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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가론] 이쾌대의 군상연구 평가A좋아요
    이쾌대의 군상 연구o 과 목 : 한국미술사 교육특강o 담당교수 : 이중희 교수님o 전 공 : 미술교육o 학 번 : 1304697o 이 름 : 안 정 환목 차Ⅰ. 머리말 …………………………………………………………… 1Ⅱ. 화가의 길에 들어서기까지 ……………………………………… 2Ⅲ. 군상의 탐구 ……………………………………………………… 31. 일본 유학기 ……………………………………………………………… 32. 신미술가협회 활동기 ……………………………………………………… 61) 향토주의 ……………………………………………………………… 62) 신미술가협회 활동 …………………………………………………… 8Ⅳ. 군상의 실현 ……………………………………………………… 121. 해방 공간 ………………………………………………………………… 122. 월북 이후 ………………………………………………………………… 15Ⅴ. 맺음말 …………………………………………………………… 17연 보 ……………………………………………………………… 18참고문헌 ……………………………………………………………… 21도판목록 ……………………………………………………………… 22도 판 ( CD에 첨부 )Ⅰ. 머리말이쾌대(李快大. 1913∼1965)는 20세기 한국 미술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화가이다. 그는 1930년대 일제강점기에 일본 제국(帝國) 미술학교에 유학하여 양화를 배우고, 이과전(二科展) 등 일본의 유수한 전람회에 입상했으며, 1940년대 전반 일제 말기의 조선 화단에서 신미술가협회를 중심으로 한국적인 유화의 천착에 몰입했다. 특히 해방 직후 좌우익 이데올로기가 대립하는 격동의 시대에 민족 현실을 장대한 군상으로 화폭에 담아냈다. 그러나 이쾌대는 6.25전쟁 때 북으로 건너간 이후 망각의 작가로 남아있었다. 오랫동안 정치적 금기의 대상으로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불온시 되어 미술사 기술에서 완전히 누락되었다.하지만 1988년 10월, 정부의 납 ? 월북작가 해금조치로 이쾌대의 생애와 작품을 미술사의 대상으로 정면에서 수용, 연구할차 연구도 오기나 오류가 많을 뿐 아니라, 작품 분석에서 일제 강점기 일본 미술 수용 관례의 파악, 당대 미술 흐름과의 양식 비교, 서양 미술사 혹은 한국 미술사에서의 맥락 찾기 등 여러 문제를 간과하고 있다.이쾌대가 북으로 간 이후 북한에서의 구체적인 행적 또한 여전히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962년부터 98년까지 북한에서 출판된 책에는 그의 이름이 전혀 거론되지 않은 것이다. 남한에서와 마찬가지로 북한 미술계에서도 오랫동안 금기의 그늘에 묻혀있던 이쾌대의 사망 연도를 비롯해 작가적 활동상이 일부나마 드러난 것은 최근 들어서이다.그는 한국 근대 화가들 중에서 특히 인물화에 치중하여 탁월한 작품을 남겼으며, 인물화 중에서도 군상이 대표적이다. 그 군상이 미술 양식이나 시대 철학 등 다양한 요소를 배경으로 변모하는 과정을 추적 ? 분석함으로써 한국 미술사에서 차지하는 위치를 정당하게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추려 한다.여기서 군상(群像)이란, 회화나 조각 등에서 여러 인물을 하나의 주제 아래 긴밀한 구성으로 형상화한 작품을 말하는 것으로 단신상(單身像)의 반의어이다. 이쾌대는 이러한 군상을 총 14점을 남겼다. 하지만 14점 중 실제로 작품은 남아있지 않지만 각각 엽서, 신문기사, 사진 그리고 북한 미술잡지에 게재된 도판을 통해 그 면모를 확인할 수 있다.한국 근대 미술사에서 군상의 예는 그리 많이 않다. 특히 양화의 경우 자화상이나 초상화 등 단신상에 비해 군상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매우 빈약하다. 우리가 떠올릴 수 있는 일제강점기의 군상은 배운성의 를 비롯한 1930년대 풍속화들, 김주경, 최재덕, 김주경, 김인승 등의 작가들이 그렸던 작품정도이다.그렇다면 이쾌대는 ‘군상을 왜 그렸을까?’ 또한, ‘군상을 통해서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란 의문을 남기게 되는데, 이 궁금증들을 이쾌대가 활동한 시기별로 나눠서 살펴볼 것이다.Ⅱ. 화가의 길에 들어서기까지이쾌대는 1913년 1월 16일 경북 칠곡군 지천면에서 대지주였던 아버지 이경옥과 어머니 윤정열의 사이에 의 메조소프라노 성악가라는 사실과 이여성의 중국과 일본으로의 유학과 독립운동, 그리고 그 자신 역시 그림 공부를 위해 일본유학을 떠난 사실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집안 분위기는 학창시절의 이쾌대가 지적인 분위기와 예술적인 환경을 누릴 수 있게 해주었고, 그는 그 속에서 감수성을 풍부하게 기를 수 있었다.1921년 신동소학교에 입학한 그는 1928년 대구에 있던 수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휘문고보에 진학하게 되면서 처음으로 미술을 가까이 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바로 화가 장발(張勃:1901~2001)을 만난 것이다. 1학년 때 담임이었던 장발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미국 유학을 하고 돌아온 지식인 화가였다. 장발은 이때 이미 이쾌대의 자질을 발견하고 그에게 미술을 권유했고, 이쾌대가 미술을 전공하는 것을 형 이여성과 의논하기도 했다.휘문고보의 학적부를 뒤져보면 이쾌대의 학창시절의 면모가 드러난다. 모든 학과에서 우수한 성적을 받았으며, 이름 그대로 쾌활하고 남성적인 성격으로 야구선수와 체조선수로도 활약을 했다.1932년 휘문고보 5학년생이었던 이쾌대는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에 (도1)로 입선하고, 제3회 전조선남녀학생작품전람회에 (도2)으로 중등회화 부문 3등상을 수상하여 신문 및 잡지에 소개된다. “대학 3,4년생의 데생 실력을 충실히 갖추었다. 내가 가르치는 사람 중 이렇게 뛰어난 사람은 처음이다.”라는 장발의 평가에서 알 수 있듯, 이쾌대는 휘문고보 시절부터 뛰어난 데생 실력을 발휘했다. 또한 그는 32년 말 진명여고에 다니는 여학생에게 반해 따라다니다 급기야 집안에서 중매를 앞세워 사귀게 되었고 결국 결혼에 이르렀다.이쾌대는 아내인 유갑봉을 모델로 수많은 작품을 그렸다. 유갑봉을 만나 결혼한 것은 그가 아직 고보에 재학 중일 때의 일이다. 그녀를 만난 것은 그의 행복이었지만 그것은 우리에게도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왜냐하면 남아 있는 그의 많은 작품들은 아마 그의 아내 유갑봉이 없었다면 벌써 흔적조차 없이 사라졌을 것이기 때문이다.이쾌대의 작품은학파의 계보를 형성했고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1930년대 화단이 활성화되고 전람회가 빈번히 열렸지만 미술가는 사회 속에서 하나의 ‘직업’으로 완전히 정착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미술은 아직까지 여가와 취미의 범주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미술 유학을 떠나기로 결심한 이쾌대 역시 이러한 사회 분위기 아래서 살아가야 할 화가의 삶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이쾌대가 들어갔던 제국미술학교는 동경에 있었다. 연륜이 그리 긴 학교는 아니었지만 동경미술학교와는 달리 자유분방한 화풍을 가능케 했던 분위기를 지녔던 학교였다. 1930년대 당시의 일본은 동경미술학교와, 관전(官展)을 중심으로 한 아카데미즘에서 차츰 벗어나려는 미술교육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1914년에는 관전에 대항하는 이과전(二科展)이 열려 아카데미즘에서 벗어난 후기 인상주의나 입체파, 야수파 경향의 작품들을 수용했는데. 제국미술학교의 분위기도 관전 쪽보다는 이과전이나 다른 재야전의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는 데 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이쾌대는 입학 직후에 동료들과 함께 백우회(白牛會)에 가담하게 되는데, 일본경찰의 사찰대상에 들어 “조선에는 흰 소가 없다.”는 표면적인 이유로 해체를 명령받게 된다. 하지만 백우회라는 이름이 조선인의 민족의식을 부추길 수 있다는게 본래의 이유였다. 결국 경시청에 연행된 뒤 이름을 바꿀 것을 강요당해 1937년 재동경미술협회로 바뀌게 되었다.제국미술학교에서 이쾌대는 특히 인물화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인체가 갖는 운동감, 색채 변화의 미묘함’에 심취해 있었다. 그 이유는 양식으로서의 모더니즘, 즉 서양화의 기법과 표현 영역에서의 다양성보다는 인물이 주는 풍부한 심리적 상황과 내용성에 더 주목했기 때문일 것이다.이 당시에 그려졌던 인물화는 거의 누드 습작이었다. 서구미술을 수용하고 소화하면서 정형화한 자신의 틀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의 누드들은 잘 보여준다. 그가 남긴 수많은 누드 스케치 혹은 크로키들과 유화 작품들은, 그가 얼마나 인물에 점을 알 수 있다. 이런 표현은 세부묘사가 생략된 얼굴과 함께 익명성의 미학을 더욱 잘 완결시키는데, 이미 그의 작업이 대상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 그것이 ‘회화적 표현’에 이르고 있음을 보여준다.이 그림과, 그보다 몇 년 앞서 인물화의 경지에 도달한 선배작가 오지호의 작품을 비교해 보면, 두 작가 모두 누드를 그리는데 있어서 유사한 과정을 거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30년 조미전에 출품한 오지호의 (도4)은 이제까지의 좌상과 판에 박은 듯한 인물에서 벗어나 과감하게 여인의 뒷모습을 보여주고 있다.이와는 달리 서구미술의 여러 유파를 섭렵하는 과정 속에서 그린 유화 작품들도 남아 있다. 그의 (도5)는 분명 세잔느의 (도6)에서 비롯되었다. 세잔느는 누드를 그리면서 대상을 사람의 인체가 아닌 정물로 파악했다. 이쾌대의 는 단순하고 매우 간결한 몇 번의 붓질로 인물의 형태가 드러나고 화면이 이루어지는 과정에 대한 그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지만. 세잔느의 조형적인 측면을 폭넓게 수렴한 작품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근대화가들에게 누드화는 서구의 누드화와는 다른 사회적 배경을 지니고 있다. 근대미술에서 누드가 예술의 한 장르로 인식될 수 있었던 것은 하나의 사건이었다. 1916년 김관호가 (도7)으로 동경미술학교 졸업작품전에서 1등을 차지한 사실이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음에도 “여인의 나체를 그렸다.”고 하여 작품이 신문에 게재되지 못했던 그 시절에서부터 1930년대에 이르기까지 한가지였다. 1930년대에 이르러 신문이나 지상에 누드 그림이 자주 소개되었지만, 여인의 벗은 몸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마치 미술 자체처럼 화가들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다. 안석주 등 당시 화가들의 말에서도 드러나듯, 인체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뿐 아니라 예술적인 시각에서도 찬양되어야 할 회화적인 대상이었다. 그러나 세 여인들은 옷을 벗어 버린 모델 앞에 선 화가의 심리에 대해 관심을 가졌고, 화가와 모델 간의 적잖은 스캔들을 화제로 삼았다. 1930년대 대중잡지,등에 유달리 화가와 모품한
    예체능| 2004.06.10| 24페이지| 1,500원| 조회(8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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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술사] 원시미술 평가A+최고예요
    서양미술사(1)원시미술의 이해학 과: 서양화전공학 번: 4095039이 름: 안정환과목교수: 이유경 교수님강 의 실: 예능관 401호※ 첨부내용 : 1. 토테미즘과 샤머니즘의 이해2. 사진자료3. 참고 문헌도서 목록● 원시시대의 생활수십만년이나 계속된 원시시대는 돌로 만든 도구와 무기를 다루는 방법에 따라 구석기 시대와 신석기 시대로 구분되어 진다. 그러나 이 구분은 관습적인 것일뿐 정말 중요한 기준은, 식물을 재배하고 동물이 사육되었는가의 여부에 따라 구분된다. 우선 구석기 시대의 생활을 엿보기로 하자.(1) 구석기 시대인류는 일반적으로 2, 3백만 년전쯤 중동부 아프리카 지방에 처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고 추측되고 있다. 물론 그 이전 시기에도 살았을 가능성도 있지만 현재까지는 고고학적 탐사의 결과를 놓고 볼 때 그렇게 짐작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초기의 인류는 아주 직접적이고 깊숙이 자연에 의존하여 살았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은 매일 매일 식량과 물, 잠잘 곳 등을 모두 자연으로부터 직접 해결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들의 최대 관심사는 충분히 먹을 것을 찾는 것으로, 아직 가축 기르는 법을 몰랐고 농사짓는 법을 몰랐기 때문에 식량 공급은 사냥에 의존 할 수 밖에 없었다. 물론 열매나 조개와 같은 손쉽게 거두어들일 수 있는 자연의 산물들을 주로 섭취했겠지만 이런 것들로만 먹고살기에는 충분치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한번만 잡으면 몇 주일씩 고기를 먹을 수 있는 사슴, 들소 같은 몸집이 큰 짐승들을 잡길 바랬다.하지만 그들은 아직 가장 간단한 나무, 돌, 뼈로 만든 무기밖에 사용할 줄 몰랐기 때문에 항상 사냥에 대한 두려움이 앞섰던 것이다. 삶의 풍요의 기쁨이 전적으로 사냥의 성공여부에 달려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사냥에서의 성공을 보장해주는 힘을 발휘하는 의식들을 발전시켜 나갔다. 또한, 자신들의 사냥감을 바위나 동굴 벽에 그려놓고 창으로 그 그림 속의 사냥감들을 찔러대는 상징적인 행위를 하였을 것이다. 때로는 아예 창에다가. 또한 어설픈 가죽 텐트보다 더욱 튼튼하고 따뜻한 텐트를 거주처로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반면에 식물을 기르는 기술을 발전시킨 사람들은 주로 밀이나 보리 종류의 곡물들을 기르기 시작하였다. 초기 팔레스타인 지방이나 기타 여러 지역에서 사람들이 야생 상태로 들판에서 자라난 곡식을 거두어들이기 위하여 돌을 갈아만든 낫을 사용하였다. 그들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씨를 뿌리고 그 결실을 수확하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고, 점점 안정적이고 풍족한 식량 조달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또한, 그에 따라 농작물을 잘 관리하고 돌보기 위하여 한곳에 정착해야 할 필요성이 생겨났고, 많은 노동력이 요구됨과 동시에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릴 수 있게 되었기 때문에 비교적 좁은 지역 안에 많은 사람들이 집단적으로 거주할 수 있게된 것이다.이렇듯 신석기 시대에는 정착생활을 하게 됨으로써 거주지가 생겨나고 집회 장소가 세워지는 등의 건축 기술이 태어나고 갖가지 창의적인 방법으로 만들어진 광주리 짜는 기술, 토기를 만드는 기술, 천을 짜는 기술 등이 발견되었다. 그 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인간의 사고와 감정에 새로운 질서의 관념을 가져다 준 종교적 신앙의 발생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종교의 핵심은 생산력과 풍요를 북돋우는 데 있었기 때문에 몸매가 매우 풍만한 여인상을 만들어, 현대 학자들이 흔히 지모신(地母神)이라 부르는 자연의 풍요를 상징하는 신에 대한 숭배의 의미를 깃들이기도 하였던 것이다.또한 인간들이 씨족, 부족사회를 결성하게 됨으로써 그들 집단 내적으로는 정신적 통일과 외적으로는 타부족과의 구분, 차별화를 각기의 우리가 알고 있는 토템이라는 형식과 주술적 의식으로써 꾀하게 된 것이다. 토템에 대한 부족들의 의례 중에서 가장 공통된 특징은 그 종을 먹을 수 없다는 것과 자연상태에 있는 그 동물을 동경하는 것이다.이처럼 신석기 시대 사람들의 종교는 매우 강한 의례적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자연은 그들에게 생명의 원천이며 삶의 터전이기도 하였으나 자연재해와 같은 재앙의 근원이며 맹수들의 로 묘사한 것이 대부분인데, 장중한 느낌의 벽화와는 달리 그 수법은 활달한 데생화를 연상케 하는 친근감 넘치는 작품이 적지 않다.조상(彫像) 중에서 매머드 상아, 돌·점토 등을 재료로 동물의 모양을 나타낸 것도 있으나, 비너스상이라고 불리는 나부상(裸婦像)이 그 대부분을 차지한다. 그밖에 주목되는 공예품으로는 순록의 뿔로 만든 지휘봉을 들 수 있다.이상과 같은 시원미술의 전체적인 특징을 살펴보면 먼저 종교의식이나 주술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을 들 수 있고, 둘째로 비사실적이며 인상주의적 수법의 작품이 대부분을 차지하여 회화나 조각상을 가릴 것 없이 모두 그것은 보는 사람들에게 강렬한 이미지를 심어 준다는 점이다. 끝으로 세 번째는 자손의 번영과 사냥의 대상이 되는 짐승의 번식, 그리고 풍성한 사냥의 수확 등을 기원하는 주술적인 신앙이 그 바닥에 깔려 있다는 점등이다.또한 원시미술은 현대미술의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하였다.20세기 초의 야수파·표현주의·입체파 등은 오지의 토인조각에서 힌트를 얻었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화가들은 메커니즘을 거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기울어져 원시미술의 새로운 전형을 창조하였다.P.고갱은 아프리카 흑인예술에서 자극을 받고 타히티섬으로 갔으며, H.루소는 ‘나이브 아트’라는 독특한 미술양식을 창조했는데, 이는 원시미술의 한 전형이다.시원시대와 초기 생산경제시대의 원시미술은 오늘날 사실주의나 갖가지 신경과민적인 표현양식에 싫증을 느낀 현대인들에게 자주 재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구석기 시대 미술 (Palaeolithic, Old Stone Age)서양의 구석기 시대는 인간의 주술적인 바램을 표현하는 미술이 주된 흐름으로 동물 형태에 깃든 동물의 영혼을 제압하여 사냥의 안전과 풍요를 기원하였다. 인류의 생활에서의 예술적 활동. 오래 전부터 있었던 것으로 본래 도구 (석기문화)를 만들어낸 최초의 시기부터 시작된다.즉, 플라이오세(世) 말기에서 최후의 대빙하기에 해당되며, 조금 진보된 예술작품은 구석기시대 후기에서부 특징을 훌륭하게 표현하고 머리 부분과 발굽에는 사실적인 배려도 찾아 볼 수 있다. 또한 복부에는 창자가 튀어 나오고 그 앞에는 넘어진 인간도 그려져 사냥하는 모습이 정확히 나타나고 있다.거의 같은 시대의 스페인 알타미라 동굴에도 이 같은 훌륭한 동물묘사가 보여진다. 알타미라 동굴벽화는 솔뤼트레 문화와 마드렌느 문화기에 걸치는 시대에 크로마뇽인에 의하여 그려진 것임이 밝혀졌다. 대 홀의 돔 모양의 천장에는 크기가 2미터를 넘는 많은 들소를 비롯하여 말, 소, 멧돼지 등의 동물이 다양한 색깔로 그려져 있다. 이 그림들은 바위의 갈라진 틈이나 자연히 융기한 부드러운 바위 표면을 이용하여 그려져 있는데, 이것이 그림 속의 동물들에게 넘치는 약동감을 주고 있다. 동굴 안의 다른 그림과는 달리, 모든 그림에서 보여지는 붓의 놀림이 한결같다는 것이 이 홀에서 볼 수 있는 회화의 특징이다. 목탄으로 그려진 선의 두께, 바위에 대한 그림의 압력, 그리고 그림의 윤곽을 잡는 방법이 모든 그림에 공통되어 있다. 윤곽은 항상 머리에서 꼬리, 이어서 뒷다리로 내려가고, 다시 머리로 되돌아가서 거기에서 앞다리와 배를 향한 다음 끝낸다. 필치는 힘이 넘치고, 아무런 수정의 흔적도 없다. 이처럼 일관된 작풍에서 이들 그림은 단 한사람에 의하여 그려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약 1만 4500년 전의 구석기 시대 후기에 존재한 그야말로 선사 시대의 미켈란젤로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알타미라 동굴은 미켈란젤로의 벽화로 유명한 바티칸 궁전의 시스티나 예배당에 견주어 '선사 시대의 시스티나 예배당'이라고도 불리는데 지구상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문화 유산의 하나가 되었다.이렇게 구석기 시대라고 하는 시대의 틀을 떼어놓고 봐도 충분히 미술품으로서 통용될 수 있는 표현력을 갖는 이러한 작품의 예는 수렵채집 민족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대상을 조형적으로 재현하고 있다.구석기인의 세계는 주술이 지배하는 세계였다. 그렇기 때문에 현실의 대상을 재현한 것에는 진실처럼 느껴지게 할 필요가 있으며,톤헨지(Stonehenge)영국 런던에서 남서쪽으로 130km 떨어진 솔즈베리 평원(Salisbury Plain)에서는 스톤헨지(Stone Henge)라 불리는 거대한 석조물이 있다. 넓은 들판에 수직으로 우뚝 서 있는 2개의 돌 위에 1개의 돌이 수평으로 얹혀져 아치 모양을 이루고 있는 스톤헨지는 높이 7m, 무게 45톤이나 되는 거대한 돌들로 이루어져 있다. 바깥쪽에는 동심원 형태의 고리가 있으며 안쪽에는 말발굽형태의 돌이 세워져 있다. 넓은 평원에 어째서 이렇게 큰 돌들이 세워져 있는 것일까?스톤헨지에 쓰인 돌은 크게 2가지로 나뉘어지는데 바깥쪽 원형와 삼석탑(Trilithon, 곧게 선 두 돌 위에 한 개의 돌을 얹은 탑)은 사슨석(Sarsen Stone)이라는 바위로 만들어졌으며, 푸른색의 작은 원형와 말발굽 모양의 푸른색 입석은 블루스톤(Blue Stone)이라는 바위로 만들어졌다. 사슨석은 스톤헨지에서 북쪽으로 약 30km쯤 떨어진 말버러 다운즈의 암석지대에서 운반되었다. 평균 4톤의 블루스톤은 스톤헨지에서 북서쪽으로 220km 떨어진 프리셀리 산맥에서 육지, 바다, 강을 차례로 지나면서 운반하였다.그렇다면 이렇게 거대한 거석 건조물을 어떻게 세웠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게 된다. 사센의 거대한 돌기둥을 세우기 위해서는, 앞서 파 놓은 돌구멍 앞쪽에 경사로를 설치하여 거기로 돌기둥을 끌어올리고, 돌기둥 위에 놓여진 돌의 추를 옆으로 밀어냄으로써 돌기둥 아랫부분이 돌구멍 속으로 떨어지게 한다. 다음에 A자형 나무틀을 이용하여 지레의 원리를 써서 밧줄을 당기면, 돌기둥을 수직으로 세울 수 있다는 것이 실험을 통하여 확인되었다.문미석을 꼭대기로 올리기 위해서는 흙 또는 나무로 꼭대기까지 경사로를 만들고, 그것을 이용하여 잡아당겨 올리는 방법이 있다. 또는 지레로 문미석 한 쪽을 들어올려 짧은 각재를 끼고, 다른 쪽 끝에서도 마찬가지 작업을 한다. 어느 정도 높이가 되면 긴 목재를 그 밑에 늘어 세워 바닥면을 만든다. 마찬가지 방법을 반복하여 문미석을 꼭대것이다.
    예체능| 2003.04.26| 15페이지| 1,000원| 조회(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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