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
Bronze개인
팔로워0 팔로우
소개
등록된 소개글이 없습니다.
전문분야 등록된 전문분야가 없습니다.
판매자 정보
학교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직장정보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자격증
  • 입력된 정보가 없습니다.
판매지수
전체자료 1
검색어 입력폼
  • 사림이 시가문학에 끼친 영향 평가A좋아요
    목 차Ⅰ. 서론Ⅱ. 사림의 형성과 성장Ⅲ. 사림의 이념과 문학관Ⅳ. 시가문학에 미친 영향1. 내용적 측면2. 갈래적 측면Ⅴ. 결론Ⅰ. 서론고려말 권문세족을 비판하면서 신흥사대부가 등장했다. 그들은 조선조에 들어가면서 두 계열로 나뉘어졌는데 한 계열은 중앙정계에서, 다른 한 계열은 향촌사회에서 막강한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두 계열 중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확보하고 있던 사람들은 '사림(士林)'이라 불리어졌는데 그들은 조선시대 전반에 걸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본고에서는 사림의 형성이 우리 시가문학에 끼친 영향에 대해 살펴보겠다. 먼저 사림의 형성과 성장을 당시의 정치·사회적 현실과 관련하여 살펴보고, 사림문학의 바탕이 되었던 그들의 이념과 문학관을 살펴보겠다.그리고 사림의 형성이 우리의 시가문학에 끼친 영향을 갈래적인 측면과 내용적인 측면으로 나누어 살펴보겠다.Ⅱ. 사림의 형성과 성장고려후기에 신흥사대부가 정계에 대거 진출하였다. 이들 신흥사대부들에 의해서 성리학(性理學)이 수용되고 보급되었다. 성리학과 접촉한 신흥사대부들은 조선의 건국으로 인해 고려에서 조선으로 왕조가 교체되는 과정에서 입장을 달리하면서 두 계열로 나뉘어졌다. 하나는 조선건국을 지지하거나 주도한 계열로 공신가문으로 인정되어 그들과 그들 자손들이 중앙정계에서 주도적인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게 된 '훈구파(勳舊派)' 계열이고 다른 하나는 고려왕조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고집하면서 향촌사회에 숨어 학문연구에 전념한 '사림(士林)'이란 계열이다.이들 중 조선건국을 주도한 훈구파계열은 고위관직을 독점하고 공신전 등을 받아 새로운 지배층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또 다시 세력이 갈라져 이방원의 1·2차 '왕자의 난'으로 인해 승리하는 세력은 공신이 되고 패배하는 세력은 역적이 되었다. 그 이후에도 정변은 그치지 않아 1453년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단종을 쫓아내고 정권을 장악해 세조가 되었고, 또 다시 성종의 차남인 진성대군이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을 내쫓고 왕이 되었다.여러 차례에 걸친 정변을 통해 다수의 가지는 것이다.사림은 도학정치의 근본이념을 위민(爲民)·애민(愛民)으로 두고 그 실천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성리학의 보급을 위해 『소학』) 송대(宋代)에 와서 주희(朱憙)가 소학의 교육이 행해지지 않음을 개탄(慨歎)하여 옛날의 소학에서 실시하던 교육 내용으로 된 글들을 모으고, 또 그 글과 관련되는 옛 성현(聖賢)들의 말과 행실을 수록(收錄)하여 이 책을 만들었다. 책이름을 《소학》이라고 한 것도 학교 이름인 소학을 그대로 응용한 것이다.이 책은 내편(內篇)과 외편(外篇)으로 크게 나뉘어지고 다시 내편을 입교(入敎)·명륜(明倫)·경신(敬身)·계고(稽古)의 네 편으로, 외편을 가언(嘉言)·선행(善行)의 두 편으로 분류했다. 입교는 사람을 가르치는 법을 세운다는 뜻이니, 입교 편에서는 태교(胎敎)에서부터 시작하여 가정 교육 등을 논했다. 교육 방침이 정해진 뒤에야 교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관점(觀點)에서 이 편을 첫머리에 두었다. 명륜 편에서는 어버이와 자식, 임금과 신하, 남편과 아내, 어른과 어린이, 벗과 벗 사이의 도리를 밝혔다. 이것이 이른바 오륜(五倫)으로서, 인간 도덕의 기본이 되는 윤리(倫理)다. 경신(敬身)은 몸가짐을 공경히 한다는 뜻이니, 유가(儒家)에서는 항상 두려워하고 경계하는 마음으로써 몸가짐을 삼가는 거경(居敬)을 수양의 공부(功夫)로 삼았다. 경신 편에서는 마음가짐·몸가짐에서부터 위의(威儀)·의복·음식의 법도 등을 논했다. 계고 편은 한(漢)나라 이전 고대 중국의 성현(聖賢)들의 언행(言行)을 상고하여 입교·명륜·경신의 실지를 입증(立證)한 것이다. 가언 편과 선행 편은 한 대(漢代) 이후 송대(宋代)에 이르는 사이에 있었던 어진 사람들의 교훈이 되는 말과 좋은 행실을 수록한 것이다. 계고·가언·선행 편은 성질에 있어서 같은 것이지만, 계고 편을 입교·명륜·경신과 함께 내편으로 한 것은 한 대 이전 성현의 언행을 더욱 중시(重視)한 것으로 보인다.이 매우 중요시되었다. 『소학』은 이름 그대로 아이들이 배우는 예절 교과서였다. 국 후, 악장을 정리하면서 전래(傳來)의 시가를 개사하거나 아예 삭제해 버린 일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전통시가에 대한 인식의 변화는 왕실이나 조정에서만 진행된 것이 아니고 사림파에게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퇴계의 경우를 들 수 있는데, 그는 전통시가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반대의사를 밝혔다.우리 동방(東方)의 가곡(歌曲)이 대체로 매우 음란하여 족히 노래부를 수가 없다. 한림별곡과 같은 문인들에 의해 창작된 작품도 긍호방탕(矜豪放 )하고 아울러 설만희압(褻慢戱狎)하여 더욱 군자의 숭상할 바가 못된다. 근세에 오직 이별육가가 있어서 세상에 널리 전해지고 있는데 이것이 그것보다는 낫기는 하나 애석하게도 완세불공(玩世不恭)의 뜻이 있어서 온유돈후(溫柔敦厚)의 실(實)이 적다. 노인(老人)은 평소에 음률을 알지 못하지만 세속(世俗)의 음악(音樂)을 듣기를 싫어한다.본조는 사림의 형성이 문학에 끼친 영향 중 가장 큰 변화는 '문학은 도를 닮는 그릇' 즉, '문이재도론(文而載道論)' 의 철저한 실천이라고 보았다. 물론 전술했듯이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훈구파들도 정치와 문학을 결합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악장문학을 통해 왕조의 창업을 찬양하고, 훈민의 내용을 담은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하지만 집권세력으로서의 위치가 굳어지면서 보수화 되었고, 이들은 현란한 표현에 치중하는, 이른 바 사장문학에 더 심취하게 되었다. 이에 사림들은 철저히 주자학적 사고에 입각해 '문'은 '도'를 담는 그릇이며, '도'의 말단에 있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수식이나 일삼는 훈구파들을 비판했다. 사림파의 문학은 '도학'의 이념을 벗어나서는 성립될 수 없었다. 자연을 노래한 강호가도의 작품에서도 자연은 보고 즐기는 대상물이 아닌 하나의 관념이었다. 물론 사림에도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문이재도'라는 기본이념에는 다름이 없었다.그럼 '도를 담는 그릇'으로서의 문학을 실재 작품을 창작할 때는 어떤 식으로 구현했는가 알아보도록 하자. 본조는 크게 내용적 측면과 갈래적 측면으로 나누치적 입지는 중앙정계의 주도권 쟁탈에 있어, 하나의 훌륭한 도구가 된다. 신재의 나 송강의 가 모두 그들의 목민관 재직 시 제작된 사실을 고려할 때, 그러한 사실은 더욱 분명해진다. 즉 사림은 지방향리에서의 정치적 치적을 중앙정계의 진출로 연결시킴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개혁적 의지를 실천하고자 한다.) 신영명, 『사대부시가의 연구』, 국학자료원, 1996, p157-159(2) 강호가도 작품의 성행사림들은 정계에서 활동하지 않을 때에는 자신이 기반을 두고 있는 향리로 내려와 자연 속에서 심신을 수양했다. 그 중에는 기반이 약한 사림의 정치 활동에 회의를 느끼고 자연 속에 은거한 부류도 있고, 나아갈 때를 기다리며 자신을 가다듬으며 준비를 하는 부류도 있었다. 그리고 아예 정치에는 관심이 없이 향촌에서의 생활에 안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예를 들어, 정극인은 산림처사로서의 생활을 다루는 은일가사를 지음으로써, 밀려나서 은거를 하는 것이 바라지 않던 바일수록 자기는 신선인 양 자부하고 세속의 먼지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림들이 가엾다고 하며 심리적인 보상을 얻으려고 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 2』, (주)지식산업사, 1999, p320-321그리고 태평성대의 환상이 쉽게 깨지고 권력투쟁이 언제든지 재연될 수 있는 조건에서 마음을 거점으로 하는 서정시 시조가 화합을 유지하려면, 정치를 버리고 자연을 택해야만 했다. 그러다가 사화가 일어난 다음에는 자연을 들어서 정치에 반격을 펴는 경향이 나타났다. 정치가 도학정치여야 하는데 그럴 수 없다는 것이 판명되자 자연에다 도학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강호가도를 표방하는 데서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또한 훈구파가 권력을 독점해 횡포를 부리는 데 맞서서 도학정치를 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림파는, 강호에서 노닌다고 하면서 진출의 기회를 찾고, 그런 노력이 좌절되어 사화에서 희생되면 그 쓰라림을 달래기 위해서 강호의 자연으로 정치에 대한 반론을 펴려 했다.) 조동일, 『한국문학통사2』, (주)지식산업사, 1999, p339-340를 넘볼 뿐 아니라 외모를 담담한 척 꾸미나 속은 몸달아 어쩔 줄 모르며 표면적으로 근엄하지만 이면으론 나약한 이른 '도명(盜名)'이라 한다.또한 율곡은 강호를 보는 안목을 셋으로 나누었다. 첫째가 '목견이이(目見而已)', 즉 그저 별 뜻이 없이 보는 차원이고, 둘째가 '심지산수지취(深知山水之趣)'로 자연의 미경(美景)을 깊이 터득하는 것이고 , 셋째가 '지도체(知道體)'로써 자연 속에 감추어진 도체(道體)를 응시하는 것으로 이 셋째의 시각을 최고로 보았고, 또 이를 '진락(眞樂)'이라 했던 것이다. 이러한 강호에 대한 관점은 율곡에 한하는 것은 아니다. 퇴계를 위시한 사림파 지식인 거의 모두에게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율곡이 사림파 지식인의 강호에 대한 인식에 관하여 이론적으로 체계화시켜 기술했기 때문에 주로 그의 글을 인용한 것이다. 율곡은 사림파 지식인의 대표적인 인물이고 따라서 그의 견해는 그 자신의 개인적 주장에 그치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민홍, 《사림파 문학 연구》, 성균관대학교 박사논문, 19842)영남사림과 기호·호남 사림의 비교사림의 정치적 전망은 이른바 이기이원론에 기초해 있다. 이기이원론은 사물의 배후에 놓여있는 본질로서의 이(理)가 사물을 떠나서도 실제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사물을 떠나지 않고 항상 그 속에 내재하는가에 따라 주리론과 주기론의 두 갈래로 나뉜다.영남사림의 강호가도의 문학에는 주리론에 입각한 자연인식이 나타나며, 기호·호남사림의 작품에는 주기론에 입각한 자연인식이 나타난다. 이때 주리론에 입각하면, 자연과 인간의 주객합일은 이(理)에의 '도달하기'가 되며, 주기론에 입각하면, 이(理)의 '드러내기' 가 된다.이렇게 볼 때, 영남 사림의 작품에는 이(理)에 도달하는 과정상의 어려움이나 또는 그 경지에 도달한 후의 자긍심에 대한 서술적 표현이 많고, 기호·호남사림의 작품에는 자연과 인간이 서로 함께 어울려 있는 모습에 대한 묘사적 표현이 많다.) 신영명, 『사대부 시가의 연구』, 국학자료원, 1996다.
    인문/어학| 2002.11.23| 14페이지| 1,000원| 조회(663)
    미리보기
전체보기
받은후기 1
1개 리뷰 평점
  • A+최고예요
    0
  • A좋아요
    1
  • B괜찮아요
    0
  • C아쉬워요
    0
  • D별로예요
    0
전체보기
해캠 AI 챗봇과 대화하기
챗봇으로 간편하게 상담해보세요.
2026년 05월 21일 목요일
AI 챗봇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 AI 챗봇입니다. 무엇이 궁금하신가요?
8:05 오후
문서 초안을 생성해주는 EasyAI
안녕하세요 해피캠퍼스의 20년의 운영 노하우를 이용하여 당신만의 초안을 만들어주는 EasyAI 입니다.
저는 아래와 같이 작업을 도와드립니다.
- 주제만 입력하면 AI가 방대한 정보를 재가공하여, 최적의 목차와 내용을 자동으로 만들어 드립니다.
- 장문의 콘텐츠를 쉽고 빠르게 작성해 드립니다.
- 스토어에서 무료 이용권를 계정별로 1회 발급 받을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체험해 보세요!
이런 주제들을 입력해 보세요.
- 유아에게 적합한 문학작품의 기준과 특성
- 한국인의 가치관 중에서 정신적 가치관을 이루는 것들을 문화적 문법으로 정리하고, 현대한국사회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를 비교하여 자신의 의견으로 기술하세요
- 작별인사 독후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