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원디자인학부 20023192 이인영비원은 조선시대의 창덕궁 뒤쪽에 자리잡은 정원으로 왕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곳이다. 본래 이곳은 비원이라 하지 않고 처음 만들어진 조선시대 초기부터 고종 때까지는 후원, 북원 그리고 금원으로 불려졌다. 비원, 북원, 금원 모두 정원을 말하는 말인데, 이 정원이라는 말은 일본인이 붙인 말이라 한다. 그러므로 비원이라는 말은 사실 후원으로 고쳐 부르는 것이 맞다.후원은 태종 때 생겼다. 세종은 경복궁에 주로 머물러서 후원에 대한 이야기가 잘 언급되지 않았다. 후원을 확장한 왕은 세조이다. 세조는 후원확장을 위해 그 안에 있던 백성들의 집 141채 정도를 헐었다. 후원이 넓어지면서 왕뿐만 아니라 왕의 가족들까지도 후원에서 쉴 수 있었다. 그런데 연산군 때에는 후원이 난잡한 놀이터로 변하였다. 백성들이 궁 안의 놀이를 못 보게 하기 위해 담을 높게 쌓고 담 주변에 있는 백성들의 집을 헐고, 후원과 인접해있는 성균관도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다. 왕자신도 자신의 행동이 부끄러웠던 인정하는 걸까?왕의 놀이를 위해서 죄 없는 백성들만이 피눈물을 흘렸다고 생각하니 그 시대의 백성들이 측은히 여겨졌다. 배를 띄울 정도의 연못을 팔려고 했던 것으로 봐서 중국의 정원형태를 모방한 것 같다. 그 뒤 임진왜란으로 인해 창덕궁이 모두 불타고 후원의 피해도 심했다. 후원의 그 많은 정자들이 오늘날과 같은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은 17세기인 인조 때이다. 인조는 취규정을 건립하고, 취향정, 팔각정, 취승정, 관풍각 등을 세웠다. 이 가운데 취승정은 낙민정으로 개칭되었고, 팔각정은 중국에 갔다온 세자에게 물어 지붕을 팔각으로 지었다한다. 중국의 모습을 모방하여 대국과 같이 보이도록 하였다. 지금 우리가 서구의 문화라면 무조건 좋아하여 무분별히 수용하는 것과 비슷한 이치인 것 같다.후원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루아침에 쨘 하고 생긴 것이 아니라 세월이 흐르면서 그 시대를 반영하면서 허물어지기도, 세워지기도 하여 오늘날과 같이 만여평이 넘는 아름다운 후원이 탄생된 것이다.후원은 크게 4개의 큰 지역으로 나눌 수 있다. 부용지를 중심으로 한 곳과, 애련지와 애련정 그리고 연경당 중심, 관람정과 반도지, 존덕정과 연지로 한 지역, 마지막으로 옥류천을 중심으로 한 곳이다.부용정은 정자이다. 팔작지붕의 형태로 부용정의 북쪽은 연못 속에 두 다리를 세웠다. 옛날에도 물속에 다리를 세운 것을 보면 정말 선조들의 지혜에 감탄을 아니할 수 없다. 부용정 북쪽의 장방형 연못에는 한가운데 둥근 섬이 있는데, 음양오행 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났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런 연못하나가 만들어진 것에도 다 뜻이 있다고 생각하니 선조들은 매사에 신중했던 것 같다.후원에는 특이한 형태의 돌문이 있다. 이것은 불로 문이라 한다. 여기를 드나들면서 늙지 않기를 기원했다 한다.애련정 안쪽 연경당 쪽에서 모아 흘러내리는 도랑물을 한 장의 넓은 판장돌 중앙을 우묵하게 파서 만든 물길을 따라 한 길 낮은 곳에 자리잡은 물확에 작은 폭포를 이루어 떨어뜨리고 이 물확에 가득 찬 물이 다시 연못에 흘러들게 한 것이다.물이 나오는 입구에도 다 조각을 해놓아 동물형태의 문양을 넣었다. 무심결 보고 지나칠 이곳에서도 석공의 숨결을 느낄수 있었다.연경당은 순조 28년에 당시 왕세자였던 익종의 청으로 사대부 집을 모방하여 궁궐 안에 지은 이른바 99칸 집이다.옥류천 주변에 소요암이 있는데, 이 바위 앞쪽에는 물이 돌아 흐르게 둥그런 홈을 팠으며 돌아 흐른 물은 다시 폭포가 되어 떨어진다. 인공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바위란 자연물을 이용하여 만든 물길을 보면서 경이로움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