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1 테러 사건이 일어난 지도 1년이 지났지만 그 사건은 하루 아침의 충격으로 끝나지 않고 테러가 없는 세계를 만든다는 미명 아래 1년이 넘게 테러와의 전쟁으로 이어 지고 있다. 9.11 사건이후 미국은 아프카니스탄과의 전쟁을 하고 그 전쟁의 승리로 자신감을 얻어 이번에는 이라크와 전쟁을 하였다. 이러한 사건들은 미국이 지명한 몇 개의 테러 국가만의 문제가 아니라 국제 사회의 상황에 따라서 얼마든지 영향을 받을 수 있는 우리 모두의 문제이다. 부시 미국 대통령은 전쟁 와중에도 북한을 "악의 축" 국가로 지명하여서 북한도 언제 미국의 공격을 받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북한이 미국의 공격을 받으면 이것은 우리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전체의 문제 더 나아가서는 나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라크 전쟁에 관한 문제를 좀더 냉철하게 볼 필요성이 있다.우선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한 최종 목표는 중동 질서의 재편을 통해 헤게모니를 장악하는 것이다. 과거 미국의 중동정책은 세력균형 유지가 기조였는데, 현재는 이라크 공격을 통해 중동지역에서 확실한 헤게모니를 확보하려고 한다. 미국이 이라크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게 되면, 이라크의 지정학적 위치 때문에 효율적이고 광범위한 중동지배가 가능해진다. 그리고 갈등관계에 있는 또 다른 악의 축인 이란을 이라크, 아프카니스탄, 중앙아시아의 3면에서 압박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게된 첫 번째 이유라고 할 수 있겠다.두 번째 이유로는 이라크 전쟁이 미국이 처한 경제적 문제의 돌파구의 하나 이기 때문이다. 미국 경제는 장기호황의 후유증으로 90년대 말 IT버블 및 주가 버블이 붕괴되었고 현재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투자 부진으로 2001년 0.3%, 2002년 2.2%의 성장에 그침으로써 전비 지출에 힘입어 미국 경제가 활력을 되찾고, 이라크 석유생산 증가로 국제유가가 인하되기를 기대해 후세인 정권이 축출되면 하루 300-500만 배럴의 원유증산이 가능하고, 또한 미국 기업들은전쟁 이후 인프라 복구 등 대규모 특수를 예상 공공 시설 복구에 매년 150-200억 달러가 소요될 전망이다.세 번째 이유는 이라크 전쟁은 부시 대통령의 정치적 승부수이다. 이라크 전쟁을 통해 애국심을 고취하고 미국인들의 단결 도모하여 단기전으로 승리를 이끌어야 국내외 반전 여론이 무마되고 2004년 대선에서도 승리 가능성이 높아져 다시 대통령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마지막 이유로는 석유 문제이다. 미국의 친 이스라엘 정책으로 미국과 사우디 아라비아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그것은 원유 수입의 6분의1을 사우디에서 수입하는 미국입장에서는 에너지 확보에 위협으로 작용하였다. 그리고 9.11테러의 범인 19명 중 15명이 사우디 사람으로 밝혀진 후 미국은 사우디에 대한 정책을 재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미국은 새로운 석유 공급원으로 이라크를 주목한 것이다. 미국은 걸프전 이후 줄곧 석유 공급원의 다변화를 추구하였는데 이라크에 친미 정권이 설 경우 미국은 사우디에 대한 석유 의존도를 낮출 수 있다는 것과 이라크는 사우디에 이은 제2위에 석유 장국이며 채굴비용도 저렴하다는 것이 이유이다. 유럽 각 국들이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 반대하는 이유도 자국의 석유 이권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후세인 정부는 그 동안 프랑스, 러시아, 중국 등의 기업들과 총380억 달러의 유전개발 계약을 체결하였다. 여기에 미국과 영국은 대 이라크 경제제재 조치로 인해 그 동안 석유 이권을 확보하지 못한 것도 전쟁의 이유이다.이러한 이유로 미국과 영국은 전쟁을 시작하였는데 그 같은 이유가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진다면 전쟁은 보다 안전한 세계를 가져올 것이다. 반대로 그 이유들이 근거 없거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전쟁은 오히려 불안정을 초래할 것이다. 그럴 경우 부시와 블레어는 대통령직과 총리직을 빨리 물러나는 것이 전 세계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다.이라크 전쟁은 후세인이 폭군이라는 점에서는 정당화될 수 없다. 정당화할 수 있다면 후세인 정권의 잠재적 위험일 것이다.부시와 블레어는 전쟁이 불가피한 4가지들었다. 첫째, 이라크는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다. 둘째,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매우 심각하면서도 직접적인 위협을 주고 있다. 셋째, 유엔의 사찰이 그 같은 위협을 제거하지 못했다. 넷째, 위협은 전쟁에 의해 가장 잘 제거될 수 있다.첫 번째 주장은 확인하기가 가장 쉬운 부분이다. 부시와 블레어는 대량살상무기는 물론 핵무기를 제조하기 위한 프로그램·지하 및 이동 생산시설 등에 대해서도 수 차례 언급했다. 따라서 그 같은 무기에 대한 존재여부는 부시와 블레어 스스로가 증명해야 한다. 특히 미국과 영국의 안보기관들이 가짜 증거를 심어뒀을 것이라는 전 세계적 의혹도 풀어야 한다. 만약 위협적인 규모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다면 이라크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에 관계없이 부시와 블레어는 정치적으로 밀려 날 것이다.두 번째 주장은 증명하기가 매우 까다로운 부분이다. 이라크는 한때 미국으로부터 구입한 화학 및 생물무기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 같은 무기가 처리장에 남아있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위협적인 양으로 사용할 준비가 돼 있느냐 하는 것이다.세 번째 주장 역시 논란의 여지가 많다. 이라크가 사찰이 방문한 지역에 무기를 숨겨두고 없다고 잡아뗐다는 증거가 필요하다. 사찰단이 왜 상당기간 동안 무기를 찾아낼 수 없었는가도 설명해야 한다.네 번째 주장은 양측의 선전과 비방을 잘 살펴봐야 할 부분이다. 전쟁이 비용·수익분석으로 정당화될 수 있을까? 전쟁이 과연 최후의 수단일까. 전쟁비용을 인명 및 재산손실·전쟁이 이라크 및 세계경제 미치는 영향·테러의 확산 및 지정학적 긴장 등 다각적 면에서 평가해봐야 이에 대한 해답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부시와 블레어는 자국을 제외하고는 전 세계적 반대에 부딪히고 있다. 특히 미국인들은 주전론(主戰論)과 공포 조성은 물론 빈 라덴과 이라크를 혼동하는 등 단순한 애국심을 표출하고 있다. 만약 4가지 주장에 대한 증거를 들이댈 수 있다면 세계인들의 태도도 바뀔 것이다. 북미(北美)의 13개 주가 독립전쟁을 일으켰을 때제퍼슨은 독립선언서에서 전쟁의 필연성에 대한 설명에는 인간적인 적절한 존경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정한 증거에 입각한 그 같은 설명이 이번 전쟁에서도 필요하기는 마찬가지다.부시와 블레어가 국제적 반대여론에도 불구하고 세계평화를 파괴하면서 준비된 대량학살을 자행했다는 것은 자명한 진실이다. 분열된 세계를 치유하는 길은 미국과 영국에서 새로운 지도자를 뽑는 동시에 유엔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다.만약 처음 3가지 주장이 모두 맞는 것으로 나타난다면 부시와 블레어의 견해를 존중해야 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전쟁은 봉쇄 또는 고립정책에 비해 현명치 못한 선택이다. 뿐만 아니라 전쟁은 최소한의 명분은 가지고 있어야 한다. 아무런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기 때문이다.이번 전쟁으로 또 하나 야기된 문제는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이다. 미국의 대 이라크 전쟁이 정당성을 얻기에 힘들어 보이지만 '이번 전쟁이 정당하지 않으므로 평화를 수호하는 우리 한국은 파병할 수 없다'라고 하면 그만인 문제가 아니다. 한국과 미국은 그 속사정이야 어떠했든 혈맹국이고 세계의 패권을 쥐고 있는 미국과 우리 한국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무엇보다 한반도의 특수상황, 분단과 북핵문제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번 파병문제는 과거 조선의 광해군과 효종이 처한 상황과 유사하다. 1618년, 조선 15대왕 광해군은 명나라로부터 출병을 요구받았다. 광해군은 새롭게 떠오르는 세력인 후금과 적대적인 관계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조선은 임진왜란 때 명의 도움을 받았던 나라이다. 출병 요구를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광해군은 파병을 미루다가 이듬해가 되어서야 출병시켰다. 이때 군을 이끌던 강홍립은 광해군으로부터 '형세를 보아 향배를 정하라'는 별도의 명령를 받는다. 명분에 밀려 어쩔 수 없이 파병은 하지만 후금과 끝까지 싸우지는 말라는 뜻이었다. 강홍립 '부차의 싸움'에서 명나라 장군이 패퇴하자마자 후금에 항복해 '어쩔 수 없는 출병'이 후금 쪽에 적극 해명하고, 결국 조선은 후금의 침략을 모면했다. 이것은 명분과 실리를 살린 탁월한 외교 정치인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의 상황은 조선의 광해군과 효종이 처한 상황과 비슷했었는지 모르겠다. 물론 200 ∼ 300년 전의 조선의 상황을 지금에 그대로 적응하는 것은 무리이겠지만 그 본질은 이번 파병 결정에서 적용할 수 있으리라 본다.이미 우리는 파병을 하였다. 파병을 한 이상 우리는 가장 실리를 찾는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전쟁 이후 이라크는 재건과 복구의 방향이 불 것이다. 경제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상황에서 '제 2의 중동 붐'을 통한 경제적 활성화를 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파병을 함으로서 우리는 한·미 동맹관계를 재정립해야 할 것이다. 그동안 미국이 우리나라에 대해 갖고 있는 주된 인식은 '도와준 나라'라는 것이다. 6·25때 미국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이미 없어졌을 나라이며 아직까지도 미군의 보호 때문에 북한의 침략을 받지 않고 있는 나라라는 인식을 미국 사람들은 갖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라크 파병은 이라크 전쟁 이후 향후 북핵 문제 해결을 더욱 원활하게 해줄 것이다. 미국이 우리를 동맹국으로 인식을 하면 북핵 문제의 해결에 있어서 기존의 독자적이고 강압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동맹국으로서 우리의 의견을 상당히 경청하고 방영할 것이다. 이번 파병은 미국과 우리의 동맹 관계를 대등하게 유지할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는 것이다. 파병은 군사적으로도 좋은 경험이 된다. 파병이 공병·의부 부대의 비전투 부대로 한정된다고 해도 우선은 미국의 첨단무기들과 그 활용을 직접 체험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또 이라크 민병대의 게릴라 전술을 통해 북한의 게릴라전을 유추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점은 실전을 눈으로 직접 봄으로써 귀중한 군사경험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강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쓸만한 군사력을 보유하는 것은 더욱 중요한 일인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파병 후 챙겨야 할 이득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의 결성과 조직상의 특징(特徵)1910년 대한제국이 멸망하기 전의 구한말과 1910년대 독립운동은 성격과 양상이 달랐다. 1910년대에도 구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이 계속되었던 것은 같은 점이지만, 국내와 국외에서 새로운 독립운동 단체가 일어나고 있던 모습은 크게 달라진 점이다.국외에서는 연해주의 권업회(勸業會)와 대한광복군정부(大韓光復軍政府), 북간도의 간미교육회(墾民敎育會) 또는 간민회(墾民會), 서간도의 경학사(耕學社) 또는 부민단 (扶民團)과 백서농장(白西農庄), 상해의 동제사(同濟社)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 하와이의 국민회( 國民會)와 대조선국민군단( 大朝鮮國民軍團) 등이 1910년대 독립운동 단체로 결성된 대표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한편 국내에서 결성된 단체로는 풍기(豊基) 광복단(光復團)과 조선국권회복단(朝鮮國權恢復團)을 기초로 결성된 대한광복회(大韓光復會)와 조선국민회(朝鮮國民會)가 대표적이었다. 그밖에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 같은 의병전쟁이나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 ) 같은 계몽운동 단체도있었는데 그것은 구한말의 의병전쟁과 계몽운동을 계승한 것이다.그 가운데 국내 독립운동을 대표하던 단체는 대한광복회였다. 그에 대하여 금번에 학술회의를 갖게 된 것을 축하하면서 필자에게 의뢰한 그의 조직에 관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필자는 연전에 ( 5, 국민대 한국학연구소, 1982)과 ( 42, 한국사연구회,1983) 그리고 3, 국사편찬위원회, 1983) 등에서 풍기 광복단과 조선국권회복단, 그리고 대한광복회에 관한 연구논문을 발표한 바가 있었다. (위의 글은 필자의 (지식산업사, 1989)에 수록되어 있음)그 후에도 대한광복회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필자의 논문에서 미진한 점을 크게 보완하였다.그 가운데에서도 박영석 교수의 ( 1, 1986)와 박환교수의 ( 44, 일지사 1986), 그리고 권대웅 교수의 ( 9, 영남대, 1988)와 강영심연구원의 ( 4, 독립기념관, 1990) 들이 새로운 자료를 발굴하여 연춘(長春)에 이관구가 설치한 삼달양행(三達洋行)과 상원양행(尙元洋行)을 연락처로 삼았다. 그리고 연해주의 우수리스크 니코리스크(소왕령)에 연락처를 개척하고 있었다. 곡물상이나 잡화상, 그리고 여관을 연락 거점으로 선택한 것은 누구나 쉽게 출입할 수 있으며, 금전 출납이 개방되어 있어서 광복회의 연락이 용이하기 때문이었다. 대한광복회는 그러한 연락처를 국내에만 100개소를 설치할 계획이었다.구성 인사를 보면 유창순(庾昌淳)·한훈(韓焄)·권영만(權寧萬)·우재룡(禹在龍)·이진룡(李鎭龍) 등 의병 출신자 또는 박상진·채기중·김한종처럼 의병 관계자가 주축을 이루고 있었는데, 나중에 다양한 인원이 참가하였다. 다양하게 구성됨에 따라 김좌진처럼 구한말 계몽주의자, 또 삼척의 김동호(金東鎬)처럼 일제하에서 면장을 지낸 인사도 있었다. 그리고 구시대의 반상을 가리지 않고 새 시대의 독립운동을 위하여 모였다. 따라서 유림이라고 해도 박상진·이관구·한훈·이병호처럼 혁신유림의 성격이 짙었다. 그러므로 비슷한 시기에 독립군 단체로 결성되어 있었던 독립의군부나 민단조합처럼 복벽주의를 이념으로 결속한 것이 아니라 공화주의를 표방하고 있었다. 그리고 박상진·이관구의 경우와 같이 대종교적 성향을 보이기도 했다. 대종교적 성향을 보인다는 것은 유림의 범주에 속한다고 해도 척사유림이 될 수없다는 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활동면에서는 세 단계의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처음에는 상동광산(上東鑛山)과 직산광산(上東鑛山)을 습격하여 군자금을 모은다든가, 경주에서 우편차를 습격하여 현금을 차압하여 군자금을 충당한다든가, 구한말 의병 방식을 그대로 수행하였다. 그때 화폐위조 계획을 세웠던 것은 독립운동 단체의 새로운 모습으로 보인다. 두 번재는 전국적으로 100개소의 연락거점을 마련하기로 계획하고 그것을 혁명의 거점으로 확대해 나가면서 혁명에 필요한 무기를 확보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무기 구입에 필요한 군자금을 거족적으로 모금하기로 결정하고 각도별로 부호 명단을 확보한 후 부호들에게 헌금통문을 발송하는 1910년에 대표적인 독립운동 단체라는 것이 규모면에서 만이 아니라 활동과 영향면에서도 그렇게 말해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것이다.2. 조직상의 특징(特徵)과 의의(意義)조직상의 특징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앞에 대한광복회의 개요에 대하여 약술하였다. 그러나 총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조직의 특징을 간추려보면 다음과 같다.1) 1910년대 국내에서 결성된 최초의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다.1910년 대한제국의 멸망을 전후하여 무장 독립운동의 추이를 보면, 구한말부터 전개해 온 의병전쟁이 북쪽 국경선 일대와 추가령지구대·태백산맥·소맥산맥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과, 서북간도와 연해주 등 해외에서 독립군기지가 개척되고 있었던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때 국내에서 의병과 성격을 달리하는 조직으로 새로 결성된 무장단체는 1913년의 풍기 광복단이 처음이었다. 풍기 광복단의 조직이 대한광복회로 발전되어 갔으므로 그것을 첫 번째의 특징으로 지적해 둔다. 그런데 풍기 광복단은 의병출신자를 주축으로 결성하였다. 그런데도 의병과 다른 성격의 무장단체를 조직할 수 있었던 것은 황상규·김상옥 같은 신진 청장년의 참여로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굳이 풍기에 팔도의 청장년이 모였던 이유는 풍기라는 이름대로 인풍(人豊) 물풍(物豊)한 고장이라는 이유도 있었지만 나라가 멸망하는 혼란기를 맞아 정감록(鄭鑑錄)의 수선지(首善地)로 알려진 이곳에 팔도에서 피란 온 사람이 많아 의병출신자가 자신의 실체를 숨기기 좋았기 때문이다.2) 1910년대 국내 유일의 전국적 조직의 독립군 단체였다.1910년대 국내에서 민족운동 당체 가운데 도 단위를 넘어선 것으로 독립의군부·민단조합·조선국민회·조선산직장려계 등이 있었는데 모두 전국에 걸쳐 조직되어 있지는 않았다. 대한공복회도 전국 8도 가운데 함경도에 지부를 가지고 있었다는 자료는 아직 발견하지 못하였으나, 그밖에 지역에는 모두 지부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만주의 안동·장춘·길림에 지부를 지부를 두고 있었으며, 거기에 기반으로 러시아 연해주의 우간도의 신흥무관학교도 독립군 교육을 실시할 수 없어 백두산 서쪽에 백서농장으로 위장하여 훈련을 해야할 처지였으므로 재만 독립군이 당장에는 독립전쟁을 주도할 형편이 못되었다. 그렇다면, 국내 조직이 주도적 위치에 설 수밖에 없었다고 보아 무리가 아닐 것이고 국내에서 독립전쟁을 일으키자니 혁명적 방법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4) 공화주의를 표방한 독립혁명 단체였다.1910년대 독립운동의 이념은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가 추구하던 복벽주의(復 主義=전제군주주의)와 북경에 있던 신한혁명당이 추구하던 보황주의(保皇主義=입헌군주주의)와 1907년 신민회 이래 새로 확산되어 가던 공화주의(共和主義)로 대별할 수 있는데 대한 광복회는 공화주의를 표방하였다. 국내에서 공화주의를 표방하던 인사는 조선산직장려계(朝鮮産織奬勵 ) 인사처럼, 거의 계몽운동에 종사하거나 아니면 권업회(勸業會,연해주), 간민교육회(墾民敎育會,북간도), 정학사(,耕學社,서간도), 동제사(同濟社,상해)의 인사처럼, 해외로 망명하여 활동하였다. 그런데 박상진·이관구 등이 주도한 대한광복회는 국내조직인데도 특별히 이 기회에 임금이 없는 나라를 세운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었다. 태황제(고종)의 복귀를 거부했거나, 그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공화주의 이념은 이웃 중국의 신해혁명을 보면서 확신을 얻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대한 광복회는 혁명조직으로서의 성격을 심화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5) 의열투쟁을 단체조직으로 단행한 효시가 되었다.의열투쟁이 독립운동 방략으로 이론화한 것은 의열단 선언문인 1923년 신채호의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이었다. 그러나 의열투쟁이 전개된 것은 1908년 장인환(張仁煥)·전명운(田明雲)의 스티븐슨를 단죄한 샌프란시스코 의거와 1909년 안중근(安重根)이 이등박문(伊藤博文)을 처단한 하얼빈 의거부터였다. 그런데 그러한 의협투쟁을 단체 조직으로 단행한 경우는 대한광복회에서 비롯된다고 생각되며, 그것이 1919년 암살단이나 주비단(籌備團)의 뱝략으로 이어져 의열광복회의 조직에서 그 본부가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 있었고, 회장은 윤세복(尹世復), 부회장은 신채호(申寀浩), 총무 이동휘(李東輝)라는 설이 있는데 그것은 당시 충청남도 경찰의 일시적 정보에 불과했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1918년 3월 2일 충청남도 경무부에서 작성한 김한종(金漢鍾)에 대한 조사문서를 보면, 광복회의 약사(略史)가 수록되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문구가 발견된다.광복회는 지금부터 6년전(1912년; 필자) 재외 배외선인 윤세복·신채호·이동휘·이갑 등이 앞장서 노령(露領) 포염(浦鹽=블라디보스토크, 해삼위(海蔘威); 필자)에서 국권회복의 목적으로 조직하고, 그후 포염(浦鹽)에 본부를 두고, 간도(間島) 회인현(懷仁縣) 및 안동현(安東縣)에 지부를 둔 것으로 현재 본 부의 역원은 회장 윤세복, 부회장 신채보, 총무 이동휘라고 한다…….강덕상(姜德相), 25, 45쪽, 대정(大正) 7년 3월 2일,고제(高第)4018호)라 하고 만주의 회원은 2만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이것은 충남 경찰이 당부(當部)에서 모지(謀知)한 바에 의하면 이라는 모호한 정보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그와 같은 기록은 다른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박상진·채기중·우재룡·이관구 등 광복회 중심인물의 경찰조서 또는 판결문에서도, 또 충남경찰에서 조사를 받은 김한종의 조사서나 판결문에도 언급이 없다. 오히려 김한종은 광복회 주동자를 박상진이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박상진과 채기중의 유고에도 언급이 없을 뿐 아니라 8·15 후 광복회를 재건하면서 한훈이 작성한 이나 광복단본부의 (1945)에도 그와 같은 내용은 발견되지 않는다. 또 당사자인 윤세복·신채호·이동휘 등의 자료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이동휘가 총무를 맡았다면 그가 핵심 역할을 수행했을 터인데, 이동휘가 연해주에 간 것은 1913년이고, 보면 연대도 맞지 않지만 연해주에 도착한 후 대한광복군정부를 결성하느라고 그럴 겨를리 있었다고 보기 힘들다.그렇게 보면 일부 학자들이 충남 경찰의 불확실한 정보를 채택하여 대한광
♠다음 주제로 과제를 준비하세요.(교재 349∼373쪽(조동걸, 1998, 《한국근현대사의 이해와 논리》지식산업사●백범(白凡) 김구(金九)의 통일국가(統一國家) 수립운동(樹立運動)한국근현대사: 이홍두교수1. 머리말통일국가 수립운동이라면 당연히 1945년 8·15해방 이후의 문제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해방 이전으로 올라가 살펴야 할 이유가 있다. 해방과 더불어 미·소의 패권주의에 의하여 한국은 남북이 분단되었는데 미국과 소련은 당시에 사상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한 종주국이었고, 또 양국을 정점으로 냉전체제가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한국의 남북분단이 사상적으로도 극단 대립하게 되었다. 그런데 그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는 8·15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발생하고 한국독립운동에서도 심각하게 관계되어 있던 문제였으므로, 통일국가 수립의 문제가 자연히 해방 전으로 올라가 살펴야 할 연원적 이유가 있게 된 것이다. 강대국에 의한 분단이라고 해도 만일 같은 자본주의 국가에 의한 분단이거나 반대로 같은 공산주의 국가에 의한 것이었다면, 8·15 이전의 사상 대립문제를 거론할 이유가 없을 것이지만, 국토의 분단이 사상의 분단으로 나타난 한국의 분단이었으므로 자연 국토분단 전의 사상 분단을 역사적 원류로 살펴야 하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독립운동에서도 미주나 소련에서 전개한 경우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사상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범 김구가 활동한 중국에서는 중국 자신이 사상문제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그 곳 독립운동에서도 사상문제가 당면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 거기에서 백범 김구가, 또 김구가 이끌고 있던 임시정부가 어떠한 정책을 수립하고 수행하면서 8·15해방을 맞았던가? 그리고 해방 후 남북에서 점령군이던 미·소의 지원을 받으며 자연스러울 수도 있을, 미국과 소련에서 활동하던 이승만과 김일성이 친미 친소 정권을 각각 수립할 때, 미국과 소련과 연고가 없던 백범 김구는 어떠한 노선을 추구하고 있었던가? 백범 김구는 한국이 미국과 소련에리고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국내의 건국동맹(여운형)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진행하던 시기에 해방을 맞았다는 자료도 발견되고 있다.이와 같이 보면 1937년 중일전쟁 이후 백범의 활동은 광복군의 창설을 통한 대일전쟁의 주체적 승리를 위한 독립전쟁과 더불어 통일전선 형성을 추진한 활동이 주축을 이루었다고 이해된다. 여기서 통일전선의 형성이 광복 조국의 통일국가 수립을 목표하고 그것을 준비한 일련의 노력이었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그와 같이 백범이 임시정부를 중심한 통일지향 정책을 추진했던 것은 백범의 인격적인 면모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중경(重慶)에서 좌파의 수령이면서 민족혁명당의 실질적 주장자였고, 백범에게는 정적이기도 했던 김원봉(金元鳳)이 상배후의 속현 결혼식에서 백범이 주례(主禮)를 맡았던 일이나, 장남 김인(金仁)이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민족혁명당의 집결지인 양자강(陽子江) 건너 남안(南岸)에서 곽(郭)여사와 함께 조손(祖孫)이 거주하는 것을 막지 않았던 사실이나, 그 조손(祖孫)의 사후에 화상산(和尙山)에 장례한 사실 등, 사상이 다르고 정적이라고 하더라도 인간적으로는 배척하지 않았다는 백범의 인품을 통하여 통일국가 지도자의 아량(雅量)과 금도(襟度)를 찾아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인격자 백범이었으므로 독립운동에서도 통합과 통일전선을 꾸준히 추구했고 좌퐈 정당에게도 설득력 있는 인격자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고 이해되는 것이다.그러한 인품으로 독립운동 정국을 운영한 백범이었으므로 백범이 주도하여 최초로 결성한 정당인 1935년의 한국국민당의 정강을 좌파와 크게 대립되지 않게 설계하고 있지 않았던가 한다. 그러한 백범의 이념은 1941년의 건국강령이나 그를 구체화한 1944년의 헌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가 1942년 통합의회를 구성할 때나 1944년 연립내각을 수립할 때나 이념상의 논쟁은 없었던 것이다. 1930년 안창호의 대공주의(大公主義)나 조소앙의 삼균주의(三均主義) 제창이래 임시정부는 줄곧 수정자본주의 또는 민주사하기 위하여 특별정치위원회를 구성할 준비를 착수하였다. 이것은 9월 3일 중경에서 발표한 임시정부 당면정책인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준비이기도 했는데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 대한 통일전선의 기대를 포기한 국민의 이목은 임시정부로 집중되었다.그런데 뜻과 같지 않았다. 인민공화국측은 자신들도 대등한 임시정부를 자처하였고, 독립촉성중앙협의회의 이승만은 임시정부 이상의 권위를 행세하려고 했다. 거기에 통치 행정권을 행사하던 미군정은 임시정부를 표방하는 어느 정파도 경계하면서 임시정부와 관계가 먼 한국민주당인사와 밀접한 관계를 수립해 가고 있었다. 이때에 모스크바 삼상회의(三相會議)의 결정안이 전해왔다.12월 28일 도하 신문에 보도된 모스크바3상회의 결정안은 조선에 새로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설립하고 열국에 의한 5년 기한의 신탁통치(信託統治)를 실시하고 그를 주선하기 위하여 미·소 주둔군 사령관으로 공동위원회(共同委員會)를 구성 개최한다는 내용이었다. 1942년부터 종전 후에 한국에 대한 국제관리설이 미국 정가에서 대두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은 국제관리설을 봉쇄하기 위하여 특히 1943년 5월 10일에는 중경에서 재중자유(在中自由) 한인대회(韓人大會)를 개최하여 국제관리설에 대한 반대시민대회를 전개한 이후, 다각도로 외교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런데 드디어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신탁통치안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미국이나 소련은 한국문제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부수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여 38선도 장난처럼 그었고, 종전 후에도 4개월 이상을 방치해 두었다가 겨우 내 놓은 것이 고작 신탁통치였으니 한국인의 민족적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백범(白凡)은 즉각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신탁통치는 자주 독립의지에도 어긋났지만, 열국의 통치로 말미암아 민족분단의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백범은 즉각 긴급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반대결의를 하고, 대내외에 천명하는 한편, 각 정당대표와 종교·언론 관계자를 모아 반탁운동을 새로운 독립운동으로 선포하면서 30일 신탁통치반주장하고 있던 백범노선을 살필 수 있다. 당시는 미소공동위원회를 앞둔 마당이어서 1월 7일에 한민당·국민당·조선인민당·조선공산당의 4당회의가 열려 기적적으로 돌파구를 찾는 듯하였다. 그리하여 8일에는 신한민족당이 참가한 5당회의가, 9일에는 김원봉 등의 임시정부 대표도 참가하여 활기를 띠는 듯하더니 16일에 이르러 다시 찬탁·반탁의 문제로 공산당과 임정측이 극단 대립하여 와해되고 말았다. 여기서 백범이 박헌영(朴憲永)의 조선공산당과의 연대를 포기하였다. 그러자 조선공산당은 인민당 등의 29개 정당단체와 더불어 19일에 좌파연합체로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을 발기하였다.그때에 백범은 20일부터 5일동안 비상정치회의(非常政治會議) 주비회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류할 것에 합의하고 이승만·김구·김규식을 중심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비상국민회의(非常國民會議)는 임시정부의 의정원을 대신하는 기구였는데 거기에 이승만과 한민당 인사가 합류한 것이다. 그러니까 임시정부의 혁신계 인물인 김원봉(金元鳳)·성주식(成周寔)·김성숙(金星淑)·장건상(張建相)이 탈퇴하여 민전(民戰) 결성에 합류하니 국민회의는 우파의 집결체가 되었다. 2월 1일과 2일에 그러한 비상국민회의가 열렸다. 그때에 미 군정청이 요술을 부렸다.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를 그들의 자문기구로서 민주의원(民主議院)(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김규식-3월 20일 이승만 사퇴, 김규식 의장대리)을 구성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견제 또는 무력하게 만들었다. 좌파에서도 2월 15일에 민주주의민족전선(民主主義民族戰線)의 결성을 완성하여 결국, 좌우익의 대립이 구조적으로 정착하게 된 것이다.여기서 백범의 통일국가 수립운동은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특히 남한 단독정부를 구상하고 있던 이승만(李承晩)과 손잡고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한 마당에 백범의 통일전선은 큰 시련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 정계의 주도권이 이승만에게 넘어가기 때문이다. 주도권 자체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은 백중외동경(中外同慶)함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파괴하기 위하여 반대하는 자도 있다. 비록 그 수는 적다 하나 그 지운 바 민족분열의 책임은 엄중하다.3. 나는 신탁통치를 철두철미 반대하는 바이어니와 좌우합작 7원칙 작성에 몸소 노력한 김규식(金 奎植) 박사도 장래 임시정부 수립 후에 신탁을 반대할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에 해석하여 주었다, 그 러므로 7원칙 중에 신탁반대의 표시가 없다고 해서 신탁에 대한 것이 모호하다고 볼 것은 없다.4. 상술한 7원칙은 문자 그대로 좌우합작위원회에서 제외한 일종의 원칙에 그치는 것이요, 미비한 점에 이르러서는 장래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 상세히 규정하여 시행할 여유가 있으니 가대한 기 우(杞憂)는 필요가 없는 바이다.5. 진정한 민주주의 애국자는 한 사람도 좌우합작 공작을 반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합작위원 회로서는 중의(衆意)를 박채(博採)하기 위하여 앞으로도 관계 각 방면에 긴밀한 연락을 취하여 좌 우에 이론(異論)이 적게 하기에 힘쓸 것이다.반탁(反託)과 임시정부(臨時政府) 문제에 대하여 크게 양보하면서 백범은 좌우합작이 통일 조국의 독립에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당시에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정가의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있었는데 백범의 성명은 어떤 문서보다 술수가 없는, 민족의 숙명적 과제로 추구되어야 할 민족 통일에 대한 애정이 담긴 내용이었다. 여기에서 백범의 민족주의와 통일국가 수립의 강력한 의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이 무렵부터 백범(白凡)이 남한 단정을 모색하던 이승만(李承晩)을 제치고 우사(尤史) 김규식(金奎植)과 가까워져 간 것은 기억해 둘 필요가 있을 것 같다.그러나 합작위원회가 끝나고 실시된 입법의원 선거와 12월 12일 설치된 남조선과도입법의원(南朝鮮過渡立法議院)(의장 김규식, 부의장 최동오·윤기섭)으로 말미암아 비상국민회의와 민주의원이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어 입법의원 다수당인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김규식의 중도우파가 정국의 우위를 장악하여 백범은 정치적 위치가 퇴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