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PORT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이 신에 의해 정해진 숙명이라면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5 -◎ 오이디푸스왕의 비극이 신에 의해 정해진 숙명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그리스 시대의 문화는 서구의 모든 예술인들과 지성인들의 이상적인 모델이었다. 그리스 시대의 문화는 조화와 안정, 통일을 지고의 미로 삼고 있었고, 그러한 그들의 이상에 맞는 문화를 창조해 낼 수 있는 역량 역시 그들은 지니고 있었다. 그 결과 그리스 시대의 모든 예술은 2천년이라는 세월을 거치면서도 그 빛이 전혀 바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스 시대의 예술은 모든 분야에서 나름대로의 수준에 도달하였지만 가장 그 성과가 뚜렷하면서도 그 영향을 후세에 넓고도 깊게 미친 분야로는 문학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그리스 문학 중에서도 아에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 그리고 에우리피데스라는 걸출한 삼대 비극 작가가 창조해 낸 그리스 비극은 여타의 문학 작품에 비해 그 주제나 극적인 구성의 측면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은 완숙미를 보여주어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의 미의 전형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들의 작품은 수효가 굉장히 많으나(예를 들어 소포클레스의 작품은 123개나 된다), 그중 전해져 내려오는 것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 중 소포클레스의 비극 작품은 아에스킬로스와 에우리피데스의 작품 경향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융합이 단순한 혼합이 아닌 더 높은 차원으로의 지향을 의미하고 있어서 후대의 사람들에게 가장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여기서는 그의 비극중 가장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을 뿐만 아니라 그 구성이라든가 주제의 심각성 등에서 그의 모든 작품들 중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오이디푸스 왕 Oidipous Tyrannos'에서 왕의 비극이 신에 의해 정해진 숙명이라면 인간의 존엄성을 어떻게 주장될 수 있는가? 에 대해 간단하게 그 주제에 대해 논의해 보자.소포클레스 (Sophokles B.C. 496 - B.C. 406)가 살던높아져만 갔다.또한 그리스 지역의 패권을 두고 다투고 있던 스파르타와는 전면적인 승리가 아니면 패배라는 극단적인 대안으로 밖에는 대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인식은 그의 작품 세계 전반에 직접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의 비극 '오이디푸스 왕'은 '콜로누스의 오이디푸스왕', '안티고네'와 함께 내용상 삼부작을 이루고 있는데, 안티고네 다음으로 쓰여져서 연대기 상 삼부작의 중간에 위치하며, 그의 전 작품 세계에서 보아도 거의 핵심에 위치하고 있어 그의 작품 세계에서의 중요성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이 작품은 소포클레스 자신의 사상과 신념을 형상화하였고, 반영하였음을 먼저 알아야 할 것이다.작품의 줄거리는 굳이 상세히 말하지 않아도 될 만큼 유명하다.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아버지인 라이오스 왕을 아버지인 줄 모르고 살해하며,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보상으로 그의 어머니를 아내로 얻게 된다. 그 후 그러한 사실을 알게 된 후 그는 자신의 운명을 저주하며 자신의 두 눈을 찔러 장님이 된 채로 나라에서 추방을 당한다. 이 얘기는 인류의 모든 사회에서 금기시되어 있는 존속살해(patricide)와 근친상간(incest)이라는 버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다.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읽은 후 느끼는 것은 운명이라는 것의 가혹함이 아닐까 한다. 즉 우리의 그 어떤 몸부림도 운명이 예정해 놓은 틀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며, 운명을 피하려는 그러한 노력들은 결국 우리의 운명을 재촉하는 결과가 될 뿐이라는 것; 운명은 바꿀 수 없으며, 또한 우리는 우리 앞의 운명이 어떤 것일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 그런 것이 아닐까 한다.사실 이 작품을 처음 접하게 되면 신탁의 위력이라는 것에 절망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이해는 우리가 이 '오이디푸스 왕'이라는 심오한 작품을 너무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한다. 과연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이 운명의 엄청난 힘과 그 앞에서의 체념이었을까? 난 그렇지 않다고 생각맹세한다. 그러나 그 저주의 주인공이 바로 자신임은 곧 관객에게 알려지게 된다.구성상에서 이 극의 특징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사건의 전모가 관객에게는 극의 초반부에 - 예언자에 의해서 - 아주 명료하게 제시된다는 점이다. 물론 오이디푸스는 자신의 과거와 아무런 연결점도 찾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예언이 자신의 얘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그가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의 범위 내에서 아주 합리적인 추론을 시도한다.즉, 테이레시아스(예언자)와 크레온이 서로 공모하여 자신을 몰아내려는 계획을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디푸스의 전모를 알고 있는 관객들은 합리적이라고 생각되는 오이디푸스의 이러한, 사실상 불합리한 추론의 비극성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체험은 극이 절정으로 치달을 수록, 즉 오이디푸스가 점점 더 사실을 향해 나아갈 수록 더욱 강하게 경험된다. 어쨌든 오이디푸스는 예언자의 얘기가 자신의 얘기가 아님을 입증하려고 각계각층의 관련자들을 소환하고, 또 그들의 증언에서 일말의 안도감을 얻기도 하지만, 그것은 결국 또 자신의 얘기였음이 다른 사람에 의해 증명되는 악순환을 경험한다. 이러한 극의 전개 구조는 우리에게 운명이란 것의 엄격함과 냉혹성을 아주 효과적으로 전달해주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운명이 그의 작품에서 오직 하나의 주인공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합리한 일일 것이다. 비극의 영웅, 즉 이 비극의 진정한 주인공은 운명에 휘말리는 인물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에 정면으로 맞서고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인물인 것이다.운명을 인간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것으로 받아들이는 입장은 '운명 비극'이라 불리는 많은 작품을 양산해 냈다. 그러나 진정으로 위대한 비극은 인간이 노출되어 있는 어둡고 예견할 수 없는 운명과 그것에 저항하여 싸우려는 인간의 존엄성 사이의 팽팽한 긴장에서만 산출될 수 있는 것이다. 분명 이러한 노력은 쓸데없는 것이 될 소지가 크다. 이러한 노력들은 주인공을 더욱 큰 고통 속으로 밀어 넣것이기 때문이다.그의 단호한 결정은 물론 운명의 엄청난 힘 앞에선 무력하다. 그러나 그러한 패배 속에서 진정한 인간의 위대한 존엄성은 그대로 남아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소포클레스의 다른 비극의 주인공들 같이 뛰어나고도 불굴의 정신을 소유하고 있다. 운명의 그물은 그를 점점 강하게 죄어온다. 그는 만약 운명을 알고 싶다는 그의 호기심을 조금만 억누른다면 마지막 순간의 재앙은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재의 평온을 희생하면서도, 즉 단순하고 평온한 생존을 희생하는 한이 있더라도 운명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계속할 수밖에 없는 비극의 영웅, 오이디푸스인 것이다. 이러한 비극적 영웅 옆에는 편하게, 안전하게, 비밀은 비밀인 채로 살아가려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안티고네의 옆에는 이스메네가 있었고, 오이디푸스의 옆에는 이오카스테가 있었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진실 추적 과정을 막아보려고 애를 쓰고, 심지어는 아폴로 신에게 기원하기까지 한다. 그러나 그녀의 이러한 노력은 결국 진실의 노출을 더욱 촉진시키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다. 결국 소포클레스가 오이디푸스라는 인물상에서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운명이란 것에 대한 단순한 체념이 아니라, 운명이라는 거대하고 거역할 수 없는 힘과 맞서서라도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진정 용기 있고 위대한 '인간'의 모습이었음을 우린 읽어낼 수 있다.소포클레스의 비극 오이디푸스왕'의 이야기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대한 탁월한 이해가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독특한 세계관, 그 문화의 산물이다. 도탄에 빠진 국가를 구하기 위해 진실을 추적하는 오이디푸스왕이 피할 수 없이 마주하게 되는 운명과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갈등이 작품의 극적인 구조를 형성하고 있는 이 극은 아리스토텔레스가 비극을 정의할 때 전형적인 비극의 모델이 되었기도 하였다.고통과 몰락을 경험하는 비극의 주인공들을 보면서 우리는 그 비극이 과연 어디에서 연유하는 것인가를 묻게 된다. 오이디푸스왕은 바로 인간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의지와 운명 사이에 불가피 의지를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 그 운명에 대응하는 그의 결단의 순간부터 관객은 자유로운 인간 오이디푸스의 고귀함을 보게 된다. 그의 노력은 자신의 기원, 자신의 범죄를 대면하는 지극히 고통스러운 순간으로 이어지지만 그는 끝내 진실에 대하여 눈을 감지 않는다. 오히려 진실에 눈멀어 있던 스스로를 단죄한다. 자신의 눈을 찌르는 그의 용기를 보면서 우리는 자유 의지를 갖고 자신의 삶과 자신의 역사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지고 가는 한 인간의 선택을 경험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자유로운 인간의 선택, 자신의 행위의 결과와 삶의 여정을 끝까지 자신 속에서 완결하려는 한 고귀한 인물의 선택이다.지금까지 논의해 왔던 오이디푸스의 '개인 의지론'은 오이디푸스의 도덕적 단죄를 논하면서 다시 한 번 더 뒷받침될 수 있을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물론 그가 유죄임은 우리의 법의식이나 현대 사회의 법의 기본 논리, 즉 '무지는 무죄의 이유가 될 수 없다'라는 원칙에 비추어 봐도 확실하다. 법적인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도덕적 차원에서도 그는 용서할 수 없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근친상간은 거의 모든 인간의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터부시되고 있는, 인간의 가장 큰 금기 중의 하나이다. 근친상간은 단순히 감정적으로 거슬릴 뿐만 아니라 그 사회적, 정신적 함의가 중요하여, 레비-스트로스와 같은 인류학자는 세상의 모든 사회의 기본 구성 원리로서 근친상간을 파악하기도 했고, 프로이드는 인간의 무의식이 자아 의식으로 도약하게 되는 계기를 근친상간과 거기에서 연역되어 나온 거세 콤플렉스라는 개념으로 이해하려 하기도 했다. 즉 그는 신이 정해준 경계를 넘음으로써 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로 묘사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앞에서 논의한 그 시대의 자유로운 사상적 분위기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을 것이다). 종합하면 오이디푸스는 법적, 도덕적, 종교적이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그는 스스로 자신의 눈을 찔러 장님이 되고 자신이 통치하던다.
고도를 기다리며고도를 기다리며 라는 제목 때문이었는지 나는 책을 읽는 동안 내내 작품 속에 나타난 고도란 무엇을 뜻하는가를 찾고자 했다. 그리고 책을 읽는 동안 나 또한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게 되었다그러나 작품 어느 곳에서도 실제적인 고도는 나타나있지 않는다.작품에서 에스트라공과 블라디미르라는 인물은 언제 올지 모르는 고도라는 인물을 기다리면서 두서 없이 떠들고 무의미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지루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기다리는 고도는 끝내 나타나지 않고 그들은 다시 고도를 기다리며,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간다이렇듯 이 작품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각각의 연속된 하루 하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삶의 연장선을 나타내주는 어제와 오늘이며 또다시, 그것은 오늘과 내일이 될 것이다.과연 특정한 줄거리도, 극적 장면도 없는 작품을 통해 작가가 보여주고자 했던 것은 무엇이었을까?내가 생각하는 고도란 꿈 내지는 희망이다.나는 에스트라공과 블라드미르의 삶의 의미인 고도에 대한 기다림을 통해서 우리는 왜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 그리고 나는 과연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지에 대한 실존적 물음을 하게되었다. 그리고 이 물음 끝에 나는 나의 꿈에 대해서 생각 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우리는 누구나 꿈이라는 기다림을 갖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물론 그 꿈은 이루어질 수도 있고,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우리가 꿈꾸는 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그러기에 작품 속 두 인물이 고도가 오면 어느 정도의 고통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를 가지고 살아가듯이 자칫 부질없어 보이는 그들의 기다림은 결국 우리가 품고 있는 희망과 같은 위치에 있는 것일 수도 있고 더 나아가 그 기다림은 삶을 살아가는 힘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흔히들 이 작품을 부조리한 삶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잘 알고 있다. 허나 이처럼 부조리하다고 느끼는 삶이야말로 그 자체로만 본다면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이기에 가장 현실적이지 않나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솔직히 이 작품의 뚜렷한 메시지를 한마디로 결론짓지는 못했다. 하지만 작품을 읽고 나서 작품에 비추어 자신의 모습을 되짚어 보는 것도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내가 이 작품을 읽은 후 느낀 점을 이야기하자면 작품 속 인물들이 무작정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은 내가 무척이나 한심스럽게 보여졌다. 하지만 그 뒤에 오는 씁쓸함이란.. 그 이유를 나 자신은 너무도 잘 알고 있다.누군가 내게 당신이 기다리는 고도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아마도 나의 꿈에 대해 말하게 될 것이다. 허나 설령 나 자신이 나의 꿈을 기다리며 산다고 할지라도 실제로의 나도 그들처럼 그럭저럭 하루 하루를 시간 보내기에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 않는가!!그렇다면 타인이 나의 모습을 봤을 때도 내가 작품 속 인물들을 보고 느꼈던 생각들과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것 같다.그러기에 이 작품은 블라드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자아를 상실하고, 고도를 기다림에 있어서 자유롭지도 못해서 시간과 기회를 속박 당한 채 그냥 막연하게 고도를 기다리는 모습을 한심스럽게 느끼게 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자신만의 진정한 고도를 그려봄과 동시에 자신의 고도를 기다리는 각자의 삶의 자세에 대해 한번쯤 생각해 볼 수 있게끔 하고 있는 것 같다.
◎ 율리시스의 시선컴퓨터 공학과 2학년 손호영(9858031)데오 앙겔로플로스감독의 은 종종 우리를 멈춰 세우고 질문으로 이끈다. 그리스의 철학적인 영화시인이라고도 불리는 앙겔로플로스의 이 영화는 깐느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받았으나, 그가 그랑프리를 놓쳤다는 사실을 알자 상패를 집어던지고 퇴장(!)한 사건으로도 유명하다. 2시간 53분 동안 마치 거대한 하나의 강처럼 흐르는 이 영화는 때로 강 한복판에서 돌연 멈추어 섰다는 느낌을 줄만큼 느리다. 그것은 스피드 광처럼 있는 힘을 다해 폭주하는 현대영화의 흐름 속에서 마치 일종의 반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앙겔로플로스 자신이 방랑하는 율리시즈처럼 시간 속의 여행자가 되고 싶어하는 때문인지도 모른다.앙켈로풀로스에게 영화는 여전히 여행이다. 그는 '안개 속의 풍경'에서 소년 소녀가 여행했던 바로 그 공간에 이번에는 영화감독을 세워놓고 여행을 떠나도록 만든다.그리고 이번에도 역시 그 여행은 견딜 수 없이 고단하기만 하다.영화감독 A(하비 카이텔)는 군사정권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을 떠났던 그리스 감독이다. 그는 자신의 영화 개봉에 맞추어 35년만에 조국으로 돌아온다. 미국에서 고향으로 돌아온 영화감독 A(하비 케이튼)는 역사 속에서 사라진 필름을 찾는다. 그 영화는 일백년전 그리스 최초의 영화 감독이었던 마케도니아 형제가 만든 무성영화 필름이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이 필름은 발칸반도 어딘 가로 사라졌다는 소문만을 듣는다.영화감독 A는 혼자서 발칸반도로 여행한다. 그러나 그 여행은 또한 죽음과 전쟁터로의 여행이다. 보스니아와 세르비아로 나뉘어진 두형제는 서로 종교와 민족을 내세워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을 벌이고 있었다. 영화감독 A(하비 케이튼)는 강물을 따라 흘러가듯이 그 전쟁터를 가로지른다. 어디서인지 알 수 없는 배가 쓰러진 레닌 동상을 싣고 흘러간다. 쓸쓸한 첼로의 꺼질 듯한 한숨소리같은 선율이 흐르고, 여기저기서 자식 잃은 부모들의 절규와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들려온다. 영화감독 A(하비 케이튼)는 여기서 자기가 찾아가는 사라진 일백년의 영화역사가 다름 아닌 피로 얼룩진 발칸반도의 일백년의 역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앙겔로플로스는 두 개의 시간을 겹쳐 놓는다. 그 하나는 1895년 12월 29일날 태어난 영화의 일백년이며, 또 하나는 세르비아계 청년의 총성과 함께 우리시대의 근심으로 시작된 일백년간의 발칸반도 전쟁이다. 그 속에서 율리시즈는 여행한다. 그 여행은 시간의 지형학이라고 불릴 만큼 기억 속에 저장된 공간으로서의 역사이다.그것을 앙겔로플로스는 아주 독특한 방법으로 화면 속에 담는다. 그는 롱테이크(카메라를 정지시키지 않고 장시간 촬영하는 기법, 임권택 감독의 에서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아버지와 소화, 동호가 길 저편에서 카메라 발 앞까지 끊기지 않고 걸어오는 장면)를 이용하여 시간의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 낸다.앙겔로풀로스의 주인공이 여행하는 공간은 언제나 그리스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기억의 공간이다. 그런데 그 여행은 왜 험난하게 펼쳐지는 수난 같은 것일까? 마나키아 형제의 필름처럼, 잃어버린 것을 찾아가는 여행은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겹쳐지는 공간으로의 여행이며, 때문에 자꾸 현재의 모습을 가슴 아프게 돌아보도록 만든다.그러나 A를 통곡하게 만드는 진짜 이유는 발칸반도에서 계속되는 전쟁일 것이다. 마나키아 형제의 필름을 현상하지 못하게 만들었던 발칸반도의 전쟁이 1990년대에도 계속되고 있는 현실을 어떻게 눈물 없이 바라볼 수 있겠는가? 그는 그 전쟁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는 사라예보에 도착하고, 어쩔 수 없이 이보레비 가족들이 몰사하는 현장에 자리를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