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별 마리아.. - 숙명의 여인의 원류를 찾아서들어가며...숙명의 여인이라 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은 단연 마리아 이다. 기독교라는 강력한 종교적인 힘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에게 강하게 인식되고 있는 숙명의 여성 마리아 . 그녀의 인생은 휘몰아치는 파도 위의 돗단배 처럼 험난한 여정을 겪는다. 평범한 여자이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운명. 그녀가 태어남으로써 그리스도인 예수는 존재할 수 있었고, 우리는 예수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이 원하였건 원하지 않았건 하늘의 숙명을 받아들여야만 했던 그녀...그녀에게는 어떤 숙명이 있는 것일까? 마리아는 그러한 숙명을 아무런 저항 없이 순순히 받아들인 것일까? 마리아가 태어나고, 수태고지를 받고, 예수를 낳고 그 예수가 처형을 당할 때까지 마리아의 숙명적인 모습을 미술작품들에서 찾아보고자 했다.1. 마리아의 탄생(1) 마리아 이름의 의미{) 아트라이브러리/예경 p35마리아(Maria)라는 이름은 히브리어인 미리암(Mirjam)에서 유래되었는데, 그 뜻은 존귀한 분, 친숙하고 사랑스러운 부인 혹은 바다 그리고 바다의 별 등의 의미가 있다. 바다 라고 할 때의 의미는 성모가 참아야 했던 고통의 정도와 그 깊이 때문이었고, 또 바다의 별 이란, 그녀의 덕이 마치 어두운 바다의 파도를 비추는 별과 같다는 의미, 또 세상의 모든 험난한 길을 밝혀준다는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었다.{(2) 마리아의 탄생성서에 기록되어 있지는 않지만 마리아의 부친은 요아킴으로서, 요셉의 부친인 야곱의 형이었고, 모친은 안나로서, 다윗 왕의 직계자손이었다.그림{) 아트라이브러리/예경/p32에서 가장 밑 부분에 붉은 색의 겉옷을 입은 안나가 어린 아기인 마리아를 안고 있고, 그 오른쪽에 역시 붉은 색 겉옷을 입은 요아킴이 걸어 들어오고 있다. 천사들이 황홀한 원을 이루면서 그 아래에 있는 성모의 양친과 갓 태어난 성모, 아기 마리아에게 축복을 내리고 있다. 마리아는 태어날 때부터 그리스도를 낳아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이것은 마리아가 원래 그녀의 모친인 안나로부터 원죄 없이 잉태되었음을 의미한다. 미술작품 속에서는 일반적으로 초승달 위에 마리아가 서 있으며, 머리 부위는 별들과 태양 빛으로 가득하고, 때때로 용과 천사들이 재현되며, 기타 마리아의 상징물들이 첨부되기도 한다.그림{) 아트라이브러리/예경 p37에서 지순한 얼굴 모습의 마리아가 5명의 동자 머리 위에 서서 하늘을 바라보고 천상에 서있다. 머리부분 좌우로 어린 두 천사가 석판을 들고 구름 속에 앉아있다. 여인의 머리 뒷부분에도 동자의 얼굴들이 뭉게 구름과 어우러져 성스러운 광채를 형성한다. 13개의 별이 마리아 머리 주변을 감싸고 있다. 그 좌우로 어린 천사들이 각자 석판과 장미 또 백합을 들고 있다. 그림 왼쪽의 천사는 그녀는 누구인가? 라는 질문이 석판에 새겨져 있고, 오른쪽의 천사는 새벽의 빛처럼 등장하는 여인 이라는 석판을 들고 있다. 왼쪽의 천사가 들고 있는 붉은 장미는 순교를 암시하며, 마리아와 그리스도의 고통을 상징한다. 오른쪽 천사의 백합은 마리아의 순결을 상징한다.2. 하늘의 은총을 받은 마리아{(1) 수태고지(受胎告知)수태고지란 천사가 마리아를 방문하여 예수를 잉태했음을 알린다는 말이다.'천사는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은총을 가득히 받은 이여, 기뻐하여라.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 하고 인사하였다. 마리아는 몹시 당황하며 도대체 그 인사말이 무슨 뜻일까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그러자 천사는 다시 두려워 말라. 마리아, 너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았다'{) 루가복음 1장 28~30절마리아가 천사에 의해서 예수를 잉태할 것임을 통보 받는다. 마리아는 당황했다고 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고결한 존재로 자랐던 것이 아니라 보통 소녀로서 자랐던 것이다. 따라서 수태고지 후 많은 고민을 했을 거라 생각한다. 갑자기 찾아온 천사, 그리고 알 수 없는 말들. 하지만 그녀는 그리스도를 잉태하는 것을 받아들이고 성스럽고 고결한 존재로서의 마리아로 부상하게 된다.{(2) 마리아의 엘리자벳 방문엘리사벳은 마리아와 사촌간할 사람을 필요로 했고, 그 사람을 낳을 여인으로 엘리사벳을 선택했다. 그 준비자가 바로 세례 요한으로 예수와는 친척지간이다.그림 {) 아트라이브러리/예경/p53을 보면전원이 펼쳐진 배경에 마리아와 엘리사벳이 만나고 있다. 화면 뒤에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엘리사벳의 집이 있는데, 마리아가 그 집으로 향하는 중, 엘리사벳이 마중을 나왔다. 왼쪽의 푸른 옷을 입은 젊은 여인 마리아가 붉은 옷을 입은 나이 든 사촌 엘리사벳과 마주쳤다. 두 여인은 동병상련의 처지로, 인간의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을 겪고 있었다. 마리아는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아기를 가지게 되었고, 엘리사벳은 노년기에 아기를 가진 것이다. 두 여인이 마주치자 각자 왼손으로 서로의 부른 배를 확인해보고 있다. 마리아가 꼿꼿이 서 있는 것에 반해, 나이 든 엘리사벳은 허리를 굽혀 마리아에게 더욱 존경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마리아가 장차 예수를 낳을 몸임을 암시한다. 엘리사벳은 결혼한 여자로서 머리 수건을 쓰고 있지만, 마리아는 결혼을 안 했기 때문에 머리를 드러내 놓고 있는데 이는 마리아가 순결한 몸으로써 아이를 갖게 되었음을 상징한다.3. 예수를 낳다.{(1) 탄생과 경배마리아는 마굿간에서 예수를 낳는다. 고귀한 몸의 예수를 마굿간에서 낳았다는 것은 가난하고 하찮은 사람들까지도 구원하는 예수를 표현한다고 할 수 있겠다.그림{) 아트라이브러리/예경/p82에나무 2그루와 곧 허물어져 내릴 것 같은 벽돌로 간신히 유지되고 있는 한 폐허 더미 위에 성 가족이 자리잡았다. 이들이 성스러운 존재라는 것은 하늘 높이 있는 별에서 흩어지는 성광이 말해준다. 동방박사들은 바로 그 별을 보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마리아가 낳은 아들을 보기 위해서 동방박사들이 허름한 마굿간을 찾았다는 것은 예수가 평범한 아이가 아니라는 것이 직접적으로 드러나게 된다. 순결한 마리아의 몸에 예수가 잉태되었다는 것만으로도 그 고결함을 짐작할 수 있겠으나 이로써 만인들이 예수의 성스러움을 알게 된 것이다. 이와 함께 마한 찬미가를 쓴다. 축제적 분위기를 한층 돋보이게 하려는 듯, 다섯 천사들이 성모자를 보필하고 있는데, 그 중 화면 양쪽 가장자리에 배치된 두 천사가 성모의 머리위로 금관을 들고 있다.마리아가 쓴 책에는 두 가지의 노래가 적혀있다.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구세주 하느님을 생각하는 기쁨에 이 마음이 설레입니다.아가야, 너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예언자가 되어 주님보다 앞서 와서 그의 길을 닦으며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는 길을 주의 백성들에게 알리게 되리니.....마리아는 예수의 운명을 수용하게 된다. 예수를 잉태하게 해 준 하느님에 감사하고, 어린 예수에게 그 고난의 길을 알린다. 고난의 길을 걷게 될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마리아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과연 정말로 마리아는 기쁘게 생각하는 것일까?{4. 아기 예수의 운명을 알게되다.(1) 성전에 바쳐진 아기 예수유대의 풍습에 따르면 여인들이 아들을 낳으면 7일간은 깨끗하지 못한 몸이라고 했고, 이후 33일간 성전에 들어갈 수 없었다. 드디어 예수가 태어난지 40일이 되자 요셉과 마리아는 이스라엘의 율법을 따라 아들을 바치러 예루살렘의 성전에 가야했다. 모든 맏이는 하느님에게 속했기 때문이다. 성전에서 만난 시므온이라는 현자는 오래 전부터 성령으로부터 예수를 만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들어 알고 있었다. 그림{) 아트라이브러리/예경/p97에서 늙은 시므온은 마리아 앞에 의자에 앉은 자세로, 무릎에 아기 예수를 왼손으로 끌어안고, 머리를 숙여 마리아에게 가까이 댄 채, 오른손으로는 걱정에 쌓인 마리아를 위로하듯, 무언가 설명하고 있다.이 아기는 수많은 이스라엘 백성을 넘어뜨리기도 하고 일으키기도 할 분이십니다. 이 아기는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받는 표적이 되어 당신의 마음은 예리한 칼에 찔린 듯 아플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반대자들의 숨은 생각을 드러나게 할 것입니다.마리아는 이미 알고는 있었지만 자신의 아들이 겪게될 기구한 운명들을 시므온에게 듣게 된다. 이미 감당하려 했던 일이지만 시므온의 말을 듣고 헤롯은 예수의 탄생에 위협을 느끼고, 2세 이하의 남자아이를 모두 죽이려고 한다. 마리아는 이러한 헤롯의 횡포를 피하기 위하여 남편인 요셉과 함께 어린 예수를 데리고 이집트로 피난을 간다.그림{) 아트라이브러리/예경/p92을 보면 건물의 폐허에서 성 가족은 휴식을 취하고 있다. 요셉은 큰 포대 위에 쓰러졌고, 마리아는 아무것도 모르는 아기 예수에게 젖을 물게 한다. 그녀의 눈꺼풀도 더 이상 참지 못할 만큼 천금만금 무거워져 결국 가라앉고 말았다.{(3) 안나와 마리아, 아기 예수이 그림{) 아트라이브러리/예경/p62에는 안나와 마리아 그리고 아기예수가 등장한다. 모친 안나의 무릎에 앉아 있는 마리아는 어린양의 머리를 부둥켜안고 그 등을 타려는 아기 예수를 떠나기 아쉽다는 듯 깊이 허리를 구부려 가슴에서 떠나려는 아기 예수를 만류하고 있다. 어린양의 머리를 안은 아기 예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돌려 엄마를 바라본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맞이할 운명을 막을 수 없는 듯 하다. 이들 모자의 운명적 관계가 안타깝지만 외할머니 안나는 체념한 듯, 또 손자의 운명을 예감한 듯, 안타까운 표정으로 자신의 딸을 만류하고 있다. 엄마는 아들의 운명을 막고 싶지만, 그것은 이미 하늘이 정한 것이다. 서글픈 표정의 마리아는 그런 아들을 품에 안고는 있지만 보호할 수 가 없다.5. 요셉은 예수의 아버지? 마리아는 예수의 어머니?{(1) 속세의 아버지인 목수 요셉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 요셉은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등록하러 갔는데 그때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 루가복음 2장 1~5절요셉은 예수의 어린 시절을 안전하게 돌보도록 속세의 아버지로 선택되었다. 결혼도 안 한 마리아가 임신을 한 것과 같이 자기의 아들이 아닌 예수를 아들처럼 보살피도록 선택받은 요셉도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다. 마리아가 임신을 하기 전에 요셉은 마리아와 약혼을 하기로 했으므로 요셉은 어쩔 수 없이 마리아를 받아들일 수밖에
담대한 신세계서문을 읽으면서....무엇보다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헉슬리의 태도에 경의를 표하게 되었다. 또한 자신의 과오를 수정하지 않은 채 담대한 신세계 를 재 간행했다는 것도 굉장한 용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자신의 실수는 어떻게든 감추고 싶어하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 아닐까? 문득 옛 일기장을 들여보다가 감추고 싶은 사실들을 모두 찢어 버렸던 기억이 난다. 지금 헉슬리의 글을 되새기며 난 한없이 부끄러워하고 있다. 멀리 내다보면 그러한 안 좋은 기억도 미래에는 좋은 경험으로 남게 될 것인데 말이다. 그렇다. 그의 말대로 젊었을 때 저질러 후세에 물려준 과오를 고치는 데에 중년의 생애를 보내는 것 은 쓸모 없고 무익하다. 헉슬리가 만약 그의 담대한 신세계를 다시 썼다면 예술적 철학적 결핍을 제거하여 좀 더 이성적으로 쓸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했다면 그를 비판하던 많은 사람들도 그의 글에 고개를 끄덕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그가 글을 쓸 당시 사고했었던 문학적 감성이 사라질 수 있을 것이며, 처음의 의도가 변질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담대한 신세계를 그대로 재 간행하면서도 자신의 소설 속의 결점을 스스로 드러내었다. 수정하지 않은 채 재 간행하기로 결심했다면, 주의의 시선이 어떠하든 그냥 자신의 문학세계를 고수하는 것이 훨씬 더 수월한 길일 수도 있었을 텐데 말이다. 자책에 빠지는 것을 바람직하지 못하게 여기지만 결점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그의 태도는 본받아 마땅하다 생각한다.그는 자신의 소설 속에서 범한 오류에 대해서 솔직히 털어놓고 있다. 새비지에게 주어진 두 가지의 선택에 대해서 말이다. 그는 너무나도 극단적인 두 가지의 선택을 제시하였다. 유토피아에서 미치광이의 삶, 그리고 정신이상의 원시적인 삶 단 두 가지의 선택을 말이다. 그는 정상적인 정신상태에 대해서 회의적으로 여기고 있다. 물론 정상적인 상태를 극구 부정하는 것은 아니나, 극히 보기 드문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의 말도 일리가 있긴 하지만, 너무 인간의 인간성을 비관적으로 생각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그는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연구하여 생산해 낸 파괴적 군사 무기의 맹목적 사용을 풍자하여, 유럽이나 일본의 붕괴된 도시 위에 그들의 판테온 신전을 세워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생각은 일반화의 오류가 아닐까? 파괴적 군사무기의 사용이 물론 정당하다고 할 수는 없다 하여도 그것을 비정상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인가에 의문이 생긴다. 또한 모든 사람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해 버리기에는 성급한 판단이라고 생각된다. 어느 곳에서도 항상 반대의 의견은 존재하기 나름이고, 군사무기의 사용에 있어서도 반대하는 무리들이 분명 있었을 것이므로....다만 그들의 힘이 실권자의 힘 보다 미약하였으므로 결과적으로 참담한 파괴를 저지르게 된 것이다.따라서 그는 새비지에게 세 번째 선택 안을 제시하였다. 정상적인 정신 상황의 가능성 말이다. 더 이상 과학은 인간의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써 이용된다. 단지 인간의 의식적이고도 지적인 추구에 의해서 말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의 소설 속에서 보였던 예술적 철학적 결핍을 해소 할 수 있게된다.또한 그는 이 책을 통해서 미래를 이야기 하고자 했다. 그리고 거의 모든 부분이 일치해 가고 있다. 그러나 그는 원자 핵분열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 이미 그가 글을 쓸 당시에도 불거져 나오고 있던 원자핵에 대한 이야기를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이상하다고 생각된다. 그는 그의 책의 내용이 과학의 진보에 대한 것이 아닌, 과학의 진보가 인간 개체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라 주장하지만, 나는 원자핵 자체가 분명히 인간개체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말대로 생물학자와 심리학자들이 도구로 그것을 이용하지만 않는다면 삶 그 자체의 형태와 표현양식을 전혀 변화시킬 수 없는 것일까? 그는 과학화된 물질 그 자체만으로는 인간의 삶을 변화할 수는 없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미 물질이 존재한다는 것은 인간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힘을 추구하며, 그러한 힘이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인간에게는 상당히 매력적인 것이 되므로, 물질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인간에게는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서 원자핵에 관한 언급이 빠진 것은 굉장히 아쉬운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진정한 혁신적 개혁은 인간의 영혼과 육체 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에서는 공감하지만, 그러한 개혁이 이루어지도록 만드는(유혹하는) 물질 또한 개혁의 초기 단계라 볼 수 있지 않을까?담대한 신세계의 통치자들은 사회적 안정성을 이룩하기 위해서 그들의 과학적 수단을 통해 궁극적으로 인격적인 진정한 혁신적 개혁을 실행한다. 이는 과학적 수단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것이었으며, 그러한 과학적 수단이 굉장한 힘을 가졌고, 충분히 매력적이었으므로 사회의 통치자라고 불리 우는 소수그룹이 그러한 선택을 강행한 것이다. 그렇다면 분명 과학적 물질 자체도 인간의 근본적 개혁에 상당한 영향을 주는 것이라 생각한다.그는 새비지에게 이성을 새로 부여하면서, 우리에게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여했다. 따라서 앞으로의 원자전쟁의 가능성은 그 동안 우리가 행한 수많은 파괴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줄어들 것이라 본다. 그러나 과연 현 시점에서 우리가 한시적인 핵전쟁의 평화 상태에 있는 것이, 우리의 지난날의 과오를 반성하기 때문일까? 아닐 것이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지난 과오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핵을 보유한 국가가 여럿이기 때문에 불가피하게 선택하게 된 것이다. 만약 핵을 단 하나의 나라만이 보유하고 있다면, 우리는 제2의, 제3의 히로시마를 보았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단지 여러 핵 보유국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자국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최소한의 이성적인 선택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정신이상, 혹은 미치광이의 상태인가?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이성적으로 조금이라도 판단이 가능하다면 말이다.그의 말대로 우리는 진정한 평화가 아닌 한정되고 단지 부분적으로 파멸을 가져오는 전쟁의 시대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또한 원자력은 산업적 목적을 위하여 쓰이고 있고, 그로 인하여 경제적, 사회적 변화가 급속히 일어났다. 이러한 변화로 인하여 우리는 많은 비인간적인 요소들을 지니게 되었다. 인간을 위한 과학이 아닌 과학을 위한 인간으로 전락하게 된 것이다. 이는 흔히 가치전도 현상이라 불리 우는 기계화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가치 전도는 과학이 실제로 궤도에 진입한 이후에 계속해서 인간에게 적용되어 온 것으로 단지 오늘날에는 그러한 것이 과거보다 훨씬 더 격렬해 진 것이라 한다. 찰리채플린 주연의 영화 모던 타임즈 를 기억하는가? 영화 속에서 찰리채플린은 자신의 존재를 잊은 채 기계의 한 부속품처럼 계속해서 나사를 조이는 일만 한다. 나중에는 모든 것이 다 나사로 보이고 동네 아주머니의 단추까지 조이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지금 우리의 모습은 어떠한가? 찰리채플리의 우스꽝스러움보다 더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지는 않은가? 한번 돌아볼 때 인 것 같다.그는 원자력과 대량생산체제로 인한 급속한 기술적 변화들은 경제적 사회적 혼란을 야기 시키는 경향을 띄게 될 것이고, 이러한 혼란을 해결하기 위하여 권력이 중앙집중화 되고 정부통제가 증대할 것이라 했다. 그의 예언이 현 사실과 정확히 일치한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기존의 전체주의의 성향은 곤봉과 사살대, 인위적 기근, 대량투옥 등의 비인간적이며 비효율적인 것이었지만 앞으로의 전체주의는 효율성을 중요시 할 것이다. 비효율은 그가 언급했듯이 성령(포드)에 대해 죄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길, 효율적인 전체주의 정부는 정치적 지도자들의 강력한 집행을 통해 자신들의 예속상태를 즐거워하기 때문에 억압할 필요가 없는 노예근성의 인구들을 통제하는 형태를 띠고 있다고 한다. 안정성을 유지하는 피상적이고 외부적인 개혁과, 인간의 육체 및 정신내부의 인격적인 혁신의 결과로 우리는 완벽하게 통제되는 것이다. 정부가 안정성을 유지하는 것은 그리 힘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의 말대로 진리에 대해 침묵하기만 하면 되니 말이다. 하지만 인격적인 혁신은 아직까지는 어려워 보인다. 과학이 더 발전해야 가능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임에는 틀림없다.
◈ The Happy Short Lifeof Francis Macomber◈ After Twenty Years강의명 : 미국문학강독교수명 : 제출일 :제출자 :특별한 설명 없이 앞부분을 생략한 채 중간부터 이야기가 전개되는 Ernest Hemingway의 The Happy Short Life of Francis Macomber 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슨 일이 있긴 했는데 알 수는 없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식당에 들어가 주문을 하는 Macomber를 바라보는 사냥꾼 Wilson의 시선은 매서웠다. 계속되는 Wilson과 Macomber의 대화로 미루어 사냥을 나가서 사자를 잡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Macomber의 부인은 남편과 Wilson이 사자를 잡은 것이 별로 맘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처음에는 Margaret이 굉장한 미인에 화장품 모델까지 했던 여자라니까 사냥엔 관심이 없어서 그러려니 했다.그런데 Wilson보다도 체격이 좋아 보인다는 Macomber가 사자를 잡을 때 토끼새끼처럼 도망쳤다는 앞의 이야기가 나오자 상황이 이해가 되었다. 용감한 남편의 모습을 기대했던 Margaret과 그 기대에 부응하지도 못하고 수치스러운 행동에 자존심이 상한 Macomber는 싸우고, Margaret은 혼자 울러 간다. 물론 실망한 Margaret의 마음은 이해가 되지만, 그렇다고 울기까지 할 일인가 싶었다. 어쨌든 다시 생기 넘치는 얼굴로 돌아온 Margaret이 남편이 실수한 것을 은근슬쩍 비꼬는 것은 여자인 내가 봐도 왠지 얄미웠다. 그래서 Wilson같은 사람이 여자에 대해 잔인하다거나 냉정하다면서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Macomber가 겁쟁이 짓을 한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이야기는 재미있어졌다. 밤부터 포효하던 사자는 아침까지 Macomber를 긴장하게 만들고 결국 Macomber는 커다란 두려움을 느끼며, 그 두려움의 원인인 사자를 죽이겠다고 마음을 먹는다. 그리하여 사자 사냥을 떠나 사자를 공격하는 모습이 머리 속에 생생하게 그려졌다. 글에 묘사되어있는 것으로도 엄청나게 클 것 같은 사자를 맞추는 모습, 그리고 그 큰 총알을 맞고도 숲으로 도망치는 사자는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총에 맞은 사자가 풀숲에서 몸을 숙이고 있다가 온몸의 힘을 모아 마지막 공격을 한다는 것은 정말이지 무서웠다. 몸에서 피를 흘려가면서도 죽을힘을 다해 공격해오는 사자는 진짜 그냥 동물이라기보다는 영물같이 느껴졌다. 그런 공격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안 Macomber가 겁쟁이 소리는 듣기 싫고, 사자의 공격은 무서워서 어찌할 바를 몰라하는 처지가 안쓰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결국 사자를 잡으러 같이 가기로 한 Macomber는 사자와 마주치자마자 겁에 질려 혼자 도망친다. Wilson의 총성에 정신을 차린 그는 Wilson과 두 흑인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자동차에 앉아있던 부인에게까지 자신이 겁에 질려 도망치는 모습을 보였다는 것을 깨닫는다.사냥을 마치고 돌아온 후 Macomber는 사자의 울음소리와 공격이 계속되는 악몽 때문에 잠에서 깬다. 그리고 부인이 오래도록 간이침대를 비우는 것을 보고 부인이 Wilson과 잠자리를 한 것을 알아버린다. 전에도 있었던 일인지 Margaret에게 심한 욕까지 하는 Macomber와 그에게 겁쟁이라고 해버리는 부인. 사랑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부부였다. 작가도 서술했듯이 Margaret은 단지 돈을 바라보고 Macomber의 곁에 있는 것이며, Macomber 역시 용기가 없어 Margaret을 떠나지 못한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는 장면이었다. 사자 앞에서의 두려움과 도망침은 아내와 관련한 모든 일에 있어서도 무기력하고 용기 없는 Macomber의 모습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다음날 아침 물소사냥을 떠나며 얼굴을 마주치는 세 사람. 아무 일 없었다는 듯한 Wilson과 Macomber의 아내는 참으로 뻔뻔스러웠다. Macomber가 자신을 경멸의 눈빛으로 쳐다보는 것을 느낀 Wilson의 속내를 Macomber는 알았을까? 다른 사람의 아내와 잠자리를 하고도, 그게 단지 그 남편의 잘못이라고 떠넘기는 Wilson의 도덕성은 정말 이해하기 힘들었다. 뿐만 아니라 다른 여성 사냥 고객들 역시 그러한 관계가 자신들이 마땅히 받아야하는 권리라고 생각하는지 항상 Wilson과의 잠자리를 원한다는 것은 성적 문란과 타락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모두가 왼손을 쓰는 사회에서는 오른손을 쓰는 것이 비정상적인 일일 것이다. 한 사회에서 도덕적으로 틀리다고 생각하는 일도 계속적으로 행해지다 보면 옳은, 당연한 얘기가 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면 도대체 무엇이 옳은 것이며, 어떤 사회가 올바른 사회일까?물소사냥에서 멋지게 명예회복을 시작하는 Macomber는 사자사냥 때와 마찬가지로 총에 맞고 도망친 물소를 쫓는 상황이 되었지만 더 이상 겁쟁이가 아니었다. 전혀 흔들리지 않는 자신감으로 물소를 공격하는 Macomber는 Wilson이 말해준 대로 콧잔등을 맞추려고 하지만 계속 빗나가 뿔을 맞추다보니, 물소는 Macomber를 향해 돌진하고 Margaret은 차에 남겨져있던 총을 든다. 그러나 어이없게 Margaret의 총에 맞고 쓰러지는 Macomber. 처음으로 용기와 자신감을 얻어 물소를 패배시킨 순간 죽음을 맞이하였으니 그 순간만큼은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싶다. 의문인 것은 진실은 무엇인가 라는 점이다. 과연 Margaret이 Macomber를 구하기 위해 총을 들었을까? 아니면 남편이 자기를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서 나온 행동이었을까? Arthur Schnitzler의 죽은 자는 말이 없다. 는 글에서 아내를 위해 자신의 남은 삶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는 남편의 깊은 마음 속에는 살고싶다는 욕망이 있다는 내용이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보면 남편을 구하려고 총을 들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는 남편이 용기를 찾아 자기를 떠나기 전에 없애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Wilson의 말처럼 독살하는 것이 훨씬 쉬웠을 텐데, 굳이 총을 쏜 것을 보면 Macomber를 구하기 위한 행동이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바로 이것이 무엇보다 이해가 안 되는데, 여자가 멀리서 총을 쏘았는데, 그것이 정확하게 Macomber에게 맞았다는 것이다. Margaret의 사격솜씨에 대한 언급이 없기 때문에 뭐라 말할 수는 없지만, 소설 속에서는 얌전히 있던 사람도 중요한 순간에는 엄청난 사격실력의 소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극적이므로 또한 비현실적인 이 장면의 옥의 티가 아닌가 싶다.다음으로 O.Henry의 After Twenty Years 의 처음 시작 부분은 The Happy Short Life of Francis Macomber 와는 약간 다르게 거리의 일상적인 이야기를 먼저 꺼낸다. 소설의 이야기 거리가 될 수 있을 만큼 특별한 화제는 없고, 단지 언제 어디에서나 있을 듯한 모습의 나열이었다. 워낙 소설이 인간 삶의 또 다른 표현이기도 하지만, O.Henry의 작품들은 특히 더 우리 주변의 생활에서 이야기가 시작되고 또 그 안에서 O.Henry만의 특유한 발상들이 나오기 때문에 그 놀라운 상상력에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평화의 수호자 역할을 하던 경찰은 깜깜한 철물점 입구에 서 있는 사나이를 보고 걸음을 늦춘다. 여기에서 서술자는 이미 소설의 배경을 다 파악하고, 등장 인물들의 행동과 생각을 다 알고 있는데도 경찰이 20년 전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 자리에 나온 것을 전혀 모르는 척 넘어가고 있다. 따라서 읽는 사람으로서는 그저 지나가는 내용이려니 하게 되고, 그것이 중요한 부분이었다는 것은 글을 다 읽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이것이 O.Henry 소설의 묘미가 아닌가 싶다. 또한 경찰이 다가오자 사나이가 의심받지 않기 위해 자기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 역시 뒤에 나오는 Bob이 지명수배자라는 사실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경찰과 찬송가 라는 O.Henry의 또 다른 작품에서는 단지 교회 앞에 서 있기만 해도 붙잡혀 가는 것을 보면, 지명수배자의 입장에서 경찰에게 주목받는 것이 좋지 않고, 따라서 의심받게 되어 잡히지 않으려는 의도로 볼 수 있다. 쫓기는 처지였기 때문에 그러한 영향이 커서 Bob에게는 Jimmy가 단지 경찰로만 보이고 친구로는 보이지 않은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