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언2. 본론1) 조선 초기 대외관계2) 『광해군 일기』의 사료적 가치3) 광해군 중립외교의 역사적 가치3. 결어-광해군의 중립외교의 현대적 의미-1. 서언한 시대는 이전 시대에서 배태·성장하고, 다음시대를 잉태하며, 이것은 곧 역사의 전개과정이라 할 수 있다. 이전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운 창출하면서 역사는 진행되어 왔다. 역사는 단계적이고, 계기적으로 전개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李景植, 「韓國史 硏究와 時代區分論」 『韓國史 認識과 歷史理論』, 金容燮敎授停年紀念韓國史學論叢, 1997.이는 16세기의 임진왜란과 20세기의 한국전쟁을 동일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고 비교할 수는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16세기 조선과 20세기 한국의 역사적 상황을 동일하게 이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대와 이후의 역사전개에 있어서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은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 임진왜란과 한국전쟁은 단순히 일본의 침략전쟁으로, 민족상잔의 비극으로 그 성격을 결정지을 수 없다.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할 때, 두 전쟁은 한반도를 둘러싼 당시의 국제질서가 표출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이는 중국에서 임진왜란을 항왜원조(抗倭援朝) 전쟁으로, 한국전쟁을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으로 표현하는 데서 잘 드러난다.韓明基, 『광해군』, 역사비평사, 2000, pp60∼61.또한 강화협상에 있어서 전쟁 당사자인 조선과 남한이 배제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리고, 두 전쟁 모두 전후 결과적으로 한국 사회의 성격을 결정짓는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했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왜란과 그 이후의 정세에서는 조선과 명과의 관계가 주목된다. 조선 초기에 우여곡절 끝에 안정된 조선과 명의 '조공-책봉' 관계가 임진왜란을 계기로 이른바 '재조지은체제'로 변하게 된 것이다. 이는 조선의 대명 자세가 초기에 비해 주체성을 상실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명에서 왜란기에 조선을 직할령으로 삼자는 주장이 나온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韓明基, 「조선과 명의 사대관계」 『역사비평』 50, 2000, p30중요한 차이점이 발견된다.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그것이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는 당시 사대부들의 관념과는 분명 배치되는 것이었지만, 오히려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다. 이제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지지는 가치를 선행연구 성과를 토대로 조선과 명·후금과의 관계를 통해 더불어 살펴보고, 현대에 지니는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2. 본론1). 조선 초기 대외관계2). 『광해군 일기』의 사료적 가치1997년 유네스코는 『조선왕조실록』을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이는 조선왕조의 실록의 가치를 인정한 것으로, 분명 『조선왕조실록』은 500여 년에 걸친 장구한 시대를 기록하고 있으며, 방대하고 자세한 내용 등등의 면모를 볼 때, 세계 수준의 역사서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기록문화의 전통을 알려준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실록을 통해 나타나는 우리의 기록문화의 전통은 수정실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몇몇 실록은 수정작업을 거치게 되는데, 『선조수정실록』, 『현종개수실록』, 『경종수정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가 그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보충 형태의 『숙종실록보궐정오』를 제외하고 나머지 실록 즉, 『선조실록』, 『현종실록』, 『경종실록』이 그대로 남아있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의 기록을 수정하더라도, 본래의 기록을 그대로 남겨놓는 우리의 기록문화의 우수성을 증명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이러한 실록에서는 『광해군일기』는 사학사적으로 단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것은 중초본과 정초본이 그대로 남아있기 때문이다. 실록의 편찬과정을 살펴보자.본래 실록은 한 임금이 세상을 떠나고 난 뒤, 새 임금 대에 편찬된다. 새 임금이 즉위하면, 실록청(實錄廳)이라는 기구를 만들고, 선왕 시절의 사료들을 수집한다. 사관들이 매일매일 기록한 사초(史草)와 승정원에서 기록한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를 포함하여 각 관청의 일기와 개인적인 문집이 망라된다. 이렇게 모아진 기록들을 실록청의 사관들은 초서로 기록된 실록의 초고인 초초본을 만든다. 그 후 초초본을 검토하는 수정작업을 거쳐 중초본이 사이에서-광해군 책봉과 관련한 은의 유출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왜란기에 형성된 조선과 명 사이의 재조지은 체제에 새로운 변수가 생겼으니, 곧 후금의 성장이 그것이다. 명, 조선, 후금이라는 당대의 국제질서 속에서 후금에 군사적으로 명이 밀리면서 왜란 당시의 명의 은혜에 대한 보답을 요구하는 명의 태도는 계속되었다. 즉, 후금 정벌을 위한 병력 징발, 광해군 책봉 문제, 은의 피탈 문제가 그것이다. 따라서 광해군 대의 대명 관계에서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은 '재조지은'과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韓明基, 「光海君代의 對中國 關係」 『震檀學報』 79, 1995, p95.주지하듯이, 광해군이 왜란기에 세자가 되어 분조를 이끌면서 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적자가 아닌 서자라는 것, 더구나 첫째도 아닌 둘째라는 사실은 세자 시기부터 후일 큰 문제가 될 것이었다. 따라서 전후 선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자신의 왕위를 중국으로부터 정식으로 책봉·승인을 받아 왕권을 강화할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광해군이 서자인데다 둘째아들이라는 이유로 계속 승인을 거부하였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이유일 뿐, 실상은 당시 중국이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은 시기였기 때문이다.韓明基.「광해군 초·중반 조명 사이의 쟁점」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1999, p189.광해군은 이러한 명에 대해 '은'을 활용하였다. 즉, 조선에 방문한 명나라 사신들에게 막대한 양의 은을 뇌물로 바침으로써, 왕위를 인정받으려 한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물론 '재조지은'이라는 논리 아래서 가능한 것이었다. 본래 조선은 세종대에 금은광을 폐쇄하면서 명의 금은 요구를 무마하였다. 하지만, 왜란기에 명이 참전하고, 조선에 은광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조선에 대한 명의 은 요구는 가혹해졌다.명은 당시 서양과의 무역을 통해 막대한 양의 은을 집적하고 있었는데, 명의 조세제도인 일조편법이 이를 잘 드러낸다.명군의 참전은 단순히 명나라의 군사만 참전한 것이 아니었다. 군대를 따라서 엇갈리고 있었다. 광해군과 신하들은 명의 출병 요구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광해군은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명의 출병 요구를 거부하였다. 광해군은 명의 군사력으로 후금을 정벌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광해군은 우선, 출병 요구가 명 황제의 칙서를 통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거부하고, 이후에는 임진왜란 이후에 피폐해진 경제사정과 나약한 군사력, 여전히 존재하는 일본의 침략 위험 등등을 거론하면서 명의 요구를 거부하려 하였다. 하지만, 신료들의 반대와 명 황제의 칙서가 내려짐으로써, 광해군의 출병 반대 시도는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광해군은 군대를 파병하되 월경시키지 않고 끝까지 국내에 머무르도록 노력하고, 결국 월경하게 되자 도원수 강홍립에게 독자적으로 행동할 것을 지시하였다. 광해군의 이와 같은 노력이 있었기에 끝내 병력을 파견했음에도 후금으로부터 별 다른 원한을 사지 않고, 명으로부터 긍정적인 평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광해군은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 속에서 명에 대한 사대와 후금에 대한 기미라는 외교적 노선을 절충하려 노력하였던 것이다.韓明基, 위의 글, p244∼250.그렇다면 광해군이 명의 출병을 회피하려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 이유는 단선적으로 파악하기 힘들다. 당시 조선의 정치·사회·경제적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있기 때문이다. 크게 보아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 째는 또 다른 전쟁을 막기 위함이었다. 광해군은 임진왜란을 통해 날카로운 국제감각을 지니고 있었으며, 그의 감각은 후금에 대한 일련의 정책으로 나타났다.광해군의 후금에 대한 정책은 다음 절에서 논하기로 한다.그는 명의 군사력으로 후금을 정벌하는 것은 어렵다고 파악한 것이다. 임진왜란을 통해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그로써는 왜란의 후유증을 치유해야 할 시기에 후금을 자극하여 전쟁이 일어나는 것을 경계하였던 것이다. 둘 째는 광해군이 추진하고 있던 왕권 강화 작업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광해군은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올랐고, 이것은 그의 왕권이 미 뿐만 아니라, 당시 후금의 엄청난 첩보활동을 의식하여 조선의 정보가 누설되는 것을 막는데도 열심이었다.韓明基, 위의 글,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pp231∼235.이러한 정보의 수집을 바탕으로 한 기미책은 후금의 사정과 맞물리면서 효과를 발휘하였다. 즉, 후금의 무역에 대한 필요와 더불어 명과의 대결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 등에서 광해군의 기미책은 효과를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정보의 수집을 통한 유연한 외교뿐만 아니라, 광해군은 최악의 경우를 대비하여 군사적 대책을 마련하는데 고심하였다. 막강한 기동력과 파괴력을 자랑하며 '철기(鐵騎)'라 불린 후금의 병력을 막는데는 산성에서 화포로 대응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결론 아래, 기존의 조총청을 화기도감으로 확대, 개편하고 파진포 등 각종 화포를 생산하였다. 또한 일본 관의 관계를 안정시켜 후금의 위협에 대한 대비에 전념하고자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일본과 국교를 재개한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한 것으로 그의 외교가 생존에 초점을 맞춘,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는 것이었음을 의미한다.韓明基, 『광해군』, p194.②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평가이상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어떠한 방법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당대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지 고찰해볼 필요가 있다.먼저, 광해군의 중립외교에 대한 기존의 평가를 고려할 필요가 있다. 기왕의 광해군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이었다. 광해군을 몰아내고 정권을 획득한 서인들은 폐모살제, 궁궐 중건 등의 빈번한 토목공사로 인한 민생의 피폐, 후금과의 화친을 통한 명에 대한 배반을 명분으로 반정을 획책했다. 대외 정책의 측면에서 볼 때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세 번째, 후금과의 화친을 통해 명을 배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과장된 측면이 있다. 광해군 역시도 중화주의를 긍정하는 화이론자였다는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후금을 경계한 것은 조선의 생존을 위한 것이었다. 후금의 침략을 최대한 늦추면서, 왕권 안정과 방어대책 마련, 전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