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문가 요청 쿠폰 이벤트
*지*
Bronze개인인증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0
검색어 입력폼
  • [한국정치사]제주 4.3항쟁의 경제, 사회적 측면에서의 연구
    I. 들어가기제주 4.3항쟁은 우리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다.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일어난 이 사건으로 제주도민들은 엄청난 피해뿐만 아니라 재산 손실을 입었다. 근대 한국의 기점이랄 수 있는 1876년 개항의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사건은 존재하지 않았다. 무엇이 1948~49년 제주를 저항의 중심이자 비극의 진원으로 만들었을까? 제주 4.3사건의 성격규정은 논자(論者)에 따라 폭동, 반란, 민중항쟁, 인민무장투쟁 등 여러 가지로 엇갈린다. 이는 논자의 시각 또는 역사관, 경우에 따라서는 논자가 인식하는 역사발전의 당위성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이 밖에도 성격규정을 분명히 하지 않은 채 ‘사태’ 또는 ‘사건’으로 유보해 두는 입장도 있다. 이 같은 성격규정의 분기점은 주체설정, 배경설명 등이 된다. 예컨대 폭동론의 경우 주체를 남로당으로, 배경 또는 원인을 인민공화국 수립으로 설정, 인민공화국 수립을 위한 남로당의 극좌모험주의적 도발로 규정한다. 반란론은 주체를 좌익과 우익으로 설정해 우익정부 수립에 대항한 좌익의 반란으로 규정함으로써 4.3의 본질을 좌우익간의 헤게모니 쟁탈전으로 본다. 인민무장투쟁론은 주로 공산주의 관점에서 취하는 입장으로서 주체를 ‘남로당과 인민’으로 설정하고 인민의 반제국주의 무장투쟁으로 규정하며 그 배경으로 제국주의의 침탈에 맞서 인민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것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세 가지의 관점은 논자(論者)의 판이한 입장 차이에도 여러 가지 유사한 점을 갖고 있다. 즉, 주체설정에 있어 모두 남로당 또는 좌익을 제1주체로 보고 있다는 점이나 인민공화국 수립(우익정부에 대한 좌익의 반란도 결국 이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을 배경으로 설명하고 있다는 점 등이 그것이다. 이는 곧 사실상 사건의 본질파악에 있어서는 상이하지 않음을 말해준다.) 본 논고는 기존의 4.3사건의 정치적 측면에 대한 고찰은 충분히 연구가 이루어져 있다고 보고, 4.3사건으로 인한익조직을 이용하여 갖은 허위선전선동으로 군정당국에 대한 도민의 감정을 악화시키는데 주력하였다. 특히 남조선노동당은 곡물수집과 양곡정책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고 이에 주민이 항거할 것을 선동하였다. 1947년 8월 9일에 일어난 동황리 주민의 양곡수집관리폭행사건은 그의 한 예였다. 곡물수집정책과 양곡정책은 분명히 미군정당국의 실패정책이었고 이로 인한 주민의 감정이 악화되는데도 불구하고, 미군정당국은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하거나 홍보활동을 통하여 주민의 이해와 협조를 구하는 노력은 하지 않고, 다만 경찰력과 행정력을 동원하여 동 정책을 강행하는데만 주력하였다.2. 제주도4?3항쟁의 사회 ? 문화적 측면에서의 발생원인(1) 인구이동과 해외귀한동포로 인한 전통사회변혁기도(企圖) 태동1945년 8?15해방 후 월남민과 해외귀환동포로 인하여 제주도를 포함한 남한의 인구가 급증하였다. 1944년 5월 1일 현재 220천명 이었던 제주도 인구는 1948년 1월 1일 281천명으로 급증했으며(약 26%인 6만여 증가), 남한 전체로는 1944년 5월1일 현재 15,587천명이 1948년 1월 1일 현재 20.041천명으로 증가하였다. 약 6만에 이르는 제주도인구의 증가는 태평양전쟁 기간 중 일본군에 종군했던 군인, 군무원, 피징용자 및 노동자와 해외(특히 일본)에서 거주하던 교포의 귀환 때문이었다. 이러한 인구의 급증은 종래의 정의적이고 공동체적인 사회구조를 몰인격적이고 이질적인 사회구조로 급변시켜, 제주도 전래의 동질적이고 목가(牧歌)적인 사회기반을 동요시켰다. 이들 이방인격인 해외(특히 일본)로부터의 귀한교포들은 기존질서체제에 대한 변혁을 시도하게 되고, 특히 이들 중에는 해외에서부터 좌익사상에 심취한 사람들이 섞여 있어서, 귀한 후 조국재건을 명분으로 한 정치활동을 통하여 일부 제주도민을 좌경화(左傾化)시키는데 기여하였으며, 좌경화된 일부 제주도민은 남조선노동당을 비롯한 좌경단체에 가입하거나 자위대와 인민유격대에 직접 가담하여 남조선노동당의 기존질서체제전복활동에 가세하였다고 논하고 있다.(4) 지정학적 요인제주도가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고 그것이 섬으로서 교통편이 불편하여 육지본토에서 군대난 경찰병력을 수송하기가 어려우며, 섬의 중앙에는 높은 한라산(해발 1950m)을 중심으로 한 밀림지대가 형성되어 있어서 군경의 토벌에 대응한 유격전을 전개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에, 남조선노동당측이 제주도에 해방지구를 건설하기 위한 결심을 하는데 촉매역할을 했다고 여러 문헌에서 지적 되고 있다. 이것은 설득력이 있는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지정학적 여건이 유리하고, 설사 제주도에서 남조선노동당의 의도가 관철되어 해방지구가 건설되었다고 가정하더라도 당시 남한에 주둔하고 있던 미국군병력이나 남한의 조선 경찰력에 대항해서 동 해방지구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구나 쉽게 이해를 할 수 있는 일이므로, 남조선노동당 측에서는 남한 전 지역에서의 유격대의 무장봉기와 북한의 조선인민군의 지원을 전제로 해서 그러한 판단을 했을 것으로 생각이 된다.Ⅲ. 해방 후 제주도의 경제상황1. 일반적 경제상황(1) 산업구조1945년 8.15 해방 당시 제주도는 산업구조면에서 타지부와 마찬가지로 제1차 산업(농업, 수산업, 목축업)이 주종을 이루고, 공업 등 제2차 산업의 비중은 극히 미약했으며, 제3차 산업의 비중은 더욱 미미했다. (표 3-1참조)표 3-1. 1944년~1946년간의 제주도의 사업장 및 노동자수구분인구사업장수(개소)노동자수(인)1944년6월1946년 11월1944년/1946년 대비 감소율(%)1944년 6월1946년 11월1944년/1946년 대비 감소율(%)남한총계19,369,2709,3235,24943.7300,520122,15959.3제주도276,148723255.61,83360367.1출처 : 조선은행조사부 편, 「조선경제연보」, 서울, 1948, I-p.201~202 및 I-p.3~4대체로 농지는 해안선과 중산간 일대에 분포되어, 주민도 주로 여기에 주거하면서 농업에 종사하고, 아울러 사면이 바다인 섬인 관계로 해안선의 할당량이 없었으며, 1946년의 경우 2,500석의 할당량 중 그의 48.3%인 1,207석밖에 수집되지 않았으며,) 1947년의 경우는 4,000석의 할당량중의 115.3%인 4,614석이 수집되었다. 1947년의 경우 할당량의 115.3%가 수집되기는 했으나, 여기에는 무리가 뒤따랐으며, 다른 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제주도에서도 민원이 발생하고, 미곡수집과정에 있어서의 관공리와 경찰관의 강권개입으로 인하여 제주도민의 원성이 자자하였다.)행정관청에서 미곡 및 하곡의 수집을 강제적으로 실시한 결과, 농민의 불만이 고조되고, 결국은 1947년의 하곡수집과정에서 행정당국과 농민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대표적인 사건이 1947년 8월 9일의 안덕면 동광리 사건이다. 곡물수집에 대해서는 일반농민도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남조선노동당은 곡물수집반대를 그의 정책으로 삼고, 이를 반체제활동에 주민을 동원하기 위한 선동수단으로 삼았다. 재조선미국육군사령부의 1947년 8월20일자 「정보참모부 일일보고서」는 “「경찰과 테로악한인 우익강력집단 광복청년단원에게 1일 5합의 배급을 하여 그들의 배만 채워주는 강제적 곡물수집을 반대하자」는 전단을 제주전역에 살포하였다. 이 좌익 메시지는 「어떠한 희생을 치르드라도 곡물수집을 반대하자」로 요약되어 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③식량배급미군정기에 제주도에서 연월일별로 배급을 받은 인구와 수량을 구체적으로 확인 할 길은 없다. 제주도의 식량수배인구는 1946년 76,000명, 1947년 46,000명, 1948년 49,000명으로 나타나고 있다.)④ 식량사정의 악화원인미군정기에 제주도의 식량사정이 악화됐던 것은 첫째 절대생산량의 부족, 둘째 미곡수집상의 모순, 셋째 모리배의 매점매석행위, 넷째 식량배급 및 수배상의 부정행위에 있었다. 그러나 가장 기본적인 요인은 절대생산량의 부족에 있었다.첫째, 제주도민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양곡의 절대생산량이 크게 부족했다. 양곡의 절대생산량의 부족은 1945년 8.15해방 후의 절대생산량의 선완전자주독립달성을 위한 일관된 시책 하에 「베로스」중령의 업적을 계승하여 본관의 책임을 수행해나갈 생각한다. 一言하고 싶은 것은 본도는 자원이 풍부함으로 시책을 산업개발에 치중함으로써 도민과 손을 잡고 민생문제해결에 기여하려고 생각한다.”라고 언급하여, 도민의 민생문제의 해결이 긴요한 문제였음을 말해주고 있다.당시「제주신보」에는 전재민 또는 육지에서 생활이 어려워 제주도로 이주해온 사실을 보도하고 있는데, 1947년 7월 초순에 북한에서 넘어온 이재민 50세대, 약 500명이 제주도에 할당되었으며, 1947년 12월 21일에는 이재민 200명이 이주해왔다.3. 노동1946년 11월 현재 제주도의 공장 수는 32개(전남한은 5.249개), 노동자수는 603명(전남한은 122,159명)에 불과했다. 이들 제주도의 공장도 소규모였고, 기타 제주버스회사를 비롯한 사업체들이 있어서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 산하에서 파업 등 노동운동(실질적으로 정치운동)을 전개했으나 (특히 1947년 3?1절을 전후해서), 그의 규모가 적고 종업원의 수도 미미하여 경인지역이나 영남지방에서와 같은 강력한 노동운동은 전개하지 못하였다.4. 교육1945년 8?15해방당시 제주도에는 학교가 중학교로 1910년 4월에 창설된 제주공립농업학교(4년제) 1개와 1936년 5월에 창립된 제주도공립농업실수학교(2년제) 1개가 있었다. 한국의 근대적인 초등교육기관은 1895년의 “소학교령”에 의해서 소학교로 명명되었다가, 1906년의 “보통학교령”에 의해서 보통학교로 개칭되었으며, 그 후 1938년의 “조선교육령”에 의하여 소학교로 개칭된 후, 다시 1941년의 “조선교육령”의 개정으로 국민학교로 개칭되었다. 1947년 현재 제주도의 중등학교는 6개(학급 수 12개)이고, 1학년 수용력은 720명이었으며, 1947년도 국민학교 졸업생 수는 2,884명이었다.일제시대부터 주민의 교육기회가 제한되어 이었기 때문에 당시는 문맹자가 대단히 많았다. 1947년 말 현재 全남한의 13세 이상 총인않았다.
    사회과학| 2006.05.11| 19페이지| 1,500원| 조회(328)
    미리보기
  • [광고론] 현대자동차 아반떼XD 분석
    . Hyundai Motor Company{한국 최대의 자동차 메이커. 1967년 설립. 1975년 한국 최초의 독자 고유모델 승용차인 '포니'생산으로 기술수용 시대를 지나 기술자립시대를 개막. 1984년 포니 단일차종으로 50만대 생산을 돌파, 1986년 미국에 포니 엑셀 첫 수출과 동시에 수입차 최대 판매 기록을 갱신.한국 최초의 독자모델 엔진인 알파엔진 개발이후 베타, 입실론, V-6 델타엔진을 개발하여 엔진의 풀-라인업을 달성. 1991년 승용차 전 차종에 대한 ISO9001 인증을 획득 하였으며, 1996년 세계 자동차업체 사상 최단기간안에 생산 1,000만대를 달성.세계 최대 자동차공장인 울산공장(생산능력 125만대), 승용차 전용생산공장인 아산공장(생산능력 30만대), 세계 최대의 상용차 전용생산공장인 전주공장(생산능력 10만대)등 한국내에 3개의 공장을 가지고 있음.해외에서는 연산 6만대 규모의 터키공장을 합작형태로 운영, 1998년 10월에는 단독 투자한 12만대 규모의 인도공장을 준공하여 아토스등을 생산 판매. 2005년 상반기 미국 앨라배마 공장 본격적인 생산 시작(2005년 15만대, 2006년 30만대 생산가능)Brand Slogan{의미와 전달메세지1고객측면 : 현대자동차는 고객의 삶과 미래를 그들 자신의 방식 그대로 나아가도록 격려해 준다는 의미와 고객 개개인의 삶의 방식을 배려하고 존중한다는 의미를 담은 표현.2내부 임직원 측면 : 현대자동차 내부 임직원으로서 자신감과 자부심을 갖고, 글로벌 Leading 브랜드가 되기 위해 본인이 맡은 바 최선을 다하는 목표를 이룰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자세를 갖도록 함을 의미.3기업측면 : 글로벌 시장의 새로운 주역으로 떠오르는 현대자동차의 자신감을 바탕으로 고객들에게 자부심과 만족을 주는 기업이 되겠다는 의지를 표현.4딜러/유통 측면 : 현대자동차 브랜드에 대한 확신을 갖고 스스로 현대자동차의 대표라는 생각으로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만족을 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수 있도록 격어, 정제되고 세련된 현대자동차의 새로운 아이덴티티를 구축하여 자동차 시장에 있어서의 차별적 위상을 확보하겠다는 의지를 표현.. Market Analysis{2002~2004 내수 판매실적 (단위 : 대){아반떼XD르노-삼성 SM3기아 세라토대우 라세티200295,72416,016미출시미출시200385,71429,878미출시34,939200468,50620,17021,47718,878시장 현황2004년 자동차 내수 판매량이 전년 대비 19% 하락한 반면 준중형차의 내수 판매대수는 16만7천883대로 4.9%의 증가.승용차 시장(RV 포함, 영업용 차량 제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001년 13.9% 2002년 13.7%, 2003년 17.6%으로 상승.2004년 7월 뉴 아반떼XD 출시 이후 2005년 1월까지 경쟁 차종 대비 판매량 최다.준 중형차 경쟁구도준 중형차급은 법규에는 없는 개념으로, 자동차 업체들이 대형화를 선호하는 국내 소비자의 선호에 맞춰 1,500~2,000㏄의 배기량에 차체와 사양을 소형차보다 키우거나 고급화한 것.1600CC 출시 배경2005년 7월 1일부터 적용될 국내 자동차세 과세기준 변경에 따라 1600CC 엔진 승용차가 중형에서 준중형으로 분류되기 때문. 현재 준중형차의 경우 CC당 140원, 중형차는 200원의 자동차세가 과세되는 것을 감안하면, 양자의 세금 차이는 32만원과 22만4천원의 차액인 9만6천원. 여기다 도시철도채권 매입액도 중형(41만5480원)과 준중형(29만836원)의 차액은 12만 4644원. 같은 차체에 1600CC 엔진을 장착할 경우 가격차는 그리 크지 않지만 트크나 마력, 순간 가속력, 추월가속 성능, 연비 등이 향상되기 때문에 소비자들의 선택은 당연히 1600CC로 기울것으로 예상. 따라서 각 업계에서는 기존의 1500CC 차량 생산라인을 1600CC로 전환. 이미 국내 자동차 업계는 수출 주력용으로 1600CC 판매.★ 경쟁사1 - 르노삼성 SM317개월에 걸친 일본 닛산과의 기술협력을 통해 선보이는 출력 · 토크 · 연비를 1500CC보다 향상.앞쪽 그릴에 SM5와의 패밀리룩을 적용, 형태를 바꾸고 뒷 램프 모양을 국산 경 쟁 차종들처럼 트렁크 라인을 따라 깎아낸 점등이 눈에 띄는 차이.★ 경쟁사2 - 기아 세라토기존 1500CC 대비 출력은 2.8%(107 110ps), 최대 토크는 7.2%(13.8 14.8㎏·m), 연비는 1.6%(A/T기준 12.4 12.6km/ ) 향상.국내 최장기간 10년/15만km 보증기간을 적용.★ 경쟁사3 - 대우 라세티기존 1500CC대비 출력은 106마력에서 109마력으로, 토크는 14.2kg·m(4,200rpm)에서 15.0kg·m(3,800rpm)으로 각각 향상.동급 차종에서 가장 낮은 rpm에서 최대 토크를 발휘. 이로써 차량 출발시 발진 가속력과 추월시 필요한 순간 가속력, 동력성능의 효율성 등을 두루 갖춤.★ 경쟁사4 - 기아 프라이드동급 경쟁차종 중에 가장 저렴한 가격(수동 변속기 기본형 기준 경쟁차종 대비100여만원 저렴)배기량 1,600㏄의 CVVT 엔진은 밸브 타이밍을 효율적으로 조절해 줘 최적의 출력과 회전력은 물론 연비 향상 및 배출가스 저감 등을 자랑하는 첨단 엔진.엔진룸과 문짝 등에 2~3중의 흡음재와 절연재를 사용. 외제차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의 정숙도.. Customer Analysis1. 뉴 아반떼XD의 구입이유는?1위 차량가격 / 구매 조건이 좋아서2위 그 모델에 대한 평판이 좋아서3위 현대자동차의 인지도 때문에(2001년 7월 이후 신차구매자 1280명 대상)2. 만약 구입 하려고 한다면 이유는?1위 차량가격/ 구매조건이 좋아서2위 외관 디자인이 좋아서3위 현대자동차의 브랜드 인지도 때문에(2001년 7월 기준 2년 내 신차 구입 예정 3363명 대상)구입한 소비자 특성은 가격과 디자인에 민감한 경향을 보임. 뉴 아반떼XD의 가격과 디자인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음을 예측 할 수 있고 브랜드 인지도 또한 좋음3. 구입한 사람의 연령은?1위 남 24~292위 남 30~343위 남 353위 24세 미만출처 : f-inside.com대체로 20대 중반에서 30대 중후반의 남성이 주요 구매고객(Main Target)으로 볼 수 있음. 또한 비슷한 연령층의 여성 또한 잠재적 구매고객으로 예상(Sub Target). Product Analysis. 브랜드 뜻Avante는 스페인어로 앞선 이라는 뜻XD는 eXellent Driving 탁월한 주행이라는 뜻. 특징2005 뉴 아반떼XD'는 크롬 베젤을 적용한 클리어 타입 헤드램프로 한층 고급스런 이미지를 강조했고, 기존 중대형차에 적용되던 이모빌라이져(Immobilizer){) 차량에 입력된 암호와 시동키에 입력된 암호가 일치할 때만 시동이 걸리므로 해당차량에 지급된 정품키가 아닌 불법 복제키로는 시동이 걸리지 않도록해 차량 도난을 방지할 수 있는 장치.시스템을 전모델에 확대 기본 적용해 호평.세이프티 파워 윈도우, 틸트 헤드레스트{) 운전자 및 탑승자의 취향에 맞게 헤드레스트 기울기를 3단계로 조정할 수 있는 틸트기능을 앞좌석에 적용., 열선 내장 고급 직물시트{) 가죽시트뿐아니라 직물시트에까지 열선기능을 적용하여 동절기 편의성을 높임., 운전석 듀얼 시트 높이 조절장치 등의 사양을 추가해 편의성을 강화시킨 것이 주요특징으로 꼽힌다.뉴 아반떼XD 1.6은 기존 모델에 비해 엔진 성능이 최고 출력은 2.8%(107 110마력), 최대 토크는 7.2%(13.8 14.8kg·m) 가량 향상.총 700억원을 투자해 개발한 뉴 아반떼XD는 더욱 공격적이고 강렬한 스타일로 외관을 변경하고 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품격을 더한 것은 물론 동급 최초로 고성능 -VVT엔진을 탑재해 출력과 연비, 환경친화성을 향상.여성전용 모델 님프(Nymph)'도 출시. 님프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초목의 요정 이란 뜻으로 깜찍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상징하는 차명. 여성전용 모델로 개발된 만큼 님프는 차명처럼 젊고 세련된 이미지를 강조하기 위해 기존 아반떼XD 골드 모델을 기본으로 우아한 여성전용 우드그레인, 조수석 에어백 등 여성을 위시장 부동의 판매 1위· 동급중 기본가격 가장 저렴· 넓은 실내공간, 안정된 주행 성능· 중형차에 버금가는 편의장치· 현대자동차라는 브랜드 이미지단점(Weakness)· 경쟁제품 중 연비가 가장 나쁨· 초기 가속력이 떨어짐· 오리지널 모델 출시가 오래된만큼 디자인의 신선감이 떨어짐· 경쟁차종중 가장 무거움기회(Opportunity)· 경제의 회복세· 준중형차 기준의 변화(1500CC 1600CC)· 고급지향의 라이프 스타일위협(Threat)· SM3, 세라토, 라세티, 프라이드등 경쟁치열· 신모델이 유리{{. F.C.B. Ex-Advertisement Analysis{1 미사일 편- 광고일 : 2000년 1월 1일- 광고컨셉 : 탁월한 주행성능- 타겟 : 20대 중후반~30대- 표현전략copy : 따라올 자 누구인가강자의 신화아반떼 XDvisual : 고풍스런 건물이 즐비한 체코 수도 프라하. 인적이 드문 한적한 광장을달리는 아반떼XD를 겨냥해 첨단 유도미사일이 발사되면서 불꽃튀기는 추격적이 시작된다. 때로는 속도를 높여 도심을 질주하고 때로는 급격한 방향전환으로 맹렬하게 뒤쫓는 미사일의 추격을 따돌리는 아반떼XD. 문제의미사일을 발사한 트럭을 향해 아반떼XD가 전속력 으로 질주하다 급선회하면서 미사일이 트럭과 충돌, 폭발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tone & manner : 동적, 남성적, 강함, 할리우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 운전자의 의도대로 운전할 수 있다는 점을 미사일 추격전이란 소재로 긴박감 있게 표현함으로써 광고효과를 극대화했다.{2 스타일에 이끌린 젊은 여성편- 광고일 : 2002년 9월 1일- 광고컨셉 : 스타일도 좋은 아반떼XD- 모델 : 여대생- 타겟 : 20대 중후반~30대 여성- 표현전략copy : 남자들은 힘이 좋아서 아반떼 XD를 탄다죠? 저는 달라요. 제 눈엔 스타일이 더 매력적 이었습니다.저는 진실을 아니까요. 사랑합니다.아반떼XDvisual : 빨간색 아반떼XD가 주차를 한다.악기를 든 여대생이 차에서 내리고, 가면서 계속 아
    경영/경제| 2005.05.25| 11페이지| 1,000원| 조회(1,739)
    미리보기
  • [국제관계론] 일본의 역사왜곡과 한일관계 평가A좋아요
    ▣ 목 차 ▣제1장 역사왜곡의 배경 및 원인 …………………………………………… 1국내적 요인국제적 요인제2장 역사왜곡의 실상 ……………………………………………………… 3임나일본부설임진왜란조선통신사한반도 위협설한국 강점강화도 조약제3장 역사왜곡이 미치는 영향 …………………………………………… 8민족적 반일감정한·중·일 FTA 체결의 장애요인국가 이미지 실추국제 평화의 위협요소외교적 마찰제4장 일본의 역사왜곡에 대한 대응 ……………………………………… 9기존의 대응현재의 대응향후 대응제5장 향후 한·일 관계 모색 ……………………………………………… 15역 사 왜 곡 과 한 일 관 계2003년 10월 28일 일본 도쿄 도지사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집회에 참석하여 기조연설을 통해서 한 망언이 우리나라에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다. 그 내용은 “(일본은) 결코 무력으로 (조선을) 침범하지 않았다”며 “한반도가 분열해서 의견 취합이 안 되니까, 그들(조선인)의 총의로 러시아-중국-일본 어느 나라를 택할 것인지 생각한 끝에 근대화가 진전된 것 같은 기색을 한 일본인의 도움을 받으려고 해서 세계 여러 나라가 합의한 가운데 합병이 이뤄졌다”는 것이다. 이같이 끊이지 않는 망언과 역사왜곡이 되풀이되는 이 시점에서 우리는 역사왜곡, 그 배경과 원인이 무엇인지 그 구체적인 실상과 그 대응방안을 찾아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왜곡으로 얼룩진 한일관계를 재조명하여 앞으로 양국이 나아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모색해보자.제1장 역사왜곡의 배경 및 원인역사왜곡의 배경 및 원인은 크게 국내적 요인과 국제적 요인으로 분류할 수 있다.일본의 국내적 요인으로는 뿌리깊은 대륙진출의 야욕과 천황제 신권주의, 그리고 일본 자민당의 정권 지배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필요성을 들 수 있다.국내적 요인1) 대륙진출의 야욕원래 일본은 백제나 가야로부터 선진문화를 받아들여 대륙에 대한 숭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적대적 관계였던 신라로 인해 삼국이 통일되면서 대륙가 4세기 중엽에 가야 지역을 정벌한 후 임나일본부라는 통치 기관을 설립하고 한반도 남부를 경영하였다는 학설이다. 이는 일제가 한국에 대한 침략과 지배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해낸 식민사관으로 한국사의 전개과정이 고대부터 외세의 간섭과 압제 속에서 이루어졌다고 설명하는 대표적인 타율성 이론의 하나이다.일본이 그 근거로서 주장하는 것과 그에 대한 학계의 비판은 다음과 같다.(1) '일본 서기''일본 서기' 신공 황후 49년 조를 보면 "신공 황후가 보낸 왜군이 한반도에 건너가 7국 4읍을 점령하고 임나에 일본 부를 설치하였는데 562년에 임나는 신라에 의해 멸망되었다."는 기사가 있다. 이에 대한 우리의 비판은 '일본 서기'는 8세기 초 일본 천황가의 미화를 위해 저술된 것으로 5세기 이전의 것은 신화적 전설로 간주하는 등 신빙성이 결여된 책이라는 것이다. 또한 '일본 서기'보다 먼저 저술된 '고사기'에는 임나 일본부에 대해서 전혀 언급이 없다든지 4세기의 일본은 열도조차 통합시키지 못한 상태였기에 해외 침략의 여력이 없었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본측 근거는 믿을 수가 없다. 게다가, '일본'이라는 국호도 7세기에 들어와서야 사용되는데 그전에 '일본부'라는 용어가 있었다는 것은 시기적으로 맞지 않다.(2) 광개토 대왕의 비문광개토 대왕 비문의 이른바 신묘년 기사이다.“倭以辛卯年 來渡海 破百殘 羅 以爲臣民”이 그 내용인데 그들은“왜가 신묘년 바다를 건너와 백제, 가야(?),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으로 삼았다.”고 해석하면서 한반도 남부의 지배를 기정 사실화한다. 하지만 일본측의 해석과 다르게 앞부분의 주어는 왜이지만 뒷부분의 주어는 고구려로 볼 수 있다. 즉,“왜가 신묘년에 건너왔기에, (고구려가) 백제(또는 왜)를 격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라는 해석인데, 실제, 이 비문은 광개토 대왕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것이지 일본의 칭송을 위한 것은 아니며, 광개토대왕비 이기에 당연히 주어를 생략하고 있다. 그리고 신라를 도와 왜구를 격퇴한 역사적 사실도 있기에 충분히 해려가 있다.일본의 검토결과=> 일본 학계에서는, 당시 일본 정치 지도자 및 사상가들 사이에 구미열강이 조선반도에 강력한 발판을 확립 할 경우 일본은 독립을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다는 것이 널리 인정되고 있다. 이러한 학설상황에 비추어 명백한 오류라고는 할 수 없으며, 제도상 정정을 요구할 수 없다.(4) 한국강점- 일러전쟁 후, 일본은 한국에 한국통감부를 두고 지배를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이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영국, 미국, 러시아 3국은 조선반도에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을 서로 경계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에 이의를 제기 하지 않았다. 한국국내에서는 일부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민족독립을 상실하는 것에 대한 심한 저항이 일어나 그후로 독립회복 운동이 끈기 있게 진행되었다.[수정요구의견]-러일 전쟁 이전부터 이미 조선지배를 획책했으면서도 마치 러일전쟁 이후 열강의 지지하에 합법적으로 '한일병합'을 한 것처럼 기술되고 있다. 또한 일본이 '한국병합' 에 이르는 과정에서 자행한 침략행위와 강제로 체결한 조약들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한국병합'이 일본의 안전과 만주의 권익을 방위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만 서술하여 사실상 '한국병합'을 합리화하고, 일본이 한국을 병합한 정치, 경제, 군사적 목적을 은폐하고 있다. 영국·미국·미국·러시아가 서로 경계하여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에 어긋난다. 러시아는 러일전쟁에 패하였기 때문에, 그리고 영국과 미국은 한국을 직접적으로 지배할 의사가 없었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에 불과하다. 이 대목은 이들 3국이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것을 부각시켜 '한국병합' 이 마치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합법적인 것처럼 보이게 하고 있다.한국국내에서 병합을 수용하자는 목소리도 있었으나 라고 서술한 것은 일본의 사주를 받은 극소수의 친일파를 일부러 부각시킨 것이다. 이것은 '한국병합'의 정황을 잘못 이해하게 할는 대로한다. 폭발물 설치는 당연하다.(우익단체의 외무성 심의관 집 테러협박사건을 옹호하면서)·10월: 한일합방은 조선인들의 총의로 이뤄졌다. 일본의 조선 식민지는 인간적이었다.·11월: 중국인은 무지해 기뻐해 하고 있다.(중국의 유인우주선 발사성공에 대해)) 조선일보, 2003년 11월 24일자 -망언 끊이지 않는 日 이시하라제3장 역사왜곡이 미치는 영향1. 민족적 반일 감정한국은 역사왜곡으로 인해 반일 감정이 격하, 심화됨으로써, 가깝게 위치해 있는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마치 절대적 원수인 것처럼 일본을 인식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유일하게 경제 대국인 일본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예를 들면, 한·일 스포츠 교류에 있어 승부에 대한 지나친 라이벌 의식으로 인해 양자간의 원만한 교류에 적지 않은 장애 요인이 되고 있다. 국민은 '영원한 적’ 일본의 선전에 내심 긴장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제국주의 식민지배의 경험과 관계없이 세대를 막론하고 일본을 싫어하는 것은 어린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익히는‘사회화’의 한 부분일 것이다. 기성세대와 신세대의 의사소통이 거의 불가능한 요즈음에도‘반일감정’은 두 세대를 공유하는 몇 안 되는 공통의 언어가 아닌가. 하지만 일본이라는 말만 나오면 ‘본능적으로’발톱을 세우는 이러한 반일감정은 정부의 일본 문화 개방 추진에 있어서도, 개방을 지연시키는 하나의 주된 요인으로 작용했었다. 역사왜곡은 이러한 반일감정을 심화시키는 것이다.2. 한, 중, 일 FTA 체결의 장애요인자유무역협정(自由貿易協定 , free trade agreement ) 이라는 것은 흔히 영문 머리글자를 따서 FTA로 약칭한다. 국가간의 상호 무역증진을 위해 물자나 서비스 이동을 자유화시키는 협정으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제반 무역장벽을 완화하거나 철폐하여 무역자유화를 실현하기 위한 양국간 또는 지역 사이에 체결하는 특혜무역협정을 의미한다. WTO가 모든 회원국에게 최혜국대우를 보장해 주는 다자주의를 원칙으로 하는 세계무역체제인 반면, FTA는 양자주의있지 못하며 따라서 '전쟁기간 중 군대에 의해, 군대를 위해 강제매춘을 한 피해자'란 의미를 갖는 "군사적 성 노예"(military Sexual Slavery)로서 바꿀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나아가 이와 같은 행위를 반 인권적 범죄행위로 명백히 정의하고, 일본정부의 법적인 책임과 배상을 촉구해 오고 있다.2. 한국의 시민단체(1) 국내 (2001년의 국내 시민단체의 대응)2001년,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항의하는 한국의 네티즌들이 사이버시위를 벌여 일본 문부과학성과 자민당, 새 역사교과서를 만드는 모임과 출판사의 후소샤, 근린제국조항의 삭제를 문부과학성에 요청키로 한 훗카이도 의회 등 역사교과서 관련기관과 단체의 홈페이지 6곳이 수 차례 서버가 다운되어 접속이 안 되는 장애현상을 빚었다.우익단체의 교과서가 검정을 통과하자 네티즌들이 일제히 관련기관 및 단체의 홈페이지에 접속히 항의메시지를 남기는 등 사이버 시위를 벌였다. 또 과소비추방 범국민운동본부 박찬성 사무총장은 '일본의 역사왜곡 규탄 항의서명'을 받아 동남아 국가들의 시민단체와 함께 국제적인 일본제품 불매운동을 벌이겠다고 밝혔다.독도향우회 최재익 회장도 "태평양전쟁 피해 국가의 시민단체와 연대해 일본을 외교적으로 고립시킬 작정"이라며 "일본 현지에서 재일동포와 함께 항의집회도 갖겠다"고 말했다.한국기독교총연합회는 일본 역사교과서 왜곡을 규탄하고 일본 정부에 교과서 검정 취소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은 "일본 정부는 검정통과를 취소하고 주변국에 사과해야 한다"고 촉구했다.일제시대 군대위안부 출신 할머니들과 한국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관계자들은 일본의 역사왜곡파문과 관련, 일본 문부과학성에 항의서를 전달하였다. 이들은 "우리가 일본의 화장실이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까지 있다니 어찌 분노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며 "일본 정부가 검정 통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잘못된 부분의 기술을 수정하라"고 요구했고, 문부과학성 관계자들은 이들의 항의와 문제 제기에 대해 "뜻을 전하겠다"고 밝혔다.(2) 국 외 (난했다
    사회과학| 2003.11.14| 18페이지| 1,500원| 조회(897)
    미리보기
  • [국제정치] 몽골세계제국 평가A좋아요
    몽골 세계 제국 요약문12세기 초 유라시아 몽골 고원에서 발현한 몽골리안은 그 발흥의 영웅으로 칭기스 칸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근대 소련의 공산주의의 혁명의 일환으로 몽골에 대하여 그 전통 문화 가령 칭기스 칸을 영웅시하고 하는 정신을 약화시키고, 칭기스의 흔적을 없애려 하였지만 여전히 칭기스 칸은 몽골인의 가슴에 있고, 후대로 이어지고 있다.세계에 유래 없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하였다는 측면 뿐만 아니라 그 광대한 제국이 유라시아 전체의 통합과 발전을 이끔으로써 동과 서의 문물의 교류, 커뮤니 케이션과 세계관의 확대라는 측면에서 이 몽골에 대한 연구는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몽골은 종래 그 발흥지인 몽골 고원이 씨족, 부족의 지역 단위체들로 할거 또는 분할 되는 양상을 띠다가 테무친 (후에 칸이 되면 칭기스라 불림) 에 의해 나이만 부, 케레이트 부, 타타르 부 등이 통합됨으로써 하나의 울루스로 모여지게 된다. 이후 서하와 서요, 천산 위구르 왕국과 천산 카를룩 왕국, 그리고 서방의 호레즘 샤에 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몽골 울루스를 확립하였다.이후 우구데이 칸과 구육 칸 그리고 강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뭉케 칸의 치세를 거쳐 제국의 영역은 서로는 페르시아와 동유럽으로 동으로는 인도 북부, 토번, 사천(四川), 운남 지방에 까지 이르게 된다. 그리고, 뭉케 칸의 사망과 함께 아릭 부케와 쿠빌라이의 왕위 계승 전쟁으로 몽골 제국은 그 분열의 씨앗을 잉태하였고, 결국 쿠빌라이의 승리와 더불어 제국 통합의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게 된다.쿠빌라이 칸은 매우 재미있으면서도 신기한 사람이다. 그는 칭기스 칸이나 서방정벌의 전술의 신이라 불리는 훌레구 또는 강력한 카리스마의 소유자 뭉케처럼 뛰어난 능력이나 카리스마를 겸비하지 못했다. 그저 편안한 아저씨 같은 인상의 소유자이다. 그러나 그가 치세한 동안의 업적을 후에 헤아려 보면 어떤 묵직함을 느낄 수 있는 것으로 유라시아 전역에 걸쳐 궁극적으로 찾아보기 힘든 명군(明君)이었음을 알 수 있다.쿠빌라이 칸은 실상 칭기스 칸담고 있는 이 책에서 스기야마 교수는 주로 터키 이스탄불 시(市)의 토프카프 궁전에 소장되어 있는 몽골사 원전 「집사(集史) - 자미 웃 타와리크(Jami al-Tavarikh)」{)1295년 군사 쿠데타로 제 7대 훌레구 울루스 칸이 된 가잔이 재상 라시드 웃 딘으로 하여금 편찬케 한 페르시아어 역사서. 쿠데타로 왕위를 찬탈한 정통성의 약점을 보완하고, 당시 점차 내부 결속이 약화되어가고 있던 훌레구 울루스 일족을 혈통을 중심으로 한 결속력을 강화하기 위한 의도에서 편찬한 국가 정책 사업의 성격이 강하다. 페르시아어 역사라고 하지만 수많은 몽골어, 투르크어 용어로 가득하고 더욱이 한어(고대 중국어를 말함) · 티베트어 · 산스크리트어 · 라틴어 등에서 유래하는 단어 까지고 전함으로써 동서의 시각을 한 데 아우른 미증유의 방대한 역사로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그 사료적 가치는 매우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가잔의 역사」혹은 「가잔의 행복한 역사」라고도 일컬어진다.와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東方見聞錄)」{)「일 밀리오네(Il Milione)」, 「백만(百萬)의 서(書)」로도 불림.그리고 바르톨드{) 스기야마 마사아키 교수는 바르톨드에 대해 이렇게 찬탄하고 있다. 그의 연구에 의해 그 때까지 확실한 근거와 일관된 맥락으로 다루어질 기회가 거의 없었던 중앙아시아, 내륙아시아 세계의 역사가 훌륭하게 부상했다. 게다가 그 때까지 그다지 관계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어오던 내륙세계와 서아시아 · 인도 · 서북 유라시아 등의 문명권 역사가 불가분의 밀접한 관계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라시아 내륙세계가 인류사에 있어 중요한 열쇠가 되는 지역이 있다는 점을 그의 저작을 읽은 사람은 부인하지 않았고 오히려 엄연한 사실로서 받아들이게 되었다.의 러시아어 역사서 「전집(全集)」에서 주로 연구 내용을 차용하거나 인식의 기준을 두었고, 비교적 내용이 쉬워서 다른 몽골 역사서 보다 읽기가 쉬운 것이 장점이다.「몽골세계제국(蒙古世界帝國)」의 저자인 스기야마 교자리를 잡고 있던 케레이트 부의 칸, 옹{) 옹 칸 - 케레이트의 칸으로 테무친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몸을 의탁했던 부족의 장이다. 테무친은 옹 칸 휘하의 부장으로 있었으므로 그가 옹칸을 타도하고 칸의 지위에 오르기 이전 까지 사료에 기록이 미미한 것은 어쩌면 당연할 지도 모른다.을 꺾음으로써 가능하다고 설명한다. 그 방법은 기습에 의해 이루어 진 것으로 명확한 설명은 역시 스기야마 교수도 미루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미 케레이트의 옹칸에 의해 서서히 통합의 장으로 나아가고 있던 몽골 고원은 테무친이 그 주도권을 가짐으로써 더욱 통합을 가속화하게 된다.그 이후 약 2년 만에 몽골 고원의 동반부의 타타르, 메르키트, 케레이트 그리고 서반부의 나이만을 정복하여 복속시켰는데, 스기야마 교수는 이렇듯 단시간에 가능했던 것은 테무친의 혈통의 정통성, 풍부한 경험과, 원만한 인간관계{) 테무친은 사람을 차별 대우하지 않고 공명정대하며 특히 일(il)'이라 불린 동료가 된 사람에게는 매우 극진했다고 한다., 천부적인 상호 분쟁 조정 능력이 발휘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테무친의 몽골부가 시의 적절하게 등장했다는 점, 당시 몽골 유목 민족 전체에 베어 있던 통합 욕구라는 시기와 운의 요인이 3박자로 들어맞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몽골 고원{) 통합된 몽골 고원을 몽골 울루스(몽골 제국) 또는 예케 몽골 울루스(대 몽골 제국)이라 한다.을 통합한 칭기스 칸은 그 영토를 동생들과 네 아들들에게 나누어주어 각각 분할 통치하게 하여 이로써 대 몽골 제국 이 탄생하였다.몽골 통합을 달성한 칭기스 칸은 곧장 군제를 천호군{) 칭기스 칸은 국내 유목민을 95개의 천호로 분할 하였는데 천호란 행정 단위인 동시에 군사 단위로 1000 명의 병사를 제공토록 한 한 구역이다.으로 재편하고, 거란 제국의 조직 체제를 대폭 받아들여 체제를 정비한 다음 곧장 대금전쟁의 길에 올랐다. 뛰어난 기동력과 전투력으로 금의 수도 중도(中都)를 점령하고 귀환한 후 이듬해 곧장 서방으로의 전격에 나섰다. 목표다. 몽골의 서방 정벌, 즉 바투의 서방 정벌의 첫 번째 목표는 카스피 해, 흑해, 카프카즈 북부 초원 일대 곧 킵착 초원 지대를 점령하는 일이었다. 바투의 서방 정벌군은 이곳에 거주하던 유목 기마 민족(아스 캉글리)을 흡수하는데 성공하여 목표 영토를 획득함과 동시에 강력한 군단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전과를 올린다.이후 파죽지세로 서쪽으로 진격하여 불가르족의 불가르 국을 정복하고 북쪽의 루시i지금의 러시아)를 침공하여 복속시키고, 군대를 둘로 나누어 각각 크라코우와 헝가리 왕국을 점령한다. 바투의 본대는 헝가리의 국왕 벨라 4세를 계속 추격하여 심지어는 비엔나 교외까지 다다르게 된다. 독일과 이탈리아에서는 폴라늘나 헝가리로부터 피난해 온 사람들로 넘쳐나 포의 도가니에 빠졌다.그러나 마침 그 시점, 1242년 3월 본국에서 바투에게 서한이 하나 도착한다. 우구데이의 서거였다. 결국 바투는 그렇게 병력을 철수시켰고, 서유럽은 파멸직전에 구원되었다. 여기서 스기야마 교수는 바투의 서방정벌에 대하여 단순히 러시아 동유럽 원정 이란 명칭을 쓰는 데에 반대한다. 이 정벌에서 몽골 국으로는 카스피 해 북부의 킵착 초원지대의 점령과 그곳의 유목 기마 부대의 흡수도 동유럽 루시 평정 못지않게 중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바투의 서방 정벌의 명칭은 킵착 카프카즈 루시 동유럽 원정 이라 되어야 함을 강조하면서 세계사의 서유럽 중심의 사관을 비판하고 있다. 이런 그의 논리는 눈여겨 볼만하다.동유럽과 킵착 초원지대를 평정하면서 조치 울루스의 영토 범위는 굉장히 확대되었고, 따라서 몽골 제국의 세력 권도 그 만큼 넓어졌다. 몽골 기마군단의 이러한 승리의 요인에는 무엇보다도 기동력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와 함께 병행된 공포 전략은 몽골 군단의 전쟁 수행에 엄청난 플러스 요인이 되었다. 이런 칭기스칸 시대의 호레즘 샤 서방 정벌과 우구데이 조의 동유럽 킵착 정벌 및 대부분의 원정에는 일관되게 공포 전략의 효과적인 수행이라는 몽골군의 특징이 있다.페르시아 역사서들과 인도 북부에 대한 진공을 위임, 중국을 겨냥한 친 동생 쿠빌라이에 대한 동방경략의 위임, 곧 유라시아를 크게 분할하여 서북쪽의 바투 휘하의 조치가, 서남쪽의 훌레구의 서정군, 동남쪽의 쿠빌라이의 동정군, 동북쪽의 동방 3왕가, 그리고 서 몽골 지역의 아릭 부케라는 그림으로 세계를 재단했다. 분명 이는 4명의 형제에 의한 정권으로 그 이전 우구데이 시대와 달리 명확한 세계 정복 전략의 밑그림이었다고 볼 수 있다.뭉케 카한에 의해 시작된 세계전략 중 동방경략의 남송 원정은 쿠빌라이에 의해 주도되었다. 서방정벌의 훌레구와 함께 쿠빌라이는 뭉케 카한에 의해 역사에 그 이름을 드러냈다고 볼 수 있다. 쿠빌라이의 남송 진공에 대해서 기본적으로 뭉케 카한은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급한 성격의 뭉케 카한은 장기전을 대비한 쿠빌라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친정을 하다가 화증과 당시 갑작스럽게 창궐한 바바 {) 바바 는 페르시아어, 아랍어로 전염병, 역질, 콜레라 등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고, 페스트 를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만약 그랬다면 14세기 몽골의 중심으로 한 거대한 유라시아의 번영을 무너뜨린 흑사병은 13세기 중반 이후에 동방에서 발생한 것이 된다. 그러나 페스트 라고 확정할 수 있는 증거는 없다.의해 사천(四川)에서 죽는다.몽골 본진에 있는 아릭 부케의 의해 정권이 이양될 것이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쿠빌라이는 부장 바아투르와 함께 모두의 예상을 깨고, 남진을 계속하여 장강의 악주에서 대담한 도강 작전으로 우군인 우량카다이를 구출하고, 이를 계기로 차가타르의 동방 3왕가와 콩기라트의 부마가, 사천 방면의 여러 군단, 그리고 뭉케 본대의 잔류 부대가 모두 합류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선대의 유지를 계승으로 북으로 돌아갈 수 있는 명분을 얻음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적 기반으로 실리를 다질 수 있게 되어 카한의 지위를 넘볼 수 있게 되었다.쿠빌라이는 이어 남송과 강화를 맺고, 중도의 금련천으로 돌아가 자파만의 쿠릴타이를 열어 아릭 부케 보다 앞서.
    사회과학| 2003.07.12| 12페이지| 1,500원| 조회(941)
    미리보기
  • [언론의역사] 민족지와 시대적 상황과의 상관성
    1.서론민족지라 함은 일제 점령기에 강력한 항일 논조로써 우리 국민의 의식을 대변하고 일제를 비판한 신문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당시 발행된 신문들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민족지와 친일지로 그 성격이 바뀌어 버린다. 당시 시대적 상황으로는 민족지는 오랫동안 존재 하기 어려웠다. 그러면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겠다.2.본론1. 일제치하 (1910∼1919)우리 나라가 일제에 침탈 되기 이전부터 민족지는 존해해 왔다. 대표적으로 ≪황성신문≫과 ≪뎨국신문≫이 그 신문이다. ≪황성신문≫의 남궁억, 유근, 장지연, 박은식, 신채호 ≪뎨국신문≫의 이종일, 이승만 같은 당대의 논객과 우국지사들이 한말 언론계를 이끌었다. 그 중에서도 ≪황성신문≫의 장지연은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쓰고 경 무청에 체포되는것과 동시에 황성신문은 정간처분을 받았다.한일합병 후 무단정치가 실시되면서 한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은 일제히 자취를 감추었고 한국어 일간지로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의 독무대가 되었다. ≪매일신보≫는 일제 기간 동안 중단되지 않고 발행된 유일한 한국어 신문이다. 이 신문은 일제의 조선침략을 합리화하는 반민족적 논조로 발행되었다.2. 3·1운동후 (1919∼1931)1919년 8월 12일 일본 총독은 헌병경찰제의 폐지, 조선인의 관리 임용 및 대우 개 선, 언론 집회 출판의 고려, 지방자치 시행을 위한 조사 착수, 조선의 문화와 관습 의 존중 등을 시정 방침으로 천명했다. 이로써 가혹한 무단 통치가 끝나고 이른바 문화정치가 시행되기에 이 르렀다. 문화정치는 반도 통치의 기본 방침에서는 조금도 달라진 점이 없었다. 일본의 식민 통치를 강화하면서도 동시에 외견상 억압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유화시키기 위해 통치의 색조를 바꾼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문화정치는 언론의 허용 영역을 넓힘으로써 언론 분야에는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총독부에서 신문의 창간을 허가할 방침을 밝히자 민간 유지들은 경쟁적으로 신문 발행의 허가를 얻고자 총독부 도서과에 신청서를 제출했다. 신청서는 십여 건에 달했으나 총독부는 1920년 1월 6일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및 시사신문의 3개 신문만을 허가했다. 일제가 친일 세력에 두 개의 신문을 허가하고 민족 진영에 하나의 신문을 허가한 것은 이른바 세력균형주의라는 미명하에 2대 1의 비율로 언론계의 판을 짜려 한 총독부 당국의 치밀한 계획이 반영된 것이다.한국언론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발행허가의 억제가 그 첫 번째 단계였다. 1910년대 무단정치기간에 한국인에게는 단 한 건도 신문발행을 허용하지 않았던 것이 그 구체적인 예였다. 그러나 극히 제한된 숫자의 신문을 허가해준 뒤에도 신문발행 이전에 통제를 가하는 '사전탄압'과 일단 제작된 신문에 대해 행정적 또는 사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사후탄압'이라는 2단계의 장치를 마련해두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문을 발매하지 못하도록 하거나 기사를 삭제하는 것이 '행정처분'인데, 이와 병행하여, 문제된 신문을 제작한 언론인에 대해 법적인 조치를 취하는 '사법처분'이 뒤따르는 경우도 있었다. 사법처분은 문제된 언론인에게 벌금 또는 체형을 가하는 것을 말한다. 일제통치기간 동안 언론인들은 빈번한 사법처분으로 고통을 당하는 외에 기사삭제와 압수처분 등의 탄압과 정간처분으로 경영상 어려움을 겪었다. 언론인들은 '무명회'와 '철필구락부'같은 언론단체를 결성하여 저항을 시도하였다.일제통치기간 동안에 발행된 ≪동아일보≫와 ≪조선일보≫가 민족지인지 아닌지 하는 문제를 한마디로 간단히 규명하기는 어렵다. 신문의 논조와 주장이 시대상황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기 때문이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족지로 불러도 좋을 정도로 항일적인 제작태도와 이에 걸맞는 논조를 보인 때도 분명히 있었다. 조선 민중도 ≪동아일보≫를 민중(또는 민족)의 표현기관 또는 민족진영의 구심체로 인식하였던 시기가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의 지면을 놓고 보면 민족지로 부를 수 없는 모습을 보였던 것도 숨길 수 없는 사실이었다.3. 친일 강요기 (1931∼1945)1920년대 후반부터는 언론의 논조가 점차로 위축되었다. 1931년의 만주사변 직전부터 한국에서는 말할 것도 없고 일본의 언론도 군부 파쇼의 통제 아래 놓이게 되었다는 것이 그 외적인 이유였고, 국내에서도 일제의 오랜 식민지통치의 결과로 민족독립운동이 전반적으로 퇴조를 보이고 있었던 상황에도 영향을 받은 것이었다.1930년에 들어서는 총독부의 민족지들에 대한 지면 요청으로 신년호 1면에다 총독의 연두사와 휘호를 싣는 지면 변화를 보였다. 1920년대화는 제작태도가 크게 달라진 것이다. 총독부 경무국 도서과장 다치다(立田淸辰)에 의하면 1920년대까지는 일본의 국가적 경사나 축제일이 되면 제국 영토 내는 물론이고 수교관계에 있는 다른 나라의 신문에서까지도 크게 취급하는 사항을 한국의 신문들은 전연 묵살해버리는 '소극적 불경'의 태도를 보였다는 것이다. 반면 인도, 필리핀, 베트남 등 식민지 치하에 있는 약소민족들의 민족투쟁에 대해서는 열심히 다루어왔는데, 그 태도가 1930년대로 넘어오면서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이렇게 되자 기사의 압수·삭제도 현저히 줄어들게 되었다. 1930년대에는 신문 경영자들이 수지타산을 가장 우선적인 경영방침으로 생각하여 20년대까지의 민족주의적인 태도, 민족지를 지향하던 신문의 논조가 퇴색하게 되고, 그 결과는 신문의 지도적, 계몽적 임무를 몰각하고 보도의 기능에 치중하게 되었다. 보도의 기능 가운데도 "무의식한 민중의 호기심을 이끌기 위하야 저급한 흥미 본위의 보도에 치중케 되었으며, 그리고 신문사가 정치적 경향을 가진 지식분자의 진영으로 자처하던 것이 변하여 영리기관의 사무인을 모아놓은 곳이 되고, 지방지국 경영도 점차로 상인의 손으로 옮아가게 되었다"는 비난까지도 들었다.1920년대의 ≪동아일보≫≪조선일보≫의 논조를 30년대의 그것과 비교해보면 분명히 크게 달라져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게 현저히 달라진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첫째는 제국주의 일본 군부의 철저한 통제하에 놓여 있었던 신문이기에 표현의 자유가 없었다는 사실이다. ≪동아일보≫≪조선일보≫와 ≪시대일보≫의 3개 민간지는 매년 수십 건의 압수처분을 당하였고, 수차례에 걸친 정간과 언론인이 구속당하는 필화를 입었다. 이는 20년대의 언론탄압이 어떠하였는가의 실상을 증명하는 것이다. 20년대에 비해 탄압의 강도가 더욱 높아진 30년대에는 논조가 현저히 약화되었으며, 이에 따라 압수의 건수는 오히려 줄어들었고 30년대에는 정간사건도 한 번밖에는 없었다. 이는 이미 언론통제가 체제적으로 확립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사회과학| 2002.11.20| 3페이지| 1,000원| 조회(45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2
12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3
  • A좋아요
    7
  • B괜찮아요
    2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3월 30일 월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12:54 오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