알 수 있다.당대 최고의 승려이자 서유기의 삼장법사의 모델로도 유명한 현장과 입당 신라 고승 가운데 최초이자 동아시아권에서 처음으로 대식과 페르시아에 관한 기록을 남긴 혜초를 통해 당시 구도자들의 실크로드를 통한 서역 접촉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1) 불교의 전래불교와의 최초 접촉은 위나라 태화 3년 12월경이다. 서쪽에서 1만 2천여리 떨어진 대월지에서 파견된 사신을 통해 서역과의 접촉을 서서히 시도 하였다.위나라는 대월지(현재의 중앙아시아 남부 ~ 아프가니스탄 북부)왕을 ‘친위대월지왕’으로 봉하였다.후에 대월지가 흉노에 의해 서방으로 이동하게되고 이란계 아리아인과 흡수통합된다. 이들의 흡수 통합 시기에 인도에서 불교가 성행하고 불교가 대월지를 통해 중국으로 전래된다.불교의 본격적인 활동은 전래된 17년 뒤 후한 명제(B.C. 1세기)에 본격적인 종교로서의 활동을 하게되고 사신을 파견하여 승려와 불경을 들여오게 하였고 중국불교의 기틀을 마련했다.2) 현주둔지인 파미르고원을 넘어 안서도호부에 도착한다. 그 후 언기를 거쳐 727년 당 현종 개원 15년 장안으로 돌아온다.(2) 8세기의 서역 불교혜초는 이른바 불교의 교학화와 인도화, 그리고 이슬람을 비롯한 외도의 침투로 인해 인도의 불교가 총체적으로 쇠퇴 일로를 걷고있으나 ‘일시적 부흥’을 모색하던 8세기 전반에 인도와 중앙아시아 일대를 순방했다.그의 여행기 내용을 위주로 하여 그 당시 서역불교의 상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첫째, 불교 전파의 북향성 이다. 7세기 이후 인도 불교는 사실상 힌두교에 흡수되어 생명력을 상실해 가고 있었다. 특히 초기 불교의 요람인 동?중천축에서는 석가의 탄생지와 열반지 조차 승려가 없을 정도로 황폐해 져있었다. 남천축은 각종 학파와 교파가 난립하면서 힌두교에 대항하였지만 이미 힌두교의 교세는 불교를 능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북천축과 중앙아시아는 이와 달리 대식의 침입에도 불구하고 불교는 오히려 활성화되어 8세기 전반에 이른바 일시적 부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둘째, 불교의 대승화 추세다. 1세기 경에 나타난 대승불교는 5~6세기까지 소승불교에 비해 열세를 면하지 못하지만 8세기 초반 북천축과 중앙아시아에서의 교세나 교단 운영에서 대승이 크게 부각됨으로써 불교의 대승화가 확연히 감지되었다.셋째, 불교에 대한 타종교의 잠식이다. 우선 힌두교의 잠식을 들 수 있다. 원래 불교는 힌두교의 도전 앞에서 그와의 회합?제휴를 통해 대승적 변혁을 시도했지만 주관적 의도와 달리 오히려 상대에게 흡수되어 버리는 비운을 자초한다.또 다른 불교쇠퇴의 원인은 이슬람교의 침투이다. 서?북천축과 중앙아시아는 일시적으로 불교가 부흥하는 기미를 보이지만 이슬람이란 새로운 종교 세력이 서쪽에서 밀려옴으로써 불교의 기존 판도가 상실되었고 서방진로와 북방진로를 차단 당하게 된다.(3) 서역 기행의 교류사적 의의혜초의 서역기행은 신라와 서역제국과의 관계사에서 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동서문화교류에도 큰 의의를 갖는다. 혜초는 한국인 최초로 대식에 있다.
    인문/어학| 2006.12.05| 13페이지| 4,000원| 조회(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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