麗末鮮初 주자성리학파의 정치사상Ⅰ. 서 론우리는 보다 바람직한 현존세계를 모색하기 위해서 현재를 대상화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다. 현재에 도달하게 된 역사적 추이를 검토하며 그 특수성을 해명하려는 것으로서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에 대한 객관적 인식의 도정을 거칠 때, 비로소 우리들은 역사의 자율성 내지는 가치선택의 자율성을 향유하게 되는 것이다.사상사를 연구하는 목적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자각하고 의식하기 위한 지적작업의 일환으로서 사상사를 연구하게 되는 것이다. 사상사의 연구를 통해서 지나간 역사의 발전추이를 조망하게 되고 우리가 처한 현재의 역사적 제약성이 무엇인가를 이해하게 될 것이며, 나아가 그 제약성을 극복할 수 있는 역사적 가능성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정치사상사의 연구는 단순히 지나간 정시세계에만 집착하여, 역사적 사실의 체계분석을 통해 정치질서가 변화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성만을 강조하는「낡은」학문분야는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현존의 정치세계를 가능케 한 관념 또는 개념의 변천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존의 정치체계가 추구해야할 보편적인 목표와 가치를 설정 ? 제시하려는 價値定向的 학문분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맥락에서 麗末鮮初에 활동한 一群의 新政治엘리트들의 정치적 思惟를 통해, 朱子 性理學이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수용되는 과정에 있어서 그 정치사상의 실체를 알아보고자 한다.麗末鮮初는 한국정치사상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분기점이 된다. 朱子 性理學을 수용함으로서 왕조교체라는 易姓革命이 이루어졌고 종래 儒佛이 혼재하던 二元的 사상체계에서 朱子 性理學 일변도의 사상체계에로 일대 사상적 變轉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특히 朱子 性理學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자 한 집단의 성격을 규명하고 궁극적으로는 그들이 朱子 性理學을 통해서 실현하고자 했던 合目的的인 정치의 세계가 어떠하였는가를 알아보고자 한다.Ⅱ . 理論的 集據로서의 朱子 性理學1. 朱子 性理學의 형성1)시대적 배경중국역사상 唐末 五代의 시기는 중국의 사회개위성은 이미 본질로서의 존재 속에 포함되어 있으므로 가치론은 결국 존재론의 전제하에 확립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3. 주자의 정치사상四書를 통해 孔孟의 진정한 정신을 접하고 그것을 自己體驗化하려는 것을 학설의 요체로 삼은 주자가 자신의 정치사상과 학설의 출발점을 孔孟의 정치학설에 두고 있음은 자연스런 현상이다. 주자는 자신의 性理學 이론개조를 통하여 孔孟의 정치사상을 발전적으로 계승 ? 수용함으로서 독창적인 정치사상을 정립 시킬 수 있었다. 孔孟의 정치사상과 비교해 볼 때, 주자의 정치사상은 인간의 心性을 중시하고 이에 대한 정밀한 사고를 전개시켰음을 알 수 있다.1) 調和와 統一의 원리주자는 현실적인 인간을 모순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그러한 인간에 의해 구성된 사회 역시 대립 ? 긴장의 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주자는 법칙성을 우주의 절대적 법칙성인 天理에 두고 인간의 행위나 사회의 질서가 天理에 합치할 때, 가장 이상적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였다. 주자가 생각한 조화와 통일의 세계는 다음의 두 가지 방면으로 구분하여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天人合一思想 이다. 모든 만물의 존재가치인 「理」는 統體太極과 經道의 측면에서 볼 때, 우주전체의 조화를 통해서만 그 존재의 의의를 갖는다. 우주전체의 조화와 균형, 즉 統體太極의 방향제시에 따라 各有太極에 잠재되어 있는 가치가 발현되어 나온다. 천지만물은 모두 선행적인 존재가치에 의해 존재하게 되는데, 그 선행적인 존재가치에 의해 모든 천지만물은 조화로운 질서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주자는 도덕적인 善의 실현을 위하여 氣를 억제하고 理를 따를 것을 주장한다.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人慾=人心을 억제극복하고 天理=道心을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天人의 조화와 통일은 사회적 모순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출발점이 된다고 하겠다.두 번째로 정치사회의 조화와 통일을 제시하였다. 주자는 성리학의 기본시각은 군신간의 상하관계를 기본 축으로 하여 일체의 사회관계 ? 인간관계를겠다.2. 朱子性理學派의 형성1)朱子性理學派와 형성과정중래의 권문세족 또는 사대부와는 성향을 달리하는 一群의 새로운 정치세력은 어떤 과정을 통해서 형성되었을까? 그들 신정치세력을 朱子性理學派로 규정하였다. 종래의 지배세력과는 학문적 ? 사상적 기반을 달리하는 신정치관료의 형성은 주자 성리학의 수용 및 그 내정화과정과 일치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麗末鮮初에 있어서 주자 성리학의 수용정착 과정을 살펴보면 대체적으로 3단계 구분법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단계 주자 성리학의 도입기(14세기 전반기)에 활동한 학자로서는 안향과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연구로 이름을 남기고 그 문하인으로 주자 성리학을 전수받은 이제현 등이 있다. 이 시기의 학자들은 주자 성리학의 이해에는 상당한 한계가 있었고 연구의 심도도 그리 깊지 못했던 것으로 보여 진다. 단지 주자 서리학에 입각하여 국학을 부흥하고 또 중국으로부터 문묘제기와 주자학 관계 서적들을 수입함으로써 주자 성리학을 이해할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 2단계는 주자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는 시기로서 14세기 후반이 이에 해당하며, 이 때에 주도적 역할을 한 학자들로는 이색, 정몽주, 이숭인 등을 들 수 있다. 麗末에 주자 성리학이 크게 흥기하고 주자 성리학적 정치이념의 실현이 강조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이 성균관을 중심으로 하여 경전을 분담하여 가르치면서 열띤 토론을 벌일 정도로 주자 성리학을 탐구하였기 때문이다.정몽주는 東方理學의 鼻祖로 추앙되는 만큼 주자 성리학의 충실한 사상가로서, 또한 교화와 윤리적 실천가로서 평가받고 있다. 구체적인 학설이나 사상을 별로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학문세계를 정확히 규명하기는 어려우나 四書의 주자집주를 유창하게 강론하여 다른 사람을 놀라게 했다는 기록을 통해서 그의 학문이 상당한 수준에 달해 있었음을 추론할 수 있다.제 2단계 주자 성리학파의 사상 및 활동과 관련하여 특기할 것은 l들이 사회의 주도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었던 만큼 사상적 ? 정치적으로도 지대한 영향을 미8세에 즉위 하였을 때 군주교육을 위해 올린 都堂上書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이제현은 中庸과 大學을 포함한 四書를 중심으로 朱子 性理學의 본원적 大體面에 상당히 접근해 있었다고 보겠는데 특히 중요한 것은 修己治人과 經世致用을 중시한 결과 그 실천적 도리를 개인생활과 국가정치에 적절히 활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즉, 朱子 性理學을 단순한 認識의 차원에서가 나이라 應用의 차원에로 이끌어나가고자 하였음을 발견할 수 있다.2. 제 2기 學者의 朱子 性理學 理解이색은 당시 성균관의 교수진을 이끌면서 성리학풍을 형성하고 탐구하는데 지대한 노력을 기울였다. 주자학에서 볼 수 있는 理氣論을 본격적으로 전개시켜 나간 것도 이색이었다. 그는 程朱學만이 천지간의 正道요 人間世에 유일한 실학일 뿐 佛道는 邪道요 人間世 에 허망한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理氣論에 근거하여 인간의 선천적인 本具的윤리성을 분명히 제시하면서 그 본연의 윤리성을 회복하려는 價値說에 더욱 주목한 것으로 나타난다. 본연의 윤리성을 회복한다는 것은 곧 氣質의 변화를 의미하는데, 그는 그것을 大學과 中庸의 학설에 의해 인식하고 있었다.정몽주는 學行兩面에서 신진학자들을 이끌고 麗末의 학풍을 내적으로 일신시킨 대표적 학자였다. 정몽주의 학문은 四書는 물론, 易, 詩, 書에도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특기할 것은 그의 정심박대한 학문은 실상 「젊은 시절 大學과 中庸을 공부하여 지극한 이치를 알아서 실천하여 일찍이 전에 없었던 비밀스러운 兼洛을 홀로 체득한」自得之學이었고, 또한 理學之祖로 추승 받을 만큼 당시 독부적인 경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의 학문의 궁극적 목적 역시 아래로 民事를 다스리고 위로 天道를 따르면 학문의 지극한 공효로서 聖人의 능한 일을 다 한다」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정몽주 역시 中庸과 大學을 중심으로 한 실천적 경학을 중시하였다고 보아 별 무리는 없을 것이다.고려의 마지막 文學儒라 일컬어지는 이숭인은 主氣的 生機本體論을 피력하는 등 朱子 性理學에 대해를 도모하고자 하였으나 그들이 주장한 군주권은 역시 天理=天道에 근거한 갖가지 도덕적 규범에 제약되는 것임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절대적인 주권을 가진 者라고 하더라도 물리적인 강제에 의존하여 백성을 통치하기보다는 치자 스스로가 도덕성의 근거인 天理를 체득하고 피치자를 도덕적으로 교화함으로서 그들로 하여금 자연적이 복종을 유발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정치라고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정당한 통치행위의 근거를 일차적으로 치자의 인격완성에 두었던 것이다.그러면 통치에 앞서 군주가 통치의 근본원리를 체득하여야 한다는 근본주의가麗末鮮初 의 주자 성리학자들에게 어떻게 수용되고 있었는가에 관해서 살펴보기로 하자. 이제현은 주자가 중시했던 「易經」의 「敬으로서 內心을 바르게 한다」라는 사상을 이어받아 「군자의 求福이 敬以直內함만 같지 못하다」고 하여 敬에 의한 修德을 강조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왕은 四書와 孝經을 공부의 출발점으로 삼고 格物致知와 誠意正心의 道를 배우고 賢儒를 스승으로 삼고 항상 학문하는 생활이 몸에 익어 밝은 성품과 덕을 형성해 나갈 것과 宰臣을 召見하여 정사를 논의할 것을 간청하였던바, 이 모든 것이 곧 주자의 근본주의 사상과 맥락을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이제현의 노력과 관심은 주자 성리학적 명분주의를 眞儒實學으로 이해하고 현실적으로 적용시켜 나가고자 한 一群의 知性的인 학자들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스승 이제현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많은 이곡은 실제의 정치에 깊은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역시 정치의 근본을 군부의 心性에 두고 심성의 수양을 중시하였다.麗末鮮初 의 주자성리학자들이 당면한 정치사회적 모순을 해결하기 위하여 군주권의 강화를 주장하였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帝王의 심성을 먼저 도야하게 되면 정시가 바르게 될 수 있다는 입장에서 군주의 正學과 도덕적 修己가 전제된 것이었다. 따라서 여말선초의 주자 성리학자들은 군주를 국가 질서와 통치질서의 중심체로 생각함과 아울러 도덕실현의 주체로 파악한 결과 군주였다.
조선후기의 사회. 경제적 변동수취체제의 개편▒ 전세의 개편임진 병자의 전란은 토지 호구 등 조선사회의 모든 것을 파괴 감축시켰다. 국가의 재정수입이 전적으로 이에 의존하고 있었던 상황이었기에 전세제, 공납제 부역제의 개편을 통한 국가재정 수입의 확충과 농민층의 안정을 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노력도 지방관의 부조리와 비협조 등으로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상황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진로를 타개해 보고자 한 점에서 일정의 긍정적인 의의를 지닌다.양란 후 토지의 황폐화와 토지대장의 소실로 토지결수는 종전의 170만 결에서 54만 결로 급격히 줄었다. 이에 정부는 진전(陳田)의 개발에 의한 경작지의 확충과 양전사업을 통한 토지결수의 파악에 진력하였다. 즉 진전의 개간은 신분 여하에 관계없이 허용하여 개간자에게 개간지의 소유와 3∼5년간의 면세 혜택을 부과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인조대 120만 결, 숙종대 140만 결, 영?정조대는 최고 145만 결로 증가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전결수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전세수입은 답보상태를 면치 못하였다. 이는 왕실의 궁방전이나 관아 군영의 관둔전 등 상당수의 토지가 면세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부는 국가재정의 충실을 위한 방편으로 전세수입의 확대를 위해 전세의 개혁을 단행해야만 했다.그리하여 효종대 풍 흉에 관계없이 토지 1결당 미 4두로 전세율을 확정 시켰다. 즉 수등이척법에 따른 양전척을 폐지하고 양전의 자(尺)를 통일하되 토지의 등급에 따라 전결의 면적을 달리하여 파악하였다. 그런 만큼 전세율은 이전보다 하향 조정되었다. 그러나 토지 실결수의 증가로 전세의 확충이 기대되었으나 국가의 재정수입은 별로 증가하지 않았다. 이는 은결의 증가, 면세지의 확대하는 수세지의 감소에서 비롯된 측면이 강하게 작용하였음을 반증하는 것이다.이러한 전세율의 하향조정에도 불구하고 농민들에게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 오히려 각종 부가세의 남징으로 조세부담은 가중되었다. 즉 수수료 운송비 자연소모에 대한 보충비 등 전세의 수입만으로 국가재정이 한계에 이르자 이 같은 논의는 활성화되었다. 그리하여 광해군대에 이원익의 주장에 따라 경기도에서 시험적으로 실시하여 어느 정도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강원도를 비롯하여 삼남지방으로 점차 확대되었으며 숙종대에 평안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적인 시행을 보았다. 이처럼 100여 년의 오랜 기간에 걸쳐 실시하게 된 원인은 지주들의 반발이 강력하여 이들을 배려하는 제도적인 장치를 보완한 후 시행되었기 때문이다.대동법은 각종 토산물 대신 쌀로 통일하여 징수했고, 과세의 기준도 종래의 가호 단위에서 토지의 결수로 바뀌었다. 토지를 가진 농민은 1결당 쌀 12두만을 납부하였기에 공납의 부담은 경감되었다. 공납의 전세화는 토지소유의 정도에 따라 차등 과세하는 합리적인 세제방법의 개선책이었다. 더욱이 토산물 대신에 쌀 포 돈 등으로 전환시킴으로써 당시의 사회 경제적인 발전상을 어느 정도 반영할 수 있었으며,점진적으로는 조세의 금납화를 단행하는 계기가 되었다.대동법 시행에 따라 공납미의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선혜청을 신설하였다. 선혜청은 공인들에게 궁방과 관아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공급케 하는 대신에 그 물가는 대동미로 일괄 지급함으로써 공물조달의 체계화를 꾀하였다. 또한 공인들이 관청의 수요 물품을 조달하자 유통경제의 활성화가 진전되었으며, 공인의 주문을 받아 수요 물품을 생산한 수공업도 활기를 띠었다.그러나 농민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하여 시행된 대동법은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궁전이나 국왕에게 현물을 진상하는 관행은 여전히 존재하였고, 특히 지방관아에서 필요에 따라 수시로 현물을 징수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농민의 부담은 형식상으로 경감된 것으로 나타나지만 사실은 이전보다 진전된 것이 거의 없었다.▒ 균역법의 시행병농일치의 균역제는 16세기에 방군수포제(放軍收布制)가 시행되면서 점차 병 농 분리의 양상이 나타났다. 특히 임진란 중 모병제가 보편화되어 병 농 분리의 군역제로 전환되었다. 따라서 군역의 부담자인 정남(丁男)은 입역 대신 1년에 2되어 군역제의 폐해는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더욱이 양인 중 서원에 투탁한 자, 향교의 교생이 된 자 등이 지방의 아전들과 공모하여 피역을 도모하였다. 피역자의 증가는 결국 양인 군역자의 부담으로 전가되어 이들의 부담은 누증되었다. 이러한 군역의 폐단은 이른바 족징 인징 황구첨정 백골징포 등으로 나타났고 이에 비례하여 농민의 유망화 현상은 급증했다. 따라서 이 같은 상황을 수습하지 않고는 수취체제 전체의 동요와 더불어 국가 존립마저도 위태로운 경지에 이르렀다.이에 대한 시정책으로서 양역변통론(良役變通論)이 제기되어 여러 논란을 거친 후 1750년(영조 26) 균역법으로 귀결되었다. 이는 1년에 2필씩 내던 군포를 1필로 감해 주고, 대신 결작 어염세 선박세 등을 보충하는 것이었다. 즉 양반 불역의 원칙은 고수하되 토지소유자에게 결작을 징수하고, 권문세가에게 독점되었던 어 염 선세를 중앙정부가 관장하고, 양인 상층에도 군역을 부과시키는 방안이었다. 균역법 시행의 이상론은 농민의 부담을 감소시키면서도 국가재정 수입은 줄지 않는 묘책이었다.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균역법은 많은 운용상의 문제점을 노출시켰다. 결작은 소작농민의 경작지에 부과되었고, 수입 증대를 위한 과다한 양정수의 책정은 농민의 부담을 훨씬 가중시켰다. 또 어 염세의 과중한 부담으로 어민 염부들의 유망화가 되살아났다. 특히 군포의 징수 폐단은 지배체제의 동요와 더불어 더욱 자행되어 농민의 부담은 이전보다 실제로 경감된 것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균역법하에서도 군정의 문란은 농민을 괴롭히는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산업발전과 신분제의 변화▒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지주제의 변동17세기로 들어서면서 농업은 기술적으로 크게 발전하였다. 당시 조선 후기의 농업은 농지개간의 활발한 전개와 개량농법의 보급에 따른 생산력의 급증으로 커다란 진전을 보이고 있었다.우선 농지개간은 주로 왕실 양반지주층에 의해서 주도되었는데, 처음 진전(陳田)의 개간에서 시작된 농지개간은 점차 늪지의 간척 등 신전 개발로 연장됨으로써 효종법에 비해서 제초(除草)에 필요한 노동력이 크게 줄어들고, 단위면적당 수확량이 늘어났을 뿐 아니라,벼와 보리의 이모작을 가능케 하여 농지 이용도를 높이고 농민의 소득을 증대시켰다. 한전에서도 밭고랑과 밭이랑을 만들어 밭고랑에다 곡식을 심는 이른바 견종법이 보급되어 재배에 필요한 노동력을 절감하는 효과를 가져왔다.이 밖에 수리시설의 정비 확대로 18세기 말에는 전국에 저수지가 약 6,000개에 달하였고, 시비법의 개발, 농기구의 개량으로 생산력이 크게 증대하였다. 또한 감자 고구마 고추 호박 등 신작물이 도입되었고, 인삼 연초의 재배가 확산되어 농업생산은 전문화 다양화되어 갔다.농업노동력의 절감과 생산력의 증대에 힘입어 근면한 일부 농민들은 경영규모를 확대하고 부를 축적하여 지주화하였다. 즉 이앙법과 견종법의 보급에 따라 노동력이 절감되어 한 사람이 경작할 수 있는 경지면적이 늘어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따라 한 집에서 넓은 토지를 스스로 경영하는 이른바 광작(廣作)이 성행하였다. 또한 당시 상품화폐경제의 발달과 관련해서 시장을 상대로 하는 농업, 즉 상업적 농업을 행하여 부를 증대시키기도 하였다. 인삼 담배 목면 채소 과일 약재의 재배에서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는데, 특히 인삼과 담배는 가장 인기있는 상업작물로서 재배되었다.이러한 농업생산의 발달은 지주제의 변동을 초래하였다. 당시 양반 지배층은 농지개간에 있어서 필요한 노동력을 모민(募民)에 의해서 충당하고 그 대가로 해당 토지의 보유권, 즉 소작권을 급여하였다. 따라서 개간을 통해 성립한 지주-전호 관계는 종래와 같이 부역 노동이나 압량위천(壓良爲賤) 등의 방법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에서 성립되었으므로 지주와 전호의 관계도 지배 예속관계와는 다른 새로운 양상으로 진전하였다. 즉 지주-전호 관계가 보다 경제적인 관계로 진행되었던 것이다.한편 광작이나 상업적 농업에는 소작농들이 참여하고 있었으므로, 이들 중에는 지주로 성장하는 사람이 생겨 서민지주가 출현하게 되었다. 이 서민지주는 농민층의 광범한 분화에 따른 나타났다.먼저 시전상인들은 국가로부터 난전을 금압할 수 있는 특권으로서 이른바 금난전권(禁亂廛權)을 부여받았으므로 이를 이용하여 독점판매의 혜택을 오래 누렸으며, 특히 시전 중에서도 육의전은 16세기말에 서울의 상권을 장악하였고 조선후기에도 수공업자를 지배하면서 큰 자본을 가지고 사상들과 경쟁하여 도고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국가의 금압에도 불구하고 난전이 줄기차게 성장하여 국가는 마침내 1791년(정조 15)에 이른바 통공정책(通共政策)을 써서 육의전을 제외한 나머지 시전상인의 금난전권을 철폐하였다. 이로써 사상들은 육의전의 상품이 아닌 것은 자유스럽게 관상과 경쟁하여 판매할 수 있게 되었고, 마침내 시전 이외에 새로운 시장을 형성하게 되었다.한편 시전상인이 사상의 침식을 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공인들의 활동은 사상의 침해를 받지 않은 가운데 특허상인으로서 날로 번창하였다. 공인은 대개 시전상인이나 경주인(京主人),혹은 장인(匠人) 등 과거에 공납과 관련을 맺었던 부류에서 나왔으며, 그들은 선혜청이나 상평청 진휼청 호조 등에서 공가(貢價)를 받아 소요물품을 사서 관청에 납품하였다. 이들은 한 가지 물품을 대량으로 구입하는 관계로 큰 자본을 가지고 상품을 거래하였으며, 거래규모만큼 이득도 커서 손쉽게 자본을 축적하였다. 그러나 그들도 국가에 대한 국역(國役)으로서 공인세를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사상들은 앉아서 판매하는 난전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전국의 지방 장시를 연결하면서 물화를 교역하기도 하고 전국 각지에 지점을 설치하여 판매망을 확장하기도 하였으며,또 대외무역에도 참여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통해서 부를 축적하여갔다. 이러한 사상들 중에서도 서울의 경강상인(京江商人),개성의 송상(松商),동래의 래상(萊商),의주의 만상(灣商)은 대표적인 거상으로 출현하였다.한편 15세기말에 전라도지방에서 발생하기 시작한 지방 장시도 조선후기에는 전국적으로 확대되어,18세기 중엽에는 1,000여개소를 헤아리게 되었다. 장시는 보통 5일마다 열려서 인근 주민들이 농겨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