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까레리나』의 레빈의 형상오블론스키의 친구인 레빈은 끼찌에게 구혼을 하기 위해서 시골에서 올라왔지만, 이미 브론스키에게 마음을 두고 있는 끼찌에게 거절당한다. 모스크바의 기차역에서 안나를 보게 된 브론스키는 안나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들게 되었고, 그녀를 따라 페테르부르크로 감으로써, 끼찌는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실연으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은 끼찌는 건강을 해치게 되어 독일의 온천지로 요양을 간 후 다시 건강한 몸이 되어 러시아로 돌아온다. 한편 끼찌에게의 구혼을 거절당한 레빈은 고향에 돌아와 농업 경영에 힘쓰지만 끼찌를 잊지 못한다. 그는 농업 문제를 시찰하기 위해 다녀온 유럽 여행의 귀로에서 모스크바 오블론스키의 집에 들러 끼찌를 다시 만나고, 구애하게 된다. 곧 끼찌도 그의 성실한 인품을 존경하게 되고, 그의 사랑에 감격해 지난날의 실례를 사과하는데 이로 인해 두 사람은 급격히 가까워져 주위 사람들의 축복을 받으면서 결혼한다. 끼찌와의 평화스런 생활 속에서 레빈은 가끔 심각한 의문에 봉착하게 된다. 신은 존재하는가 , 사람은 대체 무엇 때문에 살고 있는가 하는 의문으로 괴로워하고 번민하면서 그 해답을 구하기 위해 철학서적을 탐독하지만, 어떤 철학서적도 인생의 의의 같은 것을 분명하게 밝혀 주지는 않는다. 레빈은 주변 사람들의 생활방식에 눈을 돌려, 소박한 농민들이 그런 의문 따위는 조금도 품지 않고 정직한 마음으로 신의 존재를 믿고 신의 뜻에 따라 살아가고 있음을 깨닫고 감동한다.▶소설속의 레빈레빈은 민감하며 감수성이 예민한 인물이다. 또한 자신의 행동과 말을 가급적이면 일치시키려고 노력하는 인물이며, 도덕적인 생활과 정신적인 생활이 가져다 주는 가치를 이해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모든 일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으며 모든 일에 대해 자신의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다. 그는 유물론자들로부터는 존재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플라톤, 스피노자, 칸트, 헤겔, 쉘링, 쇼펜하우어 등과 같은 이 인생을 유물론적으로 설명하지 않는 철학자들의 책을 다시 읽어보기도 하는 인물이다. 그는 슬라브주의자였고 개화된 인물이자 동시에 러시아 민중들을 사랑하고 있다. 민중들을 경멸하는 지주와 논쟁을 벌이기도 하고 민중들의 노동을 사랑하며 민중들의 노동을 몸소 체험하기도 했다. 그러나 레빈은 삶의 기쁨이 생의 유일한 목적이라면 이러한 목적 속에는 절망만이 끼어 들 수밖에 없음을 느끼고 아무런 이유와 원인도 모른 채 회의에 빠지기 시작한다. 평범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던 레빈은 결국 정신적인 위기를 맞이하게 되고 삶의 근본적인 목적과 이유를 혼동하며 자살의 결심으로 치닫는다. 그러나 그러한 와중에 인생에 대한 절망과 불신으로 가득 찬 레빈으로 하여금 다시 한번 생에 대한 충일감에 사로잡히도록 도와준 것은 한 사람의 소박한 농부인 표뜨르의 말을 통해서였다. 즉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을 위해서 살아가야 한다는 그의 말 때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생에 대한 회의와 절망 자살의 충동으로부터 레빈을 구해낸 것은 바로 농민의 신앙 속에 내재해 있던 신과 신의 실재에 대한 믿음과 선인 것이며 이 선이야말로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명백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유일한 표시였던 것이다.레빈은 모든 인간은 자기의 영혼 속에서 선의 원칙을 느끼고 있으며 이 선의 원칙은 인간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계명처럼 이웃을 사랑하라는 의식을 갖게끔 해주는 생명력의 윤리적 원동력이다. 레빈의 생각에 따르면 모든 사회 활동은 이러한 선의 원칙에 기초해야 하며 일반적인 행복의 성취는 이 선의 원칙을 엄격하게 준수할 때만이 가능한 것이다. 결국 레빈은 신의 섭리가 내재해 있는 민중의 보편적 정신을 통해 선의 원칙을 발견하며 이것이 지상적 삶의 최고의 가치 척도임을 믿게 된다. 그러나 레빈은 이성을 통해 이것을 전수하고 있는 교회의 교리에 대한 의구심을 가지게 되며, 「그렇지만 나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믿을 수가 있을까?」 하고 자문을 한다. 말하자면 가르침은 이성과 언어 속에서 잘 이해되고 있지만 그것의 본질적인 내용은 이성이 지배하는 합리적인 지식을 통해서 전수되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레빈은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레빈의 이미지를 통해 살펴 본 이러한 일련의 과정들은 톨스토이 자신의 전기적인 요소에 나타난 정신적인 궤적과도 동일한 맥락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톨스토이는 안나 까레리나를 탈고할 무렵인 1877년부터 1879년까지 레빈과 유사한 존재론적인 정신적 위기를 겪었고 이러한 위기의 원인과 사상적 변전의 계기를 1877년부터 집필하여 1882년에 탈고한 참회록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작가의 투영인 레빈톨스토이는 작중인물인 레빈으로 하여금 여러 문제에 대해서 비판하고 있는데 바로 레빈은 톨스토이 자신의 사상을 대변하고 있다. 작품의 배경이 된 시대는 농노가 해방 된지 얼마 안 된 무렵으로 작품에서 작가는 농노 해방의 결과 빚어진 새로운 사회적 상황의 양상과 사법제도의 개혁, 슬라브민족의 해방을 비롯해 그 당시의 경제문제 교육 예술의 전반에 관해서 레빈을 통해서 깊이 성찰하고 있다. 는 그런 점에서 단순한 연애소설이 아니라 일종의 본격적인 사회 사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레빈은 농민 문제와 신의 문제와 많이 연관되어 있다.(신에 대한 믿음이 선인 것이며, 이 선이야말로 하느님의 존재에 관한 명백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유일한 표시였던 것이다.)레빈은 귀족 지주로서 농민들에게 충분한 이해와 동정을 갖는 진보적인 지주이기는 했지만 급진적이지는 않았다. 그는 농민들의 가난에 비하여 자신의 부가 불공평함을 의식하면서도 적극적으로 농민을 구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그보다는 그런 죄의식을 갖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자신도 부지런히 일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삼가려고 결심하는 정도에 머무르고 있다. (레빈같은 사람들은 아무리 오랫동안 농민들과 함께 생활할지라도 결코 서민과 융합될 수 없으며, 그 뿐만 아니라 많은 점에서 그들을 결코 이해할 수 없다...아무리 노력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에는 아직도 나태함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다소간 남아 있을 것이다.) 이는 톨스토이가 농민들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을 레빈으로 하여금 보여주고 있다. 톨스토이는 이에 대해서 이렇게 얘기하고 있다.「우리 자신의 것이 아닌 에서 사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없다. 타간로그에서 페트로파블로그스크항으로 추방된 한 농민은 그곳에서 바로 친숙한 러시아 소작농들을 발견하고서 바로 그들과 조화되고 그들과 더불어 잘 살아간다. 이것은 명문출신에게는 불가능하다. 그는 서민들에게서 완전히 불리 되어 있는데 그것은 이 신사가 갑자기 이전의 특권이 박탈되어 서민의 일부가 될 때에만 충분히 명백해진다. 친구로서, 은인이나 보호자로서 일생동안 서민과 매일같이 접촉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결코 그들의 진정한 본질을 알 수 없다. 우리의 그들에 대한 지식은 환상이요, 그 이상이 아니다.」
{꼭두각시 놀음의 역사적 유래와 그 성격삼국·고려·조선왕조로 이어진 우리의 민속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의 내용을 볼 때, 지금으로서는 조선 왕조 말기의 색채가 짙지만, 그것은 돌연발생적인 것이 아니라 큰 줄기의 내재적 자기 흐름에 의한 것으로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고구려에까지 소급되는 인형에 대한 문헌적 기록을 시작으로 하여, 그 후 어느 때부터 인형 놀음이 놀아졌느냐하는 실증적 기록을 떠나서 이 민족의 자생적 필연성에 의하여 발생한 정적 또는 동적 인형에 우리 나름의 토착적 민중의지가 첨가되어 발전되어 왔다. 그러는 과정에, 삼국시대 중엽 이후로부터 고려 초 이전에 걸치는 시기에 서역계의 인형 놀음이 중국을 거쳐 들어와 그것이 기존의 인형 내지는 인형놀음과 혼습되어 오늘날의 꼭두각시놀음의 초기적 구성을 보여주게 되는 것 같다.그 후 이것은 민중의 모임이나 축제 등에서 놀아지다가, 점차 봉건적 지배체제의 중앙집권화에 따라, 고려 이후로는 지배계층과 피지배층간의 대립관계의 심화에 의하여 저항적 민중 연희로 발전하게 되고, 그 연희자 역시 더욱 철저한 유랑 생활을 면할 수 없게 되는 것으로 보인다.꼭두각시놀음을 유랑예인집단 남사당패가 담당해 왔음은 이 인형극의 성격을 아는 데 하나의 단서가 된다. 민중에 의한, 민중을 대상으로 한, 민중놀이집단의 놀이로서 이 인형놀음은 맥락을 이어오는 것이다. 이러한 민중 놀이 집단은 조선왕조에 들어와 지배계층으로부터의 더욱 심한 박해를 받기에 이르러 거의 조선왕조의 운명과 함께 쇠퇴하여 가고 만다. 간혹 일제치하 이후에도 잔존한 남사당패거리가 있었지만, 그들 역시 침탈자에 의하여 왜곡, 변질되며 민중놀이로서의 성격을 끝내 지키지 못하고 만다.그 후 명맥마저 끊어지는 듯하다가 1960년대에 들어와 문화공보부 문화관리국에 의하여 꼭두각시놀음이 중요 문화재 제3호로 지정됨을 계기로 지금은 이 그의 전수사업을 벌여오고 있다.{꼭두각시 놀음의 어원(語源)꼭두각시 놀음은 일반적으로 , , 등의 명칭으로 통용되기도 하며, 이 놀이의 연희자들은, '버나(대접돌리기)', '살판(땅재주)', '어름(줄타기)', '덧뵈기(탈놀음)', '덜미(꼭두각시 놀음)' 등으로 짜여지는데, 그 마지막 순서로서 꼭두각시 놀음이 로 나타나고 있다.란 '목덜미를 잡고 논다'는 데서 비롯되었다 하며, 실제 공연장에서 '덜미 놀자' ,'덜미 맞추자'라는 말이 상용어로 되고 있다. 꼭두각시 놀음의 인형을 담는 괴짝은 '덜미고리'이고 꼭두각시 놀음의 무대막은 '덜미 포장'이다.라는 말 다음으로 많이 사용되는 것이, 오늘날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는 이다. ,, , 등을 들 수 있는데, 이 '꼭두'에 각시가 합성하여 꼭두각시로 되었고, 뒤에 붙은 '놀음'은 '놀다'의 어간에 어미 '음'이 붙어서 명사화한 것으로 볼 수 있다.{꼭두각시 놀음의 전체 구성 ⇒ 2마당 7거리1 제1마당 : 박첨지 마당1 박첨지 유람 거리→ 박첨지가 팔도강산을 유람하던 중 꼭두패의 놀이판에 끼여들어 구경한 얘기와 유람가 등을 부른다.2 피조리 거리→ 박첨지의 딸과 며느리가 뒷 절 상좌중과 놀아나다가 갑자기 나타난 홍동지에게 쫓겨난다. 홍동지도 뒤따라 퇴장한다. 박첨지가 다시 나와 딸과 며느리가 잘 놀던가를 '산받이'에게 묻자, 홍동지가 나타나 쫓겨 들어갔다고 하니, 괘씸한 놈이라며 잠시 들어가 혼내주고 나온다.3 꼭두각시 거리→ '산받이'에게 자기의 큰 마누라 꼭두각시의 행방을 묻고 노래조로 부르자, 꼭두각시 나타나 보괄타령(영감타령)을 주고 받으며 즐기다가, 박첨지가 말하기를 그동안 혼자 살기가 어려워 작은 마누라(덜머리집)를 얻었다며 대면시키자, 두 여자의 싸움판이 벌어진다. 하는 수 없이 살림을 나눠주는데, 덜머리집에게만 후하게 하자 꼭두각시는 금강산으로 중 되러 가겠다며 퇴장하고, 박첨지는 오히려 잘 됐다며 덜머리집을 얼싸안고 퇴장했다가, 다시 나와 이번에는 꼭두각시를 찾으며 울자, '산받이'가 왜 우느냐고 물으니 너무 시원해서 운다며 다시 들어갔다 오마고 한다.4 이시미 거리→ 박첨지가 나와서, 중국에서 날라온 청노새가 우리 곳은 풍년들고 저희 비롯하여 박첨지 손자, 피조리, 작은 박첨지, 꼭두각시, 홍백가, 영노, 표생원, 동방석이, 묵대사 등의 순서로 나오는 족족 잡아 먹는다. 박첨지가 나와 산받이에게 앞서 나온 자들의 행방을 묻자, 이시미의 짖임을 알려주니 박첨지는 겁없이 곁으로 갔다가 박첨지마저 물린다. 이 때 홍동지의 등장으로 박첨지는 살아나고, 홍동지는 이시미 껍질을 팔아 옷 좀 해입어야겠다며 퇴장한다. 다시 나온 박첨지는 자기가 살아난 것은 홍동지의 덕이 아니고, 자기 명에 의한 것이라며 이시미를 팔아 부자가 되었을 홍동지를 찾아 내겠다며 퇴장한다.2 제2마당 : 평안감사 마당1 매사냥 거리→ 박첨지가 나와 평안감사의 출동을 알리고 큰일 났다고 퇴장하면, 평안감사 나타나 박첨지를 불러 치도(治道)를 잘 못 했음을 꾸짖고 매사냥 할 몰이꾼을 대라고 하자, 홍동지를 불러 매사냥을 한다. 꿩을 잡은 평안감사가 박첨지에게 꿩을 팔아오라 하며 떠나면 뒤따라 모두 퇴장한다.2 상여 거리→ 다시 박첨지가 나와, 매사냥을 하고 돌아가던 평안감사가 황주 동실령 고개에서 낮잠을 자다가 개미에게 불알 땡금줄을 물려 죽어버려 이번에는 상여가 나온다며, 다시 들어갔다 나오는 사이에, 상여가 등장하고 박첨지가 상여 곁에 서서 대성통곡을 하자, 산받이가 그게 누구 상여인데 그렇게 슬피 우느냐고 물으면, 어쩐지 아무리 울어도 싱겁더라 하며 익살을 부린다. 다시 상주가 박첨지에게 길이 험하여 상도꾼들이 모두 다리를 다쳤으니 상도꾼을 대라 한다. 산받이가 홍동지를 부르자 역시 벌거벗고 나와 상주에게 온갖 모욕을 주고 상여를 메고 나간다.3 절 짓고 허는 거리→ 박첨지가 다시 나와, 이제는 아무 걱정 없다면서 명당에 절을 짓겠음을 알리고 들어가면 상좌 둘이 나와 조립식 법당을 한 채 짓고는 다시 그것을 완전히 헐어 버리고 들어간다.{{꼭두각시 놀음의 등장 인물· 동물[인형]{박첨지(노인, 주역이자 해설자를 겸함), 꼭두각시(박첨지의 본 마누라, 추녀), 홍동지(박첨지의 조카, 발가벗은 힘꾼), 덜머리집(박첨 지의 첩,흰 두 얼굴을 가진 남자), 표생원(시골양반), 묵대사(득도한 고승), 영노(걸신들린 요귀), 귀팔이(뜯기다 못하여 귀까지 나풀대는 백성의 한 사람), 평안감사(권력의 상징으로 내 세운 탐관오리), 작은 박첨지(박첨지 동생), 박첨지 손자(저능아, 3인), 상주(평안감사의 아들), 동방석이(삼천갑자를살았다{동방삭), 잡탈(마을사람 남자, 3인), 사령(평안감사의 매사냥 장면 과 상여장면에 나오는 관속, 3인), 상도꾼(평안감사의 상여를 맨 사람, 12인)[동물] 이시미(용도 뱀도 아닌 상상의 동물), 매, 꿩, 청노새(곡식을 축내는 중국에서 온 해조(害鳥)){[기타] 절, 부처, 상여, 명정, 만사, 요령, 영기, 부채 등{꼭두각시 놀음의 내용상 특징꼭두각시놀음은 고전극의 한 종류이면서도 색다른 면모를 지니고 있는 것은, 박첨지의 일대기적 성격을 묘사한다는 점이다. 즉, 박첨지 일가의 파탄과 구원이라는 줄거리를 일괄적으로 지니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또한 당시의 시대 상황을 잘 표현하고 있다. 제2막은 파계승에 대한 풍자를, 제4막은 어지러운 세상에 대한 풍자를 볼 수 있다. 제5막에서는 일부처첩제로 인한 가부장적 가족제도의 모순과 서민층의 생활상을, 제6막에서는 지배계급의 횡포와 그에 대한 풍자를, 제7막은 지배계급에 대한 신랄한 풍자와 조롱을 보여준다.제8막에서 절을 짓는 것은 주인공의 종교에의 귀의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며, 마지막에 절을 허는 것은 토속사상과 외래종교인 불교와의 상극이라는 해석으로, 또는 종교마저 뛰어넘는 주인공의 초월사상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꼭두각시 놀음의 무대꼭두각시놀음은 종래 주로 각 농촌 부락으로 돌아다니면서 하였으므로 그 장소는 대체로 시골 동네 타작마당, 또는 시골 장터에 가설(假設)한다. 무대는 넓은 장소 한 부분의 귀퉁이에 길고 굵은 기둥 4개를 1개씩 세우고, 포장(布帳)으로 막을 삥 둘러친다. 무대는 비교적 높게 되어 있으며, 인형 조종사는 그 포장 막 속에 들어가서 인형을 조종한다. 극을 연출할 때는 4∼5명의 다. 그런 다음 끄나풀을 잡아당기어 인형을 조종하면서 서로 대화하고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른다. 대화(재담) 중 몇몇 등장인물은 죽관(竹管)을 통한 가성(假聲)을 내어 마치 각 인형이 제각기 발음하는 것 같이 특이한 효과를 낸다. 무대는 높게 되어 있으므로 관객들은 고개를 들어 쳐다보면서 구경을 하게 된다.{꼭두각시 놀음의 연희자(演戱者)1. 대잡이 → 인형의 대를 직접 조종하는 사람2. 산받이 → '산이 받이'로도 불리워지며, 실제 인형의 조종자는 아니지만, 모든 인형과의 대화자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다. 판소리에서의 고수와 매우 유사한 것으로 전체의 연출에까지 관여한다.{꼭두각시 놀음의 연희 시간꼭두각시놀음은 대체로 1시간 정도로 끝마치는데, 다소간 신축성이 있다. 이것은 조종사의 그때그때의 형편에 따라 연희 시간을 길게도 하고 짧게도 하는데, 내용 줄거리에는 별로 변함이 없다. 짧은 시간에 빨리 연출을 마치려 할 때에는 몇 막을 줄이기도 하고, 또 내용 재담을 대강대강 말하여 줄이기도 한다. 그리고 길게 할 때에는 우스갯소리와 잔소리를 다소 집어넣기도 하지만, 음악 반주에 따라 추는 춤을 오래 추게 하거나 소리를 오래하여 시간을 늘이기도 한다. 이것은 그때 형편도 형편이지만 조종사의 장기, 즉 재담보다도 소리를 잘 한다든지, 또는 소리보다는 재담을 잘 한다든지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꼭두각시 놀음의 장단과 춤사위1. 악기 구성 → 꽹과리, 북, 징, 장고, 날라리(때로는 피리) 각 한 개씩2. 장단 → 염불, 타령, 굿거리 장단 등3. 춤사위 → 주로 '굿거리 장단'에 맞추어 이루어지는데, 인형의 동작 부위가 거의 양손 뿐이어서 양손을 올렸다 내리며 상반신을 흔드는 것으로, 풍물놀이에서의 상체만으로 추는 '무동춤'과 유사하다.{왜 했을까?안마당 7거리로 짜여진 서로 연관된 줄거리 속에 비교적 그 바탕을 양반이 아닌 백성들에게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꼭두각시놀음을 행함으로써 다음과 같은 효과를 거둔 것 같다.첫째, 가정에서 아버지의 권위가 니다.
현대사회는 사회 구조가 크게 변화해 가고 있으며 이런 변화의 시대에 대해 사회학은 대응해야할 필요가 있다. 원래 사회학은 현대 사회의 원형인 근대 사회의 탄생과 더불어 성립하고 그 사회의 여러 모순과 위기를 극복해야 할 실천적 과학이여야 한다고 규정되어 왔다. 그 후 미래를 예견하는 일도 포함해「어디에서 어디로」라는 문제는 사회변동론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회학이 사회체제의 변화에 대한 문제를 외면했기 때문에 구조적인 파악을 지향하는 이론이라기보다는 제 사회가 시계열적 변형한다는 사회진화론과 그것을 전제로 한 사회유형론이 주류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여러 사회의 유형이나 형태의 변화를 설명해도 그 변화의 구조적 파악과 형태 변화의 구조적 원인이나 필연성을 해명하는 일은 중요시하지 않았다. 사회학의 과학으로써의 엄밀성이 강조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여러 변화에 대해서도 사회학의 학설은 여전히 그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이론의 서로의 관련도 애매하고 난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D.벨이 현대 사회의 변화를 공업사회로부터 탈공업사회로의 발전으로 파악한 것은 유명하다. 그에 의하면 서구 근대에 있어서의 공업사회의 구조의 기초원리는 최소 코스트, 대체성, 최적화, 최대화와 같은 원칙 하에 자원을 배분하는「경제화」였던 것에 대해, 탈공업사회와의 사회 구조의 기초 원리는 기술혁신과 이론적 지식에 의한 정책결정이 그 근간으로 되고, 그것은 공익성에 근거한 예측, 계획화의「사회학화」의 양식을 취한다. 이러한 새로운 사회구조의 특징은 재화생산경제로부터 서비스경제로의 변천, 의사결정상의 새로운 지적 기술의 전개이고, 따라서 장래의 방향성은 기술관리와 기술적 평가에 달려있고 그 담당자로서의 전문직·기술직 계층과 같은 테크노크라트의 역할이 중요해진다. 벨은 이 논쟁에서 직접적으로는 정치형태와 문화를 분석적으로 분리했다. 그리고 사회구조가 그 정치 형태나 문화에 준 제 영향을 문제로 삼았다.이것에 대해 대중사회로부터 포스트 대중사회로의 전환 또는 대중소비사회로부터 고도대중사회로의 전환을 주장하는 제 논자들은 소비 스타일과 그 문화에 있어서 대량 획일 생산에 근거한 대량소비로부터 다품종 소량 생산에 근거한 개성화적 소비, 차이적 소비에의 변화를 인정하고 있다. 또한 포스트 모더니즘은 주로 건축 디자인이나 예술분야의 운동, 근대 합리주의적 과학에 대한 비판 등을 근거로 해서 모던을 초월한 포스트모던적 상황에의 전환을 주장하고 있다.근·현대는 스스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의존하고 있는 철학 내지는 메타이론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역사적 이성의 변증법 내지는 직선적 진보를 상정하는 진화론, 이성적 인간 내지는 노동자로서의 해방을 위한 주체의 해방, 부의 발전·성장과 같은 논리에 의거하고 있는 한, 그런 논리에 의거하는 것은 「모던」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과학이나 지식에 국한하지 않고 건축이나 문화예술에서 사회구조에도 해당된다. 즉, 모던 사회는 뉴톤적인 기계테크놀러지나 그 논리에 의거해서 美나 진보, 평등과 같은 이념적인 사실까지 정당화하려고 한다. 건축에 있어서의 기능미, 관료조직에 있어서의 효율성, 공평성의 추구는 그것을 단적으로 표시하고 있다.이것에 대해 포스트 모던은 앞서의 메타이론에 의거한 근대성 논리에 대한 불신감이라고 말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이미 이런 근대의 시대는 끝나가고 잇다. 말하자면 현대사회는 역사상 최고로 발달한 시스템이며 중단 없이 진보하는 것으로서의 역사의 끝마감을 예감케 하는 것 같은 상황이 존재하게 된 것이다.포스트모더니즘이 지지를 얻는다고 한다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언설 그 자체뿐만 아니고 그런 제 상황의 존재가 크게 공헌하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예컨대 컴퓨터·전자기술의 보급에 따른 다양한 커뮤니케이션 미디어는 나아가서 그것과 제휴하면서 그런 기술에 의해 다품종 소량 생산을 가능케 한 유연한 생산·유통과정은 전의 기계적인 관료제적인 것이 만들어낸 제 환경과는 다른 사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고도 정보화, 서비스화, 그리고 탈조직화,네트워크화한 산업화, 또는 산업조직에 직접 관련하는 표현으로서 이업종 교류, 업태 변화, 유동화등 다양한 표현이 사용되고 있지만 분자론적인 차이적인 언어게임이 지배하는 것 같은 상황이 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부유한 소비 사회이고 「풍요로운 사회」의 다른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아마도 이런 제 상황을 사회이론으로서 정식화하려고 시도한 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을 흡수한 자기조직성의 이론일 것이다. 하나의 사회가 있는 것이 아닌 다수의 사회가 분산하고 있는 상태하에서 다수의 사회로부터 그 규칙, 가치, 심볼 등을 스스로 자신의 안에 끌어들여 차이화하면서 자기언급=자기반성을 한다. 그것은 움직이는 타인과의 관계에서 끝없이 자기와 타인과의 경계의 재정의를 한다. 즉 이 관계에서 얻는 정보를 해석하면서 끝없이 경계를 재정의해 가는 과정 속에 자기 해석 과정을 편입해 넣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 차이화와 자기 언급을 통해 자기자신과 타인과의 관계를 변화시켜 항상 자기와의 관계의 초월을 추구한다는 과정이 자기 조직화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모던의 질서를 허물고 네트워크 형태의 분산 구조적 조직을 창조하려고 한다.그런데 자기 조직성의 이론은 知의 자기반성의 수준에 지나치게 편중되어서 구체적인 사회구조론을 전개 할 수 없다라는 추상성을 면하지 못하고 있다. 자기반성 사회는 하나의 이미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런 사회 이미지는 새로운 인간상에도 투영되고 있다. 즉 그 사회에 있어서는 知가 정보 네트워크에 의해 끝없이 재편되고 있기 때문에 이런 사태는 마치 자연스럽고 개인주의적 같이 보인다. 그렇기에 이런 사회를 「부드러운 개인주의」가 성립한 사회라는 인식이 나오게 된다. 인간 상호간의 게임 중에서 각 개인이 복수의 집단에 다원적으로 소속해서 다양한 자기를 연기한다. 이와 같은 다양한 사교성 내에서 다양한 자기·복수의 역할을 유연하게 연기해내는 개인화의 원리야말로 근대성의 개인화의 원리와는 다른 부드러운 개인주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이나 이론은 포스트모더니즘 그 자체가 새로운 포스트모더니즘적 제 상황에 규정되고 있고 그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반영하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것이다.그러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와 쇠퇴와는 별도로 포스트모더니즘쪽으로 역사가 이행해 가고 있다고 느끼게 하는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그것은 소위 「동구혁명」이며 「소련의 제2차 혁명」이라고 하는 정변과 소연방의 소멸이다. 즉 마르크스이래 사상사적으로 구상되어 온 사회주의가 하나의 사회체제로서 존재해있었는데 , 그 붕괴는 또 하나의 「현대」의 끝남이고 그런 뜻에서 세계는 「새로운 시대」라는 의미로 탈 현대의 시대로 진입했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이 맥락에서는 사상도 포함해 「사회주의」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다. 자본주의 사회는 민족문제, 환경문제나 핵무기의 관리, 안전보장 등 지금까지 이상으로 복잡한 곤란한 문제를 짊어져 앞으로 다양한 자본주의 발전의 길이 상정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일찍이 「사회주의체제」에 대항해서 세계의 제 사회의 서구형 산업사회의 수렴을 소박하게 주장해 온 산업사회론이 오히려 이 자본주의적 제 사회의 「수렴을 종말」의 현실 앞에서 「패배」했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다.오늘날의 현대 사회의 구조적 전환을 파악하려는 사회학적 주장은, 각각이 대상으로 하고 있는 변화의 수준이 동일하지는 않지만 공통사항을 조작적으로 설정하면, 새로운 사회 제 관계를 구성하는 규정적 제 요인중에서의 지식과 정보의 우위이고 그것이 미치는 사회적 제 귀결에의 관심이다. 이것은 이미지로서는 잘못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생각했을 경우 약간의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예컨대 知는 정보 네트워크에 관련하는 동시에 상품화하고 화폐가 유통하는 네트워크와 동질의 네트워크에 대해 유통하게 된다. 물론 이 상품화는 물건으로서의 상품의 생산 유통과는 다른 방법일 것이다. 코스트의 극소화나 노동의 착취도 포함해 생산성의 향상 논리는 知의 세계에는 적용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다. 또 아이디어나 디자인이 담겨진 상품의 가격결정이 확실치 않은 것같이 知의 부가가치계산은 구체적으로는 곤란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知나 정보 또는 서비스의 상품화는 기본적으로는 자본축적과 시장의 논리에 종속한데로 있다. 또 다품종 소량생산이나 융통성 있는 생산체제는 컴퓨터·전자기술의 힘에 의존하고 있기는 하지만 결국은 라인이라는 생산 시스템을 사용하고 있으므로 그전의 모던 형태와는 결정적으로 다른 변화는 발생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이 문제는 검토되어야할 극히 중요한 문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소비쪽으로 눈을 돌리면 여유 있는 그럴듯한 미래생활을 소비하려는 사람들의 욕망을 포착한다는 것은 많은 시장을 잡는 것이 될 것이다. 이 풍요로운 사회의 분위기 속에서 용솟음치고 있는 가까운 미래를 소비하려는 욕망은 포스트모던의 의식이나 생활양식에 따른 것이 아니고 새로운 것이 가치를 갖는다는 현대의 의식에 쫓기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더구나 이렇게 형성되는 소비공간이나 생활공간은 외관상으로는 현대의 것과 크게 다르게 보이지만, 자본의 도시화라고 할 고정자본의 전개의 논리속에서 생기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