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을 향해 금리를 맞춰라2003 한국은행 통화정책 경시대회경제내외적 불안요인경제내외적 요인장기시장 금리상승주식시장 회복조짐세계경제 회복조짐경기부양 시책효과경기 회복 우세경상수지 흑자전환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하여...금리 조정경기 부양지속 성장금리 조정안정 + 성장한국 N커브냐 M커브냐10,00020,00091년 96년 98년 2003년 2010년IMF위기N커브M커브*1인당 GDP, 단위 = 달러콜금리 목표 조정 과정최근 경제현황분석물가 및 경기 전망콜금리 목표조정경제현황분석실물경제동향금융시장동향해외경제동향경제현황파악 및 전망종합적인 분석실물경제동향경 기GDP 성장률민간 소비제조업 생산설비 투자[ 자료 : 한국은행, 전년동기대비, 명목금액기준, % ]7.07.65.49.45.61/42/43/44/41/42/42.33.87.57.88.21.61/42/43/44/41/42/46.26.65.86.83.71/42/43/44/41/42/48.97.96.24.30.91/42/43/44/41/42/4실물경제동향경 기한국은행 제조업 업황전망 BSI통계청 경기전망 CSI848975847993897991911.0 0.5 0 -0.511 12 2003 .01 02 03 04 05 06경기선행지수경기동행지수[ 자료 1 : 한국은행, 기준치=100 ] [자료 2 : 통계청, 전월대비 ]70651월2월3월4월5월6월7월861월2월3월4월5월6월7월84실물경제동향물 가소비자 물가근원인플레이션아파트매매가격112.07.41.01.3[ 자료 1 : 통계청, 전년동기대비, % ] [ 자료 2 : 국민은행, 전기말월대비, % ]2.93.02.93.13.21/42/43/44/41/42/43.32.52.72.63.34.11/42/43/44/41/42/43.34.71/42/43/44/41/42/4실물경제동.향대외거래수 입 [통관기준]*************48수 출 [통관기준]상품수지-4.2-11.9-3.97.95.0-0.612.5경상수지*************351217[ 자료 : 한국은행, 억달러 ]1571551월2월3월4월5월6월7월1341491월2월3월4월5월6월7월181월3월4월5월-1.16월2월281월2월3월4월5월6월금융시장동향종합주가지수코스닥지수50 45 40 3502 03 04 05 06 07700 650 600 55002 03 04 05 06 07[ 자료 1 : 한국은행, 원/달러환율 ] [ 자료 2 : 한국증권전산 ]주식시장환 율대미달러환율1,1701,1861,2521,2131,2061,1931,1801,1791월말2월말3월말4월말5월말6월말7월말8월현재금융시장동향금 리CD유통수익률4.284.294.234.23콜금리회사채수익률 (3년물)국채수익률 (3년물)4.054.704.544.764.624.39[ 자료 : 한국은행, 연% ]4.003.811월2월3월4월5월6월7월4.284.151월2월3월4월5월6월7월4.964.734.784.604.274.074.371월2월3월4월5월6월7월5.485.255.445.395.265.285.651월2월3월4월5월6월7월해외경제동향주요국 주가현황[ 자료 : 매일경제 ]95001월초 2월초 3월초 4월초 5월초 6월초 7월초 8월초90**************************12001000다우지수나스닥지수일본 주가 : 경기회복 기대 확산, 외국인 주식매수 급증 등의 영향으로 상승 유로 주가 : 미국 주가에 동조하면서 상승해외경제동향주요국 경제미 국유로 지역일 본7월 이후 발표된 각종 경제관련 지표들이 예상치를 상회하여 하반기 경기회복의 본격화 예상미국 경기회복에 대한 기대 등을 반영 경제주체들의 심리가 다소 호전되는 기미는 있으나 여전히 미비수출과 기업업황의 호조에 힘입은 설비투자와 주가 상승 등에 의한 소비심리 개선 등으로 회복세 조짐중국 및 동남아SARS 여파에도 불구하고 상반기에 비교적 높은 성장을 보인데 이어 하반기에도 고속성장 지속 전망물가 및 경기전망물가전망국내경기부진 3%대 초반 특소세 인하 안정세 소비위축 유지5.23 주택안정 대책 이후 상승세 둔화국제유가상승 원화강세물가 3%대 안정세 유지소비자물가 및 근원인플레이션부동산가격해외 여건물가 및 경기전망경기전망경기 회복 전망 우세노사관계 갈등 심화 북한 핵문제 기업 및 소비자 심리 저조경기회복 제약요인경기부양정책효과의 가시화 해외경제여건 개선 주식시장 회복 조짐 장기금리 상승 경상수지 흑자 전환경기회복 개선요인콜금리 목표 조정안장기 시장 금리 상승경기 회복 기대 확산금융시장 유동성 원활세계 경제 회복 가시화콜금리 현 수준 유지경기 부양 효과 관망조정 배경콜금리 목표 조정안조정 요인저금리 상태경기부양정책 실시소비유연화 붕괴서비스수지 적자 상태자금시장의 구조문제콜금리 현수준 유지 3.75%콜금리 목표 조정안콜금리 현 수준 유지 3.75%생산적인 투자유발 소비심리 개선고용사정 개선하반기 경기 회복 가속화구조조정 지속기업투자환경 조성노사관계 안정금융리스크 관리{nameOfApplication=Show}
#보고서韓國經濟의 當面課題와發展方向에 관한 硏究- 目 次 -Ⅰ. 序 論제 1 절 硏究의 背景 및 目的제 2 절 硏究의 體系 및 方法Ⅱ. 韓國經濟 패러다임의 變化제 1 절 技術의 革新過程제 2 절 新經濟의 變化樣相Ⅲ. 韓國經濟의 當面課題제 1 절 高費用 低效率의 構造제 2 절 韓國企業 經營上의 問題제 3 절 制度意識의 前 近代性 克服제 4 절 南北韓 經濟協力 强化제 5 절 市場爲主의 經濟政策 止揚Ⅳ. 韓國經濟의 發展方向제 1 절 올바른 市場經濟 秩序의 確立제 2 절 國內外 環境規制에 대한 對應제 3 절 知識情報産業을 위한 推進力제 4 절 産業의 均衡的 發展과 競爭力 提高제 5 절 人間中心 經濟의 志向Ⅴ. 結 論제 1 절 硏究의 要約 및 示唆點제 2 절 硏究의 限界參 考 文 獻Ⅰ. 序 論제 1 절 硏究의 背景 및 目的과연 우리 경제에 미래는 있는가? 10년 앞을 내다볼 때 외환위기 이전에 논의했던 정보화 사회로의 전환이 의미가 있는지 없는지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OECD가 Growth Project를 통해서 회원국에 대한 지난 10년 동안의 경제성장률 격차를 연구해서 발표한 보고서가 있다. 동 보고서에 따르면 성장률 격차의 첫째 원인은 IT의 확산속도의 차이에 달린 것으로 나타났다. 외환위기나 전 세계적인 불황은 단기나 중기에 해결될 문제지만, 10년 앞을 내다보면 한 나라의 장기 성장잠재력은 정보화기술의 확산속도에 달린 것이다.OECD에서 수행한 회원국의 정보화 잠재력에 대한 평가에서 스웨덴과 미국 다음으로 우리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우리의 정보화 우위를 살려 나가는 것이 향후 우리경제의 성장잠재력을 좌우하는 결정적인 요소가 될 것이다. 우리는 지난 30년간 산업화시대에 조선, 전자, 자동차, 반도체 등을 발전시키는 과정에 일본을 모방해 왔으나, 정보통신산업에 관해서는 일본의 모방이 아니고 일본과는 다르며 오히려 일본보다 잘한다는 점을 일본 언론이나 학자들까지 인정하고 있다.정보화 기술의 확산속도는 통신인프라나 PC 보급율에 의해서만 좌우된다고 생각해서는 안다.제 2 절 新經濟의 變化樣相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행되는 21세기의 변화를 다시 요약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산업시대에서 정보화사회로 변화한다. 둘쩨 지식과 그 힘으로 생산 분배가 이루어지는 지식기반의 경제로 전환하며 지식 노동자가 사회의 가치와 규범을 정하는 중심이 되는 지력사회로 변모한다. 셋째, 범세계적 기준이 세계를 지배하게 되고 정부의 개입주의는 약화되는 반면 자유주의는 강화된다. 넷째, 각종 조직도 피라미드형 조직에서 네트워크 조직으로 변화해간다.정보통신혁명시대의 경제는 과거 산업시대의 경제와 다른 새로운 패러다임을 형성한다. 몇 가지 눈에 띄는 변화가 관찰된다.첫째, 산업시대의 중심은 제조업이었으나 신경제의 중심은 정보통신 산업과 관련 서비스업이다. 산업혁명 이전의 농경시대에 비해 산업시대에는 생산도구를 생산하는 자본재 산업과 기계와 공장을 활용하여 소비재를 생산하는 제조업 생산이 중심이 되던 사회이고 경제의 발전이란 이러한 부분 의 자본 스톡을 증가시켜 나가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보통신 사회의 중심 산업은 제조업에서 정보통신 산업과 관련서비스 업이 크게 발전하여 전통적인 제조업의 발전 속도를 크게 추월하게 되었다.이를 담당하는 인적 자원의 축적과 활동이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둘째, 산업시대에는 자원의 가공과 제조가 중심이 되는 산업경제였으나 정보통신 시대에는 정보, 디자인, 아이디어등 지식이 기반이 되는 경제로 전환된다. 지식기반 경제는 정보통신 기술을 활용하여 미디어, 통신, 이동전화, 오락, 물류, 광고, 방송, 금웅,등 지식 관련 서비스가 크게 발전한다. 이들 산업은 미국의 경우 25% 정도의 비중을 차지한다.셋째, 경제운영 면에서 보면 과거 산업시대에는 계획과 통제 그리고 수직적 위계조직이 중심이었으나 정보통신 시대에는 목표 지향성 팀조직과 네트워크로 연결된 수평적 조직형태가 특징이며 통찰력과 비젼이 중시된다.넷째, 정보통신 시대에는 네트워크의 효과가 전세계로 확장되기 떄문에 생산, 판매, 고객과의 관계등, 모든 면에서 경제의 범과다투자 등도 생산의 비효율을 초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조업의 생산효율울 높여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사항에 대해 기업과 정부가 다같이 정책적 노력을 집중시켜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첫째, 고부가가치 창출을 위한 시장수요 지향적인 기술개발을 강화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 정부, 연구기관간의 긴밀한 협조를 통하여 높은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핵심기술 개발전략을 수립하는 것이 시급하다. 특히 단독기술개발에 따르는 자금, 인력, 기술력 등의 제약과 중복개발에 따른 비효율을 극복하고 기술개발의 시너지 효과를 극대화 하기 위해 기업간 연구기관간 공동연구 활성화를 도모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이 때 세계적인 연구개발 투자 동향 등에 관한 기업의 정보 수집 및 활용을 위해 정부와 연구기관 등의 지원체제가 구축되어야 함은 물론이다.둘째, 기술, 생산, 마케팅 기능을 통합한 전략적인 생산경영 체제를 구축하여야 한다. 급변하는 기업환경 변화에 신축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는 각종 경영기능의 유기적 통합이 긴요하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제품개발, 원자재 확보 및 판매유통에 소요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하고 생산시스템을 유연화하도록 유도해야 한다.마지막으로 생산설비의 효율을 제고하기 위한 투자조정과 합리화 투자가 확대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경쟁력을 상실한 제품의 생산설비와 유휴설비는 과감히 해외 이전하고 노후설비의 교체 및 자동화 등 합리화 투자를 늘리는 것이 노동 및 자본의 생산성을 제고하는 첩경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3.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의 대응방안이상과 같이 우리나라의 고비용 저효율 경제구조에 대해 살펴보았다. 우리나라의 고도성장 하에서 함께 생성된 고비용 저효율의 경제구조는 이제 깨어져야 할 것이다. 이제 과감하게 구조적인 문제점을 인식하고 근시안적인 단발적인 대응책이나 전술이 아닌, 21C 세계경제를 주도할 한국경제로서의 바람직한 경제구조를 재창출해나가야 할 것이다.먼저, 정부는 그간 정부주도하에 이루어 놓은 많은 경제부산물과 규제 덩어리를 은 국내. 외의 경제 환경의 변화를 모르고 자기일과 생산만 열심히 한다. 특히 세계적 경제환경이 어떻게 돌아가고 그에 대응하여 우리기업이 나의 업무가 어떻게 대등해야 하는가를 인식하고 있는 관리자가 그리고 근로자가 없다. 그런 것은 경영진이나 정부정책가나 하는 일로 안다. 교육훈련의 부족은 바로 이런 점에서 나타나며 자질개발은 물론 능력향상이 뒤떨어지는 조직구성원이 많다.여섯째, 우리나라 기업들은 전문적 인재관리를 못하고 있다. 특히 종업원의 경영참여기회의 결여로 좋은 아이디어가 상품화 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기업의 경쟁력은 이재라는 것을 아는 경영진은 인사관리 담당자뿐이다. 인사관리 담당자만 인재를 선발하고 육성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경영자들이 인재를 볼 줄 알아야 한다. 인재들을 존중할 줄 알아야 한다.일곱째, 기업경쟁력의 지식이 낙후하다. 우리기업의 경영진들, 관리자들, 근로자들 중에서 기업의 경쟁력이 무엇인지 아는 구성원이 거의 없다. 알고 있다 하더라도 경영기법이 싫고 경비가 들어가니까 싫어한다. 교육훈련을 통한 기업경쟁력을 깨우치도록 하자. 이것이 경영의기본문제이기 때문이다.여덟째, 우리나라 기업의 기본적 특질의 하나가 경영의 패쇄적 비공개임을 모두 안다. 주식분산 내지 주식대중화에 의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충분하지 못하거나 인색하여 기업은 전 이해집단의 이익을 위하여 존재한다는 기업의 공공성, 공익성, 사회성이 결여되고 있는 양샹을 빚어내고 있따. 이로 인하여 자율적인 전문 경영자에 의한 경영권의 확보와 행사가 이루지지 못하고 있다.아홉째, 우리나라 기업들은 이제 대부분 기업사를 쓸 정도의 기업사나 경영사를 정리할 시기가 왔다. 그러나 많은 후계자들은 선친이나 창업자에 대한 창업이념이나 경영이념, 경영철학, 경영사상등을 숨기려 하고 있으며 밖으로 세계로 훌륭한 경영자의 인물들을 격하시키고 있다. 즉 창업의 효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창업시대의 경영이념들이 지금의 경영자들에게 가치없는 보잘 것 없는 것들로 취급되어 버리는 사례가 비일비재한다. 기 개방적책과 시장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위한 대내적 개혁정책이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화 추세는 1980년대 후반부터 시작된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이 1993년 WTO 체제를 출범시키면서 본격화되었고 그 이후 정보화의 물결에 따라 가속화되고 있다. 이제 각국간 상품과 서비스 교역은 물론 투자활동에 있어서 자유화가 원칙이 되었고 특히 금육거래는 전 지구촌이 하나의 금융시장으로 통합되는 금융의 지구촌화현상이 가속되고 있다.교역에 대한 예외적 제한 조치라 할지라도 정부의 직접규제나 보호는 거의 혀용되지 않고 관세화를 통하여 자극산업에 대한 과도한 보보장벽을 낮춰가야만 한다.우리나라는 WTO 체제 출범전에 이미 공산품에 대한 교역 및 투자개방조치가 거의 선진국 수준에 도달하였고 WTO 체제 출범이후에 쌀을 제외한 농산물의 수입개방조치가 이루어졌으며 금융산업을 비롯한 서비스분야의 투자자유화조치가 시작됬다.외국인 투자 자유화는98년 외환위기 이후에 더욱 급속히 진전되어 거의 OECD 가입국 수준에 이르게 되었다.외국인 투자에 대한 자유화조치에 따라 95% 이상의 업종이 직접투자 자유화업종이 되었고 증권시장에 유입된 외국자본규모는 상장주식가액의 25%를 넘게 되었다. 이제 외국기업들은 우리기업과 자유로이 합병할 수 있으며 적대적 M&A 도 가능하게 되었다.인류 역사를 보면 경제적 번영을 추구하여 활발한 대외교역과 문화교류를 추구한 민족들이었다.대외적인 개방정책과 대내적으로 시장경제를 구축하려는 개혁정책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으로서 두 가지 모두 민간경제주체들의 자율경쟁과 책임을 높이고 정부의 개입과 규제를 낮추는 것이 관건이다.정부가 시장원리를 존중하고 대외개방을 확대하는 일은 정치적으로 위험이 따르거나 매우 인기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를 추진하는 정권담당세력들에게는 엄청난 인내와 고통이 뒤따른다. IMF 외완위기 이후 정원을 담당한 김대중 대통령의 개방과 개혁정책이 좋은 예가된다. 김대통령은 한국경제의글로벌화를 위하여 과감한 외국인 투자개방정책을 추진하였다. 투자자유화의 속도와 있다.
#보고서中國 社會主義商品市場經濟에 관한 硏究- 中國의 經濟시스템 變化를 中心으로 -- 目 次 -Ⅰ. 序 論제 1 절 硏究의 背景 및 目的제 2 절 硏究의 體系 및 方法Ⅱ. 中國 經濟體制 改革의 背景과 理論제 1 절 經濟體制 改革의 理念的 背景제 2 절 經濟體制改革 理論의 變遷Ⅲ. 鄧小平의 改革·開放政策제 1 절 鄧小平 以前의 經濟政策과 理念제 2 절 鄧小平 體制의 成立과 實用主義 理念제 3 절 鄧小平의 改革·開放政策의 實際제 4 절 鄧小平의 改革·開放政策의 問題點Ⅳ. 中國式 社會主義 商品市場經濟제 1 절 社會主義 商品市場經濟의 形成 및 特徵제 2 절 社會主義 商品市場經濟의 成果分析제 3 절 社會主義 商品市場經濟의 問題點Ⅴ. 中國 經濟體制의 評價와 未來제 1 절 中國 經濟體制의 評價제 2 절 中國 經濟體制의 未來Ⅵ. 結 論제 1 절 硏究의 要約 및 示唆點제 2 절 硏究의 限界參 考 文 獻Ⅰ. 序 論제 1 절 硏究의 背景 및 目的20세기는 구미가 세계의 경제 문화를 주도했던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세기의 전환기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경제 구도는 커다란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유럽 공동체가 주도하는 대륙의 경제발전 속도는 20세기말의 불황으로부터 계속되어 21세기에 이르러서는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발전 속도보다 늦어질 것이라는 전망이 요즘 대두되고 있다.미국은 한때 20세기 하반기 세계 경제의 최강국이라는 역사를 만들었고, 세기의 전환에 이르러 현대 미국의 경제 중심은 서태평양 연안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다. 미국 경제의 새 구도로서 태평양 경제가 일어서고 있는 것이다.20세기에 경제 강국으로 부상한 일본은 최첨단 산업 주도하에 21세기를 향해 고속 성장을 계속하였고, 아시아의 네 마리 용으로 불리는 NIES(Newly Industrializing Economies)는 지난 30여년의 기반을 통해 경제 성장에 그 속도를 더하였다.이와 더불어 화교 문화권의 아세안 국가들도 NIES의 뒤를 이어 사회 간접 자본의 확충과 외국 기업의 유지를 통해 경제 발전을 이룰려고 하고정의 인식 기초를 통해야만 정확하게 중국의 국정을 파악할 수 있다고 보고 있다.상술한 국정인식의 기초하에 현재 처해 있는 중국의 국정을 구체적으로 귀납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첫째, 중국은 인국가 방대한 국가이다.둘째, 중국은 자원이 부족하며 환경의 기초가 나약한 국가이다.셋째, 중국은 대륙형의 국가로서 자연지리적 배경에서 볼 때 지리적 위치가 결코 우월하지 않을 뿐 아니라 광활한 국토로 인해 자연환경과 기후조건이 복잡다양하여 생태환경이 선천적으로 부족한 국가이다.넷째, 중국은 교육과 과학기술이 낙후되어 있는 국가이다.다섯째, 중국은 개발도상국으로 발전수준이 낙후되어 있는 국가이다.여섯째, 중국은 경제발전상태가 상당히 불균형되어 있는 국가이다.일곱째, 중국은 제도적으로 상당히 미비되어 있는 국가이다.이러한 중국의 국정을 토대로 조자양이 중공 13대에서 행한 공작보고 내용을 분석하면 중국의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1) '사회주의 초급단계론'의 기본적 의미중국이 현단계를 사회주의 초급단계로 확정하고 있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첫째는 중국은 이미 사회주의 사회이기 때문에 사회주의를 반드시 견지하며 절대로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며, 둘째는 중국의 사회주의 사회는 아직 초급단계에 처해 있기 때문에 반드시 실제적 입장에서 출발해야지 이러한 단계를 초월할 수 없다는 것이다. 특히 초급단계는 결코 모든 국가가 사회주의 진입에 있어서 반드시 거치는 초기단계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생산력 낙후와 상품경제의 미발달 조건하에서 사회주의 추진과정 중에 필연적으로 거치는 특수 단계를 지칭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단계는 사회주의 경제 기초가 아직 성숙되지 않은 과도단계가 아닐 뿐만 아니라 이미 사회주의 현대화의 단계가 실현된 단계와도 다르다는 것을 지칭하는 것이다.(2) 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간사회주의 초급단계의 기간은 생산요소를 공유제로 한 사회주의 개조가 기본적으로 완성된 시기인 1950년부터 사회주의 현대화업은 발전되었으나 농업은 낙후되었고, 따라서 도시와 농촌, 노동자와 농민간의 소득격차가 확대되었다. 이에 대한 대응조치로 모택동을 중심으로 한 좌파는 반혁명의 위험을 제거하고 사회주의 운동을 실시함으로써 인민 내부의 모순을 처리하기 위한 정책전환을 시작하였다. 즉, 정치이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중국사회내부의 모순을 제거하는 데 중점을 두게 되었고, 그 결과 1957년 말부터의 대약진 운동은 향후 3년간 중국의 정치, 경제를 지배하게 되었다.3. 대약진 운동(1958 - 1930)대외적으로는 소련에서의 1956년 후르시초프에 의한 스탈린 격하운동, 중소분쟁에 의한 소련의 원조중단, 폴란드 및 헝가리에서 발생한 일련의 자유화 운동에 의한 불안 등으로 인해 모택동은 자신의 권위 하락과 사회주의 건설의 위기의식을 느끼게 되었다. 이에 따라 모택동은 혼란의 소지인 관료주의를 뿌리뽑고 계급투쟁을 전개해야 되겠다고 생각했으며 경제적으로는 소련식 발전모형이 중국경제의 현저한 구조적 성격, 저발전의 정도, 인구문제 등 때문에 중국사회에 적용할 수 없음을 비판하고, 소련식 발전모형과는 다른 새로운 사회주의 발전모형을 창출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1958년에 시작된 제2차 5개년 계획은 추진된 지 불과 1년도 안되어 1958년 5월 대약진운동으로 대체되었다. 대약진운동은 중국특유의 경제정책을 추진하려는 것으로서 농촌의 잉여노동력을 자본이 부족한 공업분야에 투입시켜 공업생산량을 제고시키는 한편 공업기술의 보급을 확산시키려는 운동이었다. 이러한 대약진운동에 따라 농업부문에 있어선 752,000여 개에 달했던 집단농장이 26,500여 개의 인민공사로 재편성 되었고 자유지와 자유시장 거래가 중단되었다. 따라서, 농민의 생산의욕은 감퇴되어 곡물생산량은 이 기간동안 크게 떨어졌다.결국 현실을 무시한 과다한 목표설정, 기존 물적자원의 범위를 넘어서는 무리한 계획추진으로 각종 생산량을 감소시키고, 기존 생산시설을 파손시켜 국가경제발전을 크게 위축시켰다. 따라서 중국정부는 대약진운동을 포기하고 이 회의들의 다른 구성원보다 큰 영향역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당주석제를 없애고 당서기를 부활한 것은 의사결정과 지도면에서의 권력분산과 집단지도체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둘째로, 당·정 기능의 분리이다. 1967년 문화혁명때 설치되어 1979년까지 당의 기능과 지방정부의 기능을 겸해온 혁명위원회를 폐지하고 지방인민정부와 인민대회상무위원회가 부활되었다. 이러한 개편은 1979년 6월 제5기 전인대 2차회의에서 이에 관한 법령이 공포됨에 따라 이루어졌는데, 당시 당무위의 법제위원의 주임이었던 팽진은 보고에서 "혁명위원회가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고 설명하면서 혁명위원회는 지방정부와 성장, 시장, 자치구 주석 및 현장에 의하여 대표된다고 하였다. 이에따라 지방조직은 당과 정부의 2원화가 되었고, 지방수준에서 권력분담이 지방인민대회, 인민정부, 당위원회의 3자간의 분화되었다.그리고 1982년 12월 제5기 전인대 제 5차회의에서 새로 채택된 헌법에 따라 정부기구의 개혁이 있었는데, 가장 큰 특색은 1975년에 폐지되었던 국가주석제의 회복으로, 지도권의 다원화에 그 의도를 두었다는 면에서 의의가 크다. 그리고 중앙군사위원회를 두고 "전국의 무장력"이 이의 지배를 받도록 하였는데 국가권력이 어느 1인에게 집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포석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또한 인민대표대회의 권한과 국무원의 기능을 강화한 것도 주용한 내용이다.이와같이 등소평체제는 당·정·군간의 책임을 분화하여 어느정도 권력의 분화를 시도하고 있다. 권력의 과다한 집중을 방지하기 위하여 당과 정부를 분리시키고 집단지도체제를 확립하면서 당은 사상교육과 영도를 맡고 정부는 정책집행을 전담하도록 개혁을 실시하고 있는 것이다.(2)경제체제개혁1978년 12월 당 제11기 3중전회에서 경제의 조정 및 개혁을 실시하기로 결정한 이래 지속적인 경제성장을 달성하기 위한 경제개혁조치들이 취해졌다. 이 글에서는 여려개혁조치들중 산업구조의 개혁과 경제운영기구와 제도의 개혁, 시장경제체제 도입, 소 1970년대말부터 약간의 인플레이션 현상이 출현하여 1979-84년에는 연평균 2.5%, 1985-87년에는 연평균 7.3%로 올라섰다. 이러한 물가상승은 1988년에 들어와 가격개혁 추진에 대한 논의와 5월중순 4종의 부식품(돼지고기, 계란, 야채, 설탕) 가격의 30-60 % 인상조정등의 영향을 받아 급속도로 진행되어 1-6월에만 전국 평균 13%, 그후 연말까지 18.5%의 엄청난 소비자물가상승률을 기록했다. 이와같은 높은 물가상승에 의해 국가, 기업, 개인의 부담은 가중되었고, 도시농촌지역 주민들의 수입증가분의 대부분은 물가상승이 먹어버렸다. 높은 인플레이션과 함께 간부들의 부정부패는 사회의 각 영역에 만연하여 자녀의 취직이나 입당, 물가의 배급, 심지어 환자의 입원등에까지 미치지 않는 영역이 없었으나, 그중에서 가장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고 또한 일반서민들의 불만과 분노의 표적이 된 것은 경제영역에서의 범죄행위이고, 또 고급간부와 그 자녀들의 부정부패였다. 부정부패가 도처에 만연되는 기본원인은 봉건주의와 자본주의의 사상적 잔재의 영향 이외에 계획경제에서 상품경제로의 과도기적 시점에서 신구의 양제도가 공존함으로써 직권을 이용한 사적이익에 대한 추구와 권력과 금융의 상호교환이 가능한 기회를 제공해 주고 있기 때문이다.앞에서 이미 언급했지만, 완전히 계획도 아니고 시장기구도 아닌 현상태의 중국경제에서는 구조적으로 인플레·실업 및 부정부패를 일소 할 길이 없다. 개혁을 실시할 때 희소성이 있는 재화가 부족하게 마련이고 이것은 인플레를 조장하며 기업이 생산성을 올리지 못하거나 도산할 때 실업은 자연적으로 발생한다. 또한 이중가격제도가 유지되는한 그것을 이용하여 이득을 보는 자가 생기며, 이것이 부정부패의 구조적인 원인이 된다. 사실 이세가지 병폐가 천안문사태의 간접적인 원인이 되었던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3. 경제적 개혁·개방과 정치적 민주화와의 갈등경제개혁의 집행은 중국사회에서 개인과 집단·계층 및 엘리트간의 정치적인 갈등과 긴장을 조장하여 불안을 야기했문이다.
#보고서新羅의 三國統一에관한 硏究- 目 次 -Ⅰ. 序 論Ⅱ. 三國統一의 背景 및 展開過程1. 삼국통일의 배경2. 삼국통일의 과정Ⅲ. 新羅의 三國統一에 대한 論議1. 신라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부정적인 논의2.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의Ⅳ. 結 論Ⅰ. 序 論분단 50년, DJ정권의 햇볕정책 추진의 결과로, 얼마 전 또 한차례의 이산가족의 상봉의 기쁨을 나누었다. 미국의 '악의 축' 발언과 주변국의 북한과의 미국에 대한 외교정책이 이상기류를 타고 흘러온 가운데, 남북의 경직되었던 대립구도가 가뭄에 잠깐의 단비를 만난 듯 하다. 이러한 남북화해의 분위기 속에서 이제는 겉보다 우리의 '속'에서 동질성을 찾아 통일을 이룩하고자, 그동안 분단을 이유로 볼 수 없었던 우리의 잊혀진 역사를 연구하는 등 역사 및 문화적 교류분야에 봇물이 트인 듯 활발하며 속속 좋은 결과들이 나오고 있다. 이런 가운데 광대한 영토를 다스렸던 고구려에 대한 연구는 무엇보다 활발하며, 압록-두만강 이북의 과거 고구려 영토에 대한 열망은 일제-조선-고려를 거슬러 올라가 신라에 의한 삼국통합에 대한 회의도 느껴지게 만든다.과연 신라의 삼국통합은 민족의 영토를 축소시키고, 이후의 일제지배를 비롯한 외세 개입의 기회를 마련해준 부적절한 이에 의한 통일인가? 이러한 질문은 기존의 신라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또한 신라만의 또는 한나라만의 관점이 아니라 신라 통합기의 동아시아적 구도를 전체적으로 이해함으로써 답해 질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신라 삼국통합의 재인식을 통해 1300여년이 지난 지금, 주한미군이라는 새로운 '당(唐)'과 한반도 통일에 대한 해답을 얻고자 한다.Ⅱ. 三國統一의 背景 및 展開過程1. 삼국통일의 배경신라통일의 배경은 우선, 고구려가 수, 당과의 오랜 싸움을 통해 국력을 소모하였고 이때 신라의 국력이 급격히 신장하고 당과 연합하게 됨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켰다. 신라의 삼국통합을 재인식하는데는 그 당시 국제 정세를 이해하고 또한 신라내부의 사회변화구도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영토가 제일 큰 고구려와 왜와 손을 잡고 있는 백제를 혼자서 물리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수·당나라와 동맹을 맺기로 했다. 당나라도 고구려를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기에 신라와 동맹을 맺었고 이 동맹을 나·당 동맹이라 한다.나·당 연합군은 660년 백제를 육지에서는 신라가 해상에서는 당나라가 공격을 하여 의자왕을 마지막으로 멸망시켰다.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은 한때 촉망받던 군주였다. 그러나 성왕의 원한을 갚는 일에 너무나 몰두하여 신라에 대한 공격을 지나칠 만큼 감행했기 때문에 국력소모를 너무 심하시켰다. 게다가 차츰 의자왕 자신의 주장만을 내세우다 보니 지배층 사이에 분열도 심화시켰다. 즉, 의자왕의 독주를 막으려한 세력과 의자왕에게 적당히 아부하여 일신의 영달을 꾀하려는 세력이 나뉘어 서로간에 반목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았을 때, 앞장서서 침략을 막을 만한 용장들은 대부분 감옥에 갇힌 상태였고, 백성들 또한 의자왕의 실정에 등을 돌려 열심히 싸우려 하지 않았다. 또 당시 기습적으로 쳐들어온 나당 연합군의 군세가 당시 백제의 즉시 동원 가능한 군세에 비해 압도적으로 많았었다는 것도 큰 이유였다. 결국 백제는 의자왕의 독재정치와 실정, 잦은 군사동원에 의한 국력소모, 지배층간의 분열과 군세의 심한 차이등이 백제를 무력화하여 멸망을 당했다고 볼 수 있다.661년 백제의 멸망 바로 다음해에 나·당 연합군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역시 한반도의 수문장이라는 말처럼 고구려는 강력했다. 나·당 연합군의 3차에 이르는 전쟁 끝에 당시 수도였던 평양 성이 함락되었다. 고구려가 나당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을 때는 독재자였던 연개소문이 죽은 지 얼마 안된 무렵이었다. 이미 이전의 수당의 막강한 침략군을 막아내는데는 심각한 국력소모가 있었던데다가 또한 이 당시의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독재 정치가 남긴 심한 후유증을 앓고 있었다. 그의 후계자리를 놓고 치열한 내분이 빚어진 것이다. 결국 이러한 지배층의 내분과 그 이전의 연이은성 전투에서 거란·말갈의 혼성부대인 당군을 신라가 대파하여 한반도에서 당의세력을 축출할 수 있었다. 이로써 신라가 한반도의 중남부 나마 통합할 수 있었던 데 대해서는 신라사의 차원에서 일정한 의미 부여가 가능하다. 그러나 신라가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 연합상대였던 당의 배신적인 전략 수정에 반대하여 군사행동을 전개한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실로부터 신라삼국통일의 의미를 추출하려는 데 대해서는 쉽게 동의할 수 없다. 그것은 사실의 인과관계에서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한국사의 차원에서도 발해가 고구려의 고지에서 엄연히 건국하였기 때문이다.고구려에 대한 당의 점령정책은 고구려 유민의 강력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압록강 이남에서 벌어진 고구려 유민의 항쟁은 평양에 설치되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지방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게끔 밀어 붙임으로써 한반도에서 당의 식민정책을 불구화시켰다. 또한 압록강 이북에서는 당으로 강제 이주되었던 고구려의 유민이 요동지방을 근거로 당에 대한 강력한 투쟁을 전개하였다. 이에 당은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을 무마하려는 고식적인 수법을 구사하였다.그러나 이러한 시도는 물론 안동도호부마저 유명무실해졌는데, 이것은 모두 당에 반대한 고구려 유민의 항쟁 결과였다. 이 과정에서 고구려를 계승할 건국의 역량이 축적되었음은 물론이다. 고구려의 장군 출신인 대조영은 말갈인과 연대하여 천문령 전투에서 이해고의 당군을 격파하고 동모산으로 이동하여 진국, 즉 발해를 건국하였던 것이다.삼국 말기의 정치과정에서 파생된 대내외적 모순이 집약·심화되었던 나당 연합에 의한 동아시아의 국제전은 결국 신라의 삼국통일이 아닌 남북국의 성립으로 귀착되고 말았다. 신라는 백제부흥군의 토벌과정에서 체제에 불만을 품은 진골세력을 제거함으로써 태종무열왕게의 왕권을 안정시켰고, 발해의 건국과정에서는 상당수에 달하는 고구려의 귀족세력들이 이미 당의 포로가 되었기 때문에 거의 배제되었다. 한편 신라는 백제통합이라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할다. 그뒤 5도독부제를 개편하여 웅진도독부를 최고통치부로 하고, 7주(州)와 52현(縣)을 두어, 백제 왕자 부여 융(扶餘隆)을 도독으로 임명하여 백제 유민을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신라의 신속한 백제고지 경략작전(經略作戰)에 따라 많은 백제의 옛 땅이 신라에게 잠식되어 감에 따라 통치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문무왕 17년(677) 신라가 남은 영토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없어졌다.등 5도독부 설치⑷ 백제의 부흥 운동 :- 복신과 도침, 왕자 풍(주류성), 흑치상지 (임존성) 등200여성 호응- 지도층의 분열로 실패,일본의 지원 세력도 백강에서 패배2) 고구려의 멸망(668)⑴ 나·당 연합군의 1차 공격 : 평양성 공격 실패⑵ 고구려 말의 정세① 수, 당과의 오랜 전쟁으로 국력 소모② 연개소문의 독재와 지도층의 내분으로 국가 단결력 상실⑶ 나·당 연합군의 2차 공격 : 평양성 함락으로 멸망⑷ 당의 고구려 지배 : 평양에 안동 도호부당(唐)나라가 고구려의 옛 땅에 둔 최고 군정기관(軍政機關). 문무왕 8년(668년) 당나라 군사가 고구려를 멸망시킨 뒤 그 영토를 9도독부(都督府)·42주(州)·100현(縣)으로 나누고, 이를 관장하기 위하여 평양에 2만명의 군대를 배치하고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당나라 장수 설인귀(薛仁貴)를 도호부사로 삼아 통치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신라가 이에 크게 반발하자 동맹관계였던 두 나라는 이를 두고 여러 해 싸움을 벌였고 이에 합세하여 고구려 유민들도 곳곳에서 일어나 대항하여 675년 매소성 싸움, 이듬해 기벌포 해전에서 대패하자 당은 676년 평양을 버리고 도호부를 요동(遼東)의 고군성(故郡城:瀋陽省 遼陽)으로 옮겼으며, 이로써 고구려 멸망 후 8년 만에 신라는 고구려의 옛 영토의 일부를 통치하게 되었다. 677년에는 신성(新城:瀋陽省), 705년에는 평주(平州)·요서군(遼西郡) 등으로 옮겼으나 안녹산(安祿山)의 난을 계기로 경덕왕 15(756년) 폐지되었다.설치⑸ 고구려의 부흥 운동 :- 고구려 부흥운동가 검모잠. 안승의 저항- 이적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황룡사9층목탑찰주본기」를 비롯하여 9세기 이전에 씌어진 여러 금석문에서 확인되고 있다. 고려 시대의 인식내용은 『삼국사기』에 일정하게 반영되어 있다. 『삼국사기』의 편찬자인 김부식은 신라계의 문벌귀족으로서 신라삼국통일이 갖는 긍정적인 의미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였다. 한편 『삼국사기』의 이와 같은 인식내용은 조선시대 전기의 대표적 편찬사서인 『삼국사절요』와 『동국 통감』에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 이와 같이 전근대사회에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입장 은 조선시대 후기를 거쳐 근대적인 역사서술을 표방하고 있던 개화·일제시대로 이어지게 되었다. 다만 근대사회에서 제시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관한 견해 가운데 우리의 주목을 끄는 내용은 바로 일본인 학자에 의한 긍정론이다. 일찍이 일본의 역사학자 하야시 아리스케가 『조선사』에서 '신라 의 통일'로 정의한 이래 일제의 식민사학자들은 '신라의 반도통일' 등으로 정리하였으며, 일부 친일 사학자들은 근대사학의 미명 아래 그 내용을 비판 없이 수용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 학자들이 신라의 삼국통일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해석한 의도는 그들의 당면한 전략목표였던 만주, 즉 발해의 역사를 한국사의 범주로부터 분리시키려는 滿鮮史觀에서 연유하는 달갑지 않은 사학사상의 유산이었던 것이다.한국 근대사학의 발달과정에서 신라의 삼국통일 인식의 본질적인 전환은 신채호에 의해서 수행되었다. 그는 역사이해의 중심축을 민중과 민족에 두었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사료로서 『삼국사기』의 봉건성과 사대성에 대하여 철저한 비판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사료비판에 입각하여 자연히 신라삼국통일에 대한 부정론을 심화시킴으로써 역사인식의 전환에서 하나의 분기점을 이루었다. 신채호의 부정적인 인식논리는 삼국시대에서 백제를 병합한 신라와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로의 상황변화만을 인정하는 양국시대론 으로 귀결되었다. 이러한 인식경향의 연장선상에서 일제시대의 민족주의 사학자들이 통사에서나마 '삼국시대와 남북국' 또것이다.
#보고서『人生』을 통해서 본中國의 現代史目 次Ⅰ.『人生』의 줄거리Ⅱ.『人生』을 통해서 본 中國의 現代史제 1 절 1940년대 - 국·공 내전 : 몰락과 그림자극제 2 절 1950년대 - 대약진 운동 : 쇳조각들과 유경의 죽음제 3 절 1960년대 - 문화대혁명 : 홍위병 간호사와 봉하의 죽음Ⅲ.『人生』에 대한 나의 鑑賞評Ⅰ.『人生』의 줄거리영화는 중국의 담배연기 뿌연 도박장을 배경으로 시작한다. 도박장에서 유난히 눈에 띄는 부귀, 그는 주인공으로서 이름과 맞게 잘 차려입고 있다. 빼빼마른 체격에 얄미운 인상... 그렇지만 도박장의 모든 이들은 부귀를 상전 모시듯 떠받든다. 하지만 도박장의 그들은 부귀의 재산을 노리고 일부러 그를 떠받들고 있다. 도박의 빚을 통해 부귀의 집을 차지하려는 용이와 그들 사이에서 간교를 부리는 중개인들은 부귀의 재산을 조금씩 빼앗아 가고 있다. 결국 부귀는 용이에게 도박빚으로 인해 집문서를 빼았기고 이를 보다 못한 아내 가진은 아이들을 데리고 떠나버린다. 부귀의 아버지 또한 충격에 못 이겨 죽음을 맞이한다.부귀는 병든 노모를 모시고 시장터에서 힘겹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그런 부귀 앞에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돌아온 아내 가진은 희망을 보여준다. 부귀는 힘을 얻어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용이에게 찾아가 돈을 빌려본다. 용이는 그런 부귀 앞에 먼지투성이의 상자를 내어 놓는다. 마치 보물상자를 연상케 하는 낡은 나무 상자 안에는 그림자극 재료가 들어 있다.부귀는 그림자극을 공연하던중 자신의 친구인 춘생과 함께 국민당의 포로로 잡히게 된다. 국·공내전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무지한 두 젊은이는 삭막한 중국의 근현대사를 몸소 체험하게 된다. 그렇게 끌려 다니다가 이번에는 공산당의 포로가 되고 공산당에서는 군인들을 위해 그림자극을 하게 된다. 그리고 부귀는 다시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고 춘생은 운전병이 되어 공산당을 따라가게 된다.국·공내전에서 부귀는 공산당을 위해 그림자극을 했다는 이유로 혁명에 반열에도 오른다. 그리고 그것을 자랑스러워 마음속 깊이 한다.다시 시간은 흐르고 한가한 아침 부귀는 구장님이 오신다고 학교에 꼭 나오라는 동네 아이들의 말에 곤히 잠자고 있는 아들 유경을 등에 업고 학교로 향한다. 학교로 가는 도중에 부귀는 등에 업힌 아들 유경에게 말을 건넨다. "유경아 잘 들어라. 지금은 우리 집이 병아리 같이 작지만, 병아리가 크면 닭이 되고, 닭이 크면 거위가되고, 거위가 크면 양이 되고, 양이 크면 소가 된단다..." 그러자 아들 유경이 다시 묻는다. "소가 크면 뭐가 되요?" 그리고 부귀는 답한다. "소가 크면 공산주의가 된단다. 공산주의가 되면 매일 고기와 만두를 배불리 먹을 수 있단다." 이렇게 대화를 마지막으로 아들 유경은 학교 담장에 기대 자다가 구장이 운전하던 트럭에 치어 죽음을 맞이한다.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있는 와중에 모습을 드러낸 이는 춘생이였다. 공산당의 운전병으로 혁명에 참가한 춘생은 구장이라는 직책에 올라 있었고 그런 춘생이 불행히도 아들 유경을 죽인것이다. 부귀와 가진은 오열을 하고 춘생은 미안함을 표현한다. 이렇게 아들을 보내고 부귀와 가진은 50년대를 보낸다.다시 화면은 60년대로 넘어간다. 어느덧 처녀가 되어버린 딸 봉하와 이제 중년이 된 부귀와 가진의 모습이 비춰진다. 60년대 중반 문화대혁명은 시작되고 집을 방문한 읍장은 그림자극이 황제나 장군에 관한 옛날 것들이라 제국주의를 나타낸다하여 반동이라고 불태워버리라고 한다. 이제껏 부귀의 가족을 지켜주던 그림자극은 이렇게 불태워 지게 된다. 나이가 찬 봉하는 혼사문제가 오가게 되고 절음발이 공장 기술자 만이희와 결혼을 하게 된다. 결혼은 성대하게 치러지게 되고 둘은 잠깐 동안의 행복을 맞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평온도 잠시 문화대혁명은 마을을 지도해 오던 읍장과 이름있는 사람을 모두 주자파로 몰아가고, 춘생도 예외일 수는 없었다. 춘생은 마지막으로 부귀의 집에 밤 늦게 찾아 온다. 그리고 부귀에게 예금증서를 건네고 아내의 자살 소식 또한 말하게 된다. 이를 듣고 있던 아내 가진은 춘생을 용서하며 용기 준다.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노세해진 부귀와 가진이지만 얼굴 표정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평온하다. 손자는 어린 병아리들을 들고 무덤에 가고 이 병아리들을 다시 집으로 까지 가지고 온다. 부귀는 병아리의 집을 마련해 주기 위해 잊고 있던 그림자극 상자를 꺼내게 된다. 그리고 다시 되풀이 되는 대화"병아리가 크면 닭이되고 닭이 크면 거위가 되고, 거위가 크면 양이 되고 양이 크면 소가 되며 소가 크면 뭐가 되는냐"고 손자는 과거 죽은 유경과 똑같이 묻는다. 부귀는 말 문을 열지 못하고 옆에서 듣고 있던 가진이 대신 답을 해준다. "소가 크면 어른이 되지 어른이 되면 비행기도 타고 배도 탈 수 있단다." 그렇다 가진은 희망을 말해 주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영화에서는 병아리를 통해 보여주었다. 이제 미래는 밝을 것이라는 그들의 희망을 끝으로 영화는 막을 내린다.Ⅱ.『人生』을 통해 본 中國의 現代史제 1 절 1940년대 - 국·공 내전 : 몰락과 그림자극영화의 시작과 함께 펼쳐진 중국의 40년대는 항·일전쟁에서 일본의 패배가 결정적인 단계로 접어들면서 국·공 내전의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한 시기이다. 영화에서는 40년대를 부귀의 몰락과 그림자극을 통해 공산당과 국민당의 내전을 그려 나갔다. 그러면 여기서는 국·공 내전에 대해 더욱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자.항·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후, 중국공산당과 중국 인민들은 한결같이 국·공 양당과 각 당파가 참여하는 민중연합 정부를 구성하여 민주개혁을 실행하고, 독립 자유 민주 통일 부강의 신중국을 건설할 것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였다. 그러나 국민당은 미국의 지지하에서 표면적으로는 공산당과 평화회담을 진행하였지만, 실제로는 적극적으로 내전을 준비하면서 항일 승리의 성과를 독점하여 국민당 정부의 독재통치를 유지하려고 기도하였다. 1946년 6월에 국민당은 공산당이 영도하는 해방구(解放區)에 대하여 전면적인 진격을 개시하였다. 이에 중국에는 제2차 국·공내전이 발발하게 되었다.1946년부터 1949년까지 제2차 국 공내전은 3중국공산당에 의해 장악되었으며,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국 내외에 선포함으로써 중국 대륙에는 중국역사상 최초로 사회주의 국가가 탄생하게 되었다.제 2 절 1950년대 - 대약진 운동 : 쇳조각들과 유경의 죽음영화에서는 대약진 운동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동네에 용광로를 만들어 집집마다 가지고 있는 모든 쇠붙이를 가져다 바치게 하고 여기에 마을의 모든 인력을 제철 제련작업에 봉사해야 하는 상황으로 말이다. 여기서 어린 유경이도 밤에 일을 도와야 하기에 잠을 충분히 자지 못했고 그로 인해 학교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는 이야기로서 대약진 운동을 그려 나갔다. 그러면 영화에서 묘사하듯 성공적이지 못했던 대약진 운동을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자.모택동은 지속적으로 공산화의 과정과 아울러 공산주의식 계획경제에 의하여 공업화와 농업생산량 향상을 위해 제1차 5개년 경제계획을 추진한다. 이것은 모든 자원을 자본재 산업에 집중, 농업을 포함한 전체 경제를 중앙집권식 계획경제로 개조하여 부강한 사회주의 중국을 건설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 5개년계획이 실업문제 등의 부정적인 결과를 보이자 중국지도부는 중국경제의 현대화를 가속화하려는 대약진운동을 전개했다.대약진운동은 7년안에 영국을, 8년~10년안에 미국을 따라 잡는다는 전제 아래 우선 공업 생산의 지표를 높였다. 중앙이 제출한 1958년의 지표는 철강이 원래 620만 톤이었는데 이를 800만 톤에서 850만 톤으로 늘려 놓았다. 6월에는 각 대구에서 철강계획회의를 소집하여 1958년의 생산 목표를 1957년의 배이상인 1070만 톤으로 늘려 잡았다. 영화에서 보면 동네 읍장들이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철로된 세간을 걷으러 다니는데 부귀 역시 작은 것까지 내 놓는 장면이있다. 이 당시엔 동네에 공동식당을 만들어 모두가 모여 식사를 했기 때문에 집집마다 솥이 있을 필요도 없었다. 이처럼 철강을 중심으로 전면 약진하자는 방침아래 그밖의 다른 공업 생산지표도 올려 놓았다. 이런 대약진의 야심은 주은래의 말가운데어나 농민들에게 식량 부족 현상이 나타났다.경공업 부분에서도 생산량감소는 마찬가지였고 결국 농업과 경공업이 발전하면서 중공업이 발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중공업의 발전은 기형적일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기형적인 발전은 인구를 증가시키고 노동자수도 급격히 늘어나게 했지만 반면 농업과 경공업의 퇴보로 이들의 수요를 충족시킬수 없게 되니 필수품의 공급부족까지 일어나게 되었으며, 결과적으로 전반적인 인민의 생활수준이 낮아지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59년부터 3년간의 자연재해가 있었고, 구소련이 60년 이래로 경제원도를 전면적으로 중단한 데다 중·소관꼐가 악화된 점 등의 원인으로 대약진 정책은 중도에 좌절되었다.제 3 절 1960년대 - 문화대혁명 : 홍위병 간호사와 봉하의 죽음영화의 마지막 시대 배경인 1960년대는 문화대혁명의 시기로서 이 시기에 부귀와 가진은 딸 봉하를 잃게 된다. 그리고 읍장과 춘생은 주자파로 몰려 비판을 받게 되고 사회는 혼란을 겪게 된다. 영화에서도 잘 나타나듯이 병원에서는 의사가 반동으로 몰리고 마을에서는 읍장이 주자파로 몰리는 등 일대 혼란의 시기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부귀의 집안에 그려진 모택동 그림과 병원의 간호학교 홍위병들은 문화대혁명의 대표적 상징인물들이라 하겠다. 그러면 여기서는 문화대혁명에 대해 자세히 알아 보도록 하자.1950년대 말 대약진 운동이 좌절된 이후 중국공산당 내부에 사회주의 건설을 둘러싼 노선대립이 생겨났다. 최고 지도자였던 모택동은 대중노선을 주장하였으나, 등소평 등의 실용주의자들은 공업 및 전문가를 우선시 할 것을 주장하였다. 1962년 9월 중앙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모택동은 계급투쟁을 강조하고, 수정주의를 비판함으로써 반대파들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1965년 상하이시 당위원회 서기엿던 요문원은 북경시 부시장 우한이 쓴 역사극 해서판관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모택동의 대약진 운동을 비판하다가 실각한 국방부장을 옹호하는 것이라는 이유에서다.이를 계기로 실권파의 권력기반이었던 북경시 당위원회와 삼가촌그룹은 모택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