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행정 수도법 위헌판결에 따른 평석1. 서론헌법재판소가 2004.10.21 신행정수도건설법이 위헌이라는 결정을 내림으로서 여야 정치권은 물론 전국민이 명암을 극명하게 나타냈다.전국민은 물론 광역자치단체의 이해관계가 크게 걸린 수도 이전정책과 신행정수도의건설을 위한 특별 조치법을 제정하면서 정부가 헌법검토를 소홀히하고 국민의 여론을 충분히 수렴하지 못해 전국민을 혼란에 빠지게 한 것은 중대한 실책이며, 이로 인해 국론을 분열케 하여 국가 발전에 크나 큰 손실을 초래하였다.충청권은 물론 호남권 주민들은 위헌철회를 요구하며 연일 반대집회를 하고 있어 정부에서는 대안으로 이 지역에 “행정수도” 건설을 한다 하지만 좀처럼 반대집회는 수그러들 기세가 안 보인다.2. 본론헌재의 결정이 위헌이라고 주장들 하지만 지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심판에서도 헌재에서 부결된 바 있다.그때는 헌재의 결정이 헌법최고기관의 내린 결정이라고 존중하고 따랐고 지금 신행정수도건설법 위헌 결정은 잘못 되었다고 하는 주장은 표리가 부동한 논리라 하겠다.헌재의 결정을 여당이 지고 야당이 승리한 흑백논리로 보아서는 안된다 하겠다.정권의 진퇴와 명운을 걸고 수도 이전을 강행하겠다는 노무현 대통령과 여당이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이라 하겠다.하지만 신행정수도법은 국회에서 여야가 합의해 압도적인 지지로 통과 된 법이다.야당과 이명박 서울시장, 손학규 경기도지사가 적극적으로 반대하고 나섰지만 절차적인 면에서는 정치권에서 공동으로 책임져야 할 문제라 하겠다.이번 결정으로 인한 국론 분열과 지역 주민의 토지와 관련한 피해의 사례는 구체적으로 열거하지 않아도 피해와 손실은 가히 엄청나고 막대하다 할 것이다.헌재의 결정을 놓고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으로 본 것이 옳으냐는 반론이 대두되고 있다.성문헌법을 채택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불문헌법 개념을 공식적으로 인정한 금번 결정은 법체계에 맞지 않다는 지적도 있다.또한 헌재가 수도이전을 여당의 주장대로 단순히 행정수도로 보지 않고 확대 해석하여 천도 수준으로 규정한 뒤 판단을 했다는 비난도 면치 못하게 되었다.그러나 그런 논란이 있다 하겠지만 우리나라 최고의 헌법해석기관인 헌재의 결정은 존중되어야 하겠으며 승복해야 한다고 생각된다.헌재 9명의 재판관 중에서 8명이라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결정된 판결은 존중되어야 하며 지금까지 벌이고 있는 소모적 논쟁과 반대집회는 속히 종결되어야 하겠다.
목 차서 론. 한국의 관광지 마케팅본 론1. 장소 마케팅 전략1) 장소 마케팅의 개요- 개 념- 등장 배경- 특 징- 장소 마케팅의 목표2) 관광도시의 장소 마케팅 사례a. 피츠버크시b. 클리블랜드시- 영 국결 론1. 장소 마케팅의 한계2. 지자체에 대한 시사점 및 활용 방안서 론♣ 한국의 관광지 마케팅오늘날 관광산업은 외화수입 및 고용창출 등으로 국민소득증대 효과를 가져오는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인식되고 있다. 또한 해당 지역 넓게는 국가적인 이미지를 높이는 또 하나의 수단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허나 한국관광산업에서 관광지 마케팅은 여러 가지 점에서 많은 문제점을 들어내고 있다.우선 우리 나라 관광지 마케팅에서 가장 관과하고 있는 점은첫째가 관광지 자체가 가지고 있는 훌륭한 역사적 문화적 가치애 비해 실제 관광자원으로써 큰 역할을 담당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점이고, 둘째는 외국인 관광객의 방문이 많으나 그 만족도가미흡한 점이다.셋째는 외국인 관광객 방문에 따른 경제적 파급효과가 매우 미미한 점이며, 넷째는 주변 환경은 대부분의 한국 관광지가 비교적 양호한데 반해 주변 관광지와의 연계성이 거의 없는 점이라고 들 수 있다.즉, 역사적 문화적으로 높은 가치가 있는 여러 한국관광지의 주변에 유리한 환경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점을 개선하여 한국관광지가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경쟁력 있는 관광지가 될 수 있도록 해야만 하겠다.이를 위해서 관광지의 장소를 대상으로 하는 관광지 장소 마케팅과 그 의미와 시사점, 각각 선진국들의 사례를 통해서 앞으로의 한국관광에서 관광지 마케팅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 참고해 보겠다.본 론1. 장소마케팅(Place Marketing) 전략1) 장소마켓팅(Place Marketing)의 개념특정 장소(도시)를 하나의 상품으로 인식하여, 지역의 공공과 민간의 협력 하에 기업·주민·관광객이 선호하는 이미지·제도·시설 개발을 통하여 장소상품의 가치를 상승시켜, 소기의목적(지역경제 활성화)을 달성하려는 전략을 말한다.2) 장소마켓팅을 알아보면- 단순한 장소(도시)의 선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소(도시)를 수요에 바람직한 방향으로맞추는 것- 목표집단의 설정, 전문성, 재정, 마케팅 방법에서 보다 조직적- 파트너쉽 : 도시의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공공-공공, 공공-민간간의 재정, 운영, 통제의책임을 다양한 수준에서 분화시킨 협력관계 구축- 장소를 단순한 물리적 실체가 아니라, 역사적 문화적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차별적이고패키지화된 상품으로 포장4) 장소마켓팅(Place Marketing)의 목표a. 지역사회 통합(integration)- 장소마켓팅을 통하여 지역주민들에게 지역에 대한 정체성, 소속감, 자긍심을 확립시켜주고, 지역 주민의 정서 안정을 도모- 문화공간 등 지역주민이 공유하는 공공영역 창출, 지역 이미지사업, 지역복지 사업 등→ 지역복지 구현- 기존의 주민들을 붙잡아 두려는 방어적 목적b. 장소 판촉(promotion)을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문화, 홍보 등 일련의 장소 마켓팅 기법을 도시를 판촉하는 수단으로 사용하자는 취지- 장소마켓팅을 다음과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1. 전문가 집단의 삶의 질을 개선하여 기업투자 유치2. 관광객 유인3. 일과후에도 사람들을 도시에 머물게 함으로서 지역경제 활성화에 이바지- 주로 복합용도개발이나 문화지구 형성을 통해 오피스, 상업, 외식시설, 문화시설물 간의상승작용을 일으킴으로써 도시의 물리적 개발계획의 이윤 확보c. 문화 산업화(cultural industry)를 통한 지역경제 활성화- 문화, 역사 등 장소마켓팅 방법을 통하여 문화를 산업화하자는 것- 문화상품의 생산과 유통을 지역경제 성장의 중요한 통로로 활용하여, 문화산업 자체가지역의 고용, 소득 창출의 주 원동력이 되도록 함이러한 목표들은 분리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장소마켓팅에 긴밀히 연계되어 있다.2. 관광도시의 장소마케팅 사례1) 싱가포르a. 도시국가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서울보다 조금 넓은 면적(646㎢), 인구 320만명에 지나지 않는 작은 도시국가이다. 싱TB)은 싱가포르를 마케팅하는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비즈니스로서 관광을 인식하고 관광관련 기업들의 투자유치, 새로운 관광지와 경험 개발 등새로운 기회 창출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 동안 싱가포르는 관광분야에서 한계가 없음을 선언한 'Tourism Unlimited' 전략을추진해왔다. 관광산업이 지속적으로 성장하고 국가경제에 기여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과영역을 창출하자는 것이다. 1996년 7월, 국가관광계획인 [Tourism 21: Vision of ATourism Capital] 발표하면서 싱가포르 관광은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었다.이 계획은 급성장하는 아시아·태평양지역 관광에서 선두주자로 나서기 위해 싱가포르를'관광수도'로 만든다는 것이다. 파리나 뉴욕, 런던을 떠올리면 대도시 이상의 기억, 즉음식에서 패션, 문화에 이르기까지 관광명소 이상으로 매력적인 장소성(magical senseof place)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였다. 방문객에게 세계적인 대도시들처럼 감성적인면에서 어필할 필요가 있음을 주목하고 특성별로 11개 테마존(thematic zones) 개발하고 세계적 수준의 스포츠, 문화, 예술이벤트를 개최하는 등 관광상품을 재구성하였다.2000년 9월부터는 '싱가포르에는 색다른 삶이 있다(Live It Up in Singapore)'라는 새로운캠페인으로 또다시 세계적인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다. 다양한 문화의 도시, 공원도시,재미의 도시, 예술의 도시, 관문의 도시라는 다섯가지 주제아래 101가지 즐길거리를소개한다. 명소를 둘러보는 차원을 벗어나 관광지의 진면모를 경험하고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자 하는 것이 주요 테마로서 향후 2년반 동안 진행할 대형 프로그램이다.c.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싱가포르가 관광객과 투자자를 유치하기 위해 전개하는 마케팅전략은 매우 독특하다.첫째, 끊임없는 관광상품의 개발이다. 체험산업으로서 관광을 재인식하고 싱가포르만의매력을 만드는 데 주력하였다. 세계최초의 나이트 사파리(night safari)는자리 감소- 도시이미지 퇴락 : 제조업 쇠퇴로 이미 공업지역을 탈피했음에도 불구하고 스모그 심한공업지역 이미지가 게속됨b. 추진과정 및 조직- 이에, 피츠버그의 도시정부와 산업자본가들이 협력을 통하여 도시재건에 앞장서서 기업을끌어들이기 위한 프로그램을 시도- 지역내부의 투자, 타지역·외국 기업, 벤쳐 캐피탈 유치를 자극하기 위한 마켓팅 기구설립하여 기금 모집, 유치 독려, 각종 지원사업 사업 시행· 지역외부 투자 유치를 위한 마켓팅 조직 :The Greater Pittsburgh Office PromotionThe Urban Redevelopment Authority of Pittsburgh· 지역주민 대상 마케팅 조직: The Neighborhod for Living Center· 비영리 지역경제개발조직 : Penn's Southwest Associaton- 유치사업과 함께 그에 걸맞는 기금 모집, 지원 프로그램 제도화· 새로이 입지하는 첨단기업에 대해서는 보조금 제공 등· 연방정부와의 계약과 인가를 유도하기 위한 프로그램 창출c. 장소마켓팅의 내용- 장소 이미지 홍보· 마켓팅 조직을 통한 홍보판촉: 홍보물, 브로셔, 정보 패키지, 비디오→ 외국과 타지방의 기업 유치(R&D, 첨단산업), 벤처 캐피탈 모집을 위한 기금 모집,지원프로그램 제도화· 홍보물 내용 : 피츠버그에 사는 101가지 이유공기가 맑다, 범죄가 적다피츠버그에서는 굴뚝이 소프트웨어로 탈바꿈하고 있다세계 르네상스의 중심지지식혁명의 중심지- 시설물, 상징물 건축· PPG Place : 포스트 모던식 오피스 건물d. 평 가- 일자리 창출(10만개) : 하이테크, 서비스업 성장- 피츠버그의 이미지 상승 (삶의 질 전국 1위)- 빈부격차 심화 : 흑인계층은 도시 활성화의 혜택 받지 못함(흑인 실업률 전국 2위)"우리는 두 도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삶의 질이 1위로 기록된도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흑인 실업률이 2위로 기록된 도시이야기다"→ 피츠버그 시장 이야기3) 미국의 클리블랜드(Cle다는 점을 강조· 여성들(간부 배우자, 전문직여성용) :여성들이 일자리와 매력적인 생활양식을 구할 수 있는 장소라는 점을 강조⑵ 시설물, 상징물 건축- 개선된 도시 이미지와 더불어 도시 재개발을 수행- 문화시설물 건축· Payhouse Square(미국에서 가장 큰 극장의 복구사업)· 록큰롤 명예전당, 돔구장 등- 복합용도개발 : CBD 오피스 개발⑶ 역사적 장소 보존- 과거 공업지역 호수 주변에 중장비들을 제즈클럽, 레스토랑과 어울리게 배치d. 평가- 캠패인을 통해 전국의 대중매체에서 클리블랜드가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을 공론화하는데 성공- 도시이미지 상승 : 중공업도시에서 생산자 서비스, 기업본사 중심지로 이미지 탈바꿈- 빈부격차 심화 : 인종차별이 심한 도시, 흑인 65% 이상이 빈곤 상태4) 영 국☞ 영국의 경제위기와 지역경제정책 -a. 영국은 산업혁명이래 제조업을 중심으로 한 고도의 산업성장을 주도한 가장 강력한산업국가였음.b. 그러나 세계의 경제질서변화에 따른 탈산업화영향이 밀어닥치면서 1970년대 중반부터해외시장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지고 내수시장은 축소- 영국의 수출실적은 1950년 25.4%, 1969년 11.2%, 1979년 9.1%, 1986년 7.6% 등지속적으로 비중이 낮아졌음.- 제조업의 쇠퇴와 경기침체는 매년 높은 인플레이션과 대규모파업(73년~78년까지 GDP성장률이 0.9%, 79년 인플레이션은 1~3.3%)a. 1960~1970년대 노동당 정권의 지역경제정책은 지방정부가 지역경제재건을 전담할법인단체나 위원회 등을 세우는데 주력함.- 지방정부가 지역경제에 개입할 수 있도록 권한을 부여한 기업위원회(Enterpriseboard)를 설립하는 것이었음.- 그러나 지방정부가 적절한 복지공급을 제공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함으로서 지방경제쇠퇴를 타개해 내려는 노력의 시도는 있었으나 여전히 복지서비스 공급에 초점을 둔정책기조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음.b. 1980년이후 보수당인 대처정부의 지역경제정책은 사회복지의 탈사회화임- 의료, 주택, 실업 등에서 침체
《 목 차 》1. 실존주의의 역사적 개요2. 실존주의란 무엇인가?3. 대표적인 실존주의 학자들3-1. 키에르케고르3-2. 니체3-3. 야스퍼스3-4. 샤르트르3-5. 카뮈3-6. 하이데거4. 실존주의와 교육4-1. 부버의 인간교육론1) 부버사상의 뿌리-하시디즘2) 만남의 철학3) 인간교육론4-2. 실존주의의 교육이론4-3. 의의와 한계5. 참고문헌1. 실존주의의 역사적 개요실존주의는 20세기 전반(前半)에 합리주의와 실증주의 사상에 대한 반동으로서 독일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일어난 철학 사상으로 실존이라는 것이 현대적인 의미로서 다루어지기 시작한 것은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1813∼1855,42세)에서부터 이다. 키에르케고르는 힘겨운 기독교와의 논쟁으로 자신의 삶을 마감했으며 자신은 신보다는 인간의 양심을 믿는다라고 했지만 그는 유신론적인 실존주의자로 말하여 진다. 실존철학의 무신론적인 것은 니체(1844∼1900,56세)에 의해서부터 이다. 그 이후 금세기의 실존주의 철학은 유신론적 실존주의와 무신론적 실존주의로 나뉘어졌는데 사르트르(1905∼1980), 카뮈(1913∼1960,47세)는 20세기의 대표적인 무신론적 실존주의자이다. 사르트르는 그의 이상으로 인해 정치적으로 되었으며 막스적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것은 그의 참여적인 행동에 의한 그 당시의 발로였다고 생각되어지지만 결국 그는 카뮈와 퐁트와도 결별하게 되었다.사르트르와 카뮈는 모두 프랑스 실존주의자들로 20세기 중반에 커다란 존재들이었으며 소설가이며 비평가로도 유명하다.야스퍼스(1883∼1969.86세)는 유신론으로, 하이데거(1889∼1976)는 무신론적인 실존주의라고 구분되며 사르트르는 자신을 포함한 프랑스 실존주의자들은 하이데거를 지지한다고 했다. 그러나 실은 야스퍼스도 평생을 거쳐 신이라는 것을 말한 적이 거의 없으며 가장 기독교적인 실존주의자였던 키에르케고르 자신도 자신을 기독교주의라고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실존주의는 유신론적인 것이 한 면으로 구분되어지긴 하지만 그 본질에 있어제를 종속적인 지위로 좌천시키면서 철학의 관심을 전환시켰다. 그들은 실존을 본질에 선행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이 실존주의가 제기하는 근본적인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되는 바, 그 물음은 " '나는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라는 것이다.사르트르는 기능공의 예를 든다. 즉 제화공이 신발을 만들 때 그가 만들려고 하는 신발의 이데아(본질)가 신발을 만들기 이전에 그에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마찬가지로 신도 인간을 만들기 이전에 이데아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본다. 따라서 항성 본질이 실존에 선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르트르는 인간의 창조주는 없다고 본다.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발견한다는 것이다. 즉 인간의 실존이 먼저 있고 나서 그 다음에 그 자신의 본질을 결정해 나간다는 것이다. 인간이 먼저 존재하고, 그리고 나서 그 자신을 결정한다는 것이다.실존주의자들은 이렇게도 이야기한다. 즉 인간의 창조자를 가정한다면, 그 신을 설명해야만 한다. 또 신의 창조자를 가정한다면, 그 신을 창조한 창조자의 창조자를 설명해야만 한다. 이러한 식으로 논리를 전개하면 한이 없으며, 결국 창조자가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히 실존하는 인간으로서 파악되며, 그가 어떤 특별한 무엇이 되기 전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유사한 양식으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I think, therefore I am.)를 반박할 수 있다. 즉 내가 존재하지 않으면 분명히 나는 생각을 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생각하기 이전에 존재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존재한다. 고로 나는 생각을 하기 위한 필수 조건들 중의 하나를 가지고 있다."(I think, therefore I have one of the prerequisites for thought.)라고 고쳐야 더욱 정확한 것이 될 것이다. 요컨대 실존주의는 "나는 선택한다. 고로 존재한다."(I choose, therefore I am.)라는을 간행하였다. 쇼펜하우어의 형이상학을 빌려 그리스 비극의 탄생과 완성을 아폴론적, 디오니소스적 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해명하고, 이어 소크라테스적 주지주의에 의거하는 에우리피데스에서 이미 그 몰락을 보았으며, 다시 그 재흥을 바그너의 음악에서 기대 ·확인하는 이 저서는 생의 환희와 염세, 긍정과 부정을 예술적 형이상학에 쌓아 올린 것이다.니체의 철학은 생의 철학과 함께 권력(힘)에의 의지, 영겁회귀, 초인 등의 유명한 몇 가지 말로 표현되곤 한다. 영겁회귀, 초인은 짜라투스트라에 담겨진 단어들이고 권력에의 의지는 짜라투스트라에 담긴 사상을 체계적으로 말해볼 생각으로 씌어진 책의 제목이다. 권력이란 것은 창조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창조란 새로운 가치기준을 말한다. 이 창조적인 새로운 가치란 또한 실존의 유희를 가로막은 것에 대한 초극이라 할 수 있다.니체는 결국 하나의 시인으로서 철학을 이야기했으며 그 시에 담긴 그의 실존 철학은 다른 실존주의자들처럼 논리적인, 그러니까 실존이 무엇이고 그래서 어쩐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그의 실존주의는 규명적이고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논리적 실존주의가 아니라 모든 한심스러운 것에 대한 질타라고 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니체의 철학은 하나의 실존주의라기에는 너무 커다랗다. 니체는 인간의 삶을 가로막는 모든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며 인간을 극복되어야 할 존재로 이야기한다. 그의 끝없는 긍정과 창조적인 인간 정신에 대한 예찬은 그의 사상을 도저히 단순하게 실존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철학자라 이야기 할 수는 없는 것이며 인간 정신의 그 본질에 파고드는 인류에 주어진 위대한 정신의 유산이라 해야 할 것이다.니체 이후의 모든 실존주의 철학자들은 그의 사상을 설명하고 옹호하며 또한 많은 시간을 반대론자들의 공격을 해소시키기 위해서 시간을 바쳤다. 사르트르와 까뮈는 특히 막시즘의 철학자들에 대한 공격에 맞섰으며 실존주의는 허망한 철학이라는 일반적인 관념과 싸워야 했다.그의 대표적인 저서 는 4부로 된 철학적 산문시로이다.그의 저서 (1934), (1936)은 당시 사르트르의 현상학에 대한 심취가 낳은 철학논문이다. 1938년에는 소설 가 간행되었는데, 존재론적인 우연성의 체험을 그대로 기술한 듯한 이 작품의 특수성은 세상의 주목을 끌어 신진작가로서의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장편소설 (1945∼1949)의 대부분과 (1947∼1965)에 들어 있는 수많은 독창적인 문예평론도 전시하의 산물이었으나,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대작 철학논문 (1943)는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입장에서 전개한 존재론으로서 결정적인 작업이었고, 세계적으로 보아도 제2차 세계대전의 전중부터 전후에 걸친 그 시대의 사조를 대표하는 웅대한 금자탑이라고 할 수 있는 노작이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메를로 퐁티 등의 협력을 얻어 지(誌)를 창간하여 전후의 문학적 지도자로서 다채로운 활동을 시작하였다.사르트르의 문학적 주장은 (1946)에서 밝혀 두었는데, 그가 말하는‘문학자의 사회 참여’란 그 이전의 나 에서 볼 수 있었던 니힐리즘의 그림자가 짙은 세계관과의 사이에 비약을 느끼게 하는 것이어서, 그 사이에는 역시 전쟁의 체험에 따른 사르트르 자신의 주체적 변화가 있었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전후부터 오늘날에 이르는 사르트르의 발자취는 이른바 ‘사회참여’ 사상으로 일관해온 것이라 하겠으나, 특히 1940년대부터 1950년대에 걸쳐 그는 그 때까지의 개인주의적인 실존주의에 의한 사회참여의 한계를 인정함과 동시에 더욱 경향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었다.(1952)는 작가 즈네의 평전으로 쓰면서도 개인적인 실존의 한계를 밝힘으로써 그러한 세계로부터의 탈피를 지향한 듯한 의미를 내포한 작품이었다. (1960)은 그의 사상적 발전을 보여 주는 노작인데, 현대의 마르크스주의자가 동맥경화증에 빠져 있는 양상에 반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자기모순적인 경향성으로 말미암아 오래 전부터 친교를 맺어 왔던 친구들이 계속하여 떠나게 되었고 마지막에는 카뮈와도 절교하기에 이르렀다.한편 사르트르는 전쟁 중에도 은 K.야스퍼스의 실존철학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동시에 후설의 현상학과 F.E.D.슐라이어마허와 W.딜타이의 해석학을 기초로 삼고 있었다. 이 밖에도 F.W.니체·S.A.키에르케고르·F.W.셸링·G.W.F.헤겔·F.횔덜린·R.M.릴케·F.M.도스토예프스키·G.트라클과 고대·중세 철학사의 영향을 받았다. 그 뒤 나치스당원이 되었고 33년 모교 총장에 취임하였으나 곧 사임하였다. 제 2 차세계대전 후 강단에서 추방되어 슈바르츠발트의 산장에서 은퇴생활을 하면서 (1927)의 문제를 재고하는 데 몰두하였으며, 특히 횔덜린의 시와 니체의 형이상학과 비판적 체득이라는 작업 속에서 전향을 준비하였다. 50년 프라이부르크대학에 복귀, 후기사상으로 평가될 만한 논구(論究)의 출판이 이루어졌다.하이데거가 일약 유명해진 것은 주요저서 때문이며 이것은 전체 구상의 전반부(前半部)에 해당하며, 처음에 후설이 편집하는 현상학에 관한 연구연보(硏究年報)에 발표되었다. 여기에서는, 존재를 이해하는 유일한 존재자인 인간(현존재)의 존재(실존)가 현상학적·실존론적 분석의 주제가 되고, 현존재의 근본적인 존재규정인 '관심'의 의미가 '시간성'으로서 확정되는 데서 끝맺고 있다.그는 거기에서 의 본래의 주제인 '존재'와 '시간'의 관계로 되돌아가 현존재의 시간성을 실마리로 해서 존재의 의미를 시간에 의하여 밝히는 동시에 역사적·전통적인 존재개념을 역시 시간적인 지평에서 구명(究明)할 예정이었으나, 이 후반부는 미발표로 그쳤다. 즉, 그가 실존사상의 대표자로 간주된 것은, 이 현존재의 실존론적 분석 부분 때문이며, 여기에서는 불안·무(無)·죽음·양심·결의·퇴락 등 실존에 관계되는 여러 양태가 매우 조직적·포괄적으로 논술되었다. 현존재의 존재의미가 과거·현재·미래의 삼상(三相)의 통일인 시간성으로서 제시된 것도, 인간이 시간적·역사적 존재라고 하는 '삶의 철학' 이래의 사상을 실존의 시점에서 다시 포착한 것이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그의 현존재 분석의 수법은 정신분석에서 문예론, 더 나아가 신학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