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데코의 예술가들1.르꼬르뷔제본명이 샤를 에두아르 잔느레(Charles Eduard Jeanneret)인 르 코르뷔지에는 1887년 10월 6일 시계산업의 중심지인 스위스의 라 쇼-드-퐁(La Chaux-de-Fonds)에서 캘빈파인 시계공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리고 잔느레는 이 마을의 응용예술학교에서 화가인 '샤를 레플라 테니에'(Charles L'Eplattenier)로부터 예술공예운동의 마지막 단계에 속하는 교육을 받았다. 아마도 그의 스승이 역사에 이름을 남기게된 것은 그가 교육한 천재적인 학생 잔느레 때문일 것이다. 레플라테니에는 '오웬 존스의《장식의 문법》에 깊은 영향을 받은 이였으며, 이를 통해 잔느레는 장식을 단지 자의적이며 절충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과 합리성에 근거한 것임을 익히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잔느레로 하여금 건축가가 되도록 권한 이도 다름 아닌 레플라테니에였다 특히 그의 어린 시절에 대한 스승의 영향은 지대한 것이어서, 그로 하여금 자연적인 것, 생명적인 것을 직관적이며 역동적으로 바라보는 태도를 얻었다. 잔느레는 스승 레플라테니에를 회고하며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나의 선생은 말했다. '오직 자연만이 인간에게 영감을 준다. 자연만이 진실이다.'……라고." 잔느레가 1907년 처녀작 팔레 주택을 설계한 보수로 최초의 국외 여행을 떠났다. 특히 그는 피렌체 근교에 있는 엠마 수도원을 방문하고 생애에 더 없는 체험을 얻었다. 그 수도원의 생활에 대하여 그는「개인의 생활과 공동 생활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조화로운 조직을 느끼게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엄정함에 근거한 공간과 공동체로서의 생활은 바로 근대인이 건축과 도시 속에서 가져야 할 모범적인 삶의 형식이었다. 이것은 그의 순수파 시대에 설계된 '신정신관'에도 적용되었고, 브루탈리즘 시대에 이루어진 위니 테 다비타시옹에도 스타일은 다르지만, 이와 같은 개인과 집합체, 건축과 도시의 관계에는 변함이 없었다. 같은 해 가을 빈으로 가 그곳에서 비인 분리파의 건축가 '요셉 호프만'. 이 비정한 기계는 몇 백리 떨어진 곳에서도 주위의 모든 것을 먼지로 만들고 이를 지배한다.」이 '동방여행'을 통해 체험된 지중해의 밝은 빛과 그 아래에서 전개되는 건축의 원리가 추상적인 형태와 이미지로 구체화되기 시작한다. 이 여행은 르 코르뷔지에로 하여금 다른 문화와의 접촉을 통해 오히려 보편적인 것, 기하학적인 정신에 대한 갈망을 증폭시킨 계기가 되었다.물론 초기의 작업 중 일부는 대량생산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생산주의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바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에게 '정신'이란 가장 중요한 핵심이었다. 양산주택도 인간의 생활을 위해서는 중요하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택 안에서 사는 사람의 새로운 정신상태를 만들어야 하며, 따라서 기계(새로운 기술)는 주택(새로운 생활)과 새로운 정신과 함께 삼위일체를 이루어야 했다. 그러므로 그가 말하는 '주거기계'는 단순히 물리적인 주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신 정신'을 생산하는 기계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주택은 두 가지 목적을 갖는다. …… 신체의 요구인 쾌적함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빈틈없이 배려한 주거기계…… 그것으로부터 명상에 유용한 작용, 즉 미가 그곳에 있고, 정신에 불가결한 정적(靜寂)을 가져다주는 저 여유 있는 작용…… 기술자의 작업이 한쪽에 있고 다른 한편에는 건축이 있다."꼬르뷔제의 채광방식시야에 틀달기, 조도의 조정, 일사의 조정, 상호 관입으로 분류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채광방식을 결정하고 그것을 물리적인 장치로 구체화시킨 이면에는 본질적으로 공간적인 요구가 있었고, 거기에 대한 탐구가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채광방식을 결정하는데 어느 한 두 가지의 요소만 고려해서 그 방법을 사용했다고 할 수는 없다. 여러 가지 디자인요소가 서로 위계다툼으로 갈등을 일으키는 경우와, 4가지의 분류방법에 속하지 않은 애매한 경우가 나타나는 작품도 있다. 그렇지만 꼬르뷔제가 실내의 어떠한 환경을 구축하기 위해서 디자인 요소로서의 외부조건인 빛을 조절하는 채광방식을 어떻게과 마을 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1891년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쥘리앙에 들어갔고, 그는 푸생과 샤르댕 등의 작품을 모사하는 인습적 보수적 경향의 그림을 따라 했었다. 이듬해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다.그는 부단히 자기의 창작과정을 밝혀 나갔으며 자기 예술의 원천, 방법, 목적을 분명히 하기 위해 비범한 지성을 동원하였다.1898년 만년에 이른 피사로는 여러 건물의 위층 창문을 통해 파리의 가장 찬란한 풍경을 인상주의적 화풍으로 그리고 있었으며, 아울러 필법과 감수성의 양면에서 1870년대 개척기의 인상주의 화풍으로 되돌아간 일련의 작품으로 일생을 마무리짓고 있었으며 이 작품들이 그 뒤 몇 년에 걸쳐 마티스에게 끊임없이 도전해왔던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896년 소시에테 나시오날의 살롱에 4점을 출품, 상당한 성공을 거두었고, 곧 인상주의적 수법을 채용, 근대회화의 주류에 합류했고, 이어서 코르시카와 툴루즈에 반년씩 머물면서 지중해와 남프랑스의 밝은 햇빛 아래서 그림을 그렸다. 97년 소시에테 나시오날 전람회에 출품한 《독서하는 여인》을 국가가 매입하게 되자 이 전람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 후 피사로 등과 알게 되어 인상파에 접근하였고, 또 보나르나 뷔야르 등의 영향도 받았다.《외젠느 들라크루아에서 신인상주의까지》라는 책을 읽고 시냑과 신인상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다. 마티스는 이 습작을 통해서 인물들을 이례적으로 넓고 아주 짙은 그림자로 에워쌈으로써 불쑥 솟아오른 듯한 부조감을 강조하려고 했다. 결국 이렇게 해서 나온 것이 야수파 회화의 흑백판이 되는 드로잉 양식으로서 그것은 마티스가 공인된 거장의 작품을 놓고 그때까지 만들어낸 습작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었다. 신인상주의의에 관한 한 그 궁극적인 결과는 마티스가 시냑을 직접 만나 볼 기회가 있었던 1904-5년에서야 비로소 드러나게 된다.모로가 죽은 후에는 아카데미 카리에르에 다니며, 드랭과 알게 되었다. 이 무렵 그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어려웠다. 한여름 그는 남프랑스의 콜리우르에 머물러 신인상주의의 규칙적인 점묘(點描)를 초월하여 강렬한 색채를 아울러 사용하는 야수파 스타일로 돌진한다. 그 해의 살롱 도톤은 야수파를 탄생시켰는데, 그는 이때 《열린 창문》 《모자 쓴 여인》을 출품했다. 빨강과 녹색, 오렌지와 파랑을 기축으로 한 채색법은 긴장된 화면에서 강렬한 빛을 반사하는 듯한 효과를 냈다. 1910년 뮌헨의 이슬라믹 대전시회를 보러 갔던 마티스는 그해 가을 남부 스페인의 유적을 탐사했으며, 이듬해에는 레닌그라드와 모스크바에서 이콘화와 벽화를 공부하기도 했다. 또한 이 같은 그의 관심은 1912년부터 1913년 겨울까지 모로코 행을 결심하게 만들었다. 모로코에서 마티스는 화가로서 마치 천국을 부여받은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강렬한 태양과 원색의 꽃들, 낯선 이국의 빛깔과 문화에 마티스는 감동했다.야수파의 거장 마티스는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와 거친 붓 놀림 등이 작품의 큰 특징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기본적으로 사물 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마티스는 예술이 단지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만을 위한 예술로 나아가길 추구했다. 이를 위해 사물이 갖고 있는 고유의 색채를 부정했으며, 전통적인 방법에서 일탈한 매우 혁명적인 변화를 시도한 것이다. 방법적인 측면에서의 수많은 시도 속에서 마티스의 작품 세계를 관통하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강렬한 색채 표현이다.마티스에게 있어서 색채는 보여지는 그대로가 아닌 자신의 경험과 감정의 표현이었고, 이는 20세기초의 미술운동인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이기도 했다. 이어 그의 색채는 더욱 강렬한 것으로 되어 1905년 살롱 데 엥데팡당전을 기화로 본의 아니게 야수파의 우두머리가 된다. 당시 마티스는 프랑스 내에서는 큰 반향을 얻지 못했던 반면, 미국의 스타인, 러시아의 모로조프와 후슈킨 등 외국이 소장가들이 그를 지원하게 된다. 특히 후슈킨은 그의 아파트를 장식할 대형 장식화를 주문해, 형태를 더욱 단순화하고 단일 색채를 인 오달리스크를 비롯하여 매우 느긋한 작품을 제작했다. 화풍은 자연주의적인 것으로 되돌아가 화면도 작아졌으나 을 창출하여 그 속에서 데생과 색채를 융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그 뒤 의 수법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시도하여 빛과 공간에 의한 추상적·비물질적 감각을 추구하게 되고, 나아가서 단순화와 순수화를 추구했다. 48년에 착수하여 51년에 완성한 20세기 최고의 모뉴먼트의 하나로 평가되는 남(南)프랑스 니스의 방스 성당의 건축·장식 일체를 맡아 여기에 모든 기법과 재료를 동원, 그의 예술의 집대성을 이룩하였다. 그의 작품은 피카소와 함께 20세기 회화의 위대한 지침이 되었으며 니스에서 죽었다.*작가의 연보 Henri Matisse (1869.12.31~1954.11.3)1869년 12월 31일. 카토-칸브레지에서 출생.1887년 파리 대학 법학부에서 수학.1889년 도콘세이유 법률 사무소에서 근무하면서 캉탕라토울 화숙에 다님.1890년 맹장염 수술을 받고 정양하면서, 구피가 쓴 「회화론」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이때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1891년 파리로 나아가 아카데미 쥴리앙에 입학, 국립 미술 학교 시험 준비에 착수.1892년 국립 미술 학교의 귀스타브 모로 교실에 들어가 루오와 알게 됨.(1890-92)1895년 생 미슐 하반에 살면서 여름철에 브르타뉴 여행. 이해, 베네치아 비엔날에 국제전이 처음으로 열렸다. (1894-95)1896년 처음으로 작품전 염. 살롱 보자르에 (1894) 출품1897년 인상주의 회화에 접하게 됨. 카이유보트의 유작들이 뤽상브르 미술관에 등 장했고, 그해에 피사로의 소개를 받음.1901년 앙데팡당전에 첫 출품. 스위스에서 잠시 요양 생활.1902년 베르토 베이르 화랑에 출품. 잠시 보앵에 있는 부모의 집으로 돌아감.1903년 살롱 도똔느 창설에 참여하고 작품을 출품. ,1904년 보라르 화랑에서 첫 개인전. 이해 여름, 생 토 브라망그 등과 함께 살롱 도 똔느에 출품. 1905년 이해 최초로 야수주의전이 열림., 190
아르누보의 예술가들1. 구스타프 클림트*그의 생애[비엔나 분리파]를 창시하여 종래의 미술 개념의 지평을 넓히는 진보적인 미술 운동을 지배했으며, 에곤 쉴레, 오스카 코코슈카의 선배이자 스승으로 그들과 더불어 오스트리아 현대 화단을 대표하는 가장 탁월하고 혁신적인 화가로 평가되는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 ~ 1918) 그는 1862년 7월 14일 오스트리아 바움가르텐에서 보헤미아으로 이주해 온 금세공사 에른스트 클림트의 7형제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느 해인가는 크리스마스 때인데도 집에 빵 한 조각 없었다."는 여동생의 술회가 말해 주듯 극심한 가난 때문에, 장녀를 광적인 종교에 잃고 막내딸마저 병으로 잃은 뒤 남은 다섯 아이는 무슨 일이 있어도 잘 키워 보겠다는 양친의 집념에도 불구하고, 그는 짐나지움에 입학하지 못하고 공장 노동자나 장인으로 예정된 미래를 짊어진 채 고등 공민 학교인 "뷔르거슐레"에 입학한다.1876년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에 입학하면서 그의 예정된 운명의 손길을 뿌리치고 화가로서의 훗날을 예비하는 첫걸음을 내딛는다. 교사로 재직 중이던 페르디난트 라우프베르거, 한스 마카르트 같은 당대의 저명한 화가들의 주목을 받으며 미술 수업을 시작한 그는, 그의 뒤를 이어 진학한 동생 에른스트, 그와 마찬가지로 뛰어난 학생으로 인정받고 있던 프란츠 마츠와 함께 동인을 결성하여 예술적 이상을 교류하면서, 라이헨베르크 국립 극장의 천장화 제작 같은 일들을 주분 받아 학비를 조달하고 아울러 화가로서의 경력도 쌓아 나간다.1883년 학교를 졸업한 그는 에른스트, 마츠와 함께 [쿤스틀러 콤파니]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본격적이 활동에 나선다. 부쿠레슈티 국립 극장 장식, 피우메에 있는 리예카 국립 극장 장식, 비엔나 미술사 박물관의 대 계단 장식 등이 이 세 젊은 예술가의 공동 작업의 소산이었다.1890년에는 비엔나 구(舊) 국립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으로 그 해 처음 제정된 [황제 대상]의 첫 수상자가 되기도 하는 등 그는 점차 뛰어난상과 너절하고 하찮은 것에의 집착, 그리고 모든 형태의 악취미에 대해 선전 포고를 하련다."라고 외쳤고, "오스트리아를 아름다움으로 덮어 버리자!"고 촉구했다. "각 세기마다 고유한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란 슬로건을 내세운 그들의 야심은, 예술로부터 상업성의 비계를 걷어 내고, 외국의 탁월한 작품들을 소개하여 비엔나를 문화적 고립으로부터 구출하며, 위대한 예술과 부수적 예술 부자들의 예술과 빈자들의 예술을 가르는 구분을 철폐하고 도시 계획, 건축, 가구, 생활 필수품 등 생활의 모든 국면에서 예술을 창조하겠다는, 말하자면 '총체 예술'을 확립하겠다는 것이었다. 지체없이 기관지 [성스러운 봄]을 창간하고, 기금을 모금하여 [분리파 전당]을 건설한 클림트는, 이후 8년 간 [일본 미술전] [인상파 미술전] 등 스물 세 번의 분리파 전시회를 기획, 추진하면서 오스트리아에 새로운 예술의 씨를 파종한다.1894년 오스트리아 문교부의 의뢰를 받아 제작한 비엔나 대학 강당의 천장화 [철학] [의학] [법학]이 발표된 것도 바로 이 분리파 전시회를 통해서였다. 이미 서서히, 그리고 노골적이고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누설하고 있던 클림트는, 앞의 두 작품에 대해 쏟아진 과도하고 병적으로 관능적이라는 비난은 그런 대로 받아넘겼으나, 1903년 발표된 [법학]에 대해 문교부와 비평가들은 물론이고 일반 여론까지 들고일어나 '춘화' 혹은 '변태성욕자의 무절제'라고 비난하자, 그를 후원하는 한 실업가의 도움을 받아 문교부로부터 받았던 사례금을 돌려주고 그 작품들을 비엔나 대학에 서 철수시킨다. 외설적이라는 비난은 비단 이 작품들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1902년 거장 베토벤을 기념해 만든 30여 미터에 이르는 대작 벽화 [베토벤 프리체]도 여론의 격렬한 분노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비록 자국 내에서는 그의 작품이 이렇듯 경원되고 혐오되었으나 바깥에서 바라보는 시선은 그와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1900년 [파리 만국 박람회]는 [철학]에 금상을 안겨 주었으며, 로댕은 벽화 [베희망 2] 등이 이 시기, 그의 주요한 소출들이었다. 그리고 대표작이자 "황금 시대"의 절정인 [키스]가 발표된 1908년을 기점으로 그의 그림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다. [비엔나 장식 미술 학교] 시절, 처음에는 부업이 그리고 나중엔 본업이 되다시피 한 여러 극장의 실내 장식 작업, [스토클레 저택 벽화] 같은 분리파 시절의 건축과 연관된 작업들에서도 내내 장식성은 그의 공기였다 그것은 그의 그림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그런데 "황금 시대"를 종료하면서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분리파 내의 반 분리파였던 아돌프 로스의 저서 [장식과 죄악]의 영향도 약간은 작용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발언이다. "장식은 이제 우리 문화와 아무런 유기적 관련을 맺지 못한다. 장식은 더 이상 진보할 수 없고, 그러므로 지진아적, 비정상적 현상에 속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그림은 그 자신의 말대로 과연 장식성에서 벗어났는지는 의심스럽다. 그의 그림의 중요한 상수인 관능성과 마찬가지로 장식성은 그의 최후의 그림들에서까지도 짙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여지기 때문이다. 장식성과 관능성, 아름답지만 부패하기 쉬운 이 '살아있는 송장'들을 그는 최후까지 끌고 갔던 것이다.그의 그림은 1908년을 넘어가면서 새로운 양상을 보이기 시작한다. 예전에 비해 색채가 많은 의미를 전달하는 독립된 구성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고, 간간이 나타나던 화면의 정사각형 형태가 거의 고정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소재 면에서 풍경과 초상이 그의 그림의 주류를 이루게 된 것이다. 말년의 그는 일년을 둘로 나누어 살았다. 저 유명한 아프리카 풍의 긴 장옷을 걸치고 일년의 반은 비엔나의 작업실에서 아침부터 밤까지 작업에 몰두하고, 나머지 반은 그와는 사돈지간인 의상 디자이너 에밀리에 플뢰게와 함께 아터 호반에서 고요한 휴식과 명상을 즐기곤 했다. [자작나무가 있는 농가] [언덕 위의 정원] [스클로스 캄머 정원의 길] [아터 호수 근처의 운터아크 교회] 같은 그의 대부분의 풍경화들은 바로 아터 호수 주위의 풍광을 대상으로 한을 앗아간 스페인 독감이 비엔나를 기습해 분리파 예술가들을 몰살시킨 해였다. 클림트는 1월 18일 뇌졸중으로 갑자기 쓰러져 신체 일부가 마비된 채 투병하다 결국 스페인 독감에 걸려 2월 6일 평생의 연인 에밀리에 플뢰게가 지켜보는 가운데 56세의 나이로 영면한다.*클림트 드로잉의 시기별 형성과정과 제 양상클림트 드로잉의 양상의 변화에 따른 시기 구분은 반드시 그의 회화전체의 흐름과 일치하진 않지만 보편적인 클림트 회화의 변천과정에 맞추어 다음과 같이 나누어 보았다. 먼저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하면서 졸업하기까지의 학습기를 포함해 클림트 형제들과 프란츠 맛슈가 함께 작업했던 공방시기, 에로틱하면서도 장식적인 회화의 변모를 보인 분리파(La Seceeeion)시기, 그리고 일본을 비롯한 동양적 양식과 비잔틴양식들이 잘 어울어진 금색시기를 거쳐 말년에 어린 시절부터 관심을 가졌던 자연에 비로소 눈뜬 자연적 귀의 시기 등 네 시기로 나누어 그의 회화상의 변화양상을 살펴보고자 한다.(1) 공동공방시기(1876~1997)클림트의 공동공방시기는 그의 예술적 재능이 일찍이 발견되어 오스트리아 미술관 부속 미술공예학교에 입학하는 1876년 그의 나이 14세부터이며, 점차 아카데믹한 화풍에서 탈피하여 비엔나 분리파를 창설하던 1897년 이전까지를 공동공방의 시기로 본다. 1892년 이후의 클림트 회화의 특징은 그의 화풍에서 리얼리즘이 약화되고 상징주의적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있다. 이는 부친과 아우의 사망으로 인한 괴로움 속에서 독특한 클림트의 상징적 세계를 탄생하게 했을런지도 모른다.이 시기에 해당하는 초기의 드로잉 작품은 이제까지 알려지지 않았던 1881~1882년 사이의 작품이 실린 스케치북이 발견됨으로써 세상에 공개되었다. 네베헤이는 1987년 소냐 크닙스가 소장해 왔던 클림트의 스케치북을 출판하면서 1881년과 1882년 사이에 클림트가 제작한 드로잉작품 50여 개 중에서 세 작품이 보존되었기 때문에 이 스케치북이 중요하다고 하였다.(2)분리파 시기(1897~1904)분리파 함께 완성된 듯한데 이는 마지막에 말한 습작과 연관된 것이며 아마도 모델이 서 있는 동안의 막간을 이용하여 그려졌던 것 같다. [의학]을 위한 구성스케치에서는 클림트가 주문한 요구에 대해 이런 식으로 밑그림을 가져갔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생각을 다시 없앴다는 것을 알 수 있다.(3) 금색시기(1904~1909)클림트의 금색시기는 유럽에서 그의 명성이 절정에 달했을 때이며 브뤼셀에 있는 [스톡클레프리즈]를 의뢰 받았던 1904년을 기점으로 하여 1909년 제 2회 예술전에 참가하면서 담담한 색조로 바뀌기 시작한 시대로 볼 수 있다. 이 시기의 드로잉은 대부분 유화작품과 관련된 밑그림의 역할을 하고 있다.클림트는 그의 금색시대에서 장식적 상징으로 고대 그리스적인 심상을 자유로이 사용하였는데 알카익 시대에 대한 클림트의 이러한 관심은 니체의 [비극의 탄생]에 따르면 그리스예술에는 질서와 억제를 나타내는 아폴로적인 성격과 열정과 쾌락을 향한 비이성적인 뒤오니소스적 성격의 상반된 특성이 존재한다.그의 금색시대 전반에 걸쳐 양식화된 알카익 장식을 이용한 예는 [음악1][음악2]와 [물뱀1], [물뱀2]에서 찾아 볼 수 있고 금색시대 이후의 많은 작품에서도 디오니소스적 모티브를 전형적인 그리스적 특징에서 이탈하여 극단적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클림트의 완전한 주관화로 인해 마침내는 고대 그리스 모티브의 인용을 구별할 수 없게 되었다.2. 알퐁스 뮈샤(Alphonse Maria Mucha)알퐁스 뮈샤는 아르누보시대에 파리에서 활동했던 화가이다. 아르누보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한 세기 전, 세기의 전환기에 서구에서 유행했던 예술양식으로, 순수예술뿐만 아니라 각종 실용적인 디자인과 상업적인 분야까지도 포괄했던 화려한 장식적 양식이다. 알퐁스 뮈샤는 아르누보의 그런 '포괄적인 디자인'으로의 요구에 발맞추어 가장 성실하게 활동했던 화가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는 화가이자 그래픽 아티스트였으며, 건축, 보석 디자인과 인테.
- 게르그 브란튼베르크의 「이갈리아의 딸들」을 읽고.. -내가 여성학 강의를 수강 신청한 이유는 현대 사회가 아직까지 남성우월주의를 추종하여 여성이 사회적 지위를 차지하고 유지하기가 어렵기에 그런 부조리한 사회에서 나 자신을 책임져 나가며 더 나아가 같은 여성들에게 권리를 찾아가는데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에서였다. 여성학 강의를 듣기 전 나름대로 여성에 대한 권리와 평등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에 대해 주체성 있게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내가 생각했던 것 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세밀한 부분까지 여성에 대한 권리와 평등이 박탈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또한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나의 고정관념들이 하나 둘씩 깨져 새로운 틀이 인식되어 진다는 것에 새삼 놀랐다. 그것에 더하여 「이갈리아의 딸들」이라는 책은 내가 생각했던 사고 방식들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해주는 파격적이고 충격적인 책이었다.처음 제목을 본 순간 내가 생각한 바로는 이갈리아라는 나라의 딸들이 우리 현실처럼 남성들에게 불평등을 당하는 얘기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책을 펼쳐드는 순간 이런 나의 생각을 무참히 깨트렸다.책의 처음에 이갈리아의 용어들은 무척이나 생소하고 난해했지만 딱 한가지 알 수 있었던 것은 여성의 지위가 남성보다 높다는 것이다. 그리고 흔히 알고 있는 영어 단어를 새롭게 조합시켜서 정말 새로운 세계의 용어처럼 느껴졌다.그 중에서 흥미를 끄는 것은 페호(peho)라는 용어인데, 페니스를 받치기 위해 입는 옷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전공이 의상학과라 의상에 관련된 것에 더 관심을 갖게 되는 것 같다. 이 책을 읽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옷이 있다면 마냥 신기해할지도 모르겠지만 실제로 서양 복식 역사에 페호(peho)와 비슷한 복식이 착용되기도 했었다. 1530년 르네상스 중반기 시대에 역삼각형의 천으로 주머니 모양의 앞트임 덮개를 만들어 핀이나 끈으로 고정시킨 것이었다. 한마디로 페호처럼 성기보호가 목적으로 쓰여졌다. 짧은 시기에만 착용한 것으로 보아 꽤 불편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작가는 여성이 착용하는 브래지어처럼 남성에게도 구속적인 표현으로 만든 것 같은데 솔직히 페호가 더 불편해 보인다.EH한 부성보호(fatherhood-protection)라는 단어는 움이 아이의 아버지라고 지목한 맨움이 갖게 되는 혜택과 의무로 아이를 길러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 뜻이 담겨 있다. 이 제도야말로 우리 현실 사회에 꼭 필요하고 여건만 된다면, 꼭 현실화되길 바라는 게 나의 심정이다.지금의 남성들은 여성에게는 모성이라는 본능이 있다고 주장하여 출산이나 양육은 당연히 여자들만의 특권이며 남성에게는 부양할 권리가 없다는 식으로 떠넘기기까지 한다. 왜 여성에게만 모성본능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또 왜 여성이 아이를 양육해야 한다는 고정관념에 사로 잡혀야만 했을까. 이 모든 것이 사회가 만들어 놓은 틀 안에 우리가 껴 맞춰 생활한 죄라고 밖에 설명 될 수 없다.남성들에게도 엄연히 부성이라는 본능이 있다. 자녀를 양육할 수 있고 육아, 교육도 담당할 수 있다. 예전에는 자녀의 교육이 아버지 몫이었고 어머니는 가정의 일에만 묵묵히 책임을 졌었다. 그러나 현재 아버지가 육아나 교육을 담당하는 것이 남자로서의 당연한 의무가 아니라 수치스러운 것이고, 사회에서 그리 보기 좋은 모습이 아니라고 여기기 때문에 남성들은 자연스럽게 육아나 교육에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만약 부성보호가 실제 사회에 제도가 되어진다면 우리나라 아니, 전 세계에 미혼모와 사생아들의 비율은 급격히 줄어들 것이다.내가 「이갈리아의 딸」들을 보면서 긍정적인 견해와 부정적인 견해를 가질 수 있었는데 먼저 긍정적인 견해에 대해 말해보도록 하겠다.이갈리아의 세계에서는 우리 현실 사회에서 미쳐 생각지도 못했던 생각들과 행동들이 자연스럽게 표현되어 씁쓸한 허전한 웃음을 자아낸다.그 나라에서 여성들은 임신을 하면 출산 휴가는 물론 첫 출산이면 특별 보너스까지 제공받는다. 또한 임신을 하면 임신 수당을 따로 받기까지 한다. 우리 사회에서 출산 휴가를 주기는 하지만 극소수의 직업들에 한해서 만이지 전부는 아니고 첫 출산에 대한 특별 보너스는 당연히 없다. 또한 출산 후 육아 휴직 급여도 20만원에서 40만원정도이기 때문에 생활비와 병행하기에는 너무 빠듯한 실정이다.또한 이갈리아에서는 임신을 할 수 있는 움(여성)이 사회적으로 절대적 존재이며 지위가 높고, 해야 할 일도 많으며 남성들을 지배할 권리를 가질 수 있게 나온다. 여성의 몸이 얼마나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신비로운지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으며 사회 생활이나 자신의 일에서 방해만 될 뿐이라는 여성 자신의 편견과 사회적 편견을 일깨워 주고 있다.여성이라면 누구나 월경을 하는데 현실에서 첫 월경을 하면 어머니들은 이제부터 조신하게 행동해야 한다. 든지 생리대나 생리용품은 아무도 보이지 않게 숨겨 둬야해. 하는 말씀을 하신다. 아직까지 월경에 대해 익숙하지 못하고 낯설어만 하는 아이에게 그런 어머니의 모습들은 아이 스스로 월경이란 숨겨야 되는 것이고 부끄러운 거라고 생각하게 되어 자신의 신체를 불편해하며 월경을 하지 않는 남성과 평등하지 못하다고 단정짓게 되는 것이다. 물론 여성이 평생 한 달에 일주일 정도씩 월경을 할 때는 불편하고, 힘들 때도 있다. 그러나 월경은 내가 곧 여자이며 또 다른 생명의 주인이 되기도 하며, 인류의 생명을 유지해 주는 절대적 존재라는 의미가 된다. 이토록 소중한 여자의 몸을 아끼고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이갈리아 세계에서 성에 대한 책임은 남성에게 있다고 보고 당연히 피임도 남성이 한다. 이것은 우리 현실과 너무나 다르게 보여주고 있어 개인적으로 나에게는 큰 충격이었다. 대부분의 여성과 남성의 성관계에서 원치 않는 임신으로 인해 괴로울 일을 방치할 때 여성이 피임을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길 정도로 남성들은 피임에 대해 무관심하다. 여성이 피임할 수 있는 방법이라면 자궁에 피임 장치를 하거나 약을 복용하는 것 밖에 없는데 이런 것들이 여성에게 유해하고 여성의 몸을 손상시키게 되는데 남성들은 피임을 원치 않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성은 이런 피임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오히려 남성의 치임은 더 간단하고 여성의 피임보다 무해하며 영구적이 아니라 남성들에게 피임을 요구하고 싶지만 남성들은 자신이 피임하는 것은 곧 성생활이 죽는 것이라고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남성이 피임하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 서로가 같이 원해서 하는 성관계에 따른 책임을 여성만 짊어져야 하는 것일까. 왜 여성은 남성의 피임을 강력히 요구하지 못하고 자신의 몸에 유해한 약이나 피임도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인가. 이런 원초적이며 본능적인 성관계에서까지도 남성이 우월하다는 것이 이해할 수 없으며 화가 난다. 결코 임신은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혼자만 책임져서도 안 된다.이런 것 외에도 이갈리아 세계에서는 현실과 반대되어 말하면서도 현실의 문제점을 부각시키고 있다. 미의 기준이라든지, 전형적 가정이 어떤 것이라든지 또한 여성만이 할 수 있는 일과 남성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정해져 있다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현실에서 보이지 않는 곳까지 여성들이 차별 받고 있다고 설명해주며 우리 사회의 현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그러나 꼭 이 책을 긍정적 견해로만 보는 것이 아닌데 지금부터 나의 부정적 견해를 말해보겠다.우선 이갈리아 세계의 한 가정에서 어느 정도의 나이가 되면 남성은 메이드맨의 무도회라는 곳을 간다. 소설의 주인공인 페트로니우스라는 아이도 하나의 여성을 만나기 위해 또 그곳에서 여성과의 성관계를 맺어 하나의 부성보호를 받아 혜택과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메이드맨의 무도회를 가는데 그런 모습들이 꼭 소설에 필요했던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단지 기다리고 선택 당해야 하는 여성의 모습을 반영하고 싶었기에 그런 설정을 해놓은 것인지 아니면 단지 주인공과 주인공의 여자가 만난다는 이유 하나 때문에 설정한 것인지 모호한 그런 모습에 소설을 단지 흥밋거리로 전략시키는 것 같았다. 메이드맨의 무도회는 남성이 자신의 신분을 극복할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돌파구처럼 보여지는데 즉 이것은 남녀간의 성관계가 여서의 지위를 높여줄 수 있고, 결혼이 여성을 행복하게 해줄 거라는 뜻처럼 보여진다. 비록 맨움들이 맨움해방주의를 운운하여 메이드맨의 무도회에서 반란으로 움을 힘을 써 강제로 방에 가둬 두려 하는데 이런 모습들이 현실에서 어떤 모습으로 비춰져서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닌 단지 성적 흥밋거리로 쓰여진 것 같아 아쉬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