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목명: 종교 심리학 교수명: 남은경 님학 과: 기독교 교육과 학 번: 1999021014 제출자: 박민지--------------------------------------------------------------------인간의 파괴성과 그 변형심층 심리학과 기독교 신학새로운 세기의 시작과 함께 우리는 인간의 공격성의 문제를 새롭게 돌아보아야 할 필요를 갖게 되었습니다. 특히 인간의 파괴성이 과연 변형될 수 있겠는가 라는 물음이 우리의 중요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이것에 대해 기독교 신학은 우리의 영적인 삶에 공격성을 포함할 때에만 신학 그 자체가 살아있을 수 있고 이 세계 안에 영혼의 삶을 창조할 수 있다고 증언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신앙의 활기를 잃어버리고, 그저 습관적으로만 기도하고, 형식적으로만 예배를 드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공격성을 의식으로부터 분열시켜 버린 증거입니다. 우리의 의식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공격성은 그때 우리 믿음의 핵심인 열정까지도 함께 가져가 버린 것입니다. 온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기 위해서 우리는 공격성을 필요로 합니다. 우리가 우리들 자신 안에서 공격성의 뿌리를, 특히 그것의 파괴적인 측면의 뿌리를 발견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우리에게 더 이상 진정한 것이 되지 못하며, 하나님은 더 이상 우리들 바깥에서 진정으로 존재하는 진정한 하나님이 되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세상에서 정의를 행하기 위해서 우리는 영적인 삶 안에 공격성을 포함해야 하며, 이러한 종류의 영적인 삶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싸움들로 가득한 세상을 삶으로부터 유리될 수 없습니다.공격성과 파괴성공격성이란, 자발적인 몸짓과 순수한 운동성 그리고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직접적인 반응에서 표현되는 에너지로 보는데 동의합니다. 공격성은 우리 안에 있는 동물적인 충동입니다. 마침내 공격 본능과 에로스가 융합에 도달하는 모습을 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에 파괴성이 타자들의 세상과의 관계 안에서 우리 안에 있는 창조적인 상상력으로 변형되는 모습을 발견합니다. 요점은 이것입니다. 삶을 시작하는 유아에게 있어서처럼, 어떤 관계라도 그 시발점에서는 파괴성과 공격성이 서로 혼합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공격성을 책임있게 받아들여 우리의 심리적 영역을 밝히고, 우리 자신의 출현하는 자기감을 지키고,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과의 동일시를 이루어내고, 기술을 발달시키고,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피할지를 선택하는데 사용할 수 있을 때에만, 우리는 차츰 공격적 에너지를 사용이 가능한 에너지의 형태로 변형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열정적인 헌신을 바치기 위해서 공격성을 필요로 합니다. 모든 이론가들은 예외 없이 우리의 정신 건강과 사회를 위험에 빠뜨리는 것이 억압된 공격성과 의식되지 못한 파괴성으로부터 온다고 말합니다. 억압된 공격성은 융이 집단 무의식이라고 부른 것과도 한데 섞이게 됩니다. 억압된 공격성은 바로 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의식 안으로 분출해 나오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것은 무의식 안에서 자아나 집단 무의식에 의해 제한받지 아니한 채 자라납니다. 그것이 종교적 신앙으로 스며들어갈 때, 그것은 그 믿음을 엄청나게 팽창시켜 무서운 하나님의 이미지를 만들어내고 그래서 우리의 아이들을 공포에 떨게 합니다. 그때 그 하나님은 우리가 실수하는 것을 지켜보다가 벌을 주는 하나님이 됩니다. 여기에서 해야 할 것과 해서는 안 될 것을 정하고, 항상 우리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르는 규칙의 신학이 생겨납니다. 우리가 우리의 파괴성을 의식으로부터 분열시켜 버린다면, 우리는 멜라니 클라인이 말하는 편집-분열적 자리에 머무르게 됩니다. 우리의 내면에 갇혀 있는 파괴성은 계속해서 바깥의 적을 만들어내고, 우리가 그 적에게 우리의 파괴성을 투사하는 동안 그 파괴성은 더 무서운 것으로 자라게 됩니다. 파괴성은 무의식 안에 갇혀 있게 되며, 보다 원시적인 형태로 퇴행하고, 더 많은 불안을 생성해냅니다. 수용되지 못한 인간의 파괴성은 개인과 사회 모두를 위험에 빠뜨리고 맙니다. 파괴성을 분열시킨 채 의식 안에 받아들이지 않을 때, 많은 에너지가 소실되고, 따라서 우리의 삶은 활기를 빼앗기게 됩니다. 우리는 생존할 수는 있겠지만, 살아있다는 진정한 느낌은 갖지 못합니다. 이러한 모든 현상은 변형된 파괴성으로부터 나오는 상상력 있는 에너지를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파괴성의 분열은 선함 또한 침몰시킵니다.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완벽한 선함의 기준에 맞추어 살지 못할 때, 우리는 그들을 공격하고, 심지어 박해하고, 정죄합니다. 우리의 파괴성을 선함으로부터 분열시키는 것은 정치적 및 사회적인 영역에서 우리-그들이라는 태도로 나타납니다. 그러나 완벽한 선함은 실패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어떤 유한한 것도 무한한 선함을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때 우리는 선함 그 자체를 공격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우리는 우리의 파괴적 에너지를 의식 안에 허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그것은 통제될 수 있고, 변형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자기가 최선의 것이 되기를 바라는 존재입니다. 이러한 욕구들이 충분히 인정받을 때 그 욕구들은 변형될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그 욕구들을 부인한다면, 그것들은 원시적인 상태에 머무르고, 파괴적인 것으로 변하게 됩니다.변형의 공간파괴성의 변형은 우리와 타자들 사이의 공간에서 일어납니다. 종교는 이것이 우리 자신과 하나님 사이에서 일어난다고 말합니다. 이 공간은 우리가 아무 것도 분열시키지 아니한 채 있는 그대로 존재할 수 있는 의존할 만한 곳이어야 합니다. 우리와 타자 사이의 공간 확장을 가져오는 두 가지 일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우리자신들에게 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 욕망이 지닌 강력한 힘이 우리와 타자 안에 구멍을 남기지는 않을까 염려하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의 본능적인 공격에 의해 손상 입은 타자를 회복시키기를 원하며 우리와 타자 모두가 온전한지를 확인하고자 합니다. 이때 우리는 파괴성이 전적인 파괴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타자가 살아남아서 우리와의 접촉을 우지하고, 보복하지 않으면서 우리의 회복을 위한 몸짓을 받아줍니다. 그때 우리는 타자가 우리의 착함에 의존되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진정한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둘째는 타자에게서 입니다. 인격, 하나님, 또는 생각은 그것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이미지와 정확하게 맞지 않습니다. 즉 타자에 대한 우리의 그림은 타자의 실제 현실에 의해 파괴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하나님 이해에 있어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 자신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을 만들면서 우리 자신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존재라는 사실을 잊어버리는 경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끔찍스런 일을 만날 때, 우리는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우리를 버렸다고 느끼고, 그 하나님은 우리의 유치한 소망의 대상이었을 뿐이라고 생각하면서 환멸에 빠지게 됩니다. 우리는 우리를 해 받음으로부터 안전하게 지켜주는 보호자로서의 하나님 상을 상실하고 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생각 바깥에서 진정되고 친밀한 존재로서 거기에 계십니다. 이러한 견고함이 바로 하나님 사랑의 특성입니다. 위니캇의 이해에 따르면, 우리와 타자 사이의 이 공간에서 발생하는 파괴성의 변형은 두 가지 결과를 가져옵니다. 하나는 이미 언급한 것으로서, 타자. 대상 또는 하나님이 우리의 투사에 달려있지 않은 진정한 실재 그 자체로서 우리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파괴성의 변형에 따른 우 번째 결과는 우리의 무의식 안에서 창조적 상상력이 증가하는 것입니다. 파괴성의 변형이 일어나는 이 공간에 대한 융의 견해 또한 유용한 것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이런 종류의 갈등에 익숙해 있으며, 우리는 그것이 파괴성과 연관되어 있다고 간주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어떤 것을 하고자 하지만, 우리 안에 있는 다른 부분은 그 반대의 것을 하기를 원합니다. 요약하면, 인간의 파괴성의 변형을 촉진시키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 다른 사람들 안에,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 있는 무자비한 파괴성을 인식하고, 그것의 현존을 부인하거나 그것의 생명력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억압하지 말아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파괴성을 부인한다면, 우리는 이 에너지와의 접촉을 잃어버리게 되고, 생명력을 잃어버리며, 다른 사람들을 죽이게 됩니다. 그때 거기에는 전쟁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사용함으로써 우리 자신 안에 있는 상반되는 관점들을 직면하고, 양 편 모두의 말을 듣고, 그것들 사이의 열띤 내적 대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점진적으로 새로움의 선물을 가져다주는 상징을 통해서 새로운 관점이 나타나게 됩니다. 우리가 한 번도 전에 생각해 본적이 없는 해결 방안이 우리의 마음속에 떠오르는 것입니다. 우리의 공격성이 이 개인적 뿌리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서로를 위한 지속적인 사랑에 도달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