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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문학] 가을실상사
    우리는 비웃지만, 실제로는 비웃음을 당하고 있다━━━━━━━━━━━━━━━━━━━━━(문학동네 2002 겨울호, 가을실상사(정도상)을 읽고)"지리산을 떠나면? 고향을, 수천년동안 함께 했던 땅을 버리고 떠나면? 잘 살줄 알았지만, 천만의 말씀이야. 부모들이 고향에서 정말 뼈빠지게 공부시켜 놓으면, 그 자식들은 결코 돌아오지를 않아. 떠나기만 하고 돌아오지를 않는다고… 결국 농촌은 늙어버렸어. 팍삭 늙어버렸다고. 갓난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아."정도상의 '가을실상사'는 이농현상으로 인한 농촌의 몰락과 도시생활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모습, 타의로 인해 도시생활을 하게되며 겪는 고통과 정신적인 분열을 그리고 있다. 대기업 부장으로 꽤 능력있는 간부사원인 진우는 어느날 자신의 현 모습에 회의를 느끼고 사표를 낸다. 놀래며 울음으로 말리는 아내를 달랜 후 사업 준비금으로 고향의 논을 팔아버리고, 노모와 농촌총각인 동생 현우를 서울로 불러올려 함께 생활을 한다. 하지만 바쁘게 운영되는 보석 세공공장에 비해 공장장을 시켜준 현우의 부적응과 이어지는 현우의 조울증적 증세가 나타나며 형제간, 부모자식간의 갈등이 나타난다. 결국 현우는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지고 진우는 현우가 그토록 원했고, 자신이 방해하지 않았다면 삶의 전부였을 고향에서 현우와의 작별을 하게된다.우리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 명예 등을 먼저 언급하게 되고, 언젠가부터 도시에 사는 것은 농촌에 사는 것에 대해 비교우위를 가지게 되었다. 자신이 태어나고 어린 시절을 보내온 고향집(대부분 시골)에서 벗어나는 것을 우선삼고 악착같이 공부를 하여 도시에서 정착을 하기위해 애를 쓰고, 지금 자라나는 많은 청소년들도 그렇게 하고있다. 소설에서 진우는 전형적인 현대인의 모습이다. 대기업 부장, 안락한 아파트에 단란한 가정, 명함과 신용카드 몇장으로 대표되는 전형적인 현대인이다. 이에 반해 동생 현우는 농촌을 지키는 사람의 표본이라 할 수 있다. 비록 젊은 시절 바깥으로 돌며 공부를 도외시했지만 그는 땅을 믿고, 땅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는 조급하지 않고 우직하니 주어진 일을 한다. 현우에게 농사는 그를 지탱해주는 자존심인 것이다."추석도 지났는데 나락을 베야지이! 엄마도 함께 가자. 가서 고추라도 따! 서리 맞으면 한 해 농사 망치는 거 알지?"-거실 바닥 가득 흙이 채워져 있고 현우는 화분의 꽃들이며 나무를 나락으로 착각하고 낫으로 베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현우는 조울증 증세를 나타내며 망상에 빠져든다. 그는 도시 한복판에서 나락을 베러가고(실제로 베는지도 모르겠다), 왕이 되기도 한다. 도시의 삶 속에서 현우는 그에 동화되는 것보다 망상이라는 극단적인 상태를 통해 그가 몸담고 있는 도시의 지배를 꿈꾼 것은 아니었을까. 그는 나락으로 상징되는 도시, 자신을 못견디게 만드는 것, 농촌에서의 삶에 대한 그리움 등을 모두 베려는 것은 아니었을까.소설은 바뀌어가는 우리 삶의 세태를 다이아몬드와 똥이라는 대립적 사물을 통해 단적으로 알려주고 있다. 현우가 실수인 듯 떨어뜨린 1캐럿의 다이아몬드를 찾기위해 모든 공장사람들이 동원되고 결국 발견을 했을 때 안도하는 모든 사람들과 자신들의 몸에서 매일 나오는 것이면서도 극도로 터부시하는 똥. 과연 다이아몬드는 왜 좋은 것일까. 빛이 나기 때문에? 예쁘기 때문에? 과거 농사를 짓는데 똥은 매우 중요한 거름이었다. 똥을 사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집집마다 자기 가족이 다른 곳에서 똥을 누고오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시기였다. 똥은 거름뿐이 아니라 변소에서 상주하던 돼지의 먹이였고, 그 돼지는 집안의 중요한 재산이었다. 우리가 열광하는 다이아몬드는 단지 탄소덩어리일뿐이다. 귀금속류로 쓰이지 않을 경우 그다지 필요가 없는 것임에 분명하다. 그럼에도 우리의 물욕을 자극하는 이유는 우리의 판단을 흐리게 만드는 많은 것들, 그들의 존재가치를 진정한 필요성이 아닌 그릇된 가치판단의식으로 인한 것이 아닐까.결국 현우는 지리산 밑의 고향집에 돌아오게 되고, 감나무 밑에서 고향을 지키게 된다.- 어린시절의 마당풍경, 외양간에는 어미소와 송아지가 방울을 딸랑거리며 한가하게 되새김질을 하고 있고, 변소 아래층에선 똥돼지가 꿀꿀거리며 내 응가를 받아먹느라 바쁘게 돌아다녔다. 마당에선 암탉이 노란 병아리를 거느리고 모이를 쪼았고 병아리들은 삐약삐약 노래하며 어미를 따라다녔다. 마루 아래 댓돌 옆에선 누렁이 '도꾸'가 게으르게 하품을 하다가 꾸벅꾸벅 졸았다.내가 마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함양에서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 새마을 운동과 함께 맨 먼저 똥돼지가 변소에서 쫓겨났다. 진주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무렵엔 쟁기를 끌던 황소 대신에 경운기가 들어왔다. 대학에 입학하자 황소도, 암소도, 송아지도 학자금으로 변해 이 마당을 떠났다. 대학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병아리들의 삐약거리는 소리마저도 뚝 그쳤다. 마당에서 하나둘씩 사라지는 소리와 함께 구름다리, 줄배 나루터, 징검다리도 운명을 함께 했다. 자갈과 흙덩이의 하얀 신작로 대신 검은 아스팔트가 실덕을 지나 벽소령쪽으로 길게 이어지자, 그 도로를 통해 관광객들이 들어왔고, 그 도로를 통해 마을 사람들은 떠났다. 지리산으로 들어오는 도로가 좋아지면 좋아질수록 마을은 텅텅 비어갔다. 나도 고향을 떠났고 여행객처럼 잠깐씩 돌아오는게 고작이었다.
    인문/어학| 2003.05.16| 2페이지| 1,000원| 조회(3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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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관계] 핵 태세 검토보고서에 대한 평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후 미국과 북한의 관계는 계속적으로 악화의 길을 걷고 있다. 우선 부시행정부는 출발부터 클린턴 행정부의 대북포용정책을 비판하고 전면 재검토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2001년 9·11 테러를 거치며 북한은 미 국무부가 지정한 테러 지원국으로서의 의심의 눈초리를 받다가, 급기야 2002년 연두교서에서는 이라크, 이란과 함께 '악의 축'으로 지칭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와중에 2002년 10월 James Kelly 차관보의 평양 방문시 우라늄 농축에 대한 문제가 불거지며,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의한 중유공급을 중단했고, 북한은 영변 2호기의 원자로 재가동으로 맞서며 양측은 계속적으로 반대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진행에 2002년 1월 8일 미 의회에 제출된 핵 태세 검토 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는 커다란 역할을 하게 되었다. 과연 NPR이란 무엇일까?1. 핵 태세 검토 보고서(Nuclear Posture Review)NPR에 나타난 미국의 핵 전략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먼저 미국의 핵 정책 역사를 간단히 파악할필요가 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미국은 과거 1950년∼70년대에 걸쳐 `대량보복'(massive retaliation),`신축적 대응'(flexible response) 등 핵무기의 기본전략 및 개념을 발전시켜 왔으며 1990년대 초반 냉전종식 이후에도 핵무기 사용 가능국에 대한 `확실한 파괴'를 보장할 수 있는 핵 억지력의 유지를 근간으로하면서 대외적으로 범세계적 핵확산 통제체제의 강화를 중시해 왔다. 지난 2000년 초 백악관과 의회에제출된 미 국방부 연례보고서는 핵무기를 “불확실한 미래를 지켜주는 울타리로서 뿐만 아니라 동맹국에 대한 약속을 보장하는 수단으로서 미국 안보 유지의 필수가결한 요소”라고 명시하고 있다.그러나 부시행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핵전략 기조는 `보복적 억지'에서 `방어적 억지' 개념을 중시하는경향을 나타내고 있으며 이와 함께 미·러 간 핵무기 감축을 통한 전략적 안정의 구축,.가장 기본적인 목표는 공세적인 공격체제(핵, 비핵 둘 다), 방어(적극적인 방어와 수동적이 방어 둘 다)시의 적절한 방식으로 출현하는 위협에 대처할 수 있는 새로운 능력을 제공하게 될 부활된 국방의토대를 만드는 것이다.여기의 New Triad는 향상된 명령과 통제(Command and Control-C2) 및 정보체제에 의해 하나로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New Triad의 설정은 두 가지 면에서 핵무기에 대한 의존을 줄일 수 있고세계 미사일 방어능력을 확산시키는 과정에서 공격을 저지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다.방어 시설의 추가 (시의 적절한 무력 능력 적용과 향상된 C2 및 정보체제에 대한 전망과 더불어)는미국이 냉전시기처럼 전쟁억제능력을 강화하기 위해 공세적 공격무력에 지나칠 정도로 의존하는 일이더 이상 없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또한 비핵 공격 무력의 추가는 (재래식 공격과 정보작전을 포함해서)미국이 공세적인 억지능력을제공하기 위해 과거보다 핵 무력에 덜 의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의미한다.New Triad를 구성하는 새로운 능력들의 결합은, 2001년 11월 13일 부시 대통령이 발표한 바의이미 작전 배치되어 있는 1700-2200개의 전략 핵탄두의 목표에 핵 무력을 접근시킴으로서 미국에대한 위험을 감소시키게 된다.나. 핵심내용의 요약(1) 미 국방부 전략가들은 러시아로부터의 위협을 격하시키고 공개적으로 장거리 핵무기 숫자 감축약속을 강조해왔지만 (폭발력이) 큰 핵무기가 필요하지 않은 돌발사건에 대처하기 위해 전술적이고 `유연한' 핵 능력을 추진하고 있다.(2) 전략가들은 재래식 군사력과 사이버 군사력, 핵무기를 통합한 새로운 무기 및 지원 시스템을추구하고 있으며 핵 능력이 가미된 최종 생성물은 대 아프가니스탄(전쟁)이후 모델로 정밀무기와장거리 가격 , 특수. 비밀공작이 결합된 형태다.(3) NPR은 핵무기가 '비핵공격에 견딜 수 있는 목표물(깊은 터널이나 동굴 등)이나 핵, 생화학 무기사용에 대한 보복, 불시의 군사사태에 사용될 수 있다'고테러조직 알 카에다와 대결하는 것과 같은 종류의 도전 속에서 일정 역할을 할 수 있는핵무기를 모색하고 있다.(9) NPR은 따라서 지하벙커파괴용 미니핵폭탄, 민간인 희생 등 `2차 피해를 줄이는' 국부가격용 `탄두',크기가 작고 범위가 좁은 목표물에 사용할 수 있는 무기(예컨대 핵 폭발력을 조종할 수 있는개량 무기) 등과 같은 것에 대한 개발을 강조하고 있다.(10) NPR은 또 미 특수부대요원들이 아프간에서 재래식 무기 공격을 위해 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핵무기를 위한 정보 수집 및 목표를 찾는 역할을 하도록 훈련받을 것과 사이버전과 다른 비핵군사력이 핵공격전력과 더욱 밀접하게 연계되도록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11) NPR은 러시아의 핵 프로그램이 우려의 원인으로 남아 있지만 `이념적 갈등 원인'이 제거됐기때문에 러시아와 연관된 핵 돌발사건을 '그럴 듯하지만 예상되지 않는 것'으로 평가했다.(12) NPR은 새로운 3가지의 전략무기방침(New Triad)을 채택했는데 이는 `공세적 타격 중심'(핵 및재래식 전력) `능동적·수동적 방어'(미사일요격 및 다른 방어수단들), `대응적 방어 기간시설'(핵무기 개발. 생산 및 핵실험 재개 능력)로 구성돼 있다. 이전에는 폭격기, 장거리 지상발사미사일, 잠수함 발사 미사일 3가지가 전략무기방침의 세 가지 축이었다.(13) NPR은 `새로운 비핵전략능력'을 핵전쟁계획에 통합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새 능력은 견고하고 땅속깊은 곳에 매장된 목표물(HDBT)과 같은 새 위협들을 제거하고 이동 및 재배치가 가능한 목표물을찾아 공격하며 생화학물질을 없애고 명중도를 높여 부수적 피해를 줄이기 위해 개발돼야 한다는것이다.(14) NPR은 4대의 개량형 트라이던트 잠수함, 무인전투항공기, 최신식 공중발사 크루즈미사일을사용하는 `새로운 타격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다.(15) NPR은 새 핵무기 외에 공격하기 어려운 적 시설에 침투, 치명적인 생화학무기를 파괴하는방법으로 `원인파괴'라는 프로그램을 제의하고 있다. 여기에는 '생산 및에 대한 보복, 불시의 군사사태에 사용될 수 있다'는 내용이다.이는 국제사회에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그동안 국제사회에서의 핵의 역할(전쟁억지)에서벗어나 보다 적극적인 핵무기 사용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즉 재래식 무기로 파괴할 수 없는 목표물이나,핵, 생화학 무기 등 대량살상무기를 파괴하기 위해 핵무기가 사용될 수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이에미국은 적극적으로 진화에 나섰으나 NPR의 내용은 누가봐도 과거 미국의 핵전략으로부터 상당한결별을 의미한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NPR의 내용은 이번 미국의 이라크 공격에서도 간접적으로 찾아 볼 수 있다. 그동안 평화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미국이 약한 명분만으로 국제사회의 반대를무릅쓰고, 이라크를 선제공격한 것은 미국의 새로운 군사전략을 알게하는 것이다.나. 비핵국에 대한 공격 가능성다음으로 비핵국을 공격대상에 포함하고, 그 결과 핵 금기라는 국제규범을 위반하게 된 것이다. 미국이공격가능대상으로 지정한 7개국(중국, 러시아, 이라크, 이란, 북한, 리비아, 시리아) 중 중국과 러시아를제외하면 모두 비핵국이다. 과거 냉전 기 미국의 전략가들은 기본적으로 핵무기가 단순히 군사력의 일부가 아니라 전혀 종류가 다른 무기라고 생각했다. 즉, 엄청난 파괴력 때문에 핵무기를무분별하게 사용했다가는 전 지구에 파멸이 오리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핵무기 개발과 사용에관한 한 엄격한 국제적 규범이 존재했고, 그런 이유로 IAEA 같은 국제기구와 NPT, CTBT 등의 국제조약이 존재한 것이다.사실 핵에 대한 국제규범은 비보유국에게 엄청난 불이익이 가는 것이다. 이미 핵을 보유한 국가는계속적으로 가질 수 있고, 비보유국은 단지 위험하다는 이유로 핵 보유를 원천 봉쇄하는 것이기때문이다. 하지만, 핵이라는 존재가 주는 파워는 평화를 원하는 많은 국가들이 자신들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조약을 체결하고 이를 준수토록 했다. 하지만 이 희생에는 한가지 묵시적인 규범이 형성되어있었다. 핵국이 비핵국에 대해서 핵무기를 먼저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위해 소형 전술핵무기 개발의 필요성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사례로인해 우선 타겟으로 설정한 것이 북한이고, 미국은 어떻게든 북한으로부터의 핵 관련 의혹을 없애기위해 북한의 목을 죄고 있는 것이다. 조금도 부풀림 없이, 보고서 내용 자체는 미국 스스로 금지하고있는 핵실험을 재개해야 할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핵 비확산 추세에 역행하면서 북한에 대해 핵에대한 약간의 가능성이라도 없애고자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라 할 수 있다.3. NPR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가. 미국의 핵태세 검토보고서(NPR)는 미국 우위의 핵전략을 내세우고 북한에 대해서도 핵사용 가능성을시사함으로써 새로운 긴장고조의 불씨가 되고 있다는 분석(1) NPR은 기존 핵무기의 전술적 한계인 무차별적 파괴라는 약점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4세대 핵무기개발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들어있음. 이전의 Negative Security Assurance(소극적 안전보장)에서Positive Security Assurance(적극적 안전보장)로 선회했다는 것인데 이처럼 미국이 핵 군축을 하지않고 새로운 핵무기를 만들겠다는 것은 무리한 정책임. 핵 비확산의 주도권을 상실할 수 있고 핵군비경쟁을 가속화시킬 수 있음.☞ 신성택 국방연구원 연구위원, 평화네트워크 금요평화포럼 '북한 핵문제 어떻게 풀 것인가,2002. 3. 15.(2) NPR은 비핵국을 공격대상에 포함함으로써 핵금지라는 국제규범을 위반했고 미국 스스로 금지하고있는 핵실험의 재개 필요성을 제기함으로써 핵비확산 추세에도 역행하는 것임. 과거 미국의 핵전략과세계적 핵 패러다임으로부터의 상당한 결별이라는 점에서 우려할 만함. 핵사용에 대한 미국의 진정한의중을 파악하고 미국이 한반도 유사시 핵사용을 고려하고 있다면 도저히 용납할 수 없음. 이는한편으로 대화를 제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핵폭탄 세례를 각오하라는 태도이므로 북한이 굴복하기보다 더욱 강경하게 대응할 것임.☞ 이상현 세종연구소 연구위원, '미국의 핵태세검토보고서와 한반도 안보,' 『정세와 정책』 2002.4월호
    사회과학| 2003.05.16| 8페이지| 1,000원| 조회(4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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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관계] 한국전쟁의 기원
    자신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커밍스는 수정주의 학파에 속하는 역사학자이다. 주지하다시피 제 2차 세계대전이 종식한 이후 미국의 사학계는 냉전의 기원을 둘러싸고 학문적인 대립과 절충을 지속하여 왔다. 논쟁의 핵심은 냉전의 기원과 관련된 미국과 소련의 책임문제이다.한국전쟁의 시작한국 38선에서 일요일 새벽에 북한군이 전 전선에 걸쳐 침공하여 왔음을 전함. 현지 시간 9시 30분의 보고로는 서울의 한국군 사령부에서 북쪽으로 65 킬로 거리에 있는 개성에서 한국군 제 1사단이 9시경 격파되고, 옹진반도의 남쪽 3, 4 킬로에서 한국군이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음.보고에 의하면 동해안의 강릉 아래에 20정의 소형 선박들이 바다에서 상륙하고 있음. 해안도로를 차단했다고 함. 아직 단편적이고 불명확한 것임을 강조해 둠. - 한국 주재 제임스 특파원 발단편보도오늘 6월 25일 이른 새벽 남조선 괴뢰정부는 38도선 전역에 걸쳐 38도선 이북지역으로 불의의 진공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진공을 개시한 적은 해주방면 서쪽, 금천방면, 철원방면에서 38도선 이북지역으로 1∼2㎞까지 침입해왔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무성은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격퇴시키라고 공화국 경비대에게 명령하였다. 현재, 공화국 경비대는 진공하는 적을 요격하면서 가열찬 방어전을 전개하고 있다. 공화국 경비대는 양양 방면에서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격퇴시켰다. 인민군 부대와의 합동 작전으로 공화국 경비대는 38도선 이북지역으로 침입한 적을 완전히 격파하고 반격전으로 들어갔다. 6월 25일 현재 공화국 인민군과 경비대는 다수의 지역에서 38도선 이남지역으로 5∼10㎞까지 전진하였다. 전투는 계속되고 있다. - 전쟁 개시 당일 북한 내무성 공식보도한국전쟁은 한국현대사의 클라이막스이자 대파국이었다. 커밍스의 한국 현대사 연구도 궁극적으로는 한국전쟁의 기원을 밝히는 것에 목적이 있다. 1980년대 초 커밍스가 한국전쟁을 본격적으로 재론하기 이전에는 한국전쟁에 관하여 서로 상반된 두가지 정설이 고착되어 있었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단정한다. 그것은 반식민지 투쟁에 뿌리를 둔 혁명적 민족주의 세력과 탈식민지 상황에서 현상유지를 꾀했던 보수·수구집단간의 갈등이 해방 이후 혁명과 반동의 변증법을 거친 다음 마침내 1950년 6월 25일에 이르러 또 다른 방식의 대결, 곧 직접 교전으로 비화했다는 설명이다. 그리하여 커밍스가 볼 때 전쟁의 구체적인 발발 과정은 오직 부차적인 중요성을 가질 뿐이다.누가 먼저 전쟁을 시작했든 그것은 구조적으로 불가피했다는 인식이다. 이런 맥락에서 전쟁의 원인에 따른 책임 소재는 커밍스에게 중요한 사항이 아니다. 한국전쟁의 기원은 구조적인 것으로서일차적으로는 1945∼48년 동안 한반도 안팎에서 발생한 일련의 사태발전에서, 그리고 부차적으로는 일제 식민지 유산에서 발견된다. 일제 식민지 유산 중 가장 중요한 문제점의 하나로서 토지개혁문제를 들고 있다. 그는 1946년 토지개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북한이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남한을 군사적으로 점령하여 토지개혁을 전한반도에서 완결시키고 식민지시대와의 연속성을 해소하고자 시도하는 과정에서 한국전쟁이 내전의 형태로 발생하였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을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6월 25일 이전에 남한에서는 토지개혁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1948년 분단체제의 성립 이후에는 남북한의 존재 자체가 말하자면 서로에게 도발행위였다.한국전쟁은 누가 일으켰나한국전쟁은 거의 전적으로 김일성의 결정이었다. 1945∼48년 소련 점령 기간 동안 북한에서는김일성을 정점으로 한 공산주의 정권이 탄생했다. 커밍스에 의하면 소련은 소비에트 정권을 북한에게 강매한것도 아니고 김일성을 꼭두각시로 삼을 수 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가 볼 때 북한체제는"사회주의 국가치고는 너무나 민족주의적"이었다. 1946년 봄, 남한과는 대조적으로 북한은 위로부터의 사회혁명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그후 남북한간 대립구조의 기본축은 계급갈등으로 획정되었으며 '혁명적 민족·항상 열려 있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남북한의 국경 충돌이 다반사로 발생했기 때문이다. 커밍스에의하면 1948∼50년 동안의 남북한간 무력충돌에는 이승만의 책임이 더 컸다. 단정 수립 이후 이승만이 주한미군 철수를 연기하기 위해 '북벌'을 공공연히 천명하면서 제한적 전쟁놀이를 벌였기 때문이다. 당시만 하더라도 확전을 자제한 쪽은 오히려 북한이었다. 커밍스가 볼 때 김일성이 전쟁을 최종적으로 결심하게 되는데는 1949년 가을 중국혁명의 영향이 매우 중요했다. 특히 국공내전에 참여하고 있던 "10만 내지 15만 명" 정도의 조선족 병사가 북한으로 귀환하게 된 것은 김일성의 개전 의지를 크게 고무할 수 있었다.그러나 커밍스가 김일성을 한국전쟁의 유일한 원인 제공자로 인식하는 것은 아니다. 김일성의 대남 침략은 남한과 미국의 대북 도발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6·25 한국전쟁을 본격화 한 것은 김일성이었지만 그것을 자극한 것은 미국의 음모 혹은 유도였다는 것이다. 아니면 최소한 미국은 전쟁을 불사하고 기다렸다는 것이 커밍스의 견해이다. 남한에 친미정부를 수립함으로써한반도에 대한 봉쇄정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미국은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걸쳐 롤백정책으로 내밀히 이동했다. 1949년 말의 주한미군 철수와 1950년 벽두의 소위 애치슨 선언은 미국의 입장에서볼 때 결코 남한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특히 애치슨 선언은 북한의 남침에 '푸른신호'를 켜 준 전략적 실수도 아니었고, 봉쇄정책의 옥의 티도 아니었다. 대신 그것은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하나의 압박이자 속임수였으며, 미국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원칙을 이승만에게 다시한번 주지시키는 계기였다. 이는 한국전쟁 개전직후 애치슨 선언 등에서 표면적으로 드러나던 한국에 대한 무관심한 정책에 반해 너무도 즉각적이고 빠른 참전결정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알 수 있다. 이승만은 한국을 미국의 동북아 방위선에서 제외시킨 애치슨 선언에 오히려 감사를 표시했고, 김일성은 그것에 속아넘어갈 정도로 제공한다. 특히 김일성이 공공연히 밝히던 "스탈린 동지의 명령은 법이다"라는 발언이 주는 의미, 즉 한반도 문제에 대한 스탈린의 영향력과 그로 인한 북한이 소련 사전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움직일 수 있었는가에 대한 의문에 대해서 커밍스는 전혀 답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 까닭으로 그가 제시하고 있는 것은 증거 불충분, 북한의 자주적 태도, 조선족 병사의 귀국에 따른 북한의 독자적 전쟁 수행 능력 향상 및 전쟁 결과에 있어서 소련의 불리한 이해득실 등이다.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나그렇다면 막상 6·25 전쟁은 구체적으로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커밍스의 구조주의적 관점에 의하면 이 질문은 "이데올로기적 다이너마이트"를 내장한 "잘못된 문제제기"이기 때문에 "대답이 있을 수 없다". 이는 미국의 남북전쟁, 베트남 전쟁, 그리고 중국내전에서 누가 먼저 방아쇠를 당겼나를 묻는 것이 우문에 불과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따라서 커밍스는 단지 한국전쟁 직전의 국내 상황과 국제적 연관을 중심으로 세 개의 모자이크를 제시할 따름이다.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가설로서 적극적인 검증보다는 소극적 반증이라는 방법론에 기초하고 있다. 세가지 모자이크 가운데 커밍스가 "정직한 역사가로서 도저히 뿌리칠 수 없다"고 주장한 것은 두 번째 내용이다. 그 핵심주장은 이렇다. 1950년 6월 24일과 25일 새벽 사이에 옹진반도에서 남한측의 도발과 이에 대한 북한측의 반격이 동시적으로 이루어지고 이것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전쟁은 옹진반도에서 철원, 금화, 춘천, 양양 등 38선 전역으로 확대되었다. 보다 구체적으로 커밍스는 두 개의 시나리오를 제시한다. 첫째는 남한이 옹진반도를 공격하였을 때 마침 북한은 하기 군사기동훈련을 위하여 상당한 병력을 38선 부근에 동원하고 있었는데, 이들 병력이 남측의 도발에 즉각 대응하였다는 것이다. 둘째는북한이 이미 잘 계획된 남침계획을 수립해 놓고 있던 상태에서 남한측의 도발에 직면하자 곧바로 대규모 남침을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이 가운데 어느 것이 사실이든따라 김일성의 전쟁준비가 충분해진 것이 1950년 초 이후였다. 또한 남한내이 게릴라 활동이 절멸했던 것도 1949∼50년 겨울이었다. 따라서 북한군의남진은 베트남이나 중국의 경우에서처럼 비정규적 게릴라전이 한계에 부딪치자 대규모 정규전으로 전략이 바뀌어지는 내전의 일반적 패턴이었다. 이런 점에서 커밍스는 한국전쟁이 북한 내 박헌영의정치적 입지와 무관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 내 토지개혁 실시 여부와도 별로 상관이 없었다고 주장한다. 커밍스가 볼 때 한국전쟁은 당시 고착화되어 가던 한반도의 분단을 무력으로 해소하려는김일성의 결심이 결정적이었는데, 그 구체적인 배경으로서 커밍스는 전후 동북아에 대한 미국 헤게모니체제하에서 1950년 상반기부터 부쩍 강화된 일본의 위상강화 및 한일유착 경향을 지적하고 있다. 요컨대 커밍스에 의하면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준비하고 시작한 내전이었다. 1949년 5월 초부터 만 18세 이상의 불구자를 제외한 남자들을 전부 병역의무를 지워 등록을 시키는 인민군 병사 모집으로 본격화된 전쟁준비는 1949년 말 공군사단 창설 등을 거쳐 1950년 6월 22일, 7개사단(제1, 2, 3, 4, 5, 6, 7사단)과 105 전차여단 병력을 38선 이북 10∼30킬로미터 이내의 지정된 각 집결지역으로 이동시키는 것으로 완료되었다. 커밍스는 우기를 앞둔 6월 25일은 사실상 최상의 택일이 아니었고, 단지 전쟁의 빌미가 주어진 그 순간을 결정적인 기회로 활용하였다는 이론을 편다. 그 대신 개전 초기에 있어서 김일성이 염두에 둔 것은 한반도 전체를 겨냥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전격전이자 제한전일 수밖에 없었고, 단지 초기 전황에 있어서 기대 이상의 승리가 전면적으로 나아가게 했을 따름이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김일성이 조국 해방절(광복절) 5주년이 되는 8월 15일을 기해 서울에 통일된 공산정부를 선포함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려는 목표가 있었을 것이라 예측도 가능하다. 통일정부를 선포하기까지의 준비작업(총 선거, 법안 마련 등)을 하는데 최소 .
    사회과학| 2003.05.16| 5페이지| 1,000원| 조회(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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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대사회 종합적 이해] 관동대지진
    우리는 무슨 자격으로 그들에 대해 논하는가.━━━━━━━━━━━━━━━━━━━━━1923년 9월1일 도쿄를 중심으로 한 간토(關東)지방일대에 커다란 지진이 발생하였다.당시 일본 정부는 모든 국력을 해외 침략에 쏟고 있었기 때문에 지진의 피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해 나갈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이들 피해자들이 중심이 되어 반정부적인 반란이 일어나지 않을까 두려워하게 되었고, 당시 일본인들의 관심을 한 곳으로 집중시킬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 군부와 경찰에서는 조선인들이 이 지진 상황을 이용하여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든가, 혹은 우물에 독약을 넣어 일본인들을 몰살 시키려하는 온갖 유언비어를 퍼뜨려 일본인들에게 조선인을 증오하게 만들었다.경찰과 헌병은 계엄령 하에서 조선인들을 잡아들이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고, 일본 민간인들도 각지에서 자경단을 만들어 분별없이 조선인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니 그 상황은 그야말로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끔찍하였다. 이들은 조선인을 구별하기 위해 낯선 자에게 일본말을 시켜 서툴다고 느껴지면 그대로 체포하거나 사살하였다. 지진의 소용돌이가 어느 정도 수습된 후 일본 경찰의 방해를 받으면서 실시한 조선인 피해 조사만으로도 당시 약 6661명의 조선인이 사망하였다고 보고되고 있다. 또한 학살에 동원되었던 쇠갈고리, 죽창, 도끼, 日本刀, 권총, 톱 등의 무기만 보아도 일본인들의 무자비성을 엿볼 수 있다.우리는 일본을 이렇게 불러왔다. '가깝고도 먼 나라'. 하지만 우리의 과거사, 일본의 조선지배사, 조선인이 일본에서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등의 지난 이야기를 인지하고, 이해한다면 우리에게 일본은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닌 단지 일개 야만국일 뿐이며, 당장 거리로 나가 머리를 깨고 온몸을 찢어버리고 싶은 쓰레기 같은 '부족'일뿐이다. 이러한 자료를 접하는 내내 화가 나고, 슬프고, 눈물이 났다. 왜 우리는 이렇게 당해왔는가, 이런 생각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고, 지금도 떠나지 않고 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의 머릿속은 무척 혼란스럽다. 무언가 글을 진행하고 싶지만 진행이 되지 않는다. 우리가 조상들의 무차별적인 학살 앞에 무슨 자격으로 평가하고, 감상한 글을 남길 수 있겠는가. 서울시내 어느 곳에 가서 사람들을 붙들고 물어봐도 관동대지진이니, 조선인 대학살이니 하는 단어를 아는 사람은 극소수이며 역사의 기본적인 개념을 확립해야 할 중·고등학교에서는 이제 국사라는 과목을 선택으로 한다는 어처구니없는 결정까지 나왔다. 대체 어느 나라에서 자국의 역사를 선택해서 가르치는지 모르겠다. 이놈의 나라,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이토록 부끄러운 적이 없었다. 지금의 내 심정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다리에 힘이 풀리고, 머리와 가슴은 점점 뜨거워지며 가끔씩 시야가 흐려진다. 내가 죽어도 세상은 바뀌지 않지만, 내가 살아있으므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말이 있다. 나 하나 흥분하고, 안타까워한다고 해서 당장 우리나라가 달라지고, 일본이 사과하는 것은 아니지만 세상을 바꿀 수 없기 때문에 침묵하고 체념하는 존재가 될 수는 없는 일이다. 이 글을 쓰기 전 한국 100년 사진박물관이라는 사이트를 둘러보았다. 사진을 보며 마우스를 체크하는 손을 제외하고 다른 곳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나름대로 역사에 대해 많이 안다고 생각하는 나에게도 당시의 상황과 사진은 충격을 넘어서는 쇼크였다.
    사회과학| 2003.05.16| 1페이지| 1,000원| 조회(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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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선지 평전 비평 평가B괜찮아요
    출중한 당의 장군, 고선지━━━━━━━━━━━━━━선지의 군사가 하서로 돌아왔을 무렵, 부몽영찰은 사람을 보내 위로하기는커녕 선지에게 욕을 퍼부으며 말하길. "개의 창자를 씹어 먹을 고구려 노예놈, 개똥을 핥아먹을 고구려 노예놈! 누가 너에게 우전사 자리를 얻게 상주해 주었느냐" 고 물었다. 이처럼 고선지 장군이 토번 연운보와 소발률을 정벌한 뒤 휘하의 군사들을 이끌고 하서로 개선했을 때 이같이 기적과 같은 전공을 세워 당 제국의 위세를 과시한 개선장군을 맞이하는 것은 질시와 멸시뿐이었다.고구려인의 후예 고선지고선지는 당나라로 강제 이주된 고구려인 부모사이에서 태어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는 고구려인의 강제거주지인 영주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한 고선지는 20여세의 나이로 안서에서 당의 유격장군이 된다. 하서에서 그의 아버지인 고사계가 장군으로서 큰 고을 세웠기 때문에 연상(延賞 : 아버지의 공적으로 자식이 벼슬을 받는 것)의 성격으로 유격장군이 되었다는 말이 있지만, 이는 고선지가 당시의 핍박받는 고구려인이라는 지위를 가졌다는 것을 생각할 때 다소 납득하기 어려운 일이고 고선지 자신이 무장으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았기에 고구려인이라는 약점을 극복하고 유격대장에 임명되었다고 하는 것이 바른 이해일 것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로서 불과 나이 20여세에 아들이 자신의 아버지와 관품이 같아졌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아무리 고사계가 큰 공을 세웠더라도 그 아들에게 아버지와 같은 관품을 내렸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인 것이다.고선지의 출중한 능력과 전과하지만 고선지는 한동안 공적을 인정받지 못했다. 고선지의 상관이던 개가운은 736년 정월 돌기시를 격파함에서 시작하여 739년 8월에는 당에 반란을 일으킨 돌기시 가한의 토화선과 흑의대식 가한의 이미를 사로잡는 전과를 올린다. 아마도 개가운이 많은 전공을 올렸던 것은 고선지의 혁혁한 공이었을 가능성이 커보인다. 후일 고선지의 상관이 된 부몽영찰이 고선지에게 많은 관직을 주었다고 생색을 낸 사실다시 말해 개가운 휘하에서 고선지가 많은 전과를 올렸는데도 개가운은 이를 자신의 공으로 돌렸고, 부몽영찰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부몽영찰은 후에 고선지를 시기하여 해코지하는 인물이 되지만 고선지의 관직생활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개원 말에 고선지가 안서부도호와 사진도지병마사가 되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는 고선지가 안서도호부의 명실상부한 이인자가 되어 실크로드를 지배했다는 뜻이다. 고구려인 출신으로 안서부도호가 된 것은 이례적인 것이다. 도호 벼슬을 한족이 독차지했던 관례에 비추어볼 때, 안서도호 휘하의 2개 안서부도호 자리도 매우 중요한 직책이라 할 수 있다.부도호의 경우에 간혹 소수민족 출신을 임명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고선지가 오른 안서부도호 자리는 당에서 고구려인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지위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파격적이고 예외적인 고선지의 승격은 그 자신의 출중한 자질과 더불어 당시 당의 번장 기용 정책에 따른 결과였다. 고선지의 역량이 얼마나 출중했는가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그가 사진도지병마사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도지병마사라는 벼슬은 안사의 난이 일어나기 전까지만 해도 도호부의 병권을 독점하던 막강한 자리였다. 이런 대단한 직책을, 그것도 소수민족 출신이 차지할 수 있었던 데는 그만큼 뛰어난 능력과 공적이 뒷받침되었던 것이다.747년, 고선지는 행영절도사로 임명이 되었고, 군사 1만명을 데리고 사라센과 토번국의 침입을 막으러 출전했다. 이 전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서 파미르 고원에 있는 적을 치는 매우 힘든 작전이었다. 최후를 맞을때까지 충직하고 유능한 부하였던 봉상청과 의논한 고선지는 우선 떠나기 전에 장병들에게 잔치를 벌여 위로한 후, 1만명의 군사를 3개부대로 나누어 출병시켰고 제 2,3부대는 각각 1주일의 간격을 두어 출병시켰다.마침내 호밀국을 지나 공격지점인 파륵강에 다다른 고선지 장군은 적의 군사 기지인 연운보를 사면에서 포위를 한 다음 강을 건너 공격했다. 곧 토 짓밟혔고, 대승을 거둔 고선지 군은 소발률국 정벌에 나섰다. 747년 고선지는 5천미터가 넘는 세계의 지붕 파미르 고원(우리는 나폴레옹이 알프스를 넘었다는 사실에 그를 위대한 장군이라 칭하지만, 고선지와 그의 군대가 넘었던 파미르 고원은 알프스와는 차원이 다른 곳이었다)을 넘어서 머나먼 원정길에 나섰다.고선지 군은 사막과 산맥을 넘어서 소발률국의 성들을 점령했고 이 1차원정으로 72개국의 서역의 나라들이 고선지 장군에게 항복했다. 당나라 현종은 고선지 장군에게 안서 도호의 벼슬을 내렸고 장군은 750년, 다시 제 2차 서역원정에 나서 타시겐트를 정복한 뒤 국왕을 포로로 잡아 당나라 수도로 돌아오게 되었다.고선지의 최후 : 그는 뛰어났으나 고구려인일 뿐이었다.이같이 뛰어난 능력을 지닌 고선지는 당을 위해 평생을 바쳤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에 반기를 든 안록산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그를 시기하는 무리들에 의해 최후를 맞게 되었다. 환관 변련성은 현종에게 고선지가 명령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적질을 자행하는 위인이라고 혹평했다. 변련성은 고선지 장군이 반란군의 빠른 공격에 대한 최대한의 방책으로 시행했던 태원창의 관물 파괴와 섬주를 포기하고 동관으로 후퇴했던 일들에 대해 "섬주의 수백 리 되는 땅을 버렸을 뿐만 아니라 국고물품마저 나누어주었다."는 보고로서 고선지 장군을 모함하였다. 이처럼 음흉하고 노회한 변련성의 보고를 들은 현종은 격노했다. 고선지로서는 안타깝고 억울한 일이었지만 이미 양귀비와 사랑에 빠져 정사에 대한 흥미를 완전히 잃고 몇몇 환관들의 주청을 그대로 승인하는 식으로 국사를 처리하던 현종과 일개 환관이 정치를 농단하는 왕조, 그 불온하고 허약한 권력 시스템 안에서 고선지 장군을 참형하기 위한 시나리오는 만들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고선지의 죽음에는 그를 시기하는 세력들의 힘이 절대적이었지만 그가 고구려인이라는 사실도 하나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당시 당 제국은 안록산의 난으로 말미암아 민심이 흉흉했는데 이 안록산은 이민족 출확립했던 명장이었다는 점에서 고선지와 아주 흡사했다. 그렇다면 왜 고선지 장군이 그토록 충성을 바쳐온 당에 의해서 죽음을 당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의문이 어느정도 풀릴 듯도 싶다.당은 안록산과 여러점에서 닮은 고선지라는 존재가 두려웠던 것이다. 이민족 출신인데다, 안록산 못지 않게 용감할 뿐만 아니라, 전술과 전략에 능통했기 때문에,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당에 위협적인 존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항상 고구려 출신이라는 이유로 고선지를 박대했던 한족 고관들이 어쩜 이 기회에 큰 후환거리를 없애버리자는 생각을 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현종 역시 풍부한 전쟁경험과 뛰어난 지도력을 겸비한 고선지를 토적부원수로 임명하기는 했지만, 언제든 때를 보아 불용 처분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고선지가 그만큼 비중있는 인물이었다는 얘기인데, 변령성도 황명의 집행관 자격으로 고선지를 죽이려고 할때 몹시 두려워 했다 한다. 고선지를 죽이라는 현종의 명령서를 품에 담고 있었을 때는, 변령성이 칼잡이를 무려 백 명이나 끌고 다녔다고 되어있다. 이것은 고선지에 대한 변령성의 두려움이 얼마나 컸는가를 보여주는 단적인 증거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당 조정이 내심 우려했던 것처럼 고선지 장군이 변란을 획책했다는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만약 그가 모반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면 자신의 휘하 사졸들과 함께 변령성과 그를 따르는 망나니 칼잡이 백 여명 정도를 제거하고 당에 반기를 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고선지는 변령성이 이끌고 온 망나니에 의해 최후를 맞이하게 되었다. 죽음이 임박한 상황에서도 고선지는 신하로서의 예의를 갖추었다. 고선지는 토적부원수였기 때문에 휘하에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가 조금이라도 황제의 명을 거부할 생각이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명령서를 가져온 변령성 앞으로 달려나가 신하의 예를 갖추었다. 결국 고선지 장군은 모함하는 세력들이 자신을 죽이려고 할때, 의연하고 당당한 모습으로 일생을 마쳤다. 12월 병오였다.유럽문명의 아버지 고선지고선지 라는 고구려인이며 당나라에서 활동했던 장군을 가리켜 굳이 유럽문명의 아버지라 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종이의 전파에 끼친 영향 때문이다.탈라스 전투는 고선지 장군이 석국 정벌을 완수하고 장안에 입조해 현종으로부터 개부의동삼사를 제수받고 난 후, 반 년 정도 지난 뒤에 전개되었던 사건이다. 이 전쟁은 당과 아랍 연합 세력 간에 벌여졌던 최초의 전쟁이었던 게 틀림없다.서기 751년, 동진하던 이슬람 군대와 고선지 군대는 중앙아시아와 실크로드의 패권을 두고 오늘날 카자흐스탄 공화국 탈라스 평원에서 맞붙었다. 세계 전쟁사에 기록된 중앙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한 대전투로 기록된 탈라스 전투!5일간의 전투, 그러나 고선지는 케르룩의 반란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오늘날 중앙아시아와 타림분지 서쪽이 이슬람화되었던 것은 이때 고선지 군대의 패배로 인한 것이다. 고선지 이후 지금까지 중국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한 번도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의 여파는 예상치 않은 곳에서 크게 일어나게 된다. 이때 중국 제지술이 최초로 서방으로 전해졌던 것이다. 고선지의 부하 중 종이 만드는 기술자가 이슬람 군사에게 잡혔고, 실크로드의 도시 사마르칸트에 이 포로들이 전수한 기술을 바탕으로 제지공장이 세워졌다. 압바스 왕조의 중심지, 사마르칸트에서 바그다드로 제지술은 또 다시 전파되고 연속하여 이슬람의 제지술은 유럽으로 전파되는 계기가 되었다.결국, 프랑스와 영국까지 제지술이 전파된 것은 대략 1300년경이다. 제지술 전파는 종이의 대량 생산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지식이 대중적으로 보급되어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된다. 유럽이 중세 암흑기를 벗어나 문예부흥기로 접어든 르네상스가 바로 1300년대 후반이라고 세계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렇듯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장군의 패배는 이슬람과 서양의 학문이 부흥되고 오늘날의 종이 문명이 있게 한 문명사의 대전환이었다. 세계 문명사를 뒤흔든 종이 전파의 시작이 바로 고선
    사회과학| 2003.01.14| 4페이지| 1,000원| 조회(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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