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머리말19세기 초반만 하더라도 프랑스의 영향권 아래에 놓여 부용국의 처지에 있던 독일 영방은 프로이센의 명재상 비스마르크의 주도 아래 북독일 연맹을 결성하고 스페인 왕위계승을 문제로 일어난 프랑스 - 프로이센 간의 보불전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 짓고 남독일영방과 제휴하여 독일제국을 성립시킨다. 이로서 독일2제국이 탄생하게 되고 프로이센의 국왕 빌헬름 1세가 1871년 1월 독일 황제로 즉위하고 비스마르크는 19년간 제국의 총리로 통치하였다. 독일2제국은 1871년에서 1918년 까지 지속되었다. 1871년 통일 후 독일은 경제적으로 놀라운 발전을 이루어 강대국 대열에 들어서며 석탄과 철강 생산량이 영국을 앞질렀으며 선박건조에서도 영국과 경쟁을 하게 되었고, 대기업을 중심으로 전기, 화학, 군수 산업이 일어났다.) 기술과 산업의 성장과 함께 단, 40년 동안에 4천만에서 6천만으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산업 혁명으로 신장된 국력과 함께 강대국 간의 경쟁도 격화되었다. 그들은 기술과 산업의 도움으로 점점 더 강한 파괴 수단을 만들어내고 대군으로 무장하였다. 유럽은 제국주의 시대로 접어들었고 다른 나라들을 차례로 침략하여 거대한 식민지로 만들었다. 통일 후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성취한 것을 지키고 독일의 위치를 국제적으로 확고히 정립하기 위해 유럽 열강과 외교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독일과 적대관계에 있는 프랑스를 가장 경계했다. 프랑스에 대한 무마책으로 북아프리카에 대한 프랑스의 우위를 인정함과 동시에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해 주변 나라들과 여러 가지 동맹을 맺었다. 보불전쟁 이후 프랑스의 보복에 대한 방어망으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 3국 동맹을 체결했다. 오스트리아의 입장에서 이 동맹은 발칸지역에서 우위를 확보하는 것이었고, 이탈리아의 경우에는 지중해에 대한 프랑스의 지배에 맞서는 수단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나아가 러시아와 재보장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중 어느 하나가 다른 강대국에 의해 공격받을 경우 중립을 지키기로 합의함으로써 을 것이기 때문이다.보불전쟁 이후 독?불 국경선에 프랑스 군대가 신속히 재배치되고 전쟁배상금을 단, 3년 만에 갚는 것을 보고 독일인들은 크게 놀랐고 비스마르크는 프랑스가 빠른 시일 안에 독일과 승부를 겨룰 것을 확신하고 프랑스와 전쟁을 하지 않기 위해 프랑스를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고 프랑스의 눈을 해외로 돌리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의 열강의 이해관계를 교묘히 이용하여 동맹이나 협약의 그물을 쳐서 자신이 외교적 목표들을 달성하려고 하였다.프랑스의 재흥이 그의 본능을 확실히 해주었다. 3제협약(Dreikaiserabkommen)은 프랑스를 침묵시키고, 그것과 함께 세 나라가 모두 폴란드인들을 지배하고 있는 동부에서의 현상을 유지시켜 줄 것이었다.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는 지리적인 이유에서도 마찬가지로 중요했다. 독일은 프랑스와 러시아의 두 나라와 동시에 나쁜 관계에 있게 되면 양면전쟁을 치러야 한다는 위험을 안고 있었다. 프랑스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이상 러시아와의 관계는 열려있어야 했다. 동시에 비스마르크는 독일이 러시아라는 대국가에 완전히 의존하여, 아시아에서의 영국과 러시아와의 분쟁에 싫든 좋든지 간에 끌려들어가는 것을 원하지는 않았다. 오스트리아와의 우호관계는 독일에 있어 마찬가지로 중요했는데, 그것은 프랑스의 잠재적인 동맹국을 없애버린다는 의미와 함께 러시아를 다룸에 있어서 비스마르크에게 상당한 독립성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오스트리아와 러시아는 모두 독일과 우호관계를 갖기를 열망했다. 오스트리아는 발칸지방에서 러시아와의 적대관계가 점점 커가고 있기 때문이었고 러시아는 만약 전쟁이 아시아에서 터질 때 유럽 강대국들의 적대적인 동맹에 직면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세 황제가 협정을 맺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이 1872년과 1873년의 상호 교환방문에서 드러났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사이의 점점 깊어가는 갈등이 전도에 암운을 던졌다. 프란츠 요셉은 빌헬름 1세와 알렉산더 2세가 동의한 군사협정에 서명하기를 거부했다. 세 황제들은 결국 공통적인 이해게다가 세르비아인들이 터키에 전쟁을 선언함으로써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1876년 11월 쯔아는 범(汎)슬라브주의 쪽으로 기울어져 오스트리아의 희망을 무시하고 슬라브족들을 보호하기 위한 전진 정책을 추구하기로 결정하였다. 러시아와 오스트리아의 정척은 갑자기 동요되었으며, 모두 독일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발칸지역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 비스마르크는 그가 한때, 그 지역 전체라 할지라도 한명의 포메른 소총수의 건강한 뼈의 가치도 없다고 언명한바 있듯이 관심이 별로 없었다.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공동보조를 취하기만 한다면, 터키가 우려하는 어떤 일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었다. 발칸지역은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러시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어떤 심각한 불화일지라도 독일의 국제적 지위에 미치는 영향은 심대했다. 왜냐하면 만약 독일이 두 나라 중에 한나라를 선택하도록 강요된다면, 다른 나라는 기꺼이 프랑스의 동맹국이 될 것이고, 따라서 발칸문제는 재빨리 큰 사건으로 발전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독일은 운명적인 결정의 시간을 연기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1876년 12월에, 쯔아가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전쟁에 돌입할 때 독일이 중립을 지킬 것인가 하고 질문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두 나라 중 어느 나라라도 전쟁에서 그 독립이 위협받을 정도로 크게 패배하는 것은 독일에 이익이 안 된다고 교묘하게 둘러대었다. 똑같이 오스트리아의 외무장관인 안드라시(Andrassy)가 러시아에 대한 오스트리아-독일 동맹을 제기했을 때 비스마르크는 그 제안을 단호히 거부하였다. 한쪽의 승리가 아니라 양자의 균형이 그의 목적이었던 것이다.1877년 1월에 러시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타협에 도달하였다. 러시아가 발칸지역에 큰 규모의 슬라브 국가를 창설하지 않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헝가리도 러시아가 터키를 공격할 때 호의적인 중립을 지키기로 약속하였다. 강대국들이 터키에 개혁을 과하려고 또 다른 시도를 하고, 이것을 터키가 거부하자 러시아는 터키에로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로 하여금 러시아의 침략에 저항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방위동맹이었다. 전쟁을 할 때에는, 러시아가 개입하지 않는 한 상대편 국가는 중립을 지켜야 했다. 실제에 있어서 러시아가 공격할 때 독일은 오스트리아-헝가리를 원조하게 되어 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는 프랑스에 대항해서 독일을 도와주지 않아도 되게 되어 있었다.그의 회고록 속에서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의 동맹을 1866년 이래 가슴속에 품어온 계획의 달성이라고 쓰고 있다. 그러나 그가 1879년 이전에 이러한 계획을 품고 있었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진실은 오히려 그가 그 자신이 주로 만들어 낸 위기상황을 넘기기 위해서, 다시 즉각적으로 행동을 취했다는 것이다. 이 동맹은 오스트리아를 건드리지 못하도록 러시아에 경고함으로써 발칸지방에서의 세력균형을 불안정하나마 유지하도록 하는 임시적인 방편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비스마르크가 양 국가 중에서 한 국가를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은 아니다. 세 나라 사이의 동맹이 독일을 구원하는 길이라는 그의 신념은 결코 흔들리지 않았다. 협상과정 중에 실제로 그는 러시아도 이 동맹에 끌어들이자고 안드라시에게 제안을 했었고, 안드라시는 이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던 것이다.동맹은 황제와의 격렬한 싸움 끝에 체결되었다. 러시아와의 우호관계에 최상의 중요성을 주었던 늙은 보수주의자는 특히 독일의 가장 좋은 친구에게 등을 돌리는 이 동맹을 부적절한 도발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황태자 및 몰트케 그리고 프로이센 장관들의 지지를 업고, 또한 자신의 사임을 무기로 하여 결국 황제가 이에 동의하도록 만들었다. 빌헬름 황제는 마지못해 양보했지만, 나로 하여금 이 정책을 취하도록 만든 자들은 이 일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경고했다.5년 기간의 이 비밀동맹은 1918년까지 정기적으로 갱신되었으며, 독일의 교정책의 토대가 되었다. 이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더 중요성을 갖게 되어 20세기 초에는, 독일에게 유일하게 남은 맹방인 오스트리아-헝가리를 방어하기 위들의 지배하에 두는 것을 포기하였다. 두 공국의 주민은 하나의 독립국을 건립하려고 하였으나, 비스마르크는 독일통일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여 양국을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공동 관리 하에 두기로 하였다가 이어 1865년 가슈타인 협정)을 체결하여 슐레스비히는 프로이센이, 홀슈타인은 오스트리아가 각각 통치하게 된다.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에서의 프로이센의 독주를 막기 위해 연방의회에서 홀슈타인과 슐레스비히의 장래를 촉구하라고 하자, 프로이센은 가슈타인협정을 파기한다. 프로이센은 가슈타인 협정의 파기로 홀슈타인에 군대를 진주할 수 있는 권리를 확보하게 되고 그 해 1866년 6월 7일에 군대 진주를 실행하나 홀슈타인의 오스트리아군은 저항 없이 철수를 한다. 이어 6월 11일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이 가슈타인협정을 위반하였으므로 독일 연방 군대의 동원을 제안한다. 프로이센은 작센과 하노버, 헤센-캇셀 등에 동원을 해제하고 프로이센 주도하의 새로운 독일국가의 참여를 촉구하고 이들 국가로부터 만족할 만한 답변이 없자 이들 군소국가를 침공한다. 당시 여론들과 당대의 사람들은 오스트리아의 승리를 점쳤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는 독일 내의 주요 국가들의 군사적 지원을 받은 반면, 프로이센은 이탈리아와 동맹을 맺고 있었고 또한 이탈리아군은 쿠스토차(Custozza)와 리사(Lissa) 등의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에게 크게 패했다.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프로이센군은 오스트리아 측에 가담하였던 독일연방의 군소국가들을 개전 3일 만에 점령하고 쾨니히그레츠 전투(Battle of Koniggratz)에서 신형소총과 참모총장 몰트케의 치밀한 작전에 힘입어 오스트리아의 보헤미아 주둔군이 프로이센의 3개 군단에 의해 괴멸되었다. 이로서 독일 연방은 해체되고 오스트리아는 독일연방에서 축출되고 프로이센의 주도아래 북독일연방이 성립되었다. 다만 남독일의 바이에른, 바덴, 뷔르템베르크, 헷센-다름시타트의 독립성을 존중한다. 이는 프랑스의 압력도 있었지만 비스마르크가 이들 4개국에 대해 별 다른 계획이 없었기
韓日 關係史高麗에 對한 元의 干涉과 麗元聯合軍의 日本征伐元干涉期의 到來1259년 몽골이 남송을 멸망시키기 직전 元 憲宗이 四川에서 病死하고 忽必烈(元 世祖)이 동생 阿里不可를 제압하고 南宋을 성공적으로 정벌하여 중국대륙과 몽골초원, 중앙아시아 등을 아우르는 大元帝國을 세운다. 한편, 30년간의 대몽항쟁으로 전국토가 피폐해진 터라 고려에서는 국제정세를 인식하고 抗蒙態度를 버리고 남송이 멸망당하기 전에 헌종을 만나러 중국 내륙으로 들어갔지만 이미 원 헌종은 병사한 뒤였다. 대신 필열홀을 만나 迎謁하고 강화를 맺게 된다. 당시 고려에서는 무인세력의 집권으로 황실의 권위는 실추되었고 王者는 有名無實한 명목상의 왕이지 전제권력을 구비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황 속에서 고려황실은 황권을 회복하고 무인집권세력을 打破하기 위해 당시 새로운 강국인 원에 기대려 한 것이다. 후일 임연이 원종을 폐하고 안경공 창을 옹립시켰으나 원의 간섭으로 원종은 복위가 된다. 이는 무인정권을 타파하고 황권을 회복하려는 고려황실의 숙원이 해갈되는 듯 하였으나 역설적으로 새로운 황권 위협세력을 불러들이고 말았다. 내부의 이리를 척결하려 외부의 호랑이를 집안으로 불러들인 격이 되고 만 것이다. 이로써 이른바 원간섭기가 도래한 것이다. 고려의 황실용어는 원의 간섭으로 皇帝에서 王으로 황제가 자신을 일컫는 用語인 朕이 孤로 大統을 承繼할 嫡子를 稱하는 용어인 太子가 世子 등으로 降稱하게 된다. 또한 원종의 세자부터는 諡號가 忠으로 시작되는 등 황제국의 위상이 제후국으로 降等이 되고 원의 간섭을 받는 駙馬國이 되었다. 한 편으로는 공녀와 공물, 그리고 영토의 침탈을 당하게 된다. 몽골의 입장에서는 고려의 자진 귀부는 매우 환영할 만한 일이었는데 남송의 멸망이 마무리 되지 않았고 몽골의 대칸 위를 놓고 필열홀과 아리불가가 대립하는 중이라 고려의 항복은 30년간 끌어온 문제를 단번에 해결하고 또한 남송과 고려로 양분된 전선의 획일화로 남송으로의 병력 집중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麗元聯合軍의 日本征伐고려를 屬邦化 한 후 원 세조는 餘勢를 몰아 일본을 정벌하려 한다. 고려 충렬왕 즉위 원년인 1274년 10월 3만 명의 여몽 연합군은 합포(지금의 마산)를 출발, 일본 규슈의 하카타를 공격했으나 태풍으로 실패한다. 7년 뒤인 1281년 쿠빌라이는 다시 14만 명의 대군을 동원, 2차 일본 정벌에 나서지만 역시 태풍으로 실패한다.원이 일본정벌을 장정을 착수한 것은 고려 원종 15년(1274년)의 일이다. 이해는 원종이 승하하고 충렬왕이 즉위한 해이기도 한다. 원 세조는 일본정벌의 첫 단계로서 김해 등에 둔전을 설치하고 병참기지를 만들기 시작하는 한편, 전함의 건조와 군량의 확보를 서둘렀다.1차 일본 원정 전함의 건조와 군량조달을 완료한 여몽 연합군은 충렬왕 즉위년(1274)년 10월 합포를 떠나 1차 원정길에 올랐다. 이 때의 병력규모를 보면 원의 흔도를 도원수로 홍다구·유부형을 좌우부원수로 김방경을 부감사로 한 원군 2만과 고려군 8천에 전함 9백척의 대규모 병단이었다. 10월 6일 합포를 떠난 원정군은 대마도 공략에 이어 잇키를 점령한 다음 규슈의 하카타만에 이르러, 병력을 분산하여 하카타와 하코자키을 공략하였으나 일본군의 저항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전쟁이 장기화할 기미가 보이자 원정군 내부에는 回軍과 進軍을 놓고 의견이 양분되었는데, 마침 이날 밤 폭풍우로 인하여 전함이 암초에 부딪쳐 부서지고 물살에 휩쓸려 익사하는 군졸이 속출하자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마침내 원정군은 남은 병선을 이끌고 합포로 되돌아 왔다.2차 일본 원정 여몽 연합군의 1차 일본정벌은 실패로 끝났지만 원 세조는 동정에 대한 야망을 끝내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원 세조는 2차 동정에 필요한 전함의 新造와 군량의 확보를 고려에게는 부담시키는 한편, 충렬왕 3년(1276년)에는 제주도에 목마장을, 충렬왕 6년(1279년)에는 동정의 전담기구를 합포에 개설하니 이것이 바로 征東行中書省이다.충렬왕 7년(1281) 5월 마침내 여몽 연합군은 합포를 떠나 2차 동정의 길에 올랐다. 이 때의 군용을 보면 흔도·홍다구·김방경이 이끄는 여몽연합군인 동로군 4만명과 舊南宋 장수 범문호가 이끄는 강남군 10만명으로 실로 방대한 규모의 병력이었다. 이 가운데 고려군의 수는 1만 여명이었는데, 그 중에서 경상도 출신의 군사는 2천 4백여명이었다고 한다.5월 3일 합포를 떠난 동로군은 1차 원정 때와 같이 대마도, 잇키 섬를 친 다음 규슈 해안에 도착하여 공격을 개시하였으며, 6월18일에는 뒤늦게 강남군이 합세하여 더욱 적극적으로 공격에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또 뜻하지 않은 천재의 변이 일어나, 7월 1일에 북규슈 일대를 갑자기 휘몰아친 태풍으로 인하여 동정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다시 합포로 되돌아오고 말았다.
近代 帝國主義의 發生原因獨逸帝國主義를 中心으로近代 帝國主義의 成立 背景十九世紀末 歐羅巴에서는 科學技術의 進步와 第二次産業革命이 隨伴되면서 資本主義가 急激히 發達하게 된다. 資本主義의 發達로 인하여 先進資本主義列强들은 原料의 獲得과 商品의 販賣, 資本을 投資할 새로운 市場이 必要하였다. 이로써 資本主義國家들이 自國의 利得을 爲하여 資本主義가 未發達된 弱小國을 目標로 武力을 同伴하여 自國의 植民地로 轉落시켰다. 이를 帝國主義라 稱하는데 帝國主義는 經濟的要因 外에도 自國의 勢力을 膨脹시키려는 近代民族主義와 自國內의 政治와 社會不安要素를 對外膨脹으로 덮으려는 숨은 意圖가 있다. 十九世紀初에는 歐羅巴의 帝國主義 活動이 衰頹를 하였는데 그 理由로는 植民地의 發見과 開拓에 든 費用이 獲得 費用보다 多大하다는 것, 自由貿易과 自由放任主義를 選好하는 雰圍氣의 蔓延, 歐羅巴强大國들의 自國內政의 沒頭를 들 수 있다. 하지만 一千八百七十年代에 들어와 帝國主義는 爆發的으로 回生하는데 그 原因은 다음과 같다.一 經濟的 要因歐羅巴와 美國의 高關稅政策: Europe과 美國은 自國貿易保護를 爲하여 輸出國의 商品에 過度한 關稅를 賦課하였는데 이는 高度로 産業化가 進行된 國家에서는 새로운 商品 販賣處를 찾아야 하는 動機가 되었다.二 人口의 爆發的 增加: 歐羅巴의 人口는 爆發的으로 急增하였고 植民地는 剩餘人口를 吸收하기 위한 手段으로 나타났다.三 民族主義: 獨逸과 伊太利는 統一國家를 達成하면서 새로 獲得한 國力을 誇示하려는 衝動이 있었다.獨逸帝國主義의 始作독일통일에서 빌헬름 시대에 이르기까지 독일 제국은 유럽 열강의 대열에 새로운 경쟁자로 등장하였다. 이 시기 독일의 경제는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였으며 독일 사회는 빛과 그늘이 교차되는 극심한 사회 변동에 놓이게 되었다. 여기서는 독일 제국주의 시대를 이끌었던 비스마르크와 빌헬름 2세의 대내, 대외 정책을 중심으로 근대 독일 제국주의의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고자 한다.Bismarck시대 (1871~1890)1)對內政策북독일 연방 창설 이래 비스마령으로 국가에 대한 교회의 자주권을 지키고 각 영방이 독립성을 지키는 연방주의를 내세웠다. 그들은 신교인 프로테스탄트파 중심의 프로이센의 통일에 적의를 품고 있었다. 또한 중앙당은 전통을 계승하고 여러 사회 입법을 요구하였는데 이러한 중앙당의 압력에 대해 비스마르크는 한층 더 교회를 국가 감독하에 두고자 하였다. 이런 가운데 로마 교황 피우스 9세(Pieus Ⅸ)는 ‘진보, 자유주의, 근대 문명’과의 타협을 무조건 거부한다고 밝혔는데, 이는 일종의 문화 투쟁(Kulturkampf) 선언을 의미하였다. 1871년 제국 의회는 카톨릭 성직자에 대해 감독을 강화하고 질서를 해치는 성직자의 언동을 금지시켰다. 1872년 프로이센의 교육부 장관인 반카톨릭적 국민 자유당 소속 팔크(Adalbert Falk)는 모든 학교 교육을 국가 감독 하에 두는 것을 골자로 하는 ‘5월 입법’을 발표하였다. 중앙당과 투쟁하는 가운데 프로이센은 정교 분리의 원칙을 넘어 국가에 의한 교회 통제를 강화하고 프로이센 영내의 모든 수도원을 해산토록 하였다. 그러자 이에 신교측에서 반발하고, 국가와 교회의 투쟁은 제국 전체로 확산되었다. 교회에 대한 이러한 탄압 속에 중앙당의 세력은 비약적으로 팽창하였다.통일 직후 제국의 경제는 프랑스의 배상금과 관세 동맹에 의한 국내 시장의 통합으로 호황을 이루었고 국민 자유당을 토대로 이루어진 제반 자유주의 개혁에 수반하여 경제의 비약적인 발전을 거두었다. 그러나 1873~1874년에 시작되어 1870년대 말까지 계속된 경제 불황으로 비스마르크는 국민 자유당에 등을 돌리고 보수당과 중앙당의 지지를 바탕으로 한 ‘제2의 제국 창건’을 기도하였다. 이러한 정책 변화는 국민 자유당과의 균열을 가져오는 대신 보수당, 중앙당과의 결속을 촉진시켰다. 또 당시 노동자들은 경제 불황으로 곤경에 빠져 무방비, 무권리의 상태에 있었는데, 마르크스의 계급 투쟁 이론으로 무장한 사회 민주 노동당이 결성되어 1875년에는 라살파를 흡수하여 사회주의 노동당으로 발전하고 제국 의회에도다. 비스마르크에 의한 종교적 탄압인 문화 투쟁과 조국 없는 사회주의자에 대한 억압 정책이 곧 그 것이었던 것이다.경제적으로는 독일이 통일하는 시기에 독일의 산업화도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비스마르크가 제국 창건 초기에 결탁한 사회 세력은 자유주의 시장 경제 원칙을 추구하는 자유주의자들이었다. 독일의 경제는 19세기 중반에 시작된 산업화의 단계를 계승한 제1차 산업 혁명 단계를 뒤이어 19세기 말에는 제2차 산업 혁명에 들어서는 역동성까지 보여준다. 이러한 공업화의 진전은 먼저 인구 팽창과 도시화에서 나타났으며 독일의 산업 발전은 1913년까지 불과 몇 십 년 사이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하게 된 것으로 대외 무역량은 미국 다음을 차지하였다. 특히 화학 분야, 기관차, 약품 공업의 발달이 두드러졌다. 이렇듯 독일이 산업 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은, 기업 투자를 주저하지 않고 새로운 제조법이나 생산 방법에 적극적으로 대응하였으며 대학이나 연구 기관에서의 연구 성과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었다.2)對外政策비스마르크는 독일에 대한 프랑스의 복수심을 경계하고 슬라브 민족주의에 강경하게 대처하는 방법을 통해 유럽을 현상 유지시켜 신생 독일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보불전쟁을 통해 독일이 프랑스로부터 알자스-로렌 지방을 빼앗은 이후, 프랑스는 이 지역을 수복하고자 기회만 노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는 프랑스를 외교적으로 고립시키고 독일에 집중적으로 가해지는 압력에 대처하기 위해서 현상 유지를 목표로 하는 외교적 노력을 강력하게 전개하였다. 먼저 러시아와의 유대를 지속하고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조정하여 1873년 3제동맹(Dreikaiserabkommen)을 체결하였다. 이것은 유럽의 평화 상태를 정착시키고 그것을 교란하는 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하고 사회적 급진 세력의 위협으로부터 군주제 원리를 수호하기 위해 맺어진 결속이었다. 그러나 1875년 프랑스가 군의 재편성을 착수한 것을 계기로 독일과 프랑스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영국과 러시아가 독일을리아-헝가리 제국의 비밀 방위 동맹이 체결되었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독일의 안정을 위해서 독일, 오스트리아, 러시아의 동맹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다르다넬스 해협에서의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을 이용하여 러시아에 접근하였다. 그 결과 1880년 3제조약(Dreikaiservertrag)이 체결되었으나 오래가지는 못하였다.이어서 베를린 회의에서 튀니지의 지배를 승인받았던 프랑스가 튀니지를 보호국화하고 모로코에 발판을 구축하자 여기에 많은 주민을 이주시키고 있었던 이탈리아는 자국의 권익을 위해 오스트리아에 접근하였고 마침내 1882년 5월 오스트리아, 독일, 이탈리아의 3국동맹(Dreibund)을 성립시켰다. 또한 비스마르크는 중유럽의 국가들을 안정 보장 체제 하에 결합시키고 프랑스를 고립시켜 독일에 대한 위협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이처럼 비스마르크는 현상 유지를 통한 독일의 안정을 위해 외교 노력을 분주히 기울였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가 구상하였던 동맹 정책의 기본은 19세기 말부터 이미 그 의미가 퇴색하였다.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각기 불가리아-세르비아 간의 전쟁에 개입하여 3제동맹은 실효를 잃게 되었다. 또한 1887년 독일과 러시아의 재보장 조약은 러시아의 곡물에 대한 독일의 고관세 정책으로 인해 악화되었고, 다시 러시아가 국내의 독일계 농업 경영자를 탄압하여 효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급기야 1887년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러시아에 대한 예방 전쟁을 약속함으로써 독일은 동서로 러시아와 프랑스를 비롯하여 영국의 이중적 국경 전쟁의 위협에 노출되었다.한편 비스마르크는 국제 관계의 안정과 현상 유지를 도모하는 것에 집중하여 식민지 획득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1888년대 들어 아프가니스탄을 둘러싼 영국과 러시아의 대립과 수단을 중심으로 한 영국과 프랑스의 대립이 고조되고 독일식민지협회가 조직되어 해외 진출의 열기를 선동하였다. 이 결과 민간인과 민간회사를 바탕으로 앙골라-베케나만 연안 지역, 토고, 카메룬, 남양군도, 비스마르크 제도를 제국의 보호 하에 두립에서 오는 부담을 덜고자 하였으며 사회 평화를 위해 노동자 보호 입법의 실현에도 의욕을 보였다. 한편 비스마르크는 자신의 노선을 견지하여 사회주의 탄압법을 갱신하고 사회 불안의 근원으로 생각한 사회 민주주의자와의 투쟁을 더욱 더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점차 지지세력을 잃었고 외교적 모험이 실패로 돌아갔으며 산업화의 진전에 따른 격동적인 변화와 대중의 힘을 적절하게 파악하지 못하는 등의 이유로 황제와 약 2년간 긴장 상태를 지속한 끝에 마침내 1890년 프로이센 수상으로 임명된지 근 30년 만에 그의 정치 생명은 끝이 났다. 실망한 비스마르크는 동프로이센의 영지에 은거하여 회고록을 기술하면서 소일하였고, 가끔 신문 칼럼에서 정부 시책을 공격하였다.2) Caprivi 내각의 정책활동빌헬름 2세는 장군 카프리비(Graf Leo von Caprivi)에게 수상직을 맡기고 비스마르크에 의해 실현되지 못했던 사회 정책 계획에 착수하였다. 그는 쉽게 중앙당 및 자유주의 좌파와 화해하고 그들의 협력을 얻어 공장 노동자의 지위 개선을 시급히 실현코자 노력하여 행정 당국과 좌파 사이에는 어느 정도 화해가 실현되어 권위적 정치 관행에서 벗어나는 듯 보였다. 프로이센은 이와 같은 사회 정책을 궤도에 올려놓기 위해 세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이를 뒷받침할 재정 정책에는 누진 소득세와 재산세에 대한 규정과 동시에 3급 선거제를 포함한 지방 행정 개혁도 포함되었다. 카프리비는 1891년부터 1894년 사이에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러시아, 벨기에, 스위스 등 유럽 각국과 통상 조약을 맺고 독일 상품의 수출을 위한 외국 시장의 개방을 약속받았다. 또한 일부 농산물에 대한 수입 관세 인하를 단행하였다. 이로써 독일 공업은 생산이 안정되었고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또한 독일 관세 보호 정책이 부분적으로 폐기되었으며, 그 결과 국내의 곡가는 낮아지고 노동자 대중의 생활수준은 크게 향상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사민당의 적극적인 지지를 얻었다.한편, 사회 정책의 주도권을 다.
序論Annales School의 發生背景과 觀點Annales이란 1929년 뤼시앵 페브르와 마르크 블로흐에 의해서 창간된 역사학잡지 (Annales d'histoire economique et sociale)에서 나온 말이다.프랑스의 아날학파는 처음부터 Leopold Von Ranke의 실증주의 사학의 타파를 표방하고 나섰다. 정치, 개인, 연대'라는 3가지 우상의 타파를 내걸고 政治 대신 全體, 個人 대신 集團, 年代記的記述 대신 構造的說明을 추구하였다. 문헌해독을 통해 주로 사건과 개인 중심의 편협한 정치사나 ‘事件史 (histoire evenementielle)'의 연구로 일관하는 기존의 史學界에 대하여 그들은 ’하나의 새로운 역사‘라는 기치를 높이 들고 도전하였다. Annales School이 내세우고 있는 ‘하나의 새로운 역사’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인간을 사회적 존재로 보고, 이를 시간계열 속에서 전체적으로 파악하려는 학문’이 곧 역사학이라는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역사학의 연구대상은 고립된 개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인간' 즉 조직된 집단이나 사회내의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Annales School이 관심을 쏟는 것은 바로 인간이 조직한 집단이나 사회이다. 인간이 조직한 집단이나 사회를 바로 ’시간계열 속에서‘ 파악하려는 데에 현재적인 것을 취급하는 사회과학과는 다른 역사학의 특징이 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사회적 인간을 시간 계열 속에서 파악하기는 하되 동시에 ’전체적으로‘ 파악하려고 한다. 즉, 종합적인 ’全體史‘ 의 지향이다.本論1. Annales School의 思想家Lucien Fevre페브르는 “참된 의미에서는 經濟史니 社會史니 하는 것은 없다. 완전히 통일된 역사가 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훌륭한 역사가는 인간의 냄새가 나는 곳이면 어디든지 손을 뻗쳐 ‘인간에 속하고, 인간에 의존하고, 인간에 소용이 닿고, 인간을 표현하고 그의 존재를 나타내며 행위, 취향, 그리고 존재양식을 표현하고 있는 모든 것’을 이용하여 역사를 연구해야 된다고 주장하였다.바로 여기에 인간에 관련된 모든 학문영역의 구분이나 그 상호간의 장벽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과 사회과학은 물론 考古學, 民俗學, 人類學, 言語學, 心理學 등의 도움을 받고 또한 적극적으로 그러한 분야 속에서 역사연구에 필요한 자료를 발굴하고 이용해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있는 것이다.또 현재적 관점에서, 페브르는 1930년대 고조된 우익적 사고를 대변하면서 물질보다는 심성의 우위를 강조하고 또 마르크시즘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해독제로서 16세기의 조화로운 세계를 제시했다는 분석, 또는 비종교적, 반교회적 좌익이 라블레를 자기편에 끌어들이려는 데에 반대하여 페브르는 라블레가 기본적으로 종교적임을 밝히려 했다는 분석 등도, 건조한 면은 있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이렇듯 페브르의 구조가 간과하고 있는 점을 지적하는 것은 바람직하고 또 정당하다고 볼 수 있다.Marc Bloc페브르가 역사가로 태어난 반면, 블로흐의 경우 출생 환경 및 부친의 지적 영향은 더 객관적인 사실로 받아들여질 수가 있다. 블로흐는 1886년 리용에서 태어났다. 한 역사가의 운명을 그의 인종적 측면만 가지고 추적하는 것은 무리지만, 19세기말부터 20세기 중반에 걸쳐 전개되었던 반유태주의 운동이 이 유태계 역사가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으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블로흐도 스스로를 드레퓌스 사건의 세대라고 말하고 있으며 또 53세의 노병(농담 삼아 프랑스군의 최고령 대위라고 말했다고 한다)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지원한 것도 이와 전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블로흐는 역사란 변화의 과학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즉 그는 먼저 과거와 현재라는 시간의 문제에 몰두하였으며, 과학의 기능, 즉 豫見이라는 문제로서 그의 을 끝맺을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역사란 과거를 연구하는 죽은 학문이 아니라 현재를 이해하고 미래를 예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유용한 실증주의적인 학문임을 천명하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블로흐가 전편을 통해 증명하려했던 문제는 역사도 과학이라는 점이었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블로흐가 취한 방법은 철학적이거나 논증적이 아니었다. 그는 실제 역사가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를 소박하게, 즉 실제 역사가의 작업장을 보여 줌으로써 그가 사랑하는 새로운 역사를 변호하려 하였다.역사는 우선 과학적이 되어야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블로흐가 역사가 科學인가 아니면 藝術인가 하는 二分法的 문제를 가지고 고민한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 역사는 과학이면서 동시에 예술이었다. 왜냐하면 역사가는 기하학적 정신을 가지고 과거를 조립하는 것을 본업으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역사학의 대상은 바로 인간이었다. 따라서 유기체 내부의 복잡한 관계를 전체성속에서 파악하기 위해서는 섬세한 정신이 또한 필요하였던 것이다.그 밖에도 블로흐는 설명과 이해, 이해와 비판, 시간의 연속성과 단절성 등 역사 인식론상의 문제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나, 스스로도 이러한 문제는 철학자들이 체계적으로 규명할 과제라고 있듯이, 논리적이지 못하다는 인상을 받는다.페브르에 비해 블로흐는 전통적 歷史學과 뒤르켐의 사회학주의에 대해 덜 적대적이었다. 또 변명과 전투에서 상징적으로 드러나는 성격의 차이, 취향의 차이 또한 지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모두 새로운 역사를 풍부하게 하는 데 긍정적으로 기여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Braudel Fernad1956년 페브르가 죽은 이후 Annales School을 이끌어 간 사람은 브로델이다. 물론 이 시점에 와서야 브로델이 Annales의 역사 속으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페브르와 브로델의 만남은 1933년 브라질에서 귀환하던 대서양의 선상에서 이루어졌다. 20대를 알제리에서 지중해를 바라보며 역사가의 웅지를 가꾸어 오던 브로델과 페브르의 이 극적인 상봉은 아날의 역사학이 지중해를 넘어 팽창해 나가는 데 중요한 시점으로 기록될 것이다. 페브르의 의견을 좇아 브로델은 학위 논문의 중심인물을 필립2세가 아니라 지중해로 무한히 확대시키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벌써 블로흐를 대신한다는 느낌을 줄 정도로 Annales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전쟁 후 브로델은 Annales의 편집에 참여하였다.제2세대의 Annales School은 전체사에 통일성을 부여하고 , 또한 전체사를 가능케 하는 기본개념을 제시하였다. 바로 그것이 ‘장기지속’과 ‘구조’ 두 개념이다. 장기지속에 관한 논문과 의 주장에서 브로델이 말하는 장기 지속의 역사와 그 주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첫째, 장기 지속의 역사는 세기를 단위로 하여 수세기의 지속을 문제로 삼는 새로운 역사시간의 설정을 전제하는 바, 종래의 단기간에 걸친 역사와의 결별을 뜻한다.둘째 이것은 역사의 표면에는 역사의 내부로, 역사의 보다 깊은 곳, 즉 ‘심층에서 작용하는 힘’을 탐색한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심층에서 별로 변하지 않는 경우에 따라서는 거의 무 변화에 가까울 정도로 움직임이 없는 지속적인 것에 주목한다.셋째, 바로 여기에서 크게 부각되는 것이 ‘구조’ 이다. 매우 긴 장기적인 역사적 시간을 통하여 전달된 모든 현실이 포함되므로 지속 기간에 차이가 있을지 몰라도 역사를 떠받쳐주는 일종의 넓은 의미의 하부 구조가 있다. 이를테면 지리적 환경, 기후적조건, 사회경제 구조, 일종의 생물학적 여건, 일종의 생산력의 한계, 또는 각종의 정신적 제약 같은 역사의 하부구조인 동시에, 경우에 따라서는 역사에 대해 한계 내지 제약을 가하기도 하는 것들이다. 이러한 구조를 바탕으로 아날학파는 전체역사를 구성하려고 한다.넷째, 장기 지속의 개념은 아날학파로 하여금 의. 식. 주와 같은 일상적인 물질문화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하고, 개인보다 집단에, 역사적 인물보다 무명의 대중에, 어떤 개인의 사상보다 집단의식이나 집단적 기억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