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정이유왜 오설록인가? 커피에 익숙해져 있는 젊은 세대에게 우리의 전통 문화인 녹차와 녹차를 이용한 한국적인 먹거리를 제공하는 문화 체험 공간을 제공한 하나의 틈새시장이 있다. 주 5일제 도입 후 비중이 커진 여가문화나 사회적인 건강과 이에 대한 관심들이 시너지화 되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오설록을 선정해 조사해 보았다.사업체 소개우리 선조들에게 학문과 예술의 벗으로 자주 음용 되었던 일반적인 차의기능으로가 아닌 문화의 한 요소이며, “심신의 건강”을 치유하는 이너뷰티(inner beauty)의 한 요소로서의 기능에 관한 연구를 집대성한 테마카페로 즉, 도심 속 현대인에게 차가 주는 “여유 문화”를 직접 체험 하도록 배려한 곳이다.컨셉트차(茶) 라는 순수 자연 식물을 마시는 일상 속으로 여유를 찿는 “느림의 철학”을 통해 몸과 마음을 치유해 온 선조들의 지혜를 바탕으로 여유와 문화가 도심 속의 다원 전체적으로 편안함을 연상시키는 그린 톤 차를 모티브로 한 실 내장식을 기본 켄셉사업점포2001년 9월 제주 설록차 뮤지엄 개관 2004년 4월 명동 1호점 오설록 티하우스 오픈 2004년 10월 강남 2호점 오픈 프랜차이즈로 사업 확장 계획 중O'sulloc tea house의 특징차(茶)를 과거의 기호 음료로서가 아니라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큼주스, 스무디, 저칼로리 음료Icecream등 다양한 음식종류와의 “퓨전” “맛있고 건강에도 좋은 차 음료” 웰빙문화에 대한 접근을 통해 독창적인 “차세계(tea area)” 를 펼쳐 나감PLC태평양 설록차매출액영업이익19*************22003683,989792,957971,3481,088,7461,119,939103,317125,094163,646159,720188,217도입기성장기성숙기제2브랜드 오설록제1브랜드 설록차설록차의 영업이익 성장차이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태평양 에서는 녹차의 다른 시장을 개척하였다.PLC(계속)CONCEPT을 편안함,안락함,정신수양 할 수 있는 것으로 잡았지만 웰빙으로 인하여 고객의 수가 늘어남에 따라 급성장하였다. 따라서 기존 CONCEPT과는 달리 기다리는 고객의 수가 많고, 제품 전시등으로 인해 편안함의 유지가 되지 않음 좌석 회전율이 빨라졌다.환경인구통계적 : 연령별 인구분포 명동: 강남과 강북의 대표적인 중심지로 직장인 및 대학생들의 만남의 장소 강남 교육수준 전반적으로 교육수준 향상 (보보스 족) -경제적 : 취업여성증가, 소비수준 향상 -경쟁적 : 기존의 커피시장 (스타벅스, 커피빈 등) 동종의 차시장 (이대 세이지와 같은 녹차카페) 전통차환경(계속)-기술적 : 좋은 녹차를 재배하기 위한 까다로운 조건 다양한 녹차를 이용한 제품 개발 -사회 문화적 환경 : 1. 웰빙문화 삶의 질 중시 2. 여가문화 현대인의 주5일제로 인해 여가시간 증가 3. 사회적인 건강과 미에 대한 관심 4. “녹차”에 대한 붐 (미국에서 스타벅스처럼 녹차 라떼 시장의 활성화)환경(계속)Strength(강점)Weakness(약점)Opportunities(기회)Threats(위협)-다년간 “차”를 전문으로 만들어온 기술력(설록차) -”태평양”이라는 브랜드 이미지 -깨끗하고 여유있는 매장분위기 (고품스러운 품격) -녹차를 이용한 다양한 먹거리 개발 (독창성)-단일 원재료로 인한 메뉴의 한계성 -타 경쟁 기업보다 턱없이 부족한 매장 수-선도기업 위치 기능 -”웰빙”문화 확산(삶의 질 중시) -친자연주의 인식 확산(건강에 대한 관심 높아짐) -저칼로리 음식으로 거부감 감소 -주 5일제 근무 도입후 비중이 커진 여가문화 -예로부터 정착되어 온 우리나라 차문화-이미 시장에 진출해 있는 차(커피) 관련 매장 다수(스타벅스, coffee bean…) -타 매장과 중복된 메뉴로 차별성이 떨어질 수 있음sT/m 설정을 위한 시장 시장세분화 조건 -시장의 크기아 성장성 : 우리가 만나는 장소, 시장크기 大 따라서 성장성이 높다 -강한 경쟁력을 가진 기업의 유무 : 아직까지 녹차 전문 까페시장 無 따라서 성장성이 높다 -기업의목표/자원 : 태평양의 설녹차 자원조달이 쉽고, 음료시장에 적합S(계속)2. 시장 세분시 고려한 변수 - 인구통계적 변수 : 소득별, 지역, 성별, 가족생활주기연령18~2525~4040이상소득별소속上中下학생보보스직장인-심리적 변수 : 사회계층(중류층이상), lifestyle(웰빙) -제품관련(행동적) 변수 : Brand-Royalty(태평양 – 설록차 – 오설록) 대기업이기에 신뢰도 또한 높다T20~30 TG 2. Menu 별 TG - 여성 : 슬림한 몸매를 원한다 (그린티 하우스) - 가족 : 망고라떼 - 아이들 : 녹차 Ice-cream - 중장년 : 명차의 향기를 느끼고 싶어한다 but 우리가 강남/명동점을 방문한 결과 기업에서 나눈 TG보다는 다양함 (대학생 : 20대, 직장인 : 30대, 중장년 : 40대, 외국인 : 외국인이 의외로 한국에서 마실 음료시장 이 없는데 오설록에는 많았다.)P1. 속성 : 제품 특징 (그 날 만들어서 그 날 판매 신선도) 모든 음료 녹차 응용 2. IMOPE : 녹차 설록차 웰빙 , 전통 (우리의 것) 3. 사용상황 : 웰빙추세에 맞게.. 유기농 음식 디저트로는 오설록을 소비자에게 제시 4. 경쟁제품 : 스타벅스 (가장 태표적인 음료, 가장 큰 시장) 스타벅스는 음료라는 속성보다 '스타벅스'라는 곳에 간다는 품위를 상승 시켜주는 효과의 고가 전략, 하지만 오설록은 경쟁 우위에 포지셔닝을 하기 위해서 웰빙, 우리 브랜드에 소구PRODUCT1. 차 음식 + 웰빙문화 2. 이너뷰티의 집대성인 테마까페 3. 차와 인간의 공감을 주선하는 까페 4. 현대인들의 입맛에 맞는 쿨 주스, 스무디, 저칼로리음료 아이스크림 등 개발 5. 다양한 음식의 퓨전 독창적인 웰빙 푸드 완성 6. 일로향 : 한라산 다원에서 청명직후에 은빛 솜털같은 어린 새싹만을 하나하나 손으로 곱게따서 정성스럽게 만든 명차 7. 그린티 티라무스 : 이태리 정통 마스카폰치즈와 은은한 녹차향의 고급스러운 맛 8. 망고라떼 : 푸르른 녹차평원에서 열대과일 망고 향을 즐기실 수 있는 음료PRICE새로운 소비계층으로 떠오르는 보보스족과 20,30대의 여성층 타켓 -중저가 가격전략 채택PRICE (차가격)가격정책PASCUCCI스타벅스O'SULLOC커피빈로즈버드세이지전통차7,000 ~ 10,0004,000 ~ 7,0003,500 ~ 6,0006,000 ~ 8,0001,500 ~ 3,0003,800 ~ 5,5005,000 ~ 10,000고가중저가중저가중고가저가중저가중고가PROMOTION제주도에 국내 최대 규모의 종합 차문화 체혐공간인 O'SULLOC을 개관, 운영, 견학 전통 문화의 향기를 되살리자는 취지의 '녹차와 문학' 공모전 매장입구에 메모판 비치 차문화에 대한 설명 무료 -온라인 상에서 하는 이벤트 -1989년 국내 최초로 국제 녹차 심포지엄 개최 녹차의 다양한 효과 널리 홍보 '설록차' 라는 차전문 잡지 창간 차문화와 차에 대한 정보PLACE원산지 : 제주도 한라산(녹차 생산에 적합한 기후와 토양 맛과향이 뛰어남판매 후 고객관리오설록 티하우스를 배경으로한 사진 이벤트 매니아 시식회 무료시음 홈페이지의 고객의 소리와 , 이용후기란결론우리 조원들이 오설록을 조사해 본 결과, 오설록이라는 새로운 녹차카페 시장이 성장하는데 웰빙이라는 환경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건강에 대한 관심도가 증가하면서 스타벅스와 같은 기호시장에서도 커피 보다 녹차 프라프치노가 더 많이 팔렸다고 한다. 따라서 이에 대한 틈새시장을 오설록이 급성장하고 있 지만 기존 오설록의 컨셉에 따라 고객에게 여유 보다는 어수선함을 주고 있다. 여기서 기업의 입장에서 볼 때 좌석 회전율이 높은 것은 이점이지만, 이에 대한 새로운 대처 방안이 세워져야 할 것이다.{nameOfApplication=Show}
1980년 이후 한국경제의 변화에 관해 서술하시오.< 목 차 >Ⅰ. 서론1Ⅱ. 본론11. 경제성장 여건의 변화12. 1980년대 이후 나타난 경제 현상33. 대기업의 대응과 재편4Ⅲ. 결론5※ 참 고 문 헌6Ⅰ. 서론1970년대의 위기 이후 세계 자본주의 경제는 ‘재구조화’라는 새로운 구조로의 전환하게 된다. 즉 국영기업의 민영화와 기업 활동에 대한 대폭적인 규제 완화, 재정지출 복지 예산의 삭감, 노동 조합의 약화 등을 통해 기업의 수입성과 이윤 전망을 회복시키고 투자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경기회복을 도모하고자하는 것이다.그러나 한국을 비롯한 개발도상국에서의 개방화 논의는 사실상 선진국들의 시장개방의 압력이었다.1980년대 이후 한국의 산업구조 조정에서 가장 주목해야 할 성과는 중화학 공업과 경공업의 양극화 현상 속에서 중화학공업 중심의 수출 지향 구조가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이다.이와 같이 중공업 부문이 더욱 증대한 이유는 국제적 차원에서의 산업 구조 조정의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즉, 엔고의 영향으로 일본의 생산 공정이 아시아 국가로 이전하면서 상대적으로 범용 기술의 중화학 공업 중심의 수출 지향 축적 구조를 더욱 강화하게 되었다.국내적으로도 고도 성장 과정에서 나타난 부문간의 생산 및 축적 능력의 격차, 성장기여도나 대외적인 수출 기여도에서 모두 중화학 공업 중심으로 크게 변화한 결과가 성장과 수출의 양극화로 나타난 것이다.이러한 맥락 하에 한국의 경제의 전개과정 중 1980년 이후 한국경제의 변화에 관해 좀더 자세히 논하도록 하겠다.Ⅱ. 본론1. 경제성장 여건의 변화1987년 ‘노동자 대투쟁’으로 노동운동의 전기를 마련하여 노동자는 자본가계급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세력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6?25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의 노동운동의 특징은 노동쟁의가 양적으로 적었을 뿐 아니라 질적으로도 임금인상투쟁의 차원에 머무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노동쟁의는 섬유, 전자 등 노동집약적 산업의 중소사업장에 집중되는 1987년 7 ~ 8월 전지역 ? 전산업의 사업장에서 악한 노동조건, 내핍적인 소비생활은 약간씩 완화되었다.1980년대 이후에는 민간주도 경제로의 이행과 함께 경제의 자유화, 즉 금융자율화, 수입자율화, 자본자유화 등도 급속히 추진되었다. 금융자율화는 1980년대 초의 시중은행 민영화, 은행에 대한 정부감독의 축소, 정책금융의 축소 등으로 나타났지만, 대체로 실패하였다고 간주된다. 하지만 그 결과는 산업 대기업의 금융지배였다. 1980~1990년대에 걸친 지속적인 금융자율화의 결과 대기업은 한편으로는 제1금융권과의 유착을 더욱 공고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제2금융권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수입자유화는 1970년대 후반부터 추진되었지만, 본격적으로 1980년대 이후부터였으며, 1990년대 중반 이후 WTO체제가 성립하면서부터는 농산물 등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정부는 비록 단계적인 수입자유화 정책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이 과정에서 경쟁력이 취약한 일부 경공업이 큰 타격을 받는 등 부작용도 없지 않았다. 자본자유화는 1980~1990년대에 걸쳐 지속적으로 추진되었다. 1980년 외자 도입법 개정 이후 외국인 투자 인가지침이 네거티브 시스템으로 전환되었으며, 1989년 이후에는 서비스부문을 중심으로 외국인 투자업종의 자유화가 추진되었다. 그리고 1992년 이후에는 첨단기술분야의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방편으로 인가제가 신고제로 전환되었다. 그리고 1990년대 중반 이후에는 WTO체제에 대비하고 OECD에 가입하기 위해 대대적인 자본자유화가 추진되었다.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이 붕괴하고 자본주의 세계경제가 전일화되면서 세계경제는 본격적인 개방체제로 들어서게 되었으며 산업기술상으로는 디지털 경제로의 이행이 빠르게 진행되었다. 김영삼 정부는 ‘세계화’를 주창하면서 각종 개방 및 자유화 조치를 단행하였고, 대기업은 여전히 은행 등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차입을 위주로 경제규모의 확장만을 지향했고, 정부도 금융기관에 대한 통제 및 대기업에 대한 규제장치를 통해 그러한 확장을 직?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었으며 소재 및 구조는 그대로 유지되었다.1980년대 이후 정부정책으로는 경제안정화 정책, 산업구조조정, 중소기업의 육성 등이 있다. 1979년 ~ 1980년의 불황해소를 위해 유신체제를 그대로 이어받은 전두환 정권은 ‘경제안정화 정책’을 실시했고 중화학공업투자의 조정, 부실기업정리와 노동통제의 강화, 실질임금과 동결, 농산물가격 통제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고 산업구조조정은 첨단산업지향, 자동화 및 노동력절감, 한계기업의 업종전환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 구조조정을 위해 공업발전법의 제정과 공업발전기금의 조성, 첨단산업기술 개발의 지원 등이 추진되었다. 또한 정부는 1980년대 초에 중소기업육성정책을 실시했는데 이것은 대기업의 침투규제, 중소기업 근대화, 중소기업 계열화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물론 이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중소기업 계열화였다.2. 1980년대 이후 나타난 경제 현상1980년대 이후 한국 경제에 나타나는 두 가지 중요한 현상이 있는데, 하나는 노동력의 공급 제약 및 노동력의 고학력화 현상이 나타났다는 점이다. 1970년대까지 공업화과정에서 필요한 인력공급은 양적인 측면에서 커다란 제약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농촌지역과 도시의 전통부문에 몰려있는 유휴 노동력이 공업부문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거의 무제한적으로 공급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무제한적인 노동력의 공급이 1970년대 말에 종료되고, 1980년대에 들어서는 노동력 부족의 압박이 발생하는 상황이 도래하게 되었다. 이러한 노동력 부족의 압박은 1980년 대학정원 자율화 정책과 함께 노동력의 고학력화 현상이 현저하게 진행되면서 산업의 인력수급 불일치의 심화로 이어져 갔다.다른 하나는 정보기술의 발달과 제품의 생존주기가 빨라지면서 산업구조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더 이상 1970년대의 단순기능 및 노동집약적인 산업구조로는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이룰 수 없게 되었다. 1980년대에는 산업이 기술집약적인 구조로 변화하고 있으며, 노동력 또한 단순기능인력의 필요성육은 종래의 기능인력 양성에서 벗어나 경제의 고도화 및 국제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술인력을 확보하는데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산업에서 중견기술자(Technician)의 필요성이 증대함을 의미하는 것이며, 따라서 직업교육은 종래의 실업계 고등학교 중심에서 전문대학 수준으로 그 비중이 크게 이동하였다. 정부의 정책도 실업계 고등학교의 직업기술교육에서 전문지식과 기술을 습득하여 중견기술인력이 되기를 희망하는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하는 방향으로 나갔다.이러한 변화과정에서 실업계 고등학교는 1981년 각급 학교의 교육과정을 개편하면서 고등학교 단계의 직업기술교육의 목표, 과목 등을 대폭 개편하였다. 또한 정부는 공업계 고등학교의 공동실습센터 설치, 농업계 고등학교의 농업기계교육 강화 및 초지조성보조금 지원, 상업계 고등학교의 정보처리 및 경영관리 기능의 배양을 위한 지원, 수산고등학교의 수산 기술인력 양성을 위한 지원 등의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 왔다. 그러나 경제환경의 변화, 소득수준의 증가, 대학 정원의 확대 등으로 실업계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사기 저하와 입학정원 미달이라는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었다. 반면 전문대학은 1979년 종래의 초급대학과 전문학교를 전문대학으로 개편하여 일원화하면서 교육내용의 전문화, 실험?실습 시설의 확충 등을 통해 중견기술인을 양성하는 정규교육기관으로 발전하였다. 전문대학은 1981년 132개교에서 1985년 120개교로 증가하였으며, 2000년 현재 162개까지 증가하였다.한편, 대학교육 기회를 놓쳤거나 중퇴한자, 대학을 졸업한 후에라도 전문지식과 기술을 습득하고자 하는 자에게 계속 고등교육의 기회를 제공함으로써 직업생활에 적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개방대학(open university)을 설립하였다. 1982년부터 설립되었던 개방대학은 고등학교 졸업생으로 산업체 근무 경력이 1년 이상인 자를 신규 입학자로 하였으며, 전문대학 졸업자나 이와 동등한 학력을 소지한 자로서 산업체 근무 경력이 1년 이상인 자는 3학년 과정영되었으며, 계절학습, 주?야간 학습, 전일제 및 전시제 학습제도를 운영하여 학생들의 편의를 최대한 배려하였다.3. 대기업의 대응과 재편국가주도의 수출지향적 공업화 속에서 고성장하고 있었던 대기업은 정부의 지원과 외국자본의 적극적 도입을 기반으로 일련의 재편과정을 겪으면서 불황을 극복하고 그 지배체제를 강화했다. 1980년대 초 대기업의 대편은 먼저 자본집중의 형태로 전개되었고 그 내용으로는 1980년대의 불황이후 중화학투자 조정에 따른 주요 중화학공업부무의 통폐합, 부실기업정리를 통한 인수합병이었다. 대기업은 중화학공업화 과정에서 나타난 모순을 억제하면서, 중화학공업부문에서의 지배력을 공고히 했으며, 중화학공업부문 우위의 산업구조 및 수출구조를 정착시켰다. 정부는 제조업부문 공기업의 민영화, 산업구조조정 등을 통해 대기업의 재편과정을 집중적으로 지원했다.또한 대기업은 정부의 강력한 지원과 초국적 자본의 유착을 통해 금융부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했으며 그 내용으로는 은행자율화 및 민영화 금융시장 개방을 주장, 은행주식을 소유함으로써 그 지배력을 안정적으로 확보, 제2금융권에 직접 진출하여 지배 등이 있다. 1990년대 들어서서 금융기관에 대한 정부의 규제는 더욱 완화되어 은행의 경영자율성을 강화하고 금융산업 개편이라는 이름으로 증권산업을 개편하였으며, 투자금융회사와 통합금융회사 등 단기금융회사의 대형화 ? 전문화를 도모하였다. 대기업의 규모확장과 더불어 은행 및 제2금융권으로부터의 차입은 더욱 커졌으며, 이는 이후 IMF 외환위기가 급속히 금융위기와 기업위기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계기가 된다.정부에 의한 중소기업 육성정책은 크게 대기업의 침투규제, 중소기업 근대화, 중소기업 계열화로 구성되었는데 특히 계열화 사업을 핵심으로 했다. 이는 전문화된 부품생산 중심의 중소기업을 창출 ? 육성함으로써 조립부문 대자본과 유기적인 생산분업관계를 맺게 하는 조치였다. 1990년대에 들어 중소기업과 대기업에 대한 기술지원 및 연계보증 지원, 협력기금 지원 등을 활성화 할 수 있.
법사회학을 법학과 사회학에 비교하여 설명하시오.I. 서 론1II. 본 론11. 사회학의 개념12. 법학의 개념33. 법학과 사회학에 비교한 법사회학4III. 결 론5※ 참 고 문 헌6I. 서 론법사회학(法社會學)은 법을 역사적 사회현상으로서 고찰하여 법의 형성 ?발전 ?소멸의 법칙성을 추구하는 경험과학으로서 몽테스키외 등을 선구자로 하나, 20세기 초엽부터 성문법 만능주의를 비판하고 자유법론(自由法論)의 주장과 결합하여 조직적으로 주장되기 시작하였다. 법사회학의 대표적학자는 오스트리아의 에를리히, 독일의 베버, 칸토로비츠, 프랑스의 귀르비치, 미국의 파운드 등이 있었다.법사회학의 연구분야에는 첫째, 법원(法源)으로서의 관습법이나 살아 있는 법(lebendes Recht)의 연구, 둘째, 법의 생성과정(입법과정이나 사법과정)의 연구, 셋째, 법의 현실적 효과의 연구(예컨대, 벌금액을 인상하면 교통사고가 얼마나 감소하는가 등), 넷째, 사회가 법에 구하고 있는 요구나 법의식(法意識)의 연구 등의 분야가 있다.본론에서는 이러한 법사회학의 개념을 심층적으로 고찰해 보기 위하여 법사회학을 법학과 사회학에 비교하여 연구해보고자 한다.II. 본 론1. 사회학의 개념현대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풍부한 사회과학적 소양이 필요하다. 사회과학은 인간의 행위에 의해 일어나는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과학을 논하자면 사회현상의 특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첫째, 사회현상은 각 시대와 사회에 따라 고유한 성격을 가지며(특수성) 반복되지 않는다.둘째, 사회현상은 정치현상, 경제현상 등이 따로따로 고립되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긴밀히 얽혀있다. 어디까지가 경제현상인지 정의가 어렵다.셋째, 사회현상은 실험이 불가능하다. 사회현상을 실험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사회과학자 자신도 인간이기 때문에 실험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넷째, 인간은 의식적인 존재이므로 사회적 행위는 예측불가능하다.문제는 사회과학이 사회현상을 설명하고 예측하려고 하기 때문에 과학성, 객관성의 문제가 제기된다.또한 현대사회는 복잡성, 불확실성을 가진 사회(The age of uncertainty)이다. 이것은 미국의 경제학자 J.K.갈브레이스가 1977년에 발표한 저서의 제목으로 당시 오일쇼크 이후 불안을 느끼고 있던 사람들의 환영을 받아 발간두달만에 34판을 거듭하는 대베스트셀러가 되었고 불확실성의 시대라는 말은 유행어가 되었다. 갈브레이스는 예전처럼 확신에 찬 경제학자도, 자본주의자도, 제국주의자도, 사회주의자도 존재하지 않는 현대를 불확실성의 시대라 명명하였다.에드가 모랭은 현대사회를 '나침판없이 망망대해에 떠있는 배'에 비유하기도 하였는데 언제 폭풍우를 만날지 어디서 빙벽에 부딪칠지 알 수 없는 불확실한 상태를 뜻한다.여기서 문제는 사회과학도 과학인가 하는 것으로 사회과학의 과학성, 객관성 문제가 제기된다. "인간으로 구성되는 사회는 자연보다 복잡하므로 자연과학의 정밀성을 갖는 일반법칙을 정립할 수는 없지만 경험적 관찰을 통해서 객관적인 법칙을 정립할수 있다고 보는 입장이 실증주의로 꽁트에 의해 만들어져 사회과학의 방법 역시 자연과학과 같다고 보는 입장으로 과학에 의해 얻어지는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고 주장하였다. 실증주의는 인간사회는 신학적 단계, 형이상학적 단계를 거쳐 실증적 단계로 접어들었고 이 실증적 단계가 인간정신 발달의 마지막 단계라고 본다. 콩트는 실증적 지식을 얻는 네 가지의 절차로, 관찰, 실험, 비교, 역사적 방법을 말하고 있다.사회학 역시 사회과학이다. 그렇다면 사회과학은 무엇인가. 사회과학은 사회현상을 관찰하고 설명하는 인간의 지적인 노력. 그런데 사회현상은 자연현상과는 다르므로 사회과학은 자연과학과는 다르다. 사회학은 사회과학중 가장 기초학문이지만 역사가 짧은 학문, 통상 사회학의 창시자는 오귀스트 꽁트. 초창기에는 사회물리학이라 명명했다. 또한 사회의 구성원은 인간이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도 이루어져야 하고 인간이 이루어낸 물질적 정신적 총체인 문화에 대해서도 이해해야한다. 사회와 문화는 불가분의 관계인데 사회가 그릇이라면 문화는 그릇에 담겨있는 내용물이다.그렇다면 사회학이란 무엇인가? 사회학은 무엇을 하는 학문인가? 명확한 규정은 힘들지만 정히 정의를 내린다면 '인간의 사회적 행위, 집단생활 및 사회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회학은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관심을 갖는다. 사회의 모든 문제가 관심영역인 것이다.사회학에서 다루지 않는 분야는 없다. 사회학 앞에 접두어를 갖다 붙이면 사회학이 된다. 정치사회학, 교육사회학, 법사회학, 문화사회학, 커뮤니케이션사회학, 조직사회학, 노동사회학 등등이 있는 것이다. 이에 Sorokin은 “사회학은 N+1의 학문이다”라고 명명하였고 이는 사회에 N개의 현상이 존재한다면 사회과학은 N+1개가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이러한 사회학에 대해 너무 종합적이고 일반적이다 보니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학자도 있다. 도대체 사회학의 고유영역이 있느냐는 것이며 사회학은 쓰레기 청소부의 학문 (scavenger science)이라 명한 학자도 있다. 이는 뚜렷한 연구영역이 없고 타사회과학이 연구하는 영역을 제외한 나머지를 연구하는 학문이란 것이다.2. 법학의 개념법은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 집단과 집단 사이의 갈등과 대립을 가능하면 가장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만든 장치이다.법은 크게 공법(公法)과 사법(私法)으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최근에는 사회법(社會法)이라는 개념도 중요하게 부각되고 있다. 공법은 헌법, 형법, 형사소송법 등과 같이 국가나 행정주체와 국민 사이의 관계를 규정한 법률을 말하고, 사법이란 상법, 민법, 민사소송법 등과 같이 개인과 개인에 관한 법률을 말한다.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사회적으로 약자인 노동자, 소비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과 환경을 보호하기 위한 법률 등이 등장하게 되었는데, 이를 사회법 이라고 한다.법학은 법술과 구별되지 않으면 안된다. 법학은 법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지식이고, 법술은 법학상의 지식을 실제에 응용하는 기술이다. 법을 잘 응용하여 법관이 재판을 하는 실제적 기술, 법을 적절히 응용하여 행정관이 집행하는 실제적 기술 등은 법학이 아니라 법술인 것이다.법은 사회의 모든 영역을 빠짐없이 규정하고 있어야 한다. 법에 규정되어있지 않은 범죄나 상황이 발생하였을 경우, 과거의 판례나 관습에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사회의 급격한 변화에 따라 판례나 관습에조차 없는 전혀 새로운 상황이 생겨날 수도 있다. 컴퓨터 바이러스의 유포와 같은 옛날에는 없었던 새로운 범죄행위가 그것이다. 이에 대한 처벌을 규정한 법조문이 없다면, 남의 이익을 침해하는 행위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그 행위자를 처벌할 수 없게 된다. 법은 이처럼 시대와 사회의 변화에 따라 그 내용을 변화시켜 가야 하는 것이지, 영원불변한 금과옥조 인 것은 아니다. 법은 사회의 변화를 수용하는 방향으로, 또 인간의 존엄과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변화해 가야 한다.3. 법학과 사회학에 비교한 법사회학법학의 연구방법으로서의 법사회학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에 이미 대두되었고 18세기에 이르러 성숙기에 들어섰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장구한 성장기를 가지는 법사회학은 자연법론 및 개념법학의 사상을 지양하여 법사회적 사실을 법의 일반화에 포용한 후 이로부터 규범의 차원적 수단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다. 법은 사회적 사실 속에서 형성되고, 발전되고, 변화하며 또한 법의 실천가능성도 사회적 사실을 무시하고는 이룩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법의 타당성도 사회적 사실에서 구해야 함은 자명한 사실이다. 법의 효력의 근원을 실력에 두느냐, 또한 타당성에 두느냐에 관한 논쟁은 법의 효력의 근원으로서의 극한점을 제시한 데에 불과한 것이고 법의 효력의 근원은 그 법의 전수자가 그 법을 전수하여 나아가는 생활사실 그 자체 속에서 발견되어져야 한다. 법의 타당성이 없는 것을 실력으로 강제한다고 될 일이 아니고 아무리 법에 타당성이 있다 하더라고 어느 정도의 실력의 보장이 없으면 역시 안 될 일이다.이러한 현상은 곧 역사학파가 말하는 바와 같이 법이란 단순히 제정된 사회규범이 아니라 국민 속에서 생성하는 국민정신의 소산, 그것을 말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국민이 그 법의 타당성이나 강제성을 의식함이 없어 법, 그것이 생활현상 속에 용해되어 있지 않다면, 이 생활사실 그것이 곧 법의 효력의 근거라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생활사실화하지 않는 법은 이행될 수 없는 법이요, 결국은 사문화된 법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면 법의 효력의 근거가 그 사실성에 있다면 사실이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많은 법사회학자들은 여기에 대한 해답을 구하려고 시도했으나 아직 법의 사회적 사실성에 관해서는 체계적 설명이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이러한 문제를 차치하고서라도 현대 법학에 과학적인 방법을 가져오게 하는데 가장 선두에서 가장 큰 힘으로 작용했던, 그리고 작용하고 있는 것은 법사회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사회학은 가장 먼저 법을 사회학적으로 무엇이라고 정의할 것인가라는 문제로부터 출발한 것이다. 법에 대한 정의의 문제는 사회에 존재하는 여러 규범적인 것들로부터 법을 구분해내는 작업을 과제로 하였다. 도덕, 예의, 전통, 관습, 유행, 그리고 종교 등으로부터 법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한 탐구는 법학의 영역을 넓혀 주었으며 법학자가 연구해야 할 필요가 있는 분야를 넓혀주었다.
종업원 직무스트레스목차 Ⅰ. 서론: 문제제기 Ⅱ. 이론적 배경 Ⅲ. 직무차원 스트레스 Ⅳ. 결론: 대처방안Ⅰ서론 :문제제기강제된 노동과 죽음, 그리고 주 5일제 [속보, 경제] 2003년 08월 22일 (금) 14:12 오마이뉴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증가하고 있는 자살 - 신용불량, 빚으로 인한 동반자살, 투신자살, 노조탄압으로 인한 자살, 산재승인이 되지 않아 또는 치료 중 자살하는 경우 등 해당 - 은 사회적인 안전망의 부재, 사회 불평등의 심화, 합리적 노사관계의 부재에 기인하는 것으로 ꡐ사회적 타살ꡑ 내지는 적어도 ꡐ사회적 방조죄ꡑ에 해당한다. 여기에 덧붙여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아 자살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사회적 타살의 한 유형에 속하는 또 다른 죽음은 최근 우리사회에서 증가하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공감하고 있는 과로사이다. 작금의 우리 사회를 보면 한 쪽에서는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이고, 다른 한쪽에서는 과중한 노동으로 인하여 쓰러져 죽음에 이르고 있다. 일자리는 적고, 비정규직은 증가하고 있고, 비정규직은 말할 것도 없고 남은 정규직의 노동조건도 악화되고 있지만 한 번 빠지면 다시 올라오기 쉽지 않은 실업과 비정규직의 굴레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몸에 무리를 해 가면서도 일자리를 지켜야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사회적 강제에 의해 행해지는 무리한 노동으로 과로사가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IMF 5년 한국 어떻게 변했나]④평생직장은 없다..동아일보 2002년 11월 21일 ꡒ제 인생에는 세 번의 전환점이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취직한 것, 두 번째는 결혼한 것, 세 번째는 외환위기 때입니다.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겪으며 인생의 목표와 계획이 모두 달라졌습니다.ꡓ 제일기획에서 광고기획을 맡고 있는 A차장(36). 그는 입사 6년차였던 외환위기 당시의 회사 분위기를 잊지 못한다. 광고계에 불황이 몰아치면서 선배와 동료 가운데 20% 이상이 명예퇴직으로 직장을 떠나던 뒷모습…. ꡐ명퇴 바람ꡑ이 잠잠해진 뒤에는 벤처열생산직 근로자 100명을 대상으로 심층 상담을 진행했다. 1인당 상담시간은 평균 2시간. 상담 대상 가운데 10%(10명)는 직무 스트레스로 인한 우울증과 불안 장애, 불면증 등으로 정신과 치료가 필요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최근 부쩍 강조되는 ꡐ고객만족ꡑ ꡐ고객감동ꡑ 등의 용어가 서비스직 종사자에게 주는 부담감은 위험 수준이라고 우 교수는 강조했다. 외환위기 이후 대부분 임시직으로 바뀌어 고용불안을 느끼는 상황에서 고객의 항의라는 ꡐ암초ꡑ가 스트레스를 가중시키기 때문. 서울대병원 신경정신과 권준수(權俊壽) 교수는 ꡒ과거 정신적 문제가 생겼을 때 도움을 주던 ꡐ지지그룹(Support Group)ꡑ이 사라지면서 만성적인 정신 질환을 앓을 가능성이 더욱 커졌다ꡓ고 말했다. 대표적인 지지그룹은 회사 동료였으나 외환위기 이후 이들이 경쟁그룹으로 바뀌면서 고민을 털어놓을 상대가 없어졌다는 것.고려대 안암병원 정신과 이민수(李敏秀) 교수는 ꡒ최근 50대 임원을 중심으로 ꡐ외상(外傷) 후 스트레스 장애(PTSD)ꡑ나 강박 장애를 앓는 사람이 많다ꡓ고 지적했다. PTSD는 외환위기 등 대형 사건이나 사고, 전쟁 해고 죽음 등 예기치 못한 불상사를 겪거나 목격해서 생기는 정신 질환. 이 교수는 ꡒ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임원 중에도 상시적 구조조정에 대한 압박감 때문에 ꡐ안 해도 될ꡑ 해고 걱정에 시달리는 사람이 많다ꡓ며 ꡒ이는 외환위기가 남긴 일종의 ꡐ마음의 상처ꡑꡓ라고 말했다. 현대사회를 살고 있는 현대인은 과거에 경험하지 못했던 빠른 변화로 인하여 불안과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있으며 내일을 예측할 수 없는 불확실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사회건 스트레스는 존재하며 불안과 불확실성은 상대적으로 비교될 수 없는 성격이지만 정보화사회로 진입하면서 모든 부분의 발달이 첨단화됨에 따라 종래 인간이 적응했던 방법과 속도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많은 스트레스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회에서 스트레스 문제는 사회문제로서 주목을 받을 뿐만 즉각적인 복원작용을 불러일으키는 과정을 의미한다.사례 Stress... 직장인 95%가 시달려 심하면 정신질환심장병 회사원 김모(35)씨는 일요일 저녁만 되면 가슴이 답답하다. 월요일부터 다시 시작해야할 회사 일에 대한 중압감이 그를 짓누르는 것이다. 상사로부터 미숙한 업무처리 때문에 늘 지적당하고, 부하 직원들은 그런 자신을 무시하는 것 같아 당장 사표를 던져버리고 싶지만 그럴 수도 없는 형편이다. 만성 위염에 심장 두근거림과 울화증까지 그의 직장 스트레스는 나날이 심해지고 있다. 1997년 이후 4년간 직업병으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2,945명. 이 가운데 53%인 1,547명이 뇌혈관 및 심장질환으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의 경영환경이 치열해지고 근로자에게 요구하는 업무의 전문성과 강도가 높아지면서 직장인들의 스트레스 지수도 함께 높아지고 있다. 최근 연세대 원주의대 예방의학교실 장세진 교수가 245개 사업체 6,977명의 직장인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사람은 5%에 불과했고 잠재적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73%,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는 사람은 22%로 나타났다. 행동 유형별로는 공격적이고 성취욕구가 강한 사람과 직위가 낮은 사원급이나 교대 근무자들이 스트레스를 더 많이 받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직무요구도가 높을수록, 직무상 재량권이나 직무자율성이 낮을수록, 그리고 동료나 상사의 지지가 낮을수록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레스도 질병 스트레스로 인한 증상은 사람마다 다양하다. 신체적 증상으로는 입과 목이 마르고 떨리며, 심장이 두근거린다. 설사와 변비, 빈뇨 증상이 나타나거나 두통, 불면증, 피로감, 목과 어깨 결림, 요통, 흉통, 소화불량 등이 생기기도 한다. 정신적으로는 불안, 우울, 급격한 기분변화, 신경과민, 자존심 저하, 분노, 좌절감, 적대감, 죄책감, 집중력 저하, 건망증 등의 증상이 나타난다. 스트레스로 인해 협심증, 고혈압, 위궤양, 천식 등 만성질환이 악화되기도 한다.이처럼 오늘날 직장인감당하기 어려울 때 직무스트레스가 발생하는 것이다. 이러한 직무스트레스는 개인 및 조직에게 심리적, 물리적, 행동적 증후를 초래하여 직무수행에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직무 스트레스인자는 '스트레스원'이라고도 하는데, 크게 환경을 포함한 조직외적인 것과 조직 내적인 것으로 분류할 수 있으며 조직외적인 데서 점차 조직 내적인 데로 그 영향력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스트레스인자는 상호 관련을 맺고 있다. 따라서 그 자체만으로는 그 영향력이 매우 적을지라도 다른 스트레스인자와 함께 작용하게 될 경우 이로 인한 스트레스는 가공할 파괴력을 지니며, 스트레스인자의 과다(寡多)나 강약(强弱)이 스트레스의 정도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는 데 유의할 필요가 있다. 오히려 스트레스인자에 대한 과소자극(過少刺戟)이나 과다자극(過多刺戟)의 경우 과도한 스트레스를 보이는 데 비해 자극이 중간정도일 경우 매우 낮은 수준의 스트레스를 보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조직외적인 스트레스인자와 조직 내적인 스트레스인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조직외적 스트레스인자 논자들의 연구결과를 정리하면, 조직외적 스트레스인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연구논자별조직외적 스트레스 인자Hughes et als.(1993) Robbins(1993) Luthans(1992) Dunham(1984)∘노조의 요구와 제약 ∘시장조건 ∘노동법 ∘사회적․정치적 변화 ∘위기 ∘가정의 요구 ∘경제적 불확실성 ∘정치적 불안정 ∘기술적 불확실성 ∘경제문제 ∘사회적․기술적 변화 ∘지역적 조건 ∘경제적․재무적 조건 ∘이사 ∘종족과 사회적 신분 ∘가족 ∘가족의 기대 ∘친구의 기대 ∘경제적인 것 ∘개인적인 것조직 내적 스트레스인자 조직 내적 스트레스인자도 논자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되고 있는데, 다음과 같이 조직수준과 집단수준, 개인수준의 스트레스인자로 구분하는 것이 논자들 사이에서는 보편적인 흐름을 이루고 있다. 여기서 이들 세 가지 수준의 스트레스인자를 차례로 살펴보기로 한다. ⑴ 조직수준의 무량 ⑥ 조직이 너무 공식적이고 경직되어 있어 비인간적이다. ⑦ 직원들의 이직률이 높다. ⑵ 집단수준의 스트레스(예) ① 집단의 성장에 따라가지 못한다. ② 집단의 일원으로서 친숙감이 없다. ③ 집단으로부터 개인적인 목표를 지지 받지 못하고 있다. ④ 속해 있는 동료집단이 조직 내에서 영향력이 없다. ⑤ 속해 있는 동료집단이 산만하고 냉담하다. ⑥ 동료집단에서 사회적 만족감을 얻지 못한다.⑶ 직무수준의 스트레스(예) ① 불필요한 일을 많이 하고 있다. ② 직무목표가 불분명한 것 같다. ③ 일을 집에까지 갖고 가야할 때가 많다. ④ 직무가 지루한 감을 준다. ⑤ 사람에 대한 관리책임을 지고 있다. ⑥ 직무가 정해진 시간 내에 끝내기 어렵다. ⑦ 근무장소가 너무나 붐빈다. ⑧ 승진기회가 충분하지 못하다. ⑨ 직무활동에도 불구하고 늘 한가한 편이다. ⑩ 직무가 판에 박은 일이 되었다. ⑪ 동료들의 생명이나 안전, 경력에 영향을 주는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⑫ 충분한 경력에도 불구하고 승진이 좌절되고 있다. ⑬ 둘 이상의 동료로부터 상반된 요청을 받고 있다. ⑭ 나에 대한 직무상의 역할기대를 확실히 모르고 있다.⑷ 근무환경의 스트레스(예) ① 대인간 갈등 ⑪ 신속한 검사결과의 요청 ② 불편한 간섭 ⑫ 인식부족 ③ 경제적 보상의 결여 ⑬ 직무나 역할모호성 ④ 근무일정과 작업량의 문제 ⑭ 의사소통의 결여 ⑤ 승진기회의 결여 ⑮ 전염병이나 위험상황에 대한노출우려 ⑥ 장비의 고장 ⑯ 직장 상사나 동료의 냉랭함 ⑦ 검사의 정확성 결여 ⑰ 직장 상사의 지원결여 ⑧ 감독의 질적 저하 ⑱ 실수에 대한 걱정 ⑨ 전문지식의 결여 ⑲ 물리적 작업환경의 열악 ⑩ 편애 ⑳ 실수나 실패에 대한 부당한 비난3. 스트레스의 조정변인 일련의 스트레스인자는 사람에 따라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키고 어느 누구도 스트레스를 같은 방법으로 경험하지 않으며 똑같은 반응을 나타내지 않는다. 동일한 스트레스인자에 대해 잘 적응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참거나 회피하는 사람도 있다. 이러한 개인차는 스트레스인
[흥선대원군의 쇄국 외교]19세기 후반기는 산업혁명을 거친 서구의 제국주의 열강들이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의 확보를 위해 본격적으로 동양에 진출하는 시기였다. 이에 잦아진 이양선(異樣船)의 출몰과 양이(洋夷)에 대한 위기 의식으로 흥선대원군 치하의 조선 정부는 중국 및 일본과 전통적인 사대교린 정책(事大交隣政策)을 고수하는 한편, 서양에 대해서는 쇄국양이 정책을 취하였다.서양과의 통상·외교를 거부하는 쇄국정책은 서양의 무력 침략은 물론 유교 질서를 부정하는 서학(西學: 주로 천주교)의 침투를 막으려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대원군은 1860년대에 조선과 접경하게 된 러시아가 통상을 요구해왔을 때, 천주교 신자 남종삼(南鍾三) 등의 건의를 받아들여 영국 및 프랑스의 세력을 동원, 러시아의 남하를 막으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의 정책을 시도한 일이 있었다.그러나 그는 이 계획을 포기하고 그 대신 정부 내의 보수주의자와 유학자들의 위정척사론을 받아들여, 러시아를 비롯한 서구 열강에 대해 문호를 폐쇄하고 국내의 천주교도들을 탄합하는 정책을 택하였다. 이러한 쇄국 및 천주교 박해정책은 ‘은둔국 조선’에 대한 프랑스 및 미국이 무력 행사를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1866년의 병인양요와 1871년의 신미양요로 프랑스와 미국 함대의 도전을 받았으나, 이를 성공적으로 격퇴시켰다.이후 대원군은 양이쇄국 정책에 박차를 가해, 변방 수비를 강화하고 척화비(斥和碑)를 세우는 등 강한 쇄국 의지를 내외에 보여주었다. 한편, 1868년 메이지유신 후, 근대적 외교·통상 관계의 수립을 요망해온 일본의 협상 요구도 서계문제(書契問題)를 구실로 거부하였다. 그러나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1873년 말에 고종이 친정(親政)을 개시하면서 지양되었다.조선 후기에 개화파가 발전시킨 부르주아적 개혁사상입니다.우리 나라의 문호를 열어서 발전을 꾀하는거죠. 서양의 문호를 받아들이고, 또 그것을 통해 나라를 발전시키려는 성향이 강했습니다. 개화 사상은 온건과 급진파로 나눠집니다.온건은 청의 양무론을 기초로 하여 점진적으로 받아들이자는 것이고,급진은 민씨 정권을 타도함으로써 권력을 얻어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그렇다면 명성왕후는 온건파였겠죠?장점은 서양 문물을 통한 나라의 발전을 꾀했다는 점이고,단점은 너무 급히 서둘다 보니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두 의견 다 나라를 발전시키고, 혼란의 상태를 막고자하는 사상이었으나,결국은 더 큰 문제를 일으켰다고 할 수 있습니다.두 사람의 싸움으로 조선은 파국으로 치닫았고,많은 사람이 싸우게 되었습니다.이 두 의견을 절충적으로 해결했다면,일본의 손아귀에서 몇 십년 동안 고통을 당할 필요도 없었겠죠.위정척사사상은 정학과 정도를 지키고, 사학(邪學)과 이단을 물리치는 사상으로 그 시대 개화 정책과 외세의 침략에 대한 반발이 유생층에 의해 일어난 사상입니다. 성리학을 정통 사상으로 신봉하였던 조선 사회에서, 위정이란 정학인 성리학을 수호하는 것이고, 척사란 성리학 이외의 모든 종교와 사상을 배격하는 것이었죠. 조선 후기에 이르러 천주교가 전래되자, 이질적인 서구종교, 서양 문화가 배격의 주요 대상이 되었습니다. 초기의 위정척사운동은 이항로, 기정진 등에 의해 주도되었고, 특히 이항로의 문인들인 유인석, 최익현 등에 의해 계승되었습니다. 척사운동은 1860년대에는 서양의 통상요구에 대응하여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 반대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어서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하여 척화 주전론으로 나타나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를 강력히 뒷받침하였습니다. 1870년대에는 유생들이 문호개방을 전후해서 왜양일체론, 개항불가론을 들어 개항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880년대에는 영남 만인소 등 개화 반대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척사운동은 1890년 이후로는 일본의 침략에 저항하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되었습니다.위정척사사상의 성격은 정치, 경제에 있어서 반침략, 반외세 운동을 보여주었지만 당시 정부의 개화 정책의 추진에 장애물이 되어 근대 사회로의 발전에 장애가 되었습니다.다음으로 개화 사상에 대해 설명하겠습니다. 개화 사상은 안으로는 실학, 특히 북학파의 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하고, 밖으로는 청에서 진행되고 있던 양무 운동과 일본에서 제기되고 있던 문명 개화론의 영향을 받은 사상이었습니다.주요 인물들로는 김기수, 김홍집, 김윤식, 어윤중, 박영효, 김옥균 등이 있습니다.개화사상의 성격은 민족적, 실용적, 실증적, 근대 지향적 성격에 개화파의 두가지 흐름에 따라 온건이냐 급진이냐가 결정됩니다.온건개화파김홍집, 어윤중, 김윤식 등 온건개화파는 청나라 양무운동을 본받아 전통적인 유교사상을 지키며 서양 과학과 기술을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조선이 아직 제반 여건이 성숙되지 않았다고 보아 천천히 개화정책을 추진하려 하였다. 급격한 개화추진으로 인한 보수세력의 반발을 염려하였던 것이다. 외교 정책면에서 전통적인 우호관계를 맺고 있던 청과의 관계를 중시하였다.이들은 조선은 이미 유교에 의해 교화되어 개화된 나라이므로 동양의 유교 도덕과 같은 정신은 유지하고 서양의 기술문명을 수용함으로써 부국 강병을 이룰 수 있다는 동도서기론에 기반하여 개화 정책을 추진하였다.급진개화파김옥균, 박영효, 서광범 등 급진개화파는 일본 메이지 유신을 본보기로 삼아 서양 과학과 기술 뿐만 아니라 사상과 제도까지 적극 받아들이자고 주장하였다. 이들은 너무 신중하게 개화를 추진하다가는 외세의 간섭이 더 심해져서 개화 노력이 수포로 돌아갈지도 모른다고 판단하였다. 급진개화파는 문명개화론을 기반으로 조선이 야만의 상태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개화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타당한 점서양 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수용할 필요성을 강조하였다. 역사 발전에 합치되는 민족 운동의 방향을 제시하였다.-한계점갑신정변과 같은 급격한 개화 추진으로 외세의 간섭을 강화하고 보수세력의 장기 집권이 가능하게 하였다. 지나친 외세 의존적 성격으로 열강의 조선 침략을 초래하였다.위정척사파위정척사란 '바른 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물리치자'는 뜻이다. '바른 것'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사회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서양 문물을 말한다. 이들은 서구문물의 유입은 전총 성리학 체계를 무너뜨리고 농촌경제를 파멸시킴으로써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위정척사운동은 문호 개방이후 개화 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 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1860년대에는 통상반대운동을 전개하고 서양의 무력침략에 대항해서는 척화주전론을 주장하여 대원군의 통상수교거부정책을 뒷받침해 주었고, 1870년대 문호개방 이후에는 왜양일체론(일본과 오랑캐는 같다)과 개항불가론을 들어 개항을 반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