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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무라이
    1. 머릿말근대에 이르러서야 ?민족(民族)? 또는 ?민족국가(民族國家)?의 개념이 형성된 서구사회와는 달리 단일민족으로 오랫동안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해 온 한국, 일본, 중국 등의 동북아시아 역사 속에서 민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신적인 측면, 즉 그 민족이 가지고 있는 민족정신의 뿌리를 깊이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특히 일본의 경우는 우리 나라와 역사적으로 특수한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민족정신을 이해하고자 할 때 객관적인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 일본의 민족정신을 흔히 사무라이 정신(武士道 精神)이라고 한다. 사무라이라하면 우리는 일본도를 차고 게다는 신고 일본식 상투를 한 냉철하고 비정한 검객을 떠올린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단순히 칼잡이를 일컫는 말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을 일컫는 말이다. 사무라이는 조선시대의 양반처럼 중세부터 근대화시기까지 일본의 신분제 사회 속에서 지배 계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따라서 우리나라 근대의 사상과 문화가 양반의 영향을 상당히 받은 것처럼, 근대 일본의 사상과 문화가 사무라이 계층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에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우리 나라의 양반이나 중국의 문인 관료와는 많은 면에서 성격을 달리 했다. 눈에 띄는 가장 큰 차이를 하나 들자면 그들은 문(文)을 숭상하는 지배 계층이 아니라 원칙적으로 무(武)를 숭상하는 지배 계층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선비의 개념으로 쓰이는 ‘士’는 일본에서 ‘사무라이’의 뜻으로 쓰이며, 마찬가지로 우리나라에는 ‘선비정신’이 일본에는 ‘무사도(武士道) 정신’이 있다. 이런 눈에 띄는 차이 외에도 많은 상이한 요소를 가지고 있어서 사무라이는 근대 일본의 성격을 같은 유교 문화권인 중국이나 우리 나라와 사뭇 다르게 하는 큰 요인 중의 하나가 된다.이러한 사무라이와 사무라이 정신(武士道)에 대해서는 종래 지나치게 미화시키거나 간과하는 측면이 있었는데, 일본의 역사 속에서 무사도 정신이 어떻게 형성되고 어떤 역할을 했는지 분석해 나가기 위해서는 구체적인 고찰이 필요두 난을 합쳐서 조헤이, 덴교의 난이라고 한다. 지방 무사단의 실력은 이 난을 통해서 확고해졌고, 조정과 중앙 귀족들의 무사들에 대한 인식도 새로워졌다.이리하여 지방 무사들의 실력을 알게된 조정과 귀족들은 그들을 사무라이로서 봉사시켰다.궁중과 왕경을 경비하고 조정으로부터 공적 지위를 부여받아 추포사, 압령사)에 임명되거나 국의 병(兵)으로서 지방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했다.(3) 사무라이의 특권에도(江戶)시대 무사에게는 세가지의 특권이 부여되었다.첫번째로 기리스테고멘(切り捨て御免)이라는 제도로 에도시대에 농민이나 상공인등 양민이 무사에 대해 무례를 했을 때 칼로 목을 쳐 죽여도 죄가 안되었던 제도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베어서 버려도(切り捨て) 벌을 받지 않는다(御免)는 것이다. 무제한으로 허용된 권리는 아니었으며, 死後에 반드시 조사가 뒷따랐으며 정당한 이유없이 양민을 살해한 경우는 처벌되기도 했다.두번째는 무사에게만 허리에 칼을 찰수 있도록 허락했다. 무사들이 가지고 다니던 칼은 한사람이 패도(큰 칼. 또는 장도), 급발(1자 이상의 중도), 해수도(1자, 즉 22.5cm 정도 길이의 칼) 등 세자루의 칼을 가지는데, 이를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 대전시 크고 작은 칼 두가지를 사용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일본식 쌍검을 이도류라고 한다. 그러나 조총이나 활, 창 등을 든 자는 장도 하나만을 휴대했었다.세번째의 특권은 무사만이 성(姓)을 가질수 있었다. 즉, 무사는 성과 이름을 쓸수 있었고 무사이외의 계층은 이름만 쓸수 있었던 것이다.(4) 무사 정권의 탄생 - 귀족과 무사의 이중정권12세기 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賴朝)가 가마쿠라에 바쿠후를 창건한 것이 본격적인 무가정권의 시작이다.한때 공가정권인 겐무(建武)정권이 부활했지만 곧 붕괴하고 무로마치 바쿠후와 전국시대(戰國時代)를 거처 에도바쿠후로 이어져 1868년 메이지(明治)유신을 맞이하기까지,약 700년에 걸쳐 무사가 일본정계를 주도했다.수도의 귀족은 권력유지를 위하여 무사의 힘을 인정했고 무사가 중앙정치다. 한편 불안한 세상에서 무사와 농민이 종교를 갖게 됨으로써 새로운 종교가 잇따라 나타났다. 헤이안 불교가 엄격한 계율이나 학문을 중시한 것과는 달리 이해하기 쉽고 실천을 중시하는 것들이었다. 신란(親鸞)과 니치렌(日蓮)이 대표적이다.(3). 호죠(北條)가문의 싯켄(執權) :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사망한(1199년)후에 그 뒤를 이은 장남 요리이에(賴家)는 쇼군으로는 함량부족이었다. 요리이에의 어머니(요리모토의 처) 호죠마사코(北條政子)가 자신의 친정아버지 호조도키마사(北條時政)와 함께 요리이에를 암살하고 그 동생 사네토모(實朝)를 3대 쇼군으로 삼는다. 호죠도키마사는 막부의 실권을 장악해 싯켄(執權〓헤이안시대의 攝政과 같은지위)의 자리에 오르니, 이후 호죠(北條)가문의 세력은 절대적인 것이 된다.(4) 가마쿠라막부의 멸망(1333년) : 막부의 세력이 쇠퇴해진 것을 기회로 고다이고(後醍 )천황은 호죠씨(北條氏)에게 불만을 가진 고케닌(御家人)들을 선동해 아시카가타카우지(足利尊氏) 등을 끌어들여 전쟁을 일으킨 결과 막부를 무너뜨렸다.2) 일본의 민족사상 - 사무라이 정신(武士道)(1) 형성배경일본은 사상과 철학이 없고 상황론에 의해서 현실과 이익에 기초한 칼의 정신만 있는 나라라는 평이 지배적이다. 우리 나라는 샤머니즘에서 출발하여 불교문화를 거치고 조선시대에는 유교문화에 기초한 사상의 기조를 갖고 있다. 반면 일본은 샤머니즘에서 출발하여 샤머니즘과 불교문화가 결합된 상태에서 사상의 기조를 만들지 못하고 근대서양 문화가 들어와 근대국가를 이루었다. 임진왜란 후 잠시 퇴계 학문을 받아들여 유교문화를 일부 수용했지만 사상으로 정립하지 못한다. 도쿠가와(德川)시대의 어느 일본 유학자는 공자가 만약 군대를 이끌고 일본을 쳐들어 온다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질문에 ?내가 공자의 목을 베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 일화는 일본의 유학자가 진정한 의미에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자신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수용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단면이다.18세기 이후 이른바 데, 그것이 '무사로서의 길' 즉, 무사도이다.무사도에서는 무사의 기존의 모습에서 탈피하려고 한 흔적이 많다. 예를 들어 무가법제도 제1조에서는 문무겸비(文武兼備)와 문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이는 무사의 직분을 더 이상 전쟁의 도구가 아닌 '덕을 밝게 하여 이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로의 전환을 말하고 있다. 이런 '무사의 유교화' 또는 '유교의 무사화'에 힘을 쓴 학자로는 나카에토주(中江藤樹, 1608-48), 쿠마자와반잔(熊澤蕃山, 1619-91), 야마가소코(山鹿素行, 1622-85) 등 로닌(浪人)출신의 유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무사는 선비가 되어 서로 물어뜯고 싸우는 개가 되어서는 안된다"라고 비판하며 거칠고 흉폭한 무사기질을 유교에 의해 세련화시킴으로서 이상적인 무사도의 기틀을 잡았다.그 중, 야마가소코는 '유교(儒敎)의 무교화(武敎化)를 실천, 종래의 무사도와 다른 길을 제시하였다. 그는 사무라이(士)의 직분은 자신의 몸을 닦고(修身), 주군을 받들어 충성을 다하며, 인과 예를 지켜 의리를 다함은 물론이고, 농·공·상의 직업을 초월한 존재로서 세 부류의 백성들 사이에서 윤리를 져버린 무리를 처벌하여 인륜을 지키는 존재라고 역설하였다. 때문에 사무라이는 문·무의 덕치를 갖추지 않으면 안된다고 하였다. 다시말해 무사는 인륜의 길을 실천해야 하며 도덕적으로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직분을 자각하고 책임감을 가지는 동시에 다른 계급을 이끌어 가야한다는 점에서 무사는 곧 선비와 같다. 다만 허리에 두 자루의 칼을 차고 있을 뿐이다.무사도의 형성에 관여한 이념은 여러 가지가 있다. 고대에서 중세로서 이행과 동시에 일본은 무사정권이 성립되어 10세기간 일본은 무사의 지배에 들어간다. 그로 인해 자연스럽게 생겨난 무사정신과 일본 고유의 종교라고 할 수 있는 신도, 그리고 고대에 백제와 신라에서 전파된 유교와 더불어 에도시대에 중국에서 수입한 주자학 등 무사도는 그 본원이 어디인지 예측하기 힘든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할 수 있는 것있는 것이다.한편 이러한 일방적인 관계로서의 충성은 국민으로 하여금 별다른 감시와 관리 없이도 국가에게 충실하게 할 수 있는 일본인의 국민성의 배경이 아닐까 싶다. 예를 들면 편의점에서 야간아르바이트하는 사람들까지도 감독없이 주어진 일을 성실히 이행하는 충실함의 근원도 이런 배경에서 연유한다고 추리할 수 있을 것이다.? 효위에서 서술한 바와 같이 효(孝)는 충의 아래에 위치한다. 옛 학자인 '타이라시게모리(平重盛, 1138-79)'는 충과 효가 본디 같은 것이라고 하였지만, 많은 역사적 사례로 볼 때, 일본에서 효가 충과 동등한 입장이라고 보기는 힘들다. 일본의 유명한 담화집인 '하가쿠레(葉隱)'에서는 효에 대한 부분이 언급되어 있으나 전체적으로 충을 더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같은 유교문화권에서 변질적인 특징을 지니게 된 것은 일본의 경우 이미 토대가 잡혀져 있던 '무사문화'에 유교의 지배이념을 도입해 재구성한 탓이다.? 의의는 다른 말로 의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는데, 이것의 범주는 너무나 광대하다. 어떤 의미로서는 '의무(義務)'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의도하지 않은 곳에서 우러나온다는 것이 틀리다. 베네딕트는 "의(義)란 자기 의무를 다하는 것을 말한다"고 서술했다.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부딪치는 수많은 의무에 대한 성실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순적인 일본인들의 성향을 설명할 수 있는 열쇠가 된다. 예로서 주군에게 치욕을 입은 가신이 적군과 손잡아 주군을 배신했던 전국시대의 무사들이 있다. 이것은 모두 일본인들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는 사건이다. 그들은 주군에 대한 의와 자기 명예에 대한 의, 두 가지를 모두 지킨 것이다.또, 의와 함께 설명할 수 있는 것으로서 '온(恩)'을 들 수 있다. 온이란 '은혜(恩惠)'라고도 번역할 수 있는 것으로서 무의식적인 '의(義)'로서 입는 혜택이다. 그런데 주의할 점은 일본인들은 이런 온을 꺼린다는 것이다. 그들이 얻은 온은 결국 언젠가는 갚아야한다고 생각하고 그것이 결국 부담이 되어 온을 입은 사람을 괴롭.
    인문/어학| 2004.05.16| 13페이지| 1,000원| 조회(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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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통신] 유비쿼터스 평가A좋아요
    1. 들어가는 말작년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에서 나오던 세상은 아득한 미래세계로만 여겨지는 상상 속 또는 영화에서나 자주 등장하는 그러한 세상이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홍채 인식을 통해 그 사람의 정보를 알아내며, 주인의 목소리나 인공지능에 의해 집안의 가전제품들이 동작을 하고, 언제 어디에서나 편리하게 원하는 정보를 얻고 보낼 수 있는 그러한 세상. 하지만, 이것은 더 이상 우리들의 상상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세상이 아니다. 인터넷과 컴퓨터의 발달로 인해 또 하나의 세상(사이버 공간)을 만든 인간은 이젠 그 실체가 없는 세상과 우리가 살아가고 숨쉬는 이 물질 세계를 결합하려 하고 있다. 즉, 농업혁명과 산업혁명 그리고 지상최대의 혁명이라 일컬어지는 정보혁명이 지나고, 이젠 유비쿼터스 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초고속 정보화 대국을 완성시킨 우리에게 유비쿼터스는 우리나라와 국내IT기업들이 세계를 향해 더 높이 뻗어 나아 갈 수 있는 최고의 경쟁력일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앞으로 유비쿼터스의 기술을 위한 신기술의 개발이 그 어느 기술보다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고 믿으며, 유비쿼터스 컴퓨팅과 네트워킹에 대한 기술들의 발전 가능성과 관련기술들에 대해 이야기하려 한다.2. 유비쿼터스란?1)유비쿼터스 개념지난 88년 제록스 팰러앨토연구소(PARC) 마크 와이저가 처음 제시한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그 효시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유비퀴터스는 언제 어디서나 , 동시에 존재한다 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이 용어는 일반적으로 물, 공기처럼 도처에 편재해 있는 자연자원이나 종교적으로는 신이 언제 어디서나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상징할 때 이용된다. 정보통신 분야에서는 이 말을 ubiquitous computing 이나 ubiquitous network 처럼 유비퀴터스화 되고 있는 새로운 IT환경 또는 IT패러다임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하지만 이 개념도 기술융합이라는 좀 더 큰 틀에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요즘 21세기 핵심기술분야를 7T라 하여 IT(정보기술), NT(나워크를 통해 언제 어디서나 빠르고 간편하게 제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이는 현실공간과 가상공간의 경계가 더 이상 무의미해지는 것을 의미한다. 가상공간이 네트워크를 통해 자연스럽게 생활공간으로 편입되는 것이다. 최근 들어 단순 주거용이던 건물을 보다 쾌적하고 풍요로운 삶의 공간으로 바꾸는 사업이 각광받고 있다. 이같은 디지털 홈 사업은 유비쿼터스 컴퓨팅이 인간 생활에 가져올 놀라운 변화를 읽게 하는 대표적인 예다. 건설회사가 만든 건축물이라는 현실 공간에 IT업체들이 구현하는 가상공간이 결합되면서 새로운 유비쿼터스 공간이 탄생하고 여기에 디지털 홈 업체들은 인간의 삶을 보다 풍요롭게 만드는 다양한 생명력을 불어넣고 있다.2) 유비쿼터스 컴퓨팅의 급부상물리공간과 가상공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유비쿼터스(ubiquitous) 컴퓨팅이 국가 정보화 정책 수립에 반영되는 것은 물론 각 분야 핵심 연구과제로 떠오르고 있다. 또 기업들의 신제품 개발 등 미래 정보화를 준비하는 기반 개념으로 빠르게 확산되는 등 e코리아 계획을 잇는 차세대 국가발전전략으로 급부상하고 있다.정보통신부는 본지가 지난 4월 19일부터 창간 20주년 미래기획시리즈 21세기 아젠다 u코리아 비전-제3공간에 대한 도전과 기회 를 내보낸 후 정보인프라의 질적 고도화를 추구하는 제3차 정보화촉진기본계획(2002∼2006년) 에 유비쿼터스 패러다임의 기본 개념을 반영키로 했다. 또 삼성SDS LGCNS 대림INS 등 주요 IT업체들도 유비쿼터스 컴퓨팅 기반의 신사업전략 수립과 신제품 개발에 경쟁적으로 나서 미국과 일본에 이어 국내에서도 유비쿼터스 컴퓨팅시대 개막을 알리고 나섰다.4. 유비쿼터스의 세계1)유비쿼터스의 세가지 특징특징1 : 네트워크 접속마크 와이저는 네트워크에 접속되지 않는 컴퓨터는 유비쿼터스 컴퓨팅 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 왜냐하면 여러 장소로 이동하는 이용자에게 컴퓨터가 그 사람에게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는 네트워크 접속이 필수불가결하기 때문이다.특징2 : 컴퓨터를 사용한다. 또한 시큐리티의 서비스에서는 정확한 ID를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에게는 해당 단말기가 서비스 제공을 거부해야 한다.2)유비쿼터스의 예유비쿼터스 기능을 탑재한 사물은 스스로 컴퓨터에 접근해(TCI:Thing Computer Interface) 필요한 정보를 직접 요청하고 교환한다. 스마트 전자레인지는 인터넷에 연결된 컴퓨터로 조리법을 물어보고 스마트 냉장고는 처음 보는 상품의 적정 온도가 얼마인지를 인터넷으로 문의한다.언제 어디서나 이용자의 취향에 따라 맞춤형 방송서비스가 가능하도록 해주는 지능형TV시스템 '스마트TV'는 이미 차세대 TV 표준으로 부상하고 있다.냉장고와 전자레인지도 서로 정보를 주고 받는다. 피자를 조리하는 스마트 전자레인지는 냉장고에 요리 재료가 충분한지를 물어본 후 냉동된 요리 재료를 녹여줄 것을 요청할 수 있다. 사물 스스로가 생각하고 직접 행동하는 것이다.아침에 일어나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손잡이에 장착된 센서는 혈압과 체온 상태를 체크한다. 변기를 통해서는 당뇨 등이 점검된다. 체크 결과는 곧바로 주치의의 단말기에 전달되고 주치의는 원격검진을 받아볼 것을 제안한다. 스마트 센서가 달린 알약은 우리 몸속의 지정된 위치까지 정확하게 약을 운반해준다. 전동 칫솔이 무선인터넷 칩을 장착한 스마트 칫솔은 충치를 발견하자마자 의사에게 연락하고 의사는 스마트 칫솔을 통해 환자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치료한다. 사람과 컴퓨터, 그리고 사물이 서로 정보를 주고받으며 하나로 조직되어 생활하는 것이다.또 한 유비쿼터스 시대에는 모든 장소와 사물이 교실이자 학습 교재가 된다. 학습 정보가 직접 학생들을 쫓아다니기 때문이다. 학생들이 피사의 사탑을 지나면 그 속에 심어진 교육용 칩은 학생의 휴대단말기를 통해 그 탑의 유래와 배경을 상세하게 설명해준다.백화점으로 가는 도중 텔레매틱스 단말기로부터 교통사고로 인한 도로정체가 있으니 우회도로를 이용할 것을 조언받는다. 백화점에 도착하면 무선(RFID-태그) 인식기가 부착된 쇼핑카트를 이용해 상품의 원산지서 깬 노인을 위해 자동으로 화장실 불을 켜거나 깨어 있는 동안 노인에 관한 정보를 기록하는 역할을 수행한다.노인들은 작은 위치추적 배지를 부착하고 다닌다. 엘리트 케어 곳곳에 심어진 센서들은 노인의 배지를 계속 추적해 의식상실 증세가 있거나 방향감각을 잃고 배회하는 노인이 감지영역을 이탈하면 경고음이 울려 간호원에게 알린다. 또 노인의 개별 침대에는 몸무게 측정 센서가 내장돼 있어 몸무게 변화뿐 아니라 수면중의 몸부림과 같은 움직임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이처럼 생활 공간에 조용히 스며들어 있는 유비쿼터스 센서들로 인해 노인들은 자립심과 자율성이 보장되는 말년의 생활을 누릴 수 있다.유비쿼터스 세상이 불러올 산업 경제적 파급효과는 상상을 불허한다. 유비쿼터스 세상은 컴퓨팅(Computing)ㆍ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ㆍ접속(Connectivity)ㆍ콘텐츠(Contents)ㆍ조용함(Calm) 등 5C의 5Any화(Anytime, Anywhere, Anynetwork, Anydevice, Anyservice)를 지향한다. 이를 통해 사물의 정보와 인간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는다.모든 정보가 자유롭게 흘러다니는 유비쿼터스화가 진전될수록 더 많은 종류의 서비스와 산업이 등장한다. 이는 곧 새로운 가치 창조의 기회를 의미한다. 이 과정에서 IT가 모든 산업영역으로 확장되고 유비쿼터스를 기반으로 한 수많은 정보서비스가 등장하면서 미래의 IT산업지도도 새로운 모습으로 바뀐다.위성위치측정시스템(GPS)과 무선통신 지리정보시스템(GIS) 웹서비스, 그리고 모든 부품에 컴퓨터 칩과 센서가 심어지고 이것이 차량용네트워크시스템(CAN:Controller Area Network)으로 연결된 것이 미래 자동차의 모습이다. 지금 크게 발전하는 모바일기술은 초보 단계여서 비약적인 발전이 예상되는 무궁무진한 분야다.특히 무선통신과 컴퓨팅의 의미를 갖고 있는 모바일은 유비쿼터스범주에 내포된다. 앞으로 주목을 받게 될 모바일 모델로는 신용카드 내장 방식 모바일은 또 유비쿼터스의 가지 기능으로 사용 가능하다는 점과 구형 스타일의 디바이스라는 점을 들고 있다. 하지만 PDA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것들도 네트워크에 접속이 가능해지면 유비쿼터스 가 될 수 있다.5. 유비쿼터스 시대를 위한 조건1) IT, NT, BT 기술개발유비쿼터스 컴퓨팅과 네트워크의 실현은 IT(Information Technology), NT(Nano Technology) 그리고 BT(Bio Technology)등과 같이 여러 분야에 걸친 기반 기술의 개발이 뒷받침 되어야 이루어 질 수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NT에서의 초소형화와 다기능 그리고 저렴한 소자들의 개발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기존의 개인 PC에 의한 터미널 간의 통신은 컴퓨터라는 한정된 통신 단말기로 가능했었다. 이는 내부 칩들의 소형화와 집적화에 의해, 노트북과 PDA등과 같이 휴대 가능한 단말기들이 개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단말기들 역시도 사용자의 특정한 INPUT에 의해서만 통신이 가능하고, 서로 다른 기종간의 연결에서의 제약이 따른다. 따라서 앞으로는 한 칩 안에 통신 및 각종 기능들이 수행되는 그러한 SoC(System on Chip)의 기술과 MEMS(Micro Electro Mechanical System)에서의 초소형의 디바이스 개발이 유비쿼터스를 위한 각종 센서 노드들의 수 많은 배치를 가능하게 할 것이다.2) 센서 네트워크 및 각종 시스템 개발센서야말로 현실 세계에서의 현상의 변화를 전자공간의 전자신호 즉, 비트들의 조합으로 바꾸어주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핵심적인 소자이다. 즉, 해당 지역의 온도를 감지하는 온도센서, 기압을 알아주는 압력계, 지진계, 유량계, 수압계 등 센서들의 종류만 해도 무궁무진하다. 그러나, 유비쿼터스 네트워킹에서의 한 센서노드를 위해서는 센서의 감지능력이 탁월해야 하며, 그 크기는 상당히 작게 만들어야 할 것이다. 또한 어떤 시스템에도 쉽게 임베딩 될 수 있는 유연성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 Microsensor등의 기술의 발전이 기대된다. 또 이 센 한다.
    공학/기술| 2003.12.19| 8페이지| 1,000원| 조회(8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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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케팅] 마케팅관리 멕심 vs 초이스 평가B괜찮아요
    목차1. 비교대상 상품소개1) 상품명2) 목표고객2. 비교대상 상품 선정 배경3. 경쟁관계 변화 분석4. 경쟁우위 평가기준 및 가중치 산정5. 평가기준을 이용한 두 상품의 비교분석1) 판촉 및 PR2) 상품 구색3) 상품 디자인4) 점포 입지 (진열위치)5) 브랜드 이미지6) 광고6. 2등 상품의 전략에 대한 제언7. 참고자료8. 설문지1 . 비교대상 상품소개1) 상품명동서식품의 인스턴트 커피“맥심”동서식품은 1968년 설립 이래 항상 최고의 맛을 창조하기 위해 노력해온 기업이다. 인스턴트 커피 브랜드로는 동서식품의 맥심(Maxim)과 맥스웰 하우스(Maxwell House), 한국네슬레의 테이스터스 초이스(Taster's Choice)와 네스카페(Nescafe) 등의 패밀리 브랜드가 존재하고는 있으나, 그중에서도 맥심, 맥스웰 하우스는 그 이름만으로도 한국 커피문화의 대명사가 되어왔으며 언제나 최고의 품질과 최선의 서비스, 끊임없는 연구개발로 고객 만족을 실현하며 성장해 왔다. 국내 커피문화의 대명사 동서식품은 다양하고 우수한 제품군으로 국내 커피시장에서 시장점유율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다.1980년 냉동건조 공법, 즉 기존의 미립자로 만들어진 분무건조(Spray Dried) 방식의 커피에서 진일보한 공법에 의한 커피생산의 도입으로 제조된 대한민국 최초의 인스턴트 커피인 맥심 오리지날은 글로벌 브랜드의 공세 속에서도 1980년 출시 후 20년간 막강한 점유율로 수위 브랜드의 지위를 지켜왔다. 물론 1988년 한국 네슬레가 고습 인스턴트 커피 제품을 위주로 시장에 진입한 이후 맥심과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기는 하나 아직까지 맥심의 위세에 눌려 있는 게 사실이다.맥심은 후에 언급될 뛰어난 광고 전략을 중심으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다. 맥심의 이와 같은 광고는 목표고객의 숨겨진 속마음까지 읽어내려는 끊임없는 고민, 고객의 언어로 제품의미를 규정하려는 노력과 함께 “가슴이 따뜻한 사람과 만나고 싶다” 로부터 시작해서 “사랑의 향기는 영원하다”로 이어져 페(Nescafe) 등의 패밀리 브랜드가 존재한다. 동서식품은 1968년 창업 후 인스턴트 커피 시장에서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다. 그러나 1988년 한국 네슬레가 고급 인스턴트 커피 제품을 위주로 시장에 진입한 이후로 동서식품은 한국 네슬레와 치열한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이 두 브랜드의 시장 점유율은 동서식품의 맥심이 월등히 앞서고 있는 상황이다.따라서 우리는 인스턴트 커피시장에서의 1위인 맥심과 2위인 테이스터스 초이스를 비교하여 두 브랜드의 차이를 알아보고, 2위인 테이스터스 초이스가 커피시장에서 맥심보다 앞설 수 있는 방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3. 경쟁관계 변화 분석(출처 : 동서식품 홈페이지, N사 : 한국 네슬레, D사 : 대상 )한국의 인스턴트 커피시장은 지난 5년 간 꾸준히 성장해왔다. 때문에 오랜 시간 독점 기업으로 한국 커피시장을 이끌어 오던 맥심에 맞서 여러 회사들에서 새로운 브랜드를 내놓고 있다. 그 대표적인 예로 1989년 한국 커피시장에 진입한 네슬레를 들 수 있다. 네슬레는 다국적 기업으로서 쌓아온 노하우로 한국 시장 정복을 시도했으나 오랫동안 “커피=맥심”으로 각인된 고객의 머리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네슬레는 젊고 세련된 여성을 타깃으로 업계 2위로의 자리를 굳히고 있다.또 네슬레는 1998년 맥심과의 격차를 좁히는데 성공하는 듯 보였으나, 외국계 기업으로서 후발기업의 이미지와 경영문제 등으로 최근에는 그 격차가 다시 늘어나는 추세이다.인스턴트 커피시장에서 지난 99년 62%였던 동서식품의 시장점유율이 2000년 64.7%, 2001년 65.6%로 성장했다가 지난해 66%로 주춤했으나 올해 들어 68.8%로 다시 점유율을 큰 폭으로 늘렸다. 한국 네슬레가 지난해 침체된 커피시장을 살리기 위해 판매위탁 등 변화를 하는 과정에 노조 등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마케팅이 위축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파생상품인 커피믹스의 경우 시장경쟁이 치열하다. 지난 99년 73.8%였던 동서식품의 시장점유율은 지난해 76.6의 부드러운 맛을 유지하면서도 커피의 풍부한 맛과 향을 입안 가득히 느낄 수 있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골든 모카”, 그리고 카페인의 자극은 자연스럽게 없애고 천연 커피 향은 그대로 느낄 수 있는 테이스터스 초이스 “디카프”가 존재한다.# 분석상품 구색 면에서 비교해 보면 “맥심”이 “테이스터스 초이스” 보다 종류 면에서 우월하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맥심의 상품이 초이스의 상품보다 먼저 발매되었다는 점에서 본다면 초이스는 영락없는 후발주자로 판단 될 수 밖에 없다. 소비자의 취향에 따라서 선택할 폭을 넓혔다는 점에서 “맥심”이 상품구색 부분에서 앞서고 있다.3) 상품 디자인두 브랜드 모두 상품 종류가 똑같으며, 각각의 포장, 색깔 등이 매우 유사하기 때문에 “맥심”과 “테이스터스 초이스” 커피 간의 상품 디자인에서는 큰 차이점을 발견하기 힘들다. “오리지날” 커피의 경우 맥심과 테이스터스 초이스 모두 빨간색 포장용기를 사용하는데, 맥심보다는 테이스터스 초이스의 색깔이 훨씬 더 짙으며, 외국 모델의 얼굴이 제품용기에 인쇄되어 있다. 여기서 외제 브랜드라는 점이 다시 한번 돋보이다. 병의 모양 역시 맥심보다는 테이스터스 초이스의 형태가 더 굴절성이 있어 부드러워 보이다. 이와 같은 약간의 차이성은 모든 종류의 제품에 해당되며 그 외 “모카커피”는 두 브랜드 모두 옅은 브라운 톤을, “디카페인 커피”의 경우 녹색을 사용하여 상품 디자인에서는 비교의 의미를 두기가 어렵다4) 점포 입지 (진열위치)맥심과 테이스터스 초이스의 매장 내 진열위치는 면적이나, 진열된 높이에서는 큰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다. 대부분의 가게에서 상품 진열 시 같은 종류의 커피끼리 나란히 위치시키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오리지날”커피의 경우, 맥심과 테이스터스 초이스 상품을 같은 매대에 나란히 진열 시켜놓았다. 이는 다른 종류”디카페인”커피나, “모카”커피에도 적용되며, 각 브랜드의 행사 시에도 매장의 중심부분을 번갈아 사용함으로써 진열위치에서는 어느 한 브랜드의 제품이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트 커피 시장을 겨냥한 것이기 때문에 동서식품은 주로 고급 인스턴트 커피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전략을 실행하였다. 경쟁 대비기에 동서식품은 기업이미지강화와 상표경쟁력강화를 목표로 하여 마케팅 활동을 수행하였다. eq oac(○,3) 맥심의 상표 애호도 강화1980년에 판매가 시작된 맥심은 매년 판매가 증가해 1988년의 생산은 3000톤에 이르렀다. 맥심은 시판 이후 계속적으로 시장점유율 1위의 위치를 지속해 왔다. 맥심의 판매증가의 이유는 고급 커피에 대한 소비자의 기호의 증가와, 동서식품의 지속적인 마케팅 활동에 이유가 있다고 할 수 있다c) 과점적 경쟁기(1989.11 ∼ 1993.2) eq oac(○,1) 경쟁자의 등장 후 동서식품의 마케팅 전략1989년 11월 한국 네슬레는 주력제품으로 고급 냉동건조 커피인 네스카페 골드블랜드와 테이스터스 초이스를 앞세워 시장에 진출하였다. 경쟁사 제품의 특성 및 전략과 그에 따른 동서식품의 전략 변화는 아래와 같다.네스카페 골드 블랜드테이스터스 초이스제품특성● 깊고 풍부한 맛의 고급 냉동건조 커피● 부드럽고 세련된 맛의 고급 냉동건조 커피목표시장● 최고급 커피를 원하는 소비자● 커피의 품질을 중시하는 소비자● 수입커피 사용자● 고급 취향 소비자● 상류사회 생활지향● 25∼35세의 여성● 커피의 품질보다는 상표 이미지를 중시하는 소비자위상정립● 정통 커피의 깊고 풍부한 맛과 향을 제공하는 최고급 커피● 부드러운 맛과 향을 제공하는 세계적인 커피표 SEQ 표* ARABIC1 경쟁 제품의 특성과 전략기존의 전략새로운 전략목표시장확장시장방어기본전략● 제품 다각화● 커피문화 정착● 제품 이미지 유지● 신제품 도입표 SEQ 표* ARABIC2 경쟁자의 등장 전과, 등장 후의 동서식품의 마케팅 전략동서식품은 강력한 경쟁자의 시장확장에 맞서 기존의 매출액을 유지하는 시장방어를 목표로 한 마케팅 전략을 수행해 나갔다. 동서식품은 기존의 제품인 맥심과 맥심 모카골드의 매출수준을 유지하기 위해 소비자들이 가지고 있던 제품에 고를 계속할 계획이다.b) TV광고네슬레의 커피광고 중 소비자들의 상기도가 가장 높은 광고는 이영애를 모델로 한 테이스터스 초이스의 광고일 것이다. 이 광고는 지적이고 아름다운 이미지의 이영애를 모델로 하여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젊은 여성이 열심히 일하던 도중 커피를 마시면서 “부드럽다, 마치 실크처럼.”이라고 말하며 마지막으로 “나의 선택, 나의 초이스”라는 문구로 끝을 맺었다. 이 광고는 ‘테이스터스 초이스’라는 다소 긴 제품명을 ‘초이스’로 간단히 줄였으며 초이스라는 영문단어의 뜻을 이용, ‘나의 선택, 나의 초이스’라고 이중 반복함으로써 소비자들의 기억 속에 쉽게 저장되도록 하였다.또한 이영애가 일하는 모습 도중 실크 옷을 펼쳐 보이는 또 다른 광고 속의 모델의 모습을 이용,“부드럽다, 마치 실크처럼”이라고 말함으로써 부드러운 이미지의 주변단서인 실크를 이용, 제품의 이미지로 전환시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이는 부드러운 실크를 광고 속에서 보여줌으로써 소비자들이 제품을 볼 때마다 실크의 이미지를 떠올리도록 하는 고전적 조건화의 방법을 이용한 것이라 하겠다.이 광고가 특히 중요한 까닭은 이후 네슬레의 광고전략이 이 광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광고 속에서 제시되는 주변단서들 - 세련된 음악, 고급스러운 분위기, 자신감 있어 보이는 모델들-과 이를 이용한 감성적 소구 방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현재에도 모델들이 좀 더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표현이나 기법 면에 있어서는 이 광고보다 낮은 수준의 광고가 많다.이러한 광고전략은 젊은 층에 있어서는 어느 정도 성공적이라 할 수 있겠으나, 30대 이후의 소비자들에게는 자아관련성이 몹시 낮게 느껴지는 광고만을 내보냄으로써 30대 이후의 소비자들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하고 있음이 가장 큰 약점이다. 또한 광고 속 모델들의 모습이 지나치게 서구적인 것도 큰 약점이다. 테이스터스 초이스 광고 속 이영애는 해외에서 일하고 있으며, 네스카페 광고 속의 배경도 지나치게 고급스럽다^;;
    경영/경제| 2003.12.18| 16페이지| 1,000원| 조회(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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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자금성과 경복궁 평가A+최고예요
    제 1 장 : 자금성, 경복궁을 향하여..중국의 명나라와 청나라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모든 역사를 함께 하며 지켜본 자금성.. 이러한 중국의 정궁인 자금성에 대해 알아보고 막연히 자금성에 비해 훨씬 작다고만 느껴지는 조선의 정궁 경복궁과도 비교해 보고자 한다. 또 자금성의 화려한 건물과 내부에 대해 조사해 보고 거기서 생활했던 황제들의 생활도 살펴보자..본격적으로 내부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 자금성과 경복궁의 역사와 개관에 대해 알아보고 들어가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문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자.제 1 절 : 역사자금성과 베이징의 역사 : 베이징과 더불어 자금성과 관련된 역사는 춘추전국 시대(기원전 8세기∼3세기경)에 연나라 수도가 이곳에 있었던 것에서 시작되나, 연나라는 수많은 나라 중 변방의 일개 나라에 불과했고, 연나라 멸망 후에도 중국 변방의 한 도시로서만 명맥을 유지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보통은 거란족의 요나라가 수도로 정했던 기원후 10세기경부터 등장한 것은 몽골제국이 중국을 지배하며, 베이징에 입성(1272년)한 후부터이다. 징기스칸의 손자인 세조, 쿠빌라이는 베이징의 이름을 대도(大都)라 칭하고 입성 몇 년 전부터 요·금 시대의 건축물을 모두 헐어버리고 그보다 몇 배 큰 규모의 성을 건설하였는데 이 대도성이 중국에서 활약했던(1275∼1292년)마르코폴로가 쓴 에 나오는 칸의 도시라는 뜻의 '칸발룩'이다. 대도성은 나중에 명나라 때 지은 베이징성과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다. 그렇지만 초원에서 말달리며 살던 이 원나라는 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자수성가의 표본인 한족출신의 주원장1)에 의해 다시 삭막한 북쪽으로 쫓겨나고 말았다.명나라와 자금성 : 주원장은 '빛'을 뜻하는 명(明)을 국호로 정하고 새 왕조의 시작을 선포했다. 당시 중국은 대원정과 반복되는 전쟁으로 몹시 피폐해 있어서 인구가 겨우 5천만 밖에 되지 않았다. 이는 150년 전의 인구보다 적은 숫자였다. 연호가 홍무제인 주원장은 나라를 일으킬 준비를 했던 곳(금릉-지금의 난징)에 수도를 있다. 또한그림 위에서 본 자금성-자금성 금지된 도시19p천제가 살던 천궁에는 1만 칸의 방이 있었다고 하는데, 황제는 지상의 천자이었기에 9,999칸까지 지을 수 있었다. 그래서 통상 9,999칸의 방이 있다고 하나 실제로는 8,707칸의 방이 있다. 또한 자금성은 크기뿐만 아니라, 건축물의 배치가 절묘한데 특히 중심부에 있는 전삼전(보화전, 중화전, 태화전)과 후삼궁(곤녕궁, 교태전, 건청궁)의 막힘 없는 배열은 감탄이 절로 나오게 한다. 개관이태조는 새로운 궁궐을 완성한 뒤 정도전으로 하여금 새 궁궐의 이름을 짓도록 하였다. 정도전은 『시경(詩經)』「주아(周雅)」의 한구절인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불렀으니 군자 만년에 큰 경복일러라"에서 경복(景福)을 따, 경복궁이라는 이름을 탄생시켰다. 임진왜란때 왜병과 난민에 의해 불에 탄 것을 고종때 흥선대원군에 의해 완성시킨 경복궁은 궁성의 길이가 1,762간에 달했으며, 문은 광화문 건춘문, 영추문, 신무문의 사대문이 중건되었다. 궁성 내에 경영한 전각은 합하여 7,225칸이었고, 궁성 밖에 경영한 후원에는 489칸의 전각이 들어섰다. 태조 창건 당시의 경복궁의 규모는 왕궁으로서는 그리 크지 않은 것이었다. 에서는 '총 390여 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중건된 경복궁의 규모는 궁성둘레 1,813보, 높이 20 여척, 규모 7,814칸으로 증축되었다.제 3 절 : 천안문그림 http://sookmyung.ac.kr/ 천안문천안문은 명나라 황제였던 영락제가 1420년에 완공한 후, 최초의 이름은 승천문(承天門)이었으나 그후 소실된 것을 1651년 청나라에서 재건하여 '천하를 편안하게 하다'라는 뜻의 천안문(天安門)으로 개칭하였다. 베이징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며 5개의 별이 천안문을 비추고 있다고 한다. 그 비교가 간단치 않지만 자금성을 서울의 대표적인 궁궐인 경복궁에 비교한다면 광화문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는데, 청나라 말기까지의 베이징성의 옛 모습을 고려해보면, 천안문은 황성의 정문이었고 자금급제한 자들이 합격증을 받고 퇴장할 때만 지나갈 수 있었다. 오문을 통해 궁궐 안으로 들어가면 길이 200m, 폭 130m의 뜰이 펼쳐진다. 이 뜰을 가로질러 금수하(金水河)라는 하천이 흐르며 하천에는 유교에서 가르치는 다섯가지 덕7)을 상징하는 다섯 개의 다리, 내금수교(內金水橋)가 놓여 있다. 다리를 건너 뜰안으로 들어가면 태화문(太和門)이 3단의 흰 대리석 기단 위의 널찍한 테라스에 우뚝 솟아 있다. 태화문을 중심으로 궁궐의 동서 양끝에는 궁궐의 측면 문인 동화문(東華門), 서화문(西華門)이 있다. 정문 - 흥례문(興禮門)조선 초 경복궁 지도에는 흥례문이 정문으로 표기돼 있다. '경복궁 전도' '궁궐지' 등 초기의 그림이나 책자에는 홍례문(弘禮門) 이라 기록하기도 했는데 경복궁 복원은 고종 당시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흥례문으로 표현한다. 청대 건륭제(乾隆帝) 의 이름이 '홍력(弘歷)' 이었는데 홍례문의 명칭은 황제의 이름자를 피하기 위해 홍(弘) 을 흥(興)으로 바꿨다고 전해진다. 광화문과 근정문의 남북 중심 축에 자리잡고 있으며 2층 건물로 아래, 위층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이었다. 이러한 흥례문이 1910년 일제 통치에 접어들면서 훼손되기 시작해 조선총독부가 '시정(施政) 5주년 기념식' 을 경복궁에서 열면서 상당 부분이 철거됐다. 이어 1916년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서면서 흥례문을 비롯한 행각(行閣) 등이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정부가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난 뒤 97년에 시작한 흥례문 일대 복원공사가 2001년 끝나 마침내 85년만에 부활하게 되었다. 일제의 말살정책에 의해 옛 모습을 잃었던 경복궁 전체가 서서히 복원되는 과정에서 정문(正門) 을 되찾는 것이다. 조선조 정궁(正宮) 인 경복궁에는 고대 동양의 법제에 따라 모두 3개의 대문이 있었다. 바깥쪽을 대표하는 광화문과 경복궁 전체의 대문인 흥례문, 조례(朝禮) 가 행해지던 근정전의 출입구 근정문 등이다. 보통 궁 바깥에서 근정전으로 출입할 때에는 광화문과 흥례문, 근정 앉는 자리 =옥좌)가 있는 뒤쪽편은 높고 전(殿)의 전면편은 낮도록 물매지어 있다. 이는 전내이지만 어좌가 높이 우러러 보이도록 하려는 의도에서 시공된 것이다. 천장에는 소란반자인데 그 한가운데 쌍봉(雙鳳)보주(寶珠)가 섬세하고도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고 , 황금빛의 용 두 마리가 여의주를 가운데 두고 희롱하는 이른바 이룡희주(二龍戱珠)의 형상이 눈에 들어온다.제 3 절 : 중화전&보화전중화전과 보화전은 태화전과 더불어 대외적인 공식행사, 의식을 치르던 전삼전 중 두 곳으로 태화전의 보조역할을 했던 곳이다.중화전의 외관-자금성 금지된 도시 47p중화전 : 중화전은 태화전과 마찬가지로 터의 중앙에 세워진 가로 세로 가각 16m인 정방형의 궁전이다. 황제는 태화전의 옥좌에 오르기 전에 이곳에 와서 준비를 하며, 대신들이나 사신들을 개인적으로 만날 때도 이곳을 이용했다. 또한 계절맞이 예식을 거행할 때나 사원에서 조상과 신들에게 제사를 드릴 때 낭독하는 황제의 조서들도 모두 이곳에서 작성되었다. 1년에 한 번씩, 농업의식을 행할 때 필요한 농기구들과 새로운 종자들을 군주와 왕자들과 고위대신들에게 소개하는 일도 중화전에서 행해졌다. 마지막으로 청의 황제들은 10년마다 한 번씩 이 곳에서 황족 혈통의 족보를 검토하는 일을 거창하게 벌이곤했다.보화전 : 세 번째 공식 궁전인 보화전은 태화전과 같은 설계로 만들어졌다. 만주의 군주들은 이 곳에서 새 사위를 맞아들이는 성대한 잔치를 베풀었다. 음력 정월 초하루와 보름에 터키와 몽고의 봉신 왕족들을 영접하기 위해 벌이는 연회도 이곳에서 이루어졌는데 1903년에는 그 행사를 위해서 양 1만마리를 잡았을 정도이다. 황제의 도서관에 보관하기로 되어있는 황제 칙령의 편집물들도 이 궁전에서 소개되었다. 1789년부터는 관료를 모집하기 위해 3년에 한 번씩 열리는 임시회시인 은과(恩科)의 입상자들을 이곳에 불러들여 고위 행정직에 임명하기 전 마지막 구두시험을 보았다. 황제가 집무를 보는 이 외조의 궁전들에는 결혼식날의 황후를 제외하고는 이 강녕전을 들어야 한다. 이곳에서 왕은 평상시 독서나 사색을 즐기기도 하고, 왕실 종친들이나 신하 등을 만나기도 하였다. 강녕전에서는 잔치도 하였다. 왕은 통치자이면서 한 집안의 가장이기도 하였다. 가장으로서 왕은 때때로 왕실 종친들을 모셔다가 잔치를 베풀었다. 왕비나 세자가 생일을 맞으면 잔치를 벌이기도 하였다. 강녕전에는 넓은 대청 마루와 시원하게 펼쳐진 월대가 있었는데, 이 곳에서 왕은 잔치를 벌였다.그림 교태전의 외관 -경복궁에서의 하루-교태전 : 경복궁의 중심축에 일직선으로 배열되어 있는 건물들 가운데 마지막이 교태전이다. 강녕전의 뒤로 가면 양의문이 나오는데 교태전은 그 문 안에 있다. 강녕전이 왕의 침전이라면, 교태전은 왕비의 침전이자 시어소다. 왕비는 공인이다. 따라서 궁궐 안에 살면서 내명부를 비롯한 여러 층의 여인들을 처리하는 일 등 업무가 적지 않다. 또한 특이한점은 교태전에는 용마루가 없다. 왕은 용이기 때문이다. 교태전은 다음 대를 이을 용을 생산하는 곳이므로 용이 위에서 이를 내리 누르면 안 되기 때문에 용마루를 설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건은 하늘, 남자, 밝음, 위로 솟음을 상징한다. 괘는 땅, 여자, 어두움, 아래로 가라앉음 등을 상징한다. 불합리하다. 이것은 지나치지 말고 서로 합하라는 것이다. 교태전에 들어가는 문 이름도 "교합"이다. 남녀가 서로 만나 생산을 잘 하라는 뜻이 있다. 교태전 가장 은밀하고 중심부에 있는 이 곳이 중전이다.제 2 절 : 자금성 < 양심전 >건청궁의 서쪽, 서육궁의 남쪽에 있는 양심전은 명나라 영락제때 건축되어 1722년에 대대적인 수리를 거친 후, 옹정제부터 선통제까지 8명의 황제들 침전으로 정무도 보면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곳이다. 따라서 여러 황제들의 체취가 가장 많이 남아 있으며 서태후가 오랫동안 수렴청정을 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도 역시 옥좌와 천장의 조정, 향로 등과 함께 황제가 옥좌에 앉아 정무를 처리하고 대신들을 접견하던 곳이 마련되어 있다. 그 외에도 양심전 서난각에는 외진 다.
    인문/어학| 2003.06.21| 17페이지| 1,000원| 조회(2,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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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학] 만가 평가B괜찮아요
    만가의 기원 ( 輓 수레 끌 만. 歌 노래 가.)흔히 해로가(硏露歌)라는 명칭으로 기록에 보인다. 만가의 기원을 중국 문헌에서 찾는다면, 《고금주(古今注)》 음악에 “해로와 호리(蒿里)는 모두 장송(葬送)의 노래이다. 이연년(李延年)이 곡조를 만들어, 해로는 왕공귀인(王公貴人)을 보내는 노래, 호리는 사대부 ·서인(庶人)을 보내는 노래로 구분하고, 상여를 메는 자로 하여금 부르게 했다. 세상에서 이것을 일러 만가라고 한다”고 했으며, 해로와 호리는, 제왕(齊王) 전횡(田橫)이 한(漢) 고조(高祖)의 부름을 받아 가다가, 시향(尸鄕)이라는 곳에서 한나라에 항거하여 목찔려 죽으니, 그의 신하가 시신을 호송해 돌아가면서 슬픔을 견디지 못하며 지은 것이라고 한다. 한국에서 만가를 해로가로 부르는 동기도 여기에 있다.만가의 종류* 대도둠소리 : 출상 전날 밤에 빈상여를 메고 친척집 등을 돌며 추렴을 하거나 상가에서 사위 등을 태우고 놀리면서 하는 소리.* 장례밤샘소리 : 출상 전날 밤에 초경(初更)부터 오경까지 1경(두시간)마다 때를 맡춰 상두군들이 상여를 메고 하는 소리.* 장례밤샘노래 : 출상 전날 밤에 동네 놀이패가 연희를 벌이면서 부르는 노래. 유흥민요의 성격을 띤다.* 발인축원(發靷祝願)소리 : 상여가 나가기 직전에 고인의 명복을 빌면서 하는 소리.* 운구(運柩)소리 : 장례일에 관을 상여까지 운반하면서 하는 소리.* 상여소리 : 상두꾼들이 상여를 장지까지 메고 운반하면서 하는 소리.* 무덤가래질소리 : 가래질로 묘터를 고르거나 분묘(墳墓)를 만들면서 하는 소리.* 무덤다지는소리 : 하관 후 광중에 흙과 회(灰)를 섞어 넣고 다지거나 분묘를 지어 다지면서 하는 소리.* 장례마치고오는소리 : 상두군들이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오면서 하는 소리.1. 밤샘노래출상 전날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마당에서 제자리걸음을 하면서 상여소리를 하는 것이 흔히 '대도둠'이라고 하는 초상집 밤샘 풍습이다. '대도둠'이란 '대(상여)를 '돋운다'(들어올린다.)는 뜻으로, 지역에 졌던 장례 풍습이다. 실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대도둠은 상두꾼들이 상여를 메고 갈 인원을 미리 정하고 운상 연습을 해보기 위한 것이다. 상두꾼들은 빈 상여를 메고 마당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면서 상여소리를 맞춰보곤 한다. 지역에 따라서는 상두꾼들이 빈 상여를 메고 상가를 벗어나 동네를 한 바퀴 돌면서 일가친척들 집에서 음식이나 돈을 추렴하기도 하는데 이것도 밤을 새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초상집 밤샘 풍습에는 실용적인 차원으로는 설명하기 힘든 점이 있다. 먼저, 상두꾼들이 이런 행사를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한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전남 고흥에서는 상두꾼들이 초경(初更)부터 오경(五更)까지 두 시간 단위로 '경 아뢰는 소리'를 다섯 번 했다. 초경은 저녁 7~8시, 오경은 새벽 5시~6시다. 이때 하는 소리는 상여소리를 그대로 하는 경우도 있고, 별도의 노래를 부르는 곳도 있다. 이런 풍습은 실용적인 측면보다는 망인의 혼백을 위로하는 의례의 성격이 강하다.그밖에 전남 신안군 비금도에는 '밤달애' 라는 초상집 밤샘놀이 풍습이 있었다. '밤달애'란 밤을 새운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비금도에서는 사당패놀이에 가까운 놀이판이 벌어졌는데, 밤달애노래를 보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있다. 비금도 사람들은 이 노래를 옛날 사당패들이 그랬던 것처럼 소고를 들고 춤을 추면서 불렀다고 한다. 초상집에서 밤을 새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웃는 것은 유교식으로 점잖게 장례를 치르는 문화권의 사람들에게는 도무지 이해하기 힘든 풍습이다. 이런 풍습을 이해하려면 그 지역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전통적인 관념을 이해해야 한다. 사람이 살만큼 살다 죽었을 경우 그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그래서 이를 호상(好喪)이라 한다. 이때는 무조건 슬퍼할 일이 아니라 오히려 돌아가신 망인의 영혼을 즐겁게 해드려야 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생각이었다. 그래서 상주들까지 합세하여 즐거운 놀이판을 벌이는 것이다.어따 저놈의 가스낙년아 머리만 긁적 말고 밥 잘 하라야밥솥에 이가 떨어져서 굼실고 지그네자근저 건너 솔폭 밑으로 잠자러 갈고나 헤헤헤야헤잠자러 가세 잠자러 가세저 건너 솔폭솔포기 밑으로 잠자러 갈고나 헤헤헤야헤어드로 가자고 날 조르냐 어드로 가자고 날 조르냐 야서천에 개주개주도로* 술병 장사 갈고나 헤헤헤야헤술병장사 가세 술병장사 가세서천에 개주개주도로 술병장사 갈고나 헤헤헤야헤* 서천은 충남의 지명. 개주도는 그 부근의 섬인 듯하다.노래 곡조도 매우 흥겹고, 보다시피 노랫말도 매우 난잡하다. 비금도에서 이런 노래를 부를줄 아는 분들은 지금 모두 팔십이 넘은 할머니들 이라고 한다. 바닷가의 여자들이 활달하다고는 하지만 초상집에서 여염집 여자들이 소고를 두들기면서 이런 노래를 불렀다는 것은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호상일 때는 즐겁게 잘 놀아주는 것이 망인을 위하는 일이라는 공통의 의식이 없었다면, 초상집에서 사당패 공연을 벌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조기잡이로 유명했던 연평도에는 또 다른 초상집 밤샘 풍습이 있었다. 연평도의 상두꾼들은 신안에서처럼 공연을 벌이지는 않았지만 상여가 떠나기 전까지 며칠이고 밤을 새면서 노래를 불렀다. 고인의 넋을 위로하는 내용의 '느시랑타령'이 그것이다.♬에헤야아헤 에헤야 느시랑거리고 왜 왔댔나불쌍하고 가련도하다 돌아가신 맹인망인(亡人)이 불쌍하다저승길이 멀다고 해도 대문 밖이 저승일세언제 오려나 언제나 오시려나 우리나 부모님 언제 오시려나사롱살강. 음식이나 그릇을 넣어두는 부엌 선반 안에 삶은 팥이 싹이나 나면 오시려나평풍 안에 그린 수탉 날개나 치며는 오시려나세월 청춘아 가면 너 혼자 가지 아까운 청춘을 왜 데리구 가나느시랑거리고 왜 왔댔나? 죽는 것이 이토록 서럽고 가슴 아픈 일인데 사람은 왜 이세상에 태어난 것인가? '느시랑거리다'의 낱말의 뜻은 알 수 없지만, 인생의 무상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노래다.2. 상여소리만가는 구전민요로는 드물게 아직도 그 기능이 살아있는 민요이다. 물론 도시에서는 그마저 사라지고 없지만, 시골에서는 장지가 아주 멀지만 않으면 대부분 상여로 운구를 하는 경우가 많다. 망인을좋은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상여는 망자를 저승으로 모시는 가마이다. 옛날에 귀한 사람들을 가마에 태워 모시고 신랑 신부를 가마에 태워 보냈듯 망인을 저승으로 모시는 데도 가마가 필요하다. 상여를 꽃과 구름무늬로 장식하는 것도 망인을 극락으로 인도하고자 하는 뜻에서 이다. 상여를 메기로 결정하고 나면 상여소리 메길 앞소리꾼을 모셔와야 한다. 옛날에는 어느 마을이든 앞소리꾼이 있었지만 지금은 읍이나 면 단위에 앞소리꾼 한 두 사람만 있어도 다행일 정도로 소리꾼이 귀하다. 상여소리는 지방마다 어느 정도의 특색이 있지만, 농요만큼 확실하게 지역색을 띠지는 않는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상여소리는 '어이가리 넘차' 또는 '어나리 넘차' 소리로 충청도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 널리 퍼져있다. 하지만 곳에 따라서는 매우 특이한 상여소리를 하는 곳도 있다.강원도에서는 처음에 발인을 하면서 느리게 '미리미리 타불' 소리를 하고 본격적으로 운상을 할 때는 '어이넘차' 소리를 하는 것이 보통이다. 상여소리가 발달한 평야지대에 비해 노래의 가짓수도 적고 가락도 단순한 편이다. 강원도의 언어나 음식이 그런 것처럼 상여소리도 소박하다. 하지만 강원도 영동의 중심지인 강릉에는 특별히 음미할 만한 상여소리가 남아 있다저승길이 멀다더니 대문 밖이 저승일세오오오 해 넘어간다만장 같은 집을 두고 북망산천 찾어가네오오오 해 넘어간다친구 하나 삼었더니 술만 먹고 잠만 자네오오오 해 넘어간다나비 나비 호랑나비 날과 같이 청산 가세오오오 해 넘어간다이팔청춘 소년들아 백발 보고 웃지 마라오오오 해 넘어가네이것은 상여가 천천히 평지를 갈 때 하는 소리다. 앞소리꾼이 노래를 내놓으면 다른 상두꾼들이 곧 함께 따라 부른다. 후렴구에 해당하는 "오오오 해 넘어가네"하는 표현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사람이 죽었다는 것을 뜻하는 표현으로는 매우 문학적이다. 또한 앞소리 세 번째 구절인 "친구하나 삼었더니, 술만먹고 잠만 자네...."에서는 북망산천을 떠나가는 망자를 술 마시고 잠자는 친구로 비유하고 있다. 생사이 나비를 벗삼아 훌훌 떠나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강원도의 민요는 사람들의 심성을 닮아 모두 소박하고 단순한 것이 특징이지만, 강릉시 유천동의 상여소리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인생의 허무함과 이별의 슬픔이 문학적으로 승화되어 있는 예술이라 하겠다.충남의 상여소리는 '어허이 어호' 계통이 대부분이지만, 역시 곳에 따라 특이한 상여소리가 있다. 논산의 '짝소리'가 그중 하나이다. 짝소리란 상두꾼들이 두 패로 나뉘어 한 절씩 번갈아 부르는 가창방식을 말한다. 상여소리를 짝소리로 부르는 곳은 충남 공주.논산.부여 군과 전북의 일부 지역이다. 짝소리를 하는 두 패로 나뉘어 상여 앞뒤에 들어서서 상여를 멘다. 일반적인 상여의 상두꾼들은 상여 좌우에서 상여를 멘다. 앞 뒤 두 패로 나뉘어 메는 상여는 "방맹이상여"라고 하여 상여 앞뒤에 가로로 굵고 긴 통나무를 댄다음 여기에 방망이를 가각 세 개씩 대고 방망이 하나에 두 명씩, 앞뒤로 각각 6명이 들어서서 멘다. 짝소리는 앞뒤의 상두꾼들이 번갈아 한절씩 부른다.♬헤리 가자 허허허하 어허하 어허하가세 가세 어서 가세 이수 건너 백로 가자*갈까 말까 망성거리다 내친 걸음에 도망질 한다남문을 열고 바라**를 치니 계명 산천 다 밝아온다오작교 다리가 더덜썩 무너져 건너갈 길 막연하다죽장 망혜대지팡이와 짚신 단표자표주박하나 로 천리강산 들어를 간다시내 갱변 종조리새종달새는 천질 만질 구만질 떴다신산 구산 다 버리고 명산대천 찾어를 간다우불퉁구불퉁 저 남산 보아라 우리도 죽으면 저 모양 된다청소난뎅이마을이름 막걸리 장사 목이 말라서 나 못살것다앞에 가는 행자들아 너희에 산소 어디메냐* 이백의 시 구절인 '이수중분백로주'(二水中分白鷺洲)에서 나온 말이다.** 파루(罷漏). 새벽에 종을 쳐서 서울 도성의 통행금지를 해제하던 일.짝소리는 논매는소리에도 있으므로 가창방식 자체는 그리 낯설지 않다. 하지만 상여소리로 부르는 짝소리는 발을 맞추어 걸어가면서 부르기 때문에 듣는 사람도 함께 흔들거리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만일 상여에 누워있는 망인이
    인문/어학| 2003.05.31| 6페이지| 1,000원| 조회(1,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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