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비전향장기수의 귀향으로 본 기록의 중요성비전향 장기수 김석형 선생은 1992년 12월 24일 성탄절 특사로 풀려났다. 1961년 남파후 1년만에 체포되어 수형 생활을 한지 만 30년 만이었다. 그는 2000년 9월 북한으로 송환될 때까지 8년을 남한 사회에서 살았다. 그가 남한 땅에서 한 일 중 하나는 그의 기록을 이곳에 남기는 것이었다. 1994년 11월 시작된 면접은 1998년 6월에 끝났고, 60분 테이프 100개 분량의 기록을 남겼다. 기록자는 이 기록을 연구자들에게 공개해도 되는지 물었고 그는 “북으로 간 후나, 아니면 죽게 되면” 그 때 공개하도록 제한조건을 달았다. 그는 자신의 말 중에 90년대 말 남한사회에서 받아들여질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자신의 기록이 시대의 한계에 의해 왜곡되지 않기를 희망했다. 그가 2000년 9월 송환됨에 따라 그의 기록은 공개될 수 있었다.20세기 한국사의 축소판(microcosm)으로서의 개인사김석형 선생은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에 입당하여 덕안면 당위원장의 책임을 맡고, 면에 남겨진 일본인을 본국으로 송환하고, 토지개혁을 주도하였다. 1947년 신의주로 근무지를 옮겨서 중국 국공내전 당시로 국경지대에서 일어나는 중국공산당의 투쟁을 목도하였다. 이후 계속해서 도내 정보사업을 담당하였고 1948년에는 해주 38경비대대 정보계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월남자를 단속하고 월북자를 돕는 일을 하였다. 그해 말에는 함경남도 정치보위부 제1과장으로 임명되어 당에 비협조적인 고위 인사들을 ‘길들이는’ 사업을 수행하였다. 1955년 함흥안내소 소장 겸 국제호텔지배인으로 임명되어 정치사업을 수행하였다. 1958년에는 평양상점 부지배인으로 임명되어 평양생활을 시작했다. 일개 면당위원장에서 10여 년 만에 평양상점 부지배인으로 자리를 옮긴 것은 그의 능력을 당에서 인정하였기 때문이었다. 이때 북한사회는 정치적 대부분 반대파가 숙청되고, 전후 복구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농업과 상공업 분야의 사회주의적 경영형태가 정착되어, 점차 안정된 체제를 갖추어 나갔다. 그는 통일에 기여하기 위해 46세에 남파 정치공작원을 자원하여 1961년 7월 임진강을 건너 남파되었다. 그는 1962년 12월 체포될 때까지 약 1년 6개월간 남한에서 생활하면서 생활기반을 확보하려 하였다. 그런데 암달러시장에서 바꾼 달러가 역추적되어 체포되었다. 무기징역이 선고되었고 1992년 출소할때까지 30년간 0.75평의 독방에서 자신의 사상을 지켜나갔다.구술기록의 가치: 역사의 체감온도이 기록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 기록되지 않거나, 기록이 부족한 역사적 사건에 대한 사료로서의 가치이다. 예를 들면 식민지 연구, 해방 후 약 20년간 북한사회 연구, 70-80년대 한국 감옥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둘째, 이 기록은 진술의 이면에 있는 구술자의 의식을 분석하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그가 ‘무엇을’ 이야기하느냐 뿐만 아니라, 그가 ‘왜’ 그렇게 이야기하느냐도 분석의 대상이 된다. 진술의 논리적 흐름, 틀리게 기억하는 것들, 구술자의 자부심? 후회? 은폐 등이 때로는 중요한 정보가 될 수 있다. 김석형 선생의 구술자료는 연구자의 작업을 통해 ‘북한사람의 의식’을 드러내는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진 제국의 통일과 진시황진시황제는 500여 년 동안 제후들의 각축장이었던 중국 대륙을 최초로 통일한 사람이다. 이름은 정(政), 그의 출생에 얽힌 다음의 비화가 전해진다. 전국 시대에 조(趙)나라에 인질로 잡혀와 있던 진 (秦)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대상인 여불위(呂不韋)가 도와주었다. 그리고 여불위는 자신의 사재를 털어 자초가 진(秦)의 왕위에 오르도록 적극 후원하였으며 자신이 총애하던 여자를 자초가 좋아하게 되자 그녀를 자초에게 넘겨주었는데 그녀는 당시 여불위의 아이를 뱃속에 갖고 있었다. 자초는 결국 진의 왕이 되었으며 이렇게 해서 태어난 아이가 자초가 죽은 뒤 진의 왕위에 올랐으니, 바로 시황제라는 것이다. 정(政)은 스스로 시황제라 칭하고 정치 혁신을 단행하였다. 중앙 정부의 기구를 행정?감찰?군사의 3 권으로 나누어, 승상?어사대부?태위를 각각 장관으로 하였다. 또한 이 사의 의견을 따라 봉건제를 폐하고 군현 제도를 실시하여, 전국을 36군(뒤에 48군)으로 나누고 중앙으로부터 관리를 파견하여 통치하게 하는 등 중앙 집권적 관료 국가 체제를 갖추었다. 그 외에도 사상의 통일, 분서 갱유, 도량형의 통일, 화폐의 통일을 행하였다. 대외적으로도 적극책을 써서, 남방의 남월을 토벌하여 남해(南海)?계림(桂林) ?상(象)의 3군을 두었고, 북방으로는 흉노를 정벌하여 몽고 고원으로 몰아내고 장성을 수축하여 동은 랴오뚱으로부터 서는 임조에 이르는 만리 장성을 완성하였다. 장성은 길이가 2700km이며, 펼치면 5000km가 되었다. 이것들은 진시황 때 전부 축조된 것이 아니라 전국시대 각 국(진, 위, 조, 연)이 축조한 장성을 진시황 때 보수하고 연결하여 완성한 것으로 지금 현존하는 명 대의 장성보다 북쪽에 위치해 있다.천하를 통일한 진은 국가 통치의 모든 권력을 중앙에 집중시키는 중앙 집권적 정치제도를 확립하였다. 진왕 정(政)은 왕의 칭호를 전설상의 삼황 오제(三皇五帝)를 뜻하는 '황제'로 바꾸어 그 격을 높였고, 전국을 36군으로 나누어 군에는 수, )의 유여(由余), 완(宛)의 백리해(百里奚), 송(宋)의 건숙(蹇叔), 그리고 진(晉)의 비표(丕豹)와 공손지(公孫支)를 맞이하여 서융의 패자가 되었고, 효공은 상앙을 중용하여 지금 진나라의 영토가 천리인 강대국으로 번영했으며, 혜왕은 장의(張儀)의 '연횡책(連橫策)'을 써서 6국의 합종(合縱)을 해체시켜 진나라에 복종하게 했습니다. 또 소양왕(昭襄王)은 범휴를 중용해 '원교근공책(遠交近 攻策)'으로 진나라 제왕의 업을 이룩했습니다. 만약 이 네 사람을 다른 나라 사람이라 하여 중용하지 않았다면 오늘과 같이 강대한 진나라는 없었을 것입니다. 태산은 한 덩어리의 흙이라도 양보하지 않았기에 크고, 바다는 작은 물줄기도 자기에게 들어오는 것을 거절하지 않았기에 깊을 수 있으며, 임금은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물리치지 않기에 그 덕이 밝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들어온 인재를 물리치고 외객을 추방하려는 것은 원수에게 군사를 꾸어주고 도둑에게 식량을 공급해주면서, 진나라는 안으로는 인재 부족을 감수해야 하고, 밖으로는 각 나라의 원한을 사게 되니 어떻게 나라가 편하기를 바라며, 천하의 패자가 되고자 하는 위업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이 사(李斯) : 시황제가 왕이 된 B.C. 246년부터 B.C. 208년까지의 38년 간, 특히 후반의 25년 간을 승상으로서 시황과 그 2세를 보필한 사람으로, 전국 초에 상채에서 태어났다. 순자에게 사사하여 그 법치주의적 학풍의 일면을 정치면에서 발휘하였다. 시황제의 정책은 거의가 이 사가 계획한 것들이다. 선량?호쾌하며 재능? 학식이 아울러 뛰어난 사람이었으나, 시황제가 죽자 2세 황제 호해를 받들어 온갖 음모를 자행하던 환자 조고에게 기만당하여 그 방향을 잃게 된다. 시황제 37년(B.C 210), 시황제는 아들 호해(胡亥), 이사, 조고 등과 함께 다섯 번째 순행을 하다 50세의 한창 나이로 사구(沙丘)에서 급사하였다. 사태가 이에 이르자 재상 이사는 나라가 혼란해질 것이 두려워 환관 조고와 결탁하여 큰아들 부소(扶蘇) 함께 각 국의 문자를 하나로 통일했던 적이 있었는가? 사실상 기원전을 따질 필요도 없이 2천년이 지난 근대에 와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불세출의 영웅이었다는 나폴레옹은 물론이거니와 희대의 정복자 히틀러도 감히 그럴 생각을 품지 못했던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분명히 중국의 역사와 서양의 역사가 틀리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또한 광활한 영역에 걸쳐 있는 영토를 하나로 통일한다는 것은 그저 단순하게 인재나 영웅의 문제로만 볼 수 없음을 느낄 수 있으리라.서안에서 동쪽으로 약 30km떨어진 섬서성 임동현의 관중 평원에 솟은 여산 기슭에 진시황릉이 있다. 봉분은 사각형 평면의 원추형이며 처음의 높이는 약 115m, 바닥 너비 485m, 길이 515m, 둘레 2km 남짓의 크기였으나 오랜 세월 동안 비바람에 깎여 지금은 높이 76m로서 약 3분의 2정도 크기로 남아 있다. 능은 이 봉분을 중심으로 둘레 6.2km의 외성과, 둘레 3.8km 남짓의 내성, 그리고 각종의 부속 건축물과 배장갱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특히 봉분 안에는 다량의 금은보화가 함께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완성된 후 도굴을 막기 위해 인부들을 생매장했다고 하며 도둑의 침입을 방지하기 위하여 기계 장치로 작동되는 큰 활을 만들게 하여, 지면을 파고 가까이 오는 자가 있으면 저절로 발사되도록 하였다. 묘실(墓室)은 구리로 만들었고, 그 가운데에는 궁전과 백관의 좌선을 만들었다. 모든 진귀하고 기이 한 물건을 궁중에서 옮겨 여기에 채웠다. 또 수은으로 크고 작은 강과 바다를 만들고 기계로써 수은을 돌아 흐르게 하였다. 묘실의 위에는 천계(天界)의 모습을 구비하였고, 아래에는 지상의 형상을 갖추었으며, 인어(人魚?그 실체는 불명)의 기름을 가지고 불을 켜서 영원히 꺼지지 않도록 장치하였다. 사후의 세계도 지상보다 낫도록 호화스럽게 준비되었다. 진시황 사후 항우의 침공 때엔 황릉의 보물이 30만 명이 30일을 운반해도 다 못 가져갈 양이었고, 황릉을 태운 불꽃이 90일간 꺼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있는 군화의 밑바닥은 말발굽처럼 징이 박혀 있었고 입고 있던 갑옷 역시 가죽끈으로 쇠조각을 엮어 만들어져 있는 모양인데 크기며 조형이 완전히 실물을 그대로 본뜨고 있다. 보병(步兵)과 기병(騎兵)의 옷차림도 역시 틀리다. 더욱 경이로운 것은 이렇게 많은 진용(秦俑)들이 무질서하게 서있는 것이 아니라 엄격한 전투대형으로 일사불란하게 도열해 있다는 점이고 또한 그러한 진용(秦俑)들은 전반적으로 어떤 예술적 표준이나 기술상의 표준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이다.이상에서 거론한 진용(秦俑)의 면모들은 우리에게 진시황제의 능력이며 성격 이외에도 중국의 통일에 대해 사고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우선 생각나는 것으로, 오늘날의 과학 기술로 현재까지 출토된 진용(秦俑)을 그대로 만든다고 가정하면 -- 현재까지 출토된 진용(秦俑)의 숫자는 대략 7천 점 정도. 그러나 지금까지 발굴이 진행된 곳은 진시황제의 능묘가 있는 여산(驪山)의 일각에 불과하므로 여산 전체를 전부 발굴하게 되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진용(秦俑)이 출토될 지 미지수-- 무작정 덤벼들어서는 곤란하고 무슨 무슨 위원회(委員會)라는 것을 반드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마치 올림픽 준비위원회....이런 식으로 말이다. 그 위원회에는 당연히 장성급 군인이 참여해야 할 것이고 또한 조각가는 물론이려니와 과학자와 기술자도 참여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이렇게 다방면의 인재들이 장기간에 걸쳐 토론하고 지혜를 모아 연구 설계 및 제작해야만 2천년 전의 진용(秦俑)을 그대로 재현할 수 있을 것이다.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진시황제(秦始皇帝)라고 할 것 같으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저지른 희대의 폭군이라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가 무슨 인내심이 있어 이렇게 번잡한 작업을 위원회 비슷한 것까지 설치하고 장기간에 걸친 기획과 연구로 진용(秦俑)을 제작했단 말인가? 그가 정말 군인 정신에 투철하고 독재정치를 일삼았다면 왜 똑같은 모양으로 벽돌을 찍어내듯 일사불란하게 천편일률적으로 진용(秦俑)을 만들지 않고 하나같이 서 자신의 능력이외에도 중국의 지리적 자연적 환경과 백성들의 염원이 실은 중국의 통일을 재촉했다는 점을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점을 좀더 분명히 하자면 다음과 같다.최근 수 십년 사이에 발전을 거듭한 지질학(地質學), 기상학(氣象學), 고고학(考古學) 연구에 따르면 중국이 기원전에 통일을 이룩하게 된 비교적 근본적인 이유를 알 수 있다. 중국문화(中國文化)는 황하유역에서 발원했다고 믿어진다. 그런데 이 황하(黃河)는 황토(黃土)로 뒤덮인 광대한 영역의 토양을 굽이쳐 흐르고 있다. 황토(黃土)는 화북(華北)의 몇 개 성(省)을 관통하며 서해(西海)--중국 입장에서 보면 동해겠지만--흘러드는데 황하(黃河)가 지나가는 토지는 수 천년 수 만년에 걸쳐 미세한 황토 알갱이가 얕게는 1백 척(尺) 깊게는 3백 척 가량 축적되어 이뤄졌기 때문에 토질이 약하다. 토질이 약한 관계로 경작에는 용이할지 몰라도 황하(黃河)의 물줄기가 흘러가며 진흙같은 토사(土砂)를 함께 말아 간다. 세월이 흐르며 토사가 강바닥에 쌓이게 되면 자연히 황하는 제방을 넘어 인가(人家)는 물론이려니와 농작물과 가축을 휩쓸어 버린다. 광대한 영토를 가로지르는 황하의 물줄기는 어느 한 곳의 치수 사업만으로는 효과적으로 홍수를 제어할 수 없는 것이다. 황토 지역을 약 500여 킬로 가로지르는 황하(黃河)는 설령 관개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공급하여 주기도 했다지만 그러나 약한 황토 지층 때문에 장마철에 접어들면 엄청난 양의 황토 토사를 휩쓸고 내려간다. 보통 물에 먼지의 함유량이 5%만 되도 더러워서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 이 황하는 평상시의 황토 알갱이의 함유량이 30-40%에 달한다. 남미 아마존 강이 홍수 때 먼지 함유량이 12%에 달한다고 하는데, 황하의 경우 홍수 때의 황토 알갱이의 함유량이 최고 기록으로 63%까지 기록한 적이 있다. 즉, 음용수로 절대 불가능한 것은 둘째치고, 이 흙탕물이 서해 바다를 향해 흐르는 과정에서 황하의 바닥에 침전되는 황토로 말미암아 강바닥이 계속 높아졌던 것이다. 이게다.
양혜왕과 맹자의 대화를 원문 포함해서 기록함::: 양혜왕 상 제1장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찾아보시니,양혜왕 "선생께서 천리를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를 利롭게 함이 있겠습니까?양혜왕은 위나라 제후 앵이다. 대량에 도읍하여 왕이라 참칭하여 시호를 혜라 하였다. 에 고 하였다. 수는 늙은이의 존칭이다. 왕이 소위 利라고 하는 것은 부국강병의 류이다.맹자 "왕께서는 하필 利만을 말씀하십니까? 역시 仁과 義가 있을 뿐입니다.仁은 마음의 德이요, 사랑의 이치(理致)며, 義는 마음의 지음(制)이요, 일의 마땅함(宜)이다. 이 두 귀절은 이 장의 큰 뜻이니, 다음 글에 자세히 말하였는데, 뒤에는 이것을 많이 모방하였다.왕께서 말씀하시기를, 어떻게 하면 내 나라를 利롭게 할까 하시면,대부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집을 이롭게 할까 하며,선비와 서인들은 말하기를, 어떻게 하면 내 몸을 이롭게 할까 하여 위와 아래가 서로 이익만을 취하면 나라는 위태로울 것입니다.만승(萬乘)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천승의 집이요,천승의 나라에서 그 임금을 죽이는 자는 반드시 백승의 집이니,만(萬)에서 천(千)을 취하고, 천(千)에서 백(百)을 취하는 것은 적은 것이 아니지마는 진실로 義를 뒤로 하고 利를 앞세우면 빼앗지 않고는 만족하지 않을 것입니다.이것은 利를 구하는 것이 해(害)가 됨을 말하여 윗글의 하필 利를 말하느냐의 뜻을 밝힌 것이다. 정(征)은 취함이니, 위는 아래에서 취하고, 아래는 위에서 취하므로 서로 취한다고 한 것이다. 나라가 위태하다는 것은 장차 임금을 죽이고 약탈할 화(禍)를 말하는 것이다. 승(乘)은 수레의 수효이다. 만승(萬乘)의 나라라는 것은 천자는 기내(畿內)가 사방이 천리에 수레 만대를 낼 수 있고, 천승의 집이라는 것은 천자의 공경 채지(采地)가 백리에 수레 천대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천승의 나라라는 것은 제후의 나라이고, 백승의 집이라는 것은, 제후의 대부이다. 시(弑)는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죽이는 것이다. 염은 만족함이다. 신求, 而不復知有仁義. 故孟子言仁義而不言利, 所以拔本塞源而救其弊, 此聖賢之心也.]與民偕樂 여민해락 백성과 같이 더불어 즐긴다.::: 양혜왕 상 제2장맹자께서 양나라 혜왕을 찾아 뵈었더니, 왕이 연못가에 서 계시다가, 기러기와 사슴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어진 사람도 역시 이런 것을 즐겨 하십니까?"소는 연못이다. 홍은 기러기의 큰 것이고, 미는 사슴의 큰 것이다.맹자 "어진 사람이라야 이런 것을 즐길 수 있지, 어질지 못한 사람은 비록 이런 것이 있더라도 즐기지 못할 것입니다.이것이 이 장의 대의이다.에 말하기를'영대를 경영하기 시작하여 자리를 잡아 터를 닦으시니,모든 백성들이 그것을 지어 주어 얼마 안 가서 완성하였도다.경영하여 시작함을 빨리하지 말라고 하시나,모든 백성들이 아들처럼 오도다.왕이 영유에 계시니 우록이 그 자리에 엎드리는도다.우록은 살쪄 윤이나고, 백조는 깨끗하도다.왕이 영소에 계시니, 아! 가득히 물고기가 뛴다' 고 하였으니,문왕이 백성의 힘으로 대를 짓고 못을 파고 했으나 백성들이 기쁘게여겨 그 대를 영대, 그 못을 영소라하여 그 사슴과 물고기와 자라들을 즐겼습니다.옛사람은 백성과 더불어 같이 즐긴 까닭으로 능히 즐길 수 있었습니다.이것은 시를 인용해서 해석하여 어진 사람이라야 이것을 즐길 수 있다는 뜻을 밝힌 것이다. 시는 영대편이다. 경은 재어 헤아림. 영대는 문왕의 대(臺) 이름. 영은 꾀함(謀[而作]爲也 - 계획해서 작업한다). 공은 다스림. 불일은 아침부터 저녁까지가 못되는 것. 극은 빠름이니, 문왕이 빨리 하지 말라고 함이다. 자래는 아들이 와서 아버지의 일을 돕는 것과 같다. 영유와 영소는 대 아래 동산이 있고, 동산 가운데 못이 있는 것이다. 우는 암사슴. 복은 그 자리에 편안함이 있어 경동하지 아니함. 탁탁은 살지고 윤택한 모양, 학학은 결백한 모양. 오(於)는 감탄사. 인은 가득하다는 뜻.맹자께서 문왕이 비록 백성의 힘을 사용했으나 백성들이 도리어 기뻐하고 즐겨 이미 아름다운 이름을 더하고 또 그 만든 것을 즐겼으니, 대개 없게 하는 것입니다.산 사람을 양육하고 죽은 사람을 장사하는데 유감됨이 없게 하는 것이 왕도의 시초입니다.오묘의 택지에 뽕나무를 심으면 쉰살된 자도 비단옷을 입을 것이며,닭 돼지 개등의 가축을 기르는 데 있어서 그 시기를 놓치지 않으면 일흔된 자가 고기를 먹을 것이며,백묘의 밭에 그때를 놓치지 않으면 여러 식구의 집이 굶주리지 않을 것이며,학교 교육을 철저히 실시하여 효도와 공경하는 법을 가르친다면 반백된 노인이 길에서 짐을 지거나 이고 다니지 않을 것입니다.일흔살 먹은 노인이 비단 옷을 입으며 고기를 먹을 수 있고, 백성이 굶주리지 않으며 추위에 떨지 않게 하고도 왕노릇을 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개와 돼지가 사람이 먹을 것을 먹어도 제지할 줄을 모르고,길에 굶주려 죽은 송장이 있어도 창고의 곡식을 풀어낼 줄 모르고,사람이 죽으면 말하기를 "나 때문이 아니라 흉년 때문이다"고 하니,이 어찌 사람을 찔러 죽이고도 "나 때문이 아니라 병기때문이다"고 말하는 것과 다르겠습니까? 왕이 풍년과 흉년을 탓하지 않으시면 이에 천하의 백성이 이를 것입니다."정자 "맹자가 왕도를 논한 것이 이와 같으니 가히 충실하다 할 것이다."또 "공자시대에 주나라 왕실이 비록 쇠미하나 천하가 오히려 주나라를 존중히 여김은 의로움인줄 아는 까닭이다. 고로 춘추 때에는 주나라를 존중함으로서 근본을 삼았고, 맹자시대에는 7 국이 패권을 다투어 천하가 주나라가 있음을 알지 못하고 백성이 도탄에 빠짐이 이미 극에 달하니, 이때를 당하여 제후가 능히 왕도를 행하면 곧 왕노릇을 할 수 있다. 이것이 맹자가 제와 양의 임금에게 권한 것이다. 대개 왕이란 천하의 의로운 임금이니 성현은 어떤 마음일까? 천명의 고침과 고치지 않음을 볼 뿐이다"梁惠王章句上 三章.梁惠王曰: [寡人之於國也, 盡心焉耳矣. 河內凶, 則移其民於河東, 移其粟於河內. 河東凶亦然. 察隣國之政, 無如寡人之用心者. 隣國之民不加少, 寡人之民不加多, 何也?]寡人, 諸侯自稱, 言寡德之人也. 河內河東皆魏地. 凶, 歲不熟也. 移民以就食, 移방해서 장사에만 썼는데도 공자께서 오히려 미워하셨거늘, 하물며 실제로 백성들을 굶주려 죽게 하겠는가를 말한 것이다.이씨 "임금된 사람이 본래 짐승을 거느리고 와서 사람을 먹일 마음은 없지만, 그러나 자신의 사욕만 좇고 그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으면, 그 영향이 반드시 이에 이를 것이다. 그러므로 백성의 부모가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니 부모가 그 자식에게 이롭게 하고 해를 피하게 하는 것을 잠시라도 잊어 후회하는 일이 없었거늘, 어찌 보기를 개나 말만큼 여기지 않음에 이르렀느냐?"------------------------------------------------------------------------梁惠王章句上 四章.梁惠王曰: [寡人願安承敎.]承上章言願安意以受敎.孟子對曰: [殺人以정與刃, 有以異乎?]曰: [無以異也.]정, 杖也.[以刃與政, 有以異乎?]曰: [無以異也.]孟子又問而王答也.曰: [포有肥肉, 廐有肥馬, 民有飢色, 野有餓莩, 此率獸而食人也.厚斂於民以養禽獸, 而使民飢以死, 則無異於驅獸以食人矣.獸相食, 且人惡之. 爲民父母, 行政不免於率獸而食人. 惡在其爲民父母也?君者, 民之父母也. 惡在, 猶言何在也.仲尼曰: {始作俑者, 其無後乎!} 爲其象人而用之也. 如之何其使斯民飢而死也?]俑, 從葬木偶人也. 古之葬者, 束草爲人以爲從衛, 謂之芻靈, 略似人形而已. 中古易之以俑, 則有面目機發, 而大似人矣. 故孔子惡其不仁, 而言其必無後也. 孟子言此作俑者, 但用象人以葬, 孔子猶惡之, 況實使民飢而死乎?○李氏曰: [爲人君者, 固未嘗有率獸食人之心. 然殉一己之欲, 而不恤其民, 則其流必至於此. 故以爲民父母告之. 夫父母之於子, 爲之就利避害, 未嘗頃刻而忘於懷, 何至視之不如犬馬乎?]可使制정 가사제정 그렇게 하면 몽둥이를 들고서도 ...with [only] sharpened sticks ...::: 양혜왕 상 제5장양혜왕 "진나라가 천하에 최강임은 선생께서도 아시는 바 입니다. 과인의 몸에 이르러, 동으로는 제나라에 패하여 큰 아들이 죽고, 서쪽으로는 진나라에게 국토를 칠백리나 빼앗겼고, 남으는 사람을 죽임이 더욱 많으므로 천하가 더욱 혼란하였으니 秦과 晉, 隋는 힘으로 합하였으나 드디어 나라가 망했으니, 맹자의 말씀이 어찌 우연이라 하느냐."------------------------------------------------------------------------梁惠王章句上 六章.孟子見梁襄王.襄王, 惠王子, 名赫.出, 語人曰: [望之不似人君, 就之而不見所畏焉. 卒然問曰: {天下惡乎定?} 吾對曰: {定于一.}語, 告也. 不似人君, 不見所畏, 言其無威儀也. 卒然, 急遽之貌. 蓋容貌辭氣, 乃德之符. 其外如此, 則其中之所存者可知. 王問列國分爭, 天下當何所定. 孟子對以必合於一, 然後定也.{孰能一之?}王問也.對曰: {不嗜殺人者能一之.}嗜, 甘也.{孰能與之?}王復問也. 與, 猶歸也.對曰: {天下莫不與也. 王知夫苗乎? 七八月之間旱, 則苗槁矣. 天油然作雲, 沛然下雨, 則苗渤然興之矣. 其如是, 孰能禦之? 今夫天下之人牧, 未有不嗜殺人者也, 如有不嗜殺人者, 則天下之民皆引領而望之矣. 誠如是也, 民歸之, 由水之就下, 沛然誰能禦之?}]周七八月, 夏五六月也. 油然, 雲盛貌. 沛然, 雨盛貌. 渤然, 興起貌. 禦, 禁止也. 人牧, 謂牧民之君也. 領, 頸也. 蓋好生惡死, 人心所同. 故人君不嗜殺人, 則天下悅而歸之.○蘇氏曰: [孟子之言, 非苟爲大而已. 然不深原其意而詳究其實, 未有不以爲迂者矣. 予觀孟子以來, 自漢高祖及光武及唐太宗及我太祖皇帝, 能一天下者四君, 皆以不嗜殺人致之. 其餘殺人愈多而天下愈亂. 秦晉及隋, 力能合之, 而好殺不已, 故或合而復分, 或遂以亡國. 孟子之言, 豈偶然而已哉?]齊桓晉文 제환진문 제환공과 진문공Duke Huan of Ch'i and Duke Wen of Ch'in::: 양혜왕 상 제7장제선왕 "제환공과 진문공의 일을 들려 주시겠습니까?"맹자 "중니(孔子)의 문하생들이 환공, 문공의 업적을 말한 사람이 없으므로 후세에 전해진 것이 없어서 듣지 못하였으니, 마다 않으시고 들으신다면 王道에 대하여 말씀하겠습니다."왕 "과인 같은 사람도 백성을 보호할 수가 있겠습니까
정초(鄭樵)의 통지(通志)송대사학은 ‘통(通)’을 구하는 데 특징이 있어 북송중기에 사마광의 《자치통감(資治痛鑑)》이 나왔고, 남송 초에 정초가 《통지》를 지어 더욱 뚜렷해졌다. 두 책은 시간적으로 80년의 차이가 있으나 하나는 편년사로서, 또 하나는 기전사로 고금을 통관하는 사서였다. 다시말하면 송대에 일어난 통사의 바람이 정초의 《통지》에 와서 극치를 이룬 것이다. 그리고 정초는 본래 서명을 ‘통사(通史)’라고 하였다가 뒤에 《통지》로 정하였다.1.정초의 사학1)일생정초(1104~1162)는 자가 어중(漁仲)으로 복건 흥화(興化, 현재 복건 보전(?田)의 한 하층 관리의 집에서 태어났다. 가정의 영향을 받아 어려서 독서를 좋아하였다. 자라서는 실학(實學)을 숭상하여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학문연구에 뜻을 두었다. 16세 때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당형인 정후(鄭厚)와 함께 협제산(夾?山)에 초당(草堂)을 짓고 평생을 학문 토론과 저술로 보내 그를 협제선생이라 불렀다. 정강 2년(1127)에 금군이 남하하여 변경을 점령하고 휘종과 홈종이 포로가 되어 붙잡혀가게 되자 정씨 형제는 시서(詩書)에만 빠져있을 수 없다 하여 하산하여 금군에 저항하자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아 다시 산으로 들어가 실용적인 학문 연구에 정진하였다. 소흥 5년(1132)에 정후가 예부시험에 합격하여 천주(泉州)의 관리가 되었다. 이때부터 정초는 독자적으로 독서와 저술에 매진하였다. 그의 향리에서는 두 번씩이나 그를 효렴 유일(孝廉 遺逸)로 추천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았다. 정초가 16세에 협제산으로 들어가 학문을 연구한 이래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크게 네 단계로 나누어, 고종 건염 3년(1129)까지를 첫 단계로 보아 주로 『詩』,『書』를 중점적으로읽고 연구하였으며, 『禮』, 『樂』에 관련된 것을 읽었다. 이 시기에 정초는 《시변망(詩辨妄)》을 지어 사학계에 영향을 크게 끼쳐 주희마저도 그의 식견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소흥 11년(1141) 이전까지가 두 번째 단계로 문자학에 전념하였다. 대표적으로 《이아주(爾雅注)》, 《본초성서(本草成書)》등을 지어 동식물에 관한 지식을 학습하였다. 세 번째 단계는 소흥 18년(1148) 이전까지로 주로 도서목록과 교수학에 전념하였으며, 그 이후 《통지》를 완성할 때까지가 네 번째 단계였다. 그의 저서는 단편을 포함하여 95종에 달하며, 권수로 되어있는 것은 50종에 584권, 454편으로 권수가 표시되지 않은 것도 35종에 달하였다. 정초는 평민 학자여서 자기의 저작을 간행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정초는 자기의 저작을 조정에 올려 그의 재능을 인정받기를 원했기 때문에 세 차례나 불원천리하고 임안(남송의 서울, 항주)에 가서 황제에게 헌상하였다. 첫 번째는 소흥 18년(1148)으로 정초는 140권을 헌상하였고, 이로 인하여 진회(秦檜)의 아들 진희(秦熺)의 추천으로 우적공랑(右迪功郞)이 되었다. 두 번째는 소흥 28년에 고종에게 《통지》의 대강을 올려 고종의 칭찬을 들었다. 이에 우적공랑으로서 예?병부가각(架閣)을 겸임하였다. 그후 정초는 어사 섭의(葉義)에게 탄핵을 받았다. 세 번째는 소흥 31년(1161)으로 《통지》를 갖고 임안으로 가 헌상하였는데, 고종이 순행중이어서 만날 수 없었으나 추밀원 편수 겸 섭검상제방문자(攝檢詳諸房文字)에 봉해졌다. 다음해 고종은 《통지》를 헌상한 정초를 불렀으나 이때는 정초가 이미 중병에 걸려 있었으며 곧 세상을 떠났다.2. 사학 사상정초의 사학 사상은 치학의 범위가 넙고 또한 실학을 중시하여 당시 유행되고 있던 의리지학(義理之學)을 반대하고 또한 문장에만 치중하는 사장지학(辭章之學)을 낮추어 보았다. 그는 근면하게 독서하고 또 실제로 현지 조사를 중시하였다. 특히 책에 나온 내용과 실제를 비교하여, 서로 증명되는 것을 중시하였으며, 사물의 원류와 변화, 그리고 사물과 사물 사이의 관계를 인식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그의 ‘회통(會通)’사상의 이론이며 그의 사학 연구의 지도원칙이었다. 정초의 회통사상에서 회(會)란 횡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든 학술 내용을 한 책에 다 모은다는 것이며, 통(通)이란 종적인 것을 가리키는 것으로 고대부터 아래로 쭉 연결되는 것을 가리킨다. 전체적 입장에서 역사를 보아야 하기 때문에 그는 통사가 자강 적합한 사서의 체제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통사를 편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를 위하여 그는 《사기》의 편찬 체제가 역사 발전을 이해하는 데 편하다고 하였고, 반고와 《한서》에 대하여 낮게 평가하면서 단대사는 역사를 끊어놓는 것이 단점이라고 하였다. 그는 단대사의 폐단을 세 가지로 지적하여 첫째, 사람과 제도를 서술함에 중복을 피할 수 없고, 둘째, 전후가 서로 연결되지 않고 단절되며, 셋째로는 역사를 쓰는 사람도 통치자의 입장에 서게되므로 시비의 표준이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통지》가 출간된 다음에 후한 이래 단대사의 기전체 사서가 지배적이었던 것을 타파하게 되었고, 후에도 어느 정도의 영향을 끼쳤다. 중국 사학의 중심은 천인지제(天人之際)를 규명하는 것이었다. 전국시대 자사와 맹자가 천인합일(天人合一)설을 제출하고, 전한의 동중서(董仲舒)가 천인감응설(天人感應說)로 발전시켜 이후 참위와 도참 재상(災祥)의 이야기가 성해졌다. 그리고 후한 반고가 《한서》에 처음으로 「오행지」를 넣은 것이다. 후세 사가들이 천문과 오행을 넣고 점복(占卜)과 미신(迷信)이 도처에 보이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다. 두우는 《통전》에서 「오행지」를 삭제하고 미신적인 것을 타파했다. 그런데 정초는 이를 더욱 확대했으며 이론적으로 반박했다. 오행은 오히려 하늘을 속이는 것이라 하고 인간의 길흉과 자연재해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이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기 위해 《통지》안에 「재상략(災傷略)」을 두어 오행상응의 설을 없애고 그 요괴(妖怪)함을 끊었다. 「천문략」에서도 실제로 일어난 하늘의 변화를 기록하여 천문지식에서 미신적인 것을 탈피하도록 하는 그의 특징을 알 수 있다. 정초는 사가들이 정에 의하여 포폄하는 태도를 첨예하게 비판하였다. 이러한 포폄은 사람을 속이는 것이라 하고 《춘추》는 법제에 있지 포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하였다. ‘춘추필법’이란 후세 유생들이 통치자의 뜻에 따라 견강부회하기 위하여 나온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정초는 사가들의 책임은 진실하게 사사(史事)를 기록하는 것이며, 이렇게 되면 선악은 자동적으로 밝혀지며 포폄이 필요 없다고 하였다. 이는 당의 유지기가 곡필을 반대하였던 것을 계승?발전시킨 것으로 청대의 장학성도 이와 같은 주장을 펴 세 사람이 일맥상통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정초가 사학계에서 주관적 견해에 입각하여 멋대로 역사를 왜곡하는 상황과 관계하여 ‘포폄의 설’을 반대한 것은 역사를 사실적으로 기술하자고 주장한 것이며 정확한 역사를 제창한 것이다. 이것은 당연히 옳은 주장이다. 그러나 포폄을 근본적으로 폐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에는 지나치게 주관적인 측면도 있다. 사서에서 논찬을 하는 것은 사(史)와 논(論)을 결합한 것으로 이것은 중국 고대 사학의 좋은 전통중의 하나였으며, 역사현상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는 것이었으므로 정초처럼 “마치 가정 주부가 음식을 하는 데 힘쓰지 않고 오직 입만 나불대고 있는 것과 같다”고 배척해서는 안된는 것이었다. 또 사서에서 설사‘논왈’, ‘찬왈’과 같은 평어를 폐지했다고 하더라도 본문의 문장의 행간에서는 미화하거나 비난하는 것이 반드시 포함되게 마련이다. 정초의 《통지》속의 문장에서도 포폄은 항상 존재하였다. 예를 들어 항우가 ‘자립’하여 서초패왕이 되었다거나, 왕망이 신황제(新皇帝)를 ‘자칭’하였다거나, 공손술이 ‘참위(僭位)’하였다거나, 유수가 ‘황제의 위업을 이루었다’거나, 조비가 ‘선양을 받았다’거나 장각이 ‘반란을 일으켰다’거나, 이연이 ‘기병했다’거나 하는 것 등등은 글자 한 자의 차이에서 그 포폄이 분명히 드러난다. 따라서 정초가 주장한 포폄의 근본적 폐지도 불가능한 것이다.3.통지의 체례《통지》는 그의 대표작으로 200권이며 삼황(三皇)에서 수(隋) 공제(恭帝)의 역사를 《사기》를 계승하여 기전체로 쓴 통사이다. 그 내용은 「본기」,「열전」,「세가」,「재기」,「연보」,「략」등 6문으로 나뉘어 「본기」18권,「부후비전」2권, 「표」를 「연보」로 바꿔 4권,「지」를 「략」으로 바꿔 20종 52권,「주동성세가」 1권,「부종실전」8권,「주이성세가」22권,「열전」98권,「재기」8권,「사이전」7권으로 되었다. 이 가운데 20「략」의 냐용이 비교적 이름을 떨쳐 남송시대에 간행되었고, 《통지》전체가 간행된 것은 지원 대덕(至元 大德, 1264~1307) 연간이었다.1)연보《통지》의 ‘연보’는 곧 정사의 연표이다. 《통지》의 연보는 삼황에서 시작하여 당 고조 무덕원년까지 다루었다. 정초는, “유왕(幽王)이 서융(西戎)의 화를 만나 전적이 모두 인멸되어 서주 시대의 년도는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무릇 기년은 동주 이후의 것은 믿을 수 있으나 동주 이전의 것은 믿을 수 없다.” 그래서 그의 《통지》연보에는 춘추 이전은 세보(世譜)로 하여 세계(世系)만 나열하고 춘추 이후의 사실만 연보로 하였는데 노 은공(隱公) 원년부터 년도별로 표를 만들었다. 정초는, “천하를 위해서는 책이 없어서는 안되고 책을 위해서는 도보(圖譜)가 없어서는 안된다. 도(圖)는 상(象)을 싣고 보(譜)는 계(系)를 싣는 것으로 도는 원근을 널리 알기 위한 것이고, 보는 고금을 통찰하기 위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무릇 기(紀)는 편년의 유풍(遺風)을 답습한 것이고 전(傳)은 한 사람의 행적을 기록하는 것이다. 역사가는 기와 전을 쉽게 생각해서도 안되며 표와 지를 어렵게 생각해서도 안된다. 태사공은 책의 내용을 총괄하여 10표에 집약하였다.” “표는 책의 요약으로서 번잡하게 서술해서는 안되며, 표는 책의 근본이므로 지엽말단적인 것을 기록해서도 안 된다.” 이것으로 정초가 《통지》의 연보4권을 대단히 중시하여 고심한 후에 작성했음을 알 수 있다.
훈요십조(訓要十條)1.배경과 의미호족에 둘러싸인 고려초기의 불안한 정치 상황속에서 왕실의 명맥 유지 차원에서 태조 왕건이 943년(태조 26)에 박술희(朴述熙)를 통해 왕실의 후손들에게 당부한 유훈(遺訓)이다. 이러한 훈요십조의 내용은 불교와 토속 신앙, 풍수지리, 음양오행, 도참설 등에 대한 태조의 깊은 믿음을 잘 보여준다. 아울러 훈요십조가 기본적으로 왕실 내 가훈(家訓)의 성격을 갖는 것이기는 하지만 왕자(王者)로서 갖추어야 할 정책 운영의 방향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2.원문 #高麗史2卷-世家2-太祖○(癸卯)二十六年夏四月御內殿召大匡朴述希親授訓要曰: 朕聞大舜耕歷山終受堯禪高帝起沛澤遂興漢業. 朕亦起自單平謬膺推戴. 夏不畏熱冬不避寒焦身勞思十有九載統一三韓 居大寶二十五年身已老矣. 第恐後嗣縱情肆欲敗亂綱紀大可憂也. 爰述訓要以傳諸後庶幾朝披夕覽永爲龜鑑. 其一曰: 我國家大業必資諸佛護衛之力故創禪敎寺院差遣住持焚修使各治其業. 後世姦臣執政徇僧請謁各業寺社爭相換奪切宜禁之. 其二曰: 諸寺院皆道詵推占山水順逆而開創. 道詵云: 吾所占定外妄加創造則損薄地德祚業不永. 朕念後世國王公候后妃朝臣各稱願堂或增創造則大可憂也. 新羅之末競造浮屠衰損地德以底於亡可不戒哉. 其三曰: 傳國以嫡雖曰常禮然丹朱不肖堯禪於舜實爲公心. 若元子不肖與其次子又不肖與其兄弟之衆所推戴者 承大統其四曰: 惟我東方舊慕唐風文物禮樂悉遵其制. 殊方異土人性各異不必苟同. 契丹是禽獸之國風俗不同言語亦異衣冠制度愼勿效焉. 其五曰: 朕賴三韓山川陰佑以成大業. 西京水德調順爲我國地 之根本大業萬代之地. 宜當四仲巡駐留過百日以致安寧. 其六曰: 朕所至願在於燃燈八關燃燈所以事佛八關所以事天靈及五嶽名山大川龍神也. 後世姦臣建白加 者切宜禁止. 吾亦當初誓心會日不犯國忌君臣同樂宜當敬依行之. 其七曰: 人君得臣民之心爲甚難. 欲得其心要在從諫遠讒而已從諫則聖讒言如蜜不信則讒自止. 又使民以時輕 薄賦知稼穡之艱難則自得民心國富民安. 古人云: 芳餌之下必有懸魚重賞之下必有良將張弓之外必有避鳥垂仁之下必有良民. 賞罰中則陰陽順矣. 其八曰: 車峴以南公州江外山形地勢 趨背逆人心亦然彼下州郡人 與朝廷與王侯國戚婚姻得秉國政則或變亂國家或 統合之怨犯 生亂且其曾屬官寺奴婢津驛雜尺或投勢移免或附王侯宮院姦巧言語弄權亂政以致 變者必有之矣. 雖其良民不宜使在位用事. 其九曰: 百 群僚之祿視國大小以爲定制不可增 . 且古典云: 以庸制祿官不以私. 若以無功人及親戚私 虛受天祿則不止下民怨謗其人亦不得長享福祿切宜戒之. 又以强惡之國爲隣安不可忘危. 兵卒宜加護恤量除 役每年秋閱勇銳出衆者隨宜加授. 其十曰: 有國有家儆戒無虞博觀經史鑑古戒今. 周公大聖無逸一篇進戒成王宜當圖揭出入觀省. 十訓之終皆結中心藏之四字嗣王相傳爲寶.3.훈요십조의 내용● … 나도 외로운 평민으로서 그릇되게 여러 사람의 추대를 받았다. 더위와 추위를 무릅쓰고 19년 동안 노심초사(勞心焦思)한 끝에 3한을 통일하고 즉위한 지가 25년이 되었고 몸도 이미 늙었다. 후사들이 감정과 욕심에 사로잡혀 나라의 기강을 문란시킬 듯하니 이것이 크게 근심스럽다. 이에 훈요를 친히 써서 전하는 바이니, … 영구히 귀감으로 삼으라.1 나라의 대업(大業)은 반드시 부처의 힘을 입어야 하므로 선종과 교종의 사원(寺院)을 창건하고 주지를 보내어 각각 다스리도록 하되, 간신들이 승려들의 청탁을 들어 각 사원을 서로 다투어 빼앗는 일이 없도록 한다.2 사원을 함부로 세우면 나라의 운수(運數)가 오래가지 못한다고 도선(道詵)이 말했으니, 도선이 산수(山水)의 형세를 살펴서 세운 사원 외에는 마음대로 사원을 창건하지 못하도록 한다.3 맏아들이 왕위를 잇는 것이 올바른 법도이지만, 만약 맏아들이 어리석으면 둘째 아들이 왕위를 잇게 하고, 또 둘째 아들 역시 불초한 경우에는 나머지 형제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추대하는 자를 왕이 되게 한다.4 우리 나라는 사람도 땅도 중국과 다르니 반드시 중국의 제도를 따를 필요가 없다. 거란은 야만의 나라이고 풍속과 언어 또한 다르니 의관(衣冠) 제도(制度)를 함부로 본받지 않는다.5 서경(西京)은 수덕(水德)이 순조로와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 되니, 철마다 서경에 가서 머무르기를 모두 100일 넘도록 하여 그곳의 안녕을 이루도록 한다.6 짐(朕)이 지극히 원하는 것은 연등(燃燈)과 팔관(八關)이다. 연등은 부처를 섬기는 것이요, 팔관은 천령(天靈)과 오악(五岳)·명산(名山)·대천(大川)·용신(龍神)을 섬기는 것이니, 후세에 간신이 이를 더하거나 줄일 것을 건의하지 못하도록 한다.7 신하의 곧은 말은 따르고 헐뜯는 말은 멀리한다. 백성을 부리되 농사철을 피하고, 요역을 가볍게 매기며, 농사짓는 일의 어려움을 알아야 한다. 어진 정치를 하되 상벌(賞罰)을 도리에 맞게 하면 음양(陰陽)이 순조로울 것이다.8 차현(車峴 : 車嶺) 이남 공주강(公州江 : 錦江) 밖은 산지(山地)의 형세가 모두 거슬리는 방향으로 달리고 있으니, 그곳의 인심도 또한 그러 할 것이다. 따라서 그들을 등용하여 권세를 쥐게 하면 혹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9 나라의 관직을 함부로 늘이거나 줄이지 말며, 만약 공(功)이 없는 자, 사사로이 친한 자나 친척 등에게 관직을 주어 백성의 원망을 사는 일이 없도록 한다. 사나운 나라가 이웃에 있으니 항상 조심하고, 병졸들을 잘 돌보아 그 가운데 뛰어난 자에게는 관직을 더 해준다.⑩ 국가를 가진 자는 항상 무우(無虞, 無事)한 때를 경계해야 하며, 널리 경사(經史)를 널리 읽어 옛일을 거울로 삼아 지금을 경계하라. … [고려사] 태조 26년(943)4.훈요십조의 해석● 훈요10조(訓要十條)는 태조가 말년(943년)에 후사(後事)를 훈계하는 훈요10조를 지어 대대로 귀감을 삼도록 부탁하였다. 후삼국 통일 직후 지은 '정계'와 '계백료서'가 군주에 대한 신하의 도리를 규정한 것이라면, 훈요십조는 군주로서 지켜야 할 교훈을 남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