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개소문淵蓋蘇文수업 :담당 :학과 :학번 :이름 :제출일 : 200 . 00. 00(월)〈보고서〉연개소문(淵蓋蘇文)- 연개소문의 일대기와 업적에 대한 평가 -5 -200xxxxxx 벼베기학과 김낫1. 머 리 말2. 연개소문 일대기3. 위대한 영웅에서 실패한 정치가까지4. 맺 음 말1. 머 리 말과거의 인물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개인 또는 당시의 세계관 그리고 역사관이 투영됨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의 시각으로 과거를 해석하는 것은 오류를 범하기 쉬운 예이다. 뛰어난 전사국가 고구려의 말기에 출현해 왕을 시해하고 정권을 탈취한 독재자에서 거대제국 중국에 맞서 한반도를 수호한 민족영웅까지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뚜렷이 구분된다. 여기서 독재자가 영웅의 반대말이 아님을 알기에 두 평가간의 절충점이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연개소문에 대한 평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김부식의「삼국사기」와 단재 신채호의「조선상고사」이다. 김부식은 연개소문에 대해〈풍채가 뛰어나고 기품이 호방한 비상한 인물이었으나, 잔인 포악한 성격으로 국가의 역적이 되었다〉고 기술한 바 있으며, 단재 신채호는 연개소문은 "조선역사 4천년 이래 최고의 영웅"이라고 극찬하였다.이와 같이 연개소문의 인물 됨됨이를 보는 시각의 차이는 김부식과 단재 신채호가 살았던 시대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김부식의 살았던 고려의 12세기는 문벌귀족의 세력이 정점에 이르고 왕권은 약화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김부식은 역사서를 편찬함으로서 정치적 교훈을 얻으려는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왕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연개소문은 김부식에게 부정적 이미지를 갖게 하기엔 충분하였다. 반면 20세기 초반 일제강점기를 살고 있던 단재 신채호에게 패권국가인 중국을 상대로 국토를 수호한 연개소문은 칭송받을 만한 민족주의자였을 것이다.이상의 연개소문에 대한 평가는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리고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연개소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를 받아들일 때 긍정적 또는 부정적인 의미에서 그가 주는 교훈은 무엇인가. 등의 문제를 살펴보기 위해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의 많은 인물들 중에 연개소문을 선택하게 되었다.먼저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고, 그에 대한 포폄의 몇몇 측면들을 생각해 보자.2. 연개소문 일대기삼국사기 권 제 49 열전 제 9 및 여러 참고문헌에서 밝힌 연개소문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개소문은 성은 연(淵)씨인데 스스로 말하기를 물 속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대중을 현혹시켰다. 생김새가 씩씩하고 뛰어났으며, 의지와 기개가 커서 작은 것에 얽매이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고구려의 대대로를 수상하였고, 성격이 잔인하고 포악하다 하여 그의 계승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많았으나 뭇 사람들에게 사죄하여 대대로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개소문은 흉폭하고 잔인하기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여서 왕과 여러 대인이 그를 죽이기로 논의하였으나, 이 일이 누설되어 연개소문은 열병식을 구실로 여러 대신들을 초대한 후 사육하였다. 이어서 궁궐로 달려가 영류왕을 죽이고 새 왕을 옹립하였으니 그때가 642년 10월의 일이었다.중앙 권력을 장악한 뒤 그는 지방의 반대파에 대한 토벌전을 전개하였다. 대표적인 사건으로 안시성의 양만춘과의 싸움이었다. 양측간의 타협으로 마무리 지어진 이 사건으로 미루어 연개소문에 의한 철저한 집권화가 이루어졌다고 볼 수는 없다.그는 몸에 다섯 개의 칼을 차고, 말을 타거나 내릴 때에는 항상 귀족의 장수로 하여금 땅에 엎드리게 하여 그 등을 밟고 디뎠으며, 나랏일을 마음대로 휘두르니 나라 사람들이 대단히 고통스럽게 여겼다.이어 연개소문은 왕에게 일러, 당나라에서 도교를 수용할 것을 청하였고 당나라 태종은 道士 숙달(叔達-삼국유사 흥법제3에 의하면 서달?達로 표기) 등 8인을 보내고 도덕경을 보내주었다. 이에 불교의 절을 빼앗아 거주하게 하였다.그는 도교를 수용함으로써 기존의 왕실과 귀족들과 밀착해온 불교를 억누르는 한편, 당시 고구려 사회의 혼란을 안정시키기 위한 의도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연개소문의 도교 진흥책은 불교의 반발을 일으키는 등 내부적 갈등을 증폭시켰다.쿠데타가 있은 직후인 642년 신라의 김춘추가 평양성을 방문하여 화평을 제의하였으나 이에 한강유역을 고구려에게 반환할 것을 요구하여 두 나라간 협상은 성사되지 못하였다. 이어 648년 김춘추는 당나라로 가서 당나라와 화친을 요구하는 한편 당나라 군사의 출병을 요청하였다.이리하여 결성된 나-당 연맹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남과 서북에서 대거 고구려를 공격한 결과 660년의 사비성 함락, 668년 평양성이 함락되어 고구려가 지도에서 사라지게 되었다.한편 연개소문은 당의 침공에 맞서 동맹를 모색하였는데, 645년 당의 침공 때에는 몽고 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설연타를 충동하여 당의 배후를 치게하여 당의 군사를 물리게 하였고, 멀리 중앙아시아의 강거(康居)국에까지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백제가 멸망된 한반도에서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의 상황은 절망적이었다.한편 악화된 안보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그의 아들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위한 조처를 취하였다. 장남 남생의 경우 중리소형과 중리대형 그리고 중리위두대형을 거쳐 24세에 장군직을 맡았고, 차남 남산과 삼남 남건 역시 비슷한 과정을 거쳤다. 백제 멸망 이듬해인 661년에 장자 남생은 삼군대장군에 봉해졌고, 665년 초에 연개소문이 죽자 남생은 대막리지로서 권력을 이어받았다. 그러나 남생은 동생등과의 권력 투쟁에서 밀리게 되어 국내성 일대의 성을 들어 당에 투항하고, 당 고종은 남생과 헌성에게 벼슬을 주고 침공군의 향도로 삼았다. 그리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지금의 원산만 일대와 강원도 북부 지역을 들어 신라에 항복하였다. 20여 년간 권력을 장악해 온 연씨 집안의 분열은 고구려의 멸망에 결정적인 작용을 하였다.3. 위대한 영웅에서 실패한 정치가까지여기서부터는 머리말에서 언급한 연개소문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대해서 좀 더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개별적으로 살펴보겠다.김부식은 삼국사기 논찬에서 송나라 신종(神宗)과 왕개보(王介甫 : 왕안석)의 대화를 인용하면서 연개소문은 재사(才士)였음에는 틀림없으나, 곧은 도리로써 나라를 받들지 못하고 잔인함과 포악함을 마음대로 하여 큰 역적에 이르렀다고 평하였다. 따라서 연개소문이 몸을 보존하여 집에서 죽은 것은 요행이 토벌됨을 면한 것이고, 그의 핏줄인 남생과 헌성은 비록 당나라 왕실에 이름이 났지만 본국의 견지에서 보면 반역자이다. 라는 비판적 시각에서 그를 바라보았다.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고려의 왕권강화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고구려 왕을 죽이고 정권을 탈취한 연개소문은 김부식의 붓 앞에서 먹물만큼이나 검은 인물로 그려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반대로 단재 신채호는「조선상고사」에서는 연개소문에 대해 구제도를 타파하고 정권을 통일했으며 남수서진(南守西進) 정책을 세웠고 당 태종을 격파해 중국 대륙을 공격하여 당시 고구려뿐 아니라 동아시아 전쟁사 속에 유일한 중심인물 이었다고 하였다.위의 단재 신채호의 연개소문에 대한 극찬은 20세기를 전후로 한 시기에 발전한 민족사관에 기인한 것이다. 당시 일본 제국주의 下에 나라를 잃은 민족주의 사학자들에게 대제국 중국에 맞서 강경한 자세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고구려를 지켜냈던 연개소문의 행보는 분명 매력적이었을 것이다.다음으로 고려후기 일연의 삼국유사 흥법제3 에서는 연개소문의 도교 수용에 관한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삼국유사에서는「고구려 본기」와 「古記」의 내용을 근거로 들어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개소문은 총명하고 신기에 가까운 무용이 있었다. 영류왕은 그의 현명함을 듣고 불러들여 신하로 삼았다. 총애받는 재상 개소문은 왕을 설득하여 도교를 받아들였다.일연의 삼국유사에서는 연개소문의 대내적 또는 대외적 정치적 행보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그가 인용한 사료에서 연개소문의 상은 영특하고 왕에게 충성하여 국가 부흥에 일조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시기적으로 20세기 보다는 김부식이 살았던 고려전기와 밀접한 고려후기 삼국유사에 어떻게 이러한 평가가 나왔을까. 이는 원 간섭기에 있던 고려의 사정을 살핀다면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원 간섭기 하에서 우리 역사와 문화의 우수성을 강조하려 했던 일연은 연개소문의 부정적 측면보다 긍정적 측면에 집중하였을 것으로 이해된다.이상의 연개소문의 역사적 포폄을 살펴보았을 때, 우리는 논자의 시대상에 투영된 연개소문 외에는 해석할 수 없겠는가 란 의문이 들었다. 이러한 일종의 해석의 오류를 피하는 방법은 해석에 있어서 논자의 처한 상황을 지양하고 당시의 세계관이나 인간관으로 문제를 바라봄이 바람직하다. 이와 같은 효과적인 해석은 노태돈 교수의 논문「연개소문 - 무모한 대외강경론자, 포악한 권력자」에서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노태돈 교수는 연개소문에 대해서 그가 대외강경론자였는가와 흉폭한 독재자였는가의 측면에서 분석하였다. 그는 연개소문은 분명히 대외강경론자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한 논지는 둘로 나눠지게 된다. 첫 번째로 연개소문이 당의 압력에 대해 강경한 대응책을 쓴 것은 비판할 상황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 시기 당은 천하 즉 문자 그대로 온 세상을 제패하려 하였다. 중국을 통일한 뒤 몽고고원의 유목민 국가인 돌궐을 제압하고, 티베트 고원 동북쪽 경사면의 토욕혼을 복속시켰으며, 나아가 지금의 중국 신강성 지역에 있던 고창국을 멸하였다. 그 다음 대상이 동북아의 고구려인 것은 분명하였다. 이런 점은 당시 고구려인들도 인식하고 있었다. 두 번째로 신라의 동맹 제의에 한강유역 반환을 구실로 거절한 것은 연개소문이 자기 나라를 위기에 빠뜨린 무모한 대외강경론자였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렵다. 신라는 고구려와의 화친 실패로 당나라로 건너가 나?당 연맹을 맺게 된다. 이는 임진강 유역에서 북상하는 신라군이 고구려군의 방어력을 분산시킬 뿐 아니라, 중국 침공군의 최대 약점인 긴 수송선에 따른 식량 보급의 어려움을 이제 신라가 보완해 줄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얼마 후 고구려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