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 과 무엇 사이-과학의 한계예전의 어떠한 사상들은 그리고 그 사상가들은 항상 무엇 이라고 정의했었다. 그 무엇 은 항상 비판의 대상이었다. 그리 하여 또 다른 무엇 이 창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다 그 무엇 또한 다른 사상가들에 의해 비판... 무엇의 무엇 , 무엇의 무엇의 무엇 , 무엇의 무엇의 무엇의 무엇 , 무엇..... 이런 식이다. 어떻게 보면 그 진리 라는 무엇 에게 살이 덧붙여지는 셈이다. 그러므로 결론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진리는 진리가 아니다! . 이는 변증법과도 비슷하다. 어떠한 생각에 비판이 따르고 거기에 맞는 답이 하나 도출된다. 그러나 여기가 끝은 아니다. 또 다른 답을 향해 사람들은 끝없이 도전하는 것이다. 과연 그 끝은 어디일까?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서, 예전의 그 사상가들은 이것 아니면 저것 이었다. 그러니까 자신의 입장에서는 항상 무엇 이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이냐 저것이냐 . 이것과 저것은 항상 대립을 이루어왔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가 그랬고 왕정과 공화정이 그랬다(이런 것 외의 그 숱한 많은 것들을 어떻게 일일이 모두 나열할 수 있을까). 그런데 요즘의 양상은 이와 많이 달라졌다. 대립되는 양면의 좋은 점만 받아들이는 어느 사이에 끼는 일이 생긴 것이다. 이를테면 이것도 저것도 . 극에서 극으로 치닫는 각자의 대립되는 사상의 교집합 적인 양상을 찾아내기란 그리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허나 사상가들은 드디어 무엇 과 무엇 사이라는 아주 중도적인 너그러운 양상을 띠는 것을 찾아낸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많은 비판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상가는 그 무엇 을 진리라고 받아들였지만 다른 사상가의 눈에는 그것이 비판 대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후대의 학자는 뻔히 비판받을 줄 알면서 그 비판을 고스란히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전자의 무엇 과 후자의 비판적인 입장 그 둘을 한꺼번에 수용하는, 그러면서 한 단계 더 발전하는 새로운 무엇 을 하나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는 끝없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끝(그 끝이라는 것이 있을까? 있다면 신-철학적인 신-을 향한 끝이 아닐까? )을 향하는 무한한 작업들인 것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앞서 말한 무엇에 대한 무엇의 무엇 과는 다른 것이다. 비판적인, 그러니까 그 반대의 입장인 무엇 까지도 아울러서 또 다른 무엇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무엇과 무엇의 사이 라는 것은 전자의 무엇과 후자의 무엇을 모두 아울러서 내세울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어느 한편으로 치우친다면 그 사이 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사이 라는 것은 과연 완벽한 것이라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사이 와 또 다른 무엇 이 나올 것이다. 그렇다면 후세의 누군가는 또다시 사이 와 무엇 둘 다를 아우르는 사이 를 찾아내야 할 것이다.패러다임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은 그 패러다임이라는 숲 전체를 조망할 줄 알까? 패러다임 자체가 자연을 파헤치기 위해서 나온 것이라면 그 패러다임은 자연이라는 전체를 조망할 수 있을까? 나는 아니라고 본다. 패러다임은 자연의 그 역동적인 출렁임의 흐름 중 일부분밖에는 알지 못한다. 자연은, 어느 한 틀 속에 들어갈 수가 없다. 자연 속에는 신의 암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신의 암호는 어느 한순간 속에 포착되어 있는 기계적인 것이 아니라 유기적인 것이다. 끊임없이 활동한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자연을 패러다임 속에 집어넣으려는 시도 그 자체가 모순이 아닐까 생각한다. 道可道 非常道와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패러다임 속에 자연을 집어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자연은 밖으로 빠져나가 있다. 패러다임-자연의 일치 에서 자연의 일치란 것은 패러다임이 포착한 자연의 여러 활동하는 모습중 한 모습일 뿐이다. 패러다임에서 한발 뒤로 물러나야 패러다임을 볼 수 있다. 불완전한 인간이 만든 패러다임이 완전할 리가 있으랴. 끊임없는 수정만이 있을 뿐이다.나뭇잎을 관찰, 연구하는 과학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그는 나뭇잎을 관찰, 연구해서 나뭇잎의 실체를 밝혀내려고 한다. 그는 나뭇잎의 구조나 구성성분따위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과학자는 드디어 그 나뭇잎의 실체 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과연 그 나뭇잎 은 과학자가 파헤친 나뭇잎과 동일하다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나뭇잎 은 그 자체가 하나의 매트릭스로써 존재한다. 과학자는 매트릭스 속에서 매트릭스를 밝혀내려고 노력한 것에 불과하다. 허나 매트릭스 속에서는 매트릭스를 알 수 없다. 매트릭스를 벗어나야만 매트릭스 전체를 볼 수 있다. 나뭇잎은 어떤 실체로서의 나뭇잎이 아니다. 거대한 자연 전체를 이루는 전체 네트워크 조직의 일부이자 전체인 것이다. 고로 나뭇잎은 나뭇잎 인 것이지 어떤 실체가 아닌 것이다. 과학자가 그 실체를 손아귀에 넣었다고 하는 순간 미꾸라지처럼 자꾸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뭇잎을 나뭇잎 으로 보는 순간 과학자는 또다시 늪에 빠지게 된다. 왜냐하면 나뭇잎 또한 자연아래(그렇다고 해서 계층성이 있다는 것은 아니다)의 유동적인 하나의 小매트릭스이기 때문이다. 이 매트릭스는 닫혀 있으면서 열려있고, 열려 있으면서 닫혀있다.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방향성이 아니다―이런 의미에서 과학의 한 방향성은 자연을 파헤치는 데에 어느 정도 한계성을 지니고 있으며 끊임없는 패러다임의 이상현상이 발견되는 것이다. 아마도 과학은 기계적인 사고방식에서 유기적인 사고방식으로 전환하지 않는 한 이러한 모순은 극복하기 어려우리라. 허나 이 말 또한 모순인 것을...어찌하였건 중요한 것은 나뭇잎은 나뭇잎 일 따름이라는 것이다.
성찰지금 내 앞에는 거울이 있다. 거울 속에는 나의 모습이 비추어지고 있다. 나는 여기에 이렇게 있고, 내 맞은편에는 거울 속의 나 가 저렇게 있다. 눈을 깜빡여 본다. 콧구멍도 벌름거려 본다. 눈썹도 움직여 본다. 신기하다. 내가 저렇게 생겼구나... 내가 하는 짓을 모두 따라하는 걸 보니 거울은 만능인가 보다. 그래 말을 걸어보자. 나는 누구냐! , ..... 대답이 없다. 다시 한번더 너는 누구냐! , ..... 내 머릿속에서만 메아리처럼 되풀이되는 나의 말소리. 거울은 가짜인가? 만능인줄 알았더니 그렇지는 않은가 보다. 말 걸어도 대답 않는걸 보니 거울은 가짜다. 그렇다면! 그 가짜인 거울 앞에서 알짱거리는 나는 진짜인가. 나는 어떻게 해서 내가 진짜라는 걸 알 수 있는가. 나는 사실 내 모습을 정말로 본 적이 없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내 머릿속에 각인시킨 것일 뿐. 거울 속의 저놈은 과연 정말 나 일까. 왜곡된 것은 아닐까. 나에게 어떤 신비한 능력이 생겨서(유체이탈 같은 능력) 내 몸을 빠져나가게 되었을 때 나는 내 몸을 알아볼 수 있을까? 그때 본 내 신체가 과연 거울 속의 나의 신체와 같을까? 가만히 곰곰이 생각해보니 내 모습이 비추어지는 곳이 한 곳 더 있다. 바로 타자의 눈이다. 상대방은 비록 내가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내 모습은 아니지만 내가 있기 때문에 상대편에 있는 존재 라고 느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상대방에게 나는 같은 질문을 한다. 나는 누구냐! , 너는 홍길동이다. , 그렇다면 너는 누구냐! , 나는 너의 친구이다 이런 식으로 나는 엮여져 있는 것이다. 내가 있으므로 해서 상대방이 있는 것이고 상대방의 눈 속에, 머릿속에, 가슴속에 나 라는 인간이 파악(화이트헤드가 말하는 파악)이 되어 남아있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나 에게 있어서는 주체이지만 상대방에게 있어서는 객체인 것이다.이제 사회를 생각해보자. 멀리 갈 것 없이 김해. 정말 많은 주체이자 동시에 객체인 사람들이 살고 있다. 이 주체이자 객체인 하나의 자아는 그 많은 사람들 중 그 만이 홀로인 채로의 존재일까? 아니다. 그 는 친구가 있다. 그는 가족이 있다. 그는 동료가 있다. 그는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하나이지만 집단과 어우러짐 속의 하나인 것이다. 그리고 그 집단은 다른 집단과 떨어진 고독한 집단이 아니라 다른 집단과 연계된, 전체 그물망속의 집단인 것이다.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을 엮어주는 메커니즘은 리오타르가 말하는 언어게임 일수도 있고, 다른 여타의 내가 알지못하는 방식의 기술들이 있을 수 있다. 이렇게 하여 엮여진 세계체제. 세계체제라는 것도 결국은 자본주의라는 하나의 거대한 틀로 엮여진 것이 아니겠는가.나 는 그 자체로서의 나 이지만 동시에 여러 개의 분화된 나 일수도 있다. 친구들 집단에서는 친구로서의 나 , 가족에게 있어서는 형으로서, 아우로서, 아들로서의 나 , 동료로서의 나 , 사랑하는 대상으로서의 나 등등. 시각에 따라, 집단에 따라 하나의 나 가 여러 개의 나 로 보여지는 것이다. 세계를 바라보는 시각도 이와 마찬가지이다. 자유주의적인 시각에서 바라보는 견해도 있고 중상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는 견해도 있는 것이다. 왈러슈타인은 그 둘과는 또 다른 시각인 세계 경제체제에서 이 세상을 바라보고 있다. 거대한 숲이 하나 있는데, 그 거대한 숲을 각자 서 있는 장소에서 통과하는 방식을 써 놓은 것이다. 어쨌든 그들이 지나간 그 길은 틀린 길이 아니다. 나는 세계체제라는 것도 하나의 제대로 된 길이라 생각한다. 여기에 나의 생각을 조금 더 덧붙여 보기로 하겠다.여태까지 나는 미시적 차원에서 거시적 차원까지 대략 설명을 해 보았다. 그 이유는 거시적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그것자체가 애초부터 거시적인 것이 아니라 미시적인 것이 모여 거시적인 것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거시적인 모습은 사실 미시적인 것들이 없으면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때 이 미시적인 성질의 것들은 많은 부분이 같아야 된다. 하지만 모두 같으면 안 된다. 같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서로 여전히 따로이 있을 때 그것들이 이루는 전체적인 모습인 거시적인 것도 하나의 형상을 갖추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 미시적인 것들이 그 자리에 가만히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주체적으로 움직인다. 이 움직임이 미시적인 것들 나름대로는 크게 느껴질지는 모르나 거시적인 차원에서 바라봤을 때는 정말 미세한 움직임일 것이다. 하지만 미시들이 모여 거시를 이루듯이 미시들이 움직여 거시를 변화시킬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너무 미묘한 움직임이라서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조급함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겠다. 그리하여 카진스키 같은 사람은 혁명을 바란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 사회는 지난 역사가 말해주듯이 그리 급하게 흘러간 적이 없다(이런 의미에서 미국을 바라보노라면 과연 어떻게 되어 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복잡성에 대한 좀 더 밝은 빛*불과 몇십년 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우리는 굉장한 속도의 시대에 살고 있다. 책상에 앉아서 컴퓨터를 켜면 정보의 바다 속으로 풍덩 빠져든다. 그것도 광케이블을 통한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그 정보들중 나에게 필요한 것을 받아들인다. 어디 이것뿐인가. 이동수단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예전에 부산대에서 아침에 출발해서 양산 통도사까지 도보여행을 한 적이 있다. 중간에 내원사를 경유하는 바람에 다음날 오전 10시쯤에 통도사에 도착했는데 거리는 40~45Km정도.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부산행 버스를 탄지 1시간만에 부산에 도착해 버렸다. 정말 상상할 수 없는 시간 절약이었다. 우리는 이런 굉장한 속도의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러면 예전보다 더 많은 여유를 누려야 하는 게 옳은 것이 아닌가. 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여유는 더 줄어든 것 같다. 무엇이 어떻게 작용했길래 이런 지경에 오게 된 것인가.속도가 빨라진 만큼 그 비용이 늘어난 탓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전에는 속도가 느렸던 만큼 거기에 드는 비용도 적었으리라. 이렇게 보면 빠르면 빠를수록 사람의 마음속은 비좁아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고로 조지프 A. 테인터가 말하는 한계수익, 한계생산을 한쪽으로 제껴둔다하더라도 사람의 마음 밭이 좁아진다는 것은 정신이 없어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는 것. 즉 무엇인가가 나를 혼란스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것이 복잡성일 것이다. 조지프 A. 테인터가 말하는 한 문명의 정점에서의 복잡성. 그는 이것을 어쩔 수 없는 선택의 귀결로 받아들이며 그리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조명으로 비추고 있다. 나는 이 조명의 빛을 좀 더 밝게 비추고 싶다.나는 영화를 좋아해서 주말에 부산 남포동을 자주 나간다.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지만 사람 만나기가 용이한 부산극장 밑에 있는 맥도날드 가게 앞에서 친구를 기다리고 있노라면... 아!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라는 생각이 고개를 쳐든다. 나를 포함한 그 수많은 사람들은 너무나 북적대고, 혼란스럽다. 어지럽다. 그래서 한번은 이 많은 사람들이 왜 여기서 북적대고 있나... 생각이 되어서 한명한명 자세히 관찰해 본적이 있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는 상당히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광경이지만 그 한명한명에게는 각자 나름대로의 목표가 있는 듯 하다. 지하철역에서 나와서 핸드폰 가게로 들어가는 사람, 택시에서 내려서 커피숍으로 가는 사람, 버스에서 내려서 금은방으로 가는 사람 등등등... 그 수많은 사람들이 한데 어우러져 복잡하지만, 그 내부구조는 어떠한 질서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하나의 질서는 각각 어느 한 끝을 향해 가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의 끝은 -어느 가수가 말했듯이- end가 아닌 and이다. 끝은 또 다른 시작인 것이다. 택시에서 내려 커피숍으로 들어갔던 것이 나의 눈에는 end로 보였지만, 사실 그 end는 친구를 만나기 위함이었고, and로 이어지는 친구와의 극장 행이 그(혹은 그녀)의 그 날의 진정한 end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 또한 end가 아닌 and인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명, 그 속의 복잡성도 이와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지금 우리는 어느 끝자락에 서 있는지 아니면 새로운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서 있는지 알 수 없다. 일단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그 끝과 시작은 이어져 있다는 것이다(모던에 대한 회의에서 포스트 모던이 나오 듯이).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끝과 시작을 이어주는 매개체이다. 그것은 바로 되돌아보는 것, 즉 성찰이다. 시간이라는 것은 두루마리 휴지를 말아놓은것과 같다. 차곡차곡 쌓여서 둘둘 말려져 있다. 이것을 조심스레 펴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연구는 우리 문명이 여기까지 걸어오게 된 길을 다시 되짚어보는 작업이 될 것이다. 이러한 작업이 없이 무조건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면 정말 end에 서게 될 지도 모른다. 지금 문명의 되돌아보지 않는 달리기는 죽을 줄 알면서도 불 속에 날아드는 불나방과도 같다.
평등과 불평등 그 모호함에 관하여우리가 살고있는 현대사회에는 위로는 엘리트계층부터 시작해서 아래로는 노동자계층까지 다양한 계층이 살고 있다. 그런데 이 계층 안에 새로운 계층이 생겨났다. 보보스가 그들이다. 보보스라는 말은 부르주아(Bourgeois)와 보헤미안(Bohemian)을 합한 말이다.부르주아는 진지하고 현실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전통과 중산층의 도덕을 옹호했다. 그들은 대기업에서 일하고, 교외지역에서 살고, 교회에 다녔다. 반면에 보헤미안은 전통을 비웃는 자유주의자들이다. 그들은 예술가와 지식인들로서 히피족과 비트족이었다. 보헤미안은 진보적인 1960년대의 가치를 옹호했던 반면 부르주아는 1980년대의 기업중 심적인 여피들이었다. 보보스는 반문화적인 60년대의 가치와 성취적인 80년대의 가치를 절묘하게 결합시킨 자들이다. 아이디어와 지식은 경제적 성공에 필수적이다. 이 시대에 번창하는 사람들은 아이디어와 감정을 제품으로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다. 보보스는 교육을 많이 받은 사람들인데, 한 쪽 발은 창의성의 보헤미안 세상에 있고 다른 쪽 발은 야망과 세속적 성공의 부르주아 영토에 있다.이들의 구매습관이나 삶에 대한 모든 부분이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것들이었다. 너무나 멋진 삶이라서 여러 사람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너무나 각박한 삶인 것 같다. 사실 자신의 직업에 열정적인 모습은 정말이지 나도 부럽다. 자신이 하고싶은 일에 매달려 산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이 어디 있을까. 하지만 그렇게 자신의 적성에 맞는 일을 찾아서 할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TV광고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들의 직업, 그리고 나오는 멘트들... 그렇게 열심히 일하고 언제든지 떠날 수 있는 사람들이 과연(전 세계적으로 생각할 것도 없이 우리나라, 아니 경상남도 안에서) 몇이나 될까. 사실 그러한 능력이 선천적이지는 않다. 후천적인 어떠한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이 노력의 과정에서도 뒷받침 해 줄 수 있는 무엇인가가 있어야 된다. 개천에서 용 나기등의 모호함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는데, 그 생각들을 전개해 보기로 하겠다.현대사회는 민주주의에 의한 평등한 사회이다. 평등한 만큼 능력지상주의이다. 능력주의자들은 보상에는 차이가 있어야 된다는 입장이다. 그래야 직업에 충원(어떠한 직업에 뽑힘을 당하는 것)되는 과정에서 경쟁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직업에 충원되기 위해서는 교육을 잘 받아야 된다. 대학에 다니는 이유는 충원에 대한 전제조건을 취득하기 위함이다(그러나 교육과정을 거쳤다고 해서 무조건 충원되는 것은 아니다). 보상이 평등하면 평등할수록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충원되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래서 복지국가가 위기에 봉착하고 다시 아담스미스로 돌아가는 신자유주의 이론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의사가 될 려는 목적은 돈을 많이 벌기 때문인 것이다. 이렇게 교육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이 교육이라는 것은 가정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 부모가 대학교 졸업한 경우의 자녀가 거의 대학교에 들어간다. 노동자의 자녀는 대학교에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이제는 더 이상 대학교육은 엘리트들만의 것이 아니다. 대학교육이 대중화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자들의 자녀는 대학교에 진학하지 않는다. 이유는 자녀들에게 학습동기를 조성해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먹고살기 바쁜데 교육까지 신경 쓸 여유는 없는 것이다. 특별히 신분타파의 필요성을 느낀 아이가 아니면 노동자 계층의 지위를 아이들은 그대로 물려받는 것이다. 반면 엘리트 부모일수록 자녀에게 학습동기를 부여, 나아가서는 강요한다. 공부를 잘 했느냐 못했느냐는 전적으로 내 탓만은 아닌 것이다. 상위계층의 가정에서는 특권지위나 부까지도 자식에게 물려준다. 이렇게 빈곤의 악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현대사회는 불평등의 단일한 원천이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든지 자신의 노력여하에 따라 신분을 타파할 수 있다. 사람들이 자기의 좋은 여건을 포기하면서 까지 많은 돈을 들여 외국에서 유학공부를 하는 것은 교육에 따른 보상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계급이 높다고 해서 꼭 보 낮다. 계급은 높지만 오히려 거기에 상응하는 수입이 낮다는 것이다. 이렇게 계급과 소득간에 불일치가 있을 수가 있다.같은 전문직이라고 해도 어떤 특정 전문직은 봉급이 많고, 어떤 전문직은 봉급이 적다(사립대학의 교수와 국립대학의 교수의 봉급차이, 같은 사립대의 교수이지만 대학의 차이에 따라, 시대에 따라 보상의 정도가 차이가 난다).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직업에 따른 보상의 정도는 시장이 결정한다. 시장성 있는 전문지식이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웹 디자이너, 광고 카피라이터, 방송 기술요원 등은 예전에는 돈 많이 버는 희귀직종 이었으나 지금은 너무 공급이 과잉 상태이다. 우리는 그리고 나는 특정한 것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추어야 된다. 언제라도 사회의 어떤 부분의 요구에도 수용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한다. 멀티태스킹형이 되어서 그 범용성을 갖추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에 더불어 일반적인 지식과 기술도 갖추어야 된다. 나아가서는 창의성도 있어야 된다.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창의적인 생각을 해낼 수 있기 위해서 우리는 대학을 다니고 있는 것이다. 전문지식은 항상 획득되고 연마되어야 한다(직업적인 보장도 시장의 희소성과 함께 크게 변한다. 그리고 시장의 희소성과 수요가 맞아 떨어져야 된다).공무원의 소득은 상대적으로 낮다. 하지만 많은 학생들은 시간과 정열을 들여서 공무원 시험을 치르고 있다. 공무원이 될 려는 것은 일반회사보다 안정적이기 때문이다(일반회사는 40대 후반까지 전문 경영인이 되지 못하면 옷 벗고 나와야 된다). 그리고 공무원은 신분이 보장된다. 장기적인 수입 전망으로 봤을 때, 지금은 비록 월급이 적지만 승진을 할 경우 권력이 많아지기 때문에 공무원이 될 려고 한다.이리하여 돈을 많이 벌게되면 지위나 계급을 강탈하려는 경향이 있다. 계급은 낮지만 돈을 많이 벌면 값비싼 소비재 내구재를 선호하거나 전시함으로 해서 자신의 지위를 뽐내는 경우가 많다. 폴로 티셔츠를 구입하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이러한 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들은 지위를 강탈하려고 그러는 것인지도 모른다. 고급 장식장의 경우 옆집에서 사면 나도 사고싶어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값비싼 소비재나 장신구를 사용한다고 해서 지위가 상승되는 것은 아니다. 사회가 안정된 곳에서는 소비재에 의해서 사회적 신분과 지위를 과시할 수가 없다고 한다.아직 우리 대다수의(적어도 나의)의식은 보보들의 의식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보보들이 자신만의 취향대로, 나름대로의 합당한 가치관으로 필요에 의해 그러한 기계(부엌에서 사용되어지는 10,000달러 짜리 기계)를 샀다해도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한 물건들 자체가 너무나 비싼 소비재에 불과하다. 이것은 의식이나 가치관의 차이이겠지만 아직은 나에게 있어서 납득이 되지 않는 부분들이다.부엌 장비와 관련해서 오늘날 보보 스타일의 부엌은 주인에게 일련의 최고 경험을 제공하는 요리 운동장과도 같다.[...]그들이 원하는 오븐 용량은 적어도 8평방피트로서, 필요하면 사람들에게 물소라도 요리할 수 있음을 보여줄 수 있는 그런 것이다.[...]AGA의 59인치짜리 요리기는 1922년에 특허를 받은 제품인데, 말 한 마리를 그 자리에서 삶아 아교로 만들어 버릴 수 있을 법한 튼튼함을 과시하면서도 난방판, 구이판, 빵구이 오븐, 불고기 오븐, 그리고 무한대로 가열할 수 있는 편리한 장치들이 달려있다.[...]이 요리기는 가격이 10,000달러밖에 안된다.우리는 부엌에 이러한 기계가 없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다. 필요에 의해서 쓰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정말 진정으로 그러한 기계가 필요한 것일까? 나에게는 오히려 이러한 기계들이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원하는 것 이라고 생각되어진다(나에게 속물근성이 있다고 해도).사람들이 판단하는 질서는 계급적 질서이다. 소득이 가져다 주는 보상이 있는데, 교사는 박봉일 경우(사실 교사가 박봉이기는 하지만) 사람들이 교사에 대한 직업을 지위평가 한다. 탤런트를 많이 선호하는 것은 광대와 같은 역할을 하더라도 소득이 높기 때문이다. 기업을 지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회장, ~본부장, 테니스 회장 등). 이러한 자발적인 결사체의 구성원은 자신이 그것을 직업으로 삼고 있지는 않다. 그렇지만 그 구성원들 중 특정한 지위를 지니고 있는 사람은 자신의 지위가 높은 계급의 사람들과 같다고 생각한다. 어떤 동호회 회장이 됐다고 해서 그 사람이 회사의 회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비록 직업을 가지고 있지 않더라도, 또는 대기업의 경비인데 천주교의 장로를 한다고 해서 자기의 직업의 지위를 보완해 주지는 못한다. 예를 들자면 성당 안에서 상사주재원의 아내가 하급지위의 아내들에게 지시를 한다. 마치 자기가 그 여자들의 상급자처럼 행동한다. 계급이 높은 것은 그 아내의 남편이지 그녀가 아니다. 그런데도 성당 안에서마저 계급적인 행위가 벌어지는 것이다.이러한 계급적 질서의 기준은 부로 인하여 만들어진다. 의사는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직업이니까 좋은 직업이고, 간호원은 돈을 많이 벌 수 없는 직업이니까 나쁜 직업이다라고 사람들은 인식한다. 사회에서는 이것은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사회적 존경과 지위는 계급적 지위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으며 권력은 이로부터 파생한 하나의 차원이다. 권력이라는 것은 개인이나 집단이 어떤 다른 개인이나 집단의 일들을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권력관계라는 것은 대상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상의 결과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이다. 이것이 바로 권력이다. 권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 사이에는 불평등이 생긴다. 예를 들어 형무소와 죄수의 관계는 권력관계이다. 작년이었던가? 간수의 비리가 신문지상에 나왔었는데, 담배 한 갑에 50만원의 값으로 죄인에게 팔았다는 내용이었다. 그만큼 간수의 권력은 막강한 것이다. 공장의 고용자와 노동자의 관계도 권력관계이다. 노동자는 노동을 팔고, 고용자는 노동을 산다. 상품은 자유로운 계약에 입각해서 사고 팔 수 있다. 그런데 노동력을 사고 파는 것은 인격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권력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 시작은 자유계약일지는 몰라도 일단 .
현대 사회의 사랑에 관하여섹스, 거짓말, 비디오 테잎... 이 세 단어의 상관관계는 무엇일까? 계속 이런 물음을 던지면서 나에게는 생소하게만 느껴지는 2시간 짜리 비디오 테잎을 감상했다. 과연 교수님 말씀 데로 별 내용은 없었다. 죤 이라는 사나이가 있는데, 그는 SEX는 할 줄 알지만 인간적인 관계는 가지지 못한다. 그의 부인 앤 은 자위조차도 웃기는 짓이라고 생각하는 SEX불구자이고 그녀의 동생 신시아는 성에 대해서 개방적이며 자기 언니인 앤 의 남편 죤 과 관계를 맺으며 지낸다. 그리고 죤 의 어릴 적 친구 그레이함 은 발기불능인 성 불구자이다. 죤 은 두 여인에 대해 육체적인 사랑만을 요구한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그레이함 은 육체적인 사랑보다는 정신적인 사랑을 추구한다. 죤 의부인 앤 역시 육체적인 사랑은 회피하고 결국은 정신적인 사랑을 찾아가게 된다. 신시아도 마음이 결여된 육체적인 사랑에 실증을 느끼고 죤 과 더 이상 만나지 말자고 한다. 마지막 장면이었던가? 앤 은 그레이함 과 함께 앉아있는데 아주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엇이 앤 을 행복하게 만든 것일까?인간에게는 욕망이라는 것이 있다. 그중 가장 기본적인 세 가지의 욕망이 자는 것, 먹는 것, 성적인 욕구의 충족이다. 자는 것은 혼자서도 할 수 있는 일이다. 내가 자겠다는데 누가 뭐라 그러겠는가. 이것은 스스로 채울 수 있는 욕망이다. 다음으로 먹는 것. 인간은 먹어야 된다. 끊임없이 먹고, 배출하고...를 반복한다. 그렇게 하지않으면 목숨이 위태로워 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먹을 것이 그냥 생기는 것은 아니다.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댓가가 있어야 된다. 그리고 나아닌 타자가, 상대방이 있어야 된다. 어쨌든 식욕까지는 어느 정도 쉽게 해결할 수 있다. 그런데 성욕은 그렇지가 못하다. 나의 성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해서는 타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타자의 동의도 필요하다. 동의 없이 내 욕구를 충족시키면 강간이라는 죄목이 씌워져버린다. 물론 돈을 주고 해결 할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그러한 행위에는 사랑이라는 것이 결여되게 된다. 그저 맹목적일 뿐이다. 이 맹목은 죤 과 신시아 사이의 관계와 같은 맹목일 것이다. 육체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행위일 뿐이다. 인간에게는 육체적인 욕구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사랑 이다. (현대 사회에서의 사랑 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우회가 필요할 것 같다.)기독교에서 인간은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는 죄를 범한 이후, 신과의 원초적인 분리 상태에 놓이게 됐다고 전제하고 있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전 세계가 하루 생활권이 되어버린 현대에 있어서도 인간은 대중 속에서 고독을 느끼며, 더욱 고립화, 유리화 되고 있다. 왕가위 감독의 영화적 표현에서처럼 현대인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과 자동차, 사물들 속에서 천천히 걷고있는 고독한 자아를 발견할 뿐이다. 현대인들은 눈앞에서 참혹한 살인과 폭행, 소매치기가 벌어져도 자기가 정작 피해의 대상이 아니면 상관하지 않는 극도의 개인주의와 이기주의에 빠져있다. 이러한 인간분리의 점증 속에서 집단 이기주의와 같은 온전하지 못한 일치 욕구는 학교와 사회에서 왕따 라는 커다란 사회문제를 일으키며 또 다른 인간소외, 분리를 가져오고 있다.자본주의는 모든 생산품에 적정한 화폐가치를 매겨놓고, 교환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러한 자본주의 사회 속에서 인간마저도 그 가치가 계량화되어 하나의 상품이 되고 있다. 노동이 철저하게 분업화되고 광범위하게 집중되어있는 기업에서 인간은 기계를 작동시키는 또 다른 기계일 뿐이며, 개인은 개성을 상실하고 기계의 소모품으로서 톱니바퀴의 톱날과 같은 것이 되었다. 사랑에 있어서도 많은 사람들이 경제능력, 외모, 학벌 등으로 개개인의 값어치를 평가하여 자신의 값어치보다 높거나 비슷한 사람을 찾으려고 한다. 시장의 상품이 내용보다 디자인이 중요시되듯이 인간도 내면의 자기 수양보다는 겉으로 나타나는 외모와 사회적 위치에만 연연하고 있다. 자본주의는 물질 지상주의를 낳으며 인간의 존엄성 추락, 인간과 물질의 가치의 전도 등의 폐해를 가져왔다.서구의 산업혁명 이후, 엄청난 기술 발전은 기술이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이라는 안이한 낙관주의를 가져왔다. 철학과 종교는 쇠퇴하고 공업기술과 정보기술의 발전만을 추구하고 있다. 20세기에는 자동차와 비행기의 속도 경쟁에 치중하고 21세기에는 인터넷 속도의 향상, 그리고 컴퓨터 하드웨어의 속도가 최고의 가치가 되어버렸다. 현대인은 그가 일을 빨리 하지 못하면 무엇인가를, 즉 시간을 잃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작 그는 그렇게 해서 얻은 시간을 그냥 허송하는 것 이외에는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를 모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은 오락 산업이 제공하는 소리나 구경거리를 수동적으로 소비함으로써, 또 나아가서는 늘 새로운 것을 구매하여 그것들을 다른 것과 교환하는데서 오는 만족감에 의해서 그 무의식, 무가치의 절망을 극복하려 한다.현대는 유행의 시대이다. 보급률이 100%에 가까운 텔레비전이라는 영상 미디어는 단 며칠사이에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낸다. 유행에의 과도한 집착은 현대인간의 분리문제에서 파생한 것이다. 사람들은 유행에서 뒤 처지거나 그것에 동참하지 못할 때, 자신이 사회로부터 분리되거나 격리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유행에 과민하게 동조하려는 것이다. 분리에 대한 두려움이 자본주의의 상업성과 맞물려 유행이 창조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인간내부의 가치의 상실과도 연관되며 결국 몰개성의 사회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현대 사회의 또 한가지 특징으로 여러 사랑의 형태 중에서 유독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에만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마광수 의 즐거운 사라 나 서갑숙의 나도 때로는 포르노그라피의 주인공이고 싶다 등은 정신적인 사랑을 무시하고 오직 육체적인 사랑, SEX만이 완전한 사랑인양 오도하고 있다.현대인은 사랑이란 사랑하는 문제가 아닌 사랑 받는 문제로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사랑스러워 지는가에 대해서만 고민하고 보다 나은 외모를 가꾸는 데만 치중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면의 인격을 가꾸는데는 소홀히 하고 따라서 철학은 따분한 이야기일 뿐이며 종교는 거추장스러운 윤리적 압박이라고 단정지어 버린다. 현대사회에서 종교라는 것은 신과의 일치, 자아회복의 문제가 아니라 성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 있다. 결국 이러한 사랑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인간의 피상주의만을 확대시키고 진정한 사랑과 인간성숙을 이루는데 방해되고 있다.프롬의 말을 빌리면 사랑이란 인간 상호간의 일치와 타인간의 융합 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생명과 성장에 적극적으로 관계하는 일 이며, 어떤 하나의 대상에 대해서가 아니라 전체로서의 세계와의 관계를 결정짓는 태도이자 성격의 방향 이다. 진정한 사랑은 받기만 하는 것도 주기만 하는 것도 아니며, 자기 자신과 타인, 가족, 세상모두를 사랑할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아무 댓가 없이 자기 자신을 맡긴다는 것, 즉 우리의 사랑이 사랑을 받고 있는 사람에게서도 사랑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을 완전히 맡기는 것을 가리킨다. 사랑은 인간뿐이라는 실존의 위협에 대해 진정한 인간 상호간의 일치를 가져올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이다. 인간의 진정한 사랑은 현대사회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열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