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기 북한의 ‘자본주의 공간’생성에 관한 연구- 북한도시의 시장 공간 발달을 중심으로 -제1장 서 론제1절 분석 틀 : 르페브르의 ‘공간변증법’제2장 사회주의 국가에서 도시 공간의 변화와 상업지역 형성제1절 사회주의 도시 공간의 변화제2절 사회주의 상업지역의 형성제3장 북한식 개방?개혁 정책을 위한 새로운 공간 생산제1절 북한식 개혁?개방의 길과‘7.1경제관리개선 조치’제2절 농민시장의 종합시장으로 개편 : 시장공간의 재생산제4장 시장 공간의 정치?사회적 효과 :‘자본주의 공간’생성제1절 시장 공간의 정치적 효과제2절 시장 공간의 사회적 효과제5장 결 론제1장 서 론‘고난의 행군’으로 대표되는 1990년대의 경제위기 이후 북한체제의 변화는 북한연구에서 주요쟁점이 되어 왔다. 북한체제는 국가배급제의 약화와 사회?경제적 불안성이 가속화 되고 있지만 급격한 붕괴 조짐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기존의 사회주의국가들처럼 국가 주도의 시장경제로의 이행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체제 붕괴로 직결되지 않으면서 혹은 단순한 현상유지 차원도 아닌 가운데, 일련의 독특한 내부적인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는 추론이 가능하다.실제로 현재의 북한체제는 중앙에 의해 소유?계획되고, 통제되는 중앙계획경제로 보기 힘들 정도로 변모하는 가운데, 시장으로 대표되는 2차경제영역이 계획경제와 공존하면서 이를 보완하고 대체하는 기제로서 이미 상당한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다.) 게다가 사회주의체제에서의 2차경제와 같은 사회현상은 단순한 경제적 현상으로만 좁게 이해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체제의 정치?경제적 모순들의 반영 물로서 체제변화의 단초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측면을 지니고 있다.)우선 이 글은 북한 계획경제 자체의 내재적 불완전성에 의해 형성된 시장에 관한 공간적 정의라 할 수 있다. 전환기 북한의 시장이라는 공간은 ‘이데올로기로서의 도시’공간의 생성)과 관련이 있다. 북한의 산업화시기 공장체제는 ‘생산의 정치’로서 도시의 노동력을 국가적으로 관리하고 생산에 대한 당의 지배를들어내며, 이렇게 만들어진 공간은 세대를 거쳐 사회적으로 지각되어, 새로운 공간적 실천 양태를 낳게끔 재생산된다.) 북한의 경우 농민시장의 변화를 보면 알 수 있는데, 처음에는 단순히 농촌의 잉여작물을 팔던 공간이 1990년대 식량의 위기를 경험하면서 암시장의 형태로 독특한 공간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이 공간은 북한 주민들에게 비공식적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고, 이제는 공식적으로 그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둘째, 공간의 재현이다. 공간의 재현이라는 계기는 실제 물리적 공간 틀을 만들어내고 거기에 특정 권력이 이데올로기와 담론을 덧붙이게끔 기능한다.) 권력의 측면에서 보아 이런 공간의 재현 모델들은 권력집단의 주문, 특히 (자본주의든 사회주의든) 국가와 자본의 주문에 봉사한다. 하지만 권력은 더 이상 노골적인 폭력의 모습이 아니라, 정교하고 세련된 지식구조에 의해 여과된 형태로 나타난다. 공간을 둘러싼 공급자와 소비자 사이의 역동성이야말로 르페브르가 이 삼각변증법에서 포착해내고자 한 요점일 것이다. 이 개념을 북한에 적용시켜 보면, 북한은 1958년 생산에 자극을 주고 인민 생활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농민시장을 합법적으로 인정하였다. 시장에서의 사적 거래는 불가피 하고 사적 이윤추구는 자본주의 맹아 형성할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북한 당국은 시장의 활성화를 막고 계획부문과의 관계에서 주변적인 위치에 묶어 두려 하였다. 즉, 초기에는 시장이 북한정권의 자본주의에 반대하는 이데올로기적 기능을 하는 공간으로 인식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경제 위기 이후 종합시장으로의 확대, 개편은 국가계획부분이 아닌 시장에 대한 국가의 통제권한을 높이기 위한 공간변화로 볼 수 있다.셋째, 대항 공간의 생산이다. 공간생산과정은 아무 저항 없이 순탄일로가 아니다. 오히려 모순과 갈등으로 가득 찬 과정이 일쑤이다. 진부한 일상의 반복에 맞서, 더 중요하게는 성문화?규범화된 지배 코드에 맞서, 흔히 비언어적인 상징의 형태를 띠는 갖가지 대항 공간 실험들이 것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거리에서 생계를 위한 목적이나 영리를 위하여 비공식적인 노점상으로 나서고 있으며, 서방계 은행과 기업에 의한 오피스 수요가 커갈수록 전환은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중국의 농업개혁이후, 농부들은 정부가 정한 일정량의 수확물만 공납하고, 나머지는 자유시장에 팔 수 있도록 허용되었다.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중국대도시에서 농산물 시장이 등장하여, 초기에는 길모퉁이의 노점상 형태로 나타나다가 경쟁을 거치면서 규모 있는 대형 상점도 생겼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근린상가와 대규모 상가, 그리고 마침내 도매시장이 등장하였다.농업생산물 뿐 아니라 공산품과 생필품 배급체계가 바뀌면서 공산품 시장도 등장하였다. 공산품시장은 업무시설에 대한 추가적 수요를 가져와 오피스, 상점, 금융기관까지 생겨나고 있으며, 이러한 비즈니스 활동은 면대면 접촉의 필요성을 증대시켜 집적의 경제를 달성하려는 대규모 중심상업업무지구의 형성을 촉진케 하고 있다.제3장 북한식 개혁?개방 정책 위한 새로운 공간 생산제1절 북한식 개혁?개방의 길과 ‘7.1경제관리개선 조치’르페브르의 공간 재현의 측면에서 시장은 북한정권의 북한식 개혁?개방정책을 운영하기 위한 실천적 공간이다. 먼저 북한식 개혁?개방정책의 내용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2002년 7월 1일부터 시행된 ‘새로운 경제관리 개선’조치 이후 북한은 본격적인 개혁?개방의 길로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다. 최근에 들어서는 ‘지적재산권’의 개인 판매와 유통도 허용하는 파격적인 조치까지 내놓고 있다.) 개성과 금강산으로 이어지는 경제특구 조치를 보더라도 북한이 그간 점진적 개혁의 길을 갈 것이라는 예상을 뒤집고 마치 ‘빅뱅(bigbang)'의 형태로 개혁정책의 방향을 잡은 것은 아닌가라는 혼동마저 주고 있다.북한은 최근 변화에 대해 중국식의 개혁?개방의 모델로 보거나 계획 경제의 정상화 시도로 보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이러한 평가의 진위 여부는 좀더 시간이 지나야 확실해 지겠지만, 북한이 시장의 도입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국가재정에서 보전해주는 제도)계획수립?‘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원칙’에 집중?국가계획위원회’는 전략적, 국가적 중요사업과 도별 공업 총생산액, 기본건설투자액 등만 작성?여타 세부사업은 해당 기관, 기업소, 지방항정기관이 수립?중앙집권적 계획경제체제의 분권화공장?기업소 경영?독립채산제의 느슨한운영 : 원자재 들을 국가에 의존하려는 경향?독립채산제 강화 : 부족한 원부자재는 해당 공장?기업소가 자체 해결?유명무실한 독립채산제를 실질적으로 운영공장?기업소 경영?원가개념 부족 : 원가개념보다 국가계획 목표달성이 우선?생산전문화 부족 : ‘자력갱생’의 원칙하에 각 공장, 기업소가 원자재부터 완성품까지 생산하는 경향?각 공장?기업소의 경영활동에 대한 국가경제기관의 각종 통제(재정통제, ‘원’에 의한 통제 등?원가개념 강화 : 자금, 물자, 노동력 투입 대비 실리를 파악할 수 있도록 재정계획 방법과 계산체제를 수립?생산전문화 유도 : 연합기업소, 협동농장, 모든 공장, 기업소에 대해 생산전문화를 유도?내각과 중앙경제기관의 기관, 기업소 활동을 제약하는 불필요한 규정 개폐?국가계획 달성보다 원가절감을 통한 수익성 제고도모?생산전문화를 통한 기업의 ‘자력갱생’원칙 완화원부자재 시장?원부자재 거래는 시장이 아닌 공장 : 기업소간 계획에 의해서만 가능?원부자재 시장을 개설?일정 비율의 생산물을 자재용시장에 납품?다만 교역물자의 종류와 범위는 국가가 규정하고 대금은 은행결제로 이루어지도록 규제?시장 범위의 확대?원부자재 배분의 효율성 제고분배방식?‘평균적 분배주의’팽배?‘일한 것만큼 분배를 받는다’는 ‘사회주의 분배원칙’의 유명무실?각 공장?기업소의 실정평가는 ‘벌어들인 수입’을 기준으로 실시?수익성이 좋은 공장?기업소들에 대해 더 많은 수익을 배분하여 노동자에게 추가노임(상여금)을 지급?유휴노동력을 국토, 농촌건설 등에 동원하되 작업수행정도에 의거하여 반드시 보수를 지급?능력급 강화?국가의 무차별적 노동력 동원 관행 자제사회보장체계?식량, 소비재, 주택 등에 대해 국정가격을 수 있는 시장의 공간은 북한 주민들에게 ‘자본주의 학습’의 공간으로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국가납부금’이나 내각의 문서의 내용들은 시장에서의 국가 통제력을 높이려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적으로 시장은 점점 북한 정권의 이데올로기를 부분적으로 반영하는 공간으로 재생산 될 것이고, 이것이 얼마간의 정권 안정화에 도움을 줄 것이다.제4장 시장공간의 정치?사회적 효과 : ‘자본주의 공간’ 생성제1절 시장공간의 정치적 효과이 장에서는 북한 시장의 활성화가 어떠한 정치?사회적 효과를 주는지에 대한 내용을 다루고자 한다.북한 정부가 시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확대?개편 한 것을 암시장이 정치?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북한의 시장이 공식적으로 용인되기 전 암시장은 사회적으로 부정?부패현상을 유발시키는 공간으로 활용되었다. 암시장 거래에 필요한 공공물자의 비법적인 거래가 횡횡했고, 당?정 고위직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부추기는 공간이 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북한이 시장을 활성화 하고 부분적인 개방?개혁 정책을 취한다 해도 여전히 불법적인 거래와 관료들의 부패는 남아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시장을 통해서 경제적 실용주의에 입각한 의식을 확립시키는 것이 곧바로 현재 북한체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로 이어질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시장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합법인 거래만을 용인하는 형태로 변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시장으로 대표되는 비공식부문의 경제는 단기적으로 식량 및 생활용품을 포함한 물자부족 현상의 완화에 긍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계획경제 부문의 시장 지향적 개혁 없이 시장공간만 확대되는 경우 투자 및 물자배분 구조의 왜곡, 소득격차 확대, 통화팽창 등 심각한 거시경제상의 부정적 효과를 가져 올 것이다.) 그러므로 북한 스스로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수용하고 시장기구의 효율성을 강조 할 가능성이 크다.제2절 시장공간의 사회적 효과시장의 발달과 함께 장사를 목적으로 물건을 팔거나 얻기 위한 유동인이다.
김일성의 단일적 지도력 확립과 국가건설-박헌영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목 차 】Ⅰ. 들어가며Ⅱ. 해방 후의 김일성과 박헌영: 외적환경요인 소련1. 김일성과 박헌영 역할변화2. 김일성과 박헌영에 대한 소련점령군의 태도 비교Ⅲ. 북로당과 남로당: 구조적 요인 안에서의 갈등1. 북로당과 남로당 합당과 권력경쟁에서 김일성의 승리2. 북로당과 남로당의 노선갈등Ⅳ. 김일성-박헌영의 회동으로 바라본 견제와 협력중의 경쟁1. 김일성-박헌영 회동 후 주도권 빼앗긴 박헌영2. 김일성과 박헌영의 회동: 전략적 관계설정Ⅴ. 맺으며Ⅰ. 들어가며북한의 당?국가 건설과정은 한마디로 김일성 그룹의 경쟁그룹 내지 경쟁파벌을 제거하거나 중립화시켜 ‘단일적 지도력’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단일적 지도력을 수립하려는 집념은 당?국가 건설자에게는 정치적 본능이며, 단일성의 획득과정은 불가피하게 당?국가 건설 경쟁자들을 정치적으로 제거하거나 무력화시키는 과정을 수반한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공산주의 운동가였던 박헌영과 북한의 최고지도자로 부상한 김일성의 권력 투쟁은 김일성의 유일체제형성의 한 요인이라 할 수 있다. 사실상 북한 정권 수립기에 박헌영 뿐 만 아니라 오기섭, 조만식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숙청을 통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 중에서도 박헌영은 한국 전쟁이후 ‘간첩사건’의 여파로 권력투쟁에서 희생되었는데, 한국전쟁 전까지만 해도 고급 문건의 서명에 김일성과 함께 박헌영이 항상 포함되어 있었을 정도로 그의 권위는 무시할 수 없었다.사실 김일성과 박헌영은 당과 국가 건설이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으나 목표 달성에 대한 생각과 이익에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이들은 국가 건설에 쓰일 수 있는 나름대로의 자원과 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 자원과 능력을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서 최대한 이용하여, 당과 국가 건설을 위한 자신의 전략을 구사하며 상호 경쟁하였다. 그러므로 이 둘의 상호경쟁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당과 국가건설 과정을 이해하는데 의미 있는 작업일 것이다. 을 잊지 않았다. 달리 말해, 김일성은 북한에서 소련군이 조성해준 소위 ‘유리한 조건’을 이용하여 해방된 조선 공산주의 운동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기회를 하나 하나 포착해 가고 있었다.)2. 김일성과 박헌영에 대한 소련점령군의 태도 비교우선 김일성과 박헌영을 비교하는데 있어서 외적환경인 소련의 태도에 대해 분석해 보겠다.1) 소련의 대북한 정책김일성과 박헌영에 대한 소련점령군의 태도를 비교하기에 앞서 소련의 대북한 정책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이 무엇이었든 간에 소련군은 해방과 함께 북한에 진주함으로써 소련에 대한 우호적인 정부의 수립이라는 이해관계를 보다 확실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다. 자국의 이익을 확보하기 위한 방안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군사적 점령만큼 그것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수단은 없었던 것이다.북한 점령 이후 소련의 입장은 장차 수립될 한국의 통일정부가 친소적이거나 최소한 중립적이어야 한다는 것으로 정리되었다. 이것은 만일 통일된 한국정부가 그런 성격이 되지 못할 경우에는 북한지역만이라도 소련에 우호적인 정권을 세울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때문에 소련은 북한 점령 이후 기본적으로 미국과 합의가 없는 한에서도 38도선이 가진 장벽의 기능을 유지함으로써 미국과 남한의 영향으로부터 북한을 차단시키려 했다.그런데 분할 점령 이후 소련은 자신들의 정책을 펴가는 데서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소련은 점령 당시 한국이 “부르주아 민주주의혁명 단계에 있다”고 보았고, 친일파를 제외한 민족주의 계열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민족통일전선을 이루어 일제 잔재의 처리와 산업 복구 등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점차적으로 토지개혁과 같은 제반의 민주적 개혁을 추진해가야 할 것으로 방향을 세웠다.소련군은 좌파가 열세인 지역에서는 좌우 세력을 비등하게 만들었고, 좌파가 우세한 지역에서는 개입을 최소화했다. 그렇게 해서 북한 일부 지역에서는 좌우익 세력의 판도가 역전되었고, 소련의 필요에 맞게 정치질서가 재편되어갔던 것이다. 그延安)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싸웠던 조선의용군과 별다른 관련을 맺지 않았을 뿐 아니라, 조선에서 지하 운동을 벌였던 국내 공산주의자들과도 아무 연계가 없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 운동가들은 물론, 공산주의자들에게도 김일성은 낯선 인물이었다.)그 당시, 조선의 이름난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전부 서울에 모여 있었고 북한에 있는 독립 운동 지도자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기독교인 조만식이나 북한이 고향인 조선공산주의자 오기섭, 김용범, 정도에 불과했다. 그래서 소려군은 당연히 그들이 선정한 김일성을 무조건 지지했고, 김일성은 북한의 지도자로서 정치적 기반을 확립하고자 노력했던 것이다.)3) 박헌영에 대한 소련점령군의 태도당시 소련점령군 당국은 박헌영 등의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었다. 소련점령군 당국은 박헌영을 조선공산당의 중앙당이라기 보다는 하나의 파벌로서 인식하고 있었고, 박헌영의 활동이 많은 오류와 결함을 표출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당시 북한에서 정치 분야를 책임지고 있던 레베제프는 “서울의 중앙당과 관계없이 북한에 당조직을 만들되, 나중에 남북 공산당 조직이 합치는 한이 있어도 우선 북한에 따로 하나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결국 박헌영은 1945년 10월 23일자로 서북5도당대회에서의 조선공산당 북부조선분국의 설립에 대한 결정을 승인하고, 11월에 들어서는 ‘중앙의 지도와 연락의 중계기관으로 또는 보다 더 정치 행동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하여 북부조선 각도 책임자와 열성자는 중앙지도하에서 조선공산당 북부 조선분국을 조직하야 지도하도록 결정’ 하니, ‘북부조선 각도 당부에서는 북부조선분국의 지도와 지령을 준수’하도록 지시하고 있다.)4) 스탈린과의 면담: 북한지도자 결정을 위해 스탈린이 박헌영과 김일성 호출구체적으로 그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의 선택을 통해 소련이 이들을 어떻게 보고 있는지 분석해 봄으로써 근거를 보충해 보겠다.1946년 7월 이후에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을 모스크바로 불러 직접 헌영과 김일성의 노선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북로당과 남로당은 1948년 8월 ‘남북조선노동당 연합중앙위원회’가 창설될 때까지 우당적(友黨的) 관계였지 상하 관계는 아니었다. 긴밀한 형제 당으로서 서로 적극적으로 도와주고 지원하는 관계였다. 다만 우당으로서 연합회의를 한다든지 연석모임을 갖고 토론하거나 조언하는 것은 가능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북로당과 남로당 지도부 사이에는 감정상, 노선상 일치하지 않는 점이 많았던 것로 확인된다. 이들의 알력이 표면화되기 시작한 것은 양자의 합의사항을 박헌영과 이승엽이 지키지 않으면서부터였다. 이런 현상은 1946년 8월에 본격화된 좌익 3당 합당과 연이어 전개된 9월 총파업에서 단적으로 드러났다.1946년 7월 중순 김일성과 박헌영은 남쪽에서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남조선신민당 간의 합당을 통해 좌익정치세력을 강화하고, 이에 기초해서 10월에 총파업과 농민항쟁을 추진키시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박헌영은 좌파세력만을 중심으로 3당 합당을 추진하여 남로당을 결성하기 위해 10월로 예정되어 있던 총파업을 9월로 앞당겼던 것이다.1946년 9월 박헌영이 월북한 뒤에 이 같은 현상은 더 심하게 나타나 북로당 지도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터져나오기도 했다고 한다. 대남문제를 전적으로 책임지던 박헌영이 북로당에서 대남사업을 적극적으로 도와주지 않는다고 불평했던 것이다.박헌영이 소련파나 소군정 사람들과 자주 만나 북로당 지도부가 자기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주지 않는다고 불평하기도 했다. 이런 얘기를 소련군사령관, 허가이 등이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이런 일이 되풀이되자 북로당 지도부와 박헌영 사이에 좋은 감정이 생길 리가 없었다. 자연 호흡이 맞지 않는 상태가 노출됐던 것이다.)1) 조선혁명과 통일 수행방도에 대한 노선 차이박헌영은 “남조선혁명은 북의 일정한 원조를 받아 남로당이 주동이 되어 수행한다.”고 시종일관 주장했고 이러한 주장은 1948년 8월경까지 변함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북로당의 최용건, 강건 등 빨치산 파 1차 회동을 통해 이루어 졌고 남한을 찬탁?반탁의 소용돌이에 몰아놓고 급기야 분단으로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던 조선공산당의 찬탁 선회도 바로 김일성?박헌영의 2차 회동의 결과물이었다.)여기에서 가장 큰 차이는 그 당시 지위의 차이라 할 수 있는데, 한 사람은 조선공산당 중앙임에도 서울에 머물며 행동을 구속받아야 했고 다른 한 사람은 명목상 분국 지도자에 지나지 않지만, 소련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고 있는 실세였다는 점에서 양자의 갈등을 예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그러나 김일성-박헌영의 3차 회동은 소모적인 권력경쟁보다는 정치현안 실무논의 라는 성격이 강했다. 말하자면 김일성과 박헌영 둘 사이에 권력 배분을 논의하기 보다는 정세 대응 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이 같은 배경에는 소련군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최소한 북의 정권지도자로 확고해지고 있다는 김일성은 자신감이 깔려 있었고, 박헌영은 박헌영 대로 ‘최후의 승리자다.’라는 특유의 전략이 내면에 깊히 흐르고 있었다. 이 회동에서 두 사람이 차이를 보인 것은 최고인민대표회의의 구성에 관한 것이었는데, 대표를 지역 비례와 인구비례, 아니면 다른 방법 중 어떤 방식으로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말할 것도 없이 박헌영은 인구비례가 적절하다는 입장이었고 김일성파는 꺼려하는 식이었다.김일성-박헌영 4차 회담에서는 ‘좌우합작에 대한 입장정리’가 현안으로 대두되었는데, 여기에서 여운형에 대한 평가가 엇갈렸다. ‘좌우합작’에 대한 박헌영의 의견은 ‘야심가 여운형이 미군정을 등에 업고 새 국면을 주도해 나가려는 음모’라고 보았다. 그러나 김일성은 여운형이 ‘좌우합작’을 도와줘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후에 김일성과 박헌영은 밀담에서 자유로운 의견개진이 있었다. 정판사사건, 좌우합작, 미군정 탄압공세에 대한 대응방안 등이 주제였다. 미군정 탄압에 강력히 맞서겠다는 구상을 박헌영이 이때 처음으로 언급했다. 나중에 발표되는 “신전술”이 그것이었다. “신전술”에 대해서 김일성과 박헌영의 의견차이가 두드러졌다고 한다.)위의 내용에서 보는 것과 같이 된다.
김정일시대 북한권력엘리트에 대한 분석【 순 서 】Ⅰ. 들어가며Ⅱ.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징 및 성격1. 북한엘리트의 정의Ⅲ. 권력엘리트구조의 내적구성 및 권력엘리트들의 역할분석1. 권력엘리트구조의 내적 구성2. 권력엘리트들의 역할 분석3. 김정일 정권의 권력엘리트 특징Ⅳ. 권력엘리트의 권력구조의 이해; 관료제와 관료를 중심으로1. 구조적 특징으로서 전국가적 단일 관료제2. 북한관료제의 성격에 관한 검토3. 북한 관료행태에 대한 인식4. 북한 관료행태의 특성Ⅴ. 맺으며Ⅰ. 들어가며김일성 정권하의 북한정치는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김정일 후계체제가 교차하고 있었고, 실질적으로 김정일의 권력과 영향력이 확대되어갔던 점에 비추어 김정일 정권이 시작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일 체제는 김일성 체제가 만들어낸 산물이자 일부이기 때문에 수령중심적인 정치구조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기존 체제의 틀을 유지하면서 대내외적인 환경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김일성 정권에서 구축된 정치구조를 재설정 내지 변형할 가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대내적으로는 김일성의 카리스마 소멸과 경제난, 대외적으로는 사회주의권의 몰락에 따른 체제정당성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정치구조의 변화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정일체제의 사상과 정책, 그리고 권력구조의 핵심적인 지배엘리트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북한사회에 대한 객관적인 조망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 일이다.이 글에서는 김정일 시대의 권력엘리트를 분석하는데 있어서 구조적인 문제에 중점을 두고 그 중에서도 특히 북한 관료들의 특징 및 성격, 관료들의 행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다시 말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첫째, 북한 권력엘리트의 특징과 성격을 이론적으로 접근해보고 김정일 정권의 권력엘리트에 대해 알아볼 것이다. 둘째, 권력엘리트 중에서 관료들의 행태를 파악하고 북한관료제의 성격에 관하여 분석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관료제와 관련하여 변화가능성과 북한 지배 권력엘리트의 변화 중에서 전문기술관료들의 등장과 관련한 부분을 다루고자 한다. 기관에 비해 상대적으로 많이 분포되어 있다는 것은 지배엘리트구조 내에서도 권력의 중핵기관으로 갈수록 김정일과의 혈연관계가 주요한 충원요인이 됨을 보여준다.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권력승계를 마무리한 1998년도의 혈연관계 비율은 정치국과 비서국의 경우 각각 23.5%, 25.0%로 여전히 높게 나타났다. 그러나 정치국과 비서국을 제외한 기관들에서는 각각 0%, 0%, 10.0%, 0%, 27.3%로 나타났고, 혈연관계 비율 누계는 94년도에 비해 줄어든 7.7%로 나타났다.대개 북한 지배엘리트의 서열은 1~12위 권 당 정치국 상무위원 및 정위원, 13~20위권의 당정치국 후보위원, 22~27위권의 정치국 위원이 아닌 당 비서국 비서, 28~32위권의 정무원 부총리, 그 이하는 당과 정무원의 부장 및 인민군 장령, 사회단체장 등의 순으로 매겨져 왔다. 혈 연 관 계기 관 년 도19941998누 계정 치 국4/18 26.3%4/7 23.5%8/35 22.9%비 서 국3/10 30.0%2/8 25.0%5/18 23.8%각 부서부장2/17 11.8%0/14 0%2/31 6.5%중앙군사위원회0/11 0%0/13 0%0/24 0%국방위원회0/6 0%1/9 11/1%1/15 6.7%내각총리, 부총리2/10 20.0%0/3 0%2/13 21.3%최고인민위원회1/4 25.0%3/11 27.3%4/15 26.7%누 계12/76 15.8%10/75 13.3%22/151 14.6%* 1994년과 1998년이라는 양 시점에서 공식적 지위방법에 따라 선정된 각각 80명과 79명의 북한 지배엘리트들의 사회배경 분석을 위해 『김정일?북한 대백과』,『북한총람』등에 산재한 인물자료를 대조하는 방법을 취함그러므로 정치국과 비서국 내에서 혈연집단이 차지하는 비율이 특히 높다는 것은 북한 정치권력의 중핵집단으로 올라갈수록, 최고지도자와의 혈연관계를 정치적 공동운명관계로 맺고 있는 인물들이 대거 충원되어 왔다는 점을 보여준다.혁명 경험의 측면에서 볼 때 항일 빨치산을 중심으로 한 혁명경험자들의 사망과%2/1414.3%3/1421.4%중앙군사위원회0/110%0/110%11/11100%0/140%1/147.1%13/1492.9%국방위원회1/714.3%1/714.3%5/714.3%2/1020.0%1/1010%7/1070%내각총리, 부총리10/10100%0/100%0/100%3/3100%0/30%0/30%최고인민위원회3/475.0%1/425.0%0/40%8/1172.7%2/1118.2%1/119.1%누 계39/8048.8%20/8025.0%21/8026.3%37/7946.8%17/7921.5%25/7931.6%2. 권력엘리트들의 역할 분석구 소련이나 동구사회주의체제가 붕괴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 정치체제와 경제개방정책을 동시에 절묘하게 구사함으로서 일단의 성공적인 모델로 주목 받고 있는 중국을 통한 북한의 변화모색은 김정일의 중국방문을 통해서도 이미 확인되고 있는 바이다. 사실 중국의 변화는 실사구시를 추구하고 개혁성향이 강한 지도자들의 등장과 이에 따른 권력엘리트들의 인식전환에 의해 가능했다. 북한 또한 외형적으로는 중국에서처럼 김정일 체제구축을 통해 구세대에서 신진세대로의 전환기과정을 일정부분 거쳤다고 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김정일 정권의 정책집행과정은 최고결정권자의 인식전환의 바탕에 의한 정책성향과 정책결정구조과정이 중국과 같은 시각으로 반영이 되고 있는가하는 것에는 회의적이다. 또 권력엘리트들은 정책결정에서의 역할이 어느 정도의 힘으로 추동 되어 있느냐 하는 문제도 있다.지금껏 일반적인 관점에 의하면 북한은 중국처럼 오랜 혁명동지들로 이루어진 집단지도체제의 경쟁적인 노선이 발달할 수 있는 전통적인 토양이 아니라 숙청을 통하여 파벌주의를 배격하고 유일지배체제를 확립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권력이양은 정상적인 최고 권력자의 승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다른 정책노선이나 갈등집단이 전무한 북한에서 정책은 오로지 최상으로부터의 지시에 의한 무조건적인 정책결정 수행만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3. 김정일 정권의 권력엘리트 특징앞의 내용치되어 있으며, 이 관료는 생사수단, 경제정책, 간부정책, 국가강제력, 의사소통 및 조직기구 등 모든 중요한 부분을 관리한다. 전국가적 관료체제는 크게 보아 당-정-군-대중단체라고 하는 네 갈래의 관료계선의 통합 상태로 이루어져 있다.) 당-정-군-대중단체의 각 관료계선은 수령을 정점으로 하여 상층부에서 하나로 융합해 있으나, 하부로 갈수록 그 기능적 분업 상태에 따라 세분화되어 있다. 그 전체는 하나의 피라미드적 위계 구조를 이루고 있다.)2. 북한관료제의 성격에 관한 검토북한의 관료제는 공산국가의 일반적인 경우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와 레닌의 관료제관을 기초로 형성되었다. 북한관료제는 마르크스와 레닌의 주장처럼 궁극적으로는 국가와 함께 소멸될 것으로 상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 관료제의 상층부는 특권층으로 행세하고 있으며, 더구나 북한 인민들 위에 군림하는 새로운 계급의 성격을 띠고 있어 소련의 “노멘클라투라(Nomenklatura)”)와 다를 바 없는 것으로 보인다.북한 사회는 그 자체가 하나의 거대한 복합관료제(a large complex Bureaucracy)를 이루고 있다. 이것은 소련의 당-국가체계(Party-State System)와 당-국가관료제(Party-State Bureaucracy)를 도입한 결과이다. 그런데 북한관료제는 소련의 관료제와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북한관료제의 특수성은 수령의 유일적 영도체제, 개인숭배와 우상화 정책, 주체사상 및 전통 문화적 요소 때문에 나타난 현상이다.여기에서는 기존의 관료제 이론을 원용하여 북한관료제의 정확한 성격규명을 하고자 한다. 북한 관료제는 마르크스-레닌의 관료제 이론에 뿌리를 두고 있으나 관료제의 역할과 존속기간에 있어서 이들의 주장과는 본질적인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소련의 당-국가관료제를 도입했으나 실제로 소련관료제와 상당한 괴리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북한 관료제는 베버의 이론에 의해 설명이 가능하다.베버의 근대관료제의 핵심내용은 합법적 지배와 몰인격성(Imper 김일성체제의 권위로 주민을 지배하고 있는데, 권위주의, 형식주의, 무사안일주의와 기회주의 등 상하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단절과 괴리 등의 특성이 나타나고 있으며,) 체제적 속성으로서의 경직성과 개인우상화 때문에 관료사회 내부에서 김일성?김정일에 대한 충성심 경쟁을 둘러싼 치열한 암투의 계속과 함께 권위주의적인 절대지배체제의 초석이 되고 있다.3) 관료제의 성격결정변수의 변화가능성앞서 관료제의 성격이나 특징을 비추어 몇 가지 성격결정변수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북한의 권력구조는 수령중심체제이며 이것은 김정일이 권력을 승계받은 후에도 지속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김정일이 절대 지도자로서의 권위를 획득하고 권력의 공고화를 꾀하기 위해서는 공식적인 직위에 취임 하는 것 외에도 자기 부친과 구별되는 독자적인 대중적 카리스마 형성과 경제난 타개를 위한 방안이 있어야 한다.앞서 북한의 관료적 성격을 규정하는데 있어서 카리스마적 요인을 언급했다.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자신의 카리스마를 영속시키기 위해서 세습의 제도화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선임지도자의 카리스마가 크면 클수록 그 후계자의 카리스마 계승이 어려워지며 추종세력은 후임자가 선임자의 카리스마를 능가하지 못할 때 회의를 품고 새로운 지도자를 찾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아무리 김정일이 김일성을 선전한다 해도 거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으며 김정일의 독자적인 카리스마 형성이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 설령 김정일이 독자적인 대중적 카리스마를 형성했다 하더라도 그의 카리스마는 김일성을 능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김일성의 카리스마는) 항일유격대 활동과 정권수립 이후에 계속적인 권력투쟁과 치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권력투쟁과 치적에 대한 체계적이고 지속적인 선전과 개인숭배정책에 의해 형성되었다. 그러나 김정일은 자기 부친의 경우처럼 절대적 카리스마 형성이 어려울 것이므로 카리스마적 지배형식을 취하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며, 불가피하게 제도나 법에 의존하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전망에서 본다면 통치스타일의 변화는 최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