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인(西人); 조선 중기의 정파15세기 말 이후 중앙에 진출하여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탄압을 이겨내고 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훈구정치(勳舊政治)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후배 관인들인 동인(東人)에 대립한 선배 세대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었다. 명칭은 분파의 중심인물이었던 심의겸(沈義謙)의 집이 도성 안 서쪽에 있었던 데서 기인하였다.초기에는 학문적 구심이나 확고한 중심인물이 없었지만, 중립적 입장에 서서 양파의 대립을 조정하려던 이이(李珥)가 동인 일부의 극단적인 주장에 그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임을 자처하게 되자 그와 성혼(成渾)이 중심을 이루게 되었다. 선조대 중반까지 적극적인 체제 개혁을 내세운 동인의 공격을 받는 수세적인 입장에 있다가, 1588년(선조 21) 모반을 기도했다는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계기로 정철(鄭澈)이 중심이 되어 동인을 숙청하고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정철이 국왕의 후계를 세우자고 건의한 것이 선조의 뜻을 거스르게 되어 곧 실세하였다. 그 후 정치의 주도권을 남인과 북인에게 넘겨 준 상태에 있었으나, 광해군대 북인이 무리한 정책을 추진하면서 입지가 좁아지자 1623년에 무력을 동원하여 인조를 추대함으로써 권력을 장악하였다[인조반정].인조대에는 공신세력과 일반 사류들의 대립이 계속되어 통일된 정파적 입장을 가지고 정치를 운영하지는 못하였고, 효종 즉위 후에 공신세력을 축출함으로써 강력하게 정치를 주도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때에도 김육(金堉)과 김집(金集)의 대립 등 그 내부에 정치적 입장의 차이는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그 후 현종대 왕실 상례(喪禮)문제 등을 쟁점으로 남인과 크게 대립하였고[禮訟] 숙종대에 들어가서도 계속되는 공방전에 진퇴를 거듭하였으나 1694년의 남인 축출로 권력을 확고히 함으로써 조선 후기까지 중앙권력은 대개 이들의 후계세력이 장악하였다. 숙종 초기에 이미 그 내부에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파되었고, 영조와 정조의 탕평책(蕩平策) 밑에서 정치세력과 명분의 재편이 이루어졌으므로, 한 정파로서 어느 정도 통일된 입장을 유지한 것은 숙종대가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다.이황의 학문적 성과를 인정하고 이이와 성혼의 권위를 적극 내세웠으므로 그들을 성균관(成均館)의 공자 사당[文廟]에 모시려는 정책이 남인과의 대립에서 중요한 쟁점이 되었다. 그 학통은 김장생(金長生)·김집·송시열(宋時烈) 등에게 이어졌고, 17세기에는 성리학의 이념을 현실에 구현하려는 것을 목적으로 한 예론(禮論)의 정리를 과제로 하였다. 학문과 정치의 주제로 삼은 명(明)나라에 대한 사대나 왕실 상례 등이 공리공담(空理空談)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으나, 조선 후기에는 그것들 자체가 사회 주도이념으로서의 구체성을 지니고 있었다. 나아가 구성원들은 대동법(大同法)·호포제(戶布制)와 같은 구체적인 정책이나 농사 방법 등에 대해서도 자신들의 입장을 지니고 있었다.※동인(東人); 조선 중기의 정파16세기 중엽, 선조 즉위 후 중앙 정계를 장악한 사림파(士林派)들 가운데서 후배 관인들을 중심으로 성립되어 주로 선배들로 구성된 서인(西人)에 맞섰다.명칭은 후배 측 입장에서 분파의 계기를 이룬 김효원(金孝元)의 집이 동쪽에 있었던 데서 유래되었으며, 중심 구성원은 유성룡(柳成龍) ·이산해(李山海) ·이발(李潑) ·우성전(禹性傳) ·최영경(崔永慶) 등이었다. 대개 이황(李滉)과 조식(曺植)의 문인들로 구성되어 처음부터 학연적 성격이 짙었다.특히 심성(心性)을 강조하면서 훈척정치(勳戚政治)와의 투쟁과정에서 사상적 지주로 형성되어온 이황의 학문이 사상적 중심이 되었던 만큼, 구체제의 요소에 대한 비판의식이 강렬하고 훈구정치의 인물과 체제를 급격히 청산하려는 입장을 보였다. 그리하여 수뢰혐의에 대한 격렬한 비판 등의 방식으로 서인을 압박하였으나, 그러한 공세적 입장으로 인하여 오히려 시류를 따르는 무리들이 많이 가담함으로써 순수성이 훼손되는 부작용도 겪었다.1582년(선조 15) 이이(李珥)가 중재 노력을 포기하고 서인을 자처한 이후로 그들과의 사이에 굳어진 양당체제에서 명분과 실력 면으로 우위를 점하였다. 1589년 자파 인물인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이 일어남으로써 수세에 몰렸으나, 2년 후 서인 지도자 정철(鄭澈)이 세자 책봉을 건의했다가 선조에 의해 축출되자 세력을 회복하였다. 그러나 그 전부터의 내부적 입장 차이가 이때 서인에 대한 공세를 둘러싸고 격화되어, 정철에 대한 강력한 응징을 주장하는 이산해 ·정인홍(鄭仁弘) 중심의 북인(北人)과 온건론을 주장하는 우성전 ·유성룡 등의 남인(南人)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전자는 조식의 문인이고 후자는 이황의 문인이라는 학연적 성격을 가졌다. 남인과 북인으로의 분기 이후에는 단일 붕당으로서의 동질성(同質性)이 사라지고 모두 동인이라는 명칭도 의미를 잃었다.※북인(北人); 조선 중기의 정파16세기 후반에 성립된 동인으로부터 남인과 함께 분파되었다. 1588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의 옥사를 이용하여 동인을 숙청하였다가 곧 실세한 서인에 대해, 정인홍(鄭仁弘)·이발(李潑) 등을 중심으로 한 적극적인 배격과 유성룡(柳成龍) 등의 공존의 입장이 대립하였고 이들이 각기 북인과 남인으로 분기하게 되었다. 학통 상으로는 동인이 이황(李滉)과 조식(曺植) 및 서경덕(徐敬德)의 제자들이 중심이 되어 있던 중 이황의 제자들이 주로 남인이 된 데 비해 북인은 조식 및 서경덕의 제자들을 중심으로 하였다.임진왜란 중에 주전론(主戰論)을 펼친 명분을 바탕으로 연소한 신진들의 지지를 모아 전란 후 정국을 주도하였지만, 전란 후유증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바탕으로 대북(大北) 대 소북(小北), 대북 내에서의 골북(骨北)·육북(肉北) 등으로 분파가 계속되었다. 여기에는 서인과 남인에 비해 복잡한 학통도 한 원인이 되었다. 몇 차례의 부침을 겪은 끝에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이이첨(李爾瞻)을 중심으로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고 임진왜란(壬辰倭亂)의 피해를 극복하는 데 많은 성과를 올렸다. 그러나 학통상의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정인홍이 시도한 이언적(李彦迪)과 이황 배격[晦退辨斥]이 실패로 돌아간 후, 선조의 적자(嫡子)이자 국왕의 동생인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살해하고 선조비(宣祖妃)인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축출하려는 정책을 펴면서 서인과 남인을 크게 배격하였다. 그것이 결국 자기 입지를 더욱 좁히는 결과로, 무력을 동원한 서인의 광해군 축출[仁祖反正]로 정계에서 숙청되었다. 그 후 남이공(南以恭)·정온(鄭蘊) 등이 인조대 정치에 참여하였으나 정파로서의 의미는 소멸되었고 일부 인물들은 남인과 행동을 함께하였다. 사상은, 정통 주자성리학과 거리를 둔, 조식을 스승으로 하였던 데 나타나듯이, 서인 및 남인과 어느 정도 다른 방향을 지향하고 있었으나, 명(明)이 후금(後金)과의 싸움에 군대를 동원하라고 요구하였을 때에는 광해군과는 달리 대개 출병에 찬성하는 등 사대 명분론 등에서는 다른 사림들과 입장을 함께하였다.※남인(南人); 조선 중 ·후기 동인(東人)으로부터 북인(北人)과 함께 분파된 정파.
①邯鄲之步 (한단지보) : 한단의 걸음걸이라는 뜻으로, 동어로는 邯鄲學步(한단학보)가 있다. 자신의 본분을 잊고 남의 흉내만을 내면 양쪽을 다 잃게 된다는 비유의 말.전국(戰國)시대, 조(趙)나라 한단 사람들은 걷는 모습이 특별히 멋있었다고 한다. 북방(北方) 연(燕)나라의 수릉(壽陵)이라는 곳의 한 청년은 한단 사람들의 걷는 모습을 배우기 위해 먼 길에도 불구하고 한단까지 갔다. 그는 매일 하루 종일 한단의 대로(大路)에서 그곳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는 그들의 걷는 모습을 보면서 따라 하였지만, 아무래도 닮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미 원래의 걷는 방법에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에 새로운 걸음걸이가 잘 배워지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억지로 원래의 걷는 방법을 버리고, 걸음마부터 다시 배우기로 하였다. 그는 한 걸음 한걸음 발을 뗄 때마다, 발을 어떻게 들고 또 어떻게 놓는지를 생각해야만 했다. 뿐만 아니라 다리의 조화와 걸음의 폭 등에 대해서도 주의해야만 했다. 이렇다보니 그는 자신의 팔다리를 마음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몹시 힘이 들었다. 몇 달 동안 내내 연습하였지만, 그는 한단 사람들의 걷는 법을 배울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원래 걷는 법마저도 잊어버리게 되었다. 이즈음, 그는 여비도 바닥 나버려 네 발로 기어서 연나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어디 이 같은 사람이 하나 둘인가. 본분을 잊고 마구 남의 흉내만 내다가 수릉의 청년처럼 기어가는 꼴이 되고 마는 일이 적지 않다. 남들이 주식투자로 돈을 좀 번다니까 그 동안 알뜰살뜰 모은 돈도 모자라서 여기저기 빌리고 융자까지 내어 흉내내가다 몽땅 다 털어먹은 이가 비일비재하다. 그뿐인가. 이웃아이가 무엇을 배워 잘한다 하면 제자식의 능력이나 취미는 고려치 않고 마구잡이로 그것을 배우게 해야 직성이 풀리는 부모가 대부분이다. 그러다가는 자식을 만능재주꾼으로 키우기는커녕 어느 것 하나도 취미 붙이지 못하고 정말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건달패로 만들고 말 것이다. 자신의 지켜야 할 본분을 잊고, 초왕(楚王)이 보낸 두 대부(大夫)가 찾아왔다. 그들은 장자에게 관직을 맡기고자 한다는 왕의 뜻을 전하였다. 장자는 낚싯대를 쥔 채 돌아보지도 않고 이렇게 말했다."제가 듣기에 초나라에는 신구(神龜: 신령스런 거북)가 있는데, 죽은 지 이미 3천 년이나 되었다더군요. 왕께서는 이 거북을 헝겊에 싸서 상자에 넣고 묘당(廟堂)의 위에 모셔 놓았다지만, 이 거북은 죽어서 뼈를 남긴 채 귀한 대접을 받기를 원했을까요, 아니면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까요?""그거야 차라리 살아서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기를 바랐을 것입니다.""그렇다면 어서 돌아가시오. 나도 진흙 속에서 꼬리를 끌며 다니고 싶으니까요."*장자는 이 비유를 통하여 자기의 본성 안에 안거(安居)하며 무용(無用)함으로 천수(天壽)를 다해야 한다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을 말하고 있다. 열어구편에는 장자를 초빙하기 위해 찾아온 임금의 사자에게, “당신들은 제사에 쓰는 소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풀과 콩을 먹이지만 태묘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에 그 소가 송아지가 되기를 바란들 무슨 소용이 있겠소.”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사기(史記)》에도 장자에 관한 기록이 있는데 이 두 이야기를 묶어 장자는 몇 해 부귀를 누린 후에 권력투쟁의 제물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벼슬하지 않은 평민의 몸으로 욕심 없이 살면서 삶을 누리기를 바라면서 거절했다고 전해진다.③井中之蛙 (정중지와) : 우물 안의 개구리라는 뜻으로, 견문이 좁아서 넓은 세상의 사정을 모르는 것을 빗대 어 이르는 말이다.바다에서 온 거북이에게 우물 안의 개구리가 말했다."나는 여기가 좋아. 밖으로 뛰어 오르면 우물의 가장자리에서 놀고 안으로 들어가면 벽돌 빠진 구멍에서 쉬지. 물속으로 들어가면 겨드랑이까지 물이 차서 턱을 편안하게 받쳐주고,바닥의 진흙을 발로 차면 발등까지 진흙 속에 파묻히지. 장구벌레, 게, 올챙이 모두 다 나처럼 하지는 못해! 우물의 물을 나 혼자 다 차지하고 내 멋대로 하는 즐거움이 대단하지. 너도 한 번 들어와 보는 게았지. 시간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비가 많이 오거나 적게 오거나 불어나지도 줄어들지도 않는 것이 바다에서의 큰 즐거움이야."이 말을 들은 우물 안의 개구리는 너무 놀라서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다가 빙글빙글 돌더니 아예 까무러쳤다.*쉽게 회자되는 이야기이지만, 사실 우리는 피부 깊이 실감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것은 우화 속에나 나오는 어리석은 개구리의 이야기일 뿐이지, 나는 그런 어리석은 개구리가 아니다”라고 자부하고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우물이라는 한정된 공간이 없을 뿐이지 우리 스스로는 우물 속에서 세계를 바라보며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④多岐亡羊 (다기망양) : 많은 갈림길에서 양을 잃는다는 뜻으로, 주위의 사물이나 현상에 휩쓸리다 보면 자기의 본분을 잊게 된다는 비유로 사용되고 있다.하인과 하녀가 양을 데리고 나갔다가 잃어버리고 돌아왔다. 주인이 먼저 하인에게 어떻게 된 것이냐고 물었다. 대답은 "한참 책을 읽다 보니 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讀書亡羊)".주인은 다음으로 하녀에게 물었더니 돌아온 답변 또한 크게 다를 것 없었다. "주사위 놀이를 하고 있다 보니 양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두 종이 각기 한 일은 달랐지만, 공통점은 양을 잃어버린 일이었다.*물론 두 사람이 한 짓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양을 지킨다는 중요한 목적을 잊은 결과에 있어서는 다를 게 없다. 중요한 것은 진짜 목표를 잘 파악해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을 하는데 있어서도,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도 중요한 교훈을 준다.⑤得魚忘筌 (득어망전) : 물고기를 잡고 나면 통발을 잊어버린다는 뜻으로, 바라던 바를 이루고 나면 그 목적(目的)을 달성(達成)하기 위해서 썼던 사물(事物)을 잊어버림을 비유(比喩)해 이르는 말이다. 즉 자기의 뜻한 바를 이룬 후에는 그 수단이나 과정에 대하여는 애착을 갖지 말라는 것이다.연문(演門=宋나라의 동문)에서 그 어버이를 여윈 사람이 있었다. 그는 상주노릇을 지극히 했으므로 몸이 몹시 쇠약해졌다. 그래서 송나라 군주날 줄 모른다. 물고기를 잡았으면 통발을 잊어버려야 하는데 통발에 집착하고 벗어나질 못하기 때문이다. 돈은 행복해지기 위한 수단이라는 데 모두 동의한다. 그런데 수단인 돈에 집착하여 진정한 행복은 영원히 못 만나는 경우가 많다. 행복해지려고 돈을 벌었는데 수단인 돈에 얽매여 목적을 상실한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⑥莫逆之友 (막역지우) : 서로 거스리지 않는 친구라는 뜻으로, 아무 허물없이 친한 친구를 가리키는 말.에 똑같은 형식으로 이야기한 두 가지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자사(子祀)와 자여(子輿)와 자리(子犁)와 자래(子來) 이렇게 네 사람은 서로 함께 말하기를, "누가 능히 無로써 머리를 삼으며, 삶으로써 등을 삼고, 죽음으로써 엉덩이를 삼을까? 누가 사생존망(死生存亡)이 한 몸인 것을 알랴! 우리는 더불어 벗이 되자." 네 사람은 서로 보고 웃었다.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벗이 되었다.또 다른 이야기를 보면 자상호(子桑戶)와 맹자반(孟子反)과 자금장(子琴張) 이렇게 세 사람은 서로 더불어 말하기를, "누가 능히 서로 더불어 함이 없는데 서로 더불어 하며, 서로 도움이 없는데 서로 도우랴. 능히 하늘에 올라가 안개와 놀며, 끝이 없음에 날아 올라가며, 서로 잊음을 삶으로써 하고, 마침내 다하는 바가 없으랴"하고 말했다. 세 사람은 서로 보고 웃으며, 서로 마음에 거슬림이 없고, 드디어 서로 더불어 벗이 되었다. 이와 같이 막역지우란 본래 천지의 참된 도를 깨달아 사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을 가진 사람간의 교류를 뜻하는 것이었으나, 오늘날에는 서로 허물없는 친구사이를 모두 가리키게 되었다.⑦明鏡止水 (명경지수) : 맑은 거울처럼 잔잔한 물이라는 뜻으로 맑고 고요한 마음을 비유한 말이다.신도가(申徒嘉)는 형벌을 받아 다리를 잘린 사람으로 정자산(鄭子産)과 함께 같은 스승을 모시고 있었다. 신도가가 말하였다. “선생의 문하에 언제 대신이라는 벼슬이 있었는가? 그대는 그대가 대신임을 대단히 여겨 남을 업신여기고 있구려. 내가 듣기를,일이 있더라도 약속을 꼭 지키는 신의 있는 사나이였다. 어느 날 미생은 애인과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는 정시(定時)에 약속 장소에 나갔으나 웬일인지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미생이 계속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데 갑자기 장대비가 쏟아져 개울물이 불어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생은 약속 장소를 떠나지 않고 기다리다가 결국 교각(橋脚)을 끌어안은 채 익사(溺死)하고 말았다.장자(莊子)는 그의 우언(寓言)이 실려 있는《장자(莊子)》'도척편(盜甁篇)' 에서 근엄 그 자체인 공자(孔子)와 대화를 나누는 유명한 도둑 도척(盜甁)의 입을 통해서 미생을 이렇게 비판하고 있다. “세상에 이른바 어진 선비 백이. 숙제는 고죽국(孤竹國)의 임금을 그만두고 수양산에서 굶주리다 죽어서 그 뼈와 살도 묻히지 못했고, 포초(鮑焦=주(周)의 은자)는 행동을 꾸미고 세상을 비방하다가 나무를 안은 채 죽었으며, 신도적은 임금의 잘못을 간했으나 받아지지 않아서, 돌을 지고 스스로 강물에 몸을 던져 물고기의 밥이 되었고, 개자추(介子推)는 충성이 지극해서 자신의 다리 살을 베어 진문공(晉文公=중이)을 먹였지만, 나중에 문공은 그를 배반하였으므로 개자추는 성을 내어 산에 들어가 나무를 안은 채 불에 타 죽었으며, 미생(尾生)은 어떤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를 약속했으나, 여자는 오지 않고 홍수가 내렸지만, 약속을 지켜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안은 채 죽었다. 이상 여섯 사람의 비참한 마지막은 이런 책형(石+桀 刑: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받은 개나 물에 떠내려간 돼지와 같으며, 그 이름을 구하는 꼴은 쪽박을 들고 밥을 빌어먹는 거지와 다름없는 것이다. 이들 모두 이름에 구속되어 죽음을 가벼이 여긴 사람으로서 본성을 본성으로 생각하고 목숨을 기르지 못한 사람들이다." 하고, 그 어리석음을 규탄하면서 이는 신의에 얽매인 데서 오는 비극이라 하였다.⑨鵬程萬里 (붕정만리) : 붕새를 타고 만리를 나는 것을 뜻하며 먼 길 또는 먼 장래를 이르는 말.장자(莊子)》〈소요유편(逍遙
국어국문학과※언어 순화의 개념문화와 문명이 발달한 겨레나 나라들은 저마다 자기네의 말을 다듬거나 바로잡거나 가꾸는 일을 벌인다. 그런 일련의 일들을 일반적으로 ‘언어 순화’ 또는 ‘언어 정화’ 라고 일컫고 우리 중심으로 일컬을 때에는 ‘국어 순화’ 라고 한다. 우선 ‘국어 순화’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1) 가. 국어를 바루고 곱게 닦아 쓰는 일 - 큰 사전(1957)나. 국어를 순수하게 하고 바른 언어로 가꾸는 일. 저속하고 규범에 어긋나는 말을 바로 잡고 외래적인 요소를 제거하는 일 등을 가리키는 용어로서 국어 정화라 하기도 한 다. - 민족문화대백과사전(1991)다. 국어를 다듬는 일. 외래어를 가능한 한 고유어로 비속한 말을 고운 말로 틀린 말을표준어 및 맞춤법대로 바르게 쓰는 것 따위이다. - 표준국어대사전(1999)다음으로 언어학자들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2) 가. 고운 말 바른 말 쉬운 말 쓰기 - 허웅(1978)나. 원만한 언어생활을 가로막는 국어의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를 제거, 개선하는 것을의미. 곧 외래어를 제거하며 바르고 고운 말로 만들거나 사용하는 것을 의미한다.- 박갑수(1999)이상으로 언어 순화의 개념을 살펴보았다. 세대가 변화함에 따라 언어도 변화한다. 언어의 변화는 당연한 것이지만 그것이 때로는 부정적인 영향을 낳기도 하여 그것을 고쳐야 하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다. 예를 들어 멀티미디어 시대가 오면서 컴퓨터가 보편화되었고 빠르게 키보드를 쳐야 하는 이유에서 문자는 점점 줄여지게 되고 또한 발음대로 표기하게 되었다. 이것은 실생활에서도 여과 없이 사용하게 되고 이러한 사용은 언어사회에 혼란을 주게 되었다. 이것은 단편적인 하나의 예일 뿐이다. 모두를 나열할 순 없지만 언어의 혼란은 광범위하고 또한 복잡하다. 그렇기에 우리의 언어 순화 노력은 절실히 필요하다. 물론 과거에도 언어 순화의 노력은 있어 왔다. 결코 한 시대에서의 과제가 아니라 전 시대, 전 세대에 걸친 과제임에 분명하다. 여기에서 주의하여야 할 것은 언어 순화는 모두에게 주어진 과제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사용하는 우리의 자산이기 때문이다. 언어 순화의 필요성을 알았다면 이제는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방향에 대해 살펴보지 않을 수 없다. 언어 순화의 개념처럼 국어를 바르고 곱게 닦아 써야 한다는 사실을 누구든지 의식하고 있다. 하지만 언어 순화의 의식을 인식하지는 못하고 있다. 언어 순화의 문제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지도를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학생들은 학교에서 바른 말 고운 말 쉬운 말을 쓰도록 교육 받아야 하고, 시청자는 대중매체 예를 들어 텔레비전에서 바른 말을 볼 수 있도록 하여야 하며 청취자는 라디오에서 고운 말을 들어야만 한다. 뚜렷한 지도목표를 인식하였다면 지도방법에 대해서도 강구하여야 한다.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사투리나 외래어 등의 조사도 이루어져야 하고 언어 순화를 위한 실천에 대해 뚜렷한 자기주장도 있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언어 순화 운동에 있어서 계통성과 일관성이 있어야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포괄적으로 살펴보았지만 언어 순화의 방향은 대체적으로 밝혀졌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선조들이 주신 소중하고 아름다운 국어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간직하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국어국문학과현 세대의 대학생인 우리는 남북이 분단되는 것을 몸소 체험한 세대가 아님에 남?북한간의 이질감을 뉴스나 기타 통신 매체를 통해 경험하고 있다. 이러한 이질감은 모습, 생활방식 등 다양한 면을 통해 느낄 수 있지만 가장 직접적으로 깨닫게 되고 확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바로 언어이다. 언어는 그 민족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결과물이다. 그만큼 중요한 언어가 분단 이후 달라졌다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 그러나 남과 북의 언어는 달라진 부분보다 그렇지 않은 부분이 훨씬 많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언어는 일상 생화에서 꾸준히 사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일정 기간이 지나면 그 상태대로 굳어져 버리고 만다. 남과 북이 서로 교류 없이 각자의 언어를 오랫동안 사용했다면 남과 북 모두 각자의 상태대로 굳어진 언어를 사용하고 있을 것이다. 남과 북의 언어가 달라진 부분은 바로 이렇게 관습으로 굳어진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이러한 부분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지난 몇 해 전부터의 남북 교류에서 밝혀지고 있다.언어는 시간이 지나면서 계속 변화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남과 북의 사람들이 자주 만나 언어 교류를 계속하면 달라진 부분을 줄여나갈 수 있다. 남북 교류의 중요한 목적 가운데 하나는 민족적, 언어적 동질성을 확인하고 이를 바탕으로 서로 공유하고 있는 부분을 점차 확대해 나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남북 언어 연구에 있어서도 이질화된 요소를 찾는 것 못지않게 동질적인 요소를 찾는 일이 무척 중요하다. 또한 순화의 대상이 되는 말들, 즉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말들은 남과 북에 많이 있다. 이러한 말들은 앞으로 남과 북이 학술 교류를 계속하여 같게 만들어 나가면 얼마든지 공통적인 요소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이러한 희망적인 전제 조건을 두고 남북한이 통일 되었을 때 표준어 선정문제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위에서 언급된 것으로 미루어 남?북한간의 교류를 통해 공통적인 요소를 뽑아 언어가 통일된다는 가정을 전제하더라도 가장 우선시해야 되는 문제를 빼놓아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언어의 세계화이다. 세계화에 발맞춰가는 시태에 세계화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운 분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곧 무엇이든지 살아남기 위해서는 또는 발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세계화되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형성되기 시작하였다는 의미이다. 우리의 언어 또한 세계화가 되기 위해서는 남과 북의 언어 중 무엇이 실용적인지 어느 것이 더욱 현실성이 있는지 따져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남과 북의 언어현상 중 띄어쓰기를 사용하는데 있어서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지에 대해서는 연구를 통해 충분히 이뤄낼 수 있다. 하지만 반대로 어느 것이 더 효율적인지 그 기준이 뚜렷이 정해지지 않는 것들도 있다. 북한은 성이 ‘리’ 혹은 ‘류’ 등 ‘ㄹ’이 앞에 오는 것을 당연시 쓰고 있는 반면 남한은 ‘이’너 ‘유’로 발음하고 표기한다. 유음 [ㄹ]이 단어의 첫머리에 나타나는 것을 회피하는 남한의 두음법칙이 딱히 실용성과 현실성과 관련이 있는지 의문이 든다. 만약 어느 것이 더욱 뛰어난 것인지 알 수 없다면 어느 한 쪽을 버리고 언어규범을 규정지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