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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콴유의 리더쉽 평가B괜찮아요
    리콴유의 리더십의 성공 비결과 한국적 리더십의문제점Ⅰ. 서 론1959년부터 1990가지 싱가포르의 총리였던 리콴유는 싱가포르를 아시아에 있어서 경제성장과 정치성장의 대표 나라로 부강시킨다. 부정부패가 없고 금융과 국제중심의 싱가포르를 건설하기까지의 배경에는 당연 총리안 리콴유의 역할이 아주 컸다. 본인은 이번 레포트에서 이러한 리콴유의 리더십을 분석하여 그 성공비결과 한국적 리더십의 문제점을 비교해보고 우리나라 리더십의 올바른 방향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Ⅱ. 본 론리콴유는 리더십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국민의 신뢰를 얻는 것이라고 했다. 약속 즉 공약을 잘 지키고 보다 많은 신뢰를 주기 위에서는 어려운 일이 있을 때는 어려워서 자신의 능력 밖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또한 목표는 세우기는 쉬우나 시행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왜냐하면 스스로 모범을 보여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민을 대상으로 어느 목표를 세웠다면 지도자는 본인이 먼저 모범을 보일 것을 강조한다.1. 정치면에서의 리콴유의 리더십싱가포르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부정과 부패가 없는 나라이다. 1954년 싱가포르가 말레이시아인과 중국계인이 혼합되어 있는 상황에서 노조대변변호사로 활동하기 시작한 리콴유는 1969년 싱가포르의 수상이 되어 이 두민족의 통합을 굳게 믿어 왔다. 하지만 결국 1965년 말레이시아로부터 싱가포르 자체가 독립되어 나오게 되었고 리콴유는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분리된 싱가포르 내에는 말레이시아인과 중국인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리콴유는 대다수인 중국인과 소수인 말레이시아인의 동시적 상황을 고려해야할 숙제가 맡겨지게 되었다. 때문에 리콴유는 싱가포르의 공용어를 영어로 지정하였고 이는 말레이시아인과 중국인의 융합에 도움을 주었다. 무엇보다 부정, 부패 척결을 위해 ‘반부정부패특별법안’을 제정하고 그 척결을 위한 효율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행정업무 절차에 있어서 장관이나 부서장 급의 구두지시를 배제함으로써 연고주의를 타파하고 어떠한 업무에 관하연 허가제를 도입함으로써 행정에 있어서의 투명성을 보장하였다. 실례로 리콴유는 그의 절친한 친구가 소액의 뇌물 수수 혐의가 포착되자 냉정하게 그 친구를 기소함으로써 편법보다는 원리와 원칙에 충실히 하여 부정부패를 없애는데 노력했다.2. 경제면에서의 리콴유의 리더십싱가포르는 국민소득 2만달러의 선진국이다. 우리 한국보다 짧은 근대화의 역사를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국민소득의 2배를 달성한 대에는 그만한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첫째, 경제활동의 자유를 부여한 것이다. 리콴유는 경제성장에는 민주주의일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그 활동 주체에게는 자유가 부여되어야함을 강조했다. 또한 리콴유의 보다 미래 지향적인 시각 때문이라 생각한다. 리콴유는 초기에 다국적 기업유치를 위해 노력한다. 그것은 어려운 국가상황에서 선진국의 경영기술과 마케팅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이는 부정, 부패가 없는 정치계와도 잘 접목되어 가시화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또한 노동문제에 관하여 사회주의자였던 리콴유는 변호사 시절에 노사문제 해결을 위한 투쟁을 지지하였으나 그 폭력성에 대한 싱가포르의 위기도래는 그로 하여금 보다 평화적인 노선을 걷게끔 하였다. 때문에 ‘노사정위원회’를 두고 노사정의 지침을 수립하는 기능을 강조하였다. 이에 ‘무엇을 해라’, ‘말라’식이 아니라 ‘무엇을 했으면 좋겠다.’는 식으로 권유하는 정책을 펼쳤다. 하지만 이러한 노사정 위원회의 지침은 강제력이 강한편이 아니었다. 때문에 해결되지 않는 사항에 대한 강력한 중재 기관이 필요했고 이는 ‘중재재판소’를 두어 담당하게 하였다. 중재재판소는 다소의 강제력을 지니고 있어 노사정위원회의 한계를 보조하였다.3. 교육면에서의 리콴유의 리더십리콴유는 초기사회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다소 보수적인 동양적 사상이 짙은 사람이다. 그것은 그의 교육정책이나 가족사회를 이끄는 행동에서 엿볼 수 가 있다. 그는 유교적 가족주의를 강조한다. 가족유지의 필요는 사회유지와도 상관되며 이를 위해서 정부에서 가족 중심으로 임대아파트 또한 제공하고 있으며 실로 이러한 정책은 전 국민의 60%에 달하는 가족이 임대아파트를 이용하게 만들었다.또한 싱가포르의 자본주의에 대하여 비판과 반성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보다 국가가 적극적으로 알림으로써 국민들이 스스로가 자본주의 패단을 막을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싱가포르의 학교운영 정책이다. 싱가포르는 학생들의 수준을 나누되 영재학교를 두고 보다 현실감 있고 현장감 있는 학습을 시킨다. 특히 체험 학습은 아이들에게 공동체의식을 부여함으로써 사회에서의 본인의 위치를 자각할 수 있는 교육 시스템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영재학교는 결코 엘리트위주의 교육이 아님을 강조한다. 그것은 다소 수준이 높은 아이들에게 보다 다양한 현장학습을 시키기 위한 정책일 뿐 일반 학생과 배우는 교과목과는 그다지 차이가 없는 것이다.Ⅲ. 결 론 : 리콴유와 비교된 한국 리더십의 문제점
    사회과학| 2003.12.03| 2페이지| 1,000원| 조회(7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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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 독일의 통일의 교훈 평가B괜찮아요
    한반도 통일에 있어서의독일의 통일의 교훈차 례Ⅰ. 서 론Ⅱ. 본 론1. 독일의 분단 원인2. 독일의 통합노력 과정3. 분단해결에 있어서의 독일과 한국의 차이점4. 독일 통일후의 분위기와 문제점Ⅲ. 결 론 : 한국의 통일에 있어서 독일 통일의 교훈1. 통일비용 : ‘약속과 보답’2. 독일의 통일 교훈을 통한 한국의 대처Ⅰ. 서 론나라를 빼앗겼던 우리 선조들은 2차 세계 대전의 종식이 가까워지자 일본의 패망을 예견하고 나라를 되찾은 후 독립국가를 이루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당시 한반도의 대표적인 정치적 세력으로는 대외적으로 중국 상해에 그 기반을 둔 임시정부파(김구 등이 중심)와 국내적으로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공산주의파(후에 인민공화국파가 됨)가 있었다. 광복이 되자 이 두 세력은 각각 임정파와 임공파를 이루어 독립국가 형성을 위한 노력을 하게 된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한반도는 양 강대국(미국-소련)의 세력 싸움과 맞물려 남과 북으로 나뉘게 되었고 결국 38도선을 중심으로 한 분단이 결정 되게 되었다. 요점만 말하자면 한반도의 분단은 크게 국내적인 요인과 국외적인 요인이 중첩되어 분단이 되었다는 것이다.이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연 분단 반세기 이후의 오늘날 우리의 통일을 위한 첫걸음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한반도 분단이라는 정체성의 문제와도 같지 않을 수 없다. 이에 분단의 원인과 현재의 상황을 이해하고 적절한 절차를 밟아갈 필요가 있는 것이다. 현재 관내의 이슈가 되고 있는 송두율 교수는 그의 박사논문에서 ‘주변인’이라는 시각적, 입장적 요소를 도입하여 관망의 입장이 아닌 당사자 입장을 강조한바 있다. 즉, 이를 한반도의 분단에 접목하면 분단을 바라볼 때 타국의 입장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입장에서 바라봐야 함을 뜻하는 것이다. 독일은 ‘2002년 독일통일 12차 연례보고서’에서 한국에게 통일에 대해 깊은 숙고를 경고한 바 있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독일의 시각임에 틀림이 없다. 엄연히 독일과 한국의 통일에는 엄연한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서독에 비해럽으로부터 힘의 정치적 군사적 퇴각을 생각하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덧붙여서 미국지역에서부터 연방제 독일을 수립하겠다고 밝혔다.이 무렵부터 구체화되기 시작한 미국의 공격적 외교방향은 1947년, 트루먼 독트린과 마샬플랜으로 명확하게 드러났다. 마샬플랜을 수용하느냐 하는 여부를 둘러싸고 유럽은 이제 분명하게 동서진영으로 구별되기 시작했다. 마샬플랜에 독일의 서방 3국 점령지역을 포함시킨 것은 독일을 서방식으로 해결하겠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소련으로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소련은 마샬플랜에 대항하여 1947년 7월 14일에 소련점령지구에만 해당되는 "독일경제위원회"를 신설하였고, 미국은 서부지역만의 재건 정책을 바꾸었다. "全독일" 표방은 미국에게는 더 이상 부합되지 않았으며, 특정조건하에서만 소련과 일치하였다.1947년 11월 25일에서 12월 15일까지 열린 런던 외무장관 회담은 이제 냉전을 사실상 공식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회담에서 미국 국무장관 먀샬과 영국 외무장관 베빈은 슐레지엔의 독일 귀속을 주장했다. 이것은 소련은 미국이 그들의 지배권을 소련 점령지역인 동쪽으로 확대하려는 시도로 보았고, 미국의 독일정책은 마샬의 한 마디에 급선회하게 된다. 미국은 '서방식' 해결을 위해 서방점령지역의 독일인의 지지를 유도하게 되었다. 독일인들은 사실 미국이 소련보다 더 독일에 파괴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을 따르지 않고 다수가 서방측에 기울고 있었다.이 시기 독일인들은 어떠했는가? 그들은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다. 첫째는 정통적인 독일 외교정책인 '줄다리기'정책을 계승한 소국으로 축소된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과, 동방화된 독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서방으로 통합된 독일을 지향하는 그룹이었다. 이 세 집단의 공통점은 하나의 독일, 즉, 이른바 '全독일'을 지향했으며, 어느 누구도 독일의 분단을 생각한 사람은 없었다는 점이다.이 중에서 가장 중요한 그룹은 중립국 독일을 지향하는 세력과 서방통합을 주장하는 이들이었다. 소련은 독일에서는 인기가 없었다. 중요한 원동력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즉 서독의 막대한 동독으로의 지원 정책이 동독의 문을 열개하였고 이는 상호 교류의 폭을 증대 시킨 것이다.셋째,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집권하면서 시행한 ‘개방’과 ‘개혁’ 정책의 결과, 동서 냉전체제가 와해되고 동유럽 국가들이 독자적인 체제를 갖추기 시작한 것도 독일 통일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넷째, 독일 통일은 동독 주민들의 강력한 개혁 요구가 작용한 결과였다. 당시 호네커를 비롯한 동독의 지도자들은 소련의 개혁·개방정책을 따르지 않았으나 주민들은 계속 개혁을 요구했다. 1989년 10월 동독 제2의 도시 라이프치히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시작되었고, 지도층 교체로 주민의 소요를 무마하려던 동독 정권은 지도자를 호네커에서 크렌츠와 모드로우로 바꾸었다. 결국 동독에는 새로운 정치세력이 들어섰고, 1990년 3월에는 역사적인 자유총선거가 있었다. 이 선거에서 선출된 드메지어 수상을 수반으로 하는 동독의 연립정부는 서독의 콜 정부와 통일조약을 체결하였다. 통일조약과 서독기본법 제23조에 의거하여 동독의 15개 지구가 분단전의 5개 주로 개편되어 서독연방에 편입됨으로써 1990년 10월 3일 공식적으로 동·서독은 통일을 이루었다. 독일정부에서 발간한 독일통일과 신연방주 재건에 관한 자료집에는 통일 선포식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베를린 제국의사당 건물앞에 흑적황색의 독일 국가가 나부끼는 가운데 수 십 만명의 인파가 참석한 통일축제가 성대하게 열렸다.”이와 같은 전반적인 배경을 토대로 독일의 통일을 전으로 한 동독과 서독의 노력을 살펴 보면 아래의 표와 같다.시 기내 용1989년여름동독 주민들이 동베를린에 있는 서독대표부와 부다페스트, 프라하, 바르샤바에 있는 서독대사관으로 탈출을 시작. 헝가리 정부가 국경을 개방, 3일동안 15,000명 이상의 동독 주민들이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로 향함. 이후 10월 말까지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주민은 50,000명에 이름9월바르샤바와 프라장벽이 설치된 지 27년이 지난 1988년 8월 15일 유럽 공동체와 동독간에 외교 관계가 수립되었다.넷째, 접점도시 베를린의 존재이다. 서베를린의 존재는 "독일 문제"를 미결 상태로 남아 있게 하였다. 동독의 심장부에 위치하였다는 사실 그리고 서방 동맹국들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사실 때문에 이 도시는 특별한 의미를 갖게 되었다. 베를린의 서쪽은 항상 만남의 장소였고 중국의 사례에 있어서 홍콩과 마찬가지로 양측의 "접점" 역할을 하였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장소가 없으며, 판문점은 이와 유사한 역할을 지금까지 담당하지 못했으며, 앞으로도 그러지 못할 것이다.다섯째, 주권국가 여부이다. 통일이 될 때까지 양독은 완전한 주권 국가가 아니었다. 양독은 정치적, 경제적, 그리고 군사적으로 통합되어 있었고 때문에 국가는 통제되고 있었다.여섯째, 소련에 대한 통제의 정도차이이다. 북한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은 항상 동독에 대한 소련의 통제력에 비해 훨씬 적었다. 동독 지도자들은 의사결정 과정에 있어서 독립적이지 못했다. 북한이 소련 지도층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기는 했지만 북한은 심지어 이념의 골이 가장 깊었던 시기에도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자국의 노선을 능숙하게 견지할 수 있었다. 또한 동독과 달리 북한에는 수십만 명의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지도 않았다.일곱째, 사회적 안정정도의 차이성이다. 북한 체제는 연구 가치가 있는 현상이다. 세계적으로 50여년 동안 문자 그대로 전체주의적 권력을 그대로 존속한 다른 사례를 찾아볼 수 없다. 외부에서 볼 때 북한은 분명 지난 세기동안 다른 어떤 사회주의 체제보다 안정된 것으로 보인다. 파벌이 있었기는 했지만 지금까지 단 두 명의 지도자, 즉 위대한 수령과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만이 있을 뿐이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동독의 경우 여러 차례 정치적 위기가 있었으며, 동독 정권이 1953년 6월 국민들이 대대적으로 반기를 들었을 때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소련이 군사적으로 개입을 하고 서방이 자제력을 행사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수년간 북한은 프로그램을 갖고 있지 못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또한 이러한 사회적 갈등은 젊은층의 극우세력이 등장함으로써 옛 나치의 망령이 되살아나는 조짐을 보여주기도 하였다. 이는 폴란드 관광객들을 습격하고, 베트남 출신 근로자를 폭행하며, 유태인 묘를 훼손한 사례에서 잘 드러난다. 주민간 갈등과 사회적 문제는 독일정부가 제도적 통일에 치중한 나머지, 사회통합에 대한 대비 통일문제의 이해, 통일교육원, 1999.가 미약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둘째로, 독일이 통일 후 겪은 심각한 문제는 정치적 과거청산 문제 통일문답, 통일부, 1999.이다. 이것은 과거 동독 공산정권에 의한 피해자와 가해자에 관한 문제인데, 피해자 10여 만명의 복권보상을 위해 신청을 접수하여 조사처리하고 있으며 이와 함께 공산당과 정권기관 등의 권력남용자로 분류된 6천여명에 대해서는 사법처리 원칙이 적용되었다.셋째, 동독지역에서 행정사법체제의 구축문제를 들 수 있다. 먼저 행정분야에 있어서 새로운 통일독일의 행정체계에 적합한 지방행정 인력의 부족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구동독 공무원에 대하여 일정한 자격심사와 재교육을 거쳐 재임용하거나 일부 서독 공무원들을 파견전보하여 해결하였다. 사법분야에 있어서는 동독지역 주민들의 법률적 보호와 사법적 공백현상을 방지하고 새로운 사법체제를 구축하기 위하여 구동독의 사법요원들을 재교육시켜 자격심사를 거쳐 선별 재임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넷째, 소유권 등 재산권의 처리문제를 들 수 있다. 소련 군정시 점령군에 의한 토지개혁으로 몰수된 재산권에 대해서는 보상을 원칙으로 처리하기로 결정함으로써 비교적 수월하게 해결해 가고 있다. 그러나 그후 동독정부에 의하여 몰수당한 재산권에 대해서는 원소유자에게 돌려주는 것을 원칙으로 함에 따라 200여만 건의 반환청구소송이 제기되었다. 이로 인한 소유권의 불확정 때문에 신규투자에 장애를 겪었다.Ⅲ. 결 론 : 한국의 통일에 있어서 독일 통일의 교훈1. 통일비용 : ‘약속과 보답’ 연합뉴스, 독일의 비밀거래 “약속과 보답‘, 2002.바이다.
    사회과학| 2003.11.25| 15페이지| 1,000원| 조회(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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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북 분단] 해방정국을 통한 분단 책임
    1. 해방정국 (1945~1948)을 염두에 두고 분단의 책임에 대하여 논하시오.1945~1948년을 우리는 해방정국 이라 부르며 이시기의 역사는 왜곡과 굴절의 역사 이다. 그것은 이 시기의 국제적 국내적 대립이 후에 한반도가 분단의 아픔을 겪게 되는 원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본인은 한반도 분단의 책임에 대하여 국제적 국내적 원인을 논해보고자 한다.먼저 국제적 요인으로는 미,소,일 3국이 일본의 항복을 전후하여 펼쳤던 한반도 정책의 요인이다. 1945년 독일이 항복하자 일본 역시 패망을 예견하게 된다. 때문에 1871년 정한론 이후 꾸준히 한반도 및 대륙에 대한 야욕을 품은 일본은 만주 지역의 관동군의 영역을 한반도의 38 선까지 남하 확장한 후 항복 하게된다. 그와 더불어 얄타회담은 미,영,중,소 4개국에 의한 한반도의 신탁통치안을 통과하게 된다. 이에 대하여 대일전에 참전한 소련군은 한반도에 대한 공산권의 팽창정책으로 서울을 함락하고자 빠르게 남아 하게되어 평양에까지 이르게 된다. 한편 미국은 한반도에 미국식 민주주의를 심어 국익을 증진하려는 목표로 소련의 남하를 저지하고자 서울 획득의 노력에 박차를 가한다. 결국 이는 일본의 관동군 활동영역과 맞아져 38 선을 중심으로 미국과 소련의 군정이 실시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한반도의 정세는 남북으로 거대한 이데올로기 대립구도의 최 일선에 놓이게 되고 이는 후에 한국전쟁으로 분단의 역사를 자아낸다.국내적 요인으로는 국내에 활동 중이던 정치세력의 대립이다. 일본 패망후 송진우 등의 한국 민주당 중심의 임시정부(이하 임정 이라함)세력과 여운형을 중심한 조선인민공화국(이하 인공 이라함)세력은 국내에서 대립구조의 양상을 자아낸다. 일본의 패망으로 1945년 8월 15일 일본의 총독 아베노부유끼는 여운형에게 일본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장해줄 것을 요구하며 정부조직구축을 의뢰하게 된다. 때문에 익일인 8월 16일에 여운형은 건국동맹을 모태로 건국준비위원회를 발촉하게 된다. 9월 초 미군정의 실시가 임박해 오자 여운형은 서둘러 전국인민대표자대회 를 열어 조선인민공화국 을 구성하게 되는데 이는 미군정시 미국으로부터 정부로써 인정을 받고 최악의 경우 협상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인공은 대부분이 공산주의 세력으로 통일전선 구축에 있어서 의미가 모호했다. 한편 임정은 정통성과 합법성을 거론하며 인공을 부정하게되고 국내의 보수주의계열과 연계하여 임정세력을 형성하여 미군정으로부터의 인정을 요구하게 된다. 하지만 인공과 임정 모두 미군정으로부터 국민적 통합을 이끌어 낼 세력으로써 인정을 못 받게 되고 후에 인공세력과 임정세력은 각각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대립을 하게되며 찬탁과 반탁의 노선을 겪게 된다. 급기야 중도연합세력의 형성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결국 이러한 대립구조에 의하여 남북 각각의 단일정부 수립 및 전쟁 그리고 분단의 역사를 자아내게 된다.
    학교| 2003.05.19| 1페이지| 1,500원| 조회(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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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권교체] 4.19혁명과 5.16쿠데타의 배경과 결과 평가B괜찮아요
    2. 4.19 의거와 5.16 쿠데타의 원인과 배경 그리고 결과에 관하여 논하시오.4.19 의거(4.19는 5.16 군사정변 이후 4.19 의거로 규정되었다가 문민정부 시대이후 4.19 혁명으로 환원된 바 그 본질의 의미와는 차이가 있지만 본인은 이후 4.19 혁명으로 함)와 5.19 쿠데타는 각각 제2공화국과 제3공화국의 출범을 자아낸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 역사적 두 사건의 원인과 배경 및 결과에 대하여 논하여 보겠다.4.19 혁명은 민주화 운동이었다. 이 혁명의 원인과 배경은 이승만 정권의 부패라고 할 수 있다. 그 시발점은 3.15 부정 선거였지만 그 전부터 국민들 사이에는 이승만 정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어 있었다. 그러한 내용들을 이승만의 12년이라는 장기집권화 과정이 이를 증명한다. 즉, '부산정치파동'으로 불리는 일련의 정치테러 사건과 이때 통과된 '발췌개헌', 종신집권을 위해 헌법의 중임제한 조항을 없애는 개헌안의 '사사오입개헌'이라는 기상천외한 개헌의 단행 등으로 이미 이승만은 민심을 잃어 버렸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집권당인 자유당은 협상선거법 을 통과시켜 부정선거를 고발하는 언론의 봉쇄, 2 ·4보안법파동 을 일으켜 언론규제와 야당탄압을 강화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하고 필화사건 으로 기자를 구속하는 등 의 만행으로 민중의 심기는 크게 노하게 되었다. 게다가 미국의 경제적 원조 마저 중단되어 과중된 경제적인 어려움도 이승만 정권에 대한 민심저하의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이 4.19혁명의 결과와 의의 및 한계로는 첫째, 역사상 최초로 대중이 정권을 쓰러뜨려 독재를 타도하고 내각책임제의 장면내각이 성립되었고 둘째, 학생을 중심으로한 민중세력이 형성되어 민족 통일운동으로도 연결되었지만 혁명세력으로써는 미약했다는 것이다. 즉, 이승만 정권이 못했던 친일파 숙청이나 독재세력을 일소하는 등 혁명으로써의 의의를 지닐 역할을 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이렇게 성립된 장면내각은 집권 후 국민의 자유를 최대한으로 보장하려는 정책이 사회의 혼란과 무질서를 초래하게 되어 1961년 5·16군사정변으로 총리 취임 9개월 만에 실각하였다5.16 군사정변은 쿠데타의 성격이다. 5.16 쿠데타의 원인과 배경으로는 장면내각의 무능력을 첫째로 들 수 있다. 4.19 후 뚜렷한 정치 이데올로기 및 정치프로그램도 없이 국민적지지 기반을 갖추지 못한 정부는 혁신세력의 활동을 통제하지 못하였고 지나친 경제 침체와 물가 폭등이라는 급진적인 현상들에 대처하지 못하게 되자 무력을 바탕으로 군부가 움직였던 것이다. 둘째 군내부적인 끈질긴 책동이다. 당시 군에 대한 전반적인 통제를 하지 못한 정부는 군 내부적 사항에 관한 정화작업은 거의 포기 되고있었다. 이러함은 군 내부로부터 정부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게 되었다. 이는 사회적 현상과 명분을 함께 하며 군인의 소명의식화가 되었던 것이다. 셋째, 미국의 묵인과 쿠데타에 대한 명시적 조직적 반대세력의 미성숙이다. 미국은 겉으로는 합법정부를 지지한다. 라고 하여 장면내각을 지지하는 듯 하였으나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던 것은 이미 전부터 추진되어 왔던 군사쿠데타를 옹호했던 것이다. 이는 쿠데타가 성공하고 곧 박정희 군사정권을 지지했던 모습에서 찾아 볼 수 있다. 5.16 쿠데타의 결과 및 의의로는 첫째, 혁명 주체인 군인이 국가와 사회 및 국민을 지배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둘째, 기존 질서의 변혁은 없었고 단지 변형과 심화 뿐 이었다. 셋째, 헌법에 명시화하고 정통성보다는 효율성만을 강조하여 실질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 정의가 와해되었다. 넷째, 뚜렷한 정치 이념이 결여 된 채 반공의식만이 부각되었다.
    사회과학| 2003.05.19| 2페이지| 1,000원| 조회(1,0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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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문학] 김명익의 림진강을 읽고
    김명익의 "림진강"을 읽고국제유엔학과 3년 199837009 손교식소설 '림진강'은 1991년 김명익에 의해 지어진 소설이다. 김명익은 1942년 황해남도 신천군 출신으로써 대게 이산가족의 아픔에 관한 작품을 많이 다루었는데 이 소설 '림진강'은 그러한 소설중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분단의 아픔은 우리 남한뿐만 아니라 북한에서도 공유되는 아픔임을 인지할 때 이 소설을 접하는 나의 마음이 다소 착잡하다. 더불어 우주를 통해 달까지도 날아갈 수 있는 이 시대에 '북한학'이라 하여 불과 몇 km떨어진 곳을 그저 문헌들로밖에 공부 할 수 없고 아니 공부해야한다는 사실이 더 없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림강벌과 잇닿은 련천벌은 어떻게 될 것인가? 분계선이 막히기 전에는 림진강이 하나의 흐름 이였듯이 벌도 하나였고 수로도 하나였다. 그런 것이 지금은 강도 벌도 논뚝길도 다 갈라졌다. 양수장 기초를 파며 사람들은 자연히 이웃마을 농민들을 생각하였다.", "저 양수장 물도 작을 테지, 그럴 바에는 아예 이 양수장을 더 크게 지으면 어떨까?", "양수장 기초가 다시 넓게 파지고 능력이 두 배 가 되는 양수기와 전동기가 실려 왔다." 이 부분은 림강마을 사람들이 양수장건설을 함에 있어서 통일후 남한농민과 양수장의 공유를 생각하며 시설을 현재의 필요 이상으로 크게 건설하는 대목이다. 이 얼마나 숭고한 통일에 대한 갈망이요 준비인가? 하지만 분단이라는 과거의 역사라는 것은 내게 있어서 단지 안타까운 현재일 뿐이다. 앞으로 먼 훗날에 누군가 지금의 분단된 역사를 기록하거나 거론한다면 부디 '정말 잠깐 동안의 아픔', '조상의 어설픈 실수'였다고 간단하게만 기록해 주길 간절히 바란다. 후손들의 조상으로써 지금의 내 모습이 너무도 부끄럽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소설 '림진강'을 접하는 나의 마음은 한없이 쓸쓸하며 소설로써의 '림진강'이 아닌 주체문예사상에 입각한 북한문학이라는 학문적 접근으로 이 소설을 대하고 분석해야하는 사실이 증오스럽다.이 소설의 배경은 림진강의 련천 부근으로 이곳은 아마도 남한의 한강과 만나 서해로 빠져나가는 하류 지역인 것으로 보인다. 시기는 한국전쟁 후 고향에서 헤어진 남편과 아들을 기다리는 홀어머니 류성녀를 딸 오숙희가 도시지역으로 모시고 가고자 고향을 방문함으로써 소설은 시작이 된다. 이 소설을 접하면서 나는 북한이라는 곳이 정말 가까운 곳이라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소설의 배경이 된 련천 지역의 임진강 하구에는 두 개의 마을이 있었는데 서로 이웃마을이라 부르며 병원도 가고 시장도 가고 그렇게 늘 오가던 곳이었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우리 민족의 실수로 말미암아 그곳은 저승보다도 더 가기 힘든 곳이 되었다. 전쟁을 경험하고 그렇게 생이별을 한 소설속 류성녀는 그 후에도 딸을 키우며 온갖 모성애를 다한다. 그것은 언젠가 돌아올 남편과 아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서이리라. 하지만 북한의 여느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이와 같은 완벽한 어머니 상은 다소 왜곡적으로 보인다. 전후 외롭게 살아온 어머니들을 위로하기 위한 방법이었으리라. 소설 전반에 걸쳐 작가는 훌륭한 묘사로 소설의 분위기를 형성해 간다. 그래서 인지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아주 쉽고 편안한 맘으로 몰입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경우가 그러했다. 소설 속의 어머니의 상도 이러한 이미지를 더욱 짙게 한다. 물론 분단의 아픔이 묘사되었지만 '편안함'과 '평화로움'이 소설의 전반적인 분위기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함정은 이 소설을 두 번째 읽음으로써 벗어날 수 있었다. 역시 1980년대 이후 북한의 문학에 있어서 과거의 김일성 찬양이나 당을 위한 혁명적 분위기에 변화가 있다는 사실은 이 소설에서도 증명되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북한 문학에 있어서 '주체문학의 성향들'이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소설의 내면 때로는 외면에 얼굴을 불쑥 내밀고 은밀한 사상적 유혹을 하고 있는 것이다.이러한 사상적 유혹을 몇 가지 사실로 알아보겠다. "림진강은 숙희의 아버지 오만석과 어머니 류성녀의 첫사랑에 움을 틔워 주었고 결실을 맺어 주었다. 남의 집 머슴살이와 부엌데기 신세였던 그들은 해방이 되여 성례를 갖추고 자유와 인간의 존엄을 찾았다. 땅을 부여받은 그들은 고마운 제도를 받드는 마음으로 부지런히 농사를 지었다. 그들에게는 누렁 소도 생기고 새 집도 지었으며 귀여운 복덩이도 태여났다. 이 좋은 세상에서 만복을 누리며 살라고 이름을 오만복이라고 지었다. 행복은 갈수록 늘어나고 앞날은 더욱 휘황하였다." 너무도 평화로운 이 구절에서 나는 얼굴을 찌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내용이 무엇을 말하는지 이제는 너무도 잘 알기 때문이다. 사실 이 소설에서는 전반적으로 '계급성'과 '혁명성' 같은 것이 그리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렇게 남생이가 머리를 불쑥 내밀 듯 나타난 계급성은 작품의 질을 상실시키는 기분 마저 들게 했다. 또한 "숙희는 자라면서 차츰 아버지 없는 설음을 잊었다. 남들처럼 철따라 교복과 신발을 선물로 받았으며 마음껏 배우며 자랐다. 상급학교를 졸업한 그는 농장의 기술지도원으로 일하였으며 마음에 드는 끌끌한 청년을 남편으로 선택하였다. 그에게 차려진 모든 행복은 아버지 없는 불행을 영영 잊게 하였다. 그는 세상에 부러움이 없었다."라는 부분에서 북한사회의 보편적인 배품을 너무 과장하여 전개시킨 것은 아닌지. 그 현실성에 대해 의심을 해 보게끔 하였다. 물론 이 대목이 전쟁세대와 그 후세대간의 한반도 분단의 인식적 차이성을 들어내고자 표현했다 할 수 도 있겠지만 이렇게 육신의 아버지 마저 잊게 하는 초월적인 국가의 모습은 독자로써 그리 긍정적인 평가를 주기가 거북스럽다. 하지만 국가에 대한 찬양적인 시각을 은근히 부각하고 바로 뒤 이어 "있다면 어머니였다."라고 하며 완벽한 국가 속에서 한가지 슬픔을 간직한 어머니의 부연은 보다 강조되어 분단의 아픔을 더욱 짙게끔 한다. 모든 것을 얻었지만 나누어진 한반도의 허리를 통하여 가족과의 이별을 경험한 사람에게는 결국 허전한 마음이 계속적으로 남아 잊혀 질 수 없는 것이다. 노동에 대한 강조도 이 소설에선 등장을 한다. 하지만 분명 노동 역시 이 소설에선 지나치게 강조 된 것은 아니다. "그래도 그렇지. 아무리 빈 양수장이라 해도 사철 비여 두지 않는 것이 우리 림강마을 사람들의 굳어진 관례라는 거야 너두 알지 않니?" 북한사회는 여성도 노동과 결부시켜 전 인민의 노동 생활을 강조해 오고 있다. 때문에 남녀 모두의 노동에 있어서 사상적 적용은 그들 노동의 당위성 즉, 사회주의의 혁명을 실현하는 수단으로 또 목적으로 자리하며 이러한 노동의 강조는 매 소설마다 등장하여 인민들의 마음을 우롱한다. 소설 전반에 걸친 이러한 '주체문예론'은 어느 정도 분단의 아픔을 겪고있는 이산가족 마저 이용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조심스럽게 의심해보는 바이다.이 소설에서는 그리 많지 않는 등장인물, 일관된 지형 그리고 각 캐릭터의 성격이 뚜렷하다는 기교를 거론할 수 있다. 즉 소설속 등장 인물들이 전쟁 전과 후의 세대로써 이는 우리 남한에서와 같이 북한에서도 이산가족에 대한 1세대와 2세대간의 충돌을 암시 할 수 있다. 또한 림진강이라는 특수 지형을 활용함으로써 한반도분단의 아픔을 더욱 부각시키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림진강은 작가가 열렬히 갈구하는 통일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멀고 먼 북쪽의 아호비령산 기슭에서 흐름을 시작하여 양덕과 법동, 이천과 철원을 연연히 거쳐 그 무슨 사무친 사연을 전하려는 듯 남쪽 땅으로 유유히 굽어 들엇다가 그대로는 흘러갈 수 없듯이 다시 북반부의 판문관에 와 닿아 서야 한강과 합류 되여 서해로 흘러드는 림진강. 그 강물을 보며 그들은 무슨 생각에 잠겨 있는 것인가." 즉, 이 소설에서 림진강은 '통일'의 상징인 것이다. 북과 남을 자유로이 누리며 굽이 흘러가는 림진강은 북한민의 애틋한 '통일의 갈망'이요. 그러다 남한의 한강과 만나 더 크게 굽이며 흘러 서해로 가는 것은 통일을 이룬 보다 '거룩한 의미의 상징'이리라. 하지만 여기서 임진강이 주가 되어 그 흐름의 범위를 만들 때 너무 북한 위주의 통일을 상징했던 것은 아닐까? 그래서인지 림진강과 한강이 아닌 오직 림진강만을 통일의 상징물로 여기게 되는 현상이 나의 뇌리에 더욱 와 닫는 것 같다. 그리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성격은 참으로 일관적이다. 이 소설에서 부정적 사물이나 사실이라 한다면 오로지 '분단'뿐이다. 전쟁에 대한 원망도 부족하다. 오로지 문제는 분단일 뿐 그래서 인지 북한 주민에 대하여 소설속 모습으로 고정관념이 생기고 다소 그러한 인물들이 허무하기까지도 여겨진다. 주인공들의 심리변화 특히 순희의 심리변화가 조금만 강조되었더라면 지금의 이 소설에 대한 이미지 자체 보다 훨씬 친근한 이미지로 대할 수 있지 않았나 또 그럼으로써 독자의 통일에 대한 보다 강력한 염원을 유도 할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보게 된다. 이 소설에는 '까치'가 여러 번 등장한다. 이러한 '까치'의 등장은 종종 한국적인 문학이라는 생각을 더욱 진하게 하게 한다. 까치는 예로부터 소식을 전달하는 우리나라의 길조의 새였다. 이러한 까치의 등장은 '통일'이라는 길조를 독자로 하여금 암시하게 함으로써 보다 긍정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조건을 부여한다. 뿐만 아니라. 이 소설에서는 까치를 통하여 통일이라는 소설의 복선 역할을 하여 '임진강'과 함께 통일의 상징체 역할을 하고 있다.
    인문/어학| 2003.05.19| 3페이지| 1,000원| 조회(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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