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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흥선 대원군과 그의 정책(쇄도정치) 평가A좋아요
    쇄도정치의 시대적 상황과 배경흥선 대원군 시대는 안동김씨의 세도 정치 후에 핍박해 질대로 핍박해진 민중의 생활과 신분제도의 몰락, 왕권의 극도의 침체, 관직의 매관매직으로 인한 지배체재의 붕괴등 조선시대를 떠받들어 온 모든 제도, 이념, 가치 등이 무너진 시대였다.나라 외적으로는 서구 열강들의 동아시아에 대한 야욕을 숨기지 않고 있었으며 (우리나라에서는 병인양요, 신미양요, 거문고 사건 등, 중국은 아편전쟁 등), 1854년에 서양에 문물을 개방한 일본은 급속도로 발전하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나라를 호시탐탐하게 노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흥선 대원군은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된다. 개방할 것인가, 폐쇄할 것인가.개방을 하면 서구문물을 접하고 발전할 수 있었으나 당시 붕괴된 국가 체제에서 새로운 가치체계와 문물의 도입으로 완전히 왕조가 무너질 가능성도 있었다고 봐야했다.폐쇄를 하면 국가 외적으로 서구열강이라는 적을 돌릴 수 있으니 조직 자체가 단단히 뭉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흥선 대원군은 폐쇄라는 정책을 세우지 않았나 싶다.흥선 대원군은 누구인가?이름 이하응(李昰應). 자 시백(時伯). 호 석파(石坡). 시호 헌의(獻懿). 영조의 5대손(五代孫)이며 고종의 아버지이다. 1843년(헌종 9)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지고, 1846년 수릉천장도감(緩陵遷葬都監)의 대존관(代尊官)이 된 후 종친부 유사당상(宗親府有司堂上) ·도총관(都摠管) 등 한직(閑職)을 지내면서 안동김씨(安東金氏)의 세도정치(勢道政治) 밑에서 불우한 생활을 하였다. 왕족에 대한 안동김씨의 감시가 심하자 보신책(保身策)으로 불량배와 어울려, 파락호(破落戶)로서 궁도령(宮道令)이라는 비칭(卑稱)으로까지 불리며 안동김씨의 감시를 피하는 한편, 철종이 후사(後嗣)가 없이 병약해지자 조대비(趙大妃)에 접근하여 둘째 아들 명복(命福:고종의 兒名)을 후계자로 삼을 것을 허락받았다.1863년(철종 14) 철종이 죽고 조대비(趙大妃)에 의해 고종이 즉위하자 대원군에 봉해지고 어린 고종의 섭정이 되었다. 대권을 잡자여 파직시켰다. 1847개 서원(書院)을 제외한 모든 서원을 철폐하고, 국가재정의 낭비와 당쟁의 요인을 없앴으며, 《육전조례(六典條例)》 《대전회통(大典會通)》 등을 간행하여 법률제도를 확립함으로써 중앙집권적인 정치 기강을 수립하였다. 비변사(備邊司)를 폐지하고 의정부(議政府)와 삼군부(三軍府)를 두어 행정권과 군사권을 분리시켰으며,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 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반면, 경복궁(景福宮)을 중건(重建)하면서 원납전(願納錢)을 발행하여 백성의 생활고가 가중되었으며, 1866년(고종 3) 병인양요에 이어 1871년 신미양요를 일으키고 천주교도에 대한 무자비한 박해를 가하는 등 쇄국정치를 고집함으로써, 국제관계가 악화되고 외래문명의 흡수가 늦어지게 되었다. 또한, 섭정 10년 동안 반대세력이 형성되어, 며느리인 명성황후가 반대파를 포섭하고 고종이 친정(親政)을 계획하게 되자, 1873년 그의 실정(失政)에 대한 최익현(崔益鉉)의 탄핵을 받았다. 이에 고종이 친정을 선포하자 운현궁(雲峴宮)으로 은퇴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壬午軍亂)으로 다시 정권을 잡고 난의 뒷수습에 힘썼으나, 명성황후의 책동으로 청(淸)나라 군사가 출동하고 톈진[天津]에 연행되어 바오딩부[保定府]에 4년간 유폐되었다. 1885년 귀국하여 운현궁에 칩거하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던 중 1887년 청나라의 위안스카이[원세개]와 결탁하여 고종을 폐위시키고 장남 재황(載晃)을 옹립하여 재집권하려다가 실패하였다.1894년 동학농민운동으로 청일전쟁(淸日戰爭)이 일어나자 일본에 의해 영립되어 친청파(親淸派)인 사대당(事大黨)을 축출하고 갑오개혁이 시작되었으나, 집정(執政)이 어렵게 되자 청나라와 통모(通謀)하다가 쫓겨났다. 청러파가 등장하여 민씨 일파가 득세하자, 1895년 일본의 책략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때 명성황후가 일본인에게 시해되어 일본 공사 미우라고로[三浦梧樓]가 본국으로 소환된 후 정권을 내놓고 은퇴하였다. 1907년(광무 11) 대원왕(大院王)에 추봉(追封)되었다대원군의 개혁정책(정치적)왕권확립 : 세도정치 일소노력, 문벌타파, 인재등용,삼정의 시정, 양전(量田)실시, 토호의 토지겸병 금지.관제개혁 : 의정부의 기능강화(비변사 폐지), 대전회통, 육전조례편찬.쇄국정책 : 1832년, 1845년 영국의 통상 요구, 1846년 프랑스의 통상 요구, 1864년 이후 러시아의 통상 요구가 잇달자 당시의 집권자인 흥선 대원군은 서양과의 교역을 엄금하고 문호를 닫아 버렸으며, 가톨릭교 탄압을 단행하였다. 당시 흥선대원군은 러시아의 강경한 통상 요구가 있자 프랑스 선교사의 힘을 빌어 이를 막아 보려 했으나 실패하였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이 잠입하여 교세를 확장시켜 나가자, 흥선 대원군은 이들을 서양 열강의 앞잡이로 인식하였으며, 당시 청나라의 가톨릭교 탄압을 보고 그도 가톨릭교를 철저히 탄압하였다. 이것이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로서, 남종삼(南鍾三)을 비롯한 신도 8,000여 명이 학살되고, 포교활동을 하던 프랑스인 신부 12명 중 9명이 처형당한 사건이다. 이때 나머지 3명의 신부 가운데 한 사람인 신부 리델이 베이징으로 탈출하여 프랑스 공사(公使) H.D.벨로네에게 이 사실을 전함으로써 서양세계에 널리 알려졌다.H. D.벨로네 공사는 중국 톈진[天津]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극동함대사령관 P.G.로즈에게, 프랑스인 신부 살해에 대한 문책과 문호개방을 위하여 출동할 것을 명령하였다. 제독 로즈는 군함 7척을 이끌고 강화도(江華島)를 공격하였으나 강화도 수비병의 완강한 저항으로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퇴각하였다. 이것이 곧 1866년의 병인양요(丙寅洋擾)이다.그 후에는 미국에 의해 문호개방이 시도되었다. 미국의 상선(商船) 제너럴셔먼호(號)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아함대사령관 J.로저스에게 군함 5척으로 조선을 침공하게 하였다. 그후 1871년에 일어난 신미양요(辛未洋擾)에서도 강화도 수비병들의 용전(勇戰)으로 미국은 퇴각하였다. 2차례의 양요를 물리친 흥선대원군은 전승의 기세를 몰아, 더욱 쇄국정책을 굳히고 척사(斥邪)의 결의를 전 국민에게 다짐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척화비(斥和碑)를 세웠다. 이 척화비문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범해 옴에도 싸우지 않음은 즉 화(和)하는 것이요, 화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일이다(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라는 글을 새겨 놓았다. 이로 미루어 보더라도 흥선 대원군의 쇄국결의가 얼마나 단호했던가를 짐작하고도 남는다.두 차례에 걸친 서양함대의 격퇴는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더욱 굳히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 열강의 침공은 일종의 보복적 성격이 농후했을 뿐, 실질적으로는 소극적인 성격을 띤 것이었다. 서양은 아직 조선을 완전히 침공 ·점거하거나 또는 개항의 요구를 기어이 관철하려는 의지, 또는 무력으로써 영토화 해버릴 의도까지는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다만 시위행동만으로 통상의 목적을 달성하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의외로 완강한 저항을 받자 물러서지 않을 수 없었다.당시 프랑스는 안남(安南) 경영에, 미국은 남북전쟁 이후 그 뒷수습에 여념이 없던 때였을 뿐만 아니라, 동양 침략의 선두에 섰던 영국은 인도 내란의 수습에, 러시아는 연해주(沿海州) 개척에 바쁜 때였다. 그러므로 이들 서양 제국은 나름대로 모두 조선에게 문호를 개방시킬 적극적 의도를 갖지 못한 국내적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이다.일본은 1854년 미국과 화친조약을 맺은 이후, 영국·프랑스·러시아·네덜란드 등 서양 제국과 차례로 통상조약을 맺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이룩하였다. 일본의 새 정부는 적극적으로 개화정책을 받아들여서 일본을 근대화하는 길로 나아갔다. 메이지 정부는 1868년 새로운 정부수립을 조선에 알려오면서 수교할 것을 요청하였다.그러나 조선 정부는 과거의 관례에 따라 일본 천황(天皇)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고, 집권자 흥선 대원군은 개화 일본에 대한 위구심(危懼心)을 서양 제국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조선의 태도는 일본을 자극하여 정한론(征韓論)을 대두시켰다. 일본 정부는 사신을 보내어 재차 수교를 청해 왔으나 조선의 완강한 거절에 부딪쳐 그대로 돌아갔다. 일본의 지도자들은 정한론의 즉시 실천을 억제하고 내치(內治)에 힘썼다. 그들은 근대화의 추진으로 일본의 국력을 기른 뒤에 적당한 시기를 택하여 조선을 침략하자는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일본에 대한 흥선 대원군의 태도가 이같이 강경했던 것과는 반대로, 청나라와는 종래의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빈번히 일어나는 사건마다 청나라에 알리고 그 자문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밀려드는 열강세력에 대처하는 것만도 벅찼던 청나라로서는 조선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기울일 여유가 없었다. 이로써 흥선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더욱 강경 일변도로 기울어갔고 그 결과 조선은 조만간 겪게 될 새로운 사태에 대응할 만한 적극적 대책을 마련하지 못한 채 국제무대에서 완전히 고립상태에 놓이게 되었다.(경제면)재정확보 : 호포제 징수(양반), 서원 정리(600여개소 → 47개소)민생안정 : 정치 기강의 확립, 환곡제 개혁 (사창제). 흥선 대원군의 치적 중 경복궁 중건에 대해서경복궁은 조선시대의 본궁(本宮)으로서 태조가 1395년(태조 4)에 창건한 것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으로 소실(燒失)된 이후, 역대의 왕은 재정이 부족하여 재건할 생각을 하지 못하였다. 19세기 초의 순조(純祖) ·헌종(憲宗) 때에도 재건계획을 세우기는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러다가 고종(高宗)의 즉위와 함께 당시의 섭정(攝政)이던 흥선 대원군이 단안을 내려 경복궁 중건계획을 발표하고, 1865년(고종 2)에 영건도감(營建都監)을 설치하여 공사에 착수하였다. 대원군은 조선 말기 이래로 외척(外戚)의 세도에 밀려 추락된 왕실의 존엄과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서 경복궁의 재건을 서둘렀던 것이다. 공사 착수 당시에는 반대하는
    인문/어학| 2004.07.05| 4페이지| 1,000원| 조회(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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