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프랑스의 문화산업 정책(1) 프랑스의 문화 정책프랑스 문화 정책은 프랑스의 절대왕정에 의해서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절대왕정체계에서 문화정책은 2가지 국가역할을 하였다. 하나는 개별 예술가 및 기관에 대한 후원자로의 역할, 다른 하나는 예술 작품의 생산과 분배에 대한 규제자로서의 역할을 부여하였다. 근대적 개념이 나타난 것은 1930년대 말이었고, 문화정책의 초점이 문화유산 보존에서 예술과 여가 부문이 정책의제로 설정되기 시작하였다. 1946년에는 국립영화센터(CNC)가 설립되면서 영화부문이 정책영역으로 포함되었으며, 각종 매스미디어의 출현에 대해 정부는 자유방임적 입장을 포기하고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1959년 6월 24일에 문화부(현재는 문화통신부(정부대변기능 포함)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음)가 설립된 후부터 문화행정이 활성화되었고, 프랑스 문화정책은 단순히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차원을 넘어서 현대 예술의 진흥에 우선순위를 부여하게 되었다. 이를 위해 보다 민주적인 접근방식과 분권화를 통해 사회적, 지리적 측면에서의 예술에 대한 접근 성을 높이는데 초점을 두었다. 1980년 이후 제 3기 문화부장관인 Jacques Lang의 기간에는 문화개념에 새로운 인식이 나타났으며, 지원영역을 확대하고, 일상생활 속에서의 문화적 표현에 관심을 나타내었다. 문화정책 영역은 문화산업 분야로 확대되었으며, 샹송, 대중음악, 재즈, 장식예술(패션, 광고 디자인 등)도 중요한 문화행정 영역에 포함되게 되었다. 이는 문화의 미국화를 방지하고, 문화정체성을 유지하며, 문화부문의 대량소비가 지닌 경제성 확보, 기술적, 문화적, 혁신 차원의 잠재력 증대를 위한 것 이었다.(2) 프랑스의 문화산업 정책Jacques Lang장관의 자유주의 문화정책은 문화정책의 영역을 전통문화와 문화복지 차원에서 대중문화와 문화산업으로 확대하게 된다. 지원영역에 포함되는 주요 문화산업은 영화, 애니메이션뿐만 아니라 음악, 멀티미디어, 게임, 교육디지털콘텐츠, 고급예술산업 등 포괄적으로 구성되었다. 19 등을 국가가 관리하기 위해 기증하도록 규정한 것을 (데뽀레갈칙령) 온라인 영역에까지 확장하여 적용함으로써, 온라인디지털콘텐츠를 프랑스 국립도서관(Bibliotyque Nationale de la France: BNF)과 국립문화산업연구소(Institut National de I’Audiovisuel: INA)에서 관리하고 있다.프랑스는 ‘문화적 예외’와 문화적 다양성 문제를 제기하면서 문화산업을 둘러싼 통상협상에서 문화산업을 문화정체성을 담보할 파수꾼으로 인식하고 있다. 이를 위해 프랑스에서는 전체 애니메이션의 60%가 유럽연합회원국 작품이어야 하고, 또 전체 애니메이션 40%가 불어로 제작된 것이라야 한다는 TV애니메이션의 쿼터제가 활성화 되어 있다.(3) 프랑스의 문화산업 육성기관1) 문화통신부인간의 주요 업적, 특히 프랑스의 업적에 국민들이 더 많이,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문화유산의 보존, 예술 작품의 창조와 조형 미술의 발전 및 문화산업 발전과 대외문화정책 수행하고 있다. 언론 영역에서 정부 정책 준비와 실행하며, 통신서비스 기술 지원 및 통신망에 대한 국가정책 수립과 집행한다. 불어의 사용, 확산 및 어휘 풍부함을 위한 정책을 펼치고 있다. 국립 박물관, 도서관, 문화센터 등과 총리 관할 국가의 건축 공사, 도시 계획사업 시 건축 조정 업무를 담당한다.2) 국립영화진흥센터(The National Center for Cinema: CNC)문화통신부로부터 인정받아 애니메이션 포함 영화와 TV산업에 지원 기금의 조성 및 운영관리 등과 관련된 경제 업무와 영화관련 법령의 조사 연구 및 행정적 관리를 하고 있다. 영화진흥 및 영상유산 보전과 관련한 업무 등을 구체적으로 담당한다. (1990년대에 들어와 다양한 문화 콘텐츠 산업으로 기능 확대) 특히 새로운 멀티미디어 기술과 정보기술을 문화콘텐츠 산업에 활용하기 위한 지원 임무를 수행한다. (영화, 애니메이션, 오디오비쥬얼, 멀티미디어콘텐츠 창작지원, 영화와 애니메이션 등 광범위한National de la Bande dessinee et de I’image)만화 산업의 발전을 위해, 지역 특화산업으로 앙굴렘시(파리 남서쪽에 위치한 보르도시 부근의 작은 마을)를 지원하고 있다. 1990년 1월에 건물이 완공 되었으며, 과거 베네딕트(bndictine)사원 자리에 재건축하였다. 1년에 총 3~4회 전시회를 개최하고 ‘9eme Art’을 연간 1회 발행한다. 은 만화 산업의 예술적 가치와 상업적 가능성을 동시에 높이는 데에 큰 역할을 하고 있다.4) 국립서적센터(CNL)1982년까지, 외국문학, 소설, 시, 연극, 고전문학, 문명생활, 사회과학, 예술 철학 분야의 9개 위원회가 설립되었고, 1983년 과학기술분야가 추가 되었으며, 1984년에 만화분야가 신설되었다. 매년 만화잡지 제작비용 전체의1/4에 해당하는 자금을 지원하고, 만화의 시나리오 작가와 만화가에 대한 지원사업도 추진하고 있다.5) 영상산업지원 위원회 (COSIP)프랑스 재무부는 전국적 방송망을 지닌 방송업자에게 5.5%의 세금을 징수하고 이 세금(약 10억 프랑)을 영상산업지원 위원회라는 기구를 통해 독립 제작사들에게 재투자 하고 있다. 이 세금 액의 분배는 전년도 총 방송시간을 기준으로 독립 제작사들이 제작, 방영한 시간에 비례하여 이루어 진다.6) 영화 및 시청각산업 재무지원회사(SOFICA)CNC가 인가한 영화와 영상작품제작 자금을 조성하기 위한 일종의 매개회사로, SOFICA의 자금조성에 참여한 개인이나 투자 사는 투자액만큼 세금공제 혜택을 받는다. 1985년 9개의 소피카가 발족된 이래로 1991년까지 17개의 소피카가 설립되어 약 14억 프랑의 자금을 모았다. 소피카는 프랑스 제작영화의 상당수에 투자해 왔는데, 1996년에는 프랑스에서 제작된 영화의 총 제작비의 12%에 해당하는 1억2천8백만 프랑을 투자하였다. 그러나 흥행이 보장되는 대형 작품에 비해 소규모 독립영화에 대한 투자가 미비해 SOFICA위상에 대해 논란이 되고 있다.2. 프랑스 문화 산업의 현황(1) 관객, 총 48억 프랑의 수입, 그리고 국내영화시장에서 프랑스 영화의 점유율 37.5%(미국영화54.4%)라는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는 1987년이래 최고의 기록이었다. 5편의 프랑스 영화가 200만 명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였으며, 1989년 이후 유럽영화(프랑스 영화포함)가 40% 이상의 점유율을 보였다. 90년대 초반 프랑스 영화의 위기설이 제기된 이후 다소 회복세를 보이고 있는 프랑스의 영상산업은 고몽-빠떼사와 UGC사 등 소수의 독과점 영화기업 이외에는 주로 소규모 독립 프로덕션과 배급업자가 다수 존재하는 시장구조를 보여준다. TV의 경우 제작부문이 소수 제작사에 집중되어 있어서 유통부문이 활성화되어 있지 못하지만, 일찍부터 발달했던 영화산업의 영향으로 TV부문과 영화부문간의 협력관계는 매우 강한 편이다.(2) 애니메이션 산업규모 면에서는 미국과 영국에 이어 세계 3위권 시장에 해당하지만, 작품 수에 있어서는 11편으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공동제작이 많으며 지속될 전망이다.(3) 출판만화100여년의 역사를 자랑하며, 오늘날 9번째 예술(9me Art)로 간주되고 있다. 미국의 코믹스(Comics), 일본의 망가(Manga)와 구별되는 독자적인 시장을 가지고 있다. 미국 코믹스는 초능력을 보유한 수퍼 영웅 위주의 내용이고, 일본 망가는 일상 생활과 SF, 역사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며, 데셍 형태가 일정한 틀을 가지는 것에 반해 프랑스 출판만화(BD)는 대개 사회적인 이슈나 철학적인 내용들을 다루며, 주인공 역시 일상의 이웃인 경우가 많다.(4) 음반산업자국음악이 강세를 띠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자국산 음악시장 규모가 크기 때문에 유럽음반시장의 경기 침체에 큰 영향을 받지 않고 있으며, 영화 및 드라마의 주제가가 좋은 반응을 보여 성장세를 이어가고 있다. 재즈의 두 번째 고향, 랩시장은 미국에 이어 세계 2위를 차지하고 있다.(5) 비디오 게임 산업프랑스 게임 분야 성장률을 2003년 15%로 상승세를 유지 하고 있으며, 중소기업의 젊은 인재, 고 있다. 젊은이들의 여가 시간에 비디오 게임을 하는 시간이 점차 증가하고 있어, 논란의 여지없이 이제 비디오게임은 프랑스에서 대중을 대한으로 한 레저 활동이 되었다.3. 프랑스 문화산업을 위한 지원(1)국립영화진흥센터(CNC)가 주도하는 영화관련 지원 및 규제제도1)영화산업의 구체적 단계(제작, 배급, 상영)에 대한 정부의 직접적 지원제작부문에 대한 지원은 크게 자동지원과 선별지원으로 구분된다. 전자는 1974년 이후, 영화의 제작-상영 후에 상영에 의해 획득된 입장료 수입에 비례하여 확정된 자동지원금(입장료 수입의 11%에 해당하는 영화발전기금의 120%)의 혜택을 받는 것이고, 후자는 흔히‘수익금 선불제’(Avancessur recettes) 라고 불리는 데, 이미 관록이 있는 영화제작자에게만 자동지원의 혜택을 주게 됨으로써, 참신한 신예제작자들이 소외되는 경향을 보완하기 위해 영화제작 전에 선별하여 재정지원을 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지원은 제작만이 아니라 배급, 상영업자에게도 적용되고 있다.2)영화산업에 대한 TV방송국의 지원 의무TV방송국의 영화제작에 대한 재정지원을 위해 1980년대 중반 이후 영화전문 유료 TV인 까날-프뤼스는 총수입의 9%를 프랑스 영화의 선매(先買)에 투자하도록 의무화되었으며, 다른 TV방송국들도 총수입의 3%를 영화제작에 지원하도록 했다. 프랑스 TV는 전체영화제작비의 20%를 감당함으로써 프랑스 영화제작에 재정적 기반을 튼튼히 해주고 있다. TV방송국은 영화제작에 참여함으로써 방영될 영상물량을 최대한 빠른 시간내에 확보할 수 있다는 이점과, 제작에 참여한 영화의 독점 방영권을 얻을 수 있다는 이점이 있다. 그 밖에도 영화를 TV에서 방영하기 위해서는 상영관에서의 일정 상영기간이 경과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든지, TV에서의 영화 방영편수, 방영시간 등에서 여러 가지 규제가 주어지고 있다. 또한 TV에서 방영되는 영화에 대해서는 불어 원판, 유럽공동체 원판의 영상물 쿼터가 존재하는데, 장편영화의 60%는 유럽공동체 원판이어야 하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사기』의 작자『사기』130편은 한의 태사령(太史令)인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것이다.사마천의 자는 자장(子長)이고 좌풍익하양(左馮翊夏陽), 즉 오늘의 섬서성 한성현(韓城縣) 사람이다. 왕국유(王國維)의 《태사공행년고(太史公行年考)》에 의하면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에 출생 하였다. 그의 선조는 왕조의 태사로 있었고, 그의 아버지인 사마담(司馬談)은 한조의 태사령으로 있었다. 아버지가 죽자 사마천이 그 자리를 이어 받았다. 그의 아버지는 전문적으로 성력(星曆), 《역경(易經)》과 황로(黃老) 학설에 정통했었으므로 여러 면에서 사마천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 위에 사마천은 공안국(孔安國)에게서 《상서(尙書)》를 배웠고 동중서에게서는 《춘추(春秋)》를 배웠으며 각지를 유력(遊歷)하는 것을 좋아하여 족적이 천하에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는 광활한 지역을 만유하면서 산일된 연사 자료와 이야기를 수집하고 많은 역사 유적지를 실지로 답사하였으며 각 지방의 민정세속(民情世俗)을 두루 이해하였다. 이 모든 것이 물론 그의 세계관 형성과 후일의 편찬 사업에 아주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사마천은 사마담이 죽은 후 3년만에 태사령을 제수받았다. 기원전 108년(원봉3년)에 태사령이 된 후에 먼저 무제의 명으로 태초력(太初曆)을 편수할 때에는 역서 개정의 발의로부터 신력(新曆)반포에 이르기까지 모두 사마천이 주관했으며 그 경위는 《한서》의 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역서 편수가 끝나자 『사기』편찬에 종사하였으나 『사기』가 채 완성되기 전에 이릉의 일로 투옥되었다. 즉 조정에서 이릉의 투항 사건을 단죄할 때 사마천은 이들을 변호했고 구금당하였다. 한대의 형법에 죄수는 돈으로써 속죄할 수도 있었고 권세자의 보석도 받을 수 있게 규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사마천에게는 돈도 없었고 그를 보석해줄 만한 권세자인 지기(知己)도 없었다. 그는 별 도리 없이 치욕적인 부형(腐刑, 또는 궁형 즉 거세형)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그는 부형을 받가 시대의 상황을 평가하고 자신의 관점을 표명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공자는 "사람들이 내 뜻을 알고자 하면 「춘추」를 통해야 하고, 내게 죄를 물으려 할 때 역시 「춘추」에 근거해야 하리라"라고 말했다. 맹자는, 「춘추」는 천자(天子)의 일을 기재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한 권의 정치 법전처럼 군주를 시해하는 난신(亂臣)과 부친을 시해하는 적자(賊子)의 무리들이 두려워하도록 만들었다고 보았다.사마천은 이 「춘추」의 영향을 깊이 받아 『사기』를 저술하였으며, 시비와 선악을 분명하게 밝힐 뿐만 아니라 뛰어난 공과 훌륭한 덕을 기록하여 공신과 사대부들의 업적을 기술하고 보존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보다 중요한 것은 사마천이 「춘추」의 기초 위에서 창조와 변화를 시도하여 사학을 정치와 도덕적 평가의 범위에서 역사 탐색의 장으로 끌어내어 명실상부한 '사학(史學)'이 되게 하였다는 점이다.3.『사기』의 구성『사기』는 모두 130편으로 되어 있다. 그중 제왕(帝王) 및 역대의 중요한 사적(史迹)을 기록한 가 12편, 역대 제왕과 제후국의 대사를 나열한 가 10편, 경제, 문화 등의 전문 역사를 논술한 가 8편, 제후 왕국의 흥망성쇠를 서술(개별 편장은 예외)한 가 30편, 영향력이 있는 역대의 인물 전기 및 소수의 외국사와 민족사를 기술한 이 70편, 도합 130편 『사기』에 망라되었다. 사마천 자신이 《태사공자서》에서 동계한 테 의하면 『사기』는 도합 52만 6천5백 자에 달한다.(1)본기(本記)본기는 제왕의 업적을 연대기 적으로 기록한 것이다. 역대의 천자와 황제 그리고 이에 비견되는 인물들을 같이 기록했다. 五帝의 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에 이르기까지 전 12편과 후에 사마정이(司馬貞)이 보록(補錄)한 삼황본기(三皇本紀)를 합쳐 13편이다.①삼황본기(三皇本記) : 복희, 신농,수인씨에 대한 기록이다. 삼황 시대는 사실이라기보다는 신화이며 사마천도 신빙성이 없다하여 사기에 기록하지 않았다.②오제본기(五帝本記) : 전설적인 5 인의 제왕인 황제(黃帝), 전욱, 제곡, 요라 통일과 안정을 위해 큰 공을 세운 개국공신들을 제후의 반열에 올려놓은 사마천의 독특한 역사해석을 볼 수 있다.(3)표(表)「세가」안의 사건들의 선후 또는 상호관련성을 이해하려면, 그것들을 다시 시간적으로 배열하지 않을 수 없는데「표」는 바로 이 때문에 설정된 것이다. 각 시대의 연표와 일람표등을 기록한 것으로, 사마천의 과학적인 사고와 정통을 중시하는 노력의 흔적이 잘 나타나 있다. 특히,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 같은 것은 격동기의 급변하는 상황을 월별로 일요목연하게 잘 정리되어 있다.①삼대세가(三代世家) : 하, 은, 주의 3왕조와 황제 전욱 제곡 요, 순의 5제의 계보를 기록한 것이다.②십이제후연표(十二諸候年表) : 천자국 주나라 시대의 12 제후국에 대한 연표이다.③육국연표(六國年表) : 주와 전국 7웅의 연표이다.④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 : 통일 진(秦) 붕괴부터 초(楚)의 항우(項羽)를 거쳐 한(漢)나라 고조(高祖)까지의 변천을 기록한 연표다.⑤漢興以來諸侯王年表 : 한고조부터 7대황제 무제(武帝)시대까지 왕으로 봉했던 제후들의 흥망에 대해 기록했다.⑥高祖功臣侯者年表 : 한고조부터 7대황제 무 제 시대까지 제후에 봉해진 인물들의 흥망을 기록했다.⑦惠景間侯者年表 : 한나라 2대황제 혜제( 惠帝)부터 6대 경제(景帝)까지의 제후로 봉했던 인물들의 일람표이다.⑧建元以來侯者年表 : 한나라 7대 무제(武帝)때 공로로 제후에 봉해진 인물들의 일람표이다.⑨建元巳來王子侯者年表 : 건원(建元)이후에 유씨(劉姓)황족으로서 제후에 봉해진 인물들의 일람표이다.⑩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 : 한고조 이래 승상(丞相), 상국(相國), 대위(大尉), 장군(將軍)등 요직을 지낸 관리들의 일람표이다.(4)서(書)서는 정치와 문화 등 제도나 현실을 기록한 문화사적인 서술이다. 한 분야에 대해 상고로부터 당시까지의 유래와 변천을 적었고, 실제적인 운용을 기록하였다. 사기의 다른 부분에서는 보기 힘든 예(禮) 제례(祭禮) 천문(天文)과 경제 등을 상세히 다루고 있다. 이 8서의 각 분 시기 이전의 역사는 간략하게 서술하였고, 전국 이후의 역사는 상세하게 서술하였다. 특히 한초 시기의 경제, 정치, 문화, 민족관계, 국내외 왕래 등 여러 면을 폭넓게 기술하였다.첫째, 『사기』는 음란하고 포악한 제왕들의 작태를 밝혀 놓았다. 사마천은 '덕치'와 배치되는 학정을 실시한 하걸(夏桀), 은주(殷紂), 주려(周 )왕 및 진시황과 같은 폭군들의 죄악을 규탄하고 그들의 멸망의 필연성을 드러내었다. 나아가서 그는 당시의 이름난 군주에 대해서도 거리낌 없이 견책하고 있다.둘째, 통치 집단 내부의 첨예한 모순과 그들 사이의 아귀다툼을 진실하게 반영하였다. 그것은 유방의 부인들인 여후(呂后)와 척회(戚姬)간의 모순 및 여후의 야만성에서 볼 수 있다. 봉건 왕조 내부의 후비들 사이의 내부 모순과 다툼이 얼마나 치열하고 참혹하며 야만적이고 비인도적이었던가 하는 것을 알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이다. 황위를 손아귀에 틀어쥐는가, 못하는가 하는 문제는 자신과 외척, 당우들의 생명, 재산과 직접적으로 관련되는 일이기 때문에 후비들의 다툼은 곧 최고 통치자인 황위의 계승권을 둘러싸고 진행되는 것을 폭로하고 있다.셋째, 『사기』는 중하층 사회 출신 사람들의 우수한 품성, 포악한 자를 때려 눕히고 약한 자를 부추겨주는 용감한 영웅적 행위를 열렬히 가송하였다. 에서 후영(候 ), 주해(朱亥), 모공(毛公)과 설공(薛公)등 '소인물(小人物)'은 모두 시급한 대목에서 위나라 공자 신릉군을 도와 조나라를 구원하고 위나라를 보존하며 진(秦)나라에 저항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사마천은 이를 서술하면서 문지기 출신인 후영의 지혜와 지식, 그리고 의리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주해의 비범한 완력을 높이 찬탄하고 있다.넷째, 『사기』는 일련의 애국 영웅들과 역사적으로 중대한 기여를 한 역사 인물들을 열정적으로 구가하였다. 사마천은 존경의 마음을 품고 을 썼다. 이장군 이광(李廣)은 용감하고 날쌔며 모략 있고 정직한 품격과 애국정신을 소유한 장군이었다. 그러므로 사마천은 애석한 심정으로 이광함되지도 않은 수치이다.풍부한 역사적 자료를 가지고 비교적 정확한 결론을 얻을 수 있으려면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점이 보장되어야만 한다. 첫째는 사료의 운용을 잘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사료와 진실에 근거하여 사실대로 쓰는 과감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학자들은 절대로 정치나 혹은 여타의 압력에 굴복해서는 안 되며, 객관적으로 역사를 서술하는 데 용감해야만 한다. 사마천은 이러한 두 방면에서 모두 뛰어난 모범이 되었다. 사마천은 사료의 운용이 뛰어난 '훌륭한 역사가'이며, 『사기』는 대단히 객관적인 '실록(實錄)' 작품인 것이다.두 번째, 사마천은 『사기』또는 역사 연구에 있어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가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즉, 시대 상황의 변화와 개인이 서로 만나게 되는 관계에 대해서 연구하였던 것이다. 그는 인간이란 자신과 국가를 주재하는 주체적인 힘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정치의 혼탁과 국가의 패망은 "현명한 충신이 은거하고 난을 일으키는 신하가 중시"되었기 때문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보았다.세 번째, 사마천은 마땅히 "고금의 변화에 통달"해야만 한다고 보았다. 즉 역사 발전의 과정과 법칙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기』는 통사체제를 활용하여 원고(遠古)에서부터 한(漢)에 이르는 수천 년의 인류 역사를 일관되게 서술한 최초의 책이며, 아울러 이 한 폭의 역사의 그림책 속에서 간 역사 시기의 특색 및 예법제도, 인물 풍숙의 지속과 변천을 드러내었다. 이처럼 『사기』의 배열은 역사 발전의 연관성을 반영하고 있다. 사마천은 역사 발전의 연속성을 강조 하였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역사의 변화에 중점을 두었다. 이것은 『사기』의 10편의 표(表)에서 더욱 분명하게 나타나고 있다.네 번째, 역사 스스로의 독특한 품격을 지닌 "일가(一家)의 말을 이루어야"만 한다고 생각하였다. 옛날부터 사학은 일종의 고지식함을 많이 지니고 있었다. 따라서 역사서는 천편일률적이었고 역사가는 개성이 부족하였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대부분이 정치 세력의 영향으로 조성되었다는 있다.
1. 악부의 형성는 한ㆍ위에서 비롯하여 남북조 시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민간에 유행하였던 작자를 알 수 없는 노래들의 가사가 그 중심을 이룬다. 그러나 란 은 음악이란 말이고 는 기구 라는 말로서 본시 한나라 무제가 설치한 음악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청의 이름이었다. 무제는 에서 예부터 내려오는 음악과 악기의 정리, 음악의 연주, 필요한 음악의 작곡 등을 맡게 하였다. 이 의 기능 중에서 이 밖에 특이하고 중요한 것으로 민간가요의 수집이 있었다 『한서』「예문지」에무제가 악부를 세우가 가요를 채집하니 이에 조ㆍ대 지방의 노래와 진ㆍ초의 노 래가 있게 되었다. 또한 풍속을 관찰하고 정치가 잘되고 있는 가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이에 의하면 악부는 한무제 때에 설립된 음악을 관장하는 기구였으나 1977년에 진시황 묘 부근에서 발굴된 자료에 따르면 악부가 이미 진나라 때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진대에 제작된 편종-그림첨부) 중국에 옛날에 있었다는 이름바 의 제로들 부활시킨 것으로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성격의 음악들이 수집, 정리되어 있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민가들이다. 후에 의 규모는 작아졌지만 후한때까지도 그대로 유지되었다.『후한서』의 기록에 의하면 광무제와 화제ㆍ영제 등이 각 지방의 민요를 통하여 민심의 동향을 파악하려 하였다. 따라서 분명치는 않지만 후한대에도 의 제도가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위ㆍ진 시대는 의 제도는 없었지만 나라에서 쓰는 음악을 정리하고 작곡하며 연주하는 일을 맡았던 음악기관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악부의 임무의 첫째는 문인 창작 및 민가를 포함한 가사의 채집이고 둘째는 안고를 제정하여 채집해온 가사를 음악에 맞추어 넣는 것이며, 셋째는 악공을 훈련시키는 것이다. 대략 이때부터 라는 단어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하였다. 사람들은 악부에서 불리워지던 노래를 통털어 라 불렀고, 여기에 모방하여 창작한 것도 포함시켰다. 이렇게 악부는 음악기구의 명칭에서 시가체제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그 뒤 남북조 시대에 와서 다시 민가가 크게 유행하였던 것을 보면 와 비슷한 음악기관은 그대로 계속 되었던 것 같다. 따라서 여러 지방의 민요와 예부터 전해내려오던 노래와, 나라의 여러 가지 행사때 불리워지던 노래등이 잘 보전되었다. 거기에는 일반 문인들이 쓴 시와는 풍취가 전혀 다른 작품들이 많이 있어, 뒤에는 에 보존되고 있는 노래의 가사들을 또는 라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중에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민간에서 채집한 민가들이다.당나라 중엽에 이르러 원진과 백거이(白 易)등이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을 일으켰는데, 여기서 말하는 신악부는 사회문제 반영을 특징으로 하고 시를 이용한 풍자를 목적으로 하는 시가 창작으로서 음악과는 관계가 없고, 여기서 말하는 악부와는 다른 것이다. 한대 악부기관이 사람을 파견하여 민간가요를 채집하게 한 대규모 민간채집활동은 커다란 역사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한서 예문지의 기록에 따르면 다시에 채집된 서한 민가는 138편에 달하는데, 이 작품들은 대부분 없어졌다. 지금 남아 있는 한대 악부민가는 3,40수 정도이고, 그 가운데 서한의 민가로 고증이 가능한 것으로는 '강남(江南)'등 7수 정도에 불과하다.2.악부의 특징첫째, 악부가 지닌 뛰어난 내면적 예술성은 진솔한 삶을 소재로 한 서민 정서였던 이유로 다른 문학보다 생명력이 있었다. 훌륭한 문학 예술은 민간 문예 가운데에서 많이 찾아 볼수 있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것은 악부의 바탕이 된 민가이다. 문인들이 민가를 정리하고, 또 모방하여 지음으로써 중국 역대 운문 문학의 주류를 형성하게 되었다. 주나라로부터 청대에 이르기 까지 중국의 여러 시가 문학은 모두 민간에서 발생하였으며, 음악과 어우러져 음악을 떠날 수 없었따. 악부도 그 예외는 아니었따. 중국 운문 문학의 특징은 '음악문학'이라는테 있는데 특히 악부는 '시詩' '악樂' '무舞' 세가지 예술의 혼합체로서 가장 전통적인 음악 문화라고 할 수 있다. 즉 언어를 통한 감정의 토로, 청각적인 음악 효과, 그리고 춤의 동작이 함께 어우러져 당시 어둡고 밝은 생활의 현실을 자연스럽게 종합적으로 표현하고 있다.둘째, 악부시의 특징은 음악에 있을 뿐만 아니라 당시 생활 습속이 잘 반영되어 있어서 당시의 문화를 연구함에 있어서도 귀중한 자료가 될뿐더러 일반 대중의 언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에 소박하고 생동적이다. 꾸밈없는 정감, 애증이 표현되고 있어 쉽게 공감하게 한다.셋째, 인물의 언어 묘사와 심리 묘사를 통하여 사건과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였다. 인물의 언행에 대한 묘사와 서술을 통하여 이야기를 전개하였고 때로는 인물의 내심세계를 심각하게 묘사함으로써 인물 형상을 선명하고도 두드러지게 하며 시가의 형상성과 감화력을 더하여 주었다. 또한 인물의 언어와 행동을 통하여 그 인물의 신분, 복식, 가정의 갈등, 습속 등에 대한 구체적인 답을 제공하여 주고 있다.넷째, 한악부민요는 사실주의가 주요한 성분을 차지하지만 낭만주의적 색체도 띠고 있다. 『시경詩經』국풍의 사실주의적 전통은 끊이지 않고 이어져 한대 악부시에서 보다 낭만적이며 구어체적으로 승화된 것 이다. 당시의 귀족 문학은 진부하여 창조적 역량을 상실하였으며, 따라서 문인들은 현실과 연결되어 진한 삶의 모습을 토로하던 민가로부터 문학적 생명력을 얻었다. 오히려 그들은 민가를 모방하게 되었으며, 당시 많은 문인들은 악부시를 주제로 작품을 쓰면서 서민들의 삶 속에 내재하고 있던 현실성과 낭만적 감각을 밀도 있게 묘사하였다.다섯째, 형식이 자유스럽고 다양하다. 본디 한漢의 악부시는 고정된 장법章法, 구법句法등이 없으며, 길고 짤음도 마음대로였다. 4언의 시경체詩境體를 답습한 것도 없지는 않으나, 절대 다수는 새로이 출현한 신체시라고 할 수 있다. 1자, 2자로부터 8자, 9자, 10자 등으로 구句를 형성하고 있는 잡언체가 있는가 하면 정연한 5언 체시가 나타났다. 5언시는 4언시보다 한 소절의 박자가 더 불어난 것만큼 더 많은 내용을 담을 수 있게 되었다. 풍부한 내용을 내포하고 더 높은 예술 표현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즉 다음절多音節의 어휘와 2음절의 어휘를 조합하여 어음이 조화되게 함으로써 더 높은 예술적 효과를 거두게 하였다. 이와 같이 다양한 형식을 빌어서 사상, 정감 등을 표현함으로써 형식적인 구속으로부터 탈피할 수 있었다.3.악부의 분류악부시의 분류는 서한 때는 채집 지역에 따라 분류하였으나, 이는 문학적, 음악적 분류는 아니었다. 악부를 음악의 성질과 용도에 따라 최초의 전문적인 분류를 한 때는 명제 영평永 4년(서기60년)에 이르러서 이다. 송대 정초鄭樵의 이른바 4품론四品論에 의해 네가지로 분류하고 있는데 다음과 같다.
게이오 대학에 대한 탐구- 위치 : 일본 도쿄- Homepage주소 : http://www.keio.ac.jp- 구분 : 사립 종합대학- 설립자 : 후쿠자와 유키치설 립 연 도 1858년전 형 시 기 4월/6월(전형료) 35,000 円(입학금) 340,000 円(수업료) 620,000 円1.설립배경일본 메이지유신[明治維新]시대 사상가이자 교육가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가 1858년 난학숙(蘭學塾:네덜란드어 서적으로 서양학문을 가르친 학원)을 개설함으로써, 서양사상을 도입하는 데 앞장섰다. 네덜란드어의 실용성이 낮은 것을 인식하여 뒤에 영학숙(英學塾:영어서적으로 교육한 학원)으로 전환하였다. 1868년 당시의 연호(年號)인 게이오를 붙여 게이오기주쿠로 개칭되었다. 당시의 국가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제국대학(帝國大學)에 대한 대안으로 설립되었으며,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를 조성함으로써 개인의 발달을 중요시하였다.학교운영은 회사조직에 의한 공동운영방식을 취하여 서양식 공립학교(共立學校)를 지향하였다. 1890년에 대학부를 신설하여 이재(理財)·법률·문학의 3개 학과를 두고, 1898년 소학교·중학교·대학교의 일관교육제로 정비하는 교육제도를 확립하였다. 문부성은 1919년 게이오기주쿠대학을 종합대학으로 공식 승인함으로써, 1920년 대학령에 의한 대학으로 새로 발족하여 문학·경제학·법학·의학으로 구성된 일본 최초의 사립 종합대학이 되었다. 19세기 말 이래로 주로 실업계에 많은 인재를 배출하여 일본의 근대화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소·중·고등학교의 일관교육을 시행하는 종합교육기관으로서 사학(私學)의 지도적 존재가 되었다.*게이오 대학의 설립자 후쿠자와 유키치게이오 대학에서는 모두 같은 공부하면 같은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교수건 학생이건 따지지 않고 기본적으로 "기미(君, 너)"라고 부른다. 물론 이 뜻은 교수를 너라고 하칭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소위 말하는 게이오 류의 학풍은 그러하다는 것이다. 나 자신 내면의 힘을 열라 믿으며, 우리는 동등하니까, 서로 평등하게 지내캠퍼스 설립을 추진하면서 지역교육청에 신고서를 제출했을 때의 에피소드가 있다. 교육청에선 이 학부가 문과인지 이과인지를 물었다고 한다.게이오측은 문과도 이과도 아니다 고 답했다. 그러자 교육청에선 종합정책학부란 이름을 보니 문과쪽인 것 같다 며 신고서를 반려했다고 한다. 이유인즉 명문대학인 게이오가 새로운 학부를 만들면서 문과 출신으로만 1천명을 뽑으면 이 지역 군소대학 문과는 망하고 인재 독점의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게이오측은 할 수 없이 이과 냄새가 나는 환경정보학부를 하나 더 만들어 문/이과 구분해서 5백명씩 나눠 뽑겠다고 설립신고를 다시 냈더니 허가가 났다. 학생들은 입학당시 소속 학부는 정해지지만 전공은 따로 없다.2개 학부 통틀어 6개 분야(환경정책,사회경영,국제정책,지식정보,인간환경,미디어환경) 중 졸업 때까지 20학점(10과목) 이상 들은 분야가 있으면 그게 곧 자신의 전공이 된다.그러니 이 캠퍼스에 다니는 학생들에게 전공이 뭐냐고 물으면 졸업때 가 봐야 안다 는 대답이 나온다.정규 과목과 별도로 연구회 란 이름의 수업이 있다. 이중 컴퓨터오락게임 만드는 연구회 수업을 살펴보면 문과학생들과 이과학생들이 공동수업을 어떻게 하는지 잘 드러난다. 이 수업에서 학생들은 1학기 동안 시장에서 팔릴 만한 새로운 프로그램을 만들어야 한다. 학생들은 기획반, 프로그램반, 음악반, 영상반 등 소그룹으로 나뉜다. 문과 학생이 기획을 맡아 발표한 상품 아이디어 중 흥미가 있는 쪽을 이과 학생이 채택하면 두 학생이 한 팀이 되어 기획과 제작을 맡는다. 음악반과 영상반 학생들도 각자 아이디어로 참여한다. 만일 아이디어가 시원찮아 스카우트나 제휴 등에 실패한 학생은 아무 그룹에나 사정해서 낀 뒤 잔심부름을 도맡아야 한다. 이 과정에서 교수의 개입은 거의 없고 매번 새로운 아이디어와 제작상의 문제점 등을 토론하면서 학생들끼리 수업을 진행한다. 이 캠퍼스 학생들은 1,2학년 때 누구나 필수과목 2개를 들어야 한다. 외국어와 컴퓨터다. 학교측은 외국어를 자연언어, 컴퓨터를 진다. 종합교육과목은, 우리들이 현대사회를 살아가면서 발생하는 여러 가지 문제에 대처하기 위해서 빼놓을 수 없는 기본적인 교양을 익힐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것은 법학부가, 학생이 넓은 시야와 더불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판단력을 고루 갖춘 인간이 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1) 법률학과 소개학생들 하나 하나의 개성과 목적지향에 맞추어 합리적인 학습과 연구를 통해서, 높은 견식과 넓은 시야가 뒷받침된 법률적인 사물의 이해방법을 함양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고 있다. 필수과목은 헌법, 민법총론, 형법총론의 3과목으로 한정하고 있다. 우선 필수과목에서는 기본원리를 학습하고 나서, 상법, 소송법, 행정법, 노동법, 국제법, 외국법, 법제사 같은 법률의 각 분야로 학습을 심화시켜 나갈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폭 좁은 전문분야에만 너무 치우치지 않도록 여러 인접학문, 예를 들면 정치학이라든가, 정치사, 국제정치론, 사회학, 경제학, 통계학을 연구할 수 있는 기회도 충분히 배려하고 있다.2) 정치학과 소개넓은 시야와 국제감각을 익히고,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는 풍부한 상상력과 판단력을 가진 인재육성을 교육의 기본방침으로 하고 있으며, 학생 한 사람 한 사람의 문제의식과 연구관심에 따른 자유로운 학습과 연구가 될 수 있도록 배려하고 있다. 우선 필수과목은 정치학과 헌법의 2과목에 한정하며, 이수선택의 폭은, 단순히 정치학의 분야에만 머물지 않고, 더 나아가, 사회학, 법률학, 경제학 같은 사회과학의 기초가 되는 모든 학과목을 갖추고 있다. 동시에, 정치학과 사회학을 구성하는 5가지 분야인「정치사상론」「정치사회론」「일본정치사」「지역연구론」「국가정치론」을 비롯하여, 전문학과목이 개설되어있다.폭 넓은 지식을 원하는 사람들도, 특정한 지역이나 사상가나 정책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교과 과정이다. 법학부의 역사는 이미 110년에 이르고있으며, 그 동안 배출한 졸업생은 7 만명을 넘었는데, 그 가운데 통신교육과정의 졸업생은 2,202명에 이르고 있다) 보이' 라는 유행어도 있을 정도. 즉 게이오대 부설 유치원에 입학할 경우 게이오 중, 고를 거쳐 게이오대까지 쉽게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이 유치원 입학경쟁은 그야말로 전쟁터다. 그러나 대체로 일반가정의 사교육비 부담은 그렇게 크지 않다.*게이오 보이- 명문 사립 게이오 대학부속 유치원에서 출발. 게이오 초중고와 대학을 거쳐 중앙부처공무원 등 사회엘리트층으로 골인하는 일본인을 일컫는 말이다. 일본인들은 이를 '에스컬레이터 현상'으로 부른다. '성공인'은 유치원 입학으로 '점지'된다는 믿음이 강하다. 즉, 명문사립초등학교 입시 때 명문유치원 출신이 유리하다는 것이 학부모들의 얘기이다.예를 들어 일본의 호메이 유치원은 어떻게 사회엘리트의 자질을 심어줄까 하는 것에 대해서 이렇게 말한다. "특별한 교육법은 없습니다. 다만 '그런' 아이들을 모아 놓는데 방법이지요. 상대의 능력과 품성에 스스로 자극받도록 말입니다."4. 게이오 대학의 현재 근황 겸 관련 사설1. 대학개혁의 선두 게이오 대학역사가 오래된 명문대학일수록 개혁과 변화엔 소극적인 게 보통이다.그런 점에서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대학 게이오가 쇼난 후지사와 캠퍼스를 통해 추구하는 변화는 상당히 이례적이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게이오 대학은 올해로 설립된지 1백41년된 일본의 대표적 명문 사학이지만 후지사와 캠퍼스는 10년밖에 되지 않았다.도쿄와 그 주변에 흩어져 있는 게이오 대학의 4개 캠퍼스 중 가장 최근에 설립됐으며 학부 신입생 정원이 8백명에 불과한 소규모 캠퍼스다.게다가 도쿄에서 서쪽으로 70㎞쯤 떨어진 시골에 위치한 지방 캠퍼스다.그러나 일본의 유수한 대기업들이 최근 쇼난 후지사와 출신 게이오 졸업생들을 스카우트하지 못해 혈안인데다 각 기업마다 후지사와 배우기 열풍이 불고 있다.이 캠퍼스 출신 학생들의 창의력과 문제해결 능력을 높이 사기 때문이다.이 캠퍼스에선 학생들의 과목 선택에 문/이과 구분을 하지 않는다.거의 모든 과목을 문·이과 출신 학생들이 제한없이 섞여서 같이 듣고 있다.입학모든 부문에서 상위를 차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3. 일본 내각 경제팀 게이오대 인맥이 장악일본 사학의 명문인 게이오(慶應)대 인맥이 고이즈미 2기 내각의 경제팀을 장악해 눈길을 모으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지난달 30일 단행한 개각에서 도쿄대 법학부 출신인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금융상과 와세다(早稻田) 법대출신의 다케베 쓰토무(武部勤) 농수상이 경질됨에 따라 내각 경제팀은 게이오대 인맥 일색으로 탈바꿈했다.정부의 경제재정자문회의 의장을 맡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를 정점으로 시오카와 마사주로(鹽川正十郞) 재무상, 히라누마 다케오(平沼赴夫) 경제산업상, 오시마 다다모리(大島理森) 농수상이 모두 게이오대 출신이다. 여기에다 히토쓰바시(一橋)대를 졸업했지만 게이오대에서 교수로 재직했던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 경제재정상은 이번 개각에서 유임에 성공한 것은 물론 금융상 자리까지 꿰찮고 앉았다.이런 점에서 고이즈미 총리는 자민당내 '파벌파괴'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학벌'은 깨지 못한 측면이 있다. 이를 입증할만한 일화가 최근에 인구에 회자된 적이 있다. 지난 8월초 일본 정부는 오는 2004년부터 1천엔, 5천엔, 1만엔권을 대신할 새 지폐를 발행한다고 발표했다. 1천엔과 5천엔권의 인물초상은 바뀌지만, 1만엔권의 경우에는 현재의 후쿠자와 유키치 (福澤諭吉) 초상을 그대로 사용하기로 했다.고이즈미 총리와 시오카와 재무상이 게이오대 설립자인 후쿠자와를 '예우'하기위해 초상을 바꾸지 않았다는 것이다. 앞서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일본 의회연설에서 영어의 '컴페티션(competition)'에서 '경쟁(競爭)'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낸 인물이 후쿠자와 유키치라고 소개, 연단 아래에 있던 고이즈미 총리를 '기쁘게' 한 적이 있다.4. 게이오 출신의 많은 일본 정부 각료들(Roots of Rebellion)일본 정부 각료들의 지적인 뿌리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다. 개혁 주도 세력인 5명의 각료가 게이오(慶應)大 출신이거나 거기에서 교수생활을 했이다.
*여성할당제에 관한 보고서*먼저 제가 조사해 본 바에 의하면 최근 유엔 174개국을 비교조사한 유엔개발계획(UNDP)의 99년 인간개발보고서에 따르면 여성의 교육수준, 재산, 평균수명을 기준으로 산정하는 여성개발지수(GDI)는 174개국 중 우리나라가 30위였으나 여성의 전문직 종사율, 여성의원 수, 소득수준 등을 기초로 산출되는 여성권한지수(GEM)는 78위에 불과했다. 이는 우리나라 여성들의 높은 교육수준과 능력에 비해 사회적 지위가 열악함을 한눈에 보여주는 것이다.이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 여성의 의회진출 비율은 3.7%로 이는 전세계 여성의 의회진출 평균 11%에도 미치지 못할 뿐 아니라 여성의 의회진출 비율이 5%에도 미치지 못하는 최악의 31개국의 하나로 꼽히는 불명예를 안게 되었다. 행정관리자(administrators and managers) 비율도 4.2%로 거의 최하위에 머물고 있다.이는 사회 각 분야의 만연적인 불평등과 관행적 차별이 눈에 보이지 않게 존재하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다.그럼 이와 같은 열악한 환경을 개선하고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잠정기간 동안의 적극적 조치(positive action)로서의 여성할당제(quota)다. 기존의 남성중심의 사회구조와 정치구조가 변화하기 어려우므로 이에 대한 교정적 장치로 북유럽을 비롯 많은 나라에서 그 필요성에 따라 제한적으로 여성할당제를 실시하고 있다.실제로 이미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캐나다, 호주 등 많은 선진국가에서 각 분야의 여성참여 증진을 위한 목표율 설정 내지 할당제를 실시함으로써 정치, 경제, 교육, 사회 등 모든 부문에서의 평등실현 속도를 촉진하고 있다.99년 UNDP 보고서에 따르면 현재 여성의 의회진출 비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스웨덴(42.7%), 노르웨이(36.4%), 스위스(33.5%), 네덜란드(31.6%)순. 여성 행정관리자의 비율은 피지(48.3%), 도미니카(44.8%), 미국(44.3%) 스웨덴(43.3%) 순이었다. 하지만 이들 몇 나라도 아직 그 목표비율인 50% 할당을 못 이루었을 뿐 아니라 많은 나라의 여성들은 실질적으로 여성의 권한행사에서 가장 중요한 정치·경제분야에서 여전히 10%대의 비율밖에 차지하지 못하는 등 낮은 지위에 머물고 있다.심지어 차별철폐협약을 제정한 유엔에서조차 이 불평등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어서 2000년까지 우선 유엔 사무국 직원 중 50%를 여성으로 채우겠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얼마 전 열렸던 경제사회이사회 고위급 회의에서는 「빈곤타파에 있어서의 고용과 근로의 역할 : 여성의 세력화와 여성지위 향상」을 토론하는 자리에 고위급 여성 참석자가 한 사람도 없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그럼 이렇게 여러나라에서 행하고 있는 여성할당제를 우리나라에서도 시행해야 하는 법적근거는 헌법 제6조에 근거하여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갖는 유엔 여성차별철폐협약 제4조 제1항에서는 『남성과 여성 사이의 사실상의 평등(De Facto Equality)을 촉진할 목적으로 당사국이 채택한 잠정적 특별조치는 본협약에서 정의한 차별로 보지 아니하나, 그 결과 불평등 또는 별도의 기준이 유지되어서는 결코 아니 된다. 기회와 대우의 평등이라는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이러한 조치는 중단되어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 규정은 할당제와 같은 적극적 조치의 합법성을 분명히 하고 특별조치로서의 적극적 조치의 한시성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또 이 조항에 근거하여 『교육, 경제, 정치 및 고용에의 여성참여를 증진하기 위한 적극적 조치, 우선대우 또는 쿼터제 같은 임시적 특별조치를 보다 많이 활용할 것』을 각국에 권유하고 있다. 즉 이 협약을 통하여 유엔은 남성과 여성 사이의 고정적 역할분담에 대항하여 여성의 완전한 발전가능성 속에서 사실상의 평등을 이룰 때까지 한시적으로 적극적 조치를 허용하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유엔 권고에 따라 우리나라도 95년 여성발전기본법을 제정, 제6조에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여성의 참여가 현저히 부진한 분야에 대하여 합리적인 범위 안에서 그 참여를 촉진하기 위하여 관계법령이 정하는 바에 따라 잠정적인 우대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잠정적 우대조치」 조항을 신설했다.이외에도 99년 1월 공포되고 7월 1일부터 시행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 관한 법률 등 후속법률을 통해 고용·교육분야에서의 성차별 사안을 조사하고 과태료와 벌금 등을 부과할 수 있는 준사법권을 여성특별위원회에 부여하는 획기적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정부에서는 우선적으로 공직부문 여성의 대표성 제고를 위해 여성차별을 해소하기 위한 쿼터제를 적용, 시행하고 있기도 하다. 2002년까지 정부 각종 위원회의 위촉직 위원 중 여성참여율을 30%까지 상향시키기 위해 연도별 여성위원 참여 목표율을 설정하여 운영하고 있는 것이 한 예이다.또 행정자치부에서는 96년부터 시행하여 왔던 공직여성채용목표제(5·7급에 적용. 96년 10%, 97년 13%, 98년 15%, 99년 18%, 2000년 20%)를 99년 2월부터 확대하기로 계획하였다. 공무원 채용시험에서 연도별 여성채용목표 비율과 실시기간, 직급별 비율을 상향조정하거나 연장하기로 한 것이다(2002년까지 5급 20%, 7급 25%, 9급 30%를 여성에게 할당). 또 보직부문에서는 여성공무원이 다양한 업무경험을 통해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여성공무원발전기본계획을 수립함으로써 각 기관마다 「1과 1여성제」를 도입, 기획·인사·예산·감사분야 등 전략업무에의 여성배치를 적극 권장하기로 했다.그러나 가부장적 문화가 뿌리깊은 우리나라에서는 정부의 노력이나 법적, 제도적 정비만으로 여성차별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가장 큰 딜레마다. 가장 큰 문제로 꼽히는 정치부문의 여성참여부터 살펴보자.여성 정치지망생들은 정당의 공천과정에서 소외되고 어렵게 공천을 받아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당선이 힘든 게 현실이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각 당은 선거제도 개혁안을 다투어 내놓고 있지만 또 정당마다 선거 때면 여성후보에게 20∼30%를 할당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언제나 지켜지지 않는 약속이 되어왔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년 4월 총선을 「21세기 여성 정치참여의 원년」으로 만들기 위해 여성단체들이 먼저 결의를 다져야 한다. 우선 정당의 당헌이나 내규에 30% 할당제의 명문화와 실천을 강력히 촉구하고 동시에 북경여성대회의 행동강령 원칙에 입각해 여성의 비례대표 30% 쿼터제를 잠정적 조치인 특별법으로 법제화시키는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여성 경영인 및 전문인력에서의 여성 참여비율을 확대시키기 위한 방안으로 현재 정부는 여성기업인지원법(1999) 제정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기업의 경우 직종, 직위 등에 따라 다르며 개별기업의 차이를 고려하지 않은 획일적인 할당제는 비례의 원칙에 반하기 쉬우므로 조심스러우나 여성인력의 규모, 노동시장의 상황 등을 고려하여 기업 자율로 목표율을 정해 실시토록 해야 한다.이를 위해 정부가 할당제의 필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교육을 펴고, 세제상 또는 재정상의 지원책과 유도책 등으로 실질적인 영향을 주는 것이 필요하다. 또 전문 여성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교육 지원과 함께 여성에게도 직업교육이나 연수에서의 평등한 기회보장, 나아가 역차별이 있다 해도 공공직업훈련에서 50% 이상의 여성우대계획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