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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농구 평가A+최고예요
    < 목 차 >1. 머리말2. 농구의 역사3. 한국농구의 역사4. 주요 농구 용어 해설5. 농구경기장의 규격과 용구6. 농구의 기본기술Ⅰ. 드리블의 기술Ⅱ. 패스의 기술Ⅲ. 슛의 기술7. 농구의 규칙8. 농구 전술 (Offence & Defence)9. 농구경기 핸드 시그널10. 맺음말1. 머리말개인적으로 농구를 많이 좋아하고 주말이면 동호회 사람들과 농구를 즐기고 있다. 그리하여 이번 학기 농구 수업을 듣게 된 원인이다. 그러나 한 주 한 주 수업을 들으면서 내가 그 동안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알게 되었다. 실력도 실력이거니와 농구에 대한 전반적인 지식의 부족을 뼈저리게 느꼈다.특별한 전략, 전술 없이 1 on 1에 의존하는 동네농구에서 무엇인가 체계가 잡힌 농구를 배우는 것은 나에게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시간이었다. 수업을 통하여 실기 면으로 많은 것을 배웠으니 이젠 이론 면으로 파고 들어가고자 이 레포트를 준비하게 되었다.이제부터 농구의 역사와 규칙, 기술, 전략?전술 그리고 심판 수신호 등을 살펴보겠다.2. 농구의 역사농구는 1891년 미국 매사추세츠 주 스프링필드의 YMCA 체육대학에서 체육연구가였던 제임스네이스미스(James Naismith) 박사가 창안함으로써 시작되었습니다. 농구는 5명씩으로 구성되는 두 팀이 1개의 공을 손으로 다루어서 서로 상대팀의 바스켓에 투입하는 것을 득점으로 하여 일정한 시간 내에 더 많은 득점을 올리는 팀이 이기는 스포츠입니다. 이 신생 스포츠는 1892년까지 정식명칭이 없다가 네이스미스가 복숭아 바구니를 사용한 스포츠이므로 "바스켓볼'이라고 이름을 붙이기로 결정을 하였습니다. 이것이 오늘날에까지 복숭아 바구니에 공을 넣는 경기라는 '피치바스켓볼'이라는 용어가 여전히 남아 바스켓볼이라 불리고 있으며 동양의 일부 국가에서는 '상자'라는 뜻의 농(籠)자를 써서 "농구(籠球)"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1892년 네이스미스가 자기가 지도한 학생 18명을 YMCA센트럴과 아모리힐이라는 두 팀으로 나누어 사상 최초의 농구팀을서큘레이팅 이라 부르고 있 다.스코어링 에어리어 : 슛할 때 성공률이 높은 지역.스크리너 : 스크린 플레이를 할 때 디펜스에 대하여 막 역할을 하는 플레이어.스크리 메이지 : 오펜스가 정확하게 셋업한 상태에서 시작하는 5 대 5 공방연습.스크린 스위치 디펜스 : 공격 측의 스크린플레이에 대해서 하는 맨 투 맨 디펜스.스크린 아웃 : 리바운드 볼을 잡을 때 볼에 대해서 상대편보다 우위의 포지션을 잡기 위하여 하는 합법 적인 블록 플레이.스크린 플레이 : 상대측 플레이를 방해하기 우하여 의식적으로 서서 디펜스를 하다가 유리하게 공격하 는 오펜스의 기본 플레이.스톱 피봇 : 급정지하여 피봇 하는 것.스트라이드 스톱 : 오른발(왼발) → 왼발(오른발)로, 2박자로 멈추는 방법이며, 최초의 발이 피봇 풋이 된다.스포트 슈터 : 특정 위치에서만 슛을 잘하는 슈터.스포트 패스 : 볼을 갖고 있는 플레이어가 자기에게서 떨어져 있는 자기편이 잡을 수 있는 지점을 골 라서 보내는 패스.스피닝 레이업 : 자기의 몸을 비틀면서 볼이 스핀을 많이 걸어 골로 직접 가져가는 레이업 슛.쓰리쿼터 포인트 : 자기쪽 코트의 프리 드로우 라인 근처에서 상대 팀에게 프레셔를 거는 디펜스.쓰리 포인트 슛 : 쓰리 포인트 라인 밖에서 하는 슛으로, 여기서 슛에 성공하면 3득점이 된다.시소즈 컷 : 피봇 맨을 중심으로 해서 두 사람의 플레이어가 가위 모양의 러니 코스를 사용하여 플레이 하는 것.싱글 포스트 : 포스트 포지션에 한 사람의 포스트 맨을 두고 하는 오펜스.슈팅 에어리어 : 슛이 상당히 높은 확률로 성공할 수 있는 구역.숄더 패스 : 야구공을 던지듯이 볼을 어깨 위로 던지는 롱 패스. 보통을 원 바운드로 하지만 여자나 연 소자는 양손 숄더패스도 한다.아웃 렛 패스 : 디펜스가 리바운드 볼을 잡아서 속공자세를 취한 자기편에게 보내는 골밑에서 하는 패 스 아웃을 말함.아치 : 슛이나 패스할 때 볼이 그리는 포물선 궤적.얼리 오펜스 : 속공 전법이 뜻대로 안 될 때 세트오펜스 등으로 전환하기까지의도 전후의 백 턴을 하여 페이킹하는 플레이.하프 코트 프레스 : 팀 백 코트에서 하는 프레스 디펜스.하프 타임 : 전반과 후반 사이의 휴게시간.해빗 리플렉스 : 디펜스에서의 중요한 습관적 반사를 말함.해킹 : 상대편의 손이나 가슴이나 다른 부분을 때리는 반칙.핸드 시그널 ; 코치나 감독이나 플레이어 리더가 손가락이나 손으로 팀에 보내는 찬수.핸드 오프 패스 : 볼을 넘길 때 두 사람의 손이 동시에 닿는 패스.핸드 업 ; 리바운드 할 때 스크린 아웃의 기본이며, 양손을 들어서 하는 디펜스 테크닉.허리 백 : 빨리 백코트로 돌아가서 디펜스 태세를 갖추는 것.헬드 볼 : 양 팀의 플레이어가 서로 볼을 가지고 있어서 경기를 지속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함. 이때는 레프리가 ‘헬드 볼’을 선언하여 가장 가까운 서클에서 점프 볼로 플레이를 재개한다. 또 가드당하고 있는 플레이어가 볼을 가진 채 패스나 드리블 같은 것을 할 수 없는 상태에서 5초를 경과했을 때도 레프리는 ‘헬드 볼’을 선언한다.홀딩 : 상대편을 잡거나, 손을 누르거나 하는 퍼스널 파울의 일종.후프 : 바스켓을 말하며, 링이 고리 모양으로 된 데서 연유되었다.5. 농구경기장의 규격과 용구그림농구는 시설과 용구 모두 남녀가 똑같다. 코트의 규격은 장애물 없는 직사각형으로서, 길이 28m * 15m이며 경계선의 안쪽부터 측정한다. 코트 천장의 높이는 7m 이상이어야 하며 조명은 선수가 슛할 때 시야에 방해가 되지 않아야 되며 코트 바닥을 충분히 밝힐 수 있어야 한다.경계선은 장애물로부터 적어도 1m이상 이격된 곳과 관중들로부터 2m 이상 이격된 곳에 5cm굵기의 폭으로 선명하게 그어야 한다. 백보드의 규격과 재료는 두께 3cm의 목재나 그 밖의 투명한 판이어야 한다. 표면은 평평하게 한다.백보드가 투명체가 아닐 경우 흰색 칠을 해야 한다.바스켓은 오렌지색으로 칠한 내경 45cm의 철제 링에 백색의 망을 단다. 링의 굵기는 지름 2cm이어야 하며 망은 길이 40cm로서 볼이 바스켓을 통과할 때 일시 머물도록 한다. 트의 엔드 라인 밖에서 드로우인하여 경기를 시작한다.▷ 선수 등번호의 규칙선수의 번호는 1에서 99번까지의 모든 번호와 0번, 그리고 00번을 사용할 수 있다. 그러나 같은 팀 내에 0번과 00번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다.▷ 타임아웃 규칙차지 타임아웃은 팀당 전반전 (제1, 2쿼터)에 2번, 후반전 (제3, 4쿼터)에 3번, 연장전에 한번씩 코치와 공격팀 선수가 병행해서 요청할 수 있다. 선수가 차지 타임아웃을 요청할 때에는 수신호와 구두로 심판에게 분명히 표현하여야 하며, 선수가 요청한 차지 타임아웃은 취소될 수 없다. 또한, 플로어에서 두발이 떠 있거나, 신체의 일부분이 엔드라인 또는 사이드 라인의 가상 수직선상 밖으로 나간 상태에서는 차지 타임아웃을 요청할 수 없다. 차지 타임아웃 시간은 각각 70초로 하고, 차지 타임아웃 중에는 중계용 ENG 카메라와 마이크가 벤치에 들어오는 것을 최대한 지양한다. 경기종료 3분전부터 허용된 차지 타임아웃에 이어 경기가 속개되는 지점은 타임아웃을 요청한 팀에서 하프라인 연장선상의 사이드 라인 밖이나, 또는 타임아웃 요청으로 데드볼이 된 지점에서 가장 가까운 사이드 라인 밖의 두곳 중에서 선택하여 드로우인으로 경기를 재개시킬 수 있다. 단, 이 것은 슛이 성공되거나 리바운드를 잡아 공격권이 바뀔 때, 그 즉시(즉, 드리블이나 패스를 하기 이전에) 타임아웃을 요청하는 경우에 한한다.▷ 경기 재개 관련 규칙하프라인에서 경기를 재개시키는 경우에는 프런트 코트나, 백 코트로 패스할 수 있다. 드로우인 지점의 선택은 차지 타임아웃이 주어진 후 심판이 요청 팀에 경기 속개 지점을 물어 해당지점에 볼을 가지고 가서 서는 것으로 결정된다. 심판의 문의시 경기 속개 지점을 즉시 알려주지 않는 경우 경기는 자동적으로 하프라인 연장선상의 사이드 라인 밖에서 속개되며, 한 번 선택된 경기속개 지점은 변경될 수 없다.파울이나 바이얼레이션으로 경기가 중단되면 데드볼이 된 지점과 관계없이 경기 속개 지점은 항상 자유투 라인 연장선상의 사이드 라인 집중적으로 수비해야 할 때이다.이것은 오펜서 공격능력을 억제할 수 있고,어느 쪽인가로 움직이는 것이 곤란한 상태에 있는 선수에 대해서는 그 반대쪽을 오버 시프트하는 것으로 양쪽 모두 평균적으로 수비할 수 있는 셈이다.또 속임수를 써서 볼을 빼앗아 잡으려고 하여 일부러 어느 쪽인가로 나아가게 하거나 패스하게 하기 위해 오버 시프트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가장 많이 오버 시프트를 이용할 때는 포스트맨에 대한 디펜스로 패스가 넘어오는 것을 이리저리 위치를 바꾸는 것으로 저지한다. 특히, 포스트맨보다 신장이 작을 때는 이것이 필요하다.또 골밑으로 접근한 선수에게 볼이 패스되어 실점될 수 있는 위기의 경우는, 그 선수와 볼 사이에 자신의 몸을 넣는 오버 시프트로 수비하는 것이 원칙이다. 오버 시프트는 프레스 디펜스와 함께 사용하면 더욱 강력한 디펜스가 된다.Ⅲ. 헬프 디펜스아무리 견고한 디펜스라도 완전하게 상대를 수비할 수는 없다. 상대가 패스를 받는 순간 접근해 프레스를 걸어도 타이밍이 빗나가면 피할 수 있다. 만약 오펜서가 피했을 때 어떻게 수비할까 하는 것이 갖추어져 있는지의 여부가 강한 디펜스와 약한 디펜스의 차이라고 말할 수 있다.헬프 디펜스란, 이러한 경우의 수비방법인데, 디펜스를 피한 오펜서에게 가장 가까운 디펜서가 쫓아가서 그 코스를 막는 것을 말한다.위: 6번의 디펜스가 빠졌으니4번은 헬프해서 5번을 마크한다.아래: 헬프받은 6번은 10번을 마크한다.당연히 헬프하는 선수와는 자신이 쫓는 상대로부터 떨어지는 것이니까, 수비를 하지 못한 디펜서는 반대로 수비선수를 교환하듯이 움직여야 한다.결국 시프트하는 셈이다. 이 시프트를 행할 경우, 헬프하는 선수와 헬프되는 선수는 서로 연락을 취해 부드럽게 움직이지 않으면 다음의 위기를 낳는 결과로 되니까 충분히 주의해야 한다.이 헬프 디펜스를 구사하기 위해서는, 우선 기본적인 수비기술(스탠스,풋웍)을 익혀야 되고, 사그와 플로우트 및 오버 시프트도 할 수 있어야 한다.Ⅳ. 더블 팁명칭 그대로 두 명이 한명의 상대,
    예체능| 2004.12.16| 38페이지| 3,000원| 조회(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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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의병전쟁
    Ⅰ. 머리말1894년부터 1915년에 이르기까지 20년 간 전국 곳곳에서 의병이 봉기하였다. 그들은 오직 구국의 일념으로 무력으로써 외국세력을 축출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의병활동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으로 국내활동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된다.여기서 우리는 의병의 전개과정과 활동, 그리고 결과와 남긴 의미를 자세히 알아보고자 한다.Ⅱ. 의병전쟁1. 의병의 재기1904~1905년에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의병이 다시 일어났다. 일제는 1904년 2월의 한일의정서와 8월의 제1차 한일협약 등을 체결하여 한국 내에 자국군을 주둔시켰으며, 일본인을 한국관리로 임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한국의 내정은 일제에 의해 장악되었는데, 특히 1905년 11월에 강제로 체결된 ‘을사조약’은 모든 한국인을 격분시킬 만큼 충격적이었다. 대한제국은 외교권이 박탈되어 일제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기 때문이다.을사조약에 반대한 한국인들은 항의의 표시로 자결하는가 하면, 이른바 매국노라 불리는 친일파를 처단하기 위하여 오적암살단이나 결사대를 조직하였다. 다른 한편에서는 애국지사들에 의해 구국을 위한 의병의 봉기가 잇따랐다.이 무렵에 의병을 주도한 사람들은 대체로 양반유생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미 1894~1896년 사이에 의병에 참여한 바 있었다. 다만 전기의병과 다른 점이라면 대규모 의진의 경우 전직관료들이 의병을 일으킨 사례가 많아졌다는 점이다.중기의병의 대표적인 의병장으로는, 강원도의 원용팔, 경기도의 이문호, 충남의 민종식, 전북의 최익현, 임병찬, 양한규, 전남의 백낙구, 고광순, 양회일, 경상도의 신돌석, 정용기, 이현규, 유시연, 황해도의 이진룡 등을 들 수 있다.중기의병장은 명문가의 양반이나 유명한 유생이 적지 않은데, 민종식, 최익현, 고광순, 박기섭 등이 그들이다. 하지만 널리 알려지지 않은 유생이나 吏族, 전직관료 등이 중기의병을 주도한 경우가 점차 늘어났다.중기의병은 양반유생이라 하더라도 위정척사적 명분론을 내세우기보다는 국가와 민족을 구다가 그 해 10월에 피체되었다.민종식은 이조참판을 역임한 여홍민씨 명문가였다. 그는 충남 정산에 낙향해 있던 중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곧바로 서울에 올라가 조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는 상소운동을 전개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수백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1906년 3월 중순에 봉기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하였을 당시 의병 규모는 1100여 명에 달하였다. 홍주성을 점령하였다는 소식이 인근에 알려지자 의병의 규모는 더욱 늘어났다. 홍주의병의 기세에 놀란 일본군은 압도적인 화력을 동원하여 잔혹한 방법으로 의병을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홍주의병은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패퇴하고 말았다.최익현의 의병봉기는 전북 태인의 무성서원 강회에서 비롯되었다. 1906년 6월 초순, 최익현이 강회를 마친 후 곧바로 창의를 선언하자 80여 명의 제자가 뒤를 따랐다. 이미 최익현과 긴밀하게 연락을 취해 오던 전 낙안군수 임병찬과 유생 고석진 등이 앞장서서 의병을 불러 모아 900여 명을 확보하였다. 태인의병은 정읍, 순창, 곡성 등지를 차례로 점령하며 군량과 무기를 획득해서 북상할 채비를 갖추었다. 이들을 저지하려고 일제의 군경과 전주, 남원의 진위대가 파견되어 의병과 접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의병은 흩어져 버리고 최익현과 임병찬 등 13인이 피체되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대마도에 감금되어 있다가 최익현은 그 곳에서 순국하였다.영남지방에서는 평민의병장으로 널리 알려진 신돌석 의병부대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신돌석은 1906년 음력 3월경 의병을 일으켜 영해를 비롯한 평해, 영양, 울진 등 경상북도와 강원도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급속하게 세력을 확대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경상북도 영천의 정용기, 진보의 이현규 등의 의진과도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서 활동하였다. 태백산맥의 험준한 산악지대를 기반 삼아 유격전술을 펼치며 반일활동을 전개한 신돌석을 사람들은 ‘태백산 호랑이’라 부를 정도였다.중기의병의 창의목표는 무엇보다도 국권회복미조약에 의해 일제는 통감부의 내정간섭권을 대폭 강화하였다.일제의 경제적 침탈도 더욱 가중되었다. 도시와 농어촌, 산간벽지 등 곳곳에서 일본인의 토지침탈이 자행되었으며, 일본인 재정고문 메가타 에 의해 화폐정리사업을 추진하여 한국의 재정분야까지 장악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는 1907년 9월에 총포 및 화약류 단속법을 제정하여 한국인의 무기소지를 금지시켰다. 이로 인해 가장 타격을 받은 사람들은 수렵을 생계수단으로 삼는 함경도와 강원도의 포수들이었다. 한국은 국가존립의 위기와 민중의 생존권조차 위협받는 절박한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의 반일감정은 극도로 악화되었다.그러던 차에 단행된 한국군의 해산은 의병전쟁을 전국으로 확산시켰다. 군대해산 소식을 전해들은 시위대 제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은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였으니 만 번 죽어도 좋다”며 자결하였다. 이를 목격한 한국군 1000여 명은 비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히 무장봉기하였다. 이들은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공방전을 벌였다. 하지만 해산군인들은 탄환의 결핍과 중과부적으로 물러났다. 서울을 벗어난 시위대 병사들은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의병전쟁의 전국적인 확산에 기여하였다.지방진위대의 해산군인들도 의병으로 전환하였다. 8월 5일 원주의 진위대는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해산을 거부하여 민긍호와 김덕제의 인솔 아래 봉기하였다.또한 강화진위대의 해산군인들도 1907년 8월 9일에 지홍윤과 연기우, 유명규, 김동수 등의 지휘 아래 일제히 봉기하였다.이와 같이 서울과 지방의 해산군인들이 대거 의병에 가담함으로써 의병의 전열은 재정비되었다. 전국에 걸쳐 다양한 계층이 의병에 참여하여 새로운 의병전선이 형성된 것이다. 후기의병은 투쟁역량을 강화하여 일본군경과 맞서 용감히 싸웠다. 곳곳이 치안불능 상태에 빠질 정도의 의병의 기세가 거세었다. 이에 힘입어 이은찬, 이구채 등은 전국 단위의 통합된 의병조직을 추진하였다. 마침내 1907년 11월경 이은찬, 이구채, 이인영, 허위 등은 13都倡義 독자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되었다.후기의병으로 활동한 주요 의병부대를 지역별로 살펴보면, 먼저 중부지역에서는 김수민, 이강년, 이은찬, 허위, 연기우 한봉수, 민긍호 의병부대 등을 들 수 있다. 김수민 의병부대는 농민을 비롯한 평민들을 주축으로 조직되었는데, 주로 경기도 장단과 강화 그리고 임진강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이강년 의병부대는 주로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의병장 김상태, 변학기, 김운선 등의 활동과 연계되었다. 이은찬 의병부대는 허위와 함께 연합의진을 형성하여 임진강 일대에서 서울탈환의 기회를 노리며 투쟁하였다. 경기도 북부의 마전, 삭녕, 연천 등지에서는 연기우 의병부대의 활동이 돋보였다. 강화진위대 해산군인 출신의 연기우는 엄정한 군율을 지키며 활동함으로써 주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충북 청주에서는 한봉수 의병부대가 활약하였는데, 위장술에 능한 것으로 유명하다. 강원도의 민긍호 의병부대는 일본군경의 회유와 귀순공작을 뿌리치며 집요하게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춘천에서는 지용기 의병부대가 춘천과 화천 등지에서 활약하였다.다음으로 영남지역에서 활동한 주요 의병장으로는 신돌석, 정환직, 서병희, 변학기 등이다. 신돌석 의병부대는 일월산과 영해 등 경상남북도를 넘나들며 눈부신 유격활동으로 중기의병 이래 이름을 떨치고 있었다. 중기의병으로 활동한 정용기의 뒤를 이어 의병장에 오른 정환직은 山南義陣을 재편하여 영천, 경주, 청송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영남 서부지역에서는 노병대, 유종환 의병부대, 동남부지역에서는 서병희 의병부대가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북부지역의 경우 함경도와 황해도 지방에서는 의병투쟁이 격렬한 반면, 평안도는 그렇지 않았다. 평안도에서는 김관수 등과 같은 유인석 계열의 유학자들이 의병을 일으켰다. 함경도에서는 홍범도, 차도선, 태양욱, 송상봉 등의 의병장은 포수와 해산군인 등을 이끌고 삼수와 갑산 등지에서 격렬하게 싸웠다. 황해도에서는 박기섭, 이진룡 등의 의병부대가 평산 등지에서 돋보이는 활약을 보였다. 한편 함북 경성과 명천 은 동생 김율과 함께 호남창의회맹소의 대장 기삼연의 뒤를 이었다. 김준 등이 이끈 의병부대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불태우며 나주, 함평, 광주 등지에서 활발한 유격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김준 의병부대는 일본군조차 두려워할 정도였다. 1908~1909년 전남지역의 경우, 전해산은 영광, 함평, 나주 등 주로 서부지역에서, 심남일은 김율의 순국 후에 독립하여 함평과 강진을 축으로 하는 남부지역에서, 안규홍은 보성, 순천 광양 등의 동부지역에서 각각 눈부신 반일투쟁을 전개하였다. 한편 전라북도에서는 이석용 의병부대가 진안과 임실에서, 무주, 진안, 장수 등 전북의 동북 산간지대에서는 문태서 의병부대가 돋보이는 활동을 보였다. 호남지역의 의병들은 일제의 이른바 ‘남한폭도대토벌작전’이 실시될 때까지 지속적으로 항전하였다.후기의병의 중심지였던 호남의병을 근절시키기 위해 일제는 남한폭도대토벌작전(1909. 9~10)이라는 전례없는 군사작전을 펼쳐 호남의병을 잔혹하게 탄압하였다. 이에 호남의병은 끝까지 저항하였으나 일제의 강력한 군사력을 막아낼 수 없었다.후기의병은 호남의병의 종식으로 일단락되었으나 의병전쟁의 고조기에 해당된다. 따라서 의병전쟁의 진면목을 파악하는 데 가장 중요한 시기라 할 수 있다. 먼저 후기의병은 창의이념에서 국권회복과 안민의식을 크게 강조하였다. 후기의병은 ‘애국구민’이나 ‘보국안민’을 표방하였는데, 이는 구국의식의 강화와 반봉건적 의식의 소산이었다. 이에 따라 防穀과 납세거부투쟁을 주도함으로써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다음으로 해산군인을 비롯한 빈농과 행상 등 평민출신의 의병장이 증가하였다. 의병장 홍범도, 안규홍, 차도선, 김수민, 연기우 등이 그들이다. 일제의 정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위기의식이 사회 저변에 널리 형성됨으로써 민중들이 의병에 투신하였을 뿐만 아니라 의병전쟁을 주도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리고 후기의병은 투쟁역량을 크게 강화하였다. 해산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함으로써 그 계기를 마련하였지만 의병 스스로도 투쟁역량의 향상에 적극 노력하였다. 의.
    인문/어학| 2004.12.16| 6페이지| 1,500원| 조회(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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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앙아시아의 5개 공화국
    Ⅰ. 머리말중앙아시아라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언뜻 떠올리는 것이 ‘실크로드’ 와 ‘유목민’ 이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중앙아시아를 다 설명할 수는 없다. 중앙아시아는 광대한 영역과 수많은 국가와 민족들이 얽혀 있는 복잡한 지리적, 문화적, 역사적 공동체이다.여기에서 이 중앙아시아에 대하여 다 살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여 협의적 의미의 중앙아시아(구소련이 주창한 중앙아시아)에 대하여 살펴보겠다.Ⅱ. 우즈베키스탄 (Uzbek)우즈벡 혹은 외즈벡이라고 알려진 이 말은 튀르크어로'자기 자신, 핵, 중심; 진짜, 순수한'이라는 뜻을 가진 'Uz'라는 단어와 백부장의 뜻을 가진 'bek'이라는 단어가 합해서 이루어진 말로 '진짜 백부장'이라는 뜻이다. 우즈벡에 페르시아어 'stan'이 합해진 우즈벡키스탄(Uzbekistan)은 '우즈벡인의 나라'라는 뜻이다.우즈벡인은 몽골 또는 이란족의 특성을 많이 가지고 있는 투르크족의 혼혈이다. 우즈벡이란 말은 "그 자신의 주인" 이란 뜻으로 정확하게 이 민족을 나타내고 있다. 그들의 자유에 대한 애착과 침착하지 못한 성격 탓에 자신들의 땅(중앙아시아 서부지역으로 알려진 투르키스탄)을 침략한 정복자들과 수 세기 동안 분쟁을 겪고 있다.투르키스탄 지역의 분쟁은 4세기 알렉산더 대왕의 침략과 더불어 시작하여, 7-8세기에는 아랍과 투르크의 분쟁으로 이어지고, 13세기에는 징기스칸이 이끄는 몽골군과의 싸움이 있었다. 14세기 티무르가 정복함으로써 끝이 났으며, 이 때가 아마도 우즈벡에게는 문화와 교훈을 가져다 준 가장 번성한 기간이었다.투르키스탄은 16세기에 기나긴 쇠퇴기에 들어섰다. 러시아가 침략했던 1860년대에서 1880년대 중반까지, 투르키스탄은 수차례 전쟁의 우위를 빼앗겼으며, 그 무렵에 많은 우즈벡인들이 중앙아시아 전역으로 흩어졌다.1) 기후 및 자연환경기후는 매우 건조한 편이다. 특히 여름은 고온 건조한 열대기후이며 겨울엔 비교적 습도가 높다. 드넓은 사막지대이므로 강우량은 적고 남동부 국경 부근에 파미르고원 가. 은이나 금세공, 가죽 공예, 목공예, 모피 가공 등 여러 가지 능숙한 기술을 가진 시장 장인들이 많이 있다.우즈벡 여인들은 대개 집안일과 특별한 기술이 필요치 않은 여러 가지 일들을 맡아 하는데, 여성들은 대개 남성들과는 격리되어 일한다. 대부분의 우즈벡인들, 특히 도심지에 사는 사람들은 유럽풍의 의복을 입고, 일부는 아직도 전통의상을 입는다.대부분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어쩔 수 없이 러시아의 권위를 인정하고는 있지만, 이들은 소비에트 공화국의 가장 진보된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1930년대에 많은 소작농들이 거대한 집단농장으로 조직되었다. 현대화된 농기계의 도입으로, 농장은 곧 집약적으로 재배되었다. 이러한 농장은 전쟁터에 필요한 음식과 장비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이 공화국 중 일부는 제2차대전 중 소련군을 위한 병창 역할을 했다.친족 유대에 바탕을 둔 전통적인 사회구조는 계속해서 서서히 붕괴되고 있는 중이다. 특히 도시지역에 들어선 현대식 건물은 가득 차서 더 이상 가족들이 같이 살지 못하게 하고, 대가족을 분리시키고 있다. 증가되는 교육기회와 함께 이러한 요소들은, 보다 많은 우즈벡인들이 그들의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일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소련의 통치 하에 있던 수십 년 동안 우즈벡은 러시아인이 되도록 하는 강한 압력을 받았다. 러시아가 이들을 강제로 집단농장으로 구성하고 반종교적인 선전을 계속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많은 우즈벡인들은 전통적인 중앙아시아의 문화 요소들을 유지하고 있다. 우즈벡어는 구소련의 중앙아시아 지역 모두에게 아주 중요한 언어로서 가장 많은 사람들에 의해 사용되는 언어이다. 우즈벡어는 1923년 아랍문자로 표기되었으며, 1927년에는 라틴문자로, 그리고 1940년대에는 키릴문자로 바뀌었다.Ⅲ. 카자키스탄의 카작족 (Kazhak)카자흐인들은 전통적인 유목민족으로서 중국 서부의 신장주와 카자흐공화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카자흐공화국은 카스피 해와 천산산맥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데 북쪽으로는 거대한 초원지대가 남던 공산주의가 무너지자 카작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이슬람에서 찾으려 하고 있고 터키 등 주변 이슬람국가에서 지원하고 있는 상황이다.5) 삶의 모습구소련의 붕괴 이후 카자흐인들은 그들의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 원래 그들은 양을 치는 유목민족이었지만 소련의 지배 아래 있을 때, 그들 소유의 땅의 많은 부분이 징발되어 집단농장으로 사용되었다. 산업이 발달함에 따라, 경제와 문화가 러시아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그들의 문화적 정체성을 재발견하려는 운동이 널리 진행되고 있다.유목민족으로서, 이들은 유르트라고 불리는 둥근 모피 천막을 치고 살았다. 러시아의 지배 아래 있을 때, 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도시로 옮겨져 아파트나 주택에 거주하게 되었다. 방 두세 칸짜리 이러한 아파트들은 수도를 가지고 있지만, 시골지역에서는 온수는 나오지 않는다. 물은 깨끗하기는 하지만, 마실 수는 없다.카자흐인들은 다양한 고기와 낙농품을 먹는다. 쌀과 빵도 흔히 먹는 주식이다. 카자흐스탄의 남쪽 지역에서는 과일과 야채가 풍부하게 생산되며, 사람들은 포도, 메론, 토마토 등을 즐긴다.도시에 사는 카자흐인들은 보통 서양식 옷을 입는다. 시골에서는 대개 헐렁한 바지의 허리를 묶어 느슨한 단색 셔츠와 함께 입는데 겉모습이 과거 이들의 고유 의상과 비슷하다.카자흐족의 가족구조는 가부장적이거나 남성 중심이지만, 점차로 바뀌고 있다. 한때 집안의 가장에게 속했던 법적 귄위들이 이제는 집단농장의 우두머리에게 옮겨졌다. 이러한 변화는 카자흐의 전통 가족제도를 붕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의식주 및 생활환경(1) 의식주카자흐인들은 다양한 종류의 고기와 낙농품을 즐겨 먹는다. 말고기로 만든 요리가 인기 있는 음식이며 주식은 쌀과 빵이다. 카자흐 남부지역에서는 과일과 야채가 풍족하다. 이슬람교를 믿는 카자흐인들에게 돼지고기와 술은 금기로 되어 있지만 일반적으로 많은 카자흐인들이 술을 마시고 어떤 부류에 따라서는 돼지고기도 먹는다. 전통적으로 카자흐인들은 유르트(Yurt)라고 불리는 둥근 카자흐어로 발행되는 주요 신문도 세 개가 있다. 전에는 상영이 금지되었던 많은 카자흐 영화들을 지금은 자유롭게 볼 수 있다.(4) 학교교육카자흐인들은,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 체제의 전 영역을 포함하는 일반적인 교육체제를 가지고 있다. 미취학과 유치원 단계에서의 교육은 의무적이 아니므로 학비를 내야 한다. 7살부터 15살까지의 모든 아이들에게는 의무교육이 시행되고 있다. 하지만 현행 교육제도가 8년제에서 10년제로 바뀌고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어린이들은 17세나 18세까지 학교를 다녀야 한다. 종 교종교적 관습 예식 : 이들 중 98%가량이 수니파 이슬람교를 신봉하여 이슬람의 종교관습을 따르긴 하지만 열성적인 신자는 별로 없다. 알마아타를 비롯해 카자흐 공화국의 남부와 서부지역에는 이슬람종교의 5대 기둥이 되는 금식, 기도, 믿음, 자선, 순례 등을 하며 특별히 라마단 기간이나 기도 중에 금식을 수행하는 회교도들이 많다. 이 지역에 사는 카자흐인들은 결혼이나 장례식(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할례 등도 종교적으로 거행한다. 할례는 이슬람 민족공동체에 소속되는 나이인 7,8세의 소년에게 거행되는데, 이때 철저한 금식이 수반되어야 한다. 카자흐인들이 훨씬 많이 살고 있는 공화국 북부와 동부지역에서는 전통적인 관습들이 거의 사라져 가고 있다. 대부분의 카자흐인들은 정령신앙과 결합된 이슬람교를 믿고 있다. 그밖에 다른 사람들은 지금도 수피형제단을 따르고 있다, 카자흐인이 절기로 지키는 대표적인 의식으로는 이스마엘을 기념하는 희생제, 라마단기간의 폐회축제, 선지자 탄생 기념제 등이다.Ⅳ. 튀르크멘족 (Turkmen)튀르크멘이라는 이름은 처음에 종족명이라기 보다 중앙아시아의 일부 집단, 즉 이슬람을 받아들인 튀르크인을 지칭하는 말로 넓게 사용되었다. 튀르크인들 중의 튀르크인이라는 자부심이 그들에게 있다. 전통적인 유목 민족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국가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가지고 있다.중앙아시아의 공화국 중에 가장 기묘한 투르크메니스탄은 아랍해의 돈 없는 경찰력을 바탕으로 한 체제로서 서구와의 교류는 그다지 활발하지 않다.4) 종교대부분이 순니 이슬람을 믿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사나운 기질로 '맹렬한 비정통의 경건'으로 이름이 났다. 회교가 95%이며, 러시아 정교가 4% 정도이다. 이들은 대부분 수피즘의 영향을 받은 수피 이슬람이며, 샤머니즘, 민족종교와도 혼합되어 있다. 튀르크멘 여인들은 이슬람이 강요하는 여성들의 베일을 착용하지는 않는다. 라마단의 금식기간을 지키며, 부유한 사람들은 메카를 순례하려고 한다. 대도시에 사는 젊은 투르크멘인들은 구소련 체제하에서 강한 영향을 받아 무신론의 성격이 강하다. 정부는 정책상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Ⅴ. 크르그즈(Kyrgyz) 크르그지스탄'40부족' 혹은 '40명의 여인들의 후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고, 어원적으로는 '40개의 텐트'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유목민 생활을 하던 40개 집안이 모여 시작된 민족임을 암시한다.1) 위치 및 자연환경중앙아시아의 남동쪽에 위치하여 톈산산맥과 파미르 알타이 산맥의 북쪽을 차지하고 있다. 북쪽으로는 카작스탄, 서쪽으로는 우즈벡키스탄, 남쪽으로는 타직키스탄, 동쪽과 남동쪽으로 중국의 위구르 자치구인 신강성과 접하고 있다.면적은 한반도와 비슷한 198,500㎢이며 국토의 95%가 해발 1,000m 이상이고(85%가 해발 1,500m 이상) 평균고도가 2,750m인 산악 국가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고지대이기 때문에 단지 국토의 7%에서만 경작이 가능하다. 기후는 대륙성 사막기후로 여름은 건조하고 뜨거우며 겨울은 춥다. 수도는 비쉬켁이다.2) 종족 및 언어구소련에서 독립한 중앙아시아 국가 중에서 러시아인의 비율이 높았던 크르그즈스탄은 경제 상황에 따라 점차로 자신의 민족국가로 되돌아가 현재는 절반을 넘는 비율을 크르그즈족이 차지하고 있다. 1997년 통계에 의하면 총인구 4,512,809명 중 투르크계 크르그즈인인 52.4%, 러시아인인 18%, 우즈벡인이 12.9%, 우크라이나인이 2.5%의 비율을 보이고 있다. 크르
    인문/어학| 2004.12.16| 11페이지| 1,000원| 조회(6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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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번체제의 동요와 새로운 사상, 문화
    ◀ 막번체제의 동요와 새로운 사상 · 문화 ▶Ⅰ. 막번체제의 동요와 정치개혁1. 재정의 궁핍과 농촌의 변화○ 무가사회의 경제 파탄 - 상품수요의 증가와 물가의 급상승 때문에, 특히 번들은 산킨코 타이(?勤交代)와 막부의 토목공사 등으로 더욱 심각해짐.→ 막부의 해결책 - 화폐의 재주조, 가부나카마(株仲間)를 인정하는 대가로 상인에게 헌 금을 징수→ 번의 해결책 - 연공을 무겁게 부과, 가신의 봉록을 빌림, 부유한 죠닌(町人)에게 금전을 차압⇒ 그 결과 하타모토(旗本), 고케닌(御家人), 번사(藩士)와 농민의 생활은 점점 더 어려워짐○ 농민의 계층분화 - 농촌에 상품경제가 침투하여 농민들 사이에 빈부의 격차가 생김⇒ 봉건 지배의 기초가 흔들림2. 교호(享保)의 개혁○ 1716년. 8대 장군인 도쿠가와 요시무네(德川吉)가 장군 친정체제(親政?制)의 구축에 의한 막번체제의 재건을 꾀함→ 하타모토, 고케닌에 대해 무예를 장려하고 근검 · 절약을 명함, 쌀값의 조절을 위해 노 력, 아이타이스마시레이(相??令))를 발포, 타시다카 제도(足高制度))를 정함→ 아게마이(上米)의 제)를 실시, 죠멘법(定免法))을 실시하고 점차 세율을 인상, 신전(新 田)개발을 장려→『구지카타오사다메가키(公事方御定書)』의 편찬, 메야스바코(目安箱)를 설치, 실학의 장 려, 한역양서(漢?洋書)의 수입⇒ 일시적으로 막부의 기강이 섰고, 재정도 안정세를 보였다.3. 농민의 저항○ 농촌에 상업자본과 상품경제의 침투로 농민의 계층분화가 심화됨, 연이은 흉작으로 인 한 아사자가 속출함 - 농민의 저항과 봉기(百姓一揆, 농민잇키)가 일어남⇒ 막번체제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4. 다누마(田沼)의 정치○ 10대 장군인 이에하루(家治) 시대에는 로쥬(老中)인 다누마 오키쓰구(田沼意次)와 그의 아들 오키토모(意知)가 실권을 장악하고 재원 확보를 위해 노력→ 오사카 · 에도의 거상을 끌어들여 대규모 신전개발을 계획→ 죠닌에게 특산물의 전매권을 주고 대신 운죠킨(運上金, 영업세)을 징수→ 가부나카마의 결성을 공인해주고 운죠킨 · 묘가킨(冥加金, 헌금)을 걷어들임→ 무역의 제한을 완하하여 외국무역에 적극적으로 나섬⇒ 죠닌의 경제력을 이용하여 재원을 확보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상업자본에 이익을 증가 시킴, 뇌물의 횡행에 의한 기강의 문란, 기근의 확산으로 인한 농민의 반항이 이어짐5. 간세이(寬政)의 개혁○ 11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나리(德川家?)의 로쥬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松平定信)는 교 호개혁을 모범으로 막정을 개혁함→ 농촌의 안정과 부흥을 꾀함 - 검약생활의 강조, 화려한 풍속의 규제, 상업자본 발전의 억제, 농민의 농촌이탈을 금지하고 귀농을 장려함(농민인구의 확보), 도시에 사창(社倉) 과 의창(義倉)을 설치하여 미곡을 저장, 에도에서는 빈민구제법(七分金積立)을 만듦→ 막부의 다이묘(大名)와 · 하타모토의 재정난 구제을 꾀함 - 경비의 절약을 강조, 1789 년엔 기엔레이(棄損令))를 명함→ 치안 유지를 위해 에도의 이시카와(石川)섬에 닌소쿠요세바(人足寄場)를 설치하여 부랑 자나 노숙자 등의 사람들에게 직업교육을 시킴→ 주자학을 정학(正學)으로 삼고 나머지는 이학(異學)으로 함 - 출판의 통제⇒ 막정의 쇄신에는 어느 정도의 효과가 있었으나 현실과 맞지 않고 사람들의 반감으로 실패했다.▷ 한편, 여러 번에서도 번정의 개혁이 나타남 - 식산흥업의 추진, 전매제도의 강화6. 서양 열강의 접근○ 막부는 통상을 요구하던 러시아와 영국, 미국의 함선에 대해 강력히 거부함→ 1825년, 이국선타불령(異國船打?令, 외국선추방령)을 내림⇒ 막부의 쇄국정책은 민간으로부터 비판받음 → 새로운 외교 정책을 검토하기 시작함7. 덴포(天保)의 개혁○ 전국적인 대기근이 일어남 - 각지에서 농민운동이 속출→ 오시로 헤이하치로(大?平八郞)의 난 - 오사카마치부교쇼(大坂町奉行所)의 요리키(?力, 막부의 하급관인)였던 오시오 헤이하치로가 1837년에 막부를 비판하는 격문을 뿌리며 봉기함→ 에치고(越後)의 가시와자키(柏崎)에서는 국학자 이쿠타 요로즈(生田万)가 오시오의 동생 이라 칭하며 봉기함⇒ 결국 1841년 로쥬 미즈노 타다쿠니(水野忠邦)를 중심으로 덴포(天保)의 개혁을 추진함○ 교호 · 간세이 개혁을 모범으로 삼아 추진됨→ 사치금지령을 내림, 에도에 유입된 농민의 강제적인 귀농, 가부나카마를 해산시키고 일 반상인과 재향상인의 자유로운 상거래를 허용→ 에도 · 오사카 주변의 땅을 막부의 직할지로 명령함(上知令, 上地令)- 영주인 후다이 다이묘와 하타모토의 반대에 의해 실패⇒ 급격한 개혁으로 인해 근본적인 사회모순을 해결하지 못했고 각 계층의 사람들로 하여 금 반발을 받아 개혁은 실패로 돌아갔다.8. 번정(藩政)의 개혁○ 막부의 덴포 개혁기에 각 번에서도 번정의 개혁이 이루어짐→ 재정의 긴축, 채무의 정리, 군사력의 정비, 식산흥업책 · 전매제 · 근대공업의 적극적인 육성⇒ 많은 번들은 번정의 개혁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번정의 개혁의 공통점- 상품경제 발전의 성과를 영주가 장악함- 유능하고 개명적인 중하급 무사층이 개혁의 중심으로 활약함 ⇒ 중하급 무사의 세력 이 커지기 시작함- 군사력의 정비와 강화를 통해 막부로부터 독립과 대항을 확고히 함Ⅱ. 가세이(化政) 문화와 학문의 신경향1. 가세이(化政) 문화○ 에도가 대도시로의 팽창과 더불어 문화의 중심도 가미가타(上方)에서 에도로 옮겨오게 되었다. 특히 사치스러운 죠닌문화가 성숙되어진다.→ 퇴폐적이고 향락적인 경향이 강함→ 문화가 널리 보급되어 다양한 현상으로 나타남→ 학문 · 사상적으로 막번체제의 동요의 극복을 위한 비판적 의견의 확산 - 근대로의 맹 아가 보이기 시작⇒ 이 시기의 문학이나 미술, 풍속과 생활 모두 위와 같은 특징이 나타남2. 국학의 전개○ 외래문화의 영향을 받지 않은 고전 문화를 통한 일본의 정신문화를 연구○ 말기엔 히라타 아쓰타네(平田篤胤)가 복고신도(復古神道)를 주창함 - 배외주의, 국수주 의의 경향이 짙음⇒ 하급무사와 부농층의 존왕양이(尊王洋夷) 운동에 영향을 미침3. 난학(蘭學)의 발달○ 8대 장군 요시무네가 실학을 장려하기 위해 양서 수입의 금지를 완화시킴- 서양 학문이 본격적으로 연구되기 시작○ 발달된 의학의 수용과 식산흥업을 추진하면서 보급됨
    인문/어학| 2004.12.16| 4페이지| 1,000원| 조회(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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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라의 삼국통일
    Ⅰ. 緖論新羅의 三國統一은 표면상 羅·唐의 연합작전에 의하여 성취된 것 같아 보이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新羅의 내적발전과 자주적 팽창에 의해서 달성된 것이다. 이는 6세기 중엽 이후 新羅의 독자적인 對高句麗·百濟 각축전이나 高句麗 패망이후 新羅의 對唐戰爭이 그것을 뒷받침하고 있다.新羅史에서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에 이른 200여 년 간 대내적으로 체제정비와 왕권강화를 통해 중앙집권국가를 달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高句麗와의 結好, 百濟와의 同盟을 맺으면서 삼국간 균형을 취하고 수시로 자국의 발전을 도모하여 眞興王代에는 新羅가 전성기를 이루게 되었다. 다시 말해 내적 체제정비와 漢江流域의 장악은 三國統合戰爭을 수행할 수 있는 독자적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따라서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新羅 法興·眞興王代의 통일기반 구축의 내용에 대해 크게 國家體制의 强化 와 漢江流域의 進出 이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麗·濟와의 관계에서 균형을 취하다가 독자적 발전을 하는 新羅의 自强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다.Ⅱ. 本論1) 國家體制의 强化新羅는 1세기에서 3세기까지 많은 貢納服屬國을 가진 지배적 위치에서 영역적 통합을 이행하여 3세기경에는 西北으로 開寧·尙州 등 慶尙南·北道 의 弁韓地域을 제외한 全辰韓地域을 영유하였다.{) 千寬宇, 〈三韓의 國家形成〉 上, 《韓國學報》2, 一志社, 1976, p.44.이같은 기반 위에서 新羅는 奈勿王代(356∼406)에 이르러 국가적 차원에서 百濟·伽倻·高句麗 등과 타협 혹은 투쟁을 전개하는 동시에 국제무대에 등장하였고 王號가 尼師今에서 麻立干으로 전환하는 과도기를 奈勿王代에서 구하고 있는 바 이 시기가 新羅의 왕권성장 내지 정치적 발전의 획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견해이다. 어떤 의미에서 奈勿王부터 訥祗王까지를 왕권의 김씨세습 과도기로 파악하여, 訥祗王부터 김씨계가 왕위계승권을 장악하는 것은 물론이고 부자상속의 원칙{) 申瀅植, 〈三國史記 本紀內容의 統計的 分析〉, 《三國史記硏究》, 一潮閣, 1981, p.80.이 확립되어 고대국가로서의의 구축이라는 면에서의 築城事業은 炤知王代(479∼500)에는 거의 완성되는 것으로 보이며 訥祗王 13년(429)에 岸長 2,170步에 이르는 矢堤를 축조했고 생산증대를 이루려는 농경진흥책{) 李春寧, 《李朝農業技術史》, 韓國硏究院, 1964, p.15~19. 신라 농기구는 4, 5세기에 이미 오늘 의 전통적 농기구와 별차이가 없다고 하였다.으로서 炤知王 11년(489)에는 遊食百姓을 歸農시켰으며, 智證王 3년(502)에는 州郡主에게 권농을 명령하고 처음으로 牛耕을 실시했다. 개혁적 조치로서의 築城과 稻作增産을 위한 제방축조에는 다수의 집단적 노동력이 요구되었으며, 여기에 기인하여 智證王 3년(502)에는 殉葬을 금지하였다.이러한 기반을 가지고 法興·眞興王代를 맞이하여 내외의 발전에 더욱 박차를 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法興王 4년(517) 兵部 설치, 7년(520)의 율령반포와 百官의 公服制 채택, 15년(528)의 佛敎공인, 18년(531) 上大等制의 실시 등 실로 현저한 제도정비에 의하여 국가의 면모를 일신시키고 문화국가임을 자부했던 것으로 보인다. 兵部의 경우 兵部令을 왕족 중에서 가장 왕의 신임을 받는 자가 임명되었는데 이는 그가 대외전쟁과 정복의 절대적 존재임을 반영한 것이며, 兵部가 法興王初에 설치된 것은 내외의 병권을 귀일 시켜 정복과 전쟁을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려는 제도적 장치였다고 하겠다. 또한 新羅의 율령은 종래의 관습법을 지양하고 智證王 5년(504)의 喪服法 제정 등의 일련의 법체계에 의하여 사회적 변화에 부응하려는 종합적 집대성으로 생각된다.上大等은 和白이라는 이름의 中古期 귀족층의 대표자로서 문벌의 서열에 따라 귀족회의를 주재하고 왕의 교체와 함께 그 임기가 만료되는 것이 원칙인데 眞興王代에 가장 눈부신 발전을 내외로 거듭했다는 사실을 미루어 上大等을 중심으로 귀족들의 단결이 굳게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和白이라는 귀족 회의체가 오랜 전통을 가지고 自轉될 수 있었기 때문에 新羅는 내외발전과 그 상황 반영한 것으로 행정의 비대화와 전문화의 필요성으로 말미암아 그 분화가 불가피 했기 때문이다.新羅 중앙관부의 문화발전에 있어 法興·眞興王代는 초창기에 해당하며 이것은 新羅의 정치체제에 가장 중요한 골격이 되었다. 이러한 제도를 운영하는 데에는 그 원리가 되는 의식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바, 바로 佛敎와 儒家的 의식의 확대는 대내적 안정과 대외적 발전의 이념역할을 했다는 면에서 통일기반을 구축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하겠다. 新羅에 佛敎가 들어온 지는 오래였지만 法興王(538)에 공인된 이래 현세적 호국불교로 알려졌다.佛敎는 사회적 통제와 복종을 요구했던 당시 지배자들에게 절실했던 이념을 공급하기에 충분하였는데 王卽佛의 사상과 眞種設에 의한 불교왕명시대를 가져올 만큼 왕실이 佛敎를 숭봉한 까닭도 여기에 있었다.{) 金哲埈, 〈新羅上代社會의 Dual Organization〉 下, 《歷史學報》2, 1952, p.92.당시 승려들은 최고 지식인으로서 왕과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새로운 이념의 공급자들로서 그들의 고문의 위치를 점하고 있으면서 眞平王때 圓光法師의 世俗五戒 창출로 新羅의 젊은이들로 하여금 정신적 지주를 마련해 新羅의 三國統合에 절대적 초석이 되게 하였으며 慈藏은 皇龍寺 七層塔을 축조하여 新羅中心思想과 호국 및 통일이념을 고취시키는 등 호국과 통일이념을 창출하여 시대정신을 확실히 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한편 6세기를 전후한 시기부터 유학에 대한 의식이 매우 깊어졌던 사실을 주목하기 않을 수 없다. 특히 〈眞興王巡狩碑文〉은 당시 유학의 수준을 이해하는 기준이 된다. 또한 眞興王 23년(536)부터 계속 사용한 연호도 중국과 대등하다는 의식을 나타낸 것이고, 그것은 단순한 과시가 아니라 신라의 실질적 성장을 의미했다고 믿어진다. 이러한 유학의 강조는 〈壬申誓記石〉에서 《詩》·《尙書》·《禮記》·《春秋》 등 儒敎經典을 3년간 습득하기로 맹세했다든지, 圓光의 世俗五戒에서 忠·孝.·信·勇·仁을 강조했다는 점에서도 찾을 수 있다.요컨대 佛敎와 儒敎가 왕권京에 거주하는 청년으로 신분은 진골귀족의 자제로부터 평민자제까지 포함되었다고 한다.이들 花郞徒는 3년간 정신적·육체적 수련을 쌓게 되는 바, 그 핵심적 강령은 眞平王 때 圓光이 貴山에서 제시했던 世俗五戒라 하겠다. 花郞徒는 청년전사로서 비상시에 국방의 제 1선에 나아가 발군의 무공을 거둠으로 인하여 新羅의 많은 兵士가 분전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다.물론 여기에는 현세적 욕망도 크게 작용하여 전공에 의한 부귀의 유지라는 門閥意識도 현저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 현세욕망이 五戒를 추진시키는 힘으로 승화되었다면 결국 개인과 사회가 바라는 합일점에 도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더욱이 花郞徒 조직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에 완충제의 작용을 하여{) 李基東, 〈新羅 花郞徒의 社會學的 考察〉, 《新羅 骨品制社會와 花郞徒》, 一潮閣, 1984, p.35 4∼365.계급간 경쟁을 해소시키는 등 全사회적 결집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新羅가 三國을 統一하는데 중요한 기초가 되었던 것이다.이상에서 法興·眞興王代를 중심으로 정치제도의 정비를 개략했지만 이러한 배경에는 新羅의 전통적 소박성과 佛敎·儒敎思想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것은 안으로 중앙집권적 귀족국가를 성숙시켰고 밖으로 국력을 증진시킬 수 있는 기반이 되었으며 이것이 후일 統一을 성취할 수 있는 중요한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2) 漢江流域의 進出新羅가 후진성을 극복하고 眞興王代의 자주적 발전에 이르기까지는 표면상 그 단계적 발전을 시기적으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4세기 후반에 보이는 高句麗와의 結好관계이며, 둘째 433년부터 553년까지 120년에 걸친 羅·濟동맹이 그것이다. 셋째 羅·濟동맹을 파기한 553년 이후부터는 독자적 발전단계로서 麗·濟와 직접 대결하게 된 시기이다.첫째, 新羅가 高句麗와 結好한 것은 奈勿王 37년(392)에 實聖을 인질로 高句麗에 보냈다는 것으로 확실히 알 수 있지만, 377년과 382년 양차에 걸쳐 前秦으로 파견한 사신이 高句麗 사신과 동행한 것을 보면, 4세기부터 6세기 중반까지 장기간 동안 우호와 동맹의 관계를 유지해 왔다. 그러나 근래에 발견된 〈中原高句麗碑〉를 감안하면, 新羅는 高句麗·百濟에 대하여 일종의 이중외교를 갖고 있지 않았나 생각된다. 新羅는 麗·濟의 날카로운 대립관계를 적절히 이용하여 자국의 존속과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둘째로 羅·濟동맹을 체결하여 高句麗의 남진을 방어하고 공방전으로 전환하기에는 新羅의 입장이 용이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예로, 瑞鳳塚에서 발굴된 銀合杆에는 延壽元年辛卯 의 銘이 있는 바, 이 辛卯는 訥祗王 35년(451)으로 추정되고 延壽元年은 長壽王 39년(451)의 연호로 생각된다. 따라서 이 銀合杆은 이 해에 高句麗에서 제조하여 新羅로 보내져서 瑞鳳塚에 副葬되었다고 한다.{) 李昊榮, , 《史學志》13, 檀國大史學會, 1979, p.101결국 451년경에도 羅·麗의 교섭은 있었다는 물적 증거가 된다.羅·濟동맹은 맺었더라도 이러한 羅·麗의 관계 속에서 얼마동안은 쉽게 新羅가 高句麗에 항거하지 못했을 것이다.羅·濟동맹은 對高句麗항전에 있어서 서로 원병이 상호교환 되었으나 이 군사 원조는 극히 형식적이어서 실질적인 도움은 크게 되지 못하였다.{) 李昊榮, , 《史學志》15, 檀國大史學會, p.7457년 高句麗軍 3만이 百濟 漢城을 함락시키고 蓋鹵王을 戰死시켰던 사건이 일어났는데, 이 때 新羅 원병이 실전으로 돕지 못한 것은 百濟에게 결정적 타격이 되어 성이 함락되고 왕이 전사하며 수도까지 천도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에 대해 新羅가 상황이 많이 기운 것을 느끼고 고의적으로 회피한 것이 아니냐는 추측도 있다.新羅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이르기까지 삼척을 지나 강릉까지 진출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내륙으로는 선산·상주는 물론 조령을 넘어 괴산·보은에서 高句麗와 대치하고 있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中原高句麗碑〉에서 중원지역에 高句麗軍이 주둔했다 하더라도 중원지방을 新羅土內 라 명기한 이상, 建碑年代로 추정되는 481년 이전에 新羅가 중원지역에 진출하여 영유했다는다.
    인문/어학| 2004.12.16| 5페이지| 1,500원| 조회(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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