뤽베송 감독과 영화 레옹뤽베송 감독의 영화 레옹 은 내가 여태껏 본 영화들 중에서 내 기억 속에 강렬하게 자리잡고 있다. 누군가가 가장 기억에 남은 영화가 무엇이냐고 물어본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영화이기도 하다. 무엇이 그토록 나에게 이 영화를 강렬하게 각인 시킨 것일까?나뿐만 아니라 영화 레옹 은 그 당시에 많은 대중들에게 레옹 열풍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렇게 많은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단순한 액션영화라고 하기에는 너무 소홀한 듯 싶다. 액션 이외에 다양한 드라마가 영화 속에 펼쳐지기 때문이다.뉴욕 빈민가의 한 아파트, 살인 청부업자인 레옹(장르노)은 모든 것이 베일에 가려진 익명의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그는 유일한 취미로 분신 같은 화초를 가꾸고 음료수로 우유만을 고집한다. 이러한 그에게 어느날 우연치 않게 이웃에 사는 열두살 소녀 마틸다(나탈리 포트만)가 도움을 요청한다. 마틸다는 마약 거래 커넥션의 일원인 부패 경찰 스탠필드(게리 올드만)에 의해 가족들이 모두 살해되고 이러한 와중에서 간신히 목숨을 구한채 도망을 치다 우연히 레옹의 방으로 뛰어들게 된 것이다. 마틸다는 가족의 복수를 위해 레옹에게 총쏘는 법을 배우고 레옹은 그러한 그녀를 처음에는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지만 차츰차츰 그녀에 의해 길들여 진다. 그 누구보다도 서로에게 의지 하였던 두 사람은 스탠필드의 추적을 피해 이리저리 이사를 다니지만, 그들의 은신처는 끝내 경찰에 의해 겹겹이 포위된다. 도저히 빠져 나갈 수 없는 막다른 상황에 몰린 레옹은 마틸다에게 유언처럼 사랑한다는 말을 남기고 스탠필드와 함께 폭사한다.혼자 남게 된 마틸다의 손에는 레옹이 남긴 화초가 들려져 있다. 그녀는 가만히 앉아 그 화초를 땅에다 심는다.이 영화를 재밌게 만드는 요소 중에 하나는 등장인물의 성격에 있을 것이다. 우선 일금 살인 청부업자인 잔혹한 킬러 레옹은 좀처럼 자기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늘 좁은 인간 범위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다. 그는 아기처럼 늘 우유를 마시고 어울리지 않게 화초를 애지중지 기른다. 이러한 설정은 그의 내부에 잠재된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한 그가 마틸다를 만나면서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마음을 열면서 서서히 아이에서 벗어나는 과정을 보여준다. 반면 어린 나이의 마틸다는 그와는 정반대로 대범하며 자신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겁내지 않는다. 이러한 마틸다를 겪으면서 레옹도 차츰 차츰 자신을 가두어 두었던 울타리 안에서 조금씩 벗어나 성장의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그리고 마틸다에게 총쏘는 법을 가르치면서 그녀에게 애정을 베풀고 마틸다 또한 문맹인 레옹에게 글을 가르쳐 줌으로써 그가 경제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 준다.그리고 또 한명의 주인공이자 악의 화신과 같은 존재인 스탠필드는 이러한 레옹에게 유아기적 태도에서 벗어나게 하도록 자꾸만 압박을 가하는 절대악의 임무를 맡고 있다.이러한 등장인물들의 초점은 한가지로 좁혀 질 수 있다. 바로 레옹이 아이에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과정이다. 그는 마틸다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서 점차 킬러로써의 냉혹함과 자기 절제를 잃어 간다. 이러한 것은 영화의 장면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길에서 소년과 대화하는 마틸다를 나무라는 레옹, 그리고 중국인 거리에서 마틸다의 원수를 해치우고 돌아왔을 때도 그는 피를 흘리고 있었다. 그는 샤워를 하며 자신의 상처를 꿰맨다. 그것은 성장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아픔이기도 하다.이러한 레옹의 성장 과정은 결국 죽음 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은 끝이 아니다. 그것은 마틸다가 들고간 그의 화초가 대신한다. 작은 화분 안에서만 자라던 화초는 마틸다의 손에 의해서 땅에 심어지게 된다. 화초는 안정적이지만 마음껏 뿌리를 내릴수 없었던 화분에서 벗어나서 대지에 뿌리를 내릴 수 있게 되었다. 화분에서 대지로 옮겨 지는 과정에서 수많은 아픔과 혼란을 겪기도 했지만 결국은 해낸 것이다. 그가 겪는 고통과 혼란 속에서 얻어낸 결과가 우리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큐비즘=입체파 (立體派)20세기 초 야수파(포비즘)운동과 전후해서 일어난 미술운동. 입체주의라고도 한다그 미학은 회화에서 비롯하여 건축·조각·공예 등으로 퍼지면서 국제적인 운동으로 확대되었다.그 특징은 무엇보다도 포름(forme)의 존중에 있으며, 인상파에서 시작되어 야수파·표현파에서 하나의 극(極)에 달한, 색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보인다.자연을 재구성할 것을 목표로 한 세잔에서 원류를 찾을 수 있으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원근법(遠近法)의 대가인 우첼로, P.D.프란체스카, 17세기 프랑스의 G.드 라투르 등에서도 입체파적인 추구를 발견할 수 있다.또 나무를 쌓아올린 것 같은 입체표현에 뛰어난 루카 칸비아노, 프라체리, 독일의 뒤러 등도 입체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다.큐비즘의 뜻을 분석하자면 1907년부터 1914년 사이에 걸쳐 파리에서 일어나 유럽 전역에 파급된 미술 혁신 운동,큐브(cube)란 정육면체란 뜻으로, 1908년 브라크가 그린 이라는 연작을 본 당시 심사위원미티스가 `조그만 입체(큐브) 덩어리` 라고 비평한 데서 유래된 명칭이다.이 파가 내세우는 주장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 정식 명칭으로서 `큐비즘` 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시인 아뽈리네르였으며, 그는 또한 이 운동의 이론적인 지주이기도 했다.큐비즘은 피카소나 1907년, 대담한 색채와 면을 구성을 보여주는 을 제작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세잔느풍의 큐비즘 시대(1907~9), 분석적 큐비즘 시대(1910~12), 종합적 큐비즘 시대(1913~14)로 전개된다.세잔느의 "자연의 형태는 원추.원통.구형으로 나눌 수 있다."는 주장을 이론적인 근거로 하여,피카소와 브라크가 이를 발전시켰다.그 방법은 대상을 해체하여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동시에 표현하는 것이다.처음에는 색채를 부정하고 흑색 . 녹색 . 갈색등으로 제한된 색채를 사용했으며, 종합적 큐비즘 시대에 이르러서는평면적인 색면구성을 하면서 대상이 사실적으로 그려지게 되었고, 한편으로는 `파피에 꼴레` 방법을가 대상의 도형화에 있어 현실과는 다른 회화공간을 쌓아올려 이 공간에서는 도형 그 자체의 연관이 유기적인 점, 두 사람의 색채가 갈색과 회색의 뉘앙스에 묶여 있는 점은 서로 공통된다.【분석적 입체파】 세잔풍의 입체파에서는 대상은 그것과 판별할 수 있다.그러나 1910년을 고비로 형체는 점차 세밀하게 결정화(結晶化)되고, 사물은 현저하게 해체되어 가는 ‘분석적 입체파’의 시대가 된다. 주제도 집이나 수목에서 한걸음 나아가 과실·술병·컵 등의 정물적 모티프가 되고, 다시 기타·만돌린·바이올린 등의 악기가 등장하여 분해된 그들 형체가 전후좌우로 서로 뒤섞여지므로 마치 거울면의 난반사(亂反射)를 방불케 하는 ‘시각적인 확대’를 획득하는 것이 되었다.피카소가 몇 개의 초상에서 실험을 한 것도 이 시기이며, 후안 그리스가 형체의 ‘비구성(非構成)’을 주장하여 ‘분석적인 그림’으로 불린 것도 이 시기이다.원래 분석적 입체파에서는 물체는 일단 일상 눈으로 보는 포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한 개의 바이올린을 이루는 세세한 오브제가 현재(顯在)하고 있는 것이라면 보는 각도를 바꾸면 이것도 ‘물체 그 자체’의 탐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분석적 입체파의 가장 큰 업적은 르네상스 이래 이루어져 온 일들의 동시적 존재를, 뒤집어서 형체의 동시 존재로서 정착시킨 데 있으며, 인간의 얼굴만 하더라도 측면, 정면에서, 궁극적으로는 여러 가지 시점(視點)에서 구성된 것이다.그것은 어떤 의미로는 이집트의 벽화나 부조에서 볼 수 있는 인물표현의 다원적(多元的)인 전개이며, 같은 입체파의 유력한 멤버였던 F.레제가 프리미티브한 예술에 기울인 관심과도 관계가 있다.【종합적 입체파】 1912년 입체파는 ‘종합적 입체파’의 시기를 맞이하였다.이것은 전술한 바와 같이 분석적 입체파가 자연히 화면구성에만 치중하여 물체가 지닌 리얼리티를 망각한 위기에서 비롯된 기법으로, 파피에 콜레(papiers colle)가 강력한 무기가 된다.즉 즉물적(卽物的)으로 신문지나 벽지, 담배갑이나 트럼프 등을흐 등의 영향도 많이 반영되었으나, 점차 청색이 주조를 이루는 소위 ‘청색시대(靑色時代)’로 들어갔으며, 테마는 하층계급에 속하는 사람들의 생활의 참상과 고독감이 두드러졌다.그러나 1904년 몽마르트르에 정주하면서부터는 색조가 청색에서 도색(桃色)으로 바뀌는 동시에(도색시대) 포름으로는 과거의 에스파냐예술, 카탈루냐지방의 중세조각, E.그레코, L.F.J.고야 등이 지닌 독특한 단순화와 엄격성이 가미되어 갔다. 테마는 작품 《공 위에서 묘기를 부리는 소녀》 《광대》 《곡예사가족》 등에서처럼 곡예사들을 묘사하는 일이 많아졌는데, 어릿광대나 곡예사는 무대 위의 모습이 아니고 그 생활의 이면을 파헤친 애수였다.1905년 G.아폴리네르와 교유하고 다음해에는 H.마티스와 교유하였다. 그러나 작풍은 P.세잔의 형체관을 살려나가 점점 단순화되고, 1907년의 영원히 기념할 명작 《아비뇽의 아가씨들》에 이르러서는 아프리카 흑인 조각의 영향이 많이 나타나는 동시에 형태분석(形態分析)이 비로소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G.브라크와 알게 된 것도 이 무렵으로, 그와 함께 입체파운동에 들어가 1909년에는 분석적 입체파, 1912년부터는 종합적 입체파시대에 들어갔다. 이 무렵 그는 이미 20세기 회화의 최대 거장이 되었고, 종합적 입체파수법을 1923년경까지 계속하면서 여러 가지 수법을 순차적으로 전개하였는데, 활동범위도 J.콕토와 알게 되면서 무대장치를 담당하는 등 점점 확대되어 갔다. 즉 1915년 《볼라르상(像)》과 같은 사실적인 초상을 그리고, 1920년부터는 《세 악사》 등 신고전주의를, 다시 1925년에는 제1회 쉬르레알리슴전(展)에 참가하였다. 또 1934년에는 에스파냐를 여행하여 투우도 등을 그렸으며 1936년의 에스파냐내란 때는 인민전선을 지지하고, 다음해 프랑코장군에 대한 적의와 증오를 시와 판화로 나타낸 연작 《프랑코의 꿈과 허언(虛言)》 및 전쟁의 비극과 잔학상을 초인적인 예리한 시각과 독자적 스타일로 그려낸 세기의 대벽화 《게르니카》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통곡미술학교에 들어가, 제롬과 페리에에게 사사하는 한편, 루브르나 아카데미 쥘리앙에 다니면서 공부하였다. 초기에는 인상파와 신인상파의 감화를 받았고, 마티스에게 영향을 받기도 하였으나 1907년경 세잔의 작품을 계기로 화면구성이나 공간표현을 연구하게 되었다.1910년 피카소와 브라크, 아폴리네르, 들로네 등과 사귀어 입체파(큐비즘)운동에 참가하여, 대표자의 한 사람이 되었다. 특히 들로네와 같이 정물화다운 제재(題材)보다 자연과 인간생활의 큰 구도를 즐겨 다루면서 단순한 명암이나 명쾌한 색채로써 대상을 간명하게 나타냈고, 원통형 등의 기하학적 형태를 좋아하였다. 그리하여 기계문명의 다이나미즘과 명확성에 이끌려 그것을 반영한 다이내믹 입체파라는 경지를 이루었다. 제1차 세계대전에 종군하여 부상을 입었으나, 이 전쟁의 체험을 통하여 기계와 인간의 공동작업이라는 새 시대의 주제에 눈을 떠 명쾌한 포름과 순색(純色)의 평도(平塗) 등 기계적인 표현으로 나아갔다. 르 코르뷔지에와 몬드리안 등과 사귀어 추상주의에도 관심을 보여, 회화와 건축, 인쇄 ·영화 ·연극 등과의 관련에 관심을 보여 현대 사회생활의 요구를 반영하고 생활의 실감을 존중하는 제작을 의도하였다.유채화 ·소묘 ·판화에서 벽화 ·모자이크 ·스테인드글라스 ·태피스트리 등에도 손을 대어 폭넓은 활동력을 발휘하였다. 1920년대에는 전위영화 《발레 메커닉》(1924) 등 무대장치와 영화 ·발레 관계 일에 종사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곡예》나 《자전거 타기》 등을 제작하였다. 1945년 다시 파리로 돌아와 1946년 아시교회의 정면을 모자이크로 장식하였고, 오댕쿠르교회의 스테인드글라스, 도자기나 태피스트리 등 광범위한 일에 종사하여 간명하고 힘센 평면적인 표현을 통하여 기계시대의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였다. 1960년 프랑스 남부 코트다쥐르의 비오에 레제미술관이 개관되었다후앙 그리(1887~1927)스페인의 마드리드 태생인 화가 호세 곤잘레스의 널리 알려진 예명이다. 그가 스페인 도하였다. 그 여파는 첫 결과는 1910년을 기점으로 다양한 후기 입체파적 양상들에 의해서 나타나게 된다. 피카소와 브라크, 후안 그리 등의 대표적인 화가들과 함께 입체주의의 영향을 받은 광선주의, 오르피즘, 미래주의, 순수주의 등의 화파들이 생성하게 된다. 입체주의는 그 지대한 영향력만큼 20세기 미술을 형성하는데 큰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작품피카소의 아비뇽의 처녀들: 이 그림은 마티스의 ‘댄스’보다 3년전에 제작 되었고 과격한 불만의 표명이었다.혐오감을 느끼는 작품을 만들어 냄.(중산층의 접근을 봉쇄) 시인 앙드레 사르몽에 의해 붙여진 제목(빈정거림이 내포, 피카소가 태어난 고향이 바로 새로나의 아비뇽이며 그곳에서 몸을 팔던 매춘부를 지적한것이기 때문)이 그림은 1.대중에 대한(대중을 향한)적의에서 생겨난 것 2.피카소의 회색시대의 시초라는 점을 지적-아카데믹한 역사가들피카소의 게르니카에스파냐 내란을 주제로 전쟁의 비극성을 표현한 피카소의 대표작.게르니카는 에스파냐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로, 1937년 에스파냐내란 중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에 의하여 폐허가 되었다. 마침 그 해에 열리기로 예정된 파리만국박람회의 에스파냐관 벽화제작을 의뢰받고 있던 피카소는 이 조국의 비보에 접하자, 한 달 반 만에 대벽화를 완성, ‘게르니카’라고 이름붙였다.이 작품은 파리만국박람회를 비롯하여 구미 여러 나라에서 순회전을 가졌다. 그러나 에스파냐가 프랑코 체제가 되자, 공화파 지지자였던 피카소는 그림반입을 거부하고, 39년 에스파냐의 민주주의와 자유의 회복 후 반드시 프라도에 전시할 것 등의 조건으로 이 작품을 뉴욕 근대미술관에 무기한 대여형식으로 빌려주었다. 프랑코의 독재가 계속되는 한 조국과 화해할 수 없다고 한 피카소의 신념으로 인해 81년에야 에스파냐에 반환되어 마드리드의 프라도미술관에 소장되었다가, 일부 정치인과 예술가들의 강력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보관상의 문제로 92년 소피아왕비 미술센터로 옮겼다.비극성과 상징성에 찬 복잡한 구성 가운데 전쟁의 11
대중매체에서 사진의 역할과 기능에 관하여사진은 대중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대중매체의 하나로서 그 역할을 하기도 한다.이러한 사진이 대중매체로써 갖는 기능과 역할에 대해서 나름대로 분석을 해보고자 한다.우선 대중매체와 대중 그리고 사진에 대한 대략적 이해와 지식을 필요 할 것 같다.대중매체의 의미대중매체 즉 매스미디어란 매스커뮤니케이션의 매체, 매스커뮤니케이션 미디어의 준말로 대중매체, 대중매개자라고 한다. 신문, 잡지, 영화, 라디오, 텔레비전 등으로 어떤 사실이나 사상 등의 의미내용을 피전달자인 대중에게 전달해서 널리 효과를 미치는 문화수단을 말한다. 이것은 언어, 회화, 사진, 음악 등 인간의 감각과 지각에 영향을 주는 모든 표현형식을 그 내용으로 한다. 이 매체들은 모두가 근대산업의 발달에 의한 도시와 농촌의 문화적 거리의 접근, 노동시간 단축에 따른 대중의 여가시간 증가, 경제적인 여유, 교육의 확산 등 대중사회를 형성하게 하는 여러 조건을 그 성립기반으로 하고 있다.이러한 대중매체는 사회에 의해 영향을 받기도 하지만 사회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현재에 이르러서 대중매체의 급격한 발달과 확산으로 우리는 대중매체의 지배를 받기도 하며 대중매체를 통해 각종 산업과 정치, 권력이 좌우되는 등 인간생활에 커다란 존재가 되어버렸다.이러한 대중매체에서 사진이 차지하는 자리는 매우 크다. 초기의 신문 잡지 포스터 전단과 같은 인쇄물이었던 대중매체는 현재 각종 송수신 장비와 컴퓨터의 발달로 전파를 통해 영상으로 우리에게 전달되어지고 있다. 그중 사진은 대중매체의 발달과정에서 초기부터 지금까지 꾸준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그것은 사진이 가지고 있는 여러가지 장점이 대중들에 의해 쉽게 흡수 될 수 있기 때문이다.대중의 의미대중은 계급, 사회적 지위, 직업, 학력 등 사회적 속성을 초월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로 구성된 집합체로서 구성원은 서로 알지 못하는 관계이고, 간접적, 비인격적 관계로 이루어진 익명적 집단이다. 과거의 대중은 결정능력이나 통제력이 부족하고 비합리적, 수동적인 존재이면서 지배를 받고 있는 계급으로 평가되기도 하였으나 현재의 대중은 각자의 개성을 중시하며 비판력을 갖추고 있고, 개개 판단에 의거하여 반응하는 개별성을 강화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대중은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영역에서 힘을 발휘하는 것이다.대중매체로서의 사진이 자리 잡게 되기까지의 과정 및 배경사진은 대중매체의 수단으로서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다. 그것은 사진만이 가지고 있는 많은 특징 때문이기도 하다.우선 사진은 복제가 용이하므로 방대한 양의 자료를 축적할 수 있으며 시각적 언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그로인해 사회에 메세지를 전달하고 사람들의 의식을 변화시킨다. 사진은 그림의 형태로 나타나지만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사진은 어느 시각 매체보다도 지시적 기능이 강하다. 사물을 사진만큼 구체적으로 정확히 묘사해 낼 수 있는 매체는 없다. 그림으로 그릴 수도 있지만, 그림솜씨가 서투르면 사물이 다르게 보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진은 보이는 대로 찍히기 때문에 이 구체적 지시성이 사진을 어느 시각 매체보다 가장 말에 가까운 것으로 이해하게 해준다.그리고 사진으로 표현된 모든 것은 전부 언어로서의 기능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사진의 특성은 사진이 강력한 미디어로 자리매김 할 수 있게 하였다.처음 사진이 발견 되었을 때에는 복제가 쉽지 않았으며 사진이 이용되는 용도 또한 회화를 잘 그리기 위한 도구 정도로 밖에 역할을 하지 못하였다. 하지만 복제가 용이 해짐에 따라 사진엽서와 같은 것이 상업적인 도구로 성공을 거두게 되고 사진의 대중화에 가속화를 가한다.그리고 더 나아가 사진엽서는 정치적인 역할을 하기도 한다.1880년 코닥이 필름을 발명하여 수많은 대중들이 사진을 즐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개인의 사생활을 기록하고 사회상을 기록하는 [기록의 도구]로서 대중매체로의 역할을 하게 되었다.대중매체에 있어 사진의 역할과 문제점대중매체로서의 사진은 사람들에게 정보를 주며 사회적 조정 역할과 함께 오락을 제공하기도 한다. 또한 사진에 의해 사람들이 동원되기도 하고 대중의 심리나 의사가 표현되기도 한다. 각종 보도 사진은 정치 경제 사회적인 모든 면에서 큰 영향을 끼친다. 대중은 사진을 통해 직접 경험 할 수 없는 상황을 접하며 그에 대한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그것은 대중이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사진은 사실을 전달 기록하는 것 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 상징성을 지니기도 하고 사진으 새로운 시각의 창조가 가능하다.대중매체로서 사진은 기업이나 혹은 개인에게 이윤을 추구하게 한다. 광고사진은 통해 대중은 소비자가 되어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며 기업이나 생산자는 이윤을 추구하고 경쟁을 통해 품질 향상에 힘쓰게 된다.사람들에게 사진은 시각적인 매우 효과적인 의사소통이 된다. 눈으로 [본다]는 것은 현대에 있어 가장 선동적인 감각이다. 시각이미지는 누구나 이해하기 쉽고 접근 가능한 이미지이다. 시각 이미지는 인간의 감수성에 강한 호소력을 지니며 현실인식의 창구 역해을 한다. 글로써 표현하지 못한 것들을 보충하여 주는 동시에 글보다 더욱 돋보이게 하기도 한다는 점에서 글만 있는 것과의 차이가 있다. 그리고 사진은 대중들의 머릿속에 깊게 남아 감동을 끌어내기도 한다.우리는 다량으로 신속하게 공급되는 이미지에 둘러 싸여, 의식적인 수준에서 무의식적인 수준까지 그 이미지에 의해 갖가지 설득을 당하며 살아간다.끊임없는 정치적 설득과 상업적 선전을 필요로 하는 현대 대중사회는 이러한 이미지의 숨은 설득력을 체계적으로 개발, 이용하여 사람들의 감각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조직적으로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시각이미지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심미적 차원에서 인간집단의 사고, 욕망과 행동을 효율적으로 조절하고 통제 내지 조작 수 있으며, 인간의 많은 삶에 많은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하지만 사진이 거울처럼 현실의 모습 그대로 객관적인 모습 그대로 모든 진실만을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람들의 조작에 의해서 왜곡되고 변형되어지고 굴절되어지는 등의 과정을 통하여 좀더 아름답게 보여 지기도 하며 자극적이고 충격적이기도 하다. 이런 조작의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 사진은 대중들의 욕망이 반영된 것이다. 대중들 자신이 가지고 있는 욕망을 충족시키는 대상으로 사진이 그 역할을 하고 있으며 사진을 보면서 자신이 몰랐던 마음속에 품고 있던 욕망을 표출하고 그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이다.많은 사람들은 오늘날의 세계를 끝없이 보이는 거울방에 비유한다. 사진영상을 통해 자신과 주변의 삶 그리고 환경을 반영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를 둘러싼 이미지들 때문에, 우리의 삶의 환경이란 과거와 같이 자연이나 도시가 아니고, 미디어를 통한 이미지가 된 것이다. 현재는 사진과 TV 등의 영상매체 때문에 세계를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가보지 않고도 영상을 통해 다 볼 수 있고, 실제 사진으로 찍혀지지 않은 세계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report만화 이해와 감상-만화란 무엇인가-만화이해와 감상백정숙 교수님시각디자인 학과이소진 200161035>>>만화란 무엇인가?만화에 대한 정의를 내리기 전에만화를 많이 읽고 가깝게 생각하지만 막상 만화란 무엇인가에 대해서 어떤 대답을 해야할지는 참으로 어렵다. 만화의 본질을 정의하고 구체적으로 만화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해본적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일반적으로 만화란 조잡하고 내용이 황당무계하며, 허무맹랑하고, 어릿광대처럼 얼띤 인물로 꾸며진 우스갯거리의 잡기 정도로 여기며 사회에 아무 도움도 안되는 저급문화로 취급되어왔다. 하지만 그건 만화에 대해 가볍게 생각하는 이들의 편견이다. 또한 이렇게 단순하게 만화를 저질 잡기로 치부하는 것 또한 경솔한 행동이 아닐 수 없다.과거 다른 분야의 문화도 긍정적인 면과 더불어 부정적인 면에 대해서 비판을 받으며 사회에 자리매김을 하였다. 그것은 영화와 텔레비전 방송 프로그램 각종 예술 문화에 걸친 아주 다양한 범위이며 인간 생활 속에 있어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문화 행위들이 그에 속한다.어떤 문화는 당시에는 호평을 받았으나 어떤 부류는 오늘에 와서는 혹평속에 사라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볼 때 만화 또한 다각도에서 비평되어지고 평가되어 새로운 고급 문화로서 정착할 기틀을 잡을만한 자격이 충분히 있다.그리고 만화를 읽는 사람들이 저학력의 문외한 사람일수록 부정적인 선입견이 강하게 작용한다는 것 또한 무언가 잘못되어도 한참 잘못된 생각이 아닐 수 없다.세계에는 아직 우리가 접하지 못한 다양하고 많은 각양각색의 만화들이 있다. 이 다양하고 폭넓은 만화의 세계를 살펴본 후에야 비로소 만화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이다.만화의 정의만화는 한마디로 인쇄(책)와 영상(TV move)이 혼합된 시각적 언어의 통칭이다. 즉 시각적 전달을 할 때 말 대신에 글자나 부호 따위의 상형적(그림)인 형태로 표현함을 말한다. 만화는 이 두가지가 모두 활용되는 그 자체로 하나의 독립적인 매체임을 증명하고 있다.만화가의 창작행위란 자신의 내부적 표현 욕망의 결과이다. 인간의 본능적 기능을 담을 수 있는 이 훌륭한 그릇을 우리는 쉽게 내버려서는 안된다. 그리고 누가 봐도 만화가 아닌 낙서와 같은 조잡성을 띤 것이라면 제외시켜야 한다. 만화를 통해 보여지는 내용물은 만화가의 능력이므로 같은 그릇이라고 할지라도 모든 만화를 매도하는 것을 옳지 않다.만화의 역사고대인들은 자신들의 표현욕구의 해소와 있었던 사실을 후세에 남기기 위하여 벽화를 그렸다. 벽화의 그림은 그냥 그림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이다. 우리가 보는 만화 역시 그냥 그림으로 제작된 것이 아니라 이다. 이것이 바로 만화의 형식인 셈이다.산업혁명은 예술 분야에 커다란 지각 변동을 불러오는 계기를 만들었는데 그것은 바로 인쇄술의 발명에 의한 것이 었다. 소수의 돈과 권력있는 사람들의 오락물이었던 예술이 인쇄술에 힘입어 많은 사람들이 즐길 수 있는 매체가 될 수 있었다. 인쇄술에 의하여 1731년에 이라는 호가스의 그림 소설이 출간되었다. 당시 그 내용의 충격도 큰영향을 주었겠지만 만화적 묘사력의 풍부한 기법으로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다고 한다.만화의 예술성회화란 그림으로 표현된 모든 것을 가리킨다. 만화의 그림도 회화의 일종이다. 만화와 회화를 예술적 관점으로 분류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만화 그림 역시 미술사를 통해서 그 발자취를 찾을 수 있으므로 회화와 분리하여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일이다.역사적으로 현대적 만화의 초창기에 만화를 그린 사람들은 순수미술을 지향하는 인물이었다. 이들이 풍자 기법을 도입한 것이 희화, 즉 만화의 모태가 된 것이다.만화와 회화의 차이점을 굳이 논한다면 순수 미술은 그림을 통해 미를 창조하고 표현하여 인간 내면의 세계를 그려내는 반면 만화는 미의 창조와 표현 행위가 종이 위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회화는 그 자체의 가치를 지닌다. 반면 만화는 인쇄되어 대중의 손에 전달되어 사회적 반응이 생겼을 때 만화의 효용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점이 만화가 회화와 구분되는 매력이며 장점이라 할 수 있다.만화가 지닌 예술로서의 위치는 어떤 물리적 힘으로도 무너질 성질의 것이 아니다.오히려 만화의 독특한 특성은 일반 예술의 경지를 넘어 선 종합 예술로서 사회적 역할을 다할 것이다.만화의 어원캐리커처(Caricare)-캐리커처란 원래 카리카래(cari-care)라는 이태리어에서 유리된 것으로 싣는다와 덧붙인다의 의미이다. 그리고 일부분을 과장된 세목 또는 세부분들을 덧붙인다는 관점에서 명사형으로 전의된 것이 캐리커처라고 한다.현재 통용되는 의미는 사실적인 모습에서 그 특징만을 그려 이를 보는 순간 그 그림의 대상을 연상해서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그림이다.카툰(Cartoon)-카툰의 서전적 의미는 으로 나와있다.원래 이 낱말은 그림을 그릴 때 무느 융단을 짤 때 , 그리고 큰 크기의 초벌 그림을 그리기 위한 여러벌의 초벌 그림에서 그 마무리 단계까지의 그림을 가리키는 말이었다.1804년대 이 낱말은 풍자적 회화를 지칭하게 되었다. 좀더 부연 설명을 하자면 회화에 익살을 접목시켜 사회의 아픈 곳을 건드려 주는 목적을 갖는 그림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만화(comics)-만화는 어원 그대로 우리에게 처음 서노인 것이 유모어류의 것들이어서 유모어에서 유래된 것이라 추정할 수 있겠다.우리나라는 만화라는 말이 언제부터 쓰여졌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찍부터 서구 문물을 받아들인 일본은 자신들의 정책을 지지 찬양하거나 일본인의 우월성을 과시하고 한국인의 비문명성을 은근히 비꼬는 풍자만화를 그들의 선전 기관지인 경성일보에 실은 것이 시초가 아니었나 추측한다.우리 사회가 만화에 거부 반응을 보이는 것도 이러한 점이 작용하였을 것이라 본다.일본어로 만화를 망가라고 하는데 많은 이들이 망가 망가 하면서 일본 만화를 우습게 본 것은 우리나름의 적대감이었을 것이다.사회의 차가운 천덕꾸러기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직업을 갖은데 대한 자책과 울분에서 만화가들 사이에서 망가라는 말이 유행한 적이 있다고 한다. 망가를 그린다. 집안이 망한다는 뜻이다. 정말 씁쓸한 말이다.
eq oad(펑크룩, )-Punk look-현대의상론상명대학교시각디자인과200161035이소진펑크룩(punk look)이란?반항적이고 사람들에게 불쾌감을 주는 공격적인 패션.펑크(punk)는 속어로 '시시한 사람, 재미없는 것, 불량소년 및 불량소녀, 겁쟁이, 풋내기'라는 의미로 그 말의 뜻이 지닌 뉘앙스와는 달리 과격하고 파괴적인 것이 특징이다.70년대 거리 패션을 풍미했던 펑크스타일은 70년대 중반 영국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펑크 패션이 발생한 것은 미국이지만 이를 정착시킨 것은 런던의 젊은이들이다. 런던의 펑크 패션은 1970년대 중후반에, 오일쇼크로 일자리를 잃은 노동계층에 의해 주도되어 권위체제에 대한 저항으로 나타났다.또한 펑크는 대중음악계로 번져 섹스 피스틀즈라는 펑크뮤직의 우상을 만들어냈다. 펑크패션의 모태는 1976년 런던에서 결성된 록 밴드들의 스테이지 의상에서 비롯되었다.더 크래쉬 같은 하드록 가수들의 의상이 젊은이들의 사랑을 받았다.옷입은 방식을 깡그리 무시하고 소재의 상식을 뒤엎으며 멀쩡한 옷을 찢어서 걸레를 만드는 펑크 섹시는 온통 도발뿐이다.#펑크룩의 악세서리검정 가죽 재킷, 찢어진 청바지, 속박과 과속을 상징하는 체인과 안전핀을 신체에 꼽는 등 "엽기적인" 차림이나 1970년대 런던 뒷골목을 지배했다.쇠사슬이 달린 검정색 가죽조끼...개의 목끈, 면도기를 액세서리로 하며 고무나 플라스틱제 팬츠, 마이크로 미니스커트, 플라스틱과 네트 셔츠, 저속한 메시지가 프린트된 티셔츠 등을 착용했다. 극히 일부 젊은이들에 한정된 펑크 패션은 점차 일반 패션에 영향을 주어 안전핀이나 면도칼의 액세서리가 인기를 끌었으며, 영국의 디자이너 잔드라 로즈는 금, 은, 보석 등의 값비싼 소재를 이용하여 이와 같은 액세서리를 만들기도 하였다.변칙 스타일은 필수 멀쩡한 천을 찢거나 작은 천조각을 모아 기운 듯한 디테일 등 보는 이의 혀를 찌르는 장식은 펑크패션의 백미로 꼽힌다.금속징은 펑크를 완성하는 액세서리 중 하나. 가죽이나 데님처럼 두꺼운 천에 여기저기 숭숭 구멍을 뚫어 금속 징을 박는다.#성난 사자의 갈기모양, 삐죽삐죽 위로 솟아오른 머리카락, 하늘을 향해 곤두세운 헤어스타일등... 쇠사슬의 달린 검정색 가죽조끼... 옷도 블랙이 대부분머리는 검정 또는 핑크나 그린으로 염색하고 검고 진한 눈화장같이 기분 나쁜 메이크업을 한다.펑크스타일 메이크업은 얼굴은 창백하게 눈이나 입술을 검게 한다.창백한 얼굴을 추종하는 펑크족에게 선텐은 금물인데, 건강해 보이기 보다는 혈색없이 아파보이는 얼굴이 펑크패션에 더 잘 어울린다.펑크 감각 . 전통과 룰을 거부하는 과격과 파괴지향의 패션감각사람의 잠재된 본능과 감성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엇인가를 창조하고 완성하려는 본능이 있는가 하면 파괴하려는 본능도 있다. 건물을 폭파하고 파괴되는 장면의 영화를 보면서 스릴과 쾌감을 느끼는 이유는 파괴본능이 있기 때문이다. 청바지에 구멍을 내거나 갈기갈기 찢엇 입는 사람은 파괴본능이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에 당당히 그것을 입을 수 있는 것이다. 잠재된 본능의 분출이 곧 감성이다. 패션디자이너 중에서 심술꾼이 많다. 그들은 창조, 그 자체를 파괴를 통해서만 한다. 디자이너가 그런 패션을 만들어 내는데에는 그것을 입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의 패션상품을 사면서 어딘가에 파괴적인 메시지가 없으면 거들떠 보지 않는 사람이 있다. 바로 이런 사람이 펑크 감각의 소유자이다. 취미에도 고상한 취미가 있는가 하면 악취미도 있다. 평크가 바로 그런 취미에 해당된다. 대부분의 스케더러스한 패션이 그랬던 것처럼 펑크 패션도 뮤직에서 비롯되었다. 수녀전에 잠시 유행한 그룬지 룩이 그룬지 뮤직에서 발상된 것처럼 펑크 푹도 그 효시는 평크 뮤직이었다. 1977년 무렵런던에 펑크 락이라고 불리웠던 강열하고 자극적인 락밴드가 등장했고 젋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끌면서 광적인 지지자들을 세계적으로 넓혀 갔다. 펑크 락은 3코드를 단순히 반복하는 시끄럽기 이르데 없는 사운드로 이 패거리들이 입은 기상천외한 의상으로 해서 더 유명해졌다. 그들의 뮤직이 정통파들에게 형언할 수 없는 혐오 그 자체였다. 멀쩡한 옷에 구멍을 뚫고 면도날로된 귀걸이를 장식하는가 하면 머리는 후에 펑크 스타일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하늘로 치켜세운 그런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바로 그런 경향은 그들의 노래가사에도 그대로 나타나 자기 나라의 여왕까지도 외설적인 내용으로 조롱하는 내용을 담기도 했다. 무엇이든 최고의 권위다 싶은 것이 있으면 그것을 조롱의 대상으로 삼았다. 펑크락이 삽시간에 열광적인 팬을 확보할 수 있었던데에는 그 당시 사회적인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펑크락이 발표되기 시작할 무렵의 영국은 마침 불어닥친 오일 쇼크로 일거리를 잃은 젊은이들의 정부와 사회에 대한 불만이 최고로 고조되어 있었다. 그들의 울분을 달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 평크 뮤직이었다. 펑크는 이들 젋은이들에게 급속히 전파되어 피스톨즈라는 펑크뮤직의 우상을 만들어냈다. 그는 반체제적인 목가를 좋아했고 스케이지 의상은 물론일상생활의 모든 것이 대담해서 그것이 마침내 젊은 추종자들이 풍속이 되어 펑크 패션으로 정착했다. 펑크라는 말은 속어로써 아주 약하고 약해서 비틀거리는 사람 즉라는 의미외에 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다.펑크라는 말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한 사람도 있다.남자끼리의 동성연애자를 가리킨다는 애기이다. SM이라는 말이 있다.SM이란 새드와 매조키스트는 새디스트의 노예, 그래서 새디스트가 매조키스트를 사슬로 묶어 채찍질한다. 그러면서 입에 담기 혐오스러울 정도의 욕을 해대는데 그 욕이 바로 펑크라는 설도 있다. 패션으로 표현되는 펑크의 특징은 한마디로 말해서 파괴적인 것이 특징, 그래서 겉으로 드러나는 인상은 지극히 도발적이다. 몸에 착 달라붙는 가죽이나 고무 플락스틱제 팬츠에 혐오스런 페인팅을 하거나 힙이 드러날 정도로 아슬아슬한 마이크로 미니 스커트를 입고 고무나 그물로 만든 셔츠를 입었던 것이 초기 펑크룩의 전형이었다.특히 펑트룩은 메이크업과 헤어스타일의 독특함 때문에 유명해졌는데 하늘로 치켜세운 머리에는 핑크나 녹색의 염색을 하고 모는 사람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기괴한 메이크업이 펑크의 전형이다. 위에서 말한 것은 정통적인 펑크 스타일을 말한 것으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도발적인 인상을 갖게 하려는 것이 펑크주의자들의 목적이다. 그러나 펑크에도 격이 있다. 우리가 흔히 펑크 감각이라고 부르는 용어속에는 과격일변도의 펑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보는 사람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지 않을 정도의 파괴적인 감각을 의미한 것이다.펑크룩의 부활1970년대에 시작해서, 1980년대 패션을 대표하던 펑크룩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반항과 불쾌감을 주는 공격성을 기본으로 하는 이 펑크룩이 많은 디자이너들에 의해서 새로운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꾸뛰르 펑크스터드(금속 징), 지퍼, 가죽 벨트 등을 기본으로하는 펑키룩을 피트한(몸에 꼭 맞는) 스타일로 고급스럽고, 정돈되게 표현했다.#엘레강스 펑크좀 더 심플하고, 우아하게 표현한 블랙 & 화이트의 펑키룩.여성스러운 원피스에 펑크룩의 기본인 가죽점퍼를 화이트로 매치 시키거나,(왼쪽)심플하게 정장 스타일을 표현한다거나,(가운데)좀 더 여성스럽고 캐주얼하게 부드러운 니트 소재로 한쪽 어깨를 섹시하게 드러내고, 레깅스 스타일의 팬츠를 입고,(오른쪽)바이커 장갑이나, 선글라스, 벨트와 부츠나 핀힐 등.액세서리로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로맨틱 펑크좀 더 여성스럽고, 로맨틱하게 표현한 펑키 룩.80년대 가수인 신디 로퍼를 연상케 한다.퍼프(부풀린) 소매나 러플 등, 주름진 디테일을 기본으로,블랙의 원피스에 매우 넓은 벨트와 레이스 레깅스, 핀힐 등의 코디로 과격함을 강조한 스타일.(왼쪽)공주과의 원피스 이지만, 화장과 액세서리로 만만치 않은 스타일로 연출.(가운데)다소 퇴폐적인 그림이나 문구의 패턴을 박은 티셔츠와 짧은 스커트에 금속 스터드(징)이 박힌 벨트와 스트랩 힐을 신든다던가,(오른쪽)전체적으로, 말 걸기 쉽지 않은 분위기를 연출한다.#'매드 맥스' 펑크좀 더 드라마틱한 분위기를 위해서, 좀 더 과격하게, 영화'매드 맥스'의 암울한 전사의 이미지를 표현한 '장 폴 골티에'의 컬렉션.이밖에도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많이 쓰이는 패션 아이템 중엔 펑크 스타일인 것들이 매우 많다.청바지를 찢어 입는다거나 귀나 얼굴에 피어싱을 하는 것 등…펑크만의 도발적이고 파괴적인 감각은 젊은이들에게 매우 자극적이면서도 흥미로운 것이다.우리나라의 경우에도 인디 락 가수들이나 그의 팬들의 경우 펑크 스타일을 추구하는 매니아들이 있고 한떄 가수 서태지 또한 이런 펑크룩을 입고 나와 유행시킨 적이 있을만큼 펑크룩은 젊은이들에게 있어서 매우 개성있고 한번쯤 해보고 싶은 패션 스타일이다.이러한 경향은 좀 더 자유롭고 싶고, 좀 더 경박하고, 과격하고, 퇴폐적이고... 반항을 하고 싶은 그런 심리의 표출이라고도 할 수 있다.여지껏, 너무 재미 없었으니까,옷으로 만이라도...PAGE 4PAGE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