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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교회사] 프랑스의 종교개혁 평가A+최고예요
    프랑스의 종교개혁1. 종교개혁의 역사적 원인 및 의의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비뇽 교황의 대립으로 생긴 분열 결과, 14세기경부터 그 안팎에서 쇠퇴의 기미를 보이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공의회(公議會)운동이 활발히 추진되어 피사·콘스탄츠·바젤 등지에서 공의회가 열렸으나 문제의 해결을 보지 못한 채 무위로 끝났다. 한편, 프랑스·영국 등 유럽 각국은 근대 국민국가로의 길을 걷기 시작하여 중세적 그리스도교 세력은 점차 쇠퇴해 갔다. 이러한 측면에서 볼 때 종교개혁은, 본질적으로는 교회의 혁신운동이지만 근대국가의 성립이라는 정치적 변혁과 밀접한 함수관계에 있었다. 본격적인 종교개혁은 M.루터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나 루터 이전에도 개혁의 선구자로 불리던 사람들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민중 사이에서 성서적 신앙을 인도한 프랑스의 발도, 롤러드파(派)를 이끌던 영국의 위클리프, 위클리프의 사상을 이어받아 독립운동을 일으킨 보헤미아의 후스, 윤리적 쇄신을 시도하였다가 끝내 순교한 피렌체의 사보나롤라를 들 수 있다. 그러나 르네상스적 인문주의와 종교개혁과는 본질적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즉 르네상스적 인문주의는 예술적이고 귀족적이어서 참으로 역사를 변혁할 힘을 갖지 못하였다. 이와는 달리 종교개혁운동은 깊이 민중의 마음을 포착하여 역사를 움직였다.종교개혁은 루터의 ‘하느님의 뜻의 발견’에서 비롯되는 그리스도교의 혁신운동이었으나, 정치·경제·사회 각 분야에서도 세계적으로 크게 영향을 미쳤다. 이로써 근대 세계와 근대인이 탄생하였다. 종교개혁 후에는 계몽주의(啓蒙主義)가 일어나, 언뜻 비종교적 합리주의가 근대사회의 특징이 된 것 같이 보였지만, 근대인을 ‘마술’에서 진정으로 해방시킨 것은 단순히 자연과학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합리적·과학적 태도를 표출한 종교개혁의 정신이었다루터에 의해 시작된 종교 개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되었고, 쯔빙글리와 칼빈에 의해 발전된 개혁주의 신학운동은 칼빈과 화렐의 고국인 프랑스에도 전개되었다. 프랑스의 개혁 운동은 인문주의{) 서양의 Faber Stapulensis)라는 라틴어 이름을 가진 르페브르(Jacque Lefever dEtaples,1450~1537)에 의하여 시작되었다. 그는 중세의 신비주의를 수용하여 제도적인 로마 천주교회에 도전하였다. 르페브르는 1522년 복음서 주석을 출판하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복음, 자유, 희락,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풍성한 삶에 대하여 열정적으로 찬양하였고,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을 극찬하였다.성경에 대한 무지가 미신을 초래한다고 확신한 르페브르는 1523년에 프랑스어로 신약성경을 번역하였고, 성경이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과 삶의 표준이 되어야 한다고 프랑스인들의 가슴속에 심어주었다.인문주의적인 개혁운동은 급진적인 개혁운동으로 발전하였다. 개혁사상의 보급과 함께 많은 무리가 로마 카톨릭의 미신적인 예배와 폭정을 급진적으로 개혁할 것을 촉구하였다.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세지자 프랑스 왕실은 1525년부터 개혁자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브리소네는 소르본느에서 종교재판에 회부되었고, 르페브르와 루셀은 스트라부르로 피신하였다.1530년에 접어들면서 기독교인들의 숫자가 늘어나고 개혁에 대한 과격한 주장이 나타났다. 개혁을 촉구하는 시위는 1534년 10월 18일에 절정을 이루었다.{) 위의 책, p226.그들은 가정집과 공공건물에 개혁을 요구하는 벽보를 붙이면서 시위를 하였고 심지어는 왕의 침실에 까지 들어와 개혁을 요구하는 전단을 놓고 가는 무례를 범하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인하여 수백명의 개혁자들이 투옥되고 화형을 처해지기도 했다.박해로 인해 피난민이 늘어나자 프랑스 당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세지자, 내,외적인 압력에 직면한 프랑스와는 1535년 7월 15일 꾸시 칙령을 선포하여 개혁자들에게 종교적인 관용을 허락하였다. 왕은 누구라도 개혁 사상을 철회하고 귀국하는 자는 용서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아무도 로마 천주교회로 돌아가지 않았고 개혁자 진영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더구나 르페브르가 죽고 칼빈의 기독교 강요가 출판된 1 프랑수와는 결국 종교적 관용을 철회하고 박해를 택하였다. 그는 1540년 개혁자들을 재판하고 처형할 수 있는 법적인 장치를 마련하고, 1545년에는 추기경 프랑수와드 뚜르농의 주장대로 왈도파 교인 3,000명을 처형하였다.3. 칼빈적 개혁운동과 위그노(Huguenots)칼빈은 제네바에 망명해 있으면서도 그의 동족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않았다. 프랑스왕 프랑스와에게 기독교 강요를 헌정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를 그치고 종교적 관용을 베풀 것을 호소하였고, 프랑스가 성경이 왕 노릇하는 국가로 개혁할 것을 위해 기도했고, 이 일을 위해 많은 개혁자를 파송하기도 하였다.1547년 프랑스와 1세가 죽고 그의 아들 앙리2세가 왕위를 계승하면서 개혁자들에 대한 박해는 심해졌다. 프랑스 전역에 잇는 성직자들, 종교 재판소, 최고법정까지 동원하여 종교개혁자들을 색출하고 처형하였다. 앙리는 1551년 싸토브리앙 칙령을 선포하여 성경과 관련된 책이나 제네바에서 출판된 책들을 금서로 정하였고, 개혁자들을 화형 당할 때 소리 지르지 못하도록 혀를 자르기도 했다.1550년경부터 제네바에 망명중이던 칼빈의 제자들이 귀국하여 브르조와 계층을 중심으로 복음운동을 시작하면서 개혁 운동은 점차로 확산되었다. 칼빈의 가르침을 따르는 프랑스의 개혁자들을 위그노{) 위그노라는 이름의 기원에 대하여 스피츠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마도 이는 스위스에서 연맹을 뜻하던 아이트게노센 (Eidgenossen)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보이(Savoy)가에 저항하던 사람들을 후원하던 이들을 아이그노라고 하였는데 이들은 아이트게노센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러한 명칭은 1562년경에 이미 나타나고 있다오 덕교, 앞의 책. p228.라고 부르는데 이들 세력은 지식층을 중심으로 퍼져 나갔다. 이들은 개혁 운동이 프랑스를 살릴 수 있는 대안이라고 주장하면서 적극적으로 동참하였다.위그노들은 목사의 지도없이 개인의 집에서 성경 공부와 예배를 위하여 모이기도 했다. 파리에 사는 라 파리에는 1555년성하였다. 칼빈의 제자인 앙뜨안느샹듀에 의해서 시작되었는데, 개혁교회가 성장할려면 대회의 조직이 필요하다고 역설하였다. 샹듀의 노력으로 파리에서 50여개의 교회대표들이 참석하여 대회를 개최하였다.파리대회는 샹듀의 신앙고백과 권징 규칙서를 프랑스 교회의 신조와 헌법으로 채택하였다. 는 칼빈의 35개조 신조, 는 기독교 강요와 칼빈이 목회하던 제네바와 스트라스부르 교회의 모형을 따라 작성되었다.그들은 장로교 정치원리인 대의정치체제를 채택하였고 장로와 집사를 교인들의 선거로 선출하게 되었다.1960년 프란시스2세가 급서(急逝)했고, 열 살난 아들이 왕위를 계승하자 국왕이 미성년자인 까닭에 그의 어머니 캐서린은 섭정직을 차지했다. 그녀는 종교적 신념이라기보다는 정치적인 책략으로 위그노들을 지원했다. 그리하여 위그노들은 자기들의 지역에서 자유롭게 예배를 드릴수가 있었다.캐더린의 섭정에 대한것에 반감을 가지고 있던 기즈가의 두 형제는 1562년 무장 귀족들과 병사들을 거느리고 예배드리기 위해 모인 위그노들을 닥치는대로 학살했다.그 다음달에 프랑스 전체를 전화(戰禍)로 휩쓴 기나긴 종교전쟁 중 최초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1563년 잠깐의 휴전협정에 평화가 왔었지만 1567년 11월부터 1568년 3월까지 2차 전쟁이 계속되었고, 잠시 동안의 휴전이 있은 후 3차 전쟁으로 이어져 치열한 전투가 있었다.4. 대학살 및 낭트칙령내란의 와중에도 위그노들은 크게 성장하였다. 그들은 성경이 왕노릇하는 교회를 만들기 위해 교회 정치를 개혁하려고 하였다. 1564~1572년 사이 장로 정치와 회중 정치에 관한 토론을 벌였고, 그 결과 칼빈의 교회 정치 사상을 받아들임으로 장로 정치를 채택하여 분열의 위기를 넘겼다. 점차 교회가 안정되면서, 개혁교회의 교인수가 급속히 증가하여 당시 프랑스 인구 2000만 가운데 3백만이 위그노가 되었다.위그노의 세력이 커지자, 캐더린은 이그노 지도자 콜리니를 암살하고자 하였다. 살인 계획이 폭로되자, 위그노들은 정부에 진상 조사를 요구하여 캐서린은 위기에 생 제르멩 교회 종소리를 신호로 하여 모든 위그노들을 살해하도록 명하므로 위그노에 대한 대대적인 살육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결혼 축하 예배에 참석하였던 사람들을 전멸하였다. 이로서 성경 중심적인 개혁 운동을 벌이던 위그노의 개혁 운동은 기가 꺾였으나 원수들은 축배를 높이 들게 되었다.캐더린은 위그노를 박멸하므로 영원한 바로아 왕조를 세우려고 계획했지만 인간의 계획과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캐더린은 그의 아들 앙리3세를 폴란드에서 급히 귀국시켜 왕위에 세웠다. 그는 우둔하고 유흥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불량아로 기즈 가문의 사람들의 혹독한 비판을 받게 되자 기즈가의 사람들을 처형함으로 권력을 공고히 쌓으려고 하였다. 이러한 앙리의 정책은 실패로 돌아가고 광신적인 도미닉 수도사가 그를 살해함으로 결국 발로아 왕족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발로아 왕조가 몰락하자 캐더린의 사위인 나바르의 앙리가 왕위에 오르면서 브르봉 왕조가 시작되었다. 앙리는 왕좌에 오르면서 앙리 4세{) 앙리(4세) (1553.12.13~1610.5.14) 프랑스의 왕(재위 1589∼1610). 나바라의 왕(엔리케 3세, 재위 1572~89). 부 르봉왕조의 시조. 프로테스탄트로서 위그노전쟁에서 활약, 1572년 신구 양교도의 화의를 다지기 위하여 프랑스 왕 샤를 9세의 여동생 마르그리트 드 발루아와 결혼하였다. 그 직후인 8월 24일 성 바르톨로메오 축일의 신교도 학살사건이 발 생하자 궁정에 연금되어 구교로의 개종을 강요받았으나, 4년 뒤인 76년 2월에 탈주하여 고향인 베아른으로 돌아온 뒤 다시 신교도의 수령으로 활약하였다. 성격이 호쾌 활달하며 무술·전술에도 뛰어나 85년 이후 신교도군을 이끌고 북상, 89년 앙리 3세가 죽은 뒤 즉위하여 부르봉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구교도는 그의 왕위를 인정하지 않아 에스파냐의 침 입을 받기도 하였다. 93년 다시 개종하여 가톨릭 세력과 화해하였으며, 98년 낭트칙령(勅令)을 발하여 신교도의 권리도 보장함으로써 30년간 계속된 프랑스의 종교내란을 종식시켰다. 또한다.
    인문/어학| 2003.10.20| 5페이지| 1,000원| 조회(8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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