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사일정과 약도3월 25일잠실 종합운동장 출발 (8:30)전주 도착 (12:30)경기전전동교회, 풍남문점심 식사김제 금산사 (3:10)정읍 전봉준 고택 (5:00)황토현 전적지장성 필암서원 (7:00)숙소3월 26일숙소 출발 (8:30)광주 경렬사 (9:40)화순 운주사 (11:10)점심 식사장흥 보림사 (2:10)강진 무위사 (4:00)대구면 청자 도요지 (5:30)숙소3월 27일강진 영랑 생가 (9:20)백련사다산초당해남 윤고산 유적지 (12:30)점심 식사대흥사 (2:30)진도 명랑대첩비용장산성 (5:00)벽파진 (6:00)숙소3월 28일나주 반남 고분군 (10:30)나주관아터미천서원 (1:00)점심식사고창 읍성 (3:20)25일 설레는 첫 답사의 첫째 날.8시 반쯤... 관광버스에 탑승하여 오랜 시간 끝에 전주에 도착하였다. 전주에 도착하였을 때는 벌써 정오가 지나 시계바늘은 12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전주에 도착하여 맨 처음으로 첫 답사의 첫발을 경기전에 디뎠다. 사적 제 339호인 경기전(慶基殿)은 전북 전주시 완산구 풍남동에 위치한 조선 태조 이성계의 영정을 봉인한 전각이다. 경기전은 경사로운 일이 있는 터전이라는 뜻으로 이성계 가문인 전주 이씨의 발상지에 제사를 지낼 사당을 지은 것이다. 원래는 태종 10년(1410년)에 전주, 경주, 평양에 태조 영정을 모셔 어용전이라 불렀는데 뒤에 태조 진영이라 했다가 세종 24년(1442년)에 전주는 경기전, 경주는 집경전, 평양은 영흥전이라 달리 이름했다. 임진왜란 당시 소실 된 것을 광해군 6년(1614년)에 관찰사 이경동이 새로 중건한 것이 현재의 건물이다. 경기전 본전 좌우에는 향정과 옥교, 신연 등의 목적이 다른 가마들이 전시 되어있었고 본전의 태조 영정 외에도 세종, 정조, 고종, 철종, 영조 등의 초상화도 전시되어있었다. 경기전을 관람한 후에는 경내의 전주사고와 예종대왕태실을 살펴보았다.조선 전기에는 4군데에서 실록을 보관하고있었다고 한다. 춘추관과 성주, 충주, 전주 이렇게 네 곳에서 을 재건하였다는 말에 우리민족의 가슴아픈 역사가 가슴에와 닿았다. 전주사고는 다른 건물들과 달리 모양이 특이하였다. 건물의 바닥이 땅에 붙어있지 않고 높은 받침기둥에 놓여 마치 수상가옥 같은 형상을 하고 있었다. 이유인 즉 바람이 잘 통하게 하여 온도와 습도를 조절하는 것이었다. 실록이라는 것이 중대한 문서이니 만큼 오래 보존하기 위해 심사숙고한 선조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태실이라는 것은 아기가 태어날 때 나오는 태를 석실에 안치한 것이다. 왕가에서는 아이가 태어나면 태를 태실에 안치하기도 하였는데 이 예종대왕태실이 그와 같은 경우이다. 원래는 다른 곳에 있던 것을 이 경기전 옆으로 옮겼다고 한다. 태실의 생김새는 모르는 이가 보면 부도로 생각할 만큼 탑이나 부도의 형식과 비슷한 것 같았다. 태실 옆에는 비석도 놓여져 있었는데 거북형상의 귀부와 비신 그리고 용형상의 이수로 이루어져 있었다. 예종대왕태실과 비석을 보고 조선시대 당시 왕의 위엄이 태를 보관할 정도로 높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경기전을 떠나 버스로 이동을 하면서 전동교회와 풍남문을 창을 통해 볼 수 있었다. 차로 약간 더 이동하여 점심을 먹을 전주 시내 식당으로 이동하였다. 이동하면서 전주시내 골목골목의 모습을 보고 다정다감한 느낌을 받았다. 좀 유치하긴 하지만 꾸밈없는 간판들과 골동품가게들은 서울 시내에서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라 기분이 좋았다. 점심으로 원조 돌솥 비빔밥을 먹었는데 원조라 불러도 손색이 없게끔 맛이 아주 일품이었다. 게다가 아침에 부랴부랴 나오느라 그날 처음 먹는 밥이라 아주 맛있게 먹었다. 점심을 먹고 금산사로 이동하였다.금산사(金山寺)는 김제시 금산면 금산리 모악산에 있는 사찰로 얼마전 TV에 방영되었던 태조 왕건의 숙적이었단 후백제의 견훤이 큰아들 신검에 의해서 유폐되었던 곳으로 유명하다.금산사는 진표계 법상종의 원류 사찰로 전라도 일대의 미륵신앙의 중심이었던 곳이다. 금산사에 들어서서 입구로부터 일직선상으로 대적광전이 보였다. 대적광전은 주전으로 비로다. 어떤 문화재라도 중요하지 않은 것은 없겠지만 특히 금산사에 있는 유적들은 규모와 아름다움 면에서 감탄할만했다. 석련대는 보물 23호로 한 개의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하며 상당히 화려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석련대는 현존하는 불상 대좌 중 가장 우수한 작품이라 평가되고 고려 초에 조성 된 것으로 추정되고있다. 이외에도 금산사에는 엄청나게 많은 유적들이 있었고 이번 답사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곳으로 금산사를 으뜸이나 버금으로 서슴없이 꼽을 수 있다. 금산사의 멋진 모습을 뒤로하고 정읍으로 갔다.정읍에서는 전봉준 고택과 황토현 전적지를 둘러보았다. 정읍에 도착했을 때가 오후 5시로 벌써 어둑어둑 땅거미가 깔리고 있었다. 이곳 전라도 지역은 동학동민 운동과는 따로 생각할 수 없는 곳이다. 녹두장군으로 불려지는 전봉준은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가 실제 살았던 집은 이미 반역자이기 때문에 흔적을 찾아볼 수 없고 우리가 간 곳은 최근에 임의로 복원 한 것이라고 한다. 황토현 전적지는 동학 농민군이 처음으로 관군과의 싸움에서 승리를 거둔 곳이다. 전적지에는 전봉준 동상이 멀리 평야를 응시하고 있었다. 전적지에 기념관을 세운다고 한참 공사 중이었다. 과연 이런 무분별한 복원이 의미가 있을까? 물론 복원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 우리가 볼 수 없었을 유적들도 많이 있다. 실제로 전쟁 등으로 소실된 문화재를 선조의 복원으로 우리가 감상하고 있고 황룡사 9층탑 같은 유적도 복원되어 있다면 아주 멋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전봉준 고택이나 황토현 전적지 같이 무분별한 복원은 오히려 문화재의 가치를 떨어뜨리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복원을 하려면 유적의 내력과 의미를 잘 파악하여 가능하면 취지를 살려서 완벽하게 복원해야만 할 것이다. 이러한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장성의 필암서원에 도착하였을 때는 7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지만 이미 날이 완전히 저물었었다. 어쨌든 어두워서 잘보지는 못했지만 필암서원은 조선 선조 23년에 김인후에 학덕을 추모하여 세워져 소실되었다가 다. 9시 반이 넘어 광주 경렬사에 도착하였다. 경렬사(景烈祠)는 여말에 왜구를 격퇴하고 나라를 지킨 경렬공 정지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시우 및 묘역이다. 한때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되었다가 1981년 다시 세워졌다고 한다. 사내에는 정지장군의 늠름한 영정이 모셔져있었다. 신속히 버스에 탑승하여 광주를 떠나 화순으로 향하였다.회순 운주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정오까지 한시간 정도 남아있었다. 운주사는 개인적으로도 귀동냥으로 들은 적이 있고 답사 전 수업시간에 교수님 설명을 귀담아 들어 두었던 관심이가는 유적이었다. 운주사는 도선이 세웠다는 설과 마고할미가 세웠다는 설, 운주가 세웠다는 설 등이 분분하지만 도선이 하루만에 천 개의 탑과 천 개의 불상을 세웠다는 도선 창건 설이 유력한 것 같다. 지금은 천불천탑이 그대로 전해지지는 않지만 역시나 절의 규모가 크고 탑과 불상이 다 둘러보기 힘들 정도로 많이 있었다. 천불천탑이 그대로 전해진다면 세계적으로 멋진 곳이었을 텐데 교수님께 천불천탑의 여러 도난 경로를 듣고 가슴이 아프고 약간 화가 났다. 그래도 나아있는 천불천탑중에 불상으로는 보물 797호인 석조불감과 탑으로는 보물 798호 원형다층탑이었다. 석조불감은 집 형태의 감실 안에 불상을 모셔둔 형태로 처음 보는 형식이라 눈이 끌리었고 원형다층석탑은 독특한 둥근 라마탑 형식이었는데 안정적으로 보였고 굉장히 드문 형식이라고 하고 둥근 모습이 귀여울 정도였다. 운주사의 가장 뒤편의 산자락에도 부부와불이라 불리는 부부불상이 사이 좋게 누워있다. 크기도 엄청나게 커서 입이 벌어지는 데 거기다 와불이 일어서면 세상이 변한다는 전설은 신비함까지 불어넣어 주었다. 절의 규모가 큰 만큼 교수님들의 배려로 운주사는 맘껏 감상할 수가 있었다.점심을 먹고 또다시 버스를 타고 장흥의 보림사에 도착하였을 때는 이미 2시가 넘어가 있었다. 보림사는 신라 헌안왕 4년(860년) 경에 보조선사 체징이 건립한 사찰로 신라 말 선문의 하나인 가지산문의 본찰로 인도, 중국 가지산의 보림사와 적한 탑과 비이다. 사리구를 절취 당하며 망가진 것을 복원했다한다. 탑비는 김영이 비명을 찬술하고 김언경이 글을 썼다한다. 몸이 피로해서 세세히 둘러보지는 못했지만 사찰의 의미와 내력만이라도 가슴에 담았다.다음 일정으로 강진의 무위사를 갔다. 무위사는 개인적으로 어렸을 적에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읽은 뒤로 꼭 한번 가보고 싶은 곳이었는데 전라도 지역을 올 일이 별로 없어 가보지 못하고 있다가 이번 답사 일정에 있는 것을 보고 기뻤던 곳이다. 어렸을 적에는 책을 읽었을 때 절 극락전을 지키는 늙은 개 이야기가 있었는데 이미 세상을 등졌는지 늙은 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아무튼 무위사는 신라 진평왕 39년에 원효가 창건하여 관음사라 했다가 헌강왕 때 도선이 중건하여 갈옥사라 개칭하고 효공왕 때는 형미가 중창하여 모옥사라 하고 세종 12년에 세운 극락전이 현재 전하며 명종 5년에 무위사로 개칭했다고 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은 국보 13호로 29점의 벽화를 해체하여 따로 전시하고 있었다. 극락보전에서는 단순하여 슬쩍 보면 멋이 없지만 뜯어서 느껴보니 순수하고 청아한 미가 느껴졌다.마지막 일정으로 5시경에 대구면 청자도요지를 방문하였다. 고려청자와 무역에 관련된 해상왕 장보고에 대한 설명을 교수님께 듣고 옛 가마터의 발굴장소와 작업실에서 현대 도공들이 직접 작업하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몇 개의 일정을 제외하고 구경을 하니 감상하고 느낄 시간을 넉넉히 가질 수 있는 하루였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에서는 선배들과 동기들과 간단한 술자리까지 마련하여 친목도 다진 여유있는 하루를 마무리하였다.27일 역시나 기대되는 셋째 날.벌써 삼일이나 지나가고 역시나 기대감으로 무장을 하고 9시 반경에 일정에 없던 김영랑의 생가에 갔다. 정만조 교수님의 재력이 있는 영랑의 생가는 초가보다는 기와를 올렸을 거라는 말씀에 그런 섬세한 부분까지 신경 쓸 수 있는 교수님의 모습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땅이 질퍽하여 이동하기 힘들었지만 산을 타고 올라가 백련사에 도착하였다. 백련사는 신
대중문학에서 폭력의 의미와 역할-두사부일체, 조폭 마누라-TV를 틀면 손쉽게 폭력장면을 만날 수 있다. 요즘 최고의 인기를 구사하고 있는 드라마 "야인시대"만 봐도 알 수 있을 것이다. " 야인시대" 는 선 굵은 드라마로 남자들만의 의리있고 멋있는 세계를 그리고 있다고 자부한다. 또 그런 드라마로 탄생하기 위해선 수많은 격투씬이 필요했다. 아마 김두한과 구마적, 쌍칼과 구마적, 김두한과 마루오카 경부의 격투신등 그 수 많은 싸움장면이 없었다거나, 밋밋한 주먹다툼에 불과 했다면 지금과 같은 시청률을 기록하진 못했을 것이다. 치고 박고 싸우고 다치고.. 왜 사람들은 그런 폭력장면을 즐기고 좋아하는 것일까? 생각해보면 옛날부터 이소룡, 성룡의 무술영화도 큰 인기를 끌곤 했다. 내 자신이 하지 못하는 폭력장면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주연배우들의 멋지고 날렵한 몸동작에 열광하는 것일까? 저번 시간에 이야기한 포르노그라피처럼 폭력또한 인간의 숨겨진 본능이 아닐까 생각한다. 나의 어리석은 머리로는 왜 사람들이 그렇게 폭력에 열광하고 보기를 좋아하고 흥분하는지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런 폭력이 대중문학뿐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난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두사부일체'는 참 재밌는 영화다. 단순히 재미만 있는게 아니고 그 속에서 우리 나라의 답답한 교육현실과 입시제도등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 나는 예전에 영화관에서 봤는데 이번에 다시 보게 되었다. 다시 보아도 실컷 웃다 후반부에는 계속 눈물이 나오는 것은 여전했다. 웃음과 눈물을 동시에 선사한다는 것은 대단한 능력인 것 같다. 반대로 난 '조폭 마누라'는 좋아하지 않는다. '조폭 마누라'도 두 번 봤는데 둘 다 조직폭력배가 주인공이고 둘 다 코메디 영화면서 폭력이 난무하지만 둘은 왠지 분명한 차이가 있다. 앞서서 '두사부일체'가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선사하며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고 있다는 반면, '조폭마누라'는 단순한 코메디이다. 단순히 웃기기 위해서 조직폭력배라는 주인공을 쓰고 볼거리를 만들기 위해서 폭력씬이 많이 있고 또 쓸데없이 성에 대한 묘사도 많이 있다. 그래서 별로 보고도 유쾌하지 않은 영화라는 생각이 든다.'조폭마누라'에서는 폭력을 단순히 미화시키고 있다고 생각된다. 쓸데없이 많이 싸우고 칼로 사람을 찔러 죽이는 등 잔인한 장면이 등장한다. 또한 조직폭력배가 쓰는 그러한 폭력이 멋이나 웃음으로 나타내어진다. 이점은 '두사부일체'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사부일체' 또한 마지막엔 조폭이 쓰는 푠력에 의해서 학교가 진압되고 평온을 되찾는다. 조폭이 쓰는 폭력이 정의김이 가득찬 것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말도 안되는 스토리다. 어떻게 학교를 두 집단의 조폭끼리 싸워서 되찾을 수 있다는 것인가?영화 안에서 보여지는 폭력의 미학이라는 것은 가장 잔인한 폭력, 피튀기는 폭력씬이 난무하는 잔학적인 것이나, 앞서 말한 것처럼 정의로 행해지는 의리있는 주인공의 필연에 의한 폭력, 모두를 포함하는 말이라 생각된다. 이런 구도속에서 '조폭마누라'와 '두사부일체'는 모두 광범위한 의미로서 폭력을 이용하고 있으며 특히 후자의 경우이다. 즉, 우리나라의 권선징악이라는 동기로 폭력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칫 폭력 우월 주의로 비치기 쉽다.
권력변환(전두환 정권에서 김대중정권까지)학번: 20020933학과: 교육심리학과이름: 윤지영날짜: 11/8저번 시간에 나는 언론이 정권의 권력에 눌려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수 없다면, 아첨이나 권력에 동조하는 기사를 내지 말고 오히려 가만히 있는게 나을 것이라 주장했다. 소수가 바른 소리, 옳은 소리를 하다가는 결국 그들만 희생되고 그 언론사는 폐간 당하는 등 불이익만 남기게 되고 그들의 존망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자신들이 희생되면서까지 국민에게 사실을 알리고 그것을 비판할 용기와 정신이 없다면, 권력에 아첨하지 않고 보도라도 하는 것이 최소한의 노력이라고 생각했다. 그 생각은 5.18항쟁이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처참히 죽어가면서도 결국은 전두환 정권의 힘을 누르지 못하고 끝나는 부분을 읽으면서도 계속되었다.하지만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언론은 전두환 편으로 돌아서고 그를 찬양하기에 바빴다. 하지만 그때 언론이 권력 편을 들지 않고 민중의 편에 서서 그들의 항쟁을 사실대로 보도하고 도왔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당시 있는 사실 그대로를 보도한 신문이나 방송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조금만 용기를 내고 자신들이 국민에게 올바른 것을 알려야 하는 언론인임을 조금만 자각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언론이 자유를 울부짖는 민중의 소리에 조금만 귀기울이고 그들을 도왔더라면, 언론인들이 힘을 모아 그 처참한 현장을 보도하고 기사화 했더라면, 전두환 정권은 존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러한 생각은 1987년 6월 항쟁을 보면서 더욱 깊어졌다.6월 항쟁은 어찌보면 언론이 주도한 것이나 다름없다. 용기를 낸 한 언론인에 의해 이루진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언론검열을 받던 당시 상황에서 한 대학생이 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아 피를 흘리며 동료에게 의지하고 있는 모습의 사진을 싣는 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는 다는 것과 다름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앙일보 이창성 사진부장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자신이 모든 고문 등을 당하겠다며 그 사진을 게재했다. 그것은 다른 언론인들의 고개를 숙이게 만드는 정말 놀라운 결정이었다. 그의 희생으로, 그의 그런 굳은 의지와 용기로 인해 그 신문은 전국에 배포되었고 그것을 계기로 6월 항쟁은 일어나게 되었다. 언론과 민중의 힘을 합쳐 권력을 이겨낸 것이다.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난 이 6월 항쟁이 너무 대단하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언론과 민중이 권력을 이겨낸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언론권력의 힘이 보이기 시작한게 아닐까 생각된다.노태우 정권하부터는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가장 강력한 권력은 더 이상 정치권력이 아니었다. 바로 언론권력이었다. 정치권력은 여전히 막강했지만, 그 권력은 여론의 지지를 받아야만 힘을 발휘할 수 있는 새로운 권력으로 변환된 것이다. 언론권력도 더 이상 정취권력의 지배 또는 종속 체제에 놓이지 않고 정치권력과 거래를 하는등 대등하거니 우위를 누리는 새로운 권력으로 변환되었다. 이는 더 이상 옳은 소리를 못하거나 사실을 보도하지 못하는 등 언론의 자유를 보장받지 못하는 일이 사라진 면에서는 정말 잘된 일이다. 하지만 이제 권력을 주므르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언론이 그들의 권력을 이용하고 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일보가 김영삼 정권을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이게 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김영삼 정권이 조선일보의 뜻에 따르지 않고 개혁을 추진하자 조선일보가 김영삼 정권에게 타격을 가함으로써 김 정권의 개혁을 좌초시키는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이제 더 이상 언론권력이 정치권력에 눌리지 않고 오히려 앞서게 된 것이다.
1. 제 2차 세계대전의 원인과 과정.바이마르에서 새 독일 의회가 소집된 1919년부터 1933년까지를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가 열렸다. 1918년 8월에 제정된 바이마르 헌법에 따르면, 독일은 연방공화국이며 연방의 대통령은 국민의 직접 선거로 선출되고 임기는 7년이다. 대통령은 수상을 임명하고 의회를 해산할 권한이 있으며 긴급령을 내릴 권한도 부여받았다. 연방수상은 대통령에 의해 임명되지만 의회에 대해 책임을 지도록 하였다. 그 외에 바이마르 헌법은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주는 등 법적으로 남녀간의 평등을 보장하였고 사회보장제도와 의무교육제도를 도입했다. 제국은 무너지고 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첫 번째 의회제 공화국은 정치적 경제적 불안정으로 시달렸다. 공화국은 처음부터 전쟁 피해보상금과 인플레이션, 경제적인 위기들과 대량 실업 등의 부담을 지고 있었다. 많은 정당들이 난립하여 파업과 혁명, 쿠테타를 통해 정부를 전복하고자 했으며, 좌익과 우익 세력 모두가 가혹한 조건의 강화조약체결에 대해 정부를 격렬하게 비난함으로써 국가의 권위가 무너졌다. 이로 인해 공화국에 대한 회의가 생겨났고, 그 결과 국내 정치가 불안해졌다. 전후의 혼란은 1923년 그 절정에 달했으나, 그 후 미국의 대규모 차관으로 독일은 경제적 회복과 함께 정치적으로도 안정을 찾았다. 이 시기에 독일의 미술, 음악, 과학과 사상이 크게 발달하여 황금의 20년대라는 번영기를 누리며 다시 몇 년만에 세계적인 권위를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바이마르 공화국은 1929년의 경제 대공황과 함께 극도의 혼란에 빠지고 결국 몰락하게 되었다.경제가 거의 미국 차관에 의존해 있던 독일은 경제공황으로 가장 심한 타격을 받았다. 몇 달 사이에 6백만명의 실업자가 생겨났고 절망에 빠진 대중은 독일 공산당과 나치스당과 같은 급진적인 정당으로 기울었다. 특히 히틀러의 국가 사회주의 운동은 불안한 정세를 틈타 1930년 이후 도약적으로 발전하여 1932년에는 가장 강력한 정당이 되었다. 1933년 히틀러는 선거에서 방법으로 자기 나라의 경제적 이익을 꾀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자본주의 경제의 기초가 튼튼하지 못했던 독일, 일본, 이탈리아 등은 심각한 경제난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이탈리아에서는 무솔리니가 정권을 잡았고, 독일은 경제 위기와 사회 혼란 속에서 히틀러가 정권을 잡아 독일 재무장을 선언하고 나섰다. 한편, 일본은 대륙 침략 전쟁을 일으켜 만주 지방을 점령한 다음 중일 전쟁을 일으켰다. 그와 같이 식민지를 가지지 못한 독일, 이탈리아, 일본이 대외 침략으로 경제적 위기를 벗어나려 꾀한 데서 세계 대전 발발의 위기는 높아 가고 있었다. 독일에서는 힌덴부르크 대통령의 사망하자 아돌프 히틀러가 수상 겸 대통령으로서 정권을 잡았다. 나치당이 도약한 계기는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경제공황이었다. 미국의 자본에 의존하여 소생하던 독일 경제는 그 어느 나라보다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독일의 절망적인 상황에서 히틀러는 선동적인 연설로 불만으로 가득 찬 대중 속으로 파고들었다. 총통에 오른 히틀러는 민주적인 공화국을 폭력에 기초한 독재국가로 만들어 버렸다. 전체주의 경찰국가가 탄생되어 어떤 형태의 저항도 잔인하게 억압되었다. 히틀러는 정권을 잡자 그의 동맹자들을 제거하고 자신의 정당 외의 모든 정당을 불허했다. 노동조합을 해체하고 기본권을 유린했으며 언론을 억압하였다. 히틀러 체제에 불만을 지닌 사람들에 대해 테러로 대처했고 많은 사람들이 재판 절차없이 감금되었다. 정당들이 해체되거나 무력화되었다. 1934년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죽은 후 히틀러는 대통령 제도를 없애고 자신을 수상 겸 대통령으로 총통이라고 불렀다. 이로써 제 3제국이 공식적으로 등장했다. 독일의 모든 권력을 장악한 히틀러는 에서 기술한 바 있는 이상, 즉 모든 독일민족국가들의 통합, 독일인을 위한 생활공간 확보, 그리고 천년제국의 건설을 실현하고자 했다. 히틀러는 바이마르 공화국 시대의 국내 정치 혼란과 정치적인 반대자들 간의 폭력적인 투쟁, 세계경제 공황으로 야기된 대량실업에 맞서 고용창출 계획과 전쟁물자한다는 명목으로 합병하였고, 3백여 만 명의 독일인들이 살고 에 있었던 자아르 지방이 독일로 환속되었고 국방사령부가 재창설되었다. 1936년 3월 비무장 지역인 라인란트를 강점있는 체코의 국경지대인 수데턴을 할양받았다. 이러한 대외정책의 성과들로 히틀러는 많은 계층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의 정치적 목표를 실현할 기반을 마련했다. 1939년 8월에 독일이 소련과 불가침 조약을 맺은 다음 그 해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하자, 영국과 프랑스가 이에 맞서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함으로써 전쟁이 시작되었다. 독일은 폴란드 침공에 이어서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이어 네덜란드와 벨기에로 쳐들어갔으며, 1940년 6월에는 프랑스의 파리를 점령하였다. 그리고 다시 1941년에 독소 불가침 조약마저 어기고 폴란드 동부, 우크라이나를 침공함으로써 독소 전쟁이 시작되었다. 전쟁 초기에는 독일이 혁혁한 전과를 올렸으나 1943년에는 스탈린그라드에서 대패하여 전세가 역전되기 시작하여 동부전선에서는 지속적인 방어만이 이루어졌다. 북아프리카에서는 이탈리아군과 독일연합군이 패배하여 연합군은 이탈리아 본토에 상륙하여 1943년 9월에 이탈리아에서 독일군은 큰 타격을 입었고, 영미 연합군은 시칠리아섬을 거쳐 로마를 점령, 이탈리아는 항복하였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성공하여 서부전선도 급격하게 붕괴되었다. 1945년 5월에는 영국, 미국, 소련이 베를린을 점령함으로써 마침내 독일도 항복하였다.2.등장인물자보(요아킴 크롤 Joachim Crol / 1957년 / 독일)"그래도 당신을 잃을 수 없어. 당신을 잃느니 차라리 반쪽이라도 갖겠어"자보는 부다페스트에서 이름난 레스토랑을 경영하는 인물이다. 그는 성실하고 자상하며 소시민적이다. 그러나 그의 사랑은 낭만적임과 동시에 파격적이다. 그에게는 일로나라는 아름다운 애인이 있다. 자신의 연인 일로나가 안드라스와 밤을 보내고 오자 그가 하는 말이 인상적이다. "그래도 당신을 잃을 수 없어. 당신을 잃느니 차라리 반쪽이라도 갖겠어" 그는 한걸음 더 그는 버림으로써 얻었으며 모든 것을 변화시켰다. 그것은 또 다른 모습의 사랑일까. .그는 비열한 독일군의 학대에 맞서 유대인으로서의 존엄을 지키고 싶어했다. 그런 그의 유대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뭉개버린 것은 "사랑의 복수"에 눈이 멀어버린 독일군 장교인 한스였다.안드라스(스테파노 디오니시 Stefano Dionisi / 1966년 / 이태리)"그리고 반쪽의 '사랑'을 쟁취했다. "그의 눈동자는 매혹적이며 우수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요구하지 않는다. 갈망할 뿐이다. 일로나에 대한 사랑은 그녀의 생일날 그녀에게 헌정하는 로 표현된다. 그는 한없는 절망으로 자신의 사랑을 노래했다. 그리고 '반쪽'의 사랑을 쟁취했다. 물론 나머지 반쪽은 자보의 영역이다. 자보의 영역은 우정으로 채색된 공간이다. 그는 그것으로도 자신의 존엄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는 사랑과 우정사이에서 갈등하고 질투했다. 에서 채워지지 않은 뭔가가 있다고 번민하는 안드라스의 심중엔 영원히 자신에게 속하지 않을 일로나의 절반에 대한 질투와 번민이 자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연인에게 바친 음악을 자신의 연인을 탐하려는 한스 앞에서 연주해야 하는 안드라스. 그는 그 순간 자신의 존엄이 상처 받았음을 느끼고 한스의 권총으로 죽음을 택한다. 독일의 침략을 받아 굴욕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들... 자기의 존엄성을 잃게된 사람들.... 그리고 그들과 마찬가지로 죽음을 택한 안드라스....안드라스의 죽음은 표면적으로 강자의 무시와 핍박 앞에서 비굴하게 목숨을 보존하느니 인간다운 존엄을 지키기위해 죽음을 선택해야만하는 시대의 아픔을 얘기하고 있는 듯 했다.안드라스의 삶은 한순간 강렬한 빛을 발했다 사라지는 별똥별과 같다. "자신에 대한 존엄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야말로 타인에 대한 사랑도 가능하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는 죽음으로 웅변했다."한스(벤 베커 Ben Becker / 1964년 / 독일)"사랑과 미움이 두 얼굴"한스를 표현한다면 이렇다.그는 사랑과 미움의 얼굴을 가졌다. 그는 현실적이고 세속적이적이고 고상한 척하는 다른 캐릭터들 사이에서 한스는 가장 깊은 존재감을 느끼게 해준다.그리고 그는 힘이 인간관계에서 어떤 영향을 미칠 수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글루미 선데이가 처음 연주되는 날 일로나에게 청혼했다 거절당하는 한스. 그는 그날 밤 자신이 실연의 상처를 안고 부다페스트의 다뉴브강에 몸을 던졌을 때 구원의 손길을 뻗쳤던 자보를 왜 죽음으로 몰고가는가. 그것은 자보가 유대인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일로나가 그를 사랑했기 때문이다. 그에게 유태인 이란 인종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독일인이기 때문에 유태인인 자보를 죽인게 아니라 일로나가 사랑한 일로나의 사랑을 받은 자보를 죽인 것이었다. 한스는 자보를 가스실로 보냄으로서 자신의 사랑을 거부한 일로나에게 복수했다. 일로나의 마음은 붙잡을 수 없었지만 그녀의 몸은 취하는 자보. 안드라스를 죽게 하고 자보를 가스실로 보내고 일로나의 육체를 유린하는 그는 사랑의 복수라면 생명의 은인도 문제될 게 없다는 극단을 보여주었다. 물론 복수를 가능케 해주는 것은 나치 소령계급장에서 나오는 권력이다. 대제국 독일의 힘을 등에 없어 생긴 권력. 자신의 80회 생일날-그날은 일로나의 생일이기도 하다- 글루미 선데이를 들으며 죽어가는 한스. 신은 그를 응! 징한 것일까. 그것을 응징이라고 하기엔 그는 너무 오래 살았고 너무 많은 것을 누렸다.일로나(에리카 마로젠 Erica Marozs / 1972 / 헝가리)그녀를 한문장으로 표현하면 이렇다. "모든 남자들과 모든 음악,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다."모든 남자들과 모든 음악, 모든 사건의 중심에 있는 매혹적인 여성 일로나. 그녀는 모든 남자들의 사랑을 받았고, 모든 남자들에게 사랑을 주었다. 일로나는 영혼을 사랑한 여자였다. 그는 한스를 사랑할 수 없었다. 한스에겐 영혼이 부재했다. 사랑하는 남자, 자보를 구하기 위해 한스에게 육체를 맡길 수 밖에 없었던 일로나에게 한스는 철저히 복수했다. 그녀는 사랑을 위해 몸을 던졌고, 사랑을 위해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다. 롤프 슈벨 감독은.
*22일부터 28일까지 조선, 중앙, 경향, 한겨레 이 네 개의 신문의 대선 관련기사를 읽고 나름대로 비교 분석하였다. 거의 신문사의 스포츠 신문만 읽다시피 해온 나에겐 힘든 작업이었고 신문 한 두개가 아니라 네 개나 읽는다는 것이 무척이나 벅차기도 했다. 하지만 좋은 경험이기도 했다. 이번 대선에 관해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각 신문사마다 나름대로의 특성도 살필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 이제 각자 신문의 특성들을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1)중앙일보중앙일보를 가장 꼼꼼히 봤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집이 중앙일보를 구독하기 때문에 지면을 통해서 읽는 것이 훨씬 생각하고 정리하기에 편리했다. 반면 다른 신문들은 인터넷을 통해보려고 하니 왠지 정리도 잘 안되고 생각하기도 힘들었다.중앙일보는 내가 일주일동안 보고 느끼기에 상황분석이 참 뛰어난 것 같다. 상황을 상세히 묘사하고 자세히 전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후보의 말이나 행동 하나하나까지도 주의를 기울여 기사를 썼다.전에 주위사람들에게 물어봤을 때 중앙일보는 한나라당 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들은적이 있다. 하지만 이번 숙제를 하면서 내가 느끼기엔 특별히 한나라당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다. 노무현,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로 한창 시끄러울때여서 그런지 몰라도 이회창후보에 대한 기사보다는 후보 단일화와 노무현, 정몽준 후보의 이야기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단일화가 끝난후에도 승리한 사람의 단일화 후까지의 여정만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패배한 사람의 도전부터 좌절까지 내용도 기사를 다뤄 무척 인상 깊었다. 또한 한나라당 쪽으로 편파된 보도를 한다면 민주당과 국민통합21의 후보단일화 과정을 자세히 다루거나 좋게 평가하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중앙일보는 '단일화 협상 52일의 드라마'라는 소제목을 써가며 그간의 긴박한 상황에 대해 기사를 다루고 극적으로 단일화가 타결된 것을 하나의 드라마나 다름없다고 기사를 쓰고 있었다. 단일화가 단절될 위기에 처할때마다 양보의 미덕을 발휘한 노무현 후보를 높이 평가하고, 패배를 깨끗이 인정한 정몽준 후보에게 칭찬을 마다하지 않았다. '기업이 운영하는 부자신문' 이라는 이미지 아래 한나라당을 지지할 것이라는 나의 생각을 말끔히 없애주었다. 내가 잘못 평가하고 이해하는 것일지도 모르지만 내가 직접 보고 느끼기엔 그랬다.또한 각 정당의 입장과 생각등을 동등하게 실었다고 본다. 어느 한쪽의 말만 기사화 하는게 아니고 양쪽의 입장을 대변하는 글을 모두 실었다. 긍정적인면과 부정적인면 모두를 담아 객관성을 유지하려고 애썼다. 단일화가 타결된 이후에는 한나라당과 민주당 양쪽의 앞으로의 방향과 유세방법도 자세히 알리려고 노력하였다.이회창, 노무현 양자 대결 구도로 바뀐 후부터는 두 후보의 정책을 비교한다는 등 독자가 두 후보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무엇이고 어떤 정책을 내걸고 있는지를 파악할 수 있게 하였다. 27일에는 지면 한 면을 할애하여 이회창, 노무현 두 후보의 신상명세와 정책을 비교하기도 하였다. 두 후보에 대한 독자들의 비교평가를 돕기 위해 주요 정책과 신상명세를 정리해서 소개한 것이다.어렇듯 독자들을 배려하였지만, 지지층이 약한 후보들은 별로 배려하지 않은듯한 단점이 있었다. 장세동, 이한동후보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이 없었고 간혹가다 권영길 후보에 대한 기사가 조그맣게 실리긴 하였다.권영길 후보는 이회창후보와 똑같이 TV토론을 하였지만, 이회창후보의 토론내용에 관해서는 많은 기사가 실린 반면 권영길 후보의 토론내용에 관해서는 가사 1개가 전부였다. 지지층이 얇다고 해서 기사를 제대로 다루지 않는 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다.전체적으로 중앙일보의 대선에 관한 기사들을 읽고 평가했을 때 비교적 객관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어느 한정당에 치우쳐 편파적인 보도를 하지 않았고 어느당, 어떤 후보든지 간에 그 사람의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을 모두 소개하고 알렸다. 후보 단일화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거기에 초점을 맞춰 보다 자세하고 정확한 보도를 하였고, 국민들이 노무현, 정몽준 두후보에 대해 알 수 있는 기사를 많이 게재한 것 같다. 단일화가 끝난 후에는 노무현 후보가 위기마다 양보하며 승부수를 띄운 것을 높이사고, 정몽준 후보가 자신의 패배를 깨끗이 인정하고 물러난 것을 아름답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반면 두 후보의 단일화과정의 공정성이나 필요성 등 집고 넘어가야 할 문제점도 빠뜨리지 않았다. 비판할 것은 비판하고, 칭찬할 것은 칭찬하는 모습이었다. 또한 독자들에게 이번 대선 후보들의 공약과 정책등을 자세히 알리고 이해가 빠르도록 돕고자 노력한 모습이 돋보였다. 이회창, 노무현후보의 양자 대결 구도가 된 이후에는 표나 그래프를 이용하여 두 후보의 정책과 노선의 차이를 분명히 보이게 하였다.2) 조선 일보조선일보는 역사속에서 항상 권력에 기생하고 민족과 나라를 배신하는 모습을 보여 왔고 그 이미지는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아니 이미지가 아니고 실상이 그렇다고 해도 틀린말이 아닐것이다. 수없이 많은 안티 조선이 존재하고, 사람들이 끝없이 욕하는 이유도 그러할 것이다.이번 레포트를 쓰기 전에도 조선일보가 한나라당 편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을 확인한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다른 세 가지 신문과 비교해보니 정말 느낄수 있었다.우선 이회창 후보, 한나라당에 대한 보도가 많았다. 또한 다른 신문들보다 객관성이 떨어졌고 편파적이라는 인상이 강했다. 이회창후보의 TV토론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신문들도 이 내용을 비교적 자세히 전하긴 했지만 조선일보만큼 자세히 전한 신문은 없었던것 같다. TV토론 내용에 대한 기사도 무척 많았고, 이회창 후보의 제스쳐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에도 집중하며 기사를 썼다. 이회창후보의 젊은층 공략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좋은 이미지를 심어주고자 노력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면 같은날 똑같이 TV토론을 한 권영길 후보에 대한 기사는 이회창 후보의 그것에 비해 턱없이 짧았다. 아무리 한사람은 많은 지지를 받고 있고 다른 사람은 그렇지 못하다고 해도 이 정도면 편파적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또한 노무현 후보와 정몽준 후보의 단일화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는데 두 사람의 단일화 과정이나 정책, 공약 등을 다루기 보다는 단일화의 정당성 문제를 깊게 들추었다. 단일화에 대 한 조선일보의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대체로 민주당과 한나라당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루는 것 같았다.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듯한 기사도 보였다. 누구를 지지하느냐는 여론조사 결과를 다룰때 어느 지역은 누구를 선호한다는 식으로 기사를 써서 은근히 지역감정을 부추기는 느낌이 들었고, 이회창 후보가 영남지역에서 '나는 OO지역의 아들이다' 라는 식으로 그 지역의 표를 호소하는 글을 서슴없이 실었다.그래도 조선일보의 장점을 꼽자면 다양하고 많은 기사인 것 같다. 돈이 많아서 그런지 경향 신문, 한겨레신문에 비해 기사가 무척 많았다. 그만큼 독자들이 다향하고 많은 지식과 정보를 얻을 수 있으니 그 점은 좋았던 것 같다. 또한 인터넷 신문에서는 기사의 밑에 '독자 100평란'이 있어서 독자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적을 수 있는 창이 마련되어 있었다. 다른신문에도 있긴 했지만 조선일보가 가장 체계적이고 정말 많은 사람들이 거리낌 없이 서로의 생각을 나누고 있었다. 조선일보의 편파적인 성격상 그 당을 지지하는 사람, 또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사람들과 다른 당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열띤 논조를 벌이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3) 한겨레신문4개의 신문 중 가장 객관적인 신문이었다. 모든 당, 모든 후보에 관한 기사를 적절히 실었다. 각 당 의 입장이나 각 당의 성명 등을 골고루 다 실었고, 거기에 대한 평가와 함께 우려, 걱정 등의 감정도 내비췄다. 기사와 함께 우려, 걱정들을 싣는다는게 다른 신문과 다른 점이었다.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기사내용이 거의 엇비슷했는데 한겨레 신문에는 처음 보는 기사도 더러 눈에 띄었다. 예를 들면 농업인 3천명이 가장 확실하게 농업정책을 내건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다는 기사는 다른 어떤 신문에서도 발견 못했는데 한겨레 신문에서는 볼 수 있었다. 또한 선거전 이모저모나 선거 유세 스케치 등의 기사를 실어 유세현장의 모습과 열기를 자세하고 생생하게 전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보였다. 정해진 기사만 전하는게 아니라 이것 저것 새로운 기사를 전하는게 한겨레 신문의 장점인 것 같다. 대선 변수 쟁점을 시리즈로 묶어 소개한 것도 인상적이었다. 이회창 후보와 노무현 후보의 정책, 공약 등을 대북. 여성, 교육, 지방화와 노동, 복지에 관한 항목으로 상세히 나눠 비교 분석한 것도 돋보였다.또한 다른 신문들은 대부분 이회창 노무현의 양강 구도를 다룰 뿐 나머지 지지도가 없는 후보는 거의 무시했다. 권영길 후보는 그래도 조금씩 다루었지만 다른 후보들에 대해서는 그냥 누가누가 대통령 후보 로 등록을 했다고 이름만 정하는 정도였다. 하지만 한겨레 신문은 장세도, 이한동, 김영규 후보등 그런 소외된 후보에 대해서도 신상명세를 소개하는 등 관심을 가지고 기사를 썼다. 이 점은 높이 살만 하다고 생각 한다. 다른신문들이 하찮게 여기고 넘어가는 작은 하나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처럼 비춰졌기 때문이다.한겨레 신문은 각 후보들이 지역정서를 자극하는 것을 비판했다. 아직도 지역 유세를 펼치며, 상대방이 지역 정서를 이용해 먹는 것은 욕하면서 그 자신도 똑같이 지역감정에 호소하는 것을 비판한 글이 인상적이었다. 또 각 후보들이 내건 대선 구호, 출사표 등도 지면을 할애하여 소개하고 국민들이 어떤 후보가 어떤 정책을 펼 치는지 알기 쉽게 도와주었다.내가 생각하기에 네 가지 신문 중 가장 객관적이면서 공정하고 다양한 보도를 하려고 노력하고 신문은 한겨레신문 인 것 같았다.4)경향신문경향신문은 '젊고 강한 독립언론'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있다. 신문을 읽으면서도 그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정말로 왠지 젊고 강한 느낌이 받았다. 반대로 조선일보와 중앙일보는 왠지 늙은 것 같았고 한겨레신문은 한 40대 정도의 느낌이랄까?젊고 강하다는 말처럼 경향신문은 4개의 신문 중 가장 비판적이었다. 특정한 당에게만 비판적이지 않았고 골고루 비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