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자의 전성시대를 통해 본 70,80 년대의 성의식1. 줄거리< 월남에서 3년간 군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목욕탕 때밀이 노릇을 하고 있는 창수는 경찰서 보호실에서 우연히 영자를 만난다. 3년전 철공소 직공이었던 창수는 심부름으로 갔던 사장집에서 영자를 처음 보고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는 약속만을 남기고 월남으로 떠났다. 그동안 영자는 사장집 아들에게 욕을 당하고 쫓겨나 춘자 언니에게서 봉제를 배운다. 여직공의 봉급은 너무도 적어서 어쩔 수 없이 그녀는 빠걸이 되나, 이것 역시 적응이 잘 안된다. 이번에는 버스걸이 되어보나, 불행하게도 만원 버스에서의 사고로 팔을 하나 잃게 된다. 절망한 영자는 자살을 기도해보나 실패하고 살아나 이번에는 마지막 코스라고 할 수 있는 창녀가 된다. >영자는 식모살이를 하다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이고, 또 만원버스에서 떨어져 한 팔을 잃은 산업재해자였다. 절단된 영자의 몸은 1970년대 경제 성장을 부각시키기 위해 감추어야 할 그늘이었다. 그러나 영자는 국가권력과 자본의 폭력성으로 인해 그저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몸을 파는 것도 감사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런데 인내와 희생의 미덕은 이 영화의 각색을 맡았던 김승옥의 영자는 우리들의 애인이며 동생이며 누나이기도 하다. 영자는 그러면서도 우리들이 버린 연인이기도 하다. 라는 언급에서도 나타난다. 월남전에 참전한 창수나 영자는 최하층민으로, 부의 축적을 도모하지만 성공적으로 자본주의에 편입하지 못한 인물이다. 빈부 격차가 심해진 70년대에 창수와 영자 같은 인물의 설정은 대다수 민중들의 삶과 정신을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은 낮은 수준의 평준화를 따르며, 비록 스스로가 월남전 참전군인이나 창녀는 아닐지라도 경제의 급성장이라는 강렬한 햇빛을 쬐지 못한 채 어둠에 갇혀 있었다는 점을 감안할 때, 피지배계층들이 창수와 영자에게서 느끼는 동일시는 충분히 가능한 것이다. 따라서 이 두 인물이 연대감 혹은 사랑을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하겠다.『영자의 전성시대』는 시대의 변모에서 성장으로 닫지 못하고 추락하는 주변화 된 인물을 역설적인 제목과 함께 제시한다. 시골에서 상경한 영자는 돈을 벌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와중, 정신적 육체적으로 타락해 간다. 영자는 급변하는 성장의 그늘 속에서 외곽으로 밀려 침잠하는 나약한 인간의 육체, 즉 순진하고 꿈 많던 시골처녀에서 나락으로 치닫는 창녀로의 변모를 통해, 이미 예정된 운명처럼 곪아터진 계급의 추락을 좇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시대가 안고 있는 급격한 근대화와 도시화의 결과가 초래하는 역기능을 멜로 드라마라는 안전한 관습 안에서 소화시킨다.2 1970년대의 사회적 여건한국인은 1970년대를 두 가지의 상반된 모습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나는 5.16군사 쿠데타로 권력을 쥔 군부독재의 철권정치이며, 또 하나는 눈부신 경제성장률과 수출의 증가이다. 대중소설 연구자들은 이 두 가지 모습 중에서 두 번째 것을 적극적으로 부각시킨다. 국민소득의 증가로 기본적인 생활난에서 벗어나 지출의 여유가 생긴 국민들은 대중소설을 향유할 수 있는 구매력을 갖게 되었고, 구매인력의 증가로 인해 대중소설을 상업적으로 성공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70년대 한국은 철저한 통제 사회였고 군사문화가 지배하는 조직사회였다. 국가권력 혹은 지배 이데올로기에 부합하지 않는 것들은 모두 지하로 숨어야만 했다. 모든 것은 국가권력 앞에 노출되어 있어야 했으며, 숨겨진 것은 불온한 것으로 더욱 탄압을 받아야 했다. 70년대 지배권력은 당대 최고의 지배 이데올로기 중 하나였던 급속한 경제발전을 부각시키고, 그로 인해 피해를 받았던 것들은 숨겨야만 했다. 『영자의 전성시대』는 70년대 지배 이데올로기의 명암을 선명하게 보여준다.1) 정치적 상황당시 한국은 뒤떨어진 농어촌의 생활 환경 개선 산업인 새마을 운동이 대대로 추진되었다. 경제 개발의 이면에서 희생하던 농민 노동자에 대한 정부의 배려로 선전하면서 수행한 것이 새마을 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의 위기 상황에서 박정희 정부가 정세 변화를 수용한 정책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남북 대화 뒷받침, 국제 정세 변화 대처를 명분으로 1972년 10월 17일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정을 중단시켰다. 국회는 해산되었고, 정치 활동이 금지되었다.비민주적, 권위주의적인 유신 체제는 학원, 언론, 종교, 정치를 비롯한 각 분야에서 민주 헌정의 회복과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민주 세력의 시위에 대한 박정희 정권의 전가의 보도는 긴급 조치권이었다. 1973년 가을 이후 대학생들이 시위가 거세어지자 유신 정권은 1호 (1974.1)를 시작으로 9호(1975.5)에 이르는 긴급 조치를 잇달아 발표하면서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 세력을 철저히 탄압했다.반유신 운동과 유신 정권의 긴급 조치가 충돌하면서 이른바 민청학련(전국 민주 청년 학생 연맹) 사건이 일어나 관련가들에게 사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민청학련 소속의 180여 학생들이 폭력에 의한 정부 전복, 민중 봉기를 획책했다는 혐의를 씌운 이 사건은 유신 반대 운동에 대한 정부의 강경 대응을 상징이었다.정부의 강경 대응에도 불구하고 반유신 민주화 운동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범민주 진영의 연대 기구인 민주 회복 국민 회의가 결성되었으며, 언론계의 언론 자유 실천 운동, 종교계의 천주교 정의 구현 사제단 결성, 문인들에 의한 자유 실천 문인 협의회 결성 등 각계의 반유신 운동은 더욱 거세어져 갔다. 또, 1976년에는 윤보선, 김대중, 문익환 등 재야 인사들을 중심으로 3.1 민주 구국 선언이 발표되었다.1978년 12월에 결정된 OPEC의 원유가 인상, 원유 감산 결정은 1979년에 이르러 제2차 원유 파동으로 나타나 한국 경제는 심각한 불황에 빠져들었다. 성장기 동안 억눌렸던 노동 운동이 자주 일어났지만 정부에서는 예전의 탄압 정책을 고수했다. 그 해 8월 신민당사에서 농서하는 YH 무역의 여공들의 경찰이 강제 해산시키는 과정에서 여공이 옥상에서 추락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것은 노동 운동, 재야와 학생의 유신 반대 운동 그리고 야당의 도전 등을 결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1986년에 이르러 야당 정치인과 재야 인사들은 1천만 명 개헌 서명 운동에 돌입했다. 여러 갈래의 민주화 운동이 대통령 직선제 개헌 추진으로 모아진 것이다. 개헌 운동이 확산되자 국회는 국회는 헌법 개정 특별 위원회를 발족시켰지만 여당의 의원 내각제 개헌안과 야당의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 고수로 진전없이 시간만 보내게 되었다.2) 경제적 상황이 당시 농촌인구의 도시편입은 1950년대부터 서서히 진행되다가 196070년대에 급속도로 이루어졌다. 1960년에 28%에 불과했던 도시인구의 비율은 1970년 41%, 1980년 57%, 1985년 65%로 늘어났다. 특히 2030세를 전후한 젊은이들이 대거 농촌에서 도시로 이주했고, 도시로 이주한 여성은 대부분 1024세의 나이였다.1962년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시된 이래 한국 경제는 급속도로 성장했다. 그러나 1960년대 경제나 도시상황은 농촌 노동력의 유입을 필요로 하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가난한 농민과 그 자녀들은 과잉 노동력 상태의 농촌을 떠나 도시로 이주했다. 도시의 흡인력 때문이 아니라 농촌으로부터의 무제한 방출에 의해 만들어진 잉여 노동력은 국가와 자본가들에게 저임금 장시간 노동 의 형태로 언제라도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는 예비 노동력을 제공해 주었다. 이러한 현실에서 도시로 이주한 사람들은 쉽게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 그러니 배운 것도 없이 무작정 서울로 올라온 영자가 일자리를 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결국 영자는 여성이 가장 쉽게 구할 수 있는 직업인 식모가 되었다. 하지만 영자에게 식모살이는 "식모를 뭐 제집 요강단지로 아는지 이 놈도 올라타고 저 놈도 올라탄다"라는 지적대로 지긋지긋한 것이 현실이었다. 영자는 식모살이를 그만두고 버스안내양이 되지만 만원버스에서 떨어져 때마침 달려가던 삼륜차 앞바퀴에 치여 외팔이 불구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에는 몸을 팔아 살아가는 창녀 가 되었다.당시 서울로 상경한 젊은 여성들은 임금과 노동환경이 비교적 괜찮다고 알려진 반도 상사, 동일 방직, YH무역, 원풍모방 등 규모가 큰 섬유업체에 취업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이런 공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는 보통 2~4년 동안 식모로 일하거나 소규모 영세업체에서 일하며 기회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보니 원하던 공장에 취업하기를 기다리다 열악한 노동환경을 견디지 못한 많은 여성들이 당시 급속도로 퍼지고 있던 서비스업, 성산업에 유입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이러한 상황은 국가와 여성계 지도자들에게 여직공을 공적인 보호와 규제의 대상으로 간주하도록 만들었다.
정치 지리학1마한의 해양 세력론마한은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한은 한 국가가 해양국가 되기 위해서는 여섯가지 요건을 갖추어야 한다고 하였다.첫째는 지리적으로 바다로 둘러싸인 국가가 유리하다고 보았다. 두 번째는 자연조건으로 해안선이다. 이 해안선은 국경선같은 것으로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 물깊이가 깊어 항구로 이용할 수 있는 해안선이어야 한다. 셋째는 영토의 크기이다. 단순히 넓이의 크기가 아니라 해안선의 길이, 항구의 성격, 전투를 할 수 있는 인구수이다. 넷째는 인구수인데 그 뿐 아니라 바다를 직업으로 한느 사람이나 해군용 물자 생산에 종사하는 사람의 수이다. 영국 사람은 해양 지향적인 반면에 프랑스는 농업지향적이다. 다섯째가 국민성이다. 영국사람과 네덜란드사람은 장사꾼으로서 대외무역으로 새로운 땅에 자연스럽게 정착하지만, 스페인사람과 포르투갈사람은 새로운 땅을 개발하기보다는 그곳을 착취하기에 관심이 있었다. 여섯째가 정부의 성격이다. 정부는 바다로 나가는 것을 지원하는 정책을 지속적으로 가져야 한다. 전체주의적 정부권력은 일관성을 가지고 있으므로 자유주의적인 정부권력보다 정책결정이 빠르기 때문에 돌발사태에 빨리 대응한다.미국은 앞으로 태평양에서 상대할 대상은 러시아 중국 일본이고 러시아는 대륙세력으로 지리적인 장점을 이용하여 태평양에 진출하면 이 지역에서 백인들, 특히 앵글로 색슨의 우월성이 도전받게 되고, 유럽해양세력들의 무역통로도 위협받게 되므로 미국을 포함한 유럽국가들은 러시아에 대하여 세력균형을 유지해야만 한다고 주장하였다.1898년 1월12일에 쿠바의 하바나 항구에 친성방문하여 머물고 있던 미국 군함 메인호가 이유불명으로 폭발사고가 발생하였다. 이 사고로 미국인 260명이 사망하였다. 이 사건을 통해 미국은 스페인과 전쟁을 했고, 그 결과 스페인은 쿠바의 주권을 포기했고 필리핀과 괌 푸에르토리코를 미국에게 할양하였다.아시아, 특히 중국의 위협에 대비하여 하와이를 점령하라고 하였던 마한의 해외전진기지 전략은 미국으로 하여금 모든 전쟁을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치르게 하였다. 이것은 마한이 미국역사에 가르친 교훈이었다. 마한의 해군해외기지 전략은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항공모함과 잠수함전력과 공군해외기지 전략으로 활용되고 있다.마한의 해양세력론의 결과가 오늘날에도 우리나라에 대단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유럽문명을 받아들이지 않고 대륙세력인 러시아가 바다로 나오는 것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태평양에서 유럽해양세력들, 특히 미국과 영국의 협력이 필요하다는 생각과 어느정도 유럽 문명을 받아들인 섬나라인 일본을 유럽 해양 세력들의 동반자로 받아들이자는 마한의 태평양 구상은 1894년 청일전쟁과 1904년의 러일전쟁에서 구체화되었다. 다시말하면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과 러시아에 대항하여, 즉 아시아 대륙과 세력균형을 이루게 하고 미국은 태평양에서 유일한 해양세력으로 헤게모니를 가진다는 구상이다. 이러한 구상이 우리나라에 영향을 미친 것은 러일전쟁이 끝나는 1905년에 미국과 일본이 맺은 태프트-가츠라 비밀협약이다. 이 협약은 미국의 태프트 육군장관이 필리핀으로 가는 도중에 일본에 들러 가츠라 총리와 7월 27일에 맺은 것이다.일본은 이러한 구상의 결과로 1905년에 한국에게 을사보호조약을 강요하였고, 1910년에는 한국을 병합하였다. 오늘날에도 미국은 한반도 방위를 일본의 책임에 두려는 등, 미국의 한반도 정책은 태프트-가츠라 비밀협약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2맥킨더의 심장지역이론맥킨더의 심장지역이론은 지리학에서 처음으로 세계전체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세계 전체를 심장지역, 안쪽초생달지역, 바깥쪽 초생달지역으로 나누었으며, 인류역사를 이 유기체 안에서 일어나는 이 지역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봄으로써 지역의 역사를 세계역사의 틀로써 파악하려하였다. 그의 이론에 따르면 세계역사의 변화는 심장지역으로부터 오는 충격이 원인이며, 대륙세력인 심장지역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안쪽초생달지역으로 넓어지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대륙세력 헤게모니의 확대는 세계의 힘의 균형을 깨고 세계 대제국을 이루게 될 것이다. 따라서 대륙 세력인 심장지역의 헤게모니 독점을 막고,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안쪽 초생달지역이 바깥쪽 초생달지역의 지원을 받아서 힘의 균형을 이루려는 것이 세계역사의 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역사의 틀에서 기울어져가는 영국의 해양세력을 지키려 하였다는 관점에서 맥킨더의 심장지역이론은 제국주의와 백인 우월주의의 보호자 역할을 하였다.주축지역: 유라시아는 북으로는 얼음띠가 잇고 그 이외에는 호수나 강물이 띠를 이루는 끝없는 땅이다. 그 크기는 2,100만 평방마일로 북아메리카의 3배보다 크고, 중심부와 북부만 하더라도 900만 평방마일로 유럽의 2배가 넘지만, 강물을 따라 바다로 나가는 길은 없다. 그러나 북극권 주위의 밀림지대를 제외하고는 일반적으로 말이나 낙타를 타고 이동하기에 편리하다.안쪽 초생달지역:이러한 심장지역의 동쪽, 남쪽, 서쪽에서는 주변지역들이 있다. 이 지역들은 커다란 초생달 모양을 하고 있으며, 바다에서 배를 타고 접근할 수 있다. 이 지역들은 4개로 구성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세계 4대 종교인 불교, 브라만교, 모하메드교, 기독교의 범위와 일치한다는 것이다.고대문명시대에는 안쪽초생달지역에 가장 약한 곳이 몇 군데 있었다. 좁은 육지로 연결된 수에즈는 해양세력을 동쪽 해양세력과 세쪽 해양세력으로 나누었으며,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스아 만까지 뻗어나간 건조한 페르시아 사막은 항상 유목세력이 해안지역에 큰 피해를 줄 기회를 만들어주었고, 그 결과로 인도와 중국을 지중해 세계와 갈라놓게 되었다. 바빌로니아, 시리아와 이집트의 오아시스를 거점으로 하는 세력들이 약해지면 초원지대의 민족들은 이란과 소아시아의 탁 트인 고원지대를 공격하여 이를 전진기지로 삼아서 펀자브 지방을 통해서는 인도로, 시리아를 통해서는 이집트로, 보스포러스-디다넬레스 해협을 통해서는 헝가리로 침입하였다.바깥쪽초생달지역: 바다에서의 기동력은 대륙의 심장부에 있는 말과 낙타의 기동력과 자연적인 경쟁관계에 있었다. 바다로 흘러들어가는 강을 따라 항해하던 하천문명단계에서는 중국문명은 양자강, 인도 문명은 갠지스강, 바빌로니아 문명은 유프라테스강, 이집트 문명은 나일강에 의해서 이루어졌으며, 지중해에 배를 타고 다니던 바다문명단계에서는 그리스와 로마 사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주축지역의 주위에 있는 안쪽초생달지역에는 독일, 오스트리아, 터키, 인도, 중국이 있으며, 바깥쪽초생달지역에는 영국, 남아프리카, 오스트레일리아, 미국, 캐나다, 일본이 있다. 현재로서는 주축국가인 러시아가 주변에 있는 국가들과 세력균형을 이룰 만한 조건이 못되지만, 프랑스가 균형추의 역할의 할 수도 있다. 미국은 근래에 와서 동부세력이 되었는데, 이것은 유럽과 직접적으로 세력균형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러시아와 균형을 맞추다 보니 유럽의 세력균형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세력균형을 이끄는 특별한 힘의 결합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다. 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결합은 주축국가의 주위를 돌아가면서 생겨나므로 주축국가는 항상 커지는 경향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주축국가의 기동력은 주위에 있는 주변지역이나 섬나라의 기동력과 비교하면 제한적이라고 생각된다. 정치세력의 실질적인 균형은 항상 지리적 조건, 즉 경제과 전략 두가지의 결과이며, 다른 한편으로는 서로 대립관계에 있는 국민의 상대적으로 많은 인구수, 용맹성, 장비와 조직의 결과이기도 하다.
1.서론정치의 시대라고도 하는 오늘날에는 권력현상이 많은 사람들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데, 권력의 정의를 내리는 문제에 있어서는 지배와 복종, 통제·정치·권위 등과 엇갈리고 뒤섞이어, 사람마다 갖가지 개념이 사용되며,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 어려워졌다. 사회가 유동화하고 복잡해지면 권력은 다양한 개인·집단으로 분산된다. 또 권력은 상대와 때와 장소에 따라 같은 힘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며, 상대가 가지는 가치의 기준과 서로 관계를 가진다. 그러므로 권력은 어느 개인 또는 집단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둘 또는 그 이상의 개인 또는 집단 사이의 관계 자체 속에 성립한다고 하겠다.한국 사회는 역사적으로 보면 일제 식민지의 경험, 국가가 주도했던 발전전략, 지역차별로 인한 사회적 분열, 분단체제하 반공규율사회 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회는 이러한 역사적 특수성에서 출발하고 있다.지금까지 한국사회에서의 개인은 자신의 주장을 주장하고 표현하기보다는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국가에서나 집단에서 일을 추진할 때 잠잠코 일을 하는 것이 당연시되어 왔다. 이렇게 한국 사회의 시민들이 잠잠코 있음으로 해서 더 큰 발언권을 얻게 된 것은 국가권력이었다. 국가 권력 특히, 정치 권력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독점 자본주의의 발달로 경제권력이 성장, 발전하게 되었다. 이 권력은 정치권력과 유착하여 자신의 권력을 더 확장하고 유지하려고 한다. 하지만 한국사회에서도 서구와는 다른 형식으로 시민사회가 형성되고 있었다. 앞에서 말한 역사적 특수성이 이 시민사회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1987년 이후 시민사회는 두드러진 변화를 보여준다. 이것은 억압적인 군부독재에 대항하는 민주화 운동을 통해 나타나게 되었다.한국사회에서 권력은 아직까지는 편중되어 있다고 본다. 하지만 점점 더 다원화된 집단이 자기 목소리를 나타내려고 하고 있다. 시민사회가 성장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사회가 걸어온 길을 볼 때, 대외적으로는 지리적 위치로 인해 외세에 너무 많이 휘돌렸고,대내적으로는 너무 많은 혼란이 존재했다. 그러는 가운데 국가권력은 국가를 안정화시킨다는 명목으로 권력을 한 곳으로 집중시켰고, 시민들은 뒷전이 되었다. 경제적인 면에서 점차 숨통이 트이자 점차 시민사회는 부각되기 시작하고 있다.이제 한국사회의 권력이 어디 곳에 분산, 편중되어 있는가를 두 이론, 엘리트이론과 다원주의이론을 통해 고찰해볼 것이다.2.이론적 고찰(1)엘리트 이론어느 사회든지 간에 일부 개인이 다른 개인보다 더 나은 지위가 있다. 많은 집단들이 사회와 정치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는 하지만 일부 집단이 다른 집단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진다. 엘리트 모델은 사회내에서 권력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소수의 사람또는 소규묘 집단의 수중에 집중되어 있다는 가정에 기초하고 있다. 사회의 성격과는 무관하게 엘리트들은 다양한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군사적 및 여타의 제도적 구조에서 지도적인 지위를 차지한다. 엘리트이론에 따르면, 정치 엘리트는 바뀌더라도 엘리트에 의한 지배는 계속된다. 엘리트는 일단 권력을 잡으면 그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엘리트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때때로 자신이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한다.(2)다원주의 이론다원주의자들의 견해로는, 상층적인 이익집단이 정치적 영역에서 서로 경쟁하거나 협상하는 과정 속에서 권력은 다소 민주주의적으로 운영된다. 그리고 공공정책이라는 것은, 경쟁하는 집단들이 내린 타협과 협상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며, 대중은 선거와 조직적인 참여를 통하여 엘리트에 대해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본다. 다원주의자들은 공동체적 의사결정과정과 권력구조를 지향하며, 한정된 영향력과 범위를 가지는 결정과 조직을 분석 대상으로 삼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다원주의는 대중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권력엘리트가 사회의 상층에서 권력을 독점적 ·지배적으로 행사한다고 보는 엘리트론(elitism)과 대립된다. 엘리트론에 의하면 권력은 사회경제적 체제 속에 있는 지위와 역할에서 나오는데, 권력이란 구조지워지는 것이며, 권력관계는 오래 유지되는 경향이 있다. 또한 엘리트와 대중 사이에는 비교적 뚜렷한 구분이 있으며, 선거나 어떤 다른 형식의 정치활동을 통해서도 엘리트는 대중의 영향을 거의 혹은 전혀 받지 않는다. 권력의 핵심 내부에는 상당한 정도의 이익 일치와 대부분의 중요한 문제에 대한 본질적인 동의가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3.한국 사회의 각 영역간 권력(1)정치 영역근대국가 발전의 가장 중요한 측면 가운데 하나는 민주정치와의 관계에서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적인 전제는 군주나 귀족과 같이 개인 또는 소수의 집단이 합법적 강제력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러나 강제력이 국가를 구성하는 모든 국민으로부터 나오게 된다는 의미에서 국민이 통치하는 정치체제이다.이러한 민주주의는 민주주의를 제도적으로 정착시켜야 제대로 유지될 수 있다. 정치적, 사회적 권리들이 제도화되지 않는다면 국민의 자율성은 언제든지 침해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사회의 경우에는 아직까지 시민들이 정당이나 정치 단체에 관여하는 것과 같은 전통적인 방법으로 참여할 수 있는 절차와 통로가 충분히 개방되지 않았다. 또한 주거지나 직장과 작업공간 등의 단위에서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기회는 더욱 제한되어 있다.한국사회에서도 국민 대다수가 정치적 권리를 가지고 있지만 모든 국민이 정치 참여할 수 는 없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 많은 국민들이 가진 다양한 사안을 공동체 결정으로 참여하여 결정하기란 불가능하다. 세계에 있는 많은 나라처럼 한국사회에서도 정치영역에서 대의제를 실시하고 있다. 대의제는 정의하자면 국민들의 의사를 대표하는 개인이나 집단에게 정치를 맡기는 것이다.하지만 사회적인 분화가 확대되어 가는 가운데서 모든 영역에서 의사결정이 국민을 대표하는 사람들에 의해 결정될 수는 없다. 국민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기회는 대통령을 선출할 때나 국회의원, 지방 자치단체장, 지방의회 의원 선출할 할 때나 행사할 수 있다. 뽑힌 사람들은 자신이 맡은 분야에서 전체적인 정책의 결정을 책임지고 조정하는 역할을 할 뿐, 실제적인 정책의 결정과 수행은 고위 관료들에 의해서 행해진다.(2)경제 영역오늘날 한국 사회는 세계화의 추세 가운데 민족 국가의 경계를 초월한 다국적 기업들의 활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는 있지만, 세계가 하나의 시장이 되어가면서 국민국가를 단위로 하는 국제간 상호 무역 경쟁의 심화로 인해 행정부의 활동은 자본가 계급과 긴밀한 협조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3)매스 미디어산업사회에서 매스미디어는 중요한 사회제도로 기능해왔다. 한국사회에서도 마찬가지 작용을 해왔다. 특히, 매스 미디어는 과거 군부통치시대부터 국민들을 통제하기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 칼 J프리드리히도 매스미디어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매스커뮤티케인션은 독재를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미디어는 국가적, 국제적 그리고 지방의 문제를 보도함으로써 우리의 사회세계를 창출, 재창출하였다. 매스 미디어의 두 가지 주요 형태로는 인쇄매체와 전자매체를 들 수 있다. 인쇄매체로는 책, 신문, 잡지 등이 있다. 전자매체에는 텔레비젼, 라디오, 영화, 음반, 컴퓨터미디어가 포함된다.정부와 미디어는 공생관계에 있다. 정치뉴스의 주원천을 정부가 제공하기 때문에 미디어는 정부엘리트에 의존한다. 미디어엘리트들도 나름대로 정보와 뉴스의 출입을 통제함으로써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이들은 사회 정치적 경제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2. 세계체계론이 한국의 발전과정에서 주는 함의는 무엇인가? 한국의 발전과정을 세계체계론의 관점에서 어떻게 분석할 수 있는가?한국은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과거 경제적으로 매우 낙후된 나라였다. 하지만 한국은 한국 전쟁이후, 여러 요인의 작용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냈다. 1970년대 중반에 세계체계론을 주창한 월러스타인은 이 이론을 통하여 세계를 하나의 사회체제로 파악하여 중심부와 주변부의 비대칭적 관계를 설명하려 하였다. 그는 특히 단위국가 대신 세계체제를 분석 대상으로 삼아야 하며, 중심부와 주변부 사이의 비대칭적인 상호관계의 분석이 단위국가 내부의 분석보다 선행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자본주의 세계경제는 16세기 유럽에서 기원하여 19세기 이후 지배적인 세계체제로 확산되었는데, 이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단일한 분업 하에서의 상이한 필수품의 생산에 입각한 불평등한 교역관계로 서로 연관되어 있는 중심부, 반주변부, 주변부의 3가지 국가군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보았다. 이 3가지 국가군은, 국가기구의 강도와 노동통제의 방식이 서로 다르다. 강력한 국가기구를 가지고 자유임금·노동에 기초하여 제조품 생산에 주력하는 중심부는, 허약한 국가기구를 가지고 강제노동에 기초하여 농산물 경작에 주력하는 주변부에 대하여 국제교역과정에서의 잉여를 수탈하는 것으로 파악하였다. 반주변부는 중심부에 의해 수취당하며 동시에 주변부를 수취하는 제 3 의 구조적 위치를 점유하고 있는 나라들이다.그러므로 세계자본주의 체제는 기능 면에서 단일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입각하여, 불균등한 교환관계를 통하여 잉여가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이전되는 상호간의 영합게임으로 간주된다. 세계체제이론은 현재의 세계자본주의 체제 내에서도 주변부가 반주변부, 나아가서는 중심부로의 그 지위 승격이 가능한, 제 3 세계 국가의 국제 계층구조 내의 약간의 이동가능성을 시사해준다.{) 두산세계대백과 EnCyber이러한 세계체계이론에서 볼 때, 한국전쟁이 바로 끝난 뒤의 한국은 식민지 경험을 가지고 경제적으로 낙후된 나라이므로 다른 후진국이나 제 3 세계로 불리는 나라처럼 주변부의 국가로 분류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계체계이론에서 주변부라고 불리는 국가들의 조건을 한국은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우선 한국은 자원이 부족하다. 중심부로 수출할 천연 자원도 없으며, 충분한 농산물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은 주변부의 조건에 맞지 않는 특수한 상황으로 볼 수 있겠다.하지만 한국은 한국 전쟁이후, 여러 요인의 작용으로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냈다. 이러한 발전은 세계체계이론으로 보면 반주변부 국가로 진입할 수 있는 발판이었다. 정치보다는 특히 경제의 발전을 통해 한국은 주변부 국가라고 불리는 국가들과 얼마간의 거리 차를 보이며 중심부와 주변부에 위치하게 되었다. 그러면 어떤 과정을 거쳐 반주변부 국가가 되었는지 살펴보겠다.첫 번째로 한국이 주변부의 위치에서 반주변부의 위치로 이동을 할 수 있었던 요인을 대외적 요인으로 미국과 일본으로부터 도입한 원조와 외자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한국 경제는 한국 전쟁이 끝난 후 대부분의 산업시설이 파괴된 상황에서 미국의 원조에 크게 의존하여 유지되었다. 미국은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생산시설을 급속이 확충하였으나 전후의 경기 위축으로 생산과잉 상태에 빠졌다. 이러한 남아도는 물자들을 한국 등 제3세계 국가들에 원조 라는 명목으로 반출되어 미국 독점자본의 시장부족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용된 것이다.미국의 원조는 1948년 이후 1961년까지 대개 원면·밀·보리 등 농산물과 소비재를 중심으로하여 약 100억 달러에 달하는 물량이 도입되었다. 이들 물자는 한미합동경제위원회 의 감독하에 국내시장에 방출되었고, 그 판매대금은 대부분 주한미군과 한국군의 무기·군사장비 구입등 군사비로 지출되어 다시 미국 독점자본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이처럼 경제원조가 군사력 증강부문에 집중된 것은 이승만 정권의 반공이데올로기 유지·강화의도와 미국이 한국을 소련과 중국에 대한 반공전진기지로 이용하고자 한 의도가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신동근 한국사 중문출판사 1994 p298또한 일본에서의 원조도 있었다. 이것은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 계획 추진에 필요한 자금조달문제를 외자도입의 확대로 해결하기 위해 한일 회담을 통해 추진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도 달러 위기로 인해 자국의 세계경제 지배력이 동요하는 상황에서 일본을 이용하여 동아시아 일대를 자본주의체제로 묶어두기 위해 이를 지원했다. 1961년 10월부터 한일회담이 시작되었다. 이 회담에서 일본은 과거 식민통치를 반성하지 않았으며, 협정내용에서도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다만, 상호관계를 규정하는 기본조약, 교포의 지위에 대한 협정, 어업에 대한 협정, 한일 재산과 경제 체계에 관한 협정, 한일 문화재와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 등 크게 네 가지 협정으로 이루어졌다. 협정에서는 거의 일본의 요구가 거의 그대로 받아들여졌다. 기본조약에서는 일본의 과거 조선지배가 합리화되었고, 어업문제에서는 한국인 어민의 입장이 무시되었다. 또 청구권문제는 명칭 자체부터 한국민족에 대한 피해 배상의 성격이 아니었던 데다가, 회담 진행과정에서 경제원조 성격으로 바뀌어 8억 달러(무상원조 3억, 공공차관 2억, 상업 차관 3억)를 한국이 제공받았다. {) 신동근 한국사 중문출판사 1994 pp309~310한국 경제는 미국·일본 등 외국으로부터 들여온 차관에 의존하여 개발이 이루어지면서 매년 10% 내외의 높은 성장률을 기록하였고, 석유·비료·화학·전자 공업 등이 성장함에 따라 공업구조도 점차 변화하였다.두 번째 요인이 바로 대내적 요인으로 경제개발정책이다. 한국은 외국의 원조를 기반으로 경제를 일으켰다. 이승만 대통령에 이은, 박정희 대통령은 군사 쿠데타로 정권을 잡았다. 박대통령은 경제 개발 정책을 펴기 시작했다. 국가 주도의 경제 정책은 국민들을 새마을 시민들로 만들었다. 기업에는 국가에서 인정한 특혜들로 번창하게 되었다. 기업은 더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다.1970년 초부터 유신 정권은 제 3 차 경제개발계획의 실시와 함께 중화학공업화를 추진하였다. 1973년 5월 정부는 중화학공업 위원회 를 조직하고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제조업 총투자액의 63.9%인 2조 9천 8백억원을 중화학부문에 투자하기로 했다. 이같은 집중적인 투자계획과 함께 세제상의 특혜조치도 실행되었던 것이다. 그 결과 전체 제조업에서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1971년 37%이던 것이 1981년에는 51%로 늘어났다.
1.사회변동이론이 공산주의에서 후기공산주의 체제로의 전환에서 가지는 관련성과 한계성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논하라.(1)사회 진화론사회진화론은 사회에 있어서 통합과 분화가 동시에 진행하여 단순사회에서 복잡 사회로, 나아가서 이중 복합사회로 진화하는 일반 법칙이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사회를 생물유기체와 비교해서 생물유기체가 단순한 것에서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그 구조와 기능이 분화하는 한편, 부분이 상호의존적인 것이 되어 통합이 진행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회에 있어서도 저급의 것이 고급의 것으로, 단순한 것이 복잡한 것으로 진화하는 과정에서 비슷한 분화와 통합이 생긴다고 사회 진화론에서 주장하고 있다.특히, 스펜서의 사회진화론은 생물진화론의 적자생존, 자연도태의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여 사회 유기체가 진화하는 원동력을 사회도태에서 구하였다. 그리고 여기에서 작자 생존을 자유 경쟁, 경제적 자유 방임의 뜻으로 바꾸어 자본의 자유로운 이윤추구를 정당화한 이론이 생겨나게 되었다. 사회 진화론은 사회 유기체설의 입장에서 사회의 조화적, 점진적 발전을 주장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존속을 정당화하며, 혁명운동을 사회유기체의 존속에 대한 파괴활동으로 보았다.{) Copyright 2000-2001 c EnCyber.COM All Rights Reserved.(2)소련이 공산주의에서 후기공산주의 체제로의 변환소련의 사회주의는 공산주의 사회 건설이라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공산당이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사회의 모든 부문에 대해 가능한 한 최대한의 통제를 하는 것을 특징으로 하고 있었다.{) 소련 공산당의 몰락 김부기,김유남 저 평민사 1992 p147공산당은 유일한 합법 정당으로서 국가 기관을 장악하고 사회활동을 통제하였음을 국유화와 중앙의 계획을 기반으로 국민경제를 관리했다. 최고회의와 지방의회는 공산당의 통제하에 공개 투표로 선출되었으며 노동계급 내부의 이해 대립은 있을 수 없다는 이념에 따라 반체제 운동 등 공산당의 입장과 다른 견해 및 활동은 허용되지 않았다. 공산당은 내부적으로 정치국의 통제하에 고도의 중앙 집권체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에 따라 소련 사회는 공산장 지도부를 정점으로 하는 거대한 관료 조직과 같았다.그러나 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 후 소련의 정치는 혁명적인 변화를 경험하게 되었다. 소위 개혁 공산주의라고 불릴 수 있는 후기 공산주의의 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는 처음 개혁을 경제 부문에 한정했으나 점차 정치 분야로 확대, 공개주의와 민주화의 기치하에 정치 쇄신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지도적 역화를 페지하고 자유 선거의 실시와 서방식 대통령제를 도임하게 되었다.(3)사회진화론이 소련 공산주의에서 탈공산주의 체제로의 전환에서 가지는 관련성사회진화론에 따르면 소련의 공사주의가 후기로 갔을 때, 자본주의 체제의 형태를 받아들인 것은 공산주의가 자본주의와의 경쟁에서 밀렸음을 인정하고 자연도태를 막기 위해 적자생존에서 살아남기 위해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소련에서는 1917년 2월 혁명을 거쳐, 레닌에 의해 사회주의적 변혁이 주장되었다. 그리고 레닌은 사회주의의 건설에 앞장섰다. 레닌은 소련에서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못했기 때문에 존재하게 되었던 농민들이 다수였기 때문에 이러한 조건에서 사회주의의 건설이 민주적 방식으로 이루어 질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고 레닌하에서 태생한 공산당 독재는 1920년대 말에 시작된 스탈린의 위로부터의 혁명에 의해 도입된 국유·계획 경제와 접합되어 전체주의라는 결과를 나타나게 되었다.스탈린에게는 미치지 못하지만 다음으로 흐루시초프가 개인의 독재 체제를 세웠다. 흐루시초프는 20차 소련 공산당 대회에서 스탈린의 범죄를 범죄별로 폭로를 하게 된다. 그러나 소련공산당의 지도원리와 구조에 대한 정당성을 그대로 인정하였다. 흐루시초프의 개혁정치는 자유화 정책으로 불렸으며, 체제의 구조적 변화없이 통제만을 완하한다는 뜻을 의미하였다. 흐루시초프의 개혁들은 이미 40년간 존재해온 정부 체제를 부활시키려는 노력을 반영한 것들이었다. 특히, 이러한 개혁은 노멘클라투라라는 특권계층의 자율성과 지위를 위협하였다. 이 관료들은 스탈린 이후에 당의 국가와 사회통제수단으로 등장하였고, 이것은 계속해서 흐루시초프 이후의 개혁 노력도 저지하는 요인으로 작용하였다.브레즈네프 정권은 흐루시초프의 각종 개혁에 대한 당 관료층들의 거부로 탄생하였다. 이 정권의 반동정치는 직업안정성과 합의제를 강조하는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이 특권 계층인, 노멘클라투라의 제도적 안정성이 유지 되게 만들었다. 특권 관료에 대한 신뢰와 안정에 대한 정권의 고수는 동시에 당과 국가 내부의 부패확산과 지방에 대한 중앙의 통제력4 약화에 기여했다. 당 관료층에 대한 거의 무제한적인 임기를 보장해줌으로써 이들 관료는 당과 전체이익보다 자신들의 개인적 이해관계 추구에만 몰두하게 되었다.고르바초프가 집권한 이후 소련의 정치는 혁명적인 변화를 겪게 되었다. 그는 처음 개혁을 경제 부문에 한정하였으나 점차 정치 분야로 확대, 공개주의와 민주화의 기치하에 정치 쇄신을 시도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공산당의 지도자 역할 을 폐지하고 자유선거의 실시와 서방식 대통령제를 도입하게 되었다. {) 안정수외 3인 소련·동구·중국·북한 문우사 1991 pp20~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