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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고도 성장기 이후의 일본경제의 흐름 평가A좋아요
    서두일본은 고도 성장기를 거치고 1960년대 후반 이후 일본의 국제 경제에 있어서의 지위는 크게 변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우선 첫째로 경제 대국으로의 부상이다.1968년에는 미 달러로 환산한 일본의 GNP는 미국, 소련에 뒤이어 세계 3위이다. 경제 대국 일본의 출현이다.둘째로, 무역수지 흑자와 선진국의 견제 강화이다. 일본의 경상수지는 1967년의 단기의 적자를 최후로, 안정된 흑자로 전환하였는데, 이는 국내의 경제 성장과 함께, 일본의 국제경쟁력이 강해지고, 1949년이래 360엔 대가 유지된 것에 기인한다.셋째로,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의 전환이다. 일본은 1967년 이후 종래의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전환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전환은 일본의 대외투자를 자극했다. 일본의 해외투자는 1965년까지는 총액 10억 달러에 이르지 못했으나, 70년경에는 36억 달러에 이르렀고, 그 뒤 더욱더 급격한 증가를 보였다.넷째로, 일본적 경제시스템이 확립된 것을 들 수 있겠다. 즉, 기업계열간 주식상호 보유로 보여지는 기업그룹의 존재, 연공임금, 종신고용의 고용시스템, 메인뱅크, 고정적인 주간사 증권을 중심으로 한 금융중개시스템, 경제의 여러 분야에 보여지는 세심한 공적규제 등을 들 수 있다.이러한 고도 성장기 이후에 일본은 안정 성장기와 버블경기, 버블붕괴 후의 침체기로 나뉘어지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안정 성장기1. 제 1, 2차 석유위기일본은 정부의 정책적으로 고정 환율제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1971년 8월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신 경제정책을 발표하면서 일본 정부와 일본은행은 360엔의 우지를 포기하고 변동환율제로 이행했다. 그 해 12월의 스미소니언 협정에 의해 엔 가치는 절상되어 1달러 308엔의 새로운 환율이 결정된 것이다. 이러한 엔의 가치 절상은 정부의 재정지출의 확대를 가져왔고, 일본은행은 과감하게 통화량을 계속적으로 증가시켰다. 이러한 통화 증가와 확대정책은 인플레이션을 초래했다. 더구나 세계의 흐름도 일본의 인플레이션을 촉진 시켰는데 측면에서 이루어졌는데 그 내용은 고용조정(고용량의 삭감)과 노동비용의 절약, 금융비용(금리부담)의 절감, 기타 비용절감(합리화)이 그것으로 이와 같은 여러 측면의 기업의 노력과, 이에 대한 정부정책의 대응 등이 맞물려, 감량경영은 5년 정도의 기간을 두고 일단 성공을 거두고, 78년 말부터 79년에 걸쳐서 기업이익률은 회복되어 갔다. 그러나 제2차 석유위기의 발생으로 오랜만에 찾아옴 1979년의 호황은 단기에 끝났다. 정부의 정책은 다시 긴축으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 때 재정금융당국은 제 1차 석유위기 때의 힘들었던 경험을 거울삼아, 신속하게 사태에 대처했는데, 그 대책은 성공하여 인플레이션은 큰 문제없이 수습되었다.이리하여 두 번에 걸친 석유위기는 극복되었으나, 전후 처음으로 물가 급등, 마이너스 성장, 경상수지 적자라는 세 가지 악영향을 경험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석유위기는,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발전해온 일본경제에 큰 충격이었다.석유위기 이후, 윈유를 비롯한 1차 상품의 가격상승에 의해, 중화학공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 성장에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석유위기 이후의 제조업은, 수입원료의 상승, 세계불황의 영향 등으로 인해 이전의 성장산업들도 불황에 허덕이게 되었다. 고도성장기 때부터 생산량이 감소해온 섬유산업 뿐만 아니라, 성장기의 주력 산업이었던 철강, 비철금속, 조선 등이 장기 불화에 빠진 것이다. 제조업의 부진 속에서, 예외적으로 기계공업은 급격한 진보를 보였는데, 이는 부가가치율이 높고, 수입원재료 의존도가 낮으므로, 기술적인 개량의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다. 특히, 승용차, 전자제품 등을 기계제품과 조합시킨 이른바 전기제품은 국내 보급률의 상승과 수출의 호조로 급격한 증가세를 보였다.2. 플라자 합의와 엔고불황제 2차 석유위기 이후, 1985년 여름에 이르기까지 엔 시세는 두 번의 짧은 파동을 보이면서 5년 간에 걸친 엔 절하의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1985년 뉴욕의 플라자호텔에서 개최된 9월22일의 5대 재무장관·중앙은행총재회의(G5), 이 수입물가 저하의 영향이 널리 확산 된 것이 첫째 요인으로 들 수 있다.경기 회복의 둘째 요인으로는, 엔고에 의한 수출가격인상을 회피하기 위한 기업 측의 합리화노력을 들 수 있다. 이 기간에 엔이 거의 두 배로 절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1985∼91년 사이의 수출가격의 인상은 20% 이하로 억제되어 있었고, 엔 표시로 보면 총 평균20%, 전기기계, 화학제품 등에서는 40% 가까이 하락하였다. 이리하여 수출형 산업에도 낮은 가격수준에서도 채산이 맞고 기업이 이윤을 낳을 만큼 합리화에 성공하였던 것이다.경기회복의 셋째요인으로는 제1차 석유위기 이후에 침체를 계속해 오던 건설부문의 호황을 들 수 있다. 기업의 설비투자도 오랜만에 호황을 보였고, 자동차, 일렉트로닉스 등, 성장 산업에 있어서는 설비의 신설확장이 많았다. 설비투자의 붐이 찾아온 이유는 1960년대 말까지 행해진 설비투자의 갱신의 시기가 온 것도 하나의 이유이고 무엇보다 절호의 조건이 된 것은 1986∼87년의 저금리였다.이리하여 석유위기 이후의 긴 조정의 시대는 80년대 중반에 끝나게 되나, 이러한 변화를 겪으면서 1985년부터 1988년 사이 해외직접투자가 급증하여, 해외에 진출하고 생산거점을 갖추는 기업이 대폭 증가하였다.버블경기1. 헤이세이경기 -버블경제-엔고불황 하에 시작된 저금리 정책은 1986년부터 89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일단 인하된 금리를 인상시킬 계기를 잡지 못한 채 연 2,5%라고 하는 기록적인 저금리가 2년에 걸쳐 유지된 것이다. 시중의 금리도 이에 따라 낮게 유지되어, 본격적인 설비투자의 붐을 만들었으나, 또한 그에 따른 몇 가지의 문제를 발생시킨 결과가 되었다. 저금리를 배경으로 대량의 자금이 주식을 비롯한 금융자산이나 부동산에 투입된 것이다. 이러하여 부동산, 특히 땅값의 상승폭은 놀라웠다. 특히 가격상승이 두드러진 것은 86, 87년부터로 3대도시의 상업지를 선두로 점차 파급되어갔다. 지가상승 때문에 무리하게 주민을 이주시켜 하나로 모은 용지를 조성하는 등, 사회문제까본의 국제적 역할이 한층 커져 무역액에 있어서도, 대외순자산의 규모에 있어서도 세계에서 최고의 지위에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의 경제동향이 전 세계에 미치는 영향은 커지게 되었던 것이다.2. 1970∼80년대의 산업정책일본경제가 안정 성장으로 이행하는 가운데, 산업구조심의회는 1971년 5월「70년대 vision」을 발표했다. 이는 중화학공업에서 새로이 지식집약화에로의 이행을 담고 있다. 지식집약형 산업의 예로서 연구개발집약산업, 고도조립산업, 패션산업, 정보처리산업을 들고, 이들이 속하는 산업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었다.「지식집약화」의 긴급성은 석유위기 이후 한층 높아져, 70년대 후반에는 대기업, 중소기업을 불문하고 널리 보급되게 되었다.80년대의 비전의 기본이념은 「창조적 지식집약화」였다. 이 비전은 기본적으로 70년대의 비전을 계승하고 있으나 앞으로는 도입기술이 아니고, 자주적인 기술개발이 주요하다는 판단에서 창조적 지식 집약화를 제창하고 모든 산업에 있어서 지식집약화를 적극적으로 추진한다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80년대 비전에서는 특정산업을 선정하지 않고, 오히려 철강이나 화학, 섬유 등을 포함해 모든 산업이 그 내부에서 지식집약화를 진행해야 함을 제안하는 것이었다.이러한 가운데 80년대의 전반의 중요과제의 하나는 제2차 석유위기에 의해 구조적 곤란에 직면한 산업의 축소와 활성화였다. 이를 위해 석유화학 등 기초소재산업을 중심으로 한 업종에 대해 설비처리와 사업제휴를 활성화하고 설비투자와 기술개발 등에 관한 지원조치가 강구되었다.1990년 7월에 책정된 90년대 비전 가운데, 90년대의 산업정책에 관련된 것에 대해서는 시장매커니즘이 적절히 작동하기 위한 환경조건의 정비라고 하는 종래의 기본노선을 유지하면서, 「국민생활의 중시」,「경제효율로부터 경제·사회효율」로, 「국제적 조화를 목표로 한 산업활동의 확립」,「장기적 발전기반의 정비」라고 하는 시점에 서서 추진할 것으로 되어있다.버블붕괴 이후의 동향1. 버블붕괴와 장기불황1980년대 후반의 엔고 하에 일본는 경기후퇴국면으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는 아직 긴 성장의 열기가 남아 있었고 주가나 지가의 재상승을 기대하는 분위기가 강하여 불황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경기는 1993년 10월에 최저점을 기록한 뒤 특히 94년 중반에는 제로에 가까운 저 성장이 계속되었다. 경제는 각종 경제정책에 의해 겨우 지탱되었다. 그러나 95년 한신아와지 대지진이 발생하면서 예상외의 수요가 추가되었다. 이와 함께 신상품들의 출시로 신규사업이 전개되는 등 신수요가 발생하면서 설비투자나 생산은 호조를 보였다. 90년의 버블 붕괴 후 비교적 경제가 양호했던 시기는 95, 96년의 2년간이었다.버블경기의 붕괴로 생긴 여러 가지 문제가 충분히 처리되지 않은 채 구조적인 변동이 계속되는 가운데 1997년 3월을 정점으로 경기는 후퇴국면으로 들어갔다. 내외 악조건 속에서 금융시스템의 불안이 현실화되고, 일본경제의 각 부문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그 첫째가 금융기관의 부실채권 문제였다. 버블경기의 붕괴로 인해 발생한 과잉설비와 고용과잉, 거액의 부실채권의 누적에 의한 부실화가 만연하였다. 80년대 말의 버블 경기의 시기에 과도한 성장기대와 지가 상승을 전제로 만들어진 시설과, 그로 인한 투융자의대부분이 처리되지 않은 채 중단되었던 것이다. 게다가 버블 붕괴 후, 보유주식의 자본 이익은 크게 감소하였다. 이 때문에 금융기관의 자기자본은 격감하고, 대형은행의 일부는 국제업무를 행하는데 필요한 자기자본 비율 8%를 넘지 못해 해외업무로부터 철수하기도 하였다. 일본 금융계로서는 전후 처음 겪는 심각한 위기였다.은행의 자기자본 비율이 하락한 가운데 민간투자자들은 출자에 신중해져, 시장을 통한 자본증가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은행은 자위수단을 취하게 되었는데, 각 금융기관은 저금리에 의한 영업이익의 확대로 부실채권의 상각을 추진하였다. 또한 가지자본비율의 개선을 목표로 자기자본비율의 분모에 해당하는 총자산의 압축, 즉 대출총액의 축소에 힘쓰게 다.
    경영/경제| 2004.11.29| 6페이지| 1,000원| 조회(7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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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제]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평가A좋아요
    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위대한 탐험정신 때문에? 실상은 그렇지 않다. 콜럼버스가 활동하던 1453년은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교도들에게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동쪽 무역로를 이용하려면 비싼 통행료를 내야 했다. 콜럼버스는 ‘할 수 없이’ 서쪽으로 간 것이고 우연치 않게 신대륙을 발견한 것이다. 이 책은 라틴아메리카를 전공한 저자가 서구 중심에서 벗어나 ‘지정학적으로 공정하게’ 바라본 세계사다.이 책의 큰 주제는 ‘서구 중심주의 벗어나기’다. 저자는 사회과학의 정전 대부분이 유럽을 세계체제의 중심부로서 눈부신 발전을 거듭한 지역으로, 아시아 문명권은 경제적인 정체와 전제정치에 신음한 지역으로 기술했다고 지적한다. 몽테스키외나 헤겔, 맑스, 베버, 브로델, 월러스틴도 이 함정에 빠졌다. 이들이 역사 서술 역시 서유럽 내지는 북서유럽을 중심에 놓은 위계 화된 서열구조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우선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해 보기로 하자. 이 책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1.발견이라는 미몽콜럼버스가 서쪽으로 간 까닭은 동쪽으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이슬람 교도들에게 넘어간 이후 동쪽 무역로를 이용하려면 비싼 통행료를 지불해야만 했다.제노바에서 상인 훈련을 받은 콜럼버스는 자연스레 값이 싸게 드는 무역로를 찾게 되었고 그러기 위해선 서쪽밖에 다리 택할 방법이 없었다. 당시 포르투갈과 스페인에는 제노바 사람들의 공동체가 여럿 있었다. 그곳에서 그는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이미 포르투갈은 대서양 연안 국가로 아프리카 남쪽 연안을 따라 항해하면서 아시아로 가는 루트를 찾고 있었으므로 콜럼버스에게는 서쪽 루트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유럽은 징기스칸과 티무르의 말발굽에 매번 시달리기만 했다. 오스만투르크 세력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자, 서유럽은 새로운 향로 무역루트를 찾아내기 위해 대서양으로 내몰렸다. 풍요의 땅인 인도와 중국을 동쪽 루트로 가기엔 힘이 부쳤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연찮게 스페인과 포르투갈이 행운을 잡게 되었고 을 건너 서인도 제도에 도착했다. 이제 바다는 서양의 무대가 된 것이다.서인도 제도와 아메리카에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모험가들로 들끓었다. 정복사업은 니체적 의미에서 권력의지의 실천이었지만, 카스티야보다 50배나 넘는 광할한 지역을 소유하게 된 스페인이 정복과 지배를 실행한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군사적 성격이 약했다. 군주는 황금에 눈이 뒤집힌 이들에게 정복사업을 허가했고, 그들의 에너지를 신대륙 에 풀어놓았다. 일종의 벤처 비즈니스를 활성화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일확천금을 꿈꾸며 대서양을 건넜고, 금은보화를 지니고 금의환향하거나 아니면 귀족 작위 하나쯤은 얻기를 원했다.16세기 스페인의 아메리카 정복을 북유럽 국가들은 잔혹한 학살과 수탈의 역사로 보고 있으며, 도미니쿠스 수도회의 라스 카사스 신부(1474-1566)는 정복자들과 일부 사제들의 원주민 수탈을 강도 높게 비난하며, 정의를 향한 투쟁 의 깃발을 들었다. 하느님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 는 성서의 말씀에 근거한 그의 주장은 당대 유행하던 위계화된 인종주의적 사고에 큰 충격을 주었고, 나아가 평등주의에 기초한 근대의 인권사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아메리카의 발견 과 정복은 스페인 사람들에게 큰 축복이자 동시에 큰 도전이었다. 사람들은 신분상승의 기회를찾아서 아메리카로 향했고, 그들은 원주민 노동력을 과도하게 수탈하여 빠른 시간 내에 재부를 축적하려고 했다. 그 누구도 밭을 갈려고 대서양을 건너지 않았다. 일확천금과 귀족의 지위를 누리고자 그들은 모험을 감행했던 것이다. 따라서 군주, 교회, 엔코멘데로, 정복자들은 서로 첨예한 이해관계를 느끼면서, 아메리카에서 앞으로 수립될 질서에 관심을 기울였다. 학자, 법률가들은 다가올 새로운 지배질서를 구축하기 위해서 질문하고 토론했다.엔코멘데로와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노예주의 신학자들은 정의의 전쟁론 과 자연 노예론 을 받아들여 스페인의 군사적 제국주의와 강압적 포교방식을 옹호했다. 그러나 인디오의 보호자 라스 카사스는 정복자드로가 엔코멘데로들의 착취를 계속 비 설 수 있었다.식민시대 아메리카 문명은 도시문명이었다. 정복자, 성직자, 지주, 광산주, 관료층이 도시에 거주했다. 이들은 엔코미엔다, 광산, 아시엔다, 플랜테이션에서 수입을 얻었지만, 농촌에 거주하지는 않았다. 도시는 권력과 행정과 신앙의 중심지 이상이었다. 그것은 문명의 표상이었다.스페인 왕실은 이교도 원주민들에 대한 기독교 전파를 식민통치의 명분으로 삼았다. 비스페인계 제국의 식민지 통치정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부분이다. 스페인 정복자들의 실제적인 목표는 황금을 구하고 봉건 영주의 지위를 얻는 것이었지만, 정복사업의 명분은 언제나 기독교를 전파하는 것이었다.1570년대에 들어와서 선교의 정열은 전반적으로 가라앉게 되었다. 비록 뒤늦게 들어온 예수회에 의해서 선교 노력이 다시 한번 재개되었으나, 이전의 열정적인 분위기는 결코 재현되지 않았다. 바로크의 시대는 예수회의 시대이기도 했다. 예수회 신부들이 식민지 교회의 상층부를 장악했고, 식민지에서 영향력을 확보해나갔다. 이들은 신앙의 토착화 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했고, 엘리트 교육을 선점했다. 예수회는 신앙의 잡종화를 직접 추구하지는 않았지만, 토착화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깨달았고, 또 그것을 실천해나갔다.인디언 곧 인디오 라고 부르는 습관에는 서양인들이 아메리카 지배를 정당화하고 영속화하는 언어심리학적인 메커니즘이 반영되어 있다. 인디오라는 명칭은 정복자들이 지배를 위해서 행한 최초의 분류작업이었다.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식민작업에 동원될 노동력으로 그들을 파악했다. 정복자들의 분류작업에 의해서 인디오는 인간도, 동물도 아닌 중간적 존재로서 위치가 정해졌던 것이다. 여기에도 철학적, 신학적 논쟁이 수반되었다.3. 은 : 세계시장의 탄생과 아시아아메리카 이곳저곳에서 은광이 발견되자, 때마침 수은 아말감 법으로 은을 정련하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1555년에는 세칭 파티오(patio:마당) 방법이 개발되었다. 이제 저질의 광석에서도 순도가 높은 은을 뽑아낼 수 있게 되었다. 유럽의 은광들의 빛이 바래기 시작했야 했다. 당연히 요역만으로는 불가능했고, 엄청난 중앙 재정이 뒷받침되어야만 했다. 패쇄적인 중화주의를 상징하는 명대의 만리장성 개축은 역설적으로 자기와 비단 무역을 통한 은 유입에 힘입은 것이었다.마닐라는 1565년부터 1815년 250년간 아시아-태평양 무역과 대서양 무역을 매개한 중심지였다. 스페인의 무적함대와 바로크 예술이 아메리카 은괴로 가능하게 했듯이, 마닐라-아카풀코 무역도 멕시코와 페루의 은괴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훔볼트는 유럽에 비해 손색이 없는 광업회사들, 수준 높은 기술가 과학, 정연한 도로계획과 뛰어난 네오클래식 건축물들에서 독립 멕시코 의 밝은 미래를 읽어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분석과 예언적인 언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꿈꾼 멕시코의 부국화는 결코 실현되지 않았다. 독립전쟁이 시작되자 정치적, 사회적 혼란 때문에 대부분의 광산은 문을 닫았다. 공화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광산 경기는 회복되지 않았다. 아메리카 은의 시대는 이제 저물고 있었다.4. 설탕 : 검은 노예노동과 자유의 투쟁유럽인들의 혀 끝에 황홀한 그 맛이 처음 닿았을 때는 십자군 전쟁 시절 아랍인들과 접촉하면서였다. 설탕의 여로는 주로 북서행 길이다. 아직 사탕수수를 효율적으로 짜내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16세기에 이르기까지 설탕은 너무 귀했다. 결핵과 콜레라의 해열제로 사용된 설탕은 아직 가게의 상품이 아니라 약국에서 취급하는 의약품이었던 것이다. 콜럼버스와 더불어 대서양을 건넌 사탕수수는 16세기에 이르러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아메리카 모든 대륙에 자리를 잡게되고 진정한 글로벌 작물 로 부상한다. 그렇지만 노동력이 엄청나게 소요되는 것이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이었다. 16세기부터 19세기 말에 이르기까지 근 400년간 검은 피부의 아프리카 사람들 1,200만 명은 그들이 태어난 곳에서 강제로 팔려와 먼 이역 땅에서 고역을 치른다. 토픽의 표현대로 사탕수수는 아시아의 작물, 유럽의 자본, 아프리카의 노동력 그리고 아메리카의 대지가 결합한 진정한 국제적 작물 이었다. 하지만했다.5. 커피 : 미각 자본주의의 빛과 그림자미각 자본주의 계보사에서 스타벅스는 맥도날드를 잇는 유망주이다. 1971년 시애틀에서 시작된 이 회사는 2002년 4월을 기준으로 24개국에 5000개가 넘는 가게를 거느리고 있다. 1992년에 미국에 불과 165개의 가게를 가지고 있던 이 회사의 성공 비결은 무엇일까?좋은 콩을 골라 잘 볶아서 중산층 소비자들의 기호에 맞춘 것이 첫 번째 비결일 것이다. 그러나 맛만 가지고 모든 것이 해결 될 수는 없다. 국제적 머케팅에서 성공한요소는 바로 코스모폴리타니즘이다. 국제 화 되어 가는 중산층에 어떻게 어필하는 실내 장식, 음악, 패스트리 등이 어우러진 판매기법도 팽창과 성장에 큰 몫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닝 스타 벅스를 선택했다고? 아니다. 스타 벅스가 당신을 선택했고, 당신의 욕망을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스타벅스 커피는 어느새 라이프 스타일로, 신분 증명서로 둔갑했고, 당신은 그것을 구매하고있는 것이다.감미로운 미각의 세계와는 달리 커피 생산의 세계는 고달프다. 오늘날 다국적 기업들이나 유통업체들이 커피 농가로부터 커피콩 1킬로그램을 수매하는 가격은 불과 10센트에 불과하다. 공급과잉으로 생산량이 넘쳐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유는 무엇인가..? 지난 수십년간 커피 시장의 수급은 국제 커피 기구(ICO)덕분에 상대적으로 안정화 되어있었다. 질 나쁜 커피의 유통은 저지 되었고, 농가에는 적당한 수준의 소득이 보장되었다. 하지만 1980년대 말에 이르러 아 수급 조절 메커니즘은 자유시장 의 이름으로 깨져 버렸다. 신자유주의자들이 이런 조절기구들을 좌악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세계은행 및 선진국들은 후진국이나 사회주의 국들과 같은 경제개발의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한 나라들에게 커피 재배를 권유하였고 이에 커피 산업이 확장되었다. 그러나 그 결과는 구성의 모순 이었다. 극장에서 무대를 더 잘보려고 한 사람이 일어나자 다른 사람들도 일어나기 시작해서 결국 아무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국제 기구 있다
    경영/경제| 2004.07.06| 12페이지| 1,000원| 조회(7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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