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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역] FDI(해외직접투자)의 산업별 특징
    Ⅰ. 해외 직접투자의 산업별 특징1. 해외직접투자의 시작과 성장경제개발 추진과정에서 부족한 투자재원 보전 등을 위해 개방적인 외국인직접투자정책을 유지해 온 것과 달리 정부는 국내의 자본과 기술 등이 해외에 유출되는 해외직접투자에 대해서는 제한적인 입장을 취해왔다. 물론 경제개발 초기에는 해외직접투자를 할 수 있는 여력도 없었던 것이 사실이며, 따라서 60년대에 정부는 해외직접투자에 대한 포괄적인 허가권을 보유함으로써 해외직접투자를 억제해 왔다.그러나 1968년 인도네시아 삼림개발을 위한 해외직접투자를 효시로 하여 1970년대 초까지 대외지향적 경제개발전략의 추진을 위해 임업, 제조업, 무역업을 중심으로 투자가 이루어졌다.197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해외에서의 안정적인 원자재 확보와 수출시장 개척을 위하여 해외직접투자를 선별적으로 허용하는 정책을 추진하게 되었다. 이러한 해외직접투자 기반 조성을 위해 해외직접투자의 절차 및 조건에 대한 규제완화 조치를 실시하였다.특히, 70년대 후반 석유파동의 경험과 86년 이후 국제수지 흑자 전환으로 인한 생산요소 비용상승은 해외직접투자 정책이 외환관리차원에서의 소극적 정책에서 산업경쟁력 확보차원의 자유화 정책으로 변화하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이에 따라 해외직접투자에 대한 허가제 적용이 축소되고 신고수리제도가 87년 100만달러 이하 투자에 도입된 이래 그 적용범위가 점차 확대되게 되었다. 이후 자유화조치는 더욱 확대되어 94년 2월에는 해외투자 대상업종 규제가 Positive List System에서 Negative List System으로 전환되게 되었다. 이후 해직접투자는 급속히 늘기 시작하여 93년에 최초로 신고건수 1,000건을 넘었고 96년 1,800여건, 2000년에는 2,000건을 넘는 등 꾸준히 증가하였다.87년 이후 우리나라 기업들의 해외직접투자 추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연도별 해외직접투자 추이(단위 : 건, 백만달러){연도건수금액연도건수금액1*************1,8176,59219882491,)3,890(19.3)617(3.1)915(4.5)189(0.9)690(3.5)20,138(100.0)금액26,525(43.3)958(1.6)16,291(26.6)4,663(7.6)9,530(15.5)1,201(2.0)2,119(3.4)61,286(100.0)위의 표에서 보면 우리나라의 해외직접투자의 대상지역은 주로 아시아와 북미에 집중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업별로는 제조업이 전체 산업의 약 60%를 차지하고 있고 도·소매업, 부동산 및 서비스업이 그 뒤를 따르고 있다. 또한 제조업의 경우 아시아에, 도·소매업, 부동산 및 서비스업의 경우에는 북미 및 유럽지역에 비중이 높게 나타나는데 이는 우리나라 기업들이 아시아지역에는 노동지향형 투자를, 유럽지역에는 시장지향형 해외투자를 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산업별로 나타난 특성을 자세히 살펴보면,1 건설업의 경우 아시아의 비중이 건수로나 금액으로나 50%를 넘고 있다. 이는 아시아의 신흥시장에서의 건설수요가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중동의 비중이 다른 산업에 q해 높게 나타나고 있는데 이 역시 70년대 후반, 80년대 초·중반에 있었던 중동지역의 건설붐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2 농림어업의 경우에는 아시아, 중남미, 대양주의 비중이 크게 나타나고 있다. 아시아와 중남미의 경우 자원으로서 목재의 확보를 위한 해외투자로 보여지고, 대양주의경우에는 원양어업에서의 투자로 인한 것으로 분석되어진다.3 도·소매업에서는 앞에서도 말했듯이 기업들의 판매시장 확보를 위한 시장지향형 투자에 의해 유럽과 북미지역의 비중이 높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4 제조업분야에서는 아시아의 비중이 절대적이다. 이것은 의복, 신발, 섬유등 노동집약적 산업들의노동비 절감을 위한 해외이전에 의한 것으로 생각된다. 제조업에서 특이한 점은 북미와 유럽지역의 투자가 건수에 비해 금액의 비중이 높은데 이는 무역장벽을 회피하기 위해서나 전자통신장비등 하이테크산업에 대한 투자로 보인다.제조업의 업종별 해외투자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섬유·에 대한 투자액은 동구 및 중 서부 아시아를 중심으로 1994 98년 중 연평균 2억 9,800만 달러를 기록하였으나, 1999년 이후에는 대우자동차의 구조조정, 유럽 통합의 마무리, 세계 자동차 시장의 공급과잉 등의 요인으로 급속히 위축되어 2000년에는 1,700만 달러에 머무는 극도의 부진을 나타내었다.기계장비 업종도 1995 99년 중 연평균 2억 2,700만 달러의 투자가 이루어졌으나, 2000년에는 6,500만 달러로 크게 감소하였다. 금년 들어서도 1/4분기 중 투자액이 500만 달러에 그치는 등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3) 섬유 의류 및 신발 가죽섬유 의류 업종에 대한 투자는 1996년 이래 감소세를 지속하다가 1999년에 일시 증가하였으나, 2000년에는 다시 큰 폭으로 감소하였다. 그러나 금년 들어서는 아시아 지역에 대한 소규모 투자의 증가에 힘입어 1/4분기 중 투자금액이 전년 동기 및 직전 분기에 비해 큰 폭으로 늘어났다.한편, 신발 가죽 업종에 대한 투자는 1994년 8,000만 달러로 정점을 기록한 후 1998년에는 1,400만 달러 수준까지 감소하였으나, 1999년 이후 다시 소폭의 증가세로 돌아섰다.나. 도 소매 부문제조업에 이어 두 번째로 투자비중이 큰 도 소매업 또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도 소매업에 대한 해외직접투자는 1998년 15억 4,800만 달러를 기록한 후 해마다 감소하여 2000년에는 4억 9,800만 달러 수준까지 크게 떨어졌다. 2001년 1/4분기 투자액도 전년동기 대비 크게 감소하는 등 투자 침체가 이어지고 있다. 이에 따라 전체 해외직접투자에서 차지하는 도 소매업의 비중도 점차 낮아지고 있다.한편, 투자금액의 감소와는 대조적으로 투자건수는 최근 들어 크게 늘어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도 소매업 투자건수는 2000년 중 225건으로 전년 대비 배 이상 증가하였고, 2001년 1/4분기에도 전년동기 대비 증가세를 기록하였다. 이같은 투자건수의 증가는 최근 중소기업들의 소규모 도 소매업 투자가 활발히 1990년대 중반 이후 유통업에 대한 진입장벽 완화조치의 영향으로 크게 활기를 띠어 최근에는 전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0% 내외로 높아졌다. 업종별 외국인직접투자 비중 추이1)단위: %----------------------------------------------------------------------------------------------------1962∼86 87∼89 90∼93 94∼95 96 97 98.1∼5월 누계----------------------------------------------------------------------------------------------------농축수산업 및 광업 0.8 0.3 0.1 0.0 0.6 0.8 2.3 0.6------------------------------------------------------------------------------------------제 조 업 63.9 65.3 68.3 39.4 60.3 33.7 59.7 53.1--------------------------------------------------------------------------------------------경 공 업 10.6 5.3 9.0 5.7 11.2 16.3 25.9 11.7(식 품) 4.0 3.3 5.1 1.0 7.9 12.2 1.8 6.2(제 지 및 목 재) 0.7 0.7 2.7 2.8 2.6 2.8 23.2 3.6중 화 학 공 업 53.3 60.0 59.3 33.7 49.1 17.4 33.8 41.4(화 공) 12.5 16.4 20.3 8.6 12.1 3.4 13.0 11.3(석 유) 2.5 2.7 11.9 1.6 6.7 0.0 0.0 3.6(금 속) 3.3 1.3 1.3 0.5 0.4 0.2 0.1 1.0(기 계) 4.8 7.4 6.1 4.6 5.0 2.4 5.7 4.8(전 기 전 자) 14.4 17.2 7.9 8.9 13.6 4.2 3.8 9.6(운 송 용 장 비) -------------------------------농축수산업 및 광업 0.3 0.4 0.8 0.0 0.0 0.0 0.1 5.7-------------------------------------------------------------------------------제 조 업 51.2 50.0 82.3 55.4 77.2 42.6 48.7 70.9-------------------------------------------------------------------------------(식 품) 6.7 2.0 0.3 1.0 33.6 0.4 28.4 27.1(제 지 및 목 재) 5.3 0.4 14.1 0.2 0.4 0.1 0.0 2.5(화 공) 12.2 10.8 28.6 24.3 10.8 10.9 2.5 16.5(석 유) 1.6 0.2 0.0 5.2 0.0 20.1 0.0 0.0(요 업) 0.8 1.3 3.2 0.2 20.9 0.0 0.5 0.0(금 속) 0.6 2.3 1.1 0.1 0.5 0.0 0.1 0.6(기 계) 3.2 7.7 13.9 2.0 3.8 1.7 1.4 4.5(전 기 및 전 자) 12.2 12.0 4.4 9.1 2.1 3.8 11.5 4.9(운 송 용 기 기) 5.5 6.6 10.3 3.0 0.8 1.4 2.6 6.5-------------------------------------------------------------------------------서 비 스 업 48.5 49.6 16.9 44.6 22.8 57.4 51.2 23.4-------------------------------------------------------------------------------(도 소 매 업) 2.7 0.6 0.8 0.2 5.0 43.4 1.5 1.3(무 역 업) 3.6 2.2 6.6 6.1 3.7 6.6 1.9 4.8(숙 박 업) 30.1 32.8 0.0 6.8 3.2 0.3 28.8 1.7(금 융 업) 4.4 4.7 5.9 13.1 2.
    경영/경제| 2003.09.22| 13페이지| 1,500원| 조회(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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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학] 개화사상과 갑신정변 평가A좋아요
    개화 사상과 갑신정변1. 개화사상과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1) 개화파의 형성개화(開化)라는 용어는 본래 『주역(周易)』의 개물성무(開物成務) 화민성속(化民成俗) 에서 취한 것으로 모든 사물을 지극한 곳까지 궁구·경영하여 일신하고 또 일신해서 새로운 것으로 백성을 변하게 하여 풍속을 이룬다는 뜻이다.19세기 전반기까지만 해도 동아시아는 중국 중심의 질서체제 아래 놓여 있었다. 이러한 동아시아의 질서체제는 중국이 아편전쟁과 애로우호 전쟁 등을 거치면서 서양의 여러 나라들에게 무릎을 꿇게 되면서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중국의 북경 함락과 일본의 개항은 조선사회에 큰 충격을 던져주었다. 이러한 소식을 접한 조선사회는 서구 자본주의 세력의 침입에 대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서구 자본주의 세력에 대한 위기의식은 대원군 집권기에 실제적, 현실적인 문제로 다가오게 되었으니 두 차례에 걸친 병인양요(1866)와 신미양요(1871)가 바로 그것이다. 프랑스·미국 함대와 접전하게 된 병인·신미양요를 경험하게 되면서 조선사회는 서양 무력의 우수함과 위세를 직접 목격하게 되었다.밖으로 북경함락과 일본의 개항소식을 접하고, 안으로 서구 열강의 직접적 침입을 경험한 조선사회의 지배층과 지식인들은 서양세력의 침투에 대비하기 위한 방안을 강구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나라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현실적 책무를 느끼게 되었다. 이러한 조선사회의 새로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적 흐름의 하나로 등장한 것이 바로 개화사상이다.개화사상의 형성시기에 대해서는 논자마다 견해가 다양하다. 역관 오경석이 1853년부터 1859년까지 청국에 역관으로 왕래하면서 개화사상을 형성했다고 보는 1850년대설, 실학사상을 내재적 기반으로 1860년 전반기에서 후반기에 걸쳐 유홍기·오경석 등 중인 출신에 의해 형성되었다는 1860년대설, 신헌이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志)』를 참고로 하여 수뢰포(水雷砲)를 제작한 1860년대 후반설, 박규수의 역할을 강조한 1870년대설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개화사상일본과 청으로의 조사시찰단·영선사의 파견 등 여러 가지 개화정책을 추진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개화파의 정치적 입장은 더욱 커져 갔다.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이들 개화파는 서구 문물의 수용 정도와 개화의 방법을 둘러싸고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동도서기론자(온건 개화파, 시무개화파)와 변법론자(급진개화파, 문명개화론자) 사이의 대립과 갈등이 그것이다. 동도서기론(東道西器論)은 동양의 도(道)인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유지하면서 서양의 기술을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그것은 동도(東道)를 유지하기 위해 서기(西器)를 받아들이는 것으로, 어디까지나 동도의 유지에 그 중심을 두고 있었다. 동도서기론자들은 임오군란 이후 3천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조선의 정치·경제·외교문제에 적극 간섭하고 있었던 청나라의 힘을 인정하고, 청에 의지하여 정권을 계속 유지하려 하였다. 동도서기론자로는 김윤식·어윤중·김홍집 등을 들 수 있으며. 민씨척족을 비롯한 당시 장치권력의 핵심세력들 대부분이 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반면에 김옥균·박영효 등의 변법 개화파는 서양의 기술 뿐만이 아니라, 기술의 바탕이 되는 서구의 제도와 문화까지도 수용해야 한다는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 변법론자들은 임오군란 이후 정치적으로 급성장하고 있었다. 먼저 박영효는 1882년 9월에 임오군란 수습과 관련한 수신사의 정사로 일본에 파견되었으며, 김옥균은 고문으로 수행하였다. 이들은 일본에서 근대 문물을 시찰하고 정계의 주요 인물들과 접촉하기도 하였다. 박영효는 일본에서 귀국한 후 1882년 12월에 오늘날의 서울시장격인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이 때 박영효는 개화파의 개혁의도를 반영하여 근대적 개화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그러나 이들 개화파는 임오군란 이후 심화된 청국의 간섭과 당시 권력의 실세인 민씨척족 등의 견제로 더 이상 성장하기 어려웠으며, 개화사업 또한 주도적으로 실행하기 어려운 입장에 처하게 되었다. 박영효는 민씨척족의 견제로 한성부판윤에서 물러나 광주유수로 옮겨졌다가 물러났으며, 김옥균 또한 민씨척족 등의 화 정책과 개화정책에 대한 탄압에 대하여 이를 비판하였다. 김옥균 등의 개화당은 청의 간섭을 배제하여 자주 독립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시급히 서양문물을 받아들이고 근대적 개혁을 실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조선에 대한 간섭을 강화해오던 청으로서는 그러한 개화당의 움직임이 궁극적으로 청국으로부터 자주독립을 추구하는 운동이라고 보고 개화당을 탄압하고 개화운동을 저지하였다. 이로 인해 김옥균 등의 개화파는 점차 정부 요직에서 소외되어 갔다.개화당은 개혁이 요구되는데 개혁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던 시기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개화당은 근대국가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청의 간섭과 수구파를 제거하는 것이 급선무라 인식하였다. 개화당들이 청의 속방화 정책과 그에 야합한 민비 정권을 타도 하기 위하여 정변을 꿈꾼 것은 1883년 봄부터였다. 그러나 이때에는 아직 정변의 구체적인 계획을 설계한 것은 아니었다.개화당이 정변을 일으키기로 결심을 한 것은 1884년 9월이었다. 청과 프랑스 사이에 안남문제를 둘러싸고 청·불전쟁의 조짐을 보이자 청은 1886년 6월 서울에 주둔한 3,000명의 병력 중에서 1,500명을 안남전선으로 이동시켰다. 뒤이어 9월에 청·불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와 청이 전쟁상태로 접어들자 개화당 인사들은 청이 전쟁을 벌이게 됨으로써 조선문제에 깊이 관여하지 못할 것이며 나아가 전쟁에 패하게 되면 조선의 독립도 쉽게 이루어 질 것으로 예상하였다.개화당이 정변을 결심한 것을 9월이고 일본 공사 다케조에가 휴가차 본국에 갔다가 서울로 귀임한 것은 1884년 10월이었다. 이때 서울에 귀임한 공사는 종전의 개화당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완전히 바끄어 적극적 호의를 보이면서 접근해 왔다. 일본은 조선에서의 청에 대한 열세를 극복하고 일본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계획아래 다케조에 공사를 통해 정변에 대한 군사적 지원과 정변 후의 재정적 지원을 약속하였다. 이에 일본군 150명을 빌려 이용하기 위한 합의가 이루어졌다.민비정권의 압박 우정국 낙성식 축하연에 정적들을 초대하여 안국동 별궁의 방화를 시작으로 수구파들을 제거하는 것으로 결정하였다. 당시의 관례로 볼 때 궁궐에 불이 나는 따위의 큰 일이 일어나면 신하들은 즉시 입궐하도록 되어 있었다. 개화파는 이 기회를 이용해 정적들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이 날 저녁 7시에 낙성식 축하연이 열렸다. 여기에 개화파를 비롯하여 열강들의 주한 공사와 수구파의 거물들이 참석하고 있었다. 밤 10시경 예정된 안국동 별궁의 방화가 실패하자 우정국 북쪽에 있는 민가의 방화를 시작으로 정변은 시작되었다.축하연 자리를 황급히 빠져 나온 개화파는 입궐하여 청국이 변란을 일으켰다고 거짓 고하고 국왕을 창덕궁에서 청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기 용이한 경우궁으로 옮겼다. 거기서 군사지휘권을 가진 자와 민비 척족의 핵심세력들을 왕명으로 불러 들여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였다.개화당은 신정부의 수립에 착수하였다. 신정부는 개화당 요인과 국왕 종친의 연립내각으로 구성되었다. 개화당의 홍역식은 우의정이 되고, 재정은 김옥균, 군사는 박영효화 서재필이 담당하도록 하였다.12월 5일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었음을 대내외에 공포하였다. 그날 오전에 경우궁이 비좁고 불편하다는 왕비의 강력한 요청으로 이재원(고종의 4촌)의 집인 계동궁으로 국왕과 왕비의 거처를 옮겼다. 다시 5일 오후 5시경에 개화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창덕궁에서 와이 계신 제일 안쪽을 개화당 소속 군인, 제 2선은 일본군, 제 1선은 천군영의 병력이 방위하였다.2) 갑신정변의 혁신정강정권을 장악한 개화당은 나라를 어떠한 방향으로 개혁하려 했는가? 이 물음에 대해 해답을 주는 것이 그들이 공포한 정강(政綱)이다. 정강은 12월 6일 공포되었다. 정강은 80여개 조항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으나 정확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은 김옥균의 수기인 갑신일록(甲申日錄)에 수록된 14개 조항뿐이다. 갑신정강(甲申政綱)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1. 대원군을 곧 모셔오도록 할 것.2. 문벌을 폐지하여 인민평등의 권(權)을 계 관부는 혁파할 것.13. 대신과 참찬은 매일 합문(閤門)안의 의정부에서 회의하여 완전히 결정한 다음에 정령(政令)을 반포해서 시행할 것.14. 정부 6조 이외에 무릇 불필요한 관청에 속하는 것은 모두 폐지하고 대신과 참찬으로 하여금 토의하여 처리케 할 것.2조는 문벌의 폐지와 인재의 등용을 공포한 것이다. 문벌의 폐지는 양반신분제도 폐지와 표리관계를 이루는 것이었다. 따라서 2조는 양반제도를 타도하고 국민국가를 수립하려는 개화당의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3조·6조·9조·12조 등은 조세제도의 개혁·환상제도의 폐지·보부상 등 봉건적 특권상업의 폐지, 재정의 통일 등의 경제개혁의 단행을 의도한 것이었다. 8조는 경찰제도의 근대화를 추구한 것이었다.13조와 14조 등은 내각제도의 수립과 같은 국가형태 갸혁과 정부 조직의 개편을 공포한 것이다. 13조와 14조를 통해 볼 때 개화파는 전제 군주제에 제한을 가하고 입헌 군주제의 초기 형태인 입법권과 행정권을 가진 내각제도 창설을 의도한 것이었다. 개화파는 중앙집권적 군주국가를 구상하고 개화파 관료를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개혁 을 단행하려고 하였다. 만일에 갑신정변이 성공하여 개화파 정부가 지속되었다면 대신·참신회의, 즉 대각회의의 권한을 확대하여 개화당 요인이 이 기관을 장악하여 그들의 이상을 실현해 보려고 했을 것이다. 이 같은 국가형태, 즉 정체구상은 전근대적 군주국가로부터 근대적 국민국가로의 과도기적 중간형태로 불 수 있다. 보다 엄격히 말하자면 입헌 군주제에서도 의회주의적인 통치형태를 취하지 않은 ‘초기 부르조아 국가’에 해당하는 것이다. 개화파가 갑신정변 때 바로 입헌 정체의 수립을 꾀했다기 보다는 가까운 장래에 있어 입헌 정체의 수립을 지향했다고 보는 편이 진실에 가깝다.갑오개혁 때 내각제도를 수립하여 전제 군주제에 제한을 가하고 입헌군주제로 가는 과도적 정치체제와 국가형태를 수립하였다. 갑오개혁의 내각제도 수립 같은 정치형태 개혁은 갑신정변 때 단행하려다 실패했던 것이 갑오개혁 때 단행된 것으로 보인다.이상.
    인문/어학| 2003.09.22| 8페이지| 1,000원| 조회(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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