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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문학]『九雲夢』에 나타난 공사상
    『九雲夢』에 나타난 空思想국어국문학과 3학년 강유진1. 序『九雲夢』은 문신이며 소설가인 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이 조선 숙종 때 지은 작품으로 선천(宣川)으로 유배되어 갔을 때 한양에 있는 老母를 위로하기 위하여 지은 것으로 알려진다. 서포는 당대 최고의 지식인의 한사람으로서 『九雲夢』 속에 당대의 동양인의 이념과 철학을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 투사시켜 놓음과 동시 삶과 죽음, 사랑이라는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다루었다. 이는 작가의 높은 학덕과 독서체험에서 얻은 지식 위에 작가의 문학관을 적용한 결과라 할 수 있다.『九雲夢』은 당대로서는 품격 있는 문학으로 여겨지지 않던 소설 속에 소재를 배합하여 종교나 철학이 나아갈 수 있는 최고의 층위에까지 작품의 주제를 끌어올렸다는 데에서 작가의 탁월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본 발표는 『九雲夢』에 나타난 儒?佛?道 3교사상 중 유?도가를 주제를 위한 소재로 파악하고 소설의 궁극적 주제 의식을 불교로 파악하는 입장을 취한다. 또한 불교사상의 방대한 논의를 다 할 수 없어 諸理論 중 가장 핵심이 되는 空思想을 중심으로 『九雲夢』을 살펴보겠다.2. 『九雲夢』의 作家論的 考察2.1 西浦의 생애와 『九雲夢』 창작 배경서포 김만중(金萬重, 1637~1692)은 조선 인조?숙종 때의 문신으로 본관은 광산(光山), 예학의 대가인 사계 김장생의 증손이며, 숙종의 첫 왕비인 인경왕후의 숙부이다. 병자호란 때 아버지 익겸이 강화에서 순절한 이후에 유복자로 태어났는데 당시 어머니는 스물 두 살이었고 형 만기는 다섯 살이었다. 그들은 어머니를 따라 외가에 들어가 살았으나 외조부모 사후로는 생활이 어려워져 어머니가 바느질품을 팔아 생활을 이끌어 나갔다. 그래서 어렸을 적에는 스승이 따로 없이 어머니에게서 『小學』,『史略』,『唐詩』등을 배웠다고 한다.서포는 스물 아홉 살 때(현종 6년,1665) 정시 문과에 장원함으로써 벼슬길에 오르기 시작하여, 나이 오십이 될 때까지 예조참의?판서?대사헌?좌우 참찬?대제학 등 높은 관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그러나 당쟁이 치열했던 현종?숙종 연간에 서인의 지반위에서 벼슬길에 올랐던 그는 굽히지 않는 격한 성격으로 현종 초에 발단이 된 예송과 숙종 때의 경심환국?기사환국 등 정변이 있을 때마다 거센 정쟁에 휘말렸다. 그러다가 끝내는 남해 절도에 유배되어(숙종 15년 윤3월) 숙종 18년 4월에 56세를 일기로 유배지에서 삶을 마쳤다. 죽기 한 해 전에는 서울에 계시는 노모의 부음을 듣기도 하였다.서포는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남달랐다고 한다. 서포의 조카손자인 김춘택의 『북헌집』에 의하면 서포는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국문소설을 많이 썼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남긴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은 『九雲夢』과 『사씨남정기』 두 편뿐이다. 이 외에 한시문집 『西浦集』과 한문 수필류 모음집인『西浦漫筆』이 있다.붕당의 시대인 17세기 후반을 살았던 서포는 일생동안 영광과 시련의 교체를 거듭한다. 그는 총 3번에 걸친 유배생활을 하였는데 숙종 13년에 왕에게 조사석 문제를 直諫하였다가 宣川에 유배된다. 그는 2차 유배지였던 선천에서 『九雲夢』을 창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 그는 이 시기에 승려와의 교류 및 불서의 독서체험을 통하여 緣起?空?中道의 사상체계에 접근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대 뛰어난 지식인으로 유?불?도를 두루 섭렵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상당 부분 불교에 비중을 두고 그것에 심취하여 선천 유배생활 시기에 불교적 인생관을 확립하였다. 그는 『九雲夢』에서 그가 가지고 있는 유?불?도 사상을 하나로 통합하고자 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불교가 중심이 되었다.2.2 서포의 思想작품에 나타난 사상을 살피기 이전에 먼저 작가가 가진 사상적 토대를 알아야 할 것이다. 서포의 사상은 그의 관련 서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이들 자료의 검증 결과 서포는 바로 작품의 저작지인 선천 유배시에 불교적 인생관을 확립했다는 사실, 그리고 그것이 여러 승려와의 교유, 불서에 대한 적극적인 독서 체험, 참선 등 인식론적 접근과 실천적 수행과정의 병행으로 이루어졌다는 보다 구체적이고 새로운 사실을 발견해 낼 수 있다. 이를 통해 『九雲夢』과 불교사상과의 필연적 상관성을 더욱 공고히 할 외적 기반을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그에게 수용된 불교사상의 구체적 내용들이 輪廻?緣起?空?中道 등 불교사상의 중심을 관통하는 것이었음을 확인하고 유추해 냄으로써, 그가 불교사상의 핵심부에 침투해 들어 있었음과 아울러 이에 따라 그의 작품인 『九雲夢』에도 輪廻?緣起?空?中道의 사상이 구조의 원리와 의미의 실상으로 작용하게 되었을 것이라는 先判斷을 얻어낼 수 있다.3. 『九雲夢』에 나타난 空思想3.1 六觀大師『九雲夢』의 등장인물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인물은 성진의 스승인 六觀大師이다. 그의 법명 ‘六觀’은 그가 고국에서부터 유일하게 지니고 온, 그리고 평생 그 불경만을 강의하는 所依經典인 金剛經의 지혜를 대표하는 주제어이다. 金剛經에는 몇몇의 四句偈가 있지만 그 게송 중에서도 가장 후반에 위치한 대표적인 것이 세존이 수보리)에게 설법의 내용을 요약해서 노래해주는 게송이다. 육관과 함께 불려지는 이칭 ‘六如’라는 법명도 같은 게송의 주제어에 그 의미를 두고 있다. 그만큼 금강경이 제시하는 진리의 법이 승려 육관대사, 육여화상과 동일시되므로 법과 승의 일치를 작명에서 보여준다. ‘육관’이란 법명의 존경받는 대사의 명명이 금강경의 주제어가 되면서 작품의 주제요, 주체 인물로 자리하게 된다.3.2 『金剛經』과의 관련성한마디로 말하자면 ‘『九雲夢』은 『金剛經』을 중심으로 한 공사상으로 이루어졌다.’라고 말할 수 있다.)『九雲夢』은 작품의 전개가 『金剛經』과 매우 유사하고, 작품 안에 『금강경』에 대한 언급이 번번히 나타난다. 예를 들면 첫 부분에서 육관대사가 傳道次 서역으로부터 중국에 들어와 남악 형산 연화봉 위에 암자를 짓고 修交할 때에 오직 『금강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 末尾에서도 성진이 楊少遊로 환생하여 인간이 가진 富貴榮華를 누리고 나서 꿈에서 깨어나 참성진으로 전수하고 환원했을 때 육관대사가 성진에게 역시 금강경을 전수하고 서역으로 가버리는 것이다.3.3 空思想空思想이란 불교의 모든 분야에서 불교의 正統的인 사상이다. 소위 法이라는 것이 즉 緣起요, 이 연기의 법이 佛陀의 근본사상인 이상 이것이 즉 불교의 정통사상이며, 이 연기의 바탕이 곧 공인 것이다. 실상 공사상은 불교 교리의 基調가 되는 것으로 元始佛敎로부터 역설되고 급기야 불교 각 종파를 막론하고 불교가 공사상을 떠나 생각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거기서 이른바 諸法無我 諸行無常 一切皆苦의 三法印이 있는 한, 불교는 앞으로도 공사상을 바탕으로 나아갈 것이다.)공사상은 迷에서 幻을 통하여 覺에 到達하는 과정을 말한다. 각의 세계가 말하자면 진공소유인 것이다. 그런데 모든 중생은 불성을 가졌으며 만물은 실상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므로 이 覺과 迷의 차이는 아주 간발의 차이라는 것이다. 즉 불과 범부의 차이는 가장 멀면서도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다. 결국 인간은 모두 부처이다. 다만 一念의 迷로 覺의 자리를 발견하지 못하고 있음 따름이다. 각은 먼데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신 심성의 본자리에 있는 것이다.생명이 자기를 중심으로 보는 세계는 모두가 有이다. 그것은 자기의 존재가 무엇인가에 의해서 구별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有도 假有이고, 無도 假無이다. 그러므로 非有非無이며 또는 유는 무가 있기 때문에 이름 지워지고 무도 유가 있기에 불려지는 것이므로 유를 不正하면 無自身이 肯定되는 것이 아니라 역시 無도 부정되는 것이므로 또한 非眞有非眞無이다. 즉 絶對의 유나 무가 아닌 것이다.이렇게 유무는 자신의 불완전성을 깨닫고 각기의 존재가 합하여 중도로 나아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만물의 구별을 止揚?克服하고 무분별로 나아가자는 것이니 구별을 추출해 내면 남는 것은 空이다. 그러나 이 공은 虛無와는 같지 않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일체가 有의 諸法相이 實在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실재하는 相을 구하는 進行인데 이것은 自己 不正에서부터 시작해서 他의 一切까지 부정하여 더 부정할 수 없는 데까지 도달해야 하는 것이다. 이 최후의 부정 뒤에 오는 것이 최대의 긍정인 것이다. 『금강경』에서는 최후의 일념까지도 부정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인문/어학| 2006.01.31| 4페이지| 1,500원| 조회(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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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전문학]彗星歌의 다양한 의미 양상
    의 다양한 의미 양상-社會史的, 呪術歌的, 敍情詩歌的 特性을 中心으로-國語國文學科 3學年 姜侑辰Ⅰ. 머리말鄕歌는 巫俗性과 藝術性이 미분화된 呪術歌에서 근원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주술가와 향가를 막론하고 원초적인 의미의 무속성 및 예술성을 더불어 가지고 있다. 이러한 특성으로 인해 향가는 무속성과 예술성 중 어디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연구에 있어 여러 異見을 낳는다. 또 『三國遺事』 소재 향가는 향가와 관련 서사가 함께 있다는 특성을 지니는데 이는 향가의 문학적 해석을 위해 관련 서사를 실마리로 삼을 수 있다는 장점과 동시에 향가 자체보다 오히려 관련 서사가 부각될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닌다. 그 동안의 많은 연구가 관련 서사를 중심으로 이루어져 온 것이 사실이다. 그에 따라 에 대한 기존의 연구는 대체로 사회적 측면의 연구와 呪歌로서의 성격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다.)본 발표에서는 를 기존의 연구를 중심으로 고찰해 보고 최근 새롭게 대두된 학자들의 견해를 보태어 가 가지는 사회사적, 주술가적, 서정시가적 성격을 두루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Ⅱ. 本論1) 의 본문과 해독(1) 관련설화① 설화 원문融天師 彗星歌 眞平王代第五?第六(一作)?第七等三花之徒, 欲遊, 有彗星犯心大星, 郎徒疑之, 欲罷其行. 時, 作歌歌之, 星怪卽滅, 兵還國, 反成福慶. 大王歡喜, 遣郎遊岳焉. 歌曰: ?舊理東尸汀叱, 乾達婆矣遊烏隱城叱?良望良古, 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邊也藪耶, 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 月置八切爾數於將來尸波衣, 道尸掃尸星利望良古, 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 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 此也友物比所音叱彗叱只有叱故.?② 설화 해석거열랑, 여섯째 실처랑, 일곱째 보동랑 등 세 화랑의 무리가 풍악(금강산)에 놀이를 가려 할 제 혜성이 나타나 心大星(북극성)을 범하였으므로, 이를 불길한 징조라 하여 풍악 행을 중지하여 하였더니, 이때에 융천사가 노래를 지어 부름으로서, 혜성을 즉멸하게하고, 일본병을 환국케 하였다. 왕은 화가 변하여 복이 되었다고 기뻐하여 화랑들에게 풍악놀이를 시켰다.(2) 본문1. 원문舊理東尸汀叱乾達婆矣游烏隱城叱?良望良古倭理叱軍置來叱多烽燒邪隱邊也藪耶三花矣岳音見賜烏尸聞古月置入切爾數於將來尸波衣道尸掃尸星利望良古彗星也白反也人是有叱多後句 達阿羅浮去伊叱等邪此也友物比所音叱 兮叱只有叱故② 의 해독과 현대어 해석1. 양주동 해독녜 ?ㅅ믌? 乾達婆? 예전 동해 물가노론 잣?란 ?라고 건달바의 논 성을랑 바라보고,예ㅅ 軍두 “왜군도 왔다!”燧?얀 ? 이슈라 봉화를 든 변방(邊方)이 있어라.三花? 오?보샤올 듣고 삼화(三花)의 산(山) 구경 오심을 듣고?두 ?즈리 혀렬바애 달도 부지런히 등불을 켜는데길? 별 ?라고 길 쓸 별 바라보고彗星여 ??여 사?미 잇다 “혜성이여!” 사뢴 사람이 있구나.아으 ? 아래 ?갯더라 아으 달은 저 아래로 떠갔더라.이 어우 므슴ㅅ 彗? 이실꼬 이보아 무슨 혜성이 있을꼬.2. 김완진 해독녀리 ? 믌? 옛날 東쪽 물가乾達婆? 노론 자?랑 ?라고 乾達婆의 논 城을랑 바라고,여릿 軍도 왯다 倭軍도 왔다홰 ?얀 어여 수프리야 횃불 올린이여 수풀이여.三花? 오롬 보시올 듣고 세 花郞의 山 보신다는 말씀 듣고,?라라도 ??그? 자자렬 바애 달도 갈라 잦아들려 하는데,길 ? 벼리 ?라고 길 쓸 별 바라고,彗星이여 ??녀 사?미 잇다 彗星이여 하고 사뢴 사람이 있다.아야 ?라라 ?갯?야 아아, 달이 떠가 버렸더라.이예 버믈 므슴ㅅ彗ㅅ 다?닛고 이에 어울릴 무슨 彗星이 함께 하였습니까.(3) 내용 분석이 詩歌는 신라 진평대왕 때 融天이라는 승려가 지은 十句體 鄕歌이다. 이 작품을 이루는 10句는 크게 세 단락으로 나눌 수 있다. 제 1구에서 제 4구까지는 倭軍과 乾達婆에 대한 내용으로 제 1단락, 제 5구에서 제 8구까지는 花郞과 彗星에 관한 것으로 제 2단락, 제 9구와 제 10구는 결구로서 제 3단락이다.제 1단락에는 왜군이 나타나는 신기루를 보고 烽火를 사른 사건이 제시된다. 이는 모두 舊里로 한정되는 과거의 사실이다. 이 과거사는 실제와는 무관한 것이면서 제 2단락의 내용을 암시하는 기능을 한다. 여기서 나오는 ‘건달파성’은 일상적으로 신기루를 뜻하는 관습적인 숙어로 사용된다.)제 2단락은 혜성 출현에 대한 부정이 중심을 이룬다. 三花의 山行과 달의 運行이 병치됨으로 해서 삼화와 달은 은유적 관계를 형성한다. 그리고 밤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은 달의 길을 쓸어주는 ‘길 쓸 별’이라고 새롭게 명명된다. 이 새로운 이름으로서 ‘彗星’이라는 낡은 이름이 지닌 흉조적 함의는 부정된다.2) 의 이데올로기적 문학의 성격 (사회사적 반영)앞서 살펴 본 바와 같이 는 심대성을 범한 천체의 이변이 있자 진평왕의 명령으로 융천사에 의해 불린 노래이다. 즉 순수한 문학적 동기에 의해서 지어진 노래가 아니라 왕의 명령에 의해 지어졌다는 점에서 당시 정치, 사회적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겠다.법흥왕대에서부터 왕족중심의 중앙집권국가로 탈바꿈한 신라는 왕과 귀족세력간에 세력 다툼을 벌였는데 진흥왕을 거쳐 진지왕에 이르러서는 귀족서력에 의해 왕이 폐위되는 등 왕권이 극도로 실추되었다. 그러한 난국에서 즉위한 진평왕은 자신의 입지를 굳건히 하기 위해 자신의 정치적 동반자로서의 관부와 관직을 설치하는 방법, 사상의 통합으로 국가적 단결을 꾀하는 방법, 왕권의 신성성 강조 등을 동원하였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려는 진평왕의 이와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시에는 빈번한 자연재해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때에 혜성이 심대성을 범한 사건이 일어났으니 왕은 兵革으로 인한 왕권에서의 퇴위나 왕권의 실추를 두려워했을 것이다.이렇게 혼란이 발생하려하자 진평왕은 사실의 은폐나 대체를 꾀했고, 즉 혜성이 심대성을 범한 일을 무마시키고자 본래 혜성이 가지고 있던 부정적 의미를 다시 명명하여 그것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사실의 은폐나 대체는 주가에서보다는 敎化的인 성격을 지닌 이데올로기적 문학에서 주로 드러나는 현상이다.) 그러므로 앞서 언급한 진평왕이 처해 있던 당시의 상황이 진평왕에게는 난국이었고 이데올로기적 문학으로서의 혜성가의 기능은 그러한 난국을 타개하고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키기 위한 것에 있다. 진평왕이 왕권유지에 집착하는 모습은 그의 통치 기간 중에 지속적으로 이어진다. 이처럼 곳곳에서 보이는 진평왕의 권력지향적인 모습이 천년 왕국인 신라에서 가장 오랜 기간의 통치를 진평왕이 할 수 있게 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서 창작된 는 어느 정도 지배체제의 유지에 그 기능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3) 呪歌에서 敍情詩歌로의 이행앞서 언급한 대로 향가는 무속성과 예술성이 미분화된 주술가에서 근원한 것으로 원초적인 의미의 무속성 및 예술성을 더불어 가지고 있다. 그리고 무속성과 예술성 중에서 어느 쪽이 더 큰 비중을 차지하느냐에 따라서 주술가와 향가가 구분된다.는 초기 향가로서 주술가가 서정시가로 넘어가는 過渡期的 단계에 놓인 작품이라는 데 특이성이 있다. 즉 는 주술가적 형식에서 기원하였으면서도 동시에 서정시가로 발전해 가는 과정에 해당하는 가요로서 시가의 구성과 표현의 초기적 양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먼저 서정시가로서 지니는 표현적 요소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제 1단락에 왜군과 봉화에 관한 서술은 표면상의 부정적 의미와 내면상의 긍정적 의미를 지닌 점에서 중의법에 해당한다. 이는 주술가 형식의 후대적 파경에서 유발된 수사적 표현의 출현이라 할 수 있다.제 2단락에 나오는 달은 혜성을 압도하기 위해 설정된 소재로서 三花의 등산로를 비추는 인격체로 비유되었다. 혜성이 지닌 부정적 의미를 압도하기 위해 동원된 긍정적 형상으로서의 달의 모습은 수사적 표현을 통한 서정적 아름다움의 표출이다. 또 ‘길 쓸 별’의 비유는 한자의 지식에서 끌어온 심상으로 문자의 의미를 빌려 새로운 표현을 나타낸 것은 향가의 서정화를 촉진하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음을 추론하게 한다.)제 3단락에서 감탄구 ‘아야’는 제 1구절과 제 2구절의 심상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확대되어 나타난 것으로, 보다 농밀하게 축적된 정서가 폭발된 양상이다. 이는 집단의 불안한 정서를 해소시키고 呪術的 해결 국면을 유발하는 기능을 지녔다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지막에 나타나는 설의법을 통하여 시적 재치를 발휘한다.그 다음으로 서정시가로서 지니는 역동적 구성에 대한 고찰의 결과는 다음과 같다.먼저 제 1단락의 왜군에 대한 부정과 제 2단락의 혜성에 대한 부정으로 반복의 효과를 이루고 다시 반전을 지시하는 완결의 언급을 제 3단락에 유보함으로써 반복의 효과를 점층의 효과로 연결시키는 입체성에 본가가 지닌 구성의 역동성이 있다. 따라서 이 역동성은 전반에 걸쳐서 역동적 韻律의 형성에 기여하였다.
    인문/어학| 2006.01.31| 5페이지| 1,500원| 조회(3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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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사] 메이지 유신 평가A좋아요
    일본의 개국과 근대화-메이지유신-19세기 일본은 아시아 국가 중 유일하게 개국과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이것은 객관적인 입장에서도 사실로 인정할 수 있는데 당시 조선과 중국은 서구 열강의 압력에 저항하다 마지못해 개국은 하였으나 개국 이후 근대화에는 실패한 것이 사실이다. 일본이 개국과 함께 근대화의 길을 걸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메이지유신의 성공과 함께 생각할 때 설명될 수 있다.메이지유신은 일본이 메이지 왕 때 막번체제(幕藩體制)를 무너뜨리고 왕정복고를 이룩한 변혁과정으로 그 시기는 1853년 미국 동인도 함대 사령관 페리 제독이 이끄는 구로후네(黑船)의 출현, 혹은 1854년 미일친화조약 체결을 시작으로 1877년 지조개정 실시를 전후로 하는 것이 일반적이다.(제도적으로 본격적인 메이지유신의 실현은 1868년으로 볼 수 있으나 일본 근대화의 시작을 중요 기점으로 삼을 때 1853년경으로 볼 수 있다.)메이지유신을 이끈 주된 정치적 세력은 하급무사 계급이었는데, 그들은 토쿠가와가에 대한 적대의식을 품고 있었으며 개혁을 이끄는 데 요구되는 전문적인 군사훈련과 높은 교육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목표는 나라를 지키고 동시에 서양제국에 맞서 나라를 강화하는 데 있었다. 이들은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 과정에서 개인적인 야심과 정치적 수완이 융합되어 개혁을 이루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하였다.메이지유신은 국가 주도의 일방적인 대개혁이었다. 말 그대로 경제, 사회, 정치, 문화 등 국가 전역에 걸친 대대적인 개혁이 이루어졌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주목할 것은 경제 분야의 개혁으로 생각된다. 메이지유신을 계기로 일본은 무사계급 중심의 농경사회에서 상공인 중심의 근대 산업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다. 이것은 메이지유신의 가장 획기적이고 근본적인 변화이자 성과로서 이후 일본 전반의 변화에 바탕이 된다. 이전의 일본은 무사계급 중심의 봉건체계를 이루고 있었는데 그들에 의한 막부정치는 일본 특유의 봉건제도와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메이지유신 이전, 무사는 상위 계급으로서 농민을 직접 지배하는 한편 그들의 상급자에게는 충성을 강조하는 가부장적 주종관계에 역점을 둔 봉건윤리를 발전시켰다. 제 2신분은 농민이었고 제 3신분은 상공자로서 이들은 상업의 발달과 더불어 부를 축적하여 막부 후기에는 무사와 대등한 사회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바로 이들에 의해 메이지유신 이후 일본 경제 개혁이 가능했던 것이다. 상공업자들은 상업자본을 축적하였고 나름대로의 문화도 가지고 있었으므로 일본 근대화의 터전을 닦았다고 평가된다.일본의 근대 산업국가로의 전환은 자급자족 중심의 지역사회에서 중앙집권 국가로의 전환을 가능케 했으며 무사 중심의 계급사회를 타파하고 사민평등의 사회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언급한 대로 메이지유신은 국가주도의 위로부터의 개혁이었다. 때문에 개혁은 농민의 자발적인 개혁이 아니라는 약점을 지니지만, 반면에 개혁이 국가에 의해 전 영역에 걸쳐 용의주도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일본 조정은 단순히 정치적 영역뿐만 아니라 지조개정, 폐번치현, 전신, 전화 설치, 7요제 실시, 태양력 사용 등 정책의 변화와 함께 생활 전반에 개혁을 실시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메이지유신은 국가에 의해 주도된 개혁임에도 불구하고 효율적이고 전면적인 개혁을 추진했기에 아래로 농민들의 참여까지 얻어내어 마침내 근대화에 성공할 수 있었다.일본은 대대적인 개혁에 의해 정치적으로는 입헌정치가 성립되고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의 틀을 갖추게 되었으며, 국가적으로는 근대적 통일국가를 수립하게 된다. 그러나 개혁으로 인해 기존의 주도 세력인 사족들은 설자리를 잃고 반란을 일으켰으며 개혁파 내에서도 개혁과 온건으로 나뉘어 싸움이 일어나게 된다. 이러한 혼란은 개혁 이후 수반되는 통상적인 현상으로 생각할 수 있는데 일본은 이러한 반란을 제압하고 국가 단합을 위한 방법으로 외부로 눈을 돌렸다. 이 때 대두된 것이 바로 정한론이다. 정한론의 배경에는 이러한 일본 내부 문제와 함께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를 모방해 제국주의에 합류하려는 일본의 모방의식도 한 몫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일본은 대외적으로는 제국주의 국가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으며 천황제적 절대주의가 사회전반에서 실현되었다. 일본은 서구에 보였던 굴종적인 태도와는 달리 아시아 국가에 대해서는 강압적이고 침략적인 태도를 견지하게 된다. 이러한 일본의 이중적인 태도는 1894년 청일전쟁, 1904년 노일전쟁, 1937년 중일전쟁 등을 일으키고 1941년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유발하기에 이른다. 그 후 독일, 이탈리아와 2차 세계대전에 참여하여 급기야 1945년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최초로 원자 폭탄이 투여되는 비극을 자초한다. 이와 같은 세계사적 흐름으로 보아 일본의 서구열강 답습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었음이 밝혀졌으며 이는 그들의 모방 정신이 근본적인 방법일 수 없음을 시사한다.
    인문/어학| 2003.12.01| 2페이지| 1,000원| 조회(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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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페미니즘] 노동시장과 성차별
    11주차 노동시장과 성차별한국 여성의 실제 경제 활동 참가 수준은?1960년대 이후 여성들의 경제 활동 참가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해 왔다.(1960년: 26.8% 1999년: 47.4%) 그러나 여성의 경우 취업을 포기하여 구직하지 않는 실망실업자 가 존재.예)가정주부는 실업자가 아닌 비 경제활동 인구에 포함된다.산업화의 진행과 여성 노동의 변화*1960년대-1970년대: 수출지향적 공업화와 여성노동- 여성노동자가 전체노동력에 큰 비중차지. 그러나! 그들 대다수가 저학력의 어린 여성노동자. 장기적인 노동과 저임금 문제.*1970년대 후반-1980년대: 중화학공업화와 여성노동- 여성사무직 종사자 증가. 유흥산업의 확장으로 서비스업으로의 여성유입 증가.*1990년대 이후: 정보·서비스 산업화와 여성노동- 판매직 서비스직 종사 비율 높음. 정보화 사회 이후 여성의 취업 전망에 청신호 예상.여성 취업구조의 특징* 직종별 분포: 사무직, 판매·서비스직에 집중된 경향. 전문기술·행정관리직의 비율은 여전히 적은 상태 많은 여성 취업자들이 불안한 저임금 직종에 종사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연령별·혼인 상태별 분포: 예전에 비해 기혼 여성의 취업 증가.(전체 취업 여성 인구 中 미혼 22.1%, 유배우자 65.3%, 사별·이혼 12.6%) 그러나 불연속적 (25-34세 취업률 급감 노동시장 참여의 불연속성 여성의 노동시장 재진입시 여성 지위를 하향 이동시키는 원인으로 작용) 60세 이상 노인의 경제참여율 높은 수준(복지 제도의 미비) 교재 『여성과 일』,p.73, p.79.지구화가 여성 노동에 갖는 의미초국적 자본에 의해 값싸고 유동적인 노동력 수요 증가 여성노동의 불안정화.노동시장에 대한 국가 개입 축소로 인해 여성의 노동은 더 취약해질 수밖에 없음.장기적인 전망으로서 노동력의 여성화, 비정규직 노동력의 확대, 여성 노동력의 양극화과제노동력 참여의 불연속성 해결을 위해 사회체제 마련이 시급. 취업영역의 전면적 확대.사회적 불평등과 성: 성의 사회적 지위는 단순히 물질적 측면에 주목하는 계급의 문제를 넘어서서 한 사회의 문화적, 성적, 이데올로기적 측면을 파악해야 이해할 수 있다.성별 불평등의 측정: 계량화의 어려움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의미 변화. 예)브리튼통계로 본 한국 여성의 불평등 현황* 성비로 본 여성의 지위: 성감별과 낙태 (셋째 자녀 이후의 출산은 남자아이를 위한 것)* 교육체계와 성불평등: 여성의 대학교육과 취업, 성차별적 교과목 편성, 인문사회계열의 여성 집중 현상/ 육·해·공사관학교에의 진출.* 가족구조와 성별 불평등: 가족의 소규모화 가족관리의 양 오히려 증가 재테크, 여가운용, 맞벌이(이중노동)로 다양화.* 경제구조와 성별 불평등, 정치구조와 성별 불평등- 비정규직 증가, 고위공무원 비율 3.2%국제지표로 본 한국 여성의 지위* 성별 평등지수(캐나다 1위/한국30위)* 남녀 권한척도: 적극적인 사회 참여 및 결정권 획득 정도(63위)해결방안: 경제적 자립권 확보 / 가사노동의 가치 인정 / 여성의 사회적 세력화.차별이란* 차별 : 사업주가 근로자에게 성별, 혼인 또는 가족상의 지위, 임신 등의 사유로 합리적인 이유 없이 채용 또는 근로의 조건을 달리하거나 기타 불이익한 조건을 취하는 것 - 남녀고용평등법간접차별 : 외관상으로는 성 중립적으로 보이나 남성보다는 여성에게 더 불리한 결과를 가져오는 조치나 규정, 관행들에 의해 야기되는 차별고용차별의 유형과 사례-임금 차별과 남녀 임금 격차-모집, 채용에서의 차별-교육, 배치, 승진에서의 차별-정년, 퇴직, 해고에서의 차별간접차별과 그에 대한 대응사례1997년에 제정된 제대 군인 지원에 관한 법률 즉 군 복무자 가산점 제도에 대하여 헌법재판소는 1999년 위헌판결을 내린바 있다.고용차별에 대한 대응과 개선 방안- 대응 사례1 1983년 한국통신 교환원 차별 정년 사건은 당시에는 합리적 차별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으나 1988년 고평법 시행 후 차별로 인정받았다.2 1988년 철도청은 여승무원 모집 시 면접에서 여성 응시자에게 반팔 상의에 스커트 차림을 요구하는 등의 외모위주 채용의도를 보였고 이에 여성단체는 시정을 요구하여 면접시 여성면접관의 포함과 근무복장의 개선을 약속 받기도 하였다- 개선 방안-여성 고용 관련 법 제도의 지속적인 개선-차별 개념에 대한 인식 확대-동일 가치 노동에 대한 동일 임금규정적용의 현실화-노동조합의 고용평등 실현 기능 강화-정부제도역할이 실질화수요, 공급의 측면에서 바라본 개인의 분석사회, 구조적 원인 분석# 개인의 분석인적자본론 - 신고전주의 경제학의 시각여성과 남성의 생물학적 차이와 역할의 차이를 전제하는 이론차별적 기호이론, 통계적 차별이론* 차별적 기호이론 - 개인이 가진 잘못된 신념이나 선호가 노동시장에서 특정집단에게 불리한 영향을 미칠수 있다는 이론(고용주, 종업원, 소비자에 의한 차별)* 통계적 차별이론 - 여성에 대한 차별을 노동시장의 불완전한 정보에 의해 발생하는 차별로 설명혼잡가설- 여성들이 여성 스스로 여성적 직업의 선택하기 때문에 노동시장에서의 낮은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는 이론 (소수의 여성적 직업에 경쟁이 심화되고 인력공급과잉으로 인한 저임금)
    사회과학| 2003.12.01| 3페이지| 1,000원| 조회(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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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강 정철 평가B괜찮아요
    Ⅰ. 序論송강 정철(松江 鄭澈 : 1536~1593)은 조선 선조(14대) 때의 명신이면서 문인으로서 자는 계함, 호는 송강이며, 시호는 문청이다. 율곡 이이와 동갑나기인 정철은 돈녕부 판관을 지낸 정유침의 아들로서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당대의 명유들이었던 하서 김인후, 고봉 기대승, 면앙정 송순 등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우리나라 시가사상 고산 윤선도와 쌍벽을 이루는 가사문학의 대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52세 때 향리인 담양에서 지은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조선 선조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노래한 것으로 유배가사의 일종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포 김만중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중국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 지은 이소(離騷)에 비겨, 동방의 이소(離騷)라고 절찬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전라남도 담양군 남면의 경치좋은 광주호 주변에 있는 식영정과 호남의 명산인 무등산 북서쪽의 원효계곡 자락에 있는 성산(별뫼)의 모습을 연결시켜 노래한 성산별곡은 정극인의 상춘곡, 면앙정 송순의 면앙정가, 정해정의 석촌별곡으로 이어지는 호남 가단의 중요한 맥을 형성하고 있다. 송강 정철은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관동지방의 해금강, 내금강, 외금강 등의 절승지와 관동팔경(*)을 중심으로 한 기행가사인 관동별곡을 짓기도 했다. 또한 송강 정철은 본래 성질이 곧아서 바른 말을 잘하는 데다, 당시 조정의 당파 싸움에 연루되어 거의 평생을 귀양살이로 마쳤지만, 학문이 깊고 시를 잘 지어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즐겨 회자되고 있다. Ⅱ. 本論1. 松江의 삶 (송강 문학의 전기적 배경 연구)송강의 문학은 한편으로는 표일호방 하고 질풍노도 하는 낭만성을 보여주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깊은 허무적 정한의 정서를 담지하고 있다. 전자는 그의 타고난 기질지성에서 기인했을 것이고, 후자는 당대의 정치인으로서 그의 삶의 과정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것은 송강의 문학이 이러한 정서적 특징이 궁극적으로 별개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것들이 결국 송강를 맞게 된다. 10월에 이르러 을사사화에 무고하게 연루된 인사들이 석방되고 명예가 회복되어 아버지 판관공의 직첩이 다시 회복된다. 11월에 홍문관 수찬에 임명되고 직후 율곡과 더불어 호당에 선출된다. 선조 1년 3월에 이조좌랑의 요직에 임명되고 6월에 원접사 박순의 종사관이 되어 시 재주를 발휘하기도 한다. 선조 2년 5월에 홍문관 수찬, 교리, 지평에 제수되고 이즈음 조정의 요직을 차지하고 있던 기존세력들이 사림계 인문 17인을 논죄하고 조정에서 내쫓으려 하자, 임금 앞에 나아가 그들을 통렬히 논박한다. 선조 3년에 교리, 예조정랑을 역임하고 4월에 부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37살(1572년) 되던 해 6월까지 2년여에 걸쳐 시묘살이를 한다. 이 때 모든 의례와 절차를 스승과 벗들에게 물어 예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게 함으로써, 주위의 큰 칭송을 받는다. 선조 5년 7월에 시묘살이의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직강, 이조정랑, 의정부 검상 및 사인, 사간원 사간 등을 역임한다. 선조 6년에 홍문관 전한, 사헌부 집의, 군기시정 등을 역임하고 4월에 모친상을 당하여 경기도 고양군 신원에서 40살(1575년) 되던 해 5월까지 약 2년 동안 다시 시묘살이를 한다. 이 때에도 예를 다하여 주위의 큰 칭송을 받는다. 송강의 집안은 대대로 청백의 가풍을 이어왔는데, 특히 부친인 정유침은 효행과 우애로 유명했다고 한다. 그의 모친 죽산 안씨 역시 효행이 대단하여 송강의 외조부가 매양 칭찬하기를 ‘내 딸의 효행은 열 아들 못지않다’고 한 바 있다. 이러한 가풍이 송강에게도 전해진 것으로 생각된다.선조 8년 6월에 시묘살이 복을 벗고 벼슬길에 나아가 내자시정, 사인으로부터 홍문과 직제학, 성균관 사성, 사간등을 역임한다. 이무렵 동서분당에 따른 당쟁의 소용돌이가 본격화되기 시작하여 송강은 서인의 주요 인사로서 동인과 대립하게 된다. 그러다가 마침내 율곡에게 조정의 화합을 맡기고 담양 창평으로 낙향한다. (첫번째 낙향) 이 소식을 들은 선조가 장차 크게 등용하짓는다. 선조 19년 10월에 조헌이 상소하여 이이, 성혼, 박순과 함께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하고 선조 20년 3월에는 이귀가 상소하여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애쓴다. 이 해와 다음 해 사이의 기간에 ,을 짓는다. 선조 21년에 조헌이 재차 상소하여 송강을 복권시키고자 하고 선조 22년 7월에 사암 박순의 죽음에 곡하며 추도의 시를 짓는다. 8월에 맏아들 기명의 죽음으로 복을 입고 10월에 정여립 모반사건이 적발되자 아들의 장사를 위해 경기 고양에 올라와 있다가 대궐에 들어가 임금께 사건의 전말을 기록한 계를 올린다. 선조는 충절로서 일컬으며 가상히 여기는데, 이어서 기축옥사가 벌어져 11월에 특명으로 의정부 우의정에 임명되고 겸하여 옥사를 주관하는 위관이 된다. 이로서 낙향한 지 4년여 만에 다시 화려하게 중앙 정계에 복귀한다.선조 23년 2월에 좌의정으로 승진하고 3월에 다시 위관을 맡아 기축옥사를 처리한다. 7월에 수충익모 광국추충 분의협책 평난공신을 책하고 인성 부원군에 봉해진다. 선조 24년 2월에 세자 책봉 문제를 건의하다 이산해의 모해로 선조의 노여움을 사게 되어 체임된다. 3월에 용산촌사로 물러나 명을 기다린다. 윤 3월에 이르러 평소 주색에 빠져 생활이 문란하고 당을 꾸며 경박한 무리를 모았으며, 조정의 인사를 마음대로 휘둘렀다는 혐의로 사헌부와 사간원 양사의 논핵을 입고 파직된다. 6월에 다시 양사가 계를 올려 송강의 귀양을 청하자, 처음에는 명천으로 정배되었다가, 곧 이어 진주로 옮기라는 명이 내린 지 사흘 만에 북녘 땅 강계로 유배되어 거처 주위에 가시울타리까지 쳐지는 혹독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이 기간 중 대부분을 독서와 사색으로 보낸다. 선조 25년 4월 중순에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5월 초에 유배에서 풀려나 평양에서 임금을 모시게 된다. 9월에 충청, 호남 양호의 체찰사로 임명되어 남쪽으로 내려가는데 이 무렵 조헌의 순국 소식을 듣고 제문을 지어 곡한다. 선조 26년 1월에 체찰의 임무를 소홀히 한다는 모함을 받고 북쪽 조정으로 돌아 하며 그를 파직시켜 유배 보낸다. 선조의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정철은 주색을 즐겼던 모양이다. 율곡도 정철에게 “제발 술을 끊도록 하고 말을 함부로 하는 버릇을 없애라”고 충고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술을 좋아했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 취기를 바탕으로 빼어난 산문과 절편의 시들을 뽑아낼 수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의 풍류가?애주가로서의 기질은 그의 문학 활동에는 도움이 되었을지 모르나 그의 정치 생활에는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4) 송강의 문학 활동숙종 때의 김만중(金萬重)은 《서포만필(西浦漫筆)》에서, 정철의 , , 을 중국 초(楚)나라 굴원(屈原)이 지은 에 비겨 라고 절찬한 바 있다. 작품은 ,,, 4편의 가사와 시조 107수가 전한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송강집》과 시가작품집인 《송강가사》가 있다.창평의 송강서원(松江書院), 영일의 오천서원(烏川書院) 별사(別祠)에 제향(祭享)되었고, 충북 진천군 문백면 봉죽리에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의 문학 작품에 대한 설명은 다음 장에서 자세히 언급하겠다.2. 송강의 가사문학 작품(1) 星山別曲엇던 디날 손이 성산의 머믈며서하서당 식영정 주인아 내 말 듯소.인생 세간(世間)의 됴흔 일 하건마난엇디 한 강산을 가디록 나이너겨적막 산중의 들고 아니 나시난고.송근(松根)을 다시 쓸고 죽상(竹床)의 자리보와져근덧 올라안자 엇던고 다시보니천변(天邊)의 떠난 구름 서석을 집을 사마나난닷 드난 양이 주인과 엇더한고.창계(滄溪)흰 믈결이 정자 알패 둘러시니청강(淸江)의 떳난 올히(오리) 백사(白沙)의 올마안자백구 랄 벗을 삼고 잠갤 줄 모라다니무심코 한가가하미 주인과 엇더한고.오동 서리달이 사경(四更)의 도다오니천암만학(千巖萬壑)이 낫인달 그러할가.호주(湖洲) 수정궁을 뉘라셔 옴겨온고銀河랄 건너 뛰여 광한전의 올랏난닷.짝마잔 늘근솔란 조대(釣臺)예 셰져두고그아래 배랄띄워 갈대로 더져두니홍료화 백빈주어나 사이 디나관대환벽당(環碧堂)용의 소히 배 넌패 다핫나니(후략)은 1560년(명종 15) 작자 끝내 죽을 지경에 이르게 한 임에 대해서는 원한을 품기보다 오히려 불변하는 충성으로 죽어서도 임이 알거나 모르거나 간에 임을 따르겠노라는 일편단심을 '범나비'가 되어 표현한다. (인용한 것은 서사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이 신선의 세계를 노래하고 있다면 은 여성 화자가 그리는 세계를 말하고 있어 보다 우아와 비장의 미의식이 드러난다.(3) 續美人曲뎨 가는 뎌 각시 본 듯도 한뎌이고.天上(천상) 白玉京(백옥경)을 엇디하야 離別(이별)하고해 다 뎌 져믄 날의 눌을 보라 가시난고.어와 네여이고 내 사셜 드러 보오.내 얼굴 이 거동이 님 괴얌즉 한가마난엇딘디 날 보시고 네로다 녀기실새나도 님을 미더 군뜨디 전혀 업서이래야 교태야 어지러이 구돗떤디반기시 낯비치 녜와 엇디 다라신고.누어 생각하고 니러 안자 혜여하니내 몸의 지은 죄 뫼가티 싸혀시니하날히라 원망하며 사람이라 허믈하랴셜워 플텨 혜니 造物(조믈)의 타시로다.(후략)정철이 50세 때인 1585년(선조 18) 당쟁으로 조정에서 물러나 창평(昌平)에 내려가 있는 동안에 지은 가사로, 3·4조(또는 4·4조)에 모두 49절 96구로 되어 있다.과 마찬가지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마음을 젊은 여인이 남편을 사모하는 형식으로 읊고 있으나, 그 표현 방법은 두 여인의 문답형식으로 구성하였고, 한자어구도 훨씬 적으며, 애끓는 심정이 더욱 넘쳐흐른다.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대로 선조 임금에 대한 자신의 애틋한 심정을 진솔히 노래한 연군 가사이다. 두 선녀 (갑녀·을녀 - 작자의 분신) 가 대화하는 대화체 형식으로 되어 있어 구성상 새로운데, 내용은 남편과 이별하고 지상으로 내려와서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을 노래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갑녀는 을녀에게 질문을 던져 그의 하소연을 유발해 내고 그의 하소연을 종결짓는 역할을 하고, 을녀는 갑녀의 질문에 응해 푸념 어린 신세 한탄을 곡진히 피력함으로써 작품의 정서적 분위기를 주도하여 작품의 주제 구현을 위한 중추적 역할을 한다. 이러한 대화체의 가사에 있어 갑녀·을녀는 각기 작자라.
    인문/어학| 2003.04.13| 15페이지| 1,000원| 조회(3,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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