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 헤겔, 동양철학, 혹은 동양의 종교라는 것을 하나로 아울러서 생각하고자 할 때, 다양한 스펙트럼을 한 시각으로만 보려는 데에서 오는 획일화의 오류라는 것은 필연적으로 발생한다. 물론 하나의 시각으로 통시적인 입장에서 유구한 세월을 통해 이루어진 사상을 고찰해보는 것은 의미가 있는 일이다. 하지만 어떤 것이 절대적으로 옳다 라고 말을 하는 순간 그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 것이 되어버린다. 이는 비단 노장의 사상에서 뿐 아니라 서양철학에서 칼 융이 서양의 인과론적 사고 (causality)를 비판하며 동시성의 패러다임을 주창한데에서도 그러한 것을 볼 수 있다.동양철학 혹은 동양의 사상이라 하는 것은 그것이 인도의 것이든 중국의 것이든 공통적으로 극단을 배제하고 균형을 바탕으로 진리에 접근하는 것을 화두로 삼고 있다. 균형이라는 것은 대표적으로 음양의 조화를 통해 구체화되며 만물을 그러한 조화의 원리에 입각해서 고찰하려는 것이 동양, 이 부분에 있어서는 특히나 동아시아 문화권의 저변에 깔려있는 사상이라 할 수 있다. 그러한 균형은 사물을 인과적으로 보지 않고 시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어떤 것, 즉 동시성에 의한 것으로 드러난다. 불교의 카르마나 노장사상에서의 ‘하나’ 라는 개념에서 대표적으로 그것을 볼 수 있다. 자기의 비움, 無 라는 것 또한 동양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를 잊고(無我) 삼매의 경지에 빠져들어 참진리를 구하고자 하는 것은 아마 앞서 언급한 균형과 동시성을 구하고자 하는 것일 것이며 그것을 통해 만물의 개체에 내재해 있는 통일된 하나의 것을 구하고 자신을 잊음으로써 아집에서 벗어난 참다운 자유를 얻으려고 하는 것일 것이다.그러나 인용문에서의 헤겔이 바라보는 동양철학을 보면 동양적 사유와 동양 사상에 대한 견해에 상당한 오류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우선 헤겔은 “오직 하나의 실체 그 자체만이 참다운 것이라는데...”라는 구절에서 큰 오류를 범하고 있다. 중국문화의 원형적 사유를 노장사상을 통해 살펴볼 때 실체와 참에 대한 헤겔의 생각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수직적 세계(본질)와 수평적 세계(현상)가 만나는 점에 섰을 때 올바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지점을 無爲自然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절대 자유는 두 축이 만나는 그 지점에서 얻어질 수 있다.)“일체화되어 바로 그 속에서 주체로서의 존재임을 중단하고 무의식의 상태로 빠져들 때라야만 진정한 가치를 지닐 수 있다.” 이 구절도 진정한 가치가 현상계와 본질계의 양행이 아닌 본질계에만 있다고 말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기는 하지만 대체로, 주관이 사라지는 삼매의 경지인 無我를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의한다. 자기와 외물의 사이에서 갈등과 분쟁, 즉 小我와 執, 불교에서의 카르마, 그리고 六識을 통한 경계가 사라지는 말라식의 상태에 들어갈 때 실체 없는 것에 집착하는 욕망이 사라지고 그것을 통해 만물의 근원인 본질로 化 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헤겔은 小我의 부정을 통해 大我로 가는 단계까지는 언급하지만 庸을 통해 평범함으로 다시 환원되어 참자유가 일상으로 내려오며 兩行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언급하지 않고 있어서 동양의 근원적 사유에 대한 한계를 보인다.“유한적인 것의 부정이 행해지긴 하지만 이것도 개인이 실체적인 것과의 통일을 이룰 때에만 자유에 도달할 수 있을 뿐이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모든 특수적인 것은 짓밟혀버리고 무절제한 극단성......” 문맥상 실체적인 것과의 통일이 아니라 본질적인 것과의 통일이라고 생각하고 논의를 진행하면, 이 구절은 개인이 본질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한다면 자유를 얻을 수 없고 또한 그러한 개인은 의미가 없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개인이 본질과의 합일을 이루어내는 과정을 무절제한 극단이라고 평가했으며 만물의 특수성, 즉 지뢰와 인뢰가 그 과정에 있어서 무시되어야 하는 것이고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평가했다고 해석된다. 우선 헤겔이 본질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하면 자유가 없다 라고 한 것은 통일의 의미를 일차원인에 집착해서 어떤 것에 스스로를 맞추는 것이라고 보았기 논의하고 있는 통일이라는 것이 인식이 배제되고 주관이 배제된 상태라는 것을 말하고 있다. “천하가 새장이 되면 쏠 사람도 맞을 새도 없어진다.”라는 말에서도 이러한 통일의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본질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한 개인은 의미가 없다는 헤겔의 오해는 인뢰와 지뢰에 이미 천뢰의 성질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에서 부정된다. 진리와의 합일도 중요한 문제이지만 그에 못지않게 개별적인 것, 즉 개별 상의 특수성도 동등하게 중요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동양사상에서는 이미 음양오행을 통해 그것을 암시하며 또한 서양철학에서도 주인과 노예의 변증법을 통해 개별상과 근원존재의 상호보완성 혹은 동시성을 드러내고 있다. 河圖에서 음양이 마주하며 완벽한 균형을 이루고 그로써 완벽한 정적, 침묵을 표상하고 있는 것은 동양에서 혹은 중국의 근원적 사유에서 통일이라는 명제가 어떻게 두 극단을 조화시키고 양립시키는가라는 문제의 해결을 보여주는 동시에 완벽한 대동의 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또한 본질과의 합일을 이루지 못한 특수한 개인, 즉 일반적 현상계에 대해서는 洛書를 통해 헤겔이 오해한, 통일을 이룰 때 특수적인 것이 짓밟힌다는 것의 오류를 설명할 수 있다. 낙서에는 하도가 잠 해있다 라는 말로 설명할 수 있는데 이는 오행(현상계)을 드러내는 낙서에는 음양(본질계)을 드러내는 하도의 원리가 담겨져 있기에 그러하다. 다시 말하면 본질계로 들어가는 통일을 추구함에 있어서 현상계인 개별상이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현상계에 본질계의 원리가 숨겨져서 작동하고 있고 따라서 본질을 추구함에 있어서 그 원리로 작동하는 현상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유한적인 것의 부정이 행해지긴...”에서는 뒤에 연결되는 말 때문에 납득할 수 없게 되긴 하지만 부정의 개념을 희미하게나마 드러내고 있다. 동양적인 부정의 의미는 도덕경 3장에 나오는 無知를 예로 들어 살펴볼 수 있다. 이때의 無 는 부정을 나타낼 수도, 부정의 부정을 나타낼 수도 있다. 따라서 無라는 것은 존재의 근원자체를 다. 앞서 언급한 河圖에서 볼 수 있듯이 글로 표현하기 전에 이미 상으로 그 본질을 이야기 하고 있는 중국인들의 원형적 사유체계라는 것은 무절제와 극단이라는 것과는 정반대의 개념을 보이고 있다. 도덕경 10장에서도 하나라는 것으로 포용과 조화를 충분히 강조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載營魄抱一)“유한적인 것이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실체 속에 침잠하여야만 가능할 뿐, 실체와 분리된 채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은 내용이 결핍된 메마른 상태를 면치 못할 것이다.” 앞서 진행한 논의(천뢰, 인뢰, 지뢰로 대표되는)를 통해 근원과 본질이 현상계의 만물상 속에 들어서 작동하고 있음을 보인바 있다. 본질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유한적인 것, 즉 개별상은 존재할 수 없다. 장자가 제물론의 첫 번째 고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바람이 불면 각기 다른 소리가 나지만 그 소리의 근원은 결국 하나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동양의 철학과 사유체계를 나름대로 정리한 헤겔의 생각에는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특히 최초의 오리엔탈리즘 사례라고 하는 그의 ‘동양철학’에서는 문화적 왜곡에 대한 비판적인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용구를 하나씩 짚어가며 논의를 전개했는데 인용문을 새롭게 써보자면,“동양종교와 그들의 근본적 사상의 중심관계는 만물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는 것이 참진리라는 데에 있다. 즉자대자적인 천상의 도와 대립해 있는 개인은 사실 아무도 없고 또 존재할 수도 없다. 개인 안에는 이미 근본의 도가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개인이 도와 완전히 합일하여 도 자체가 되려면 인식론적인 객관과 주관의 분리가 멈추어진 상태인 말라식의 상태로 빠져들 때만 그렇게 될 수 있다. 이것이 동양적 종교에서의 기본적인 상태이며 관계이다.... 유한적인 것의 부정이 행해지고 결국 그 부정을 통해 없앨래야 없앨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드러내며 그 존재와의 통일을 이룰 때 자유에 도달할 수 있다.... 그리하여 여기서는 모든 특수한 개별상들과 그 개별상을 아우르는 균형과 조화- 즉 동양적인 있다.“신전은 신의 모습을 숨겨 간직하고 있으며, 그 숨겨진 간직 속에서 열려진 주람을 통해 그것을 성스러운 영역 가운데로 드러내고 있다.” 이 구절은 숨김을 통해 진실을 드러내고 또한 숨기는 것은 드러내는 것으로 숨기며 그러한 관계 속에서 진정한 예술의 의미가 나온다는 의미를 가진다. 이것은 주역의 상핵 삼획괘?와 하핵 삼획괘?를 통해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초효를 버림으로써 坎 이 드러나며 상효를 버림으로써 震 이 나타난다. -이 둘은 하나는 위에, 다른 하나는 아래에 있는 두 개의 양효-로 둘러 쌓여있기 때문에 숨겨진 핵괘이다. 여기에서 예술작품이 긴장과 운율을 지니고 있다는 상징을 볼 수 있다. 아래의 감(심연)과 위의 진(분기)에 의해 생겨나는 내적 긴장은 예술 작품의 내적구조, 정신적 요소와 영혼의 요소가 결합하여 생기는 구조를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신의 이러한 현존은 그 자체가 성스러운 영역의 확장이자 동시에 경계지움이다.” 신의 존재 자체가 성스러운 영역의 확장이면서 그 영역의 경계를 긋는 것이라는 이 말은 숨김 속에 드러냄이 있고 드러냄 속에 숨김이 있다는 말만큼이나 의미가 모호한 표현이다. 이 말을 살펴보기 위해 바로 뒤에 나오는 구절인 “또한 신전은 거기 있음으로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 문장에서는 신전의 존재, 즉 신이 머무는 장소와 신 자체의 현존으로 인해 인간 본질에 관련한 모든 것이 하나로 통일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는 주재자인 신, 즉, 본질 자체인 신이 속세에 내려올 수 있는 바탕이 마련된 것으로 인해 그 신의 본질을 가지고 있는 인간의 원류와 관련한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합되어 정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의 통합이라는 것은 바로 동양적 의미의 道 와 상통한다. 인간의 원류와 관련된 것의 통합, 즉 개별상의 본질을 드러내며 개체의 상이 되기도 하는 탄생과 죽음, 저주와 축복 등의 갈등구조를 가지고 있고 양극에 위치하는 것은 음과 양으로 정리될 수 있다. 그러한 음과 양은 본질의 체계에서는 떨어져서 있다.
唐詩 感想이백, 백거이, 왕유, 두보0010241 중어중문학과 심규현1. 序문학 작품을 감상하는 데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고등학교 때 배우는 것처럼 작가에 대해 조사하고 작품의 창작 시기에 대해 조사하고, 쓰인 운이 어떠니 대구가 어떠니 하며 접근하는 것도 중요한 작업일 것이다. 그러나 이번 보고서를 계기로 작품 감상의 의미를 새롭게 가져가 보기로 했다. 작품배경이나 작가의 소개 등의 구체적인 것은 근세문학사나, 고대문학사 등의 과목에서 충분히 다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이미 고대문학사를 들었고 근세문학사도 현재 듣고 있어서 그런 수업에서의 보고서나 발표와는 다른 감상을 시도하고 싶었다. 두 달이라는 여유 있는 제출 기한은 또한 교수님께서 여유 있는 작품 감상을 의도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각 작품별로 텍스트와의 개인적인 접근을 시도해보았다. 작품의 감상을 표현하는 데 적합하다고 생각한다면 때로는 논설문의 형식도 때로는 수필의 형식도 사용했다. 이백의 경우에는 그의 作詩순간을 느끼고자 취중 감상을 하기도 했다.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는 것이 더 안 좋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노력하는 젊음은 언제나 아름답다’ 라는 말을 가슴에 담고 용기를 내본다.2. 이백 月下獨酌#1詩仙이라 불리던 이백. 그는 술과 달을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한다. 그의 술과 달에 대한 편애는 이 시에서 여실히 나타나고 있다. 홀로 술을 마시자니 쓸쓸해져서 그는 달에게 술을 권하고 그림자와 더불어 춤을 추고 있다. 그러나 깨어있을 때 함께 즐기다가 취해서는 각기 흩어진다는 표현에서 호탕함 속에 감춰져있는 깊은 고독을 느낄 수 있다. 우리의 영원한 우정, 아득한 은하수에서 다시 만나세 라는 표현은 또 얼마나 낭만적인가. 깊은 밤 홀로 갖는 술자리에서 자연을 벗 삼아 한잔하고 또 우주를 무대 삼아 우정을 나누는 모습은 광활한 자연과 우주 앞에서 경외만을 느끼는 凡人의 모습을 넘어 자연과의 친교와 소통을 이루는 이백의 통 큰 기개를 느낄 수 있게 한다.#2대학 생삼아 月下獨酌 하기는 어렵겠지만 그의 시 한 수에서 느낄 수 있는 풍류정신을 배우는 것도 생활하면서 한번쯤 배워볼 만한 것일 테다.#3예전에 어느 교수님께서 그러셨다. 이백의 시는 술을 한 잔 하고 감상해야 제 맛이 난다고. 그래서 제 맛을 보기 위해 한강에 나가 벗과 함께 술을 한 잔 나누고 月下獨酌을 낭송했다. 중국어 실력이 부족한 탓에 친구 앞에서 멋들어지게 성조의 운을 담아가며 낭송하지는 못했지만 우리 옛 선조들이 했듯이, 우리 식 발음으로 읽는 것도, 또 조금은 느끼한 목소리로 해석본을 낭송해보는 것도 강물과 마주하며 술 한 잔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운치를 가져다주었다. 마치 그 옛날 사대부들의 신선놀음을 흉내내는 양, 친구와 나는 시 한 수씩을 주고받았다. 나는 잘 알지 못하는 릴케의 시를 던지는 친구,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다며 가지고 있던 이백의 시선집을 꺼내어 將進酒를 읊으며 술이나 한잔 더하라는 나. 술 한 잔 받아 마시더니 이내 뜬금없이 짧아서 외우고 있다며 정현종 선생님의 ‘섬’을 던지며 사람들 사이에 있는 섬에 가봤냐는 친구. 노래 한 소절 하면 그 섬에 데려다 주겠다며 친구에게 김광석의 ‘흐린 가을하늘에 편지를 써’ 라는 노래를 청해 듣는 나. 그렇게 청춘은 흐르는 강물 앞에서, 雲漢 아래서 당당하게 兩酌有相親 하며 소중한 시간으로 또 한 겹 쌓아올려졌다. 먼 훗날 이백의 시를 마주하면 아마도 언제가 되었든지 어디가 되었든지 나는 그 순간과 이백을 함께 기억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문학의 힘 아니겠는가. 개인적인 차원의 경험을 환기시켜주는 모티프로써의 문학.3. 왕유 送朞毋潛落第還鄕 - 기무잠의 귀향에 부쳐서산수의 풍경을 운치 있게 노래한 것으로 유명한 왕유. 왕유의 여러 시들을 읽으면서 송대의 소식이 그를 두고 畵中有詩 詩中有畵 라고 칭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의 자연시는 마치 동양의 산수화를 보는 듯, 또는 자연의 풍경을 빛으로 표현한 서양의 인상파적 유화 한 폭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준다. 참으로 아름다운 시가 많았지만 그 세기의 우리 사회는 여전히 과거제가 존재한다. 사법고시, 행정고시, 요즘에는 교사가 되기도 어려워서 임용고시라는 말도 등장했고, 여기저기 고시라는 말이 붙은 시험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다. 예전 과거시험을 준비하는 만큼 혹은 그보다 오랫동안 준비를 해서 시험을 본다. 혹자는 과거라는 제도, 고시라는 제도가 계급의 이동이 원천적으로 봉쇄되어가고 있는 요즘 같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유일하게 계급을 높여갈 수 있는 제도이며 철저하게 자신의 능력과 노력여하에 따라서 승부가 결정 나는 공정한 게임이라고 예찬하고 있기도 하다. 드는 시간이 너무 많고 준비하는 사람 수에 비해서 뽑는 인원이 턱없이 부족하니 되는 사람보다는 안 되는 사람이 너무 많아 젊은이들이 한참 일하고 즐길 나이를 뻔한 시험공부에 모두 바쳐야한다는 부작용을 차치하고 생각해보면, 고시예찬론자들의 말도 일리가 있다. 출신 지역, 출신 학교, 집안의 배경, 사람의 외모 등 우리 사회에서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편견의 위험을 잔뜩 가지고 있는 그런 기준이 배제된 오로지 시험 점수라는 한가지의 기준만을 가지고 선발을 하는 것이니 선발에 관한 어떤 이견도 있기 힘들다.#3하지만 고시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본다면 부정적인 대답이 많을 것이다. 어려서부터 판검사가 꿈이었다거나, 정부의 관료로서 나라를 책임지고 싶다는 대답, 글쎄 얼마나 나올까. 아마도 고시를 수단으로 삼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리고 대다수의 경우는 그동안 해왔던 것이 공부밖에 없기 때문에 다른 종목으로 옮기는 것이 두렵기 때문에 고시라는 문을 두드린 것이리라. 마치 요즘 대학원을 일종의 도피처 삼는 사람이 많아졌듯이 말이다. 청년실업이 많은 이유에 대해서 김형태라는 멋진 음악가는 이런 말을 했다. “20대가 왜 그렇게 취직하기가 어려운 줄 아십니까? 사람들은 불경기라서 그렇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입니다. 20대들이 정확히 하고 싶은 일이 없고, 확실하게 할 줄 아는 것이 없고, 겁은 많 속으로 침잠해 가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나 스스로에게 그리고 고시준비를 하는 다른 친구들에게 가지고 있는 생각은, 책상머리에 붙어 앉아 데이트도 마다하고 술도 마다하고 쇼핑도 마다하면서까지 책을 보는 그 절대적인 공부시간의 양과 집중도는 누군가가 함부로 비웃기에는 그들에게는 너무도 치열한 것이라는 것이다. 나태하게 공부한답시고 몰려다니면서 게임이나 하고 그러는 수험생이라면 욕을 먹어도 할 말이 없을 테지만 자신의 꿈을 위해, 혹은 현실적인 이유에서 최선의 선택을 한 사람들이 스스로의 목적을 위해서 젊음의 한복판을 치열하게 책과 싸우며 보내는 모습은 도전이라는 면에서 볼 때 아름답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기무잠이 어쩔 수 없이 어디에선가는 나오겠지만 우리는 기무잠이 되지 말자고 서로 격려해가면서 경쟁하는 모습은 누군가 함부로 말할 수는 없는 가치 있는 모습일 것이다.4. 村夜 - 백거이#1시골마을의 밤풍경. 옛날 중국의 시골마을의 밤 풍경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이렇게 고인들의 작품 속에서 간접적으로만 가능할 듯싶다. 시간을 내서 외진 산 속으로 들어가 비슷한 여운을 느끼고 싶었지만 학교를 다니는 이상 내게는 두세 시간 떨어진 교외로 나간다는 것조차 버거운 일이었다. 대신 나는 내가 있는 자리에서의 밤 풍경을 담기로 했다. 도시에서의 밤풍경에 대한 시 한 수로 옛 사람과 마주하기. 내게는 그것이 시간을 초월해서 그들과 마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세상에게 혹은 스스로에게유리된 소외에게 - 도시의 밤풍경심윤규현소슬한 바람 도시를 감싸오니한 줄기 빛처럼 꿈들은 스치우고맨발로 갈대밭 뛰며 흘리던 피,모두 옛 말이외다고흐의 고귀한 노랑이 아닌소외의 노랑을 담는 마음은마천루를 지나는 강물의 외로움일 것이요,운명의 순례를 떠나 아직 긴 여정의 끝을 보지 못한벌거벗은 방랑자의거칠음일 것이다.#2가을이다. 새벽 남산에 올라가보니 백거이의 시에서처럼 달밤 서리 맞은 풀이 파르스름했고 가을벌레들도 울고 있다. 비단 남산뿐만 아니라 반지하 자끝을 보지 못했다는 것은 아직까지 요란하게 박동하는 삶의 증거가 아니던가. 소외의 한가운데에서 나는 희망을 본다. 거칠음 속에서 나는 방랑자의, 까뮈가 말한 부조리를 안고 사는 이방인의 희망을 본다. 장자는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암시를 준다. 나는 그 암시에 취해서, 이방인의 희망에 취해서 오늘 하루도 즐겨야하는 것이다. Carpe Diem.#2.1친구와 함께 사진기를 둘러메고 오랜만에 신촌을 벗어나 양재천으로 향했다. 도곡동의 높디높은 빌딩은 다른 것과 유리되어서 스스로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연출된 사진을 찍기 위해 억지로 징검다리 위에 앉혀놓은 친구의 뒷모습이 쓸쓸해보였다. 거대한 마천루와 오색의 인공조명 앞에서 냇가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친구의 뒷모습도 그저 묻혀버렸다. 사람만이 희망이라는 박노해 시인의 말이 듣고 싶었다. 가을은 가을인가보다.5. 두보#1 두보의 삶)자 자미(子美). 호 소릉(少陵). 중국 최고의 시인으로서 시성(詩聖)이라 불렸으며, 또 이백(李白)과 병칭하여 이두(李杜)라고 일컫는다. 본적은 후베이성[湖北省]의 샹양[襄陽]이지만, 허난성[河南省]의 궁현[鞏縣]에서 태어났다. 먼 조상은 진대(晉代)의 위인 두예(杜預)이고, 조부는 초당기(初唐期)의 시인 두심언(杜審言)이다. 소년시절부터 시를 잘 지었으나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하였고, 각지를 방랑하여 이백·고적(高適) 등과 알게 되었으며, 후에 장안(長安)으로 나왔으나 여전히 불우하였다.44세에 안녹산(安祿山)의 난이 일어나 적군에게 포로가 되어 장안에 연금된 지 1년 만에 탈출, 새로 즉위한 황제 숙종(肅宗)의 행재소(行在所)에 달려갔으므로, 그 공에 의하여 좌습유(左拾遺)의 관직에 오르게 되었다. 관군이 장안을 회복하자, 돌아와 조정에 출사(出仕)하였으나 1년 만에 화저우[華州]의 지방관으로 좌천되었으며, 그것도 1년 만에 기내(畿內) 일대의 대기근을 만나 48세에 관직을 버리고 식량을 구하려고 처자와 함께 간쑤성[甘肅省]의 친저우[秦州] ·퉁구[同谷]를린다.
元代 雜劇의 槪觀元代 雜劇의 槪觀1. 雜劇의 변천宋初北宋金元明淸가무희강창희골계희雜劇院本雜劇雜劇(침체기)................短劇雅部戱花部戱(지방희)→京劇南宋南戱전기(傳寄)위량보가 崑腔)과 南戱를 정리戱文(희문)원 잡극은 언제 생겨났는가?☞ 중국에 태곳적부터 민간에 유행하던 전통적인 연극은 노래와 춤 및 간단한 대화를 사용하여 서너 명의 배우들이 간단한 고사를 연출하는 놀이형식의 가무희(歌舞戱)와 가무 없이 해학과 풍자를 위주로 하는 골계희(滑稽戱)와 노래와 고사를 위주로 하고 반주 악기와 표정 연출로 이루어진 강창희가 중심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북송(北宋) 말(1126) 남송(南宋)초의 짧은 동안에 중국 남방의 온주(溫州)를 중심으로 연극의 규모가 커진 희문(戱文)이 생겨났다. 중국희곡학자들은 이전의 전통적인 놀이 형식의 가무희를 중심으로 하는 연극을 소희(小戱), 그리고 희문에서 시작되는 규모가 커진 이후의 연극을 대희(大戱)라 부른다. 만주족(滿洲族)인 금나라가 중국 북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발전시킨 원본(院本)은 당대의 참군희 및 기타 가무 잡희와 북송의 잡극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으로 송대 잡극이 원대 잡극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원대의 잡극은 노래와 춤으로 고사를 연출하는 형식의 것인데, 그 중의 노래를 한 곡 따로 떼어놓으면 그 가사는 바로 새로운 시가 되고 이 시를 보통 산곡(散曲)이라고 부르고 잡극과 산곡을 합쳐서 곡(曲)이라 부른다. 곡은 원대를 대표하는 장르가 되었다. 명대에는 소박하고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희문(戱文)이 원 잡극의 세련된 형식미에 자극을 받아 한 차원 세련된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성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명대의 연극을 대표하는 전기(傳寄)라 불린다. 명대에 잡극은 명나라 왕족인 주권(朱權), 주유돈(朱有燉)이 창작하면서 비현실적이고, 공허하며 봉건예교를 선전하는 귀족의 놀이도구로 전락하여 쇠퇴하다가 명말에 전기의 영향을 받아 전체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만 뽑아서 공연하는 단극(短劇)의 형태로 바뀐다. 이후 청대 초기는 전기가 귀족적인 연극으로 발전하여 형식화 된 아부희가 생기는데 서민들은 귀족적인 아부희에 반하여 각 지방에서 제각기 자기 지방의 토조(土調)를 바탕으로 한 지방희를 발전시킨다. 이를 花部戱라고도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극종이 경극인 것이다.元曲 =散曲 + 雜劇散曲: 詞와 마찬가지로 민간가요로부터 발전한 악부계통의 가사로 宋詞에 이어 발달 했던 원대의 새로운 시가.雜劇: 원대에 비로소 발달했던 중국의 古劇(창과 대사가 있는 뮤지컬의 형태)唐대의 골계희를 계승한 것.내용은 우스운 내용에 풍자의 내용을 섞은 오락적인 놀이였다.2. 元 雜劇의 발생배경(흥성이유)①도시경제 및 서민 사회의 발달 : 희곡은 직접적으로 군중의 수요에 기초하였다. 이들의 오락문화를 뒷받침하는 대도(大道), 평양(平陽)등의 도시의 발전으로 원 잡극의 연출을 위한 물질적 조건과 관중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도시경제의 발전으로 경제적으로 여유로워진 서민들이 문화적인 욕구 또한 증가하였다.②과거제도의 폐지와 한족의 멸시 : 몽고족의 지배로 유학이 침체하였고, 과거제도를 폐지하여 정부 중앙부처 요직으로 한족이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였다. 몽고 정부에 협력하기 않은 한족은 상당수가 희곡 작품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잡극은 이러한 한족사대부들의 불만을 표출하는 역할을 하였다.③희곡문학 자체의 발전(문학내적 요인) : 이미 전통극은 가무희 설창예술 골계희 등의 예술성취를 받아들여 구조나 표현에 있어서 모두 성수한 단계에 다다를 수 있었다. 특히 강창 양식 중 제궁조(諸宮調))의 악곡의 조직, 음악과 배우의 대화가 결합된 형식은 원잡극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송 話本소설은 희곡의 발전에 이야기 제재와 인물형상을 제공해주었다.④북방민족의 악곡의 전파 : 각 민족간의 문화적인 교류로 북방 민족의 악곡이 전파되어 원 잡극에 영향을 주었다.3. 元 雜劇의 특징원 잡극은 민간에서 발전한 연극이기 때문에 그 내용은 서민들의 생활을 반영하고 속된 표현이나 속어도 많이 쓰였다. 현실적인 색채가 농후하여 실제 사회생활을 생생하게 묘사했으며, 북방의 구어 방언과 이민족의 언어를 혼용하여 표현예술 역량이 뛰어나다는 특색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몽고족이 중국을 지배하게 되면서 지배자들을 위한 오락용으로 쓰여서, 이 작품 내용뿐만 아니라 음악 무용 및 배우들의 의상이나 화장 등에 이르기까지 이족(異族)귀족의 냄새도 함께 느껴진다.원 잡극은 사상내용면에서 봉건사회의 일부 본질적인 문제들을 반영하였다. 봉건예교와 봉건 통치 집단에 대한 하층민들의 반항정신을 나타내었다. 대표작인 관한경의 《두아의 원한》두아의 형상을 통하여 봉건통치자들에 대한 강렬한 투쟁정신을 반영하였다. 원 잡극 중의 상당히 많은 작품들은 혼인 문제에서의 봉건예교의 반동적 본질을 폭로하고 그에 대한 반항투쟁을 구가하였다.4. 元 雜劇의 형식종류특징부가설명체재한극에 4절(一本四折)-折은 지금의 막(幕)에 해당.-한折은 음악적으로 하나의 궁조에 기반을 둔 한곡의 투곡(套曲))으로 이루어짐.(음악적 분위기에 따라 折의 변환)-각 절에는 관례상 가장 흔히 쓰이는 악곡들이 정해져 있다.ex) 제1절: 선려궁 투곡제2절: 정궁이나 남려궁 투곡3요소唱(노래), 科(동작), 白(대사)-唱: 가장 중시, 반주에 따라 노래, 등장인물의 성격 표현, 극의 진행 주도, 청중에게 제공되는 가장 중요한 오락적 항목으로 극의 성공여부 결정-科: 유형화된 상징적 동작, 개(介)라고도 함ex) 做悲科(슬픈동작), 作戰科(싸우는 동작)무대의 연출효과를 나타내는 것.ex) 內作風科(안에서 바람이 분다)-白: 대화와 독백, 경시 ,상연상황에 따라 가감 변경4대각색末(남자배우), 旦(여자배우), 淨(남자조연), 축(丑)(광대)-正末(남자주인공), 正旦(여자주인공)副末(남자조연) 副旦(여자조연)-대부분의 각색은 도면화장을 하여 인물의 성격 상징적으로 드러냄.창末本(남자가 노래하는 곡), 旦本(여자가 노래)-창은 남자주인공이나 여자주인공이 혼자서 끝까 지 불러야 함, 다른 배역들은 과와 백만 맡는 것 이 보통.설자楔字연극 시작하기 전에 극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해 줌.중간에 놓여서 극의 앞, 뒤 절을 연결-한 두 곡의 만을 씀. 노래부르는 사람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각색이 경우가 많다.-주의 환기, 집중(宋대의 화본의 체제 중 引子와 유사)후에 명대 傳寄의 가문(家門))으로 연결題目正明잡극의 끝머리에 8자 혹은 5자로 이루어진 한 구내지 두 구의 어구가 짝을 이룸.-정명 끝의 세 글자는 오늘날 연극 제목에 해당.극의 전체내용을 요약, 흥미 불러일으킴.ex) 題目: 沈黑江明妃靑塚恨正明: 破幽夢孤雁漢宮秋5. 元代 전기의 雜劇성격-전기의 잡극은 북방(大都)을 중심으로 성행.-북곡(北曲)을 바탕으로 북방문학적 특징이 잘 드러남.-문장이 솔직하고 질박한 특색을 지니고, 당시의 사회와 인간상을 잘 반영.작가관한경파(關寒卿派)-무대상연과 청중 반응 중시→상연을 전제로 함-구어, 방언, 속어의 사용(민중들의 생활상 반영)-사회문제에 관한 소재 多관한경(關寒卿)-원대 대표 잡극가-잡극의 제제확대.자유로운 형식 추구-작품: ,왕실보파(王實甫派)-읽는 희곡으로써의 기능-귀족이나 상류층 묘사한 작 품이 多-문장의 수사에 주의 기울임왕실보(王實甫)-관한경과 쌍벽을 이루는 작가-귀족적 색채 농후-작품: (일반적 잡극체제와 다른 5本20절의 장편의 대작)마치원(馬致遠)-곡사 화려, 읽기 위한 희곡의 성격이 짙음-백박(白樸)-7. 元 雜劇의 성격변화①잡극의 고급예술화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시민계층이 잘 발달되었던 남방을 중심으로 성행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남방적 정서가 유입되었고, 남송의 극양식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원왕조의 한족화, 부유한 일부 시민계층과 관료계층의 보수화 등으로 잡극이 점차 우아하고 세련된 상류층의 고급예술로 변하게 되는 배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방향은 극양식으로서의 생동감가 대중성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②음악적 성격의 변화원래 잡극은 套數로써 이루어져 있으며, 북송의 잡극, 요금의 元本을 통해 계승되고 성숙되어 온 북방음악인 북곡(北曲)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북방의 잡극이 성행할 때 남송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남방에서는 희문(戱文)이 성행하고 있었다. 원의 남송 정복은 북방의 잡극이 남방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남방의 희문은 이면으로 잠복하게 하였다. 잡극은 남방음악의 영향으로 심한 성격변화를 일으키게 되었고, 잡극의 북방적 성격이 차츰 남방적 요소와 융합되어 갔다.③문화적, 사회적 요인남북 대치 상황이 해소됨에 따라 원 왕조는 차츰 한족화되어 갔고, 한족과 몽고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완화되었다. 원 왕조의 안정과 도시경제의 발전에 따라 원대말기로 가까워 가면서 시민계층과 사대부계층을 포함하여 도시의 상류층 사이에는 현실에 안주하는 보수적 경향, 유흥과 안일을 추구하는 퇴영적이고 사치스러운 경향이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시민계층 일반을 대상으로 하는 대중적 오락의 기능과 문화적 기능보다는 상류계층의 기호를 충족시키는 기능을 중시하여, 여성적이고 감상적인 남방적 분위기가 강화되었다.8. 元代 후기의 雜劇(원나라가 송을 완전히 멸망하고 통일을 이룬 1279년을 경계로 함)성격-소주,창주 등의 남방으로 국가의 중심지 이동-현실성이 결여-왕실보의 영향으로 전아한 문사위주의 작품이 많이 창작되어 점차 연극으로서의 기능 상실.작가왕실보파(王實甫派)정광조(鄭光祖)-역사적 사실을 잡극으로 각색.-, 교길(喬吉)-문인들의 풍류를 제재로 한 작품 많이 지음
2004학년도 2학기Musical & 雜劇-시대와 공간을 넘어서학 번0010241소 속중어중문학과성 명심규현제출일2004.12.2개 요0. 들어가며-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그리고 雜劇雜劇1. 원대 잡극의 변천과 발생2. 원 잡극의 발생배경과 흥성이유3. 원 잡극의 특징4. 원 잡극의 형식5. 원 잡극의 성격변화6. 원 잡극의 쇠퇴이유7. 원 잡극의 문학사적 의의뮤지컬8. 뮤지컬의 발생과 역사(1) 영국(2) 미국(3) 한국9. 뮤지컬의 발전과 변화10. 뮤지컬의 형식11. 원 잡극과 뮤지컬의 비교0. 들어가며- 내가 좋아하는 뮤지컬, 그리고 雜劇내가 좋아하는 극 형식은 뮤지컬이다. 아마 뮤지컬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다들 그렇듯 나 역시 일반 연극과 달리 뮤지컬이 음악적 요소가 강하고, 오페라와 달리 대중적인 이야기와 대중적인 음악으로 구성되어 쉽게 즐길 수 있다는 점 때문에 뮤지컬을 좋아한다. 시간이 나면 오페라를 감상하는 것도 좋을 테지만 아무래도 오페라는 감상하기에 많은 비용, 배경지식, 익숙한 한국어나 영어가 아닌 보통 이탈리아어로 공연을 하기 때문에 접근성이 용이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또한 연극은 그 주제에 있어서 희극이 아닌 경우에는 좀 진지한 것을 다루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특별한 날이 아니면 쉽게 극장으로 발을 옮기지 못하게 된다. 하지만 뮤지컬은 연극의 극적인 요소와 오페라에서 맛 볼 수 있는 강한 음악의 감동을 쉽게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뮤지컬을 좋아한다. 뮤지컬을 좋아하는 것에는 또한 화려한 무대장치와 배우들의 춤도 한몫하고 있다. 정적인 특성이 강한 오페라와 연극에 비해서 뮤지컬은 동적인 요소가 강하고, 방송 안무나 힙합(Hip-Hop)류의 춤에 비해서 춤 자체보다는 내용상 흥을 돋우고 극을 이끌어 나가는 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뮤지컬의 안무를 선호하는 편이다. 한 가지 상당히 개인적인 이유를 하나 더 들자면, 보통 중간 크기 이상의 큰 공연장에서 하고, 관람료가 완전히 대중화되기엔 좀 비싼 편인 뮤지컬을 보러간다는 것은 남들의 눈 연극을 대희(大戱)라 부른다. 만주족(滿洲族)인 금나라가 중국 북부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발전시킨 원본(院本)은 당대의 참군희 및 기타 가무 잡희와 북송의 잡극에서 발전되어 나온 것으로 송대 잡극이 원대 잡극으로 발전해 가는 과도기 역할을 수행하였다. 원대의 잡극은 노래와 춤으로 고사를 연출하는 형식의 것인데, 그 중의 노래를 한 곡 따로 떼어놓으면 그 가사는 바로 새로운 시가 되고 이 시를 보통 산곡(散曲)이라고 부르고 잡극과 산곡을 합쳐서 곡(曲)이라 부른다. 곡은 원대를 대표하는 장르가 되었다. 명대에는 소박하고 초기 단계에 머물러 있던 희문(戱文)이 원 잡극의 세련된 형식미에 자극을 받아 한 차원 세련된 형식으로 탈바꿈하여 성행하게 되는데 이것이 명대의 연극을 대표하는 전기(傳寄)라 불린다. 명대에 잡극은 명나라 왕족인 주권(朱權), 주유돈(朱有燉)이 창작하면서 비현실적이고, 공허하며 봉건예교를 선전하는 귀족의 놀이도구로 전락하여 쇠퇴하다가 명말에 전기의 영향을 받아 전체 중 가장 흥미로운 부분만 뽑아서 공연하는 단극(短劇)의 형태로 바뀐다. 이후 청대 초기는 전기가 귀족적인 연극으로 발전하여 형식화 된 아부희가 생기는데 서민들은 귀족적인 아부희에 반하여 각 지방에서 제각기 자기 지방의 토조(土調)를 바탕으로 한 지방희를 발전시킨다. 이를 花部戱라고도 하는데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극종이 경극인 것이다.元曲 =散曲 + 雜劇散曲: 詞와 마찬가지로 민간가요로부터 발전한 악부계통의 가사로 宋詞에 이어 발달 했던 원대의 새로운 시가.雜劇: 원대에 비로소 발달했던 중국의 古劇(창과 대사가 있는 뮤지컬의 형태)唐대의 골계희를 계승한 것.내용은 우스운 내용에 풍자의 내용을 섞은 오락적인 놀이였다.2. 元 雜劇의 발생배경(흥성이유)①도시경제 및 서민 사회의 발달 : 희곡은 직접적으로 군중의 수요에 기초하였다. 이들의 오락문화를 뒷받침하는 대도(大道), 평양(平陽)등의 도시의 발전으로 원 잡극의 연출을 위한 물질적 조건과 관중을 제공해 주었다. 또한 도시경제의 발전으로여 인물의 성격 상징적으로 드러냄.창末本(남자가 노래하는 곡), 旦本(여자가 노래)-창은 남자주인공이나 여자주인공이 혼자서 끝까 지 불러야 함, 다른 배역들은 과와 백만 맡는 것 이 보통.설자楔字연극 시작하기 전에 극의 이야기를 간단히 설명해 줌.중간에 놓여서 극의 앞, 뒤 절을 연결-한 두 곡의 만을 씀. 노래부르는 사람은 주인공뿐만 아니라 다른 각색이 경우가 많다.-주의 환기, 집중(宋대의 화본의 체제 중 引子와 유사)후에 명대 傳寄의 가문(家門))으로 연결題目正明잡극의 끝머리에 8자 혹은 5자로 이루어진 한 구내지 두 구의 어구가 짝을 이룸.-정명 끝의 세 글자는 오늘날 연극 제목에 해당.극의 전체내용을 요약, 흥미 불러일으킴.ex) 題目: 沈黑江明妃靑塚恨正明: 破幽夢孤雁漢宮秋5. 元 雜劇의 성격변화①잡극의 고급예술화경제적 여유를 바탕으로 시민계층이 잘 발달되었던 남방을 중심으로 성행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남방적 정서가 유입되었고, 남송의 극양식과 융합되기 시작하였다. 원왕조의 한족화, 부유한 일부 시민계층과 관료계층의 보수화 등으로 잡극이 점차 우아하고 세련된 상류층의 고급예술로 변하게 되는 배경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발전의 방향은 극양식으로서의 생동감가 대중성을 상실하게 되었음을 가리키기도 한다.②음악적 성격의 변화원래 잡극은 套數로써 이루어져 있으며, 북송의 잡극, 요금의 元本을 통해 계승되고 성숙되어 온 북방음악인 북곡(北曲)을 바탕으로 형성되었다. 북방의 잡극이 성행할 때 남송왕조가 지배하고 있던 남방에서는 희문(戱文)이 성행하고 있었다. 원의 남송 정복은 북방의 잡극이 남방으로 세력을 확대하고, 남방의 희문은 이면으로 잠복하게 하였다. 잡극은 남방음악의 영향으로 심한 성격변화를 일으키게 되었고, 잡극의 북방적 성격이 차츰 남방적 요소와 융합되어 갔다.③문화적, 사회적 요인남북 대치 상황이 해소됨에 따라 원 왕조는 차츰 한족화되어 갔고, 한족과 몽고족 사이의 민족적 갈등은 완화되었다. 원 왕조의 안정과 도시경제의 발전에 따라 원대말기로 가까워 발라드 오페라인 [거지 오페라, The Beggar's Opera]에서 시작하였다. 이 [거지 오페라,The Beggar's Opera]는 범죄 집단의 탐욕과 배신을 정치적인 풍자와 함께 섞어 공연 음악의 위트가 특출한 작곡가였던 헨리 퍼셀의 작품들로부터 거리의 발라드에 이르는 다양한 음악들을 자유롭게 이용하여 만든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런던 연극사에서 가장 오래된 작품으로 그에 이어 희극의 기본이 되었다. 이 때의 뮤지컬 무대는 경직되고 전통적인 오페라와 연극 양식을 좀 더 가벼운 코믹 터치로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좀 더 형식의 발전은 길버트와 설리번의 공동작품을 공연하기 시작한 1877년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 영국은 정치적, 경제적으로 막강한 국가였다. 그러다 보니 세계의 무역상들과 부호들이 거래를 위해 런던으로 몰려들었다. 그렇지만 그들을 위한 적당한 오락물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둘러 제작하여 1892년 10월 영국 황태자극장에서 공연한 [도시에서,In Town]를 기점으로 한 뮤지컬 파스(Musical Frace) 류의 공연물이었다. 당시의 뮤지컬 파스는 자유롭고 애매한 제목의 근본, 풍부한 노래와 춤, 희극 오페라 무대의 인기 있는 연주자들과 화사한 미인들이 주역으로 등장하는 게 특색이었다. 그 뒤 이 형식은 더욱 발전되어 1893년 존스의 음악으로 [게이티 걸, A Gaiety Girl]을 상연하였는데 이것이 뮤지컬 코메디라고 불리는 첫번째 작품이다.②미국신대륙이 발견되고 유럽에서 견디지 못한 사람들이 이주하여 개척한 미국은 상황이 달랐다. 그들은 당시의 유럽 본토에 비해 식견이 짧았고 문화적인 면에서도 고도로 세련된 유럽의 예술보다는 쉽고 즐거운 여흥거리를 원하였다. 게다가 유럽 제국들이 앞을 다투어 신대륙에 진출하고 20세기 초에 이민 문호가 개방되면서 미국은 새로운 문화 양식을 찾게 되었다. 미국에 뮤지컬의 씨가 최초로 뿌려진 것은 영국의 식민지 시대인 1751년으로 알려진다. 이이라는 명칭으로 불렸다.1930년대에 들어서 대중극의 전성기를 구가하는 동안 가극은 연극시장, 태양극장, 협동무대, 낙랑좌 등에 의해 더욱 연극적인 양식으로 다듬어졌으며, 명칭도 악극으로 바뀌었다.악극은 1930년대의 동양극장을 무대로 당시의 흥행극단들이 공연하여 대중들로부터 큰 호응을 받았었다.조선 악극단, 반도 가극단 등 대표적인 악극단에 의해 명맥이 유지되었던 악극은 1950년대 이후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우리나라에는 1962년에 예그린 악단이 창단되면서부터 현대적 뮤지컬 공연이 시작되었다. 창단 후 연극형태의 음악극을 공연하던 예그린 악단이 본격적인 뮤지컬 공연을 시작한 것은 최창권 작곡의 "살짜기 옵서예 "를 공연하면서 부터이다. "살짜기 옵서예"는 음악, 무용, 연극 등 각 분야의 전문인과 인기배우들이 동원되어 당시 관객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 뒤 예그린 악단은 국립 가무단(1976)을 거쳐 국립 예그린예술단으로 활동할 때까지 "꽃님이 꽃님이 (1967)", "대춘향전 (1968)", "바다여 말하라 (1971)", "화려한 산하 (1971)", "종이여 울려라 (1971)", "시집가는 날 (1974)", "상록수 (1975)", "태양처럼 (1976)" 등을 공연하였다. 이 단체는 1977년 서울 시립가무단 (현 서울 뮤지컬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세종문화회관을 주무대로 "달빛나그네 (1978)", "포기와 베스 (1984)", "지붕위의 바이올린 (1985)", "간도 아리랑 (1995)" 등을 무대에 올렸다.9. 뮤지컬의 발전과 변화뮤지컬을 독특한 공연 예술로 완성시킨 1930년대를 뮤지컬 황금기 제 1기라고 본다면 제2기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평화로운 시대를 되찾은 1950년대부터 1960년대 전까지이다. 이 시기에는 오랜 전쟁으로 지쳐 있던 인류가 마음을 달래고, 영혼의 쉼터를 마련키 위해 뮤지컬이라는 장르에 상당한 애정을 기울이게 된다. 그동안 대중적인 뮤지컬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으나 이 시기부터는 뮤지컬이란 장르가 예술성을 획득.
, 작품 소개와 패러디학 번0010241소 속중어중문학과성 명심규현제출일2004.12.2개 요1. 작가 소개 - 한유2-1 작품과 패러디 가. -스승에 대한 논설- 원문과 번역문나. 작품소개다. 패러디-2-2 작품과 패러디 가. 모영전 원문과 번역문나. 작품소개다. 패러디-3. 참고문헌1. 작가소개- 韓愈)한유(768~842년)는 하남 孟縣사람으로서 자를 퇴지(退之)라고 불렀다. 세 살에 부모를 여읜 그를 형수 정씨가 길렀다. 어려서부터 배움에 열중한 그는 25살에 진사 급제하고 변주관찰추관, 4문박사, 감찰어사 등 벼슬을 하였다.정원 19년 그가 감찰어사로 있을 때 조정의 그릇된 정사를 견책하면서 한재가 든 관중(섬서) 지방의 백성들에게 부역과 부세를 면제해줄 것을 상주한 까닭에 양산령으로 강직되었다. 원화 12년에는 배도를 따라 회서의 오원제를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워 형부시랑으로 승직되었다. 2년 후에 불사리를 맞아들이지 못하도록 간하는 바람에 헌종의 노염을 사게 되어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하다가 배도의 주선으로 구원되어 조주 자사로 강직되었다. 목종이 즉위하자 다시 내직으로 옮겨져 병부시랑, 이부시랑으로 있다가 57세에 세상을 떴다. 그의 저작으로는 40권이 있다.한유는 유학을 숭상하고 유교 도통의 계승자로 자처하였지만 순수한 유교가는 아니었다. 그의 정치 사상과 세계관은 상당히 복잡하였다. 그는 환관들의 전횡을 반대하고번진들의 할거를 반대하였으며 당 왕조의 통일을 수호하였다. 그렇지만 그는 왕숙문 영정의 개혁을 찬성하지 않았다.그는 유교의 인정을 제창하고 관리들이 백성들의 재물을 쓸어가는 것을 반대하였으며 봉건지배 계급들의 죄악을 폭로, 비판하였다. 그는 나라의 운명에 관심을 갖고 인민의 질고를 동정하였지만 인민에 대한 유교의 진압설을 선전하였다.그는 유교의 도통을 수호하였지만 현실에 존재하는 구체적인 문제를 관찰할 때는 유교 도통의 테두리를 벗어났다. 그는 불교와 도교를 배척하고 인재를 억누르는 문벌 정치를 반대하였으며 젊은 인재들을 배양하는 데 뿐만 아니라 시가를 혁신하는 데도 힘을 기울였다. 그는 이백과 두보의 시가 창작의 전통을 계승하고 탐구를 거쳐 독자적인 풍격을 갖춘 우수한 시편들을 창작하였다.이상 한유의 문학상을 공적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첫째, 산문의 문체개혁(文體改革)을 들 수 있다. 종래의 대구(對句)를 중심으로 짓는 병문(騈文)에 반대하고 자유로운 형의 고문(古文)을 친구 유종원(柳宗元) 등과 함께 창도하였다. 고문은 송대 이후 중국 산문문체의 표준이 되었으며, 그의 문장은 그 모범으로 알려졌다. 둘째, 시에 있어 지적인 흥미를 정련(精練)된 표현으로 나타낼 것을 시도, 그 결과 때로는 난해하고 산문적이라는 비난도 받지만 제재(題材)의 확장과 더불어 송대의 시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사상분야에서는 유가의 사상을 존중하고 도교 ·불교를 배격하였으며, 송대 이후의 도학(道學)의 선구자가 되었다. 작품은 앞서말한 《창려선생집(昌黎先生集)》(40권) 외에도 《외집(外集)》(10권) 《유문(遺文)》(1권) 등의 문집에 수록되어있다.2-1 작품과 패러디 가. -스승에 대한 논설- 원문과 번역문古之學者 必有師 師者 所以傳道授業解惑也人 非生而知之者 孰能無惑. 惑而不從師 其爲惑也 終不解矣生乎吾前 其聞道也 固先乎吾 吾從而師之 生乎吾後 其聞道也亦先乎吾 吾從而師之 吾 師道也. 夫庸知其年之先後 生於吾乎是故 無貴無賤 無長無小 道之所存 師之所存也嗟乎. 師道之不傳也 久矣 欲人之無惑也 難矣.古之聖人 其出人也 遠矣 猶且從師而問焉 今之衆人 其下聖人也 亦遠矣而恥學於師 是故 聖益聖 愚益愚 其皆出於此乎.愛其子 擇師而敎之 於其身也 則恥師焉 惑矣.彼童子之師 授之書而習其句讀者也 非吾所謂傳其道解其惑者也.句讀之不知 惑之不解 或師焉 或不焉 小學而大遺 吾未見其明也.巫醫樂師百工之人 不恥相師 士大夫之族曰師 曰弟子 云者 則群聚而笑之 問之則曰 彼與彼 年相若也 道相似也位卑則足差 官盛則近諛. 嗚呼 師道之不復 可知矣 巫醫樂師百工之人君子不齒 今其智乃反不能及 基可怪也歟.聖人 無常師 孔子師 子弘師老 子之徒其賢 不及孔子.孔子曰 三人行 則必有俄師 是故 弟노담을 스승으로 삼았는데 담자의 무리는 그 현명함이 공자에게 미치지 못했다. 공자가 말하길, “세 사람이 걸어감에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다”고 했다. 이렇기 때문에 제자라고 해서 반드시 스승만 못하리란 법도 없고 스승이라 해서 반드시 제자보다 나으리란 법도 없다. 도를 깨달음에 선후가 있고 술업에 전공이 있으니 이와 같을 따름이다.이씨의 아들 반은 17살인데 고문을 좋아하여 육경의 경전을 모두 통하여 익혔으며, 시류에 구애받지 않고 나에게 배움을 청해왔다. 나는 그가 능히 옛 도를 행하는 것을 가상히 여겨 을 지어 그에게 준다.聖人無常師 : 위나라 대부 공손추가 공자의 제자 자공에게 [당신네 先生님 孔子께서는 어디서 누구에게 배우셨는가? 라고 물었다. 이때 자공이 [우리 선생님께서는 어디든 가서 배우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따라서 어디서 누구에게 배웠다는 일정한 스승이 없습니다.],논어,자고>하였다. 곧 성인의 도가 있는 곳은 모두 배울 곳이요, 이 도를 아는 사람은 다 배울만한 스승이라는 말이다.나. 작품소개1) 등장하는 인물과 전고?子(담자) : 춘추시대 ?나라의 임금, 담자가 노나라에 갔을 때 공자가 그에게 고대 제왕의 官에 대해서 물었다고 한다.?弘(장홍) : 周나라 大夫로써 음악에 精通하므로 공자가 음악의 일을 물은 일이 있다고 한다.(예기) 및 (공자가어)師襄 : 노나라의 樂官으로 거문고에 능통하므로 공자가 일찍이 이를 배웠다고 한다(공자가어)老聃(노담) : 도가의 시조 老子, 일찍이 공자가 노자에게 예를 물었다고 한다.(예기 및 공자가어)三人行必有我師 세사람이 함께 길을 간다면 반드시 나의 스승으로 본받을 만한 사람이 있다, 곧 세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공자의 자신이요, 나머지 두 사람은 善惡間에 다 스승이 된다는 말2)작품설명이 글은 논변류로써 의론문과 설명문을 가리킨다. 논변류는 대체로 논, 설, 변, 원, 해 등을 표제로 사용하는데 사설 역시 설(說)을 사용한 것으로 이 논변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정연한 논리로 타당성 있는 이치를 논하고 줄 것이다. 이에 대저 나이로만 선, 후배를 따지며 그러다보니 서로를 무시하게 되는 것이 어찌 아쉽지 않겠는가!슬프도다! 선, 후배의 정이 전해지지 않은지가 오래되었으니, 캠퍼스 생활과 학창시절의 이후에 대해 의혹됨이 없고자 하나 어렵다! 예전의 대학생들은 일반 사람들보다 깬 자가 많아서 사회를 움직였으면서도 오히려 선배에게 배우고 후배를 이끄는데 소홀함이 없었다는데, 오늘의 많은 이들은 7,80년대 청춘들보다 훨씬 못하지만 선배들 두고 후배와 친교를 이루는 데에 망설임을 갖는다. 이 때문에 사회에 나가있는 예전의 그들은 젊은이들을 뽑으려하지 않고 작금의 학생들은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 채 졸업을 맞게 된다. 학부제가 실시된 이후의 세대들이 취업할 때 제대로 된 정보조차 얻지 못하고, 학구열에 불타올라 치열한 논쟁 한 번 해보지 못한 채 졸업을 맞게 되는 까닭은 모두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자기 자신을 사랑하여 교수를 가려서 수업을 들으려 하면서도 교수보다 더 가까이 두고 배울 수 있는 선배 두기를 부끄러워하니, 이는 미혹된 것이다. 궁금한 것이 생기고 스스로의 필요가 있을 경우에만 선배를 찾고 후배를 찾으니 이 또한 미혹된 것이다. 이런 경우에 선배를 찾고 후배를 찾는 것은 작은 것은 배우면서도, 파편의 정보만이 아닌 생활의 도와 학문의 도를 논할 수 있는 큰 길을 버리는 것이므로 나는 그것을 현명하다고 보지 않는다.서울대, 고대의 족속들과 심지어 중?고등학생까지도 서로 선후배의 의를 갖추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데, 연대생이라는 족속들은 선배니 후배니 하고 말하면 곧 떼거리로 모여서 비웃는다. 그 이유를 물으면 곧 말하길, “저 사람과 저 사람은 나이가 서로 비슷하고 도가 서로 비슷하다, 또한 학점이 후배보다 낮다.”고 한다. 또한 “같이 듣는 수업도 없고 굳이 만나서 무언가를 나눌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나이가 어리면 수치스럽다고 여기기에 족하다 하고 나이가 많으면 자신의 사회경험이 우월하다고 여기니, 슬프도다! 이에 선후배의 洩惟不喜武士然見請亦時往.累拜中書令與上益狎上嘗呼爲.中書君上親決事以衡石自程雖官人不得立左右獨穎與執燭者常侍上休方罷穎與絳人陳玄弘農陶泓及會稽楮先生友善相推致其出處必偕上召穎三人者不待詔輒俱往上未嘗怪焉.後因進見上將有任使拂拭之因免冠謝上見其髮禿又所摹畵不能稱上意上?笑曰中書君老而禿不任吾用吾嘗謂君中書君今不中書邪對曰臣所謂盡心者因不復召歸封邑終于管城子其子孫甚多散處中國夷狄皆冒管城惟居中山者能繼父祖業太史公曰毛氏有兩族其一姬姓文王之子封於毛所謂魯衛毛聃者也戰國時有毛公毛遂獨中山之族不知其本所出子孫最爲蕃昌春秋之成見絶於孔子而非其罪及蒙將軍拔中山之豪始皇封諸管城世遂有名而姬姓之毛無聞穎始以?見卒見任使秦之滅諸侯穎與有功賞不酬勞以老見疎秦眞少恩哉.모영은 중산 사람이다. 선조는 명시인데 우임금을 도와 동방을 다스려 만물을 기른 공로가 있어서 묘 땅에 봉지를 받았으며, 죽어서는 열두 신의 하나가 되었다. 그가 일찍이 말하길, 나의 자손은 신령의 후손이니 다른 동물과 같을 수가 없다. 당연히 입으로 토하여 새끼를 낳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후에 과연 그러하였다. 명시의 팔세손은 누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은나라 때 중산에 살았는데, 신선술을 터득하여 빛 속에서 은신술을 부리고 물건을 부릴 수 있었으며, 항아를 속여 두꺼비를 타고 달에 들어가 그 후손들은 마침내 은거하여 벼슬하지 않았다고 한다. 동관에 사는 후손은 준이라고 하는데, 교활하고 잘 달렸다. 명견 한로와 재능을 다투었는데 한로가 따르지 못하자 노하여 명견 송작과 모의하여 준을 죽이고 그 가족으로 장을 담갔다. 진시황 때에 몽염장군은 남쪽으로 초나라를 정벌하면서 중산에 주둔하였다. 대규모의 사냥으로 초나라를 겁주려고 좌우 서장과 군위를 불러 연산으로 점을 치니, 하늘이 인류 문명을 내린다는 조짐이 나왔다. 점쟁이가 축하하며 말했다. 오늘 잡으 것은 뿔도 이빨도 없는 털옷 입는 족속입니다. 입은 찢어지고 긴 수염이 났는데, 구멍이 여덟 개이고 책상다리를 하고 앉습니다. 빼어난 놈을 취하여 문서작성에 이용하면 천하가 같은 글자를 쓰게 될 것입니다. 진나라가 끝내 제후들을 겸병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