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석기 시대의 자연환경과 문화중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구석기 시대에는 추운 빙기와 따뜻한 간빙기가 여러 차례 나타났다. 이러한 자연 환경의 변화는 인간 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빙기에는 지구 북반구의 일부가 빙하로 덮여 있었기 때문에 동아시아 지역의 해수면 높이는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그러므로 당시에는 중국대륙 과 한반도, 일본 열도 , 타이완 등이 모두 육지로 연결되어 있었다. 빙기가 끝난 후, 해수면이 높아져 해안선이 변화되자, 한반도를 비롯한 동아시아의 여러 지역은 오늘날과 비슷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구석기 시대는 신생대 제3기와 제4기에 해당하는 시대 있다. 신생대 제 3기에는 젖먹이동물이 번성하였고, 영장류가 출현하였으며 두발로 걷는 Homo속 이 출현하였고, 석기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제 3기 전반부(팔레오세-이오세)는 전지구의 기후가 비교적 따뜻했는데, 올리고세로 가면서 추운 기후가 빙하작용을 일으키기 시작하였다. 마이오세 중기 (1400만 년 전)에는 남극대륙 일부에 영구 대 빙원(ice sheet) 이 형성 되었고, 마이오세 말기(650-500만 년 전)에는 남극대륙 전체에 영구 대 빙원이 형성되었다. 플라이오세 중반 (320-280만 년 전)에는 북반구에 빙하 형성이 시작되었다. 인류 진화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자연선택의 요인은 기후변화로 추정이 된다. 280-100만 년 전, 약 4만년 을 주기로 추운 기후가 나타났고, 약100만 년 전 이후부터는 약 10만년을 주기로 추운 기후가 나타났다. 250만 년 전 이후, 약 50 번의 빙하작용이 일어났고, 78만 년 전 이후 에는 약 8번의 빙하 작용이 일어났다. 신생대 제 4기에는 빙하작용에 따른 기후변화가 일어나고 인류가 진화 발달한 시기로. 갱신세(170만년-1만 년 전) 과 전신세(1만 년 전-현재) 로 구분된다. 갱신세는 전기(170-78만 년 전) 중기(78-13만 년 전) 후기 (13-1만 년 전)을 구분되고, 구석기 시대는 전기 250-30돌석기에 해당하고 흔히 자갈돌을 사용하였고, 잔손질 보다 행위의 강도가 강한 떼기를 적용하여 날을 가공하였다.? 한국의 구석기 시대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서는 한국 구석기시대의 시작을 70만년 전으로 보고 있고, 전기에는 큰 석기 한 개를 가지고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 중기에는 격지제작 기술이 발전하고 후기에는 돌날격지 가 제작 되었으며, 대표유적은 평양 상원 검은 모루 동굴, 경기도 연천 전곡리, 충남 공주 석장리, 충북 제천 창내 가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짐승사냥과 식물채집,을 하였고, 무리를 이루며, 큰 사냥감을 찾아다니며 생활하였다. 사냥도구는 주먹도끼, 찍개, 팔매돌등이 있었고, 조리도구 로는 긁개, 밀개 등이 있었다. 후기 구석기의 대표적인 석기에는 슴베 찌르게가 있고, 지도자는 있으나 지배자가 없는 평등한 공동체적 생활을 하였다. 석회암이나 동물의 뼈 또는 뿔을 이용하려 조각품을 제작하였고, 공주 석장리와 단양 수양개에서 고래와 물고기를 새긴 조각품이 발견되었는데, 조각품은 사냥감의 번성을 비는 주술적 의미를 나타낸다고 교과서에 나타나있다.한국사에 있어 구석기 유적의 발견과 그 의의를 살펴보면 1930년대 중반 함경북도 두만강 연란 동관진(현재 지명 강안리)의 황토층에서 많은 동물화석과 흑요석 격지 2점이 발견되었는데, 구석기 유적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당시의 일본 황국사관의 영향과 1만년 이전의 갱신세 동물화석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다. 1949년 일본 군마현 암숙에서 최초 구석기 유적이 발굴 되었는데, 1950년 대 말 까지 북한학자도 부정하였다. 1961년에는 함경북도 화대군 장덕리 토탄층에서 털코끼리 화석이 발견되었다. 1962년 함경북도 선봉군 굴포리 신석기 시대 조개더미 유적의 발굴을 끝내며, 뗀석기 1점을 생토층에서 발견되었고, 구석기 시대의 것으로 인정되었다. 1963년 갱신세 고토양층에서 구석기 시대의 석기가 발굴되었고 국가적인 사업으로 진행되었는데, 그 목적은 일제식민지사관의 극복과 유물사관에 의한 내재적인 역사발전의 적층에서 원숭이 화석 출토되었다. 주요사냥감은 사슴종류가 6-70%로 주로 어린것과 늙은것이고 사냥 계절은 가을-겨울 로 보인다. 석기는 전기와 중기 구석기 유적으로 유적의 연대 설정에 많은 문제점이 있는데, 주먹도끼, 자르개, 여러면석기 들이 있다. 후기 구석기시대에는 유물의 성격이 비교적 자세하게 알려졌는데, 돌날, 좀돌날과 같은 격지와 잔손질된 격지 석기가 증가 했고, 주먹도끼, 여러면석기 등과 같은 대형석기 일부가 지속되었고, 유문암, 혼펠스, 흑요석등으로 암질 변화되었다. 단양 수양개 유적등에서 석기제작터도 확인되었다. 또 동굴유적에서는 뼈연모도 발견되었는데, 만달리 동굴 유적의 뿔망치, 뾰족이 등이있다. 예술품으로는 약 6만 5천 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제천 점말 동굴의 코뿔소 앞팔뼈와 용곡동굴에서 발견된 짐승모양 얼굴이 있다.? 한국의 신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의 기본성격은 우선 후빙기의 자연환경으로 10000년- 3500년 전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석기 시대에는 간석기와 낚시 뼈연모 등 새로운 생산도구 들이 등장하였고, 음식물을 조리, 보관, 운반할 목적으로 토기가 제작되고 사용되었다. 생업수단으로는 식물재배, 가축사육, 짐승사냥, 물고기 잡이, 조개잡이 등이 있었고, 신석기인들은 움집을 짓고 정착생활을 하며 마을을 형성하고 살았다. 무덤의 형태는 움무덤, 독무덤이 있고, 조각품과, 바위그림과 같은 예술품도 나타났다. 신석기 시대는 약 6000년간 존속되었는데, 시기구분은 주로 토기의 형태, 무늬의 특징을 중심으로 구분하였고, 최근에 농경의 변천과정을 중심으로 새로운 시대구분이 시도되고 있다. 토기에 따른 시대구분을 살펴보면 기원전 6000년 이전 제주고 고산리 유적에서 좀돌날석기와 토기가 출토되었다. 토기는 풀잎이나 갈대를 섞어 만들었다. 청도 오리진 바위그늘 유적 맨 아래 층에서도 위와 같은 토기가 출토되었다. 기원전 6000-5000년 경 동해안, 경남 남해안지역에서는 덧무늬 토기가 발견되었는데, 이 토기는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가 성행하는 이전이 로는 조가비나 돌을 이용한 팔찌, 대롱옥, 발찌 등이 있다. 식생활은 식물성 먹을거리로는 재배곡물을 먹어나 도토리나, 가래, 감, 살구, 산딸기, 토란, 마, 칡 등 야생식물을 먹었고, 동물성 먹을거리로는 가축으로는 개와 돼지를 먹었다. 특히 동북지방에서 개를 많이 먹은 것으로 보인다. 야생동물로는 사슴류나 멧돼지가 가장 많고, 바다짐승으로는 물개, 바다표범, 바다사자, 고래(반구대 암각화) 등을 먹었고, 날짐승으로는 꿩이나 오리를 먹었다. 또 낚시와 그물, 작살, 그물추를 이용하여 물고기 잡이도 하였는데. 바다에서는 물고기의 서식 습성을 이해하여 잡았고, 강에서는 그물추, 등을 이용하여 잡았다. 또 홍합, 굴, 백합과 같은 조개류도 먹은 것으로 보인다. 신석기 시대의 예술품은 조각품과 치레걸이가 있는데, 주제는 주로 사람과 동물형상이고, 재료는 흙, 돌(납석), 뼈, 뿔, 짐승이빨, 조가비 등을 사용하였다. 의미는 호신부, 풍요와 다산, 토템, 애니미즘을 나타내고, 인물상 가운데 여성이 많아. 북한은 신석기 시대를 모계사회로 규정하였다.?한국의 청동기 시대1957년 황해도 지탑리 유적이 발굴되기 이전까지는 청동기와 신석기 시대를 구분하는 뚜렷한 유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제시대에는 청동기 시대를 금석병용기 시대라는 용어로 표기 하였다. 이는 우리의 역사를 왜곡하려는 의도로 한국이 청동기 시대를 거치지 않고, 석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넘어 갔다는 것으로 식민지 사관 확립에 악용이 되었다. 1950년대 부터북한 고고학계에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고, 1957년 황해도 지탑리 유적이 발굴되었고, 1963년 굴포리 유적 발굴 되면서 일본의 역사 왜곡을 극복하였다. 청동이란 인류가 발견한 최초의 합금으로 구리와 주석의 합금이다. 신석기 시대에는 흙을 가열하여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고, 청동기 시대에는 구리와 주석을 가열하면 이용할 수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구리의 녹는점은 약 1084도로 구리에 주석이나 아연, 납 등을 넣으면 구리의 녹는점수반하지 못했다. 청동기 시대의 유적을 살펴보면, 먼저 집터는 집의규모가 다양화되었고, 움의 깊이가 얕아졌다. 또 기둥구멍 대신 주춧돌을 이용하였다. 일반형 집터는 장방형과 세장방형이 있는데, 세장방형은 길이가 너비의 2배 이상, 30m 에 이르는 것도 있는데. 대가족제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8세기 이후로 넘어가며, 집자리규모가 축소되는데, 소가족제도로 분화된 것이라는 추정도 있다. 송국리 형 집터는 대체로 원형으로, 중심부에 타원형의 구덩이가 있고 구덩이 내부의 인접부에 기둥구멍이 있다. 화덕시설이 없는 것으로 보아, 석기 또는 옥기를 제작하기 위한 공방으로 추정된다. 마을의 방어시설인 환호와 목책을 살펴보면, 환호는 마을을 둘러싼 도랑으로 울산 검단리 유적은 전체 둘레 길이 약 300m 의 타원형이이다. 목책은 마을 주위에 구덩이를 파고 목재를 박아 서로 연결된 것으로, 부여 송국리 유적에 나타나있다. 농경지유적도 나타나는데, 농경문청동기를 통해 밭농사를 했음을 알 수 있다, 논산 마전리 유적의 각종 수리시설과 우물을 통해,논농사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무덤의 양식을 살펴보면 고인돌은 주로 한국, 중국과 일본 구주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데, 약 4만기가 발굴되었고, 대동강 유역과 전남지역에 집중 분포되어 있다. 대부분은 무덤의 기능을 했거나, 공동무덤을 상징한 것으로 보인다. 구조는 고임돌과 무덤방 묘역시설로 되어있고, 형태는 지상식은 탁자식과 반지하식인 바둑판식, 지하식은 개석식이 있다. 중국에서는 탁자식을 석붕, 개석식을 대석개묘 라고 한다. 탁자식은 지상에 무덤을 축조한 것으로 판돌 3-4개가 받침돌의 역할을 한다. 바둑판식은 땅을 약간 파서 무덤방을 만들고, 지석을 놓고 덮개돌로 덮은 것이다. 개석식은 지하에 무덤방을 만들고, 기위를 덮개돌로 덮은 것으로 유물이 많이 발굴되었다. 돌널무덤은 석관묘나, 돌상지무덤이라고도 하는데, 한국, 중국 동북지방, 시베리아, 일본 등에 분포되어있다. 구조는 지하에 무덤구멍을 파고, 판돌, 깬돌, 강돌 등으로다.
한중록 (閑中錄)1. 시대적 배경과 저자1) 편찬의 시대적 배경? 정조 19년 (1795)? 17~18세기의 조선 왕실의 계보와 당파 싸움에 대해 미리 알아 두어야할 필요가 있음⇒사도 세자는 영조의 아들이자 조선의 제19대 왕인 숙종의 손자이다. 숙종은 최초의 왕비 인현 왕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두지 못했다. 그래서 장 희빈을 왕비로 맞아 경종(景宗, 제20대 왕)을 낳았고, 숙빈 최씨와의 사이에서 연잉군(영조)을 낳았다. 그러나 경종의 어머니 장 희빈은 인현 왕후를 모함한 죄로 사약을 받아 죽었고, 연잉군은 어머니가 신분이 낮은 궁녀 출신이라는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연잉군은 숙종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는 소문에 줄곧 시달려야 했다.역사적으로 '누가 다음의 왕, 또는 왕비가 될 것인가?'라는 문제는 언제나 임금의 친척과 관료들 사이에 분란을 일으켰다. 조선 중기의 관료는 노론(老論). 소론(少論). 남인(南人). 북인(北人)등의 네 당파로 갈려 있었다. 그들은 어떤 사건이 일어나면 그것을 계기로 번갈아 가며 권력을 잡았고, 그 때마다 왕명으로 상대방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그 무렵 소론은 경종을 지지했고, 노론은 연잉군을 지지했다. 결국 경종이 왕위에 올랐지만, 노론은 경종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경종이 자식이 없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이복 동생 연잉군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바로 영조이다.영조는 당파 싸움의 폐해를 없애려고 노력했으나, 자신이 왕이 되는 데 결정적인 도움을 준 노론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 뒤 영조의 큰아들이 일찍 죽었기 때문에 후궁이 낳은 둘때 아들이 태어난 지 1년 만에 왕세자가 되었는데, 그가 바로 사도 세자이다. 사도 세자는 매우 영리하여 열네 살 무렵부터는 영조를 대신하여 국정을 보기도 했는데, 당시에 세력을 떨치고 있던 노론을 못마땅하게 생각했다. 과거에 노론이 경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는데, 사도 세자가 보기에 이것은 왕권에 도전하는 대단히 건방진 짓 이엇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사도 세자가 다음 왕이 되면 자신들의 앞날이 위태롭다고 판단하고, 사도 세자가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이 무렵 영조의 왕비 정성 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새로이 정순 왕후가 왕비가 되었다. 그런데 정순 왕후와 혜경궁 홍씨는 사도 세자의 적인 노론의 집안 출신이었다. 이 두 여인의 친정을 비롯한 노론 세력은 사도 세자를 모함했으며, 여기에 정순 왕후도 가담했다.성격이 과격한 영조는 수시로 사도 세자를 불러 사소한 잘못에 이르기까지 매섭게 꾸짖었고, 세자는 영조를 두려워하면서 정신적으로 아주 불안정한상태가 되었다. 게다가 궁녀를 죽이고, 여승을 궁에 데리고 들어오며, 몰래 궁궐을 빠져 나가 평양에 갔다 오는 등 이상하고 난폭한 행동을 많이 했다. 그리하여 정순 왕후의 아바지 김한구와 노론의 지시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열 가지를 영조에게 해 바치는 일이 일어난다. 영조는 크게 화를 내며 왕실의 앞날을 위해 사도 세자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불러 자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세자가 말을 듣지 않자, 그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게 하고 말았다.2) 저자: 혜경궁 홍씨 (1735~1815)? 영의정 홍봉한의 딸 이자 사도세자의 빈, 정조의 어머니? 1744년 (영조20) 세자빈에 책봉?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 뒤 혜빈의 호를 받음? 1776년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궁호로 혜경 (惠慶) 으로 올랐음? 1815년 12월 (순조15) 서거, 이듬해 현경이라는 시호를 받고 사도세자의 현륭원에 합봉? 1899년(고종 36) 사도세저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의황후에 추존? 혜경궁 홍씨는 사도 세자와 동갑으로, 열 살 때 사도 세자와 결혼했고, 스물일곱 살 때 남편의 참혹한 죽음을 겪었다. 그 뒤에도 친정아버지와 숙부들, 그리고 조카들이 목숨을 잃거나 귀양을 가고 관직에서 쫓겨나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함? 정순왕후와의 관계: 혜경궁 홍씨의 시어머니인 정순 왕후는 시아버지인 영조가 쉰한 살 에 맞아들인 왕비로, 혜경궁 홍씨보다 열 살이나 아래였다. 두 여인의 친정은 같은 노론 집안이면서도 서로 주도권을 다투는 사이였으므로, 두 사람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 협력을 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 사이가 되었다. 이러한 불편한 관계는 정순 왕후가 세상을 떠 나는 1805년까지 계속 됨.2. 체제 및 내용1) 체제? 혜경궁 홍씨가 회갑이 되던 해부터 네 차례에 걸쳐 쓴 회고록? 「한중록(恨中錄)」이라고도 하고, 「한중록(閑中錄)」이라고도 표기. 원명은「한듕록」? 궁정 수필. 한글 수필. 실기(實記) 문학.? 문체: 내간체2) 내용? 사도제사의 참변을 중심으로 한 혜경궁 홍씨의 한(恨) 많은 인생회고? 실제 내용에는 자신의 친정아버지 홍봉한과 그의 동생들이 사도 세자의 죽음에 대해 책 임이 없음을 주장하는 부분이 많음3. 판본? 한중록은 혜경궁 홍씨의 회갑 때, 67세, 68세, 그리고 71세 때 쓴 4개의 이본이 있음? 첫 번째는 조카에게 주기 위하여 친정 중심으로 기록? 두 번째는 친정의 몰락에 대한 자탄을 기록? 세 번째는 순조에게 바치기 위하여 기록? 네 번째는 며느리 가순궁(嘉順宮)의 요청으로 기록4. 사료적 가치 및 한계1)사료적 가치①『인현왕후전』,『계축일기』와 함께 우리나라 궁중 문학의 대표작.②어휘의 선택과 문장의 표현에서도 고상하고 우아한 면을 엿볼 수 있음⇒작자가 세자빈이라는 높은 지위에 있었기 때문. 고상하고 우아한 표현, 절실하고도 간 곡한 묘사, 전아하고 품위 있는 궁중 용어의 사용 등으로 한글로 된 궁중 문학의 백미 로 평가
? 프랑스 혁명과 독일의 변화프랑스혁명은 정치적인 대립과 분열 그리고 경제적 후진성에 깊이 잠들어 있던 독일을 깨우기에 충분하지 못하였다. 30년 전쟁이후 독일제국은 300여개의 크고 작은 영방국가로 분열되고 국토는 황폐화되었다. 또한 한자동맹을 통한 경제적 번영도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대서양시대의 개막으로 퇴색되었다. 프리드리히 대왕의 강력한 프로이센 국가건설도 중산층이 성장할 수 없는 사회적인 후진성 때문에 그 빛을 잃어 갔다. 18세기말의 질풍노도운동을 통해 독일 여론이 흥기하여 민족의식의 각성을 요청하였지만 현실적인 여건의 열악함은 한갓 이상주의에 불과한 구호였을 뿐이었다. 프랑스 혁명의 성공은 계몽주의적인 독일 지식인과 서민의 자유주의를 크게 자극하였지만 독일 제국의회는 1793년 오히려 보수반동정치를 강화하는 결정을 하여 시민의 모든 정치적 집회 등을 금지시켰다. 따라서 슐레지엔과 작센 등에서는 노동자계층의 시위를 통한 소요사태가 발생하였지만 곧 진압되었다. 특히 자코벵파의 공포정치는 독일영방국가의 지식인까지도 혁명에 무관심을 나타내는 계기가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여파에 따라 19세기 자유주의가 영국과 프랑스 등에 서는 크게 발전한 반면, 독일은 보수반동적 비인체제의 강압아래 오히려 후퇴하는 결과가 나타났다. 한편 중남부의 독일 국가는 자유주의적인 헌법을 제정하는 움직임이 확산되었다. 또한 작센과 바이마르 헌법은 언론, 출판자유를 허용하는 등 가장 진보적인 성향을 보였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메테르니히가 주도하는 보수반동체제의 원칙 하에서 자유주의의 열망을 접어야만 하였고, 중산층의 시민계급은 성잘 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의 자유주의 운동을 주도한 계층은 학생과 지식인이었다. 1815년 예나대학에서 부르센샤프트가 결성되고, 이에 14개의 독일대학이 호응하였다. 따라서 부르센샤프트의 결성은 독일인이 열망하였던 자유와 통일의 구심점으로 성장하였다.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의 여파는 침체된 독일의 자유주의를 흔들어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제국의 부라운슈마이크, 작센, 헤겐, 하노버등에서는 민중봉기가 일어나 자유주의적 신헌법이 제정되었고, 바덴헌법은 언론출판의 자유를 보장하는 가장 진보적인 모델이 되었다. 절정에 이른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운동도 메테르니히의 철권정치아래 무참히 탄압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연방의회는 비상사태의 선포와 반동입법을 통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군대를 동원하여 강력한 정치적 탄압을 자행하였다. 따라서 바덴에서는 검열제가 부활되는 등 칼스바트의 결의가 훨씬 강화되었다. 그러나 19세기 독일 자유주의는 성공하지 못하였지만 1834년에 파리에 ‘독일 망명자동맹’이 결성되는 등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1840년 새로운 프로이센 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가 즉위하였다. 그는 중세 찬미론자를 자칭한 낭만주의적 보수주의자였다. 따라서 그의 소극적 개혁방향은 결국 침체된 시민계급을 환기 시킬 수 없었고, 프로이센은 결국 자유주의적 헌법을 채택하지 않았다. 1840년대 산업혁명의 여파가 나타나고 경제적 통합이 이루어지는 과정에서 시민계급으로 성장을 원하는 프로이센의 수많은 노동자, 농민 등 민중들은 독일의 분립주의와 절대주의 타파를 요구하는 민족주의와 자유주의 운동을 재개하였다. 1848년 2월 프랑스혁명의 소식은 전 유럽에서의 혁명으로 발전되었다. 독일에서는 1848년 3월 5일 남독일 자유주의자가 하이델베르크에서 모인 것을 필두로 3월 말에는 프랑크푸르트에 전 독일 대표가 소집되어 통일방안을 논의하여 7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초기 민중에게 굴복하여 출판자유등을 보장하여 사태를 수습하려 하였다. 3월 13일 오스트리아의 비인에서 일어난 혁명으로 메테르니히가 실각되고 자유주의적인 정부가 구성되었다. 다음날 베를린 혁명은 군대와 군중이 충돌하여 시가전의 유혈사태로 전개되었지만, 국왕은 곧 민중에 굴복하고 자유주의 헌법을 보장하고 통일의 책임을 맹세하는 등 3색기를 새로운 국기로 정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독일혁명은 초기부터 혁명의 지도세력의 조직체계의 불안함과 준비부족에 따른 결과로 원칙적인 구질서를 타파 할 수 없었다.프로이센은 17세기 중반에 들어와 점점세력을 확장해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영주 시대에는 북부독일의 가장 강력한 국가가 되고 프리드리히 2세 때는 유럽의 강대국이 된다. 1763년 프리드리히 2세가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에서 프로이센은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가와 더불어 강대국이 된다. 1789년의 프랑스 혁명은 중세초기 이래 지속되어 온 봉건적인 사회질서를 무너뜨렸다. 무력으로 프랑스 혁명에 개입하려는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시도는 무산되고 혁명군의 역습을 받았다. 오히려 프랑스에서 혁명의 유산을 이어받은 나폴레옹의 공격으로 독일제국의 질서는 변화를 겪게 된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오스트리아를 점령하고, 1806년에 신성로마 제국을 해체 하였으며, 다음해에는 프로이센을 점령해 버렸다. 그러나 1814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하여 독일 제국이 세워졌다. 프랑스는 라인 강변을 차지했으며, 독일 중부지역의 영방들은 1806년 프랑스의 보호아래 ‘ 라인동맹’ 에 합세했다. 라인 동맹은 나폴레옹의 후원으로 조직된 남서 독일 제국으로부터의 탈퇴를 선언하자 프란츠 2세는 왕권을 포기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은 막을 내렸다. 독일에서는 지식인 층이 프랑스 혁명을 새로운 시대의 태동으로 환영했다. 그러나 프랑스 혁명은 독일로 파급되지 않았다. 독일은 프랑스 혁명에서 시작된 사회적 변화로부터 영향을 받지 않고 존속했다. 중앙집권적인 프랑스와는 반대로 제국의 봉건적 구조가 새로운 이념들의 확산을 저해했기 때문이다. 또한 혁명의 본거지 인 프랑스는 독일인을 적대자이며 점령세력으로 적대시 하였다. 나폴레옹과의 전쟁으로 독일에서는 민족의식이 확산되었으며, 해방전쟁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해방전쟁은 1812년 나폴레옹 1세의 프랑스 군이 러시아 원정에 실패한 이루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가 동맹하여 나폴레옹 체제를 타파한 전쟁이다.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의 모스크바 철수를 계기로 러시아와 동맹을 맺고 1813년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어서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스웨덴이 동맹에 가담하여 마침내 1814년 3월 동맹군의 파리진격으로 나폴레옹은 퇴위하였다. 이 해방전쟁은 여기에 참가한 다양한 계층의 독일인들에게 자유에 대한 의식을 확산시켰고, 이때부터 독일 전역에 걸쳐 하나로 통합된 독일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게 되었다. 나폴레옹의 침공은 독일의 국가형태에 변화를 가져와서 수많은 군소 국가대신 중간 크기의 국가들이 생겨났다. 세력이 강해진 남부독일의 국가들이 1806년 독립을 선언하고 신성로마제국의 프란츠 2세가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남으로써 신성로마제국은 막을 내리게 된다. 같은 해에 프로이센은 나폴레옹에게 항복을 하였는데, 이 사건은 국가와 사회개혁의 계기가 되었고, 이후 다시 1813년 빈에서 37개의 독일의 국가들과 독립 도시들은 독일연방을 이룬다. 그러나 이 연방은 강력한 연방국가가 아니라 엉성한 형태의 연합에 불과했다.
? 독일의 종교개혁16세기 초는 독일 역사에서 매우 혁명적인 시기 였다. 마루틴 루터의 종교개혁, 토마스 뮌처의 재세례파 운동과 농민 전쟁이 모두 이시기에 일어났다. 이 사건들은 따로 떨어진 것이아니라 상호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마루틴 루터의 종교개혁운동은 그가 95개조 반박문으로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비판한데서부터 시작된다. 면죄부란, 이것을 사는 사람은 죄를 용서받고 천당에 갈 수 있다는 증표인데, 사실은 성 베드로 성당을 지을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이 짜낸 묘안이었다.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 신학교수로 있던 마르틴 루터는 교회 벽에 라틴어로 쓴 95개조의 반박문을 내걸어 교황의 면죄부 판매를 맹렬히 비판했다. 그의 반박문은 선풍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2주일 만에 독일 전역에 퍼졌고, 4주 일 만에 국경을 넘어 유럽 전체에 알려졌다. 1520년 그는 3편의 논문을 발표, 교황과 성직자의 부패, 타락을 고발했다. 격분한 교황이 파문을 경고했지만 루터는 교황이 보낸 칙서를 불살라 버리고 말았다. 1521년 마침내 그는 파문을 당했다. 독일 황제 카를 5세 역시 그를 국법의 보호밖에 둔다는 선고를 내렸다. 루터는 황제의 경쟁자인 작센 공 프리드리히의 보호 아래 숨어 지내야 했다. 이 때 루터는 라틴 어로 쓰인 성서를 독일어로 번역, 이듬해 출간 했다. 이제껏 성직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성서가 일반 민중들에게 널리 읽히게 된 것 이다. 루터는 인간의 구원은 교회나 성직자를 통해서가 아니라 신앙과 은총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 신앙의 근거는 성서였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가장 열렬히 지지한 것은 농민들이었다. 교회의 횡포에 오랫동안 시달려온 농민들에게 루터는 자신들의 대변자로 여겨졌던 것이다. 루터와 동시대에 활약한 인물로 토마스 뮌처가 있다. 그는 라이프치히, 프랑크푸르트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루터의 종교개혁에 큰 감명을 받았다. 루터의 소개로 츠비카우에서 목사가 된 그는 거기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다. 그는 원시 기독교의 평등주의를 이상으로 삼고 하나님의 나라를 지상에 실현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게 되었다. 루터와 결별한 뮌처는 아르슈테트로 가 설교에 힘썼다. 군주, 지배자, 부자를 비판하는 그의 설교를 듣고 농민과 광부들은 깊은 공감을 느꼈다. 1523년 뮌처는 튀빙겐에 정착, 다음 해 그곳에서 일어난 농민 전쟁의 선두에 섰다. 1525년 튀빙겐에서 시작된 농민전쟁은 순식간에 독일 전력으로 파급되었다. 그러나 루터는 농민전쟁에 매우 냉소적이었다. 루터는 특히 뮌처가 이끄는 농민군에 대한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으므로 이에 힘을 얻는 봉건귀족들은 무자비하게 농민군을 진압했다. 농민들은 이제 루터에게 등을 돌렸다. 뮌처가 지도한 재세례파 운동에 참여란 사람들은 무참하게 죽음을 당하였다. 뮌처도 1525년 참수형에 처해졌다. 농민전쟁은 독일의 종교개혁운동에 가장 깊은, 지속적인 그러면서도 비참한 결과를 안겨다 주었다. 루터 개인에게도 영향을 미쳤으며 급기야는 자신이 이끌려던 방향에 치명적인 결과를 안겨다 주고 말았다. 농민전쟁은 종교개혁운동의 주도권을 복음적 제후들의 손에 안겨다 주었으며, 개혁적인 독일 국가교회의 탄생이라는 꿈을 깨뜨리고 말았다. 루터는 무장반란은 아무런 유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그는 평화의 길만이 영속적인 유익을 가져다준다고 확신하였다. 농민의 난이 일어나자 루터는 크게 당황하였다. 사탄이 농민들 편에 서있으며 그 반란은 자신이 발견한 신성한 진리를 거부하려는 것이라고 단정했다. 따라서 그는 종교 개혁의 실질적 후원자로 생각하던 영주들 편으로 확실하게 돌아섰다. 그리고 자신만의 진리를 발견했다고 자부하던 다른 광신자들이나 독재자들, 이상주의자들처럼 루터 역시 수천여 명에 달하는 농민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살육과 약탈을 일삼는 농민 무리에 대항하여’ 라는 소책자에서 루터는 영주들에게 신의 이름으로 폭도들을 처형하라고 촉구했다. 당시의 상황이 아무리 그러한 글을 쓰게 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하더라고, 루터의 고매한 삶과 이력에 지울 수 없는 오점을 남기게 되었다. 농민의 지지를 잃은 루터의 종교개혁은 봉건제후와 도시민의 지원 하에 계속되어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에서 대타협을 이룸으로써 공인되었다. 이로써 카톨릭이 아닌 루터 교가 성립되고, 독일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는 일종의 신구교의 종교화의를 통한 평화조약을 뜻하였다. 주요내용은 우선적으로 독일제후와 모든 자유도시는 그 통치하에 있는 주민이 카톨릭과 루터파 중에 하나를 믿도록 택일 할 권리를 인정하였다. 즉 ‘지배자의 신앙이 지배지의 신앙이다’ 라는 원칙에 입각하여 주민은 그들 제후의 의도대로 카톨릭 또는 신교 둘 중 하나를 믿어야만 되었다. 따라서 진정한 의미의 종교의 자유를 허용한 것은 아니었다. 이러한 결정은 제후의 권리가 강화되면서 독일 국민국가의 형성에 절대적인 저해요인이 되었다. 독일 제국은 300여개의 크고 작은 분열된 영방국가로 자리매김을 확실히 하게 된다.30년 종교전쟁은 1618년부터 1648년 까지 30년간 독일을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 사이에 있었던 신구교의 동맹체계로 진행된 대규모 종교 전쟁이었다. 전쟁의 직접적 원인은 반종교개혁의 과정에서 합스부르크가는 1618년 보헤미아 왕이었던 페르디난드가 후스당의 신교를 탄압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구교의 종교대립을 배경으로 연쇄적으로 충돌하면서 전 유럽이 전쟁터를 방불케 하였다. 독일영방의 개신교 제후는 덴마크, 스웨덴의 지원하에 합스부르크가의 카톨릭 연합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특히 1625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4세가 독일을 침입하였지만 패배하였다. 그러나 전쟁기업가가 등장하면서 용병은 증가되었다. 1630년 스웨덴의 사자왕 구스타프도 독일 신교를 원조하여 독일 카톨릭세력을 격파하였다. 30년 전쟁의 후반부는 프랑스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의 싸움으로 진전되고 난립된 독일 영방의 신구교 제후간의 투쟁도 계속된다. 종교적 국제전쟁으로 프랑스의 개입은 종교보다는 합스부르크왕가의 견제와 약화에 있었다. 특히 부르봉 왕가의 목표는 라인지방으로부터 스페인 세력을 퇴출시키는데 있었다. 따라서 같은 카톨릭 계통이었지만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의 2대진영의 싸움으로 전개되었다. 전쟁의 결과로 독일제국은 황폐화되었다. 총 인구의 3분의 1이 감소되고 따라서 생산력도 감소되었다. 유럽 최초의 국제회의가 1641년 베스트 팔렌에 소집되었다. 독일 황제와 66명의 전권대사가 참석한 유럽의 세력균형을 좌우한 중요한 강화조약이었다. 1647/8년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거하여 합스부르크가는 오스트리아 중심으로 변모하여 스페인의 합스부르크가는 쇠퇴하였다. 즉 오스트리아의 종교적 정치적 승리가 보장되어 보헤미아와 헝가리를 병합하였다. 이로써 오스트리아는 중, 남동유럽의 신교세력을 근절시키고. 유럽의 강국으로 등장하였다. 스페인 합스부르크가의 쇠퇴는 프랑스 부르봉가의 영향력 확대를 의미하였다. 따라서 오랜 스페인의 지배와 싸웠던 네덜란드가 독립되었다. 또한 스웨덴의 유럽 내 에서의 영향력이 강화되고, 스위스의 독립이 재 보장되었다. 최후, 최대의 종교전쟁이었던 30년 전쟁은 형식적으론 신, 구교의 대립이었지만 정치적 세력의 대결이었다. 결국에는 부르봉가와 합스부르크가의 정치적, 경제적 이권대립의 전쟁으로 전개되고 마감되었다. 30년 전쟁은 종교개혁의 종착역이란 의미가 있다. 이후 종교적인 문제로 유럽에서 큰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특히, 루터파, 칼뱅파 등의 공인과독일 제후들의 종주권인정을 통해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는 명목상의 황제로 전락되었다. 황제는 독일제후의 동의 없이 법률개정, 세율인상, 선전포고, 조약체결을 할 수 없었다. 황폐화된 380여개의 독일영방은 더욱 분열된 양상으로 발전하였다.
- 비잔티움 제국(Byzantine Empire)이라는 이름은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신수도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 지금의 이스탄불)로 천도한 330년 이후부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의 마지막 황제가 전사한 1453년까지를 일컫는 중세 그리스의 동로마 제국(Eastern Roman Empire) 문화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로마 인들은 자신들의 영역을 신의 은총과 영원한 로마의 위대한 유산을 물려받은 그리스도교 국가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어서 스스로를 계속해서 '로마인'이라고 불렀다. 수도 비잔티움은 원래 고대 그리스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유럽과 소아시아의 경계선에 있었고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30년 5월 11일에 이 곳을 '새로운 로마'로 정하고 이를 콘스탄티노플이라 명명한 후 수도를 옮겨온 뒤부터 동로마라는 새로운 영역의 중심이 되기 시작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을 때(395) 제국을 양분하여 동로마를 큰 아들 아르카디우스 서로마를 작은 아들 호노리우스로 하여금 각각 통치하게 함으로써 동.서 로마의 분리는 결정적인 사실이 되었다.비잔티움 제국은 제도 일반에서는 로마 적이지만 주민, 언어, 문화면에서는 그리스적이었고 콘스탄티노플은 일찍이 로마 제국이 완수한 적이 없었던 전략상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리스를 중심으로 소아시아와 이탈리아 해안의 여러 섬들을 포함하여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 조직을 갖추고 그리스도교와 동방적 색채를 포함한 군주국가로서 완전히 성립된 것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과도기를 거쳐 헤라클리우스 황제(610-641 재위) 때였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은 행정과 학문에서 새로운 중심이 되었고 제국의 문화는 고전적 전통 및 중세 카톨릭 유럽과 소아시아의 이교 문화의 교차 지점으로서의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 비잔티움과 게르만족의 관계는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야만족에 대해서는 세례만 인정하면 개방했고, 비잔티움 역시 문화의 기원이 다른 문화들인 슬라브, 아랍, 셈, 투르크 등의 문화와 끊임없이 이코노클레즘)은 비잔티움 제국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발전했다. 성상이나 성유물에 대한 신앙을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성상 금지론자들은 모든 성상 표현을 꺼렸다. 성상파괴논쟁은 제국 영토 내의 카톨릭교도를 그리스 정교회로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726년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가 성상숭배금지를 주장하자, 그 뒤 100년이 넘도록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성화,성상 등 많은 작품들이 파괴되어 없어졌다.-발칸 속주에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유스티니아누스가 자신이 생존한 세기의 가장 교양 있고 박식한 인물이 된것은 비잔티움의 수도가 가지고 있던 문명의 힘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유스티니아누스라는 인물 사진이 워낙 탁월한 존재였음을 알려주는 증거는 세계적인 폭을 지닌 그의 정치적 목표와 유례없이 다양했던 그의 활동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의 성격에는 상당히 유쾌하지 못한 약점들이 수없이 많았지만, 이런 약점들도 모든 것을 포괄하는 그의 정신의 힘 앞에서는 빛을 잃었다. 또 결단성과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유스티니아누스를 그의 부인 테오도라가 뒷받침 해주었다.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이끈 인물은 그가 아니라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였다. 거대한 법전 편찬을 완수한 인물은 그가 아니라 트리보니아누스였고, 가장 중요한 행정 초지들을 강구한 인물을 그가 아니라 총독이었던 요한네스였다. 그러나 그의 위대한 시대에 이루어진 모든 위대한 업적들을 고취시킨 인물은 바로 유스티니아누스 였다. 로마 보편제국의 재건은 비잔티움인 들의 영원한 동경이었다. 이러한 동경은 r의 복고정책에서 가장 웅장하게 표현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비록 복고작업이 영속되지 못했고 그 와해가 제국에 극히 심대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하더라도, 그의 정책은 후세에 숭고한 예로서 간주되었다.*유스티니아누스 法-유스티니아누스 시대의 가장 위대하고 지속적인 업적은 로마법의 법전 편찬이었다. 트리보니아누스의 지휘아래 이사업은 놀랄 만큼 짧은 시일 안에 완성러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여전히 고수되었고 영토는 줄었지만 제국의 통일성은 더욱 공고해졌다.(∴복합국가가 아닌 보다 직접적인 통일국가가 되었다, 로마적 제국에서 그리스적이고 헬레니즘적인 제국으로 되어가고 있었는데, 그러한 현상은 정치, 문화, 예술, 종교등 모든 분야에서 나타났고, 그 단적인 예로 그리스어를 공용어로 사용한 것을 들 수 있다.)*비잔티움의 재기1)콘스탄티노플 방어전: 717년에 있었던 아랍인의 콘스탄티노플 정복 위협으로 비잔티움의 운명은 다시 내리막길을 걸었다. 그러나 그 위기는 결단력 있는 황제 레오 3세(717-741)의 역습에 의해 극복되었다. “그리스의 불”로 알려진 비밀 병기와 강력한 군사력의 도움을 받아, 레오는 바다와 육지에서 아랍의 군대를 격퇴할 수 있었다. 717년에 레오가 치른 콘스탄티노플 방어전은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투 가운데 하나였다. 비단 그 방어전 덕분에 비잔티움 제국이 향후 몇 세기 동안 더 연명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실로 그것은 서유럽 전체를 위험으로부터 구원했던 것이다. 만일 그때 이슬람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했더라면, 그들이 유럽의 나머지 지역을 휩쓰는 것을 막아내기란 거의 불가능 했다. 비잔티움은 그 후 수십 년 동안 소아시아의 대부분을 재정복 할 수 있었다. 이 지역은 그리스 지역과 더불어 그 후 300년 동안 비잔티움 제국의 심장부가 되었다. 그 후 10세기 후반에 접어들어 비잔티움이 약화된 이슬람 세력에 대해 공세를 취할 수 있게 될 때까지, 비잔티움과 이슬람은 교착 상태에 빠져들었다. 그 시기에 비잔티움 군대는 시리아의 대부분을 재정복했다.*비잔티움 제국이 장기간 안정을 누린 이유.1)유능한 황제들의 등장: 1071년 콘스탄티노플이 마침내 함락된 것은 전혀 놀라운 일이 아니다. 오히려 정작 놀라운 것은 비잔티움제국이 그처럼 많은 적대 세력들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오랫동안 존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놀라움은 비잔티움 제국의 국내정치가 극도로 혼미했던 사실에 접하면 더욱 커지게 된다지 제국의 경제기반이 비교적 탄탄 했다는 점이다. 역사가인 “스티븐 런시먼(Steven runciman)”의 지적처럼 “만일 비잔틴의 힘과 안정이 관료들에 힘입은 것이라면, 그 관료들에게 급료를 지불할 수 있게 한 것은 바로 무역” 이었다. 서유럽에서 원격지 무역과 도시생활이 수백 년 동안 거의 소멸되었던 것과는 대조적으로, 비잔티움 동유럽에서는 상업과 도시가 계속해서 번창했다. 특히 9세기와 10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극동의 사치품과 서유럽의 원료를 거래하는 중요한 무역 시장이었다. 제국은 또한 비단 제조 등 자국의 산업을 장려하고 보호 했으며, 또한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안정된 금?은 화폐제도로 유명했다.*비잔티움제국의 종말11세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또 다른 이슬람세력인 셀주크 투르크 족의 위협을 받고 있었다. 그들은 비잔티움이 종전에 획득한 영토를 모조리 빼앗고 말았다. 1071년에 셀주크 투르크 족은 소아시아의 만치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티움 군대를 전멸시켰다. 이 놀라운 승리를 말미암아 그들은 비잔틴 동부의 남은 지역을 정복했다.만치케르트 전투 이후 비잔티움 제국은 살아남기는 했지만 결코 애초의 활력을 되찾지 못했다. 그 중요한 이유는 1071년부터 제국이 멸망한 1453년 까지 비잔틴의 운명은 서유럽의 흥기로 말미암아 대단히 복잡해졌기 때문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서유럽은 너무나 미약하여 비잔티움에 대해 이렇다 할 도전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은 11세기에 접어들면서 완전히 바뀌었다. 셀주크족이 비잔티움에 대해 승리를 거두던 1071년 바로 그해에 서유럽인(노르만인)은 비잔티움을 남이탈리아에 남은 그들의 마지막 점유지로부터 추방해버렸다. 그런데 이와 같은 서유럽의 명백한 적의에도 불구하고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콤네누스는 1095년에 투르크족에 대항하기 위해 서유럽에 원조를 요청했다. 그의 원조요청은 서유럽의 십자군 운동을 촉발시켰고, 이 십자군이야 말로 비잔티움 제국 멸망의 주요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물론 제 1차 십자군 원정에서 서유럽인하지는 않았으나 종교 논쟁에서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였다. 비잔틴의 종교분쟁은 황제들이 분쟁에 적극적인 역할을 함으로써 매우 복잡하게 되었다. 동부의 여러 지방을 상실하고 교리가 정교하게 다듬어진 후인 8세기에는 비로소 종교적 평화가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이른바 성상파괴논쟁(Iconoclastic Controversy)에 의해 평화는 다시 한 세기 동안 깨지고 말았다.- 성상파괴운동성상파괴주의자란 성상, 즉 그리스도와 성인들의 형상에 대한 숭배를 금지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다. 성상 파괴운동은 레오3세에 의해 시작되었고 그 후 그의 아들 콘스탄티누스5세에 의해 한층 더 강력하게 추진되었는데 역사가들은 그 동기를 다양하게 설명하고 있다. 그 하나는 분명히 신학적인 것이다. 성상 파괴주의자들이 볼 때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되며 그리스도는 너무나 신성한 존재여서 인간의 솜씨로는 표현할 길이 없다고 믿었다. 그리고 십계명에서도 “새긴 우상(graven image)”에 대한 숭배가 금지되었기 때문에 성상금지는 논의의 여지가 없는 당연한 일로 간주되었다. 또한 정치? 재정적 동기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비잔틴의 황제들은 급진적인 새로운 종교 운동을 천명함으로써 교회에 대한 황제의 통제권을 재확인하고, 아울러 점차 세력이 증대하던 수도원들을 제압하고자 했을 것이다. 실제로 수도원들은 성상 숭배를 구실로 세력을 키우고 있었고 콘스탄티누스 5세는 그들을 철저히 박해함으로써 많은 수도원의 재산을 차지할 기회를 얻었다.-성상파괴 논쟁의 의의성상 파괴 논쟁은 9세기에 다시 원점으로 돌아감으로써 해결되었다. 즉 다시 성상 숭배를 허용하는 것으로 결말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에워싸고 혼란이 벌어졌던 한 세기는 돌이킬 수없는 심각한 결과들을 가져왔다. 그 하나는 황제의 명에 의해 많은 종교 예술품이 파괴되었다는 것이다. 이로 인해 현존하는 8세기 이전의 비잔틴 종교 예술품들은 대부분 성상 파괴 교황들의 손이 쉽사리 미치지 않는 이탈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