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미군정미소간의 한반도 분단점령이 결정된 후 중장 J.R.하지의 지휘하에 미육군 24군단은 9월 8일 인천에 상륙, 서울로 들어와 9일 삼팔선 이남 지역에 대한 군정을 포고한 데 이어 12일 소장 A.V.아널드가 군정장관에 취임함으로써 미군정체제가 수립되었다.미군정은 14일 총독부의 일본인 관리들을 행정고문으로 두고 일본의 식민지 통치기구를 그대로 이용하기로 결정하였다. 또 18일에는 미군장교를 각 국장에 임명하고, 19일 ‘재조선 미육군사령부 군정청’이라는 정식명칭으로 통치를 시작하였다. 이는 곧 미군정이 정부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고 배타적인 권위와 강제력을 독점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미군정은 강제력과 권위를 배타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① 10월 10일 군정장관 아널드의 성명을 통하여 좌익이 주도하는 인민공화국을 부인하고, ② 1946년 1월 15일 8 ·15광복 이후 생겨난 사설군사단체, 특히 조선국군준비대의 해산령을 발표, 국방경비대를 발족시켰으며, ③ 2월 23일 정당등록법을 제정하고, ④ 3월 29일 행정기구를 확대하는 한편, 명령계통을 단일화함으로써 중앙집권화를 구체화하였다.또한 ⑤ 4월 23일 《인민보》 《자유신문》 《현대일보》 등을 폐간 ·처분하고, ⑥ 5월 15일 ‘정판사 위조지폐사건’을 발표하였으며, ⑦ 18일 《해방일보》 정간명령에 이어 ⑧ 9월 박헌영(朴憲永) ·이주하(李舟河) ·이강국(李康國) 체포령을 내렸다. 그리고 ⑨ 1947년 8월 11∼14일 민족주의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인민공화당 중앙위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 중앙위 사무소를 폐쇄하고, 좌익계열 1,000여 명을 검거하였으며, ⑩ 1948년 5월 8일 5 ·10선거에 대비하여 미군에 특별경계령을 발포하는 등 일련의 조치를 취하였다.한편, 관료기구에 한국인을 참여시키기 위한 조치로 ① 1945년 10월 5일 군정장관 고문관에 위원장 김성수(金性洙)를 비롯하여 한국인 11명을 임명하고, 12월 한국인 ·미국인 양 국장제를 실시하였으며, ② 1946년 2월 14일 주한미군 사령관 하우합작 및 남북협상에 실패함으로써 몰락하였다.박헌영 중심의 좌익진영은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통하여 사회주의국가를 건설하려고 하였기 때문에 미군정으로부터 심한 탄압을 받았고, 찬탁을 계기로 대중들로부터 유리되었으며, 이후의 무장투쟁에서도 실패함으로써 남한에서 몰락하였다.결국 3년간 실시된 미군정의 제반 정책은 공산당을 비롯한 좌익진영을 배제하고, 한민당을 비롯한 우익진영을 독점적으로 진출시키는 결과를 낳았다.2.이승만정권1948년 제헌국회의원에 무투표 당선, 이어 국회의장에 피선되어,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제정·공포하고, 국회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에 당선, 그 해 8월 15일 취임하였다. 철저한 반공주의자로서 국내의 공산주의운동을 분쇄하였으며, 철저한 배일(排日)정책으로 일본에 대하여 강경자세를 견지하였다.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과 유엔의 도움으로 공산군을 격퇴하는 데 성공하였으나, 1952년 임시수도 부산에서 제2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야당세력이 우세한 국회에서 자신의 대통령재선이 어렵게 되자, 자유당(自由黨)을 창당하고 계엄령을 선포, 반대파 국회의원을 감금하는 등 변칙적 방법을 동원하여 헌법을 대통령 직선제(直選制)로 개정하고 대통령에 재당선되었다.1953년 미국의 전쟁처리방법에 반대, 계속 휴전을 반대하다가 휴전성립 직전에 반공(反共)포로의 석방을 단행,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또한 1954년 자신의 경우에만 적용되는 종신대통령제 개헌안을 발의, 국회에서 1표 부족으로 부결되었는데, 사사오입(四捨五入)의 해석논리를 변칙적으로 적용하여 번복, 통과시킴으로써 1956년 대통령에 3선되었다. 1958년 12월 차기 대통령선거에 대비하여 국가보안법 등 관계법령을 개정하고 경제시책의 빈곤으로 인한 특정재벌에 대한 특혜 등으로 국민의 지탄을 받기도 하였다.1960년 3월 15일 여당과 정부가 전국적·조직적으로 부정선거를 감행하여 대통령에 4선되었으나 4·19 혁명으로 사임, 하와이에 망명해 있는 동안 사망하였다. 장례는 고국에서 가족장으로 조촐히 집행포 연금(軟禁)하여 위협하는가 하면, '백골단(白骨團)' '민족자결단(民族自決團)' 등 정체불명의 단체가 나타나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그리고 개헌을 반대하는 의원들의 출신구에서는 난데없이 국회의원 소환을 외치는 성토군민대회(聲討郡民大會)가 이곳저곳에서 벌어지기도 하였다. 당시 소위 '부산정치파동(釜山政治波動)'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拔萃改憲)'으로 이승만에 대한 국민의 신망은 더욱 떨어졌다.1954년 11월 이승만은 재차 자신의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重任制限)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을 국회에 상정시켜 소위 '사사오입개헌(四捨五入改憲)'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을 단행하였다. 당시의 개헌안 가결정족수(可決定足數)는 재적 국회의원 203명의 2/3인 136표 이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투표결과 135표를 얻었기 때문에 203의 3분의 2는 135.333…으로 사사오입하면 135이므로 개헌안은 부결된 것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전날의 표결결과를 뒤집어 136표로 사사오입하여 가결된 것으로 정정 선포함으로써 사사오입개헌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956년 5·15정부통령선거에서 정권이 교체되는 듯한 분위기가 감돌았으나,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신익희(申翼熙)의 급사(急死)로 그 꿈은 무산되고 말았다. 자유당은 선거법에 언론규제규정을 삽입한 ‘협상선거법(協商選擧法)’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을 봉쇄해놓고 관권에 의한 부정선거를 공공연히 자행하였으나, 신익희에 대한 추모표(追慕票)가 20%에 달하였고 부통령에 민주당의 장면(張勉)이 당선됨으로써 민심의 소재가 분명히 밝혀졌다.그리고 1958년 12월 자유당은 국회의사당에 무장경찰과 무술경찰을 배치하여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을 완력으로 막고 ‘2 ·4보안법파동(二四保安法波動)’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1959년에 이르러 자유당 정권은 야당계 언론에 대한 탄압을 강화하여 몇 차례의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기자를 구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조치였으므로 대구고교와 경북고교 학생이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외치면서 마침내 데모를 벌였다. 이어 3월 1일 서울 ·대전 ·수원에서, 8일 대전, 12일 ·13일 부산 ·서울에서 계속적인 학생데모가 일어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처음에는 “구속학생 석방하라”,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마라”는 등이었으나, 점차 정치적인 구호로 바뀌어 “학생은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뭉치자”, “부정선거를 묵인하는 자는 자유로운 조국에서 삶을 포기한 자다”라는 등의 부정선거 규탄의 방향으로 바뀌어갔다.3월 15일 선거 당일에는 마산에서 학생들이 데모를 벌였고, 자유당의 작태를 목격한 시민들도 선거포기선언을 한 민주당 당사 주변에 모여 “협잡선거 물리치자”고 외치면서 학생 데모에 합류하였다. 경찰과 자유당 정치폭력배들의 무자비한 제지로 많은 사상자와 행방불명자가 속출하였으며, 갖가지 풍문은 마산시민들을 극도로 흥분시켰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 4월 11일, 그동안 행방불명이 된 마산상고생 김주열(金朱烈)이 눈에 최루탄이 박힌 채 무참하게 살해된 시체로 바다에서 발견되자, 전국의 학생들과 국민들의 흥분은 극에 달하였다.4월 18일 고려대생 3,000여 명이 의사당 앞에서 연좌(連坐) 데모를 한 후 귀교하는 길에 정치폭력배들의 습격을 받아 1명이 죽고 수십 명이 부상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데모에 앞서 밝힌 고려대생들의 선언문에서는 다음과 같이 되어 있었다. 지난날의 “학생들은 일제(日帝)에 항거하고 멸공전선(滅共戰線)의 전위대열(前衛隊列)에 섰으나, 오늘은 진정한 민주이념의 쟁취를 위한 봉화를 높이 들어야 한다. 청년학도만이 진정한 민주역사창조의 역군이 될 수 있음을 명심하고 총궐기하자”는 고려대생들의 4 ·18데모는 그 다음날 학생들이 총궐기하게 된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2. 전개과정1960년 4월 19일 서울 시내 각 대학 학생들이 미리 약속했던 계획에 따라 각 대학에서 총궐기의 선언문을 낭독하고 중앙청을 향해 행진하였다. 그 선언문도 4 ·18 고작하였고, 25일 서울의 각 대학 교수 259명이 “대통령 이하 3부요인(三府要人)들은 3 ·15부정선거와 4 ·19사태의 책임을 지고 즉시 물러나는 동시에 정부통령선거를 다시 하라”는 내용의 시국선언문(時局宣言文)을 채택하고, 구속학생의 즉시석방을 요구하면서 데모에 나섰다. 이 날의 교수 데모는 자유당정권 퇴진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에 자극받은 일반군중들은 계속해서 야간 데모를 벌이며 “자유당정권 물러가라”고 외쳤고, 26일에는 다시 학생들이 거리를 메워 태평로는 4 ·19 때와 같은 혼란이 거듭되었다.학생들의 요구에 따라 계엄사령관 송요찬(宋堯讚)이 주선하여 학생과 시민대표 5명이 이승만과 면담하고 시국수습을 위한 요구조건을 제시했다. 이 자리에서 이승만은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고, 3 ·15부정선거는 다시 한다. 또한, 이기붕은 모든 공직에서 물러나는 동시에 내각책임제 개헌을 한다”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어 11시 이승만은 방송을 통해 직접 하야의 뜻을 밝히고 다음날 정식으로 '대통령사임서'를 국회에 제출하였다.28일 이기붕 일가(一家)가 경무대의 일실(一室)에서 자살하였음이 확인되었고, 29일 이승만은 극비리에 하와이로 떠났다. 결국 이승만이 이끈 자유당의 12년간의 장기집권은 비극적인 종말을 고하였고 새로운 공화정을 위한 준비를 위해 허정(許政) 과도정권(過渡政權)이 뒤를 이었다.3. 의의4 ·19혁명은 처음부터 정권탈취를 목적으로 한 투쟁이나, 어떤 정치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체제변혁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또한 어떤 정치적 주도세력(主導勢力)이 개입된 것도 아니며, 조직적 투쟁 계획이나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정의감에 불타는 청년학생들이 불의에 항거한 의분(義憤)이 집단행동을 취하는 과정에서 사태가 변전(變轉)하고 발전되어 나타난 하나의 결과적 현상이었다. 4 ·19혁명은 한국의 정치발전사에 하나의 획기적인 전기(轉機)를 기록한 역사적으로 큰 의미를 지니는 일대사건(一大事件)이었다.첫째, 한국 국민의 민주의식(民主意識)의 되었다.
도시개발과 보존Ⅰ. 들어가는 글현대 우리나라는 경제성장 목표아래 개발을 끊임없이 해왔다. 그 결과 세계가 놀랄 만한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환경문제 등 여러 가지 개발의 부작용이 일어나고 있다. 그래서 1980년대부터 환경문제와 보존행정이 대두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진정한 보존의 개념을 모르는 행정가나 도시계획가들의 일방적인 정책으로 그 효과는 편면적 정책이 되고 말았다. 도시 개발과 보존은 서로 표리 관계에 있는 것 같지만, 서로 잘 조화로운 정책을 펴나간다면 좋은 효과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1989년에는 노태우 정부가 주택건설 200만호 정책을 내세우면서 수도권에 분당과 일산을 포함한 5개 신도시 건설계획을 발표한지 10년이 흘렀다. 발표한지 2년이 조금 지나서 1991년 가을부터 분당 신도시의 입주가 시작되었다. 온전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시간감각을 가지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세계의 신도시 개발 역사상 우리 한국의 신도시 개발이 “속도 측면에서” 볼 때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전무후무한 세계 신기록을 세운 엄청난 사건이다. 수도권 5개 신도시 개발이 계획보다도 훨씬 더 조기에 달성되고, 노태우 정부는 재임기간 전에 200만호 주택공급 목표를 달성했다고 당국자끼리 서로 화려하게 자축했던 일도 기억난다.새로 당선된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 복원이라는 큰 사업을 주요 공약으로 내세움으로서 그에 대한 기대도 크게 대두되고 있다. 전에 개발위주의 정책공약들과는 달리 새로운 도시디자인, 도시보존의 형태의 정책으로 전환되게 된 것이다. 청계천 복원 사업과 같은 도시계획은 인간성이나 정신적 문제의 해결에 초점을 두게 한 것이다.편면적 행정에서 양면적 행정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에서의 특징은 개발위주의 정책에서 개발과 보존의 정책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의 행정시스템도 이러한 형태로 바뀌어 가는 과도기에 접해있다.Ⅱ. 개발과 보존개발과 보존 어느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포기해야 하는 양자택일적 가치인 것 같다. 그래서 두 가지를 동시에 추구해 가기란 어려운 것 같다. 그래서 개발도상국들의 도시계획은 일단 경제성장의 상징인 빌딩과 공장 설립에 중점을 두고 과거의 가치, 과거의 건물들을 서둘러 해체시키러 한다. 그래서 결국 시민들의 의견과는 대립하게 되고, 고유의 민족성이 상실되고 점점 서구화되는 도시 구조의 형태를 띠게 된다. 과거의 문화유산을 남기고 민족문화를 지키려는 방향도 관광상품의 개발이라는 측면으로 이루어져 고유의 시민 정신이 사라지고 있다.구라파의 도시들을 보면 과거와 현재가 혼재해 있는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 높은 빌딩은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경제성장도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도시개발 성장이 경제성장이라는 공식은 성립하지 않는 것 같다.{그러면 왜 개발을 위해 노력하는가? 그 이유는 첫째, 욕구 충족을 위해 보다 발전하려는 것이다. 둘째 이차대전 이후 [개발=발전=국방력=자국수호]라는 공식이 성립하면서 국방력 강화와 경제성장을 통한 輔國安民의 효과로 개발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경제성장과 개발을 위해 사람들은 도시로 몰려들고 농업사회에서 산업사회로 전환하면서 도시의 중요성은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과거 빈곤의 유산들은 버림받게 되고 경제성장의 상징인 빌딩과 공장 건물들이 난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개발은 개발도상국가들에서 특히 두드러지게 나타난 현상이다. 결국 물질적 개발만 강조한 나머지 정신적인 측면의 도시개발은 등한시 되게 되었다. 시민을 등한시한 일방적인 도시개발 정책은 오히려 시민들에게 불편과 불쾌감을 조성하게 된다.보존이란 무조건적인 유지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가치판단에 의해서 무엇을 보존할 것인지, 무엇을 개발할 것인지 판단해야 한다. 그러면 보존은 왜 중요한가? 보존의 중요성은 일단 도시의 시민들에게 정신적 안정과 지역 소속감, 연대감을 고취시킨다. 자기 지역에 있는 문화유산 등 고건축물들은 추억을 회상시키게 하고 시민 연대의식을 고취시킨다. 더 나아가 국보급 문화유산들은 중요성은 민족 정신을 고취시킬 수 있다. 그리고 고 건축물이나 녹지지역에서 시민들은 안정과 여유를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보존행정 정책은 일방적인 정책으로 시민과 연대없이 행한 것이라 오히려 불편을 주고 있다.Ⅲ. 개발제한구역{과도한 개발을 방지하고자 서울을 비롯한 거의 모든 도시에서는 개발제한구역을 설치하고 관리하고 있다. 개발제한구역은 그린벨트(greenbelt)라고도 한다. 이 구역 내에서는 건축물의 신축 ·증축, 용도변경, 토지의 형질변경 및 토지분할 등의 행위를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건설교통부 장관, 도지사, 시장, 군수 등의 승인 또는 허가를 받아 구역설정 목적에 위배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의 개발행위는 가능하다.개발제한구역 중 생산녹지는 농경 ·목축 ·임업 ·수산 등의 경제적 목적을 겸하고 있으며,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광활한 농장 ·유원지 ·임야 및 산지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일반적인 개발제한구역 중에는 농가나 넓은 정원을 보유하는 주택 ·학교 등의 건설물이 점재할 수 있다. 즉, 개발제한구역은 시가지를 구분하는 대상(帶狀)의 공원을 이루고, 또 비상시의 피난로로서 이용된다.차단녹지는 주택 등을 공장의 배기가스 ·소음으로부터 방지하는 동시에 대도시의 시가지가 무제한으로 팽창하는 것을 막기 위하여 도시 외곽에 도시민의 쾌적한 환경을 제공하려는 목적에서 설치된다. 한국에서는 1971년 7월 30일 서울지역을 효시로 도시의 무질서한 확산을 방지하고, 도시주변의 자연환경을 보전하여 도시민의 생활환경을 확보하는 동시에 보안상 도시개발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고 인정될 때에는 도시 주변지역에 대한 개발제한구역을 설치할 수 있도록, 도시계획법을 제정하였다.1972년 8월에는 수도권 개발제한구역이 2배로 확대되어 서울의 광화문 네 거리를 중심으로 반지름 30km 이내의 6개 위성도시를 총망라한 68.6km2지역이 개발제한구역이 되었다. 그 밖에 개발제한구역으로 지정된 도시는 부산 ·대구 ·춘천 ·청주 ·대전 ·울산 ·마산 ·진해 ·충무 ·전주 ·광주 ·제주 등 13개 도시이다. 외국의 예로서는 런던의 개발제한구역을 들 수 있으며, 이 개발제한구역에는 목장 ·온실원예농장 ·운동시설 등이 설치되어 있고, 뉴타운 등의 개발은 개발제한구역의 외측에서 볼 수 있다.Ⅳ. 현재 서울시의 도시계획(청계천 복원사업)서울 강북 도심지역을 관통하는 '청계천 복원사업'에 국내외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기대감도 높지만 제 기능을 잃은 대도시 하천이 원래대로 회복될 수 있을까에 대한 의구심이 겹치는 것이다. 서울시가 매주 화요일마다 진행하고 있는 청계천 참관 프로그램에는 10월 말 현재 2000여 명의 시민이 이미 참여했다. 시민 반응이 좋아지자 시는 당초 프로그램을 10월말에서 12월말까지 연장했다.최근에는 데이비드 엘던 영국 HSBC 회장 등 15명의 세계적 기업 최고 경영자들이 서울을 방문해 복원사업에 투자할 의사가 있다고 밝혔다.{나아가 복원 후 청계천 주변에 들어설 국제업무단지에 입주하고 싶다 는 의향도 내비쳤다. 또 이달 25일에는 하천 복원과 관련해 세계적인 기술전문가들이 모이는 '청계천 복원 국제 세미나'도 열릴 예정이다. 사업을 주도하고 있는 이명박 서울시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번 사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수'라며 사업 추진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왜 복원하나? 청계천 위에 설치된 청계고가도로는 안전에 문제가 있을 정도로 너무 낡았다. 보수공사를 하더라도 대대적으로 해야 할 상황이다. 이런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아예 하천을 원래 모습으로 복원하려는 것이다. 게다가 서울은 선진국 수도에 비해 공원시설이 부족하고 사람 살기에 너무 삭막하다는 지적이 많았다. 물고기가 뛰노는 청계천을 복원하면 좀더 환경 친화적인 도시로 다가서고 과거 서울 모습도 회복한다는 의미도 포함돼 있다. 무엇보다 서울 강남과 강북간 생활환경을 균형 있게 발전시키기 위해 서다. 하천 복원은 그 자체가 주민공원이 될 뿐아니라 주변 지역도 업무중심지로 조성하는 사업이 병행된다. 하천 주변에 세계적인 기업들이 입주하면 낙후된 이미지를 벗고 첨단 도시로 거듭나게 된다.현재 청계천 복원에 관한 세부 연구계획을 외 부 연구기관에 의뢰한 상태다. 내년 4월께 연구결과가 나오면 시에서 검토작업을 거쳐 내년 말 착공해 첫 삽을 뜰 계획이다. 공사는 2년여 에 걸쳐 진행돼 2005년 말 제 모습을 찾게 된다. 공사의 기본 구상은 간단하다. 먼저 도로 양옆에 가림막을 설치하고 고가도로를 해체한 뒤 도로를 파헤친다. 그 후 하천에 물을 흘리는 방식이다. 하천에 흐르는 물은 수돗물 등을 이용해 인공적으로 마련한다. 이를 도식화하면 고가도로 아래편 양쪽 가림막 설치, 고가도로 상판과 빔(철골), 교각 철거, 복개구간 도로 철거, 하수처리관 설치 및 하천 조성공사, 하천에 횡단교량 설치 및 구간별 하천 양 옆 도로공사, 자연친화형 하천 조성 등의 순서로 진행된다. 공사할 때 예상되는 가장 큰 문제점은 교통체증이다. 청계고가도로를 이용하던 차들은 공사기간 다른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서울시는 고 가도로 양편에 2차선 도로를 확보하고 버스 노선 증설, 지하철 운행 횟수 증가 등으로 교통문제를 풀어나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