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가“Bramante, Donato, Tempietto”학 번 :성 명 :1. 시대/역사적배경일반적으로 르네상스란 학문 또는 예술의 재생·부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프랑스어의 renaissance, 이탈리아어의 rina scenza, rinascimento에서 어원을 찾을 수 있다. 고대의 그리스·로마 문화를 이상으로 하여 이들을 부흥시킴으로써 새 문화를 창출해 내려는 운동으로, 그 범위는 사상·문학·미술·건축 등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다. 5세기 로마 제국의 몰락과 함께 중세가 시작되었다고 보고 그때부터 르네상스에 이르기까지의 시기를 야만시대, 인간성이 말살된 시대로 파악하고 고대의 부흥을 통하여 이 야만시대를 극복하려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르네상스 운동은 14세기 후반부터 15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이 통설인데, 이 운동은 곧 프랑스·독일·영국 등 북유럽 지역에 전파되어 각각 특색있는 문화를 형성하였으며 근대 유럽문화 태동의 기반이 되었다. 이때의 르네상스 외에도 문화부흥 현상이 보인 기타의 시대에 대해서도 이 용어를 사용하는데, 카롤링거 왕조의 르네상스, 오토 왕조의 르네상스, 12세기의 르네상스, 상업의 르네상스, 로마법의 르네상스 등이 이에 속한다. 르네상스라는 개념 형성은 이미 그 시대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르네상스 사상의 기본요소는 F.페트라르카가 이미 설정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고대를 문화의 절정기로 보는 반면, 중세를 인간의 창조성이 철저히 무시된 ‘암흑시대(Dark age)’라고 봄으로써 문명의 재흥(再興)과 사회의 개선은 고전학문의 부흥을 통하여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생각은 당시 인문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크나큰 확신이기도 했는데, 이들은 단순한 라틴 학문의 부흥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지적(知的)·창조적 힘을 재흥시키려는 신념에 차 있었다.당시 L.브루니는 자기 시대의 학문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하였고, 16세기의 미술가 G.바자리는 저서 《이탈리아의 가장 뛰어난 화가·자는 스위스의 문화사가 J.부르크하르트라고 할 수 있다2. Background of Bramante(b. near Urbino. italy 1444 ; d Rome, italy 1514)부유가정에서 태어난 브라만테에 대해서는 뚜렷한 성장기록이 없다 특히 1477년까지의 생애와 작품에 관해서는 거의 알 수 없으나, 페데리코 다 몬테펠트로 공(1482 죽음) 치하에서 매우 중요한 인문주의의 산실이 된 우르비노에서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조수로 일했다고 추측되고 있으며 1477년에는 베르가모에서 건축물에 사실적인 벽화를 그리는 화가로 일하였던 기록이 있다.1477년 롬바르디아 시대 브라만테는 우르비노를 떠나 북부 이탈리아에 있는 롬바르디아에 정착했다. 이후 베르가모에 있는 포데스타 궁전 정면에 프레스코를 그렸는데, 이것은 복잡한 건축 배경 속에 고전 철학자들의 모습을 배치한 그림이었다. 브라만테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별로 보수도 좋지 않고 가치도 없는 일"을 한 뒤 "밀라노 대성당"을 보기 위해 밀라노에 갔다. 이탈리아·독일·프랑스 출신의 공예가들이 교대로 일하던 대성당 작업장은 지식과 설계방법, 기술을 교환할 수 있는 중요한 중심지 역할을 했다. 더욱이 밀라노는 크고 부유한 대도시이자 '일 모로'라고도 불리는 루도비코 스포르차 공이 다스리던 공국의 수도로서 르네상스 건축이 흘러들어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이유로 이 도시는 브라만테 같은 젊은 건축가에게 무한한 가능성을 약속하는 곳이었다.최초의 건축작품은 1장의 스케치로 남아 있다. 1481년 밀라노의 조각사인 베르나르도 프레베다리가 브라만테의 밑그림을 보고 만든 판화로, 인간 군상이 있는 폐허가 된 신전을 나타낸 것이다. 이 시기에 브라만테는 "산타마리아프레소산사티"로 교회를 짓고 있었다. 이것은 확실히 그가 설계한 것으로 추정되는 최초의 건축물이며 지역 색채를 충실히 드러내면서도 알베르티·만테냐·브루넬레스키와 우르비노 학파의 영향을 받은 흔적을 보여준다. 우르비노 학파의 영향은 특히 성가대석에 뚜렷이 나았다. 16세기의 여러 작가에 따르면 그가 그린 작품이 많다고 하나 보존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듯하다. 키아라발레 대수도원에 있는 〈기둥 위의 그리스도 Cristo alla colonna〉(1490경, 지금은 밀라노의 브레라에 있음)는 그의 것으로 생각되는 단 하나의 이젤 그림이다.1499년 9월 프랑스가 밀라노를 점령한 이후 브라만테는 성년(聖年)인 1500년을 기념하기 위해 라테라노에 있는 산조반니 교회 그림을 그린 것을 비롯해 로마에서 여러 가지 계획에 처음부터 활발히 참여했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전속 건축가로서 트라스테베레의 산타마리아 광장과 산피에트로 광장의 분수를 만든 것으로 추측되며 몇몇 건축 자문위원회에서 일했다. 한편 나폴리의 부호이자 정치적 영향력이 컸던 추기경 올리비에로 카라파를 알게 되었는데, 카라파는 문학·예술·골동품에 깊은 관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카라파는 로마에 있는 브라만테의 작품 가운데 최초의 것으로 꼽히는 산타마리아델라파체의 수도원과 클로이스터(1504 완공)를 맡겼다. 1502년 브라만테는 산피에트로인몬토리오 교회에 '템피에토'라고 알려진 작은 교회를 지은 것으로 보이는데, 이 자리는 성 베드로가 십자가에 못박혔다는 곳이다.1503년 10월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선출되자 브라만테의 작업도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어 웅장하고 성숙된 양상을 보였다1505년 브라만테는 거대한 벨베데레 궁전을 설계하였다. 이는 구(舊)바티칸 궁전의 중심부를 북쪽으로 확장하여 기존의 인노켄티우스 8세의 저택과 연결시킨 공사였으며 율리우스 2세가 죽고 1514년 브라만테 자신이 죽을 때까지도 완공되지 않았다.1505년초 그는 그때까지 인류역사에서 가장 야심찬 건물 계획 중 하나이자 가장 위대한 그의 작품인 로마의 새로운 성베드로 대성당을 계획했다. 그는 웅대한 규모의 성베드로 대성당 공사를 진행하면서도 소규모 작업을 계속했다. 1505~09년에 산타마리아델포폴로 교회의 성가대석 증축과 카스텔 산탄젤로의 일부 건축작업, 로카 디 비테르보의 개수작업을 했구에서 확장시켰다. 그밖에 오래된 중세도시 구역 안의 몇몇 거리를 바꾸었다. 또한 줄리아가에 거대한 트리부날리 궁전(1508)을 설계하고 산비아조 교회(1509)와 연결했다. 산비아조 교회는 16세기 건축의 전형으로 주목할 만하다. 브라만테는 종합계획의 틀을 따라 항구의 밑바닥을 더 깊이 파고 치비타베키아에 해양요새를 세웠다. 바티칸 궁전의 서쪽 정면 역시 그의 설계에 따라 지어졌으나 후에 라파엘로가 맡아 완성시켰다. 율리우스 2세가 죽은 후에도 교황 레오 10세의 총애를 받았으나 몸이 쇠약해져 1514년 죽고말았다.3.주요작품- 성사티로 교회[1482]- 산타마리아 델라크라치에 성당[1492~1497]- 산타마리아 델라파체 수도원[1504]- 템피에토[1504]- 바티칸 궁전 벨데데레(1505]- 성베드로 대성당[1506]4. 템피에토(Tempietto)4-1. 템피에토의 건립목적그림 1. 도나토 브라만테,, 로마, 1502.르네상스 원형구조건축(rotunda)의 고전인 템피에토(Tempietto),(그림1과2)는 고대 로마의 원형열주식 신전(peripteral temple)을 재생함과 동시에 순교 기념물이라는 새로운 기능을 충족시키기 위해 새로운 형식을 창조해낸 르네상스 정신의 전형으로서 의미를 가진다.그림 2. 세를리오,, 신전과 안뜰 평면도, 1551, 목판드로잉템피에토는 로마의 테베레강 저편 쟈니콜로라는 언덕에 위치합니다. 이 언덕에서는 로마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언덕의 정상에는이탈리아 통일의 아버지인 가리발디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가리발디 동상에서 템피에토로 가는 길에는 넓은 공원이 펼쳐지는데, 이곳에 도리아 판필리 별장과 근처에 성 판크라찌오 성당이 있고 성당의 지하에는 카타콤이 있습니다. 또한 템피에토 뒤쪽으로 조금 올라가면 마데르나가 세운 아쿠아 파올라 분수가 주변 환경에 생명수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로마 물줄기의 근원이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샘으로 되어 있다.템피에토는 산 피에트로 몬트리오 성당안에 위치한 성소이미 일반화되어 있다. 티볼리에 있는 시빌 신전(Temple of the Sibyl or Vesta, 기원전 1세기 초), 혹은 이러한 유형에 관한 비트루비우스의 서술과 브라만테의 신전을 비교해 보면 평면도 상으로 원형이며 건물외벽은 열주회랑으로 둘러싸여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나 셀라의 직경이 원주의 높이와 일치하는 비트루비우스의 비례원칙에 어긋나고 대부분의 원형신전이 코린트 양식를 사용하는데 반해 템피에토는 도리아 양식을 쓰고 있다.(그림 3) 그리고 고대 신전의 열주랑은 20개 이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템피에토는 16개 여서 고대의 예보다 원주간격이 좀 더 넓다. 브라만테가 고대의 유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면 적어도 수치와 비율상의 특징들을 유지하려 했을 것이다.고대신전과 비교하여 템피에토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놓은 드럼(drum)-돔을 바치고 있는 구조라기 보다는 2층으로 보인다-과 완전한 형태로 부각되는 반구형 돔이다. 이에 비하면 티볼리 신전의 드럼은 내진벽의 연장수준으로 돔의 밑 둥 주위를 받쳐주기 위한 버팀 구조이다. 여기서 기억할 점은 고대 로마의 돔양식과 르네상스의 기독교 돔을 분명히 구분하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고대 로마의 판테온 신전에서와 같이 고대의 돔은 제한된 내부공간으로서 그 공간을 음미하기 위함이었는데, 르네상스의 기독교 돔은 교회의 시각상징으로서 외부의 시선을 집중시키기 위한 규모, 높이와 프로필을 중시했다.이상에서 드럼과 돔 그리고 비율과 수치가 고대의 예와 차이를 보이는 것은 브라만테가 고대의 모형들로부터 직접 디자인을 차용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시사해준다.4-2. 템피에토 건축적 해석그림 4. 브라만테,, ‘셀라’내부 (‘코너’스케치북 드로잉 세부)템피에토는 그 이전 콰트로첸토(15세기) 르네상스의 원형, 또는 중앙집중식 건물과는 달리 고대신전과 마찬가지로 처마도리를 제대로 갖춘 열주로 에워싸인 최초의 르네상스 건물이다. 15세기 중앙집중식 성당들이 기본적으로 교회의 의식을 도모하고 집행하기 위한 공간으로 의것이다.
◎다큐멘터리(documentary)란...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다큐멘터리(documentary)는 대부분이 공익적이고 사회 비판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 우리가 자주 접하는 TV 다큐멘터리를 보더라도 그러한 프로그램들이 매우 많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전부가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현재 우리 사회에서 통속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성격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인식되어 있는 실정이다. 즉 다큐멘터리는 사람들에게 항상 어떤 교훈이나 비판적인 메시지를 주어야 한다는 그런 기대들이 많이 퍼져있는 상태이다.○다큐멘터리의 개념적 정의와 특징‘비허구적인 영화(논픽션 필름)를 가리킨다. 현장, 로케이션 촬영과 배우가 아닌 실제 인물을 대상으로 역사적, 과학적, 사회적 환경의 문제를 다룬다. 주된 목적은 관객에게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에 관한 시각을 제공하고 관객을 설득하고, 교육시키며, 계몽하는 것이다.’)다큐멘터리의 사전적 의미는 문장이나 방송 또는 영상 매체를 활용하여 제작 또는 구성한 주제와 줄거리가 있는 기록물이다.) 하지만 다큐멘터리란 그 형식과 기능, 목적에 따라 다양하게 구분되고 있기 때문에 하나로 정의하기 쉽지 않다. 다큐멘터리란 말이 처음 사전에 등장한 것은 1802년으로 '다큐멘트'(document)에서 파생되어 나온 말이다. '다큐멘트'(document)란 증거나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기록되어 있는 것 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그리고 다큐멘트(document)의 어원인 라틴어의 도체레 (docere)는 가르치다 의 뜻이다. 다큐멘트의 어원인 다큐멘툼 (documentum)은 중세 말, 권리 또는 특권을 증명하는 행위 라는 뜻의 무니멘트(muniment)를 대신해서 사용되었던 말이다. 다큐멘트 는 점차 권리 라는 추상적인 의미에서 계약을 보장하는 법적인 권리 라는 뜻으로 점차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됐다.이후 산업혁명이 일어나고 사회관계가 점점 복잡해지고 자본주의의 발달에 의한 계약관계 및 법적인 관계의 증대로 다큐멘트 라는 말은 보증서, 특허, 비망록, 요약, 세목, 법원영장 등을 총칭하는 단어로 이용됐다. 다큐멘트의 현대적 의미는 이 말이 내포하고 있는 증거 라는 총체적 의미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왔다. 다큐멘트 의 이 같은 의미는 사진기술의 발달과 맥을 같이 한다. 사진은 그 기술이 발명될 당시부터 증거를 보여주는 일종의 다큐멘트 로 받아들여져 왔다. 다시 말해 사진은 어떤 상황의 진실성을 입증할 수 있는 중요한 증거 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다큐멘터리가 사진기술의 발달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보여준다.1895년 프랑스 뤼미에르 형제에 의해 최초로 탄생된 영화는 20세기로 넘어 오면서 기존의 예술과는 다른 독자적인 개성과 형식을 갖춘 새로운 예술로 발전하게 되었고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20년대로 접어들면서 도전적이고 진취적인 작가들에 의해 새로운 영역이 개척되었는데 이것이 다큐멘터리이다.세계 최초의 다큐멘터리는 1922년 미국의 로버트 플레허티 Robert Flaherty가 만든 「북극의 나눅」(Nanook of the north)이다. Nanook 성공 이후 그는 두 번째 작품 Moana를 제작하였다. 존그리어슨은 이 작품을 보고 Moana는 기록할만한 자료로서 가치가 있다 라는 내용의 글을 New York Sun지에 기고하였는데 이글에서 다큐멘터리란 용어가 최초로 사용되었다.○객관성과 주관성다큐멘터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본질적 의미는 증거로서 객관성과 사실성에 있다. 사진이란 매체가 다른 매체들에 비해 비교적 사실적 증거로서의 의미가 부각되었기 때문에 다큐멘터리 역시 이러한 점이 가장 매력적인 요소로 존재한다. 또한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에서 이미지는 하나의 언어이며 다른 매체들에 비해 사진, 즉 영상이 갖고 있는 힘은 바로 다큐멘터리 그 자체이다. 따라서 기록성, 사실성을 가지고 있는 사진의 등장으로 다큐멘터리의 등장은 필연적이었었다.-영상으로서의 다큐멘터리다큐멘터리가 픽션과 다른 점은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꾸며진 세계가 아닌 현실과 사실을 소재로 작가의 시각을 통해 형성되는 예술형식이라는 것이다. 즉 허구가 아닌 실재하는 사람, 행동, 장소 그리고 사건 속에 담겨진 가치를 탐구하여 영상언어로 전달하는 진실의 형상화 작업인 것이다. 다큐멘터리 제작자들은 예술적인 거짓을 통해서가 아니라 신빙성 있는 사실들을 통해서 진실에 도달하려고 한다.두 번째 특징적 요소로서는 화법으로서의 전개 방식을 갖는 다는 것이다. 이는 각 단편적 영상들의 조각을 하나로 이어주기 위한 필수적인 연결방법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연출자의 스토리 적 해석이 반영되어진다.다큐멘터리는 객관과 주관, 현실과 정신, 이성과 감성의 경계 지점에서 그 작업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해서 다큐멘터리는 사실 그 자체의 단순한 전달도, 그렇다고 해서 완전한 허구적 구성도 아닌 그 가운데에서 이루어지는 현실의 사실적 구성이라 할 수 있겠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야기는 결코 생략될 수 없는 필수적 요소이다. 이때 현실 이라는 말은 지금 당장의 실재적인 것에 국한 될 필요가 없으며 미래나 과거의 것 까지를 자유롭게 포함한다. 분명한 것은 다큐멘터리란 외부 현상에 대한 내부로부터의 말 걸기 혹은 대화이며 과정이라는 사실이다. 다큐멘터리라는 단어 자체가 기록이라는 뜻의 다큐멘트 와 스토리 가 조합하여 이루어진 것을 고려할 때 이러한 정의는 더욱 그럴듯해진다.다큐멘터리 역시 누군가에 의해 형성되는 창조물이다. 다큐멘터리의 본질적인 측면이 지니는 문제들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실제 세계를 다루고 있는 ' 다큐멘터리의 사실성의 문제이다.? 다큐멘터리는 현실세계를 그 소재로 하고 있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촬영한 현실을 '재구성'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재구성이라는 것은 사실의 단편들을 새롭게 짜 맞추는 것이며, 따라서 이를 어떻게 짜 맞추는 가에 따라 역사적 사실들의 의미는 새롭게 주어질 수 있는 것이다반드시 누군가에 의해 객관적이고 사실적인 눈으로 기록한다고 하더라도 주제가 정해지는 순간부터 한 개인의 주관적 판단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어떤 사회적 현상을 기록하고 제작 한다 는 것 자체역시 개인의 주관이다. 그 사람이 어떠한 주제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다 는 것 자체도 주관이며 그러한 사실적 기록을 따라 한다 는 것 역시 그 사람의 주관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다큐멘터리라는 기록을 접한다는 것은 그 것을 만든 사람의 시선에서 보고 있음을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그러나 문제는 다큐멘터리가 현실의 재현물인 이상, 이야기를 맡은 제작자와 제작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연출 적 개입과 조작적 효과를 완벽하게 제거할 수는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주체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이다.-사진으로서의 다큐멘터리Andreas Feiningers 는 "다큐멘터리 사진에는 실제적인 것과 예술적인 것이 내포되어있다"라고 정의했다. 즉 주제나 사건은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 하나 그 표현은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다큐멘터리 사진의 역사는 카메라 앞에 놓여 진 현실을 이해함으로써 사상과 감정을 가지고 예술을 창조하는 사진가들의 노력의 결과로 예술의 한 유형으로, 또한 사회의 가치 있는 표현으로서 계속해서 성장해왔다. 사진술의 발명 이후 현대인의 의사소통은 텍스트 중심의 전달에서 점차로 이미지 중심의 메카니즘으로 변하고 있다. 단순한 기록과 정보를 직접적으로 복제하여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모든 예술이 그러하듯이, 그 의미를 감정적 가치로 전환시켜 예술적 표현을 가지는 것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다. 단순한 기록, 전달이라는 표피적 의미의 실용성 보다는 높은 차원의 다큐멘터리로서의 예술성을 지향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역시도 주관적인 입장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카메라의 렌즈를 바라보는 작가 자신의 의도에 따라 같은 상황은 전혀 다른 반대의 상황으로서 이미지화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영상이 편집자의 의도에 따라 단편적 형상들이 맞춰질 수 있는 반면 사진은 한정된 이미지만으로 상황을 이해 하고자 함으로서 전혀 다른 이면의 주제는 가려질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교육을 비판한다.학교에서는 모든 아이들을 위한 전인교육을 실시하여야 하며, 많은 아이들과 함께 하는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수업이 이루어져야한다. 이는 교육이 가야 할 길이고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 하지만 현재 우리들 학교에서는 과연 이러한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학교는 단지 ‘먹고살기 위한 도구’가 되어버렸고, 대학(간판)을 가기위한 하나의 과정이 되어버렸다. 그렇기에 일주일에 한번인 무용시간은 무용수업보다는 영어를 보충하는 시간으로, 음악교사는 자율학습 감독 선생님으로 바뀌야 말았다. 도대체 무엇이 중요하고 중요하지 않은지에 대한 판단과 판단력은 무뎌진지 오래다. 전인교육을 위한 학생중심의 수업이 이루어져야 함에도 불구하고 거의 모든 학교에서는 수능과목을 위한 수업과 자율학습, 보충학습만이 진행되어지는 어이없는 현상들이 지금 바로 나에게 나의 후배들에게 일어나고 있다.학부모의 90%가 자녀의 학력이 대졸 이상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금, 교육부조차도 ‘우리나라처럼 대학입학 경쟁이 과열되고 또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아직 자격기준 등으로 사용되기 보다는 상당한 비중으로 선발기준이 되어 있는 상황(교육부 보도자료 2005)’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우리나라 교육의 현실인 것이다.현재 우리나라 교육과정인 7차 선택중심교육과정은 어떠한 교육과정이며 이는 2005수능체제를 만나 어떠한 상호작용을 이루어 낼 것인가가 뜨거운 감자로 우리들에게 던져지고 있다. 7차 선택중심교육과정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대학은 수능시험 영역을 선택할 수 있고, 학생들은 학교에서 과목을 선택할 수 있다는 것이 그 골자이다. 그렇다면 결과는 무엇인가? 대학에서 반영하는 수능영역에 해당하는 과목을 학생들은 학교에서 선택하려 할 것이 뻔하지 않겠는가? 그 어느 때보다도 대학입시가 학교교육에 영향을 크게 끼치게 될 상황이 오고야 만 것이다.이러한 문제속에서 현재의 교육과정을 비판하고 수정하는 움직임이 일어나 보다 학생과 미래를 위한 교육의 틀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2005년 수능체제에 따른 7차 선택중심교육과정의 실상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첫째, 기형적인 교육과정2005년 수능체제에서 학생들은 심각한 편식교육을 받을 수 밖에 없다. 즉, 국어와 영어는 6차 교육과정보다 2배 늘어나게 된다(3년간 204단위의 절반: 인문계 학생은 국어 44단위, 영어 48단위/ 자연계 학생은 국어 40단위, 영어 48단위). 바야흐로 이제 고등학교 교육은 ‘국어’와 ‘영어’만을 위한 교육이 될 것이다. 반면 몇 시간 되지 않던 예체능 시간은 거의 반으로 줄어들고, 이공계열 학생들조차 ‘과학교과’ 시간이 대폭으로 줄어들게 된다. ‘국어’, ‘영어’, ‘수학’을 제외한 대부분의 과목시간이 줄어들고 그 시간만큼 ‘영어’와 ‘국어’시간이 늘어나게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그 나머지 시간도 학생들은 수능과 관련된 공부만 하느라 시간을 다 보내게 될 것이 뻔하다. 이제 교육은 더 이상 개개인의 인간적 가능성과 능력을 최대한으로 개발하고 바람직한 공동체를 형성하기 위한 과정이 아니라 그야말로 ‘국어’,‘영어’ 중심의 ‘입시집중교육’만이 존재할 뿐이다.둘째, 학교붕괴의 가속화국민공통교육과정과 교육청지정과목 수업 중 수능에 직결되지 않는 시간에 학생들이 제대로 수업에 임할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이 이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간들은 자습시간으로 되거나 실제로는 수능준비를 하는 시간으로 변질되지는 않을까? 사실 학교를 다닐때 체육이나 음악시간 등은 자습시간으로 애용되어 온 것도 사실이기에 이러한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지 않을 수 없다.이와 함께 학교 붕괴를 가속화 시키는 요인은 사교육비의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7차 입시집중체제에서 학교는 여러 가지 여건상 학원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질 수 밖에 없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입시만을 생각한다면 학교수업보다는 학원수업을 위주로 공부를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벌써부터 대학별 맞춤 과정을 개설해 놓고 학생들을 기다리는 학원들이 즐비한 상황에서 학부모들은 지금보다 더 학원에 의존하게 될 것이다.셋째, 말뿐인 학생선택권교육부가 선전하고 있는 ‘학생의 과목선택권’은 단지 ‘대학의 과목선택권’으로 변질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2005년 수능체제는 그나마의 ‘학생선택권’도 크게 제한해버렸다. 대학이 사회탐구와 과학탐구를 선택적으로 반영하게 함으로써 한 분야만을 선택하도록 제한하였고, 수능을 국/영/수 중심의 ‘심화선택과목’에서 출제함으로써 예체능이나 기술/가정, 일반심화선택과목을 무의미하게 만들어 버렸다.결국 학생의 선택권이라는 것은 시험을 위한 대학을 가기위한 선택권이 되어버린 것이다.넷째, 커져만 가는 학습부담7차 교육과정은 어찌된 일인지 3년 총 이수단위를 216단위로 12단위(학기별로 주당 2시간)나 다시 늘려버렸다. 이는 기존에 비하여 학습부담, 교사의 수업부담을 대폭 늘려 놓은 것이다. 이젠 더 이상의 학생의 학습 부담을 경감하고, 교육의 질을 향상할 필요성에 대해 여지를 두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문제는 이렇게 학습부담, 수업부담이 늘었는데도 서울시 교육청에서는 내년도 인문계 고교 교원정원을 올해 보다 더 줄이고 있다는 것이다. 교사의 정원을 대폭 늘리겠다고 선심이나 쓰듯이 그렇게 선전한 것과 막상 실시되는 현실은 전혀 딴판이다. 특히 대학마다 수능반영영역이 천차만별일 경우는 ‘보험’의 차원에서 대부분의 영역을 공부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오히려 수험부담이 더 늘어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교과를 내용별로 세분화하여 각각 독립된 교과로 한다면, 통합되어 있을 때보다 전문적인 내용으로 채워질 가능성이 클 것이므로 공부할 내용도 더욱 어려워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들 과목을 집중 공부하기 위해 사설학원 단과반이 기승을 부려 사교육비 부담 또한 매우 늘어나게 될 것이다.이렇게 지금보다 공부할 내용이 더 많아지고 더 어려워진다면 학생들이 학교 공부에 더 흥미를 못 느끼게 될 것은 뻔하다. 결국 학교가 전문화, 세분화될수록 학생들의 학습의지는 더욱 저하되고 학교는 더욱 황폐화되어 ‘학교붕괴’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다섯째, 조기 진로 결정과 진로변경의 불가능본 교육의 개정과 입시안은 고등학교 신입생을 비롯 그들의 학부모에 큰 걱정을 안겨주고 있다. 이는 빨리 진로를 정해야 함에서 나오는 현상이다. 학생들은 자신의 진로를 빨리 정해야, 다시 말해 대학이나 학과를 정해야 과목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학교운영상 이들은 보통 1학년 1학기 네에 평생의 진로를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한 번 정하면 중간에 진로를 바꾸기 어렵다. 특히 대학들마다 수능을 천차만별로 반영하거나 특정 과목을 지정할 경우 진로변경은 거의 불가능하다.현재 문과 이과를 결정하는 것도 쉽지 않은 현실에서, 막판 눈치 작전이 극심한 입시 현실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에 특정대학, 특성학과까지도 결정해야 하는 체제는 현실성이 없다. 대입제도와 교육과정 전반에 대한 재검토가 절실하다.
-고대 이집트(고대 이집트, BC3000∼322년)-1. 건축의 배경·지리적 상황- 나일강 유역의 비옥한 토양 → 사람들의 의식 속에 신과 생명의 상징→ 신전·분묘들이 모두 나일강과 연관- 나일강의 범람 → 댐을 건설하여 통제하고자 함 → 문명의 시작- 사방이 산맥과 사막으로 둘러싸인 폐쇄적 지형→ 외적의 침입이 적었으므로 장기간에 걸쳐 동일 민족문화를 육성·유지·종교적 상황- 태양신을 유일신으로 섬기면서 영원성을 동경 → 인간의 영혼(Ka)도 영원하다 고 생각하며 인간이 죽어도 'Ka'는 육체에 산다고 믿음.- 나일강을 태양신과 같이 영원성과 생명의 상징으로 여김- 신전은 나일강 동쪽(해뜨는 곳 : 탄생), 분묘는 서쪽(해지는 쪽 : 죽음)·사회적 상황- 상부이집트와 하부이집트로 나뉨 → 문명이 발달한 하부 이집트에 의해 통일- 계급 사회- 부역엔 주로 평민과 노예가 동원됨2. 건축의 특징(1) 형태·작업으로서의 건축- 원시 이집트 건축- 쉽게 구할 수 있는 재료(갈대, 파피루스, 종려나무가지등)에 진흙을 바름- 원형 평면의 건물엔 원형 지붕,장방형 평면의 경우 터널 모양의 지붕-목재는 고급 건축에 사용(목재가 부족) → 성숙한 예술과 건축을 형성시키는데 영향·작품으로서의 건축- 단순한 입체 형태와 가구식구조- 아치 사용이 가능했지만 석조 건축엔 사용치 않음·건축의 분류- 분묘 건축 : 마스타바, 왕의 피라미드, 절석분묘- 신전 건축 : 신격화된 왕에게 드리는 종교의식을 위한 분묘 신전고대의 신과 신비의 신을 모시는 일반인의 예배를 위한 제사신전- 오벨리스크 : 태양신의 상징(2) 건축의 공간 구성·4주실 : 성소로 가는 통로로서의 휴식 공간·암굴 분묘 : 현관, 전실, 기둥으로 된 홀, 성실·성소 : 왕과 성직자만이 들어(3) 건축의 구조·주재료 : 진흙으로 된 흙벽돌, 석회석, 화강석 등의 석재·모든 벽체의 저변(底邊)을 크게 하는 벽체의 경사 형식은 이집트 건축의 일반적 인 형태·석조 건축의 구조 형식 - 주로 가구식, 기둥과 보로 조립됨- 처음(제3왕의 통로나 내부및 지하 구조에 Vault를 사용했으나 팽대한 면을 단조로운 형식으로 처리하기 위해서 보에 의한 가구식 구조(Lintel Structure)를 사용·벽체는 방향의 돌을 몰탈없이 쌓아올렸고 벽면의 경사는 벽체에 안정감을 주어 아름답게 하는 건축적인 표현 기술(4) 건축의 특성·극히 간단한 구조에서 극히 웅대한 성과를 이룩 예) 기제의 피라미드·건축에 있어서 일정한 일관성(평면 구성 형식과 건축 구조)을 유지·구조물에 흙을 많이 사용 (강우량이 적고 뜨거운 태양열 때문)·석조 기술 사용(나일강 상류의 풍부한 석재) → 세계 최초로 석조주두를 개발·경사벽의 형식 : 일건연화(日乾煉瓦)나 석재에 의한 조적방식의 연구에 힘써 벽체 를 하부는 넓고 상부는 좁게 함 → 자중 때문이며 벽체의 조형적 양식으로 발전(5) 기타·이집트 건축과 시대 분류- 고왕국시대(BC3200∼2160, 제1∼10왕조)a나일강 하류의 멤피스가 수도.b신전은 거의 세워지지 못했고 주로 마스타바와 피라미드가 세워짐(제2∼3왕조엔 주로 마스타바가, 제4왕조엔 피라미드가 세워짐. 이후 마스터 바는 귀족의 분묘로 이용)- 중왕국시대(BC2160∼1580, 제11∼17왕조)a힉소스에 의해 피정복됨.b수도가 나일강을 따라 멤피스에서 계곡 지대인 테베로 옮겨짐→ 지형상의 무리와 환경에 대한 조형성의 문제로 마스타바와 피라미드는 세 워지지 않음 → 산허리나 절벽을 파서 암굴분묘성행- 신왕국시대(BC1580∼525,제18∼30왕조)a힉소스의 격퇴.b이집트 문화의 절정기(18, 19, 20왕조)로 많은 신전이 세워지고 수도 주위에 왕가의 계곡과 왕비의 계곡이 생김.c자연 환경에 순응한 훨씬 인간적인 건물.3. 이집트 피라미드의 발전과 의미·발전 과정- 마스타바 → 계단식 피라미드·굴절피라미드 → 기제의 피라미드(200년 걸림).·용도 : 왕이나 귀족의 'Ka'가 안식할 수 있는 곳.·형태- 처음엔 분묘의 언덕이나 구릉의 형태를 딴 마스타바에서 보다 큰 형태로 발전 → 하중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점점고 아래가 넓게 변하여 기제의 피라미드 형태로 완성.- 단순한 기하학적 매스는 평탄한 주위에 대해 강한 우월성과 나일강에서 영감을 얻은 영원성 상징·의미- 거대한 공사에 많은 인원을 동원하면서 국가와 사회의 정비와 발전에 영향(행정, 경제적 요인).- 최초의 거대 석조 건축으로서 기술적으로 성공.- 'Ka'를 보호하는 안식처의 기능은 실패(도굴됨) → 이러한 문제는 후에 암굴 분묘와 신왕국의 분묘 신전에서 해결하려 노력함.4. 건축의 실례(1) 분묘 건축● 마스터바(BC3000년경, 평탄한 탁상, 아랍어로 bench){A 묘실 B 묘실로 통하는 수직 통로 C 소신전 D가짜문 E세르답 F 입구·구조 : 흙벽돌 사용 → 3왕조부터 석조·형태- 경사진 측면을 갖는 간단한 입 체 높이 20∼50m 폭 15∼37m.- 상부에는 ka에게 바치는데 쓰 인 제사실과 죽은 상을 보관하 는 sardab과 묘실로 이루어짐.- 주로 왕의 조신 무덤으로 쓰임.·의미- 단순한 관심을 나타냄 → 자기 자신을 초월하고 인간의 존재와삶을 영원히 이 어가고 싶어하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 삭카라의 조세르왕 계단 피라미드와 그 복합 건물군 (Ensemble tuneraire de Djesera Saqqara)·구조 및 형태- 임호텝이 설계한 사상 최초의 석조 건물- 여러 개의 마스타바가 중복된 계단 피라미드- 엄격한 직교 배치이지만 축에 의한 대칭으로 구성되어 있지 않음- 'Ka'의 영원성을 시각적으로 형상화- 출입구 홀 : 최초의 의미 있는 실내 공간 (빛을 이용)- 필라스터 : 벽에 부착된 기둥 → 독립 기둥은 시도되지 못함·의미- 기술적으로는 성공, 기능적으로는 실패- 연속성과 영원성을 나타내는 형태적 표현● 기제의 피라미드·건축적 형태- 최초의 석조 건축물 중의 하나, 영원한 보존.공간(외부 공간과 작은 스케일의실내 건축)이 전적으로 석조로 된 건축이기 때문.- 피라미드가 발전해 나가면서 매스, 선 그리고 면이 주된 형태 요소로 쓰임.- 식물 재료에서 따와 수직 부재의 형태를 씀.- 완 수직 부재를 연결 못함 (수직지지 부재 : 기둥이나 피어로 불림).- 피라미드의 방위는 4지점에 따라 향이 정해 짐.- 피라미드에는 위로 오르는 대회랑을 가진 국왕 묘실이 있다.·배치- 피라미드 → 소신전 → 계곡 신전 → 강- 소신전 : 제물이 바쳐지고 제례가 행하여 졌으며 의복, 음식, 제례용 용기등에 저장.- 계곡 신전 : T자형으로 이루어진 가구식 건물, 장식이 배제됨.- 피라미드의 방위는 4지점에 따라 향이 정해 짐.- 피라미드에는 위로 오르는 대회랑을 가진 국왕 묘실이 있다.·구조- 피라미드는 견고한 원축형 핵과 여기에 기대어 있는 몇 겹의 경사진 벽돌로구성.- 내부의 방들에는 부조가 새겨 있는 상판과 함께 수평보를 사용.- 수직적, 수평적 구조재가 완전히 통합된 최초의 예.·건축적 의미- 왕권의 지고함을 의미 (왕은 태양신의 아들).- 영원성과 안전성을 상징.- 기제 피라미드는 안정과 안전, 자기 방어에 대한 인간의 욕구와 갈망을나타냄.- 기술적으로는 성공,기능적으로는 실패('카'를 위한 물질적 보호와 안정이불안정 하기 때문), 형태적인 면 성공 (이집트인이 동경하는 영원성의 표현).- 사후까지도 왕의 권력이 계속되는 영원성을 나타냄(2) 분묘 신전● 멘투호텝왕의 분묘신전건물군(BC1991)- 하부구조는 커다란 정방형의 주랑이 붙은 기단을 이중으로 하고 상부 기둥 중 앙에 피라미드를 얹음.● 람세스 2세의 분묘 신전(BC1257).- 내외부의 왕의 거대한 조각상 : 리듬감, 장식적 역할뿐만 아니라 구조적 기능 겸함● 핫셉수트 여왕의 분묘 신전(BC1500년경)- 형태a가구식 구조로 구성된 벽들과 열주량을 가진 세개의 테라스로 이루어짐b경사로를 통해 계곡 밑바닥으로부터 상승c자연과 건축의 조화 : 테라스 가장자리의 긴 수평선, 기둥의 짧은 수직선, 기 둥에 의한 명암의 반복 율동, 좌우 대칭, 건물 배경의 암석d건축과 조각을 통합 : 둥근 수직 부재와 사각의 수평 부재를 연결e건축가 센무트의 단구 활용법 : 신전의 부지에 있는 석재로 세웠기 때문에손대지않은 바위들과 완전한 조화.: 신전의 옆모습이 자연적인 단구와 같이 반 복되어 있으나 그 스케일은 인간적인 스케 일로 되어있음.f기능 : 신성시된 여왕을 위한 종교의식에 적합한 환경을 제공하는 것g차츰 상승하는 통로의 성격 : 초월에 대한 갈망- 의미 : 영속성, 점진, 점이{ A 탑문 B 파라오의 거대상 C 오벨리스크 D 엎드린 동물상이 있는 접근로 E 전정 F 다주실 G 성소 H 옥중한 벽체 I 서비스 공간(3) 신전·용도 : 분묘 신전과는 달리 장제(시 신을 놓아둠)실과는 무관한 오직 신 을 위한 신전으로 독립적으로 발전·공간구성- 신전의 평면은 단일축을 따라 배 치- 공간의 변화(공간 분할의 3분법)a신전의 외부 첫번째 공간:넓고 개방, 빛이 충만 (공적)b안쪽으로 감에 따라 더 낮아지고 좁아지고,어두워짐 (사적 공간)c신상이 놓여진 방 - 가장 작고, 어둡고,비밀스러운 곳·진입 경로 : 비스듬히 누운 동물상이 나열되어 있는 길 → 오벨리스크 → 파라오 조각상 → 파일론 → 열주량 의 중정 → 육중한 기둥의 다주실 (이집트 문화의 기본 적상징인 통로 를실체화)→성소(聖所) ·파일론(Pylon)- 벽면이 아래로 갈수록 두꺼워지는 육중한 탑문- 신전의 정문격, 상부와 양 측면은 모울딩처리·오벨리스크(Obelisx) : 태양신의 상징- 후에 로마인들이 로마의 기념적 건물의 상징물로 옮김(성베드로 성당의 광장, 캄피돌리오 광장, 판테온)● 아몬-레 신전(카르나크, BC1300년경)·아몬(Ammon) - 테베지방의 신흥 태양신 .·레(Re) : 멤피스 지방의 태양신 → 하부 이집트에 의한 통일의 증거·신전의 전면에 람세스2세가 건축한 거대한 다주실이 가장 인상적·다주실- 53m×102m낮고 밀집된 공간과 높고 덜 밀집된 공간의 대조는 중앙의 높은 천 장부분의 '통로적인 성격'을 나타내어 의식 행렬을 앞으로 인도해 나감.- 중앙부의 상부에 클리어스토리에 유입되는 빛으로 효과를 더욱 극대화함- 양 측면의 낮고 어두침침한 부분은 신비한 종교의식이나 신탁을 받던 각됨
고대 그리스 건축1. 인문적 상황*심리적 상황- 인간은 만물의 척도 (by 프로타고라스); 인간 중심의 최초 문명 (인본주의적 관점)*사회적, 정치적 상황- 아테네(Athenes) : 개방적 민주주의.- 스파르타(Sparta) : 폐쇄적 독재정치.*지적 상황- 인간의 이성이 지니는 힘을 존중한 최초의 문명. (인간은 이성적 동물)→ 아리스토텔레스 : 인간이 알고자함은 인간이성의 질서와 일치하는 자연 질서.소크라테스 : 너 자신을 알라.플라톤 : 이데아 (idea)- 자연과학, 철학의 기반.*예술적 상황- 이성적 질서 추구 → 美의 추구- 자연은 예술의 거장, 자연을 능가하는 표현이 예술의 목적→이상주의 (idealism - 플파톤의 이데아와 관련)*역사적 상황- 페르시아 전쟁 (BC497∼479)에서의 승리의 주역→ 아테네는 그리스 문화의 중심으로 발전2. 그리스 초기 건축*페스툼의 신전 (BC550~460)- 페스툼 : 남부 이탈리아에 있는 그리스의 식민지 (로마 : Posedonia)직교하는 격자형 시가지- 남쪽 (낮은 지면) : 헤라 신전→도시와 대지, 그 대지의 여신이 일체됨 상징.- 북쪽 (높은 지면) : 아테나 신전→ *이 도시에서 가장 눈에 잘 띄는 곳에 위치.*어두운 힘, 구속적 법칙을 갖는 자연의 공포로부터의 인 간해방*그리스 아테네 권력, 힘 상징●제1 헤라 신전*형태- 기둥 : 건물의 폭, 길이에 비해 낮음9 X 18 개엔타시스 - 조형적 , 역동적 : 강건한 느낌주두의 유별난 크기, 납작한 에키누스 - 대지에 밀착된 느낌 형상화- 중심축을 따라 1열의 내부지지 부재 (Basilica)●제2 헤라 신전 (넵튠, 포세이돈 신전-BC450경)*거석문화적 힘*통일된 조각 작품*기둥 - 제1신전 : 낮고 기는 듯 함제2신전 : 높고 짜임새있으며 더 큰 규모.*균형잡힌 고전적 배치*전체적 비례 : 통합, 통일에의 소망 표출→ 반복을 통한 안정감 창출*셀라 내부의 2열 기둥- 2개의 기둥이 상하로 조합(단일 높이의 기둥은 전체 비례 맞추기 힘들다.)●아테나 신전(BC510)*수직적 효과- 비례, 세부처리의 어우러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