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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한국근현대사 평가A좋아요
    해방과 더불어 미ㆍ소의 패권주의에 의하여 한국은 남북이 분단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당시 사상적으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를 대표한 종주국이었고, 양국을 정점으로 냉전체제가 성립되어 있었으므로 한국의 남북 분단이 사상적으로도 극단 대립하게 되었다. 자본주의와공산주의는 8ㆍ15이후에 발생한 것이 아니라 그 전에 발생하고 한국 독립운동에서도 심각하게 관계되어 있던 문제였으므로, 통일국가 수립의 문제가 자연히 해방된 것이다.독립운동에서도 미국이나 소련에서 전개한 경우는 어느 하나의 사상이 지배적이었기 때문에 사상문제가 심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백범 김구가 활동한 중국에서는 중국 자신이 사상문제에 휘말려 있었기 때문에 그 곳 독립운동에서도 사상문제가 당면 문제로 부각되고 있었다.백범은 한국이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되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정권이 수립될 때, 순응하지 않고 독자적 행보를 고집했다.백범이 명실 공히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주도하기 시작한 것은 1935년 7월 남경에서 민족혁명당이 결성될 때, 임시정부가 붕괴될 위기에 봉착하여 임시정부를 수습한 뒤부터라고 할 수 있다. 그 시기 백범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확고히 하기 위하여 한국 국민당을 창당하였고 1937년 중일전쟁이 발발하자 한국 독립당, 조선혁명당과 함께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그 후 중일전쟁이 확대자 광복의 날을 앞당겨 전망하면서 통일전선의 성사를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독립운동전선 정비에 집념을 버리지 않고 1940년에는 중경에서 의견이 근접한 우파 정당만의 3당 회의를 통하여 한국독립운동단체연합회 소속의 3당을통합하여 이른바 통합 한국독립당을 만들었다.백범의 통일전선 형성의 추진은 일본의 패망이 분명하게 전망된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 이후에 박차가 가해졌다. 1944년 개헌으로 국무원과 행정각부도 한국독립당 외에 좌우파 각당에서 참여한 연립내각을 구성하여 임시정부가 명실공히 독립운동의 구심체로, 또 조국해방에 대비한 체제를 갖추어 갔다. 그리하여 때마침 태항산에서 주장자였고, 백범의 인품을 통하여 통일국가 지도자의 아량과 금도를 찾아볼 수 있으며, 독립운동 정국을 운영한 백범이었다. 또한 백범이 주도하여 최초로 결성한 정당인 1935년의 한국국민당의 정강을 좌파와 크게 대립되지 않게 이끌어 나갈 수 있었고 독립운동에서도 통합과 통일전선을 꾸준히 추구했고 좌파 정당에게도 설득력 있는 인격자로 대접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한 백범의 이념은 1941년의 건국강령이나 그를 구체화한 1944년의 헌법에서도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임시정부가 1942년 통합의회를 구성할 때나 1944년 연립내각을 수립할 때나 이념상의 논쟁은 없었던 것이다.백범은 모든 계급의 공동 이해에 입각한 국가를, 이승만을 중심한 극우파가 친일파까지포함한 단결을 지향했다면 백범은 친일파를 숙청한 민족적 단결을 추구하였다. 그리하여백범은 환영대회가 끝나자 민족 세력의 총집결에 의한 통일방안을 수립하기 위하여특별정치위원회를 구성할 준비를 착수하였다. 조선에 새로 임시정부를 설립하고 열국에 의한 5년 기한의 신탁통치를 실시하고 그를 주선하기 위하여 미ㆍ소 주둔군 사령관으로 공동위원회를 구성 개최한다는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안 내용으로 1942년부터 종전 후에 한국에 대한 국제 관리설이 미국 정가에서 대두하여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 단체들은 국제 관리설을봉쇄하기 위하여 특히 1943년 5월 10일에는 중경에서 재중자유 한인대회를 개최하여 국제 관리설에 대한 반대 시민대회를 전개한 이후, 다각도로 외교활동을 전개해 왔다. 그런데 드디어 그것이 현실로 나타나 신탁통치 안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미국이나 소련은 한국문제가 자국의 이익을 위한 부수적이고 사소한 문제에 불과하여 38선도 장난처럼 그었고, 종전 후에도 4개월 이상을 방치해 두었다가 겨우 내 놓은 것이 고작 신탁통치였으니 한국인의 민족적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았다. 백범은 즉각 반탁운동에 돌입하였다 신탁통치는 자주 독립의지에도 어긋났지만, 열국의 통치로 말미암아 민족분단의 위험이 컸기 때문에 을 중심한 조직으로 결성하여 백범이 선두에 선 대규모의 시민대회를 개최하였다. 동시에 전국의 행정과 경찰기구를 임시정부가 접수한다는 것과, 주권행사를 선언함으로써 미군정에 정면으로 대항하였다. 분명히 자주독립의 강렬한 표현이었고 미군정 측에서 보면 반탁정변이었다. 외세를 배격하는 백범의 투철한 자주의지가 극명하게 들어난 역사적 사건이었다. 백범이 선봉에 선 전국적인 반탁운동의 열기와 임시정부의 주권행사를 선포한 반탁정변에 놀란 것은 미군정 당국과 인민공화국을 이끌던 좌파였다.김구?ㆍ하지회담이 가까스로 열려 평화적 반탁운동의 전개로 합의하여 사태는 수습되었다. 반탁운동을 통해 백범과 그의 임시정부가 전 국민적으로 부상하여 인민공화국이 무척 격하되고 있었는데 다시 결정적 전략의 위기를 맞은 것이다. 그래서 인민공화국 중앙위원회는 1월 1일 임시정부에 대해 두 정부를 해체하고 통합하자고 제의하고 이튿날 까지 회답할 것을 통보했다. 그것이 거절당하자 좌파는 북한의 찬탁정국에 맞추어 신탁통치 찬성으로 돌변하고 반탁대회로 알려진 시민대회를 찬탁대회로 번복하여 백범을 공격하고 나섰다. 찬탁 반탁은 좌우익의 대립으로 대치되어 갈 민족적 위기를 맞게 된 것이다. 이에 백범은 시국수습에 나서 좌파를 향해비상정치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좌파가 참여한 정부로 확대 개편하고 이어 임시정부를 대신하고 정식정부를 수립할 과도정부를 수립하자고 제의했다. 그때에 백범은 비상정치회의 준비회를 개최하여 이승만의 독립촉성중앙협의회와 합류할 것에 합의하고 이승만ㆍ김구ㆍ김규식을 중심으로한 비상국민회의를 결성하기로 결의하였다. 임시정부의 혁신계 인물이 탈퇴하여 민전 결성에 합류하니 국민회의는 우파의 집결체가 되었다. 2월 14일 비상국민회의의 최고정무위원회를 그들의 자문기구로서 민주의원(의장 이승만, 부의장 김구ㆍ김규식-3월 20일 이승만 사퇴, 김규식 의장대리)을 구성하여 비상국민회의를 견제 또는 무력하게 만들었다. 좌파에서도 민주주의 민족전선의 결성을 완성하여 결국, 좌우익의 대립이 구조적으로 조로만 자주독립국가 완성을 촉구하였다. 백범은 자신이 그토록 강조하던 반탁에 대한 언급이 없을 정도로 불비한 7원칙이었지만, 환국 이후에 접한 좌우파 대표에 의한 합의문서 가운데 가장 희망적이요 실현성이 있다고 전망하고, 민족통일을 위하여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반탁과 임시정부 문제에 대하여 크게 양보하면서 백범은 좌우합작이 통일 조국의 독립에 초석이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당시에 단독정부 수립을 둘러싸고 정가의 권모술수가 난무하고 있었는데 백범의 민족주의와 통일국가 수립의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이 무렵부터 백범이 남한 단정을 모색하던 이승만을 제치고 김규식과 가까워져 갔다. 입법의원 다수당인 이승만이나 한민당과 김규식의 중도우파가 정국의 우위를 장악하여 백범은 정치적 위치가 퇴조하게되었다. 그렇다면 백범으로서 통일국가 수립을 위하여 새로운 용단을 구상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탁통치 문제는 자연 소멸할 가능성이 있기도 하였지만, 동시에 단독정부 수립안이 부상하는 정국으로 이행할 염려가 많았다. 이것은 역사의 거센 물결이 백범에게 새롭게 밀려온다는 것을 의미했다.백범 김구라면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의 화신처럼 국민의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백범이생애 마지막에 남북협상을 추진하여 독립운동과 통일운동을 결산한, 종장을 통하여 각인된 기억을 역사와 민족은 잊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김구를 비롯한 한국독립당과 김규식을 중심한 민족자주연맹은‘남북정치 요인회담을 개최하여 남북 통일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통일 총선거를 실시해야 한다’고 하면서 이승만이 고집하는 단독 선거안에 단연 반대하였다. 백범은‘남이 일시적으로 분할해 놓은 조국을 우리가 우리의 관념이나 행동으로써 영원히 분할해 놓을 필요야 있겠습니까?’라고 간곡하게 남북회담에 동의할 것을 호소하였다. 백범에게는 남북협상을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고 있었다.김구ㆍ김규식은 김두봉과는 중국에서 26년간 휴척을 같이하며 독립운동을 전개한 동지였다. 그러므로 협상 가능성을 웬만큼은 자신했던 것이다. 더구나공전쟁이 어떠한 비극을 연출하고 있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므로 한국에서 분단정부가 수립되면 6ㆍ25전쟁 같은 비극을 예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백범은“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시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라고 비장한 결심을 내외에 발표하였다.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의 추진은 당시 유엔한국위원단 의장 메논도 크게 감동을 받고 있었다. 유엔소총회는 단독정부가 총회에서 결의한 국민정부가 되느냐의 여부간에, 또 총회의 결정을 소총회에서 번복시킬 수 있느냐의 여부간에 미국이 제안한 남한 단독선거안을 결의하였다. 미군정은 3월 18일에 5ㆍ10 총선거를 공포하였다. 백범은 실망하였지만, 남북협상에 더욱 더 박차를 가했다. 4월 3일에는 민족자주연맹 중앙집행위원회가 열려 남북협상에 대한지지 결의가 있었으며 자주적 남북협상을 지원하니 백범에게는 용기가 배가될 수 있었다.통일 독립 운동자협의회라는 명칭에서 명백히 나타나듯이, 또 문화인 성명에서 보듯이 남북협상은 독립운동의 연장선상에서 인식했던 것이다. 백범은 북행을 강행하면서 성패와이해득실이 독립운동처럼, 누구누구에 한정되지 않고 전 민족의 것이라는 말이다. 따라서 백범은 성패 이둔을 가릴 여유도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오로지 민족 자주 역량에 의한독립이요 통일을 위해 몸 바칠 뿐이었다. 남북협상을 추진하는 백범의 민족주의는 독립운동의 민족주의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4월 30일 열린 김구ㆍ김규식ㆍ김일성ㆍ김두봉의 4김 회담은 백범이 제기한 협상회의였으므로 안건을 협의하여 공동성명까지 채택 발표하였다. 공동성명은 남북에서 ‘외국군의 철거, 외국 군대의 철수 후에 안전과 질서의 유지, 외국군이 철수한 뒤에 전조선의 정당사회단체회의를 소집하여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임시정부가 주관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통일 민주정부를수립, 남조선 단독선거를 승인하지 않는다‘ 라는 요지였다. 그러나 남북 어디에서도 지켜지지 않았다. 5ㆍ10선거는 예정대로 실
    인문/어학| 2006.11.06| 5페이지| 1,000원| 조회(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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